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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 남편과 은혜 남편 로마서 7:1-6 / 하원식 목사
오늘 본문을 보면 율법은 옛 남편이요, 은혜는 새 남편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제 옛 남편인 율법이 죽었으므로 거기에서 벗어나 새 남편인 복음과 결혼한 관계라고 했다. 다음 이야기 중에 옛 남편은 율법으로, 새 남편은 복음으로 생각하고 들어 보시오.
1. 율법 남편 은혜 남편 오늘 본문에 보면 “크리스천”이라는 한 여인이 나온다. 이 여인이 한 남자를 만나 결혼하여 살게 되는데 이 남편의 이름이 율법 씨이다. 처음엔 반듯해 보이고 완벽해 보이는 신사 율법 씨가 좋아도 보였다. 그러나 단 하루를 지내고 나니 그는 함께 살만한 사람이 못되었다. 그는 일종의 완벽주의자로 조그마한 실수나 허물도 용납할 줄을 몰랐다. 아무리 잘 해 보려고 노력해도 그의 요구엔 한계도 끝도 없었다.
이틀을 지나고 나니 그는 폭군으로 변했다. 자기가 정한 규칙에서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부인을 때리고 비난한다. 마침내 아내 “크리스챤”은 만사에 자신감을 잃었고 삶의 의욕마저 상실했다. 잘 해 보려고 노력을 하면 할수록 더 큰 실수를 낳고 만다. 깊은 열등감에 사로 잡혔고 우울증에 시달려야 했으며 죽고 싶어도 죽을 수조차 없었다. 남편의 가혹한 채찍에 맞아 피를 흘리다 부르짖은 이 아내 크리스천의 절규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 누가 나를 이 끔찍한 율법의 남편,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
이 여인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해준 사도 바울은 일찍이 못된 남편과 같은 율법씨 밑에서 고생하며 살아본 사람이다. 지키고 순종해 보려 해도 끝이 없다. 자유도 기쁨도 감사도 행복도 없었다. 자기와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잡아죽이는 일에 앞장섰던 만남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지독한 남편이 죽었다. 처음에는 충격이 컸지만 한달 두 달 지나는 사이 묘한 해방감마저 들었다. 얼마 후 이 여인은 “전도자”를 통해 한 남자를 만나 재혼을 하게 된다. 이 새 남편의 이름이 은혜씨이다. 알고 보니 이 은혜가 바로 “크리스천” 여인의 첫사랑 “J”라는 그 청년이었다. 어릴 때 J 라 불렸는데 지금은 은혜씨가 된 것이다.
예수 - 은혜 씨는 크리스천이 에덴동산에서 만난 첫사랑이었다. 그런데 그만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첫사랑을 버리고 선악과를 따먹고 말았다. 율법 씨와 연애를 시작했던 것이다. 새 남편 은혜 씨는 크리스천 여인을 사랑하며 이 여인의 모든 죄 값을 치루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었다 살아난 사람이었다. 그러니 이 여인의 허물이 허물로 보일 리 없었고 약점이 약점으로 보일 리 없었다.
그는 이해심과 동정심, 사랑과 긍휼과 이해로 늘 흘러 넘쳤다. 크리스천 여인은 예수를 만난 후 삶의 활기와 자신감을 찾았고 잃었던 인생의 기쁨과 보람과 행복을 되찾았다. 그는 점차 매력적인 여인으로, 사랑스런 아내로 바뀌어져가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본문이 오늘 우리에게 말하는 “율법과 은혜”에 관한 교훈이다. 율법의 눈과 은혜의 눈 렘브란트가 그린 ‘탕자의 귀향’이라는 그림을 보면 남루한 옷에 흉한 몰골을 한 탕자가 등을 보인 채 무릎을 꿇고 있다. 아버지는 깊은 연민으로 그 아들을 바라보며 손을 넓게 펴서 아들의 등을 어루만진다. 바로 옆에는 아버지와 똑같은 붉은 색 외투를 입고 수염을 기른 사람이 서 있다. 바로 큰아들이다. 그런데 이 큰아들은 아버지와 달리 두 손을 마주 잡은 채 허리춤에 올려놓고 있다. 시선은 냉정하고 차갑다.
작가 수잔 헤르츠는 바로 이 큰아들에게 ‘제2의 탕자’라는 별명을 붙였다. 신학자 사이먼 키스트메이커는 큰아들을 ‘자기 의에 가득 찬 사람’이라고 불렀다. 큰아들은 ‘율법의 눈’으로 동생을 보았다. 아버지의 재산을 창기와 더불어 탕진하고 빈 손들고 돌아온 동생을 용납할 수 없었다. 율법적으로 심판하고 정죄하고 판단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큰아들과 같은 율법의 눈으로 아들을 보지 않았다. 아버지는 사랑과 자비의 눈으로 아들을 본 것이다. 이것이 율법의 눈과 은혜의 눈이 다른 것이다.
누가 복음 15 장의 탕자의 비유 눅15:30에 보면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까? 아버지 이럴 수가 있습니까? 나는 이 아들과 함께 잔치 상에 들어가지 않겠다.” 그러나 아버지의 눈은 달랐다. 아버지는 용서와 사랑의 눈으로 자식을 보았다.
그는 눅15:32에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비록 탕자가 되어 아버지의 자산을 창기와 함께 다 먹어치워 버렸으나 회개하고 돌아왔으니 아버지가 너무나 기뻐서 그 아들을 영접하고 이 아들은 잃은 아들인데 도로 찾아왔고 죽은 아들인데 살아났으니 얼마나 기쁘고 즐거우냐.
맏아들과 태도가 전혀 다르다. 율법적인 눈으로 보면 이 탕자가 돌아온 사람을 용납할 수 없다. 그러나 은혜의 눈으로 보면 용서와 사랑으로 품에 품어주고 기뻐 즐거워했던 것이다. 우리 하나님은 바로 맏아들과 같은 하나님이 아니시라 아버지와 같은 하나님이 되신 것을 알아야 되는 것이다. 시103:12~13절에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야훼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2. 율법에 대하여 나는 죽었다. 결혼을 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결혼을 하게 되면 함께 일어나고 함께 살고 함께 잠을 잔다. 함께 밥을 먹고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며 함께 자식을 낳고 산다. 함께 재산을 공유하며, 서로가 서로에게 구속되며 소위 한 몸, 하나가 된다. 우리가 율법과 결혼하여 살 때는 율법과 함께 살며 율법이 나를 구속하며 율법의 열매를 맺는다. 아무리 율법과 붙어살아도 율법은 나를 행복하게 해주지 않는다. 더욱 더욱 나를 비참하게 만들뿐이다. 율법은 마치 진단을 정확하게 잘하지만 전혀 치료 할 줄을 모르는 의사와 같다.
율법의사가 할 줄 아는 말이 꼭 한 가지 있다. 율법은 거울과 같다. 우리의 죄지은 모습, 불의한 모습, 추악한 모습, 버림받은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그에 따른 준엄한 심판을 선언할 뿐 조금도 우리를 구원해 줄 수 있는 힘이 없다. 1895년 독일의 뢴트겐(Wilhelm Konrad Rontgen, 1845~1923)이 X선을 발견한 후 인류는 병을 더 잘 알게 되었다. 육안으로 볼 수 없는 것도 X-레이로 찍으면 다 나타난다. 결핵이나 신체 장기에 관련된 부분이 X-레이 촬영으로 밝혀지므로 의사들이 약을 투여하고 수술을 하는 의료행위를 향상시켰다.
얼마 전에 머릿속에 못이 박힌 사람, 복부에 수술 가위가 있는 사람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X-레이라는 의료기술 덕분이었다. 율법은 바로 X-레이 와 같은 것이다. 율법을 통해서 보면 감추어진 죄가 다 드러나게 된다. 율법이 오기 전에는 자기 속에 있는 죄가 죄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죄를 인식할 수 없었다. 그러나 율법의 X-레이 가 비춰지므로 감추어진 죄가 다 드러나게 된 것이다. 완전히 하나님 앞에 벌거벗은 존재가 된 것이다.
율법의 X-레이로 인해 쫓기게 된 인생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밑으로 갈 도리밖에 없게 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용서하고 또 우리의 의로움과 구원을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 그리고 인간이 율법 아래에서 지은 모든 죄를 대신 끌어안고 십자가 위에서 몸 찢고 피 흘리시며 마침내 돌아가시므로 모든 죗값을 지불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지불하신 그 값이 우주보다 더 크기 때문에 우리는 값을 지불할 수 없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거져 주시는 선물로서 우리는 믿음으로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이다.
로마서 6장 23절에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안에 있는 영생이니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의 죄를 대신 갚아주신 예수님의 은혜는 우리가 선물로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강철왕 카네기는 “빚은 다 갚을 수 있지만 우리가 받은 은혜는 영원히 갚지 못한다”고 했다. 신학자 칼 바르트는 “나는 공짜로 받았지만 하나님은 엄청난 값을 지불하신 것이 십자가의 은혜”라고 말했다. 예수님이 우리를 구속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은 하나님 편에서 볼 때 어마어마한 대가를 지불하신 것이다. 독생자를 내어 주시고 그리스도는 생명을 바쳐서 우리를 위해서 죄를 갚아 주었기 때문에 그 값은 측량할 수 없다.
이처럼 하나님이 값비싼 대가를 지불하셨지만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거저 받게 되었으니 이 은혜에 감사하고 또 감격해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고, 버림을 받고 영원히 지옥 불에 탈 수 밖에 없는 우리임에도 불구하고 오직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기만 하면 모든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영생을 누리게 되는 축복을 주시는 것이다. 요한복음 3장 15절에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죄의 값은 사망으로 죄를 지은 영혼은 멸망하고 영원히 지옥에 들어가게 된다. 이 죽음의 감옥에서 도로 나오신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청산하시고 사흘만에 감옥 문을 열고 부활하셨다. 이 세상에 살다간 많은 성인들과 선각자들이 인류에게 좋은 진리를 가르쳤지만 죄는 갚지 못하였다. 하지만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내가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시므로 인류의 모든 죄를 갚으셨음을 선언하신 것이다.
사도행전 4장 12절에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온천하 만국에서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는 구원받을 이름이 없는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이 지옥에 가는 것은 자기 죄 때문에 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지 않기 때문이다. 훌륭한 행위를 못해서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지옥에 가는 것이다.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고 영원한 천국으로 들어갈 수 있다. 너무나 값비싼 선물일지라도 우리는 단지 믿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로마서 3장 23절로 24절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 세상에서 옷을 한 벌 사도 값을 지불해야 된다. 하지만 천국은 예수님의 보혈의 은혜로 값없이 가는 것이다.
에베소서 2장 8절로 9절에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이 하나님의 선물을 믿음으로 받아들인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이 하나님의 선물을 거부하고 받아들이지 아니하면 영원히 멸망 받을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선물을 받아 들이냐 받아들이지 않느냐가 우리 인생의 운명을 결정하게 되는 것이다.
율법은 죄의 문제를 들추어내지만 치료 책을 주지는 못한다. 오늘 본문 말씀에 의하면 이 폭군 남편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길은 꼭 한 가지 죽음밖에 없다. 죽음만이 율법과 갈라 설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율법은 절대로 죽지 않는다는 것이다. 죽기는커녕 일점 일획 상처도 입지 않는다. 이제 길은 한 가지 밖에 없다. 내가 죽으면 된다. 여기에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 있다. “내가 죽는 데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된다.”
로마서 6장 4절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그의 죽으심을 나의 주 죽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세례는 나의 죽음 선언식이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보시오. 내가 십자가를 통해 죽음으로서 율법과의 결혼관계는 깨끗이 끝이 났다. 믿는 자는 율법의 모든 정죄와 구속과 저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그 안에서 그의 죽음이 곧 나의 죽음이 되었다. 이상의 말씀들이 보여주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행복한 결혼생활을 위한 전제조건이 있다. 옛 남편 율법과의 깨끗한 관계청산, 깨끗한 죽음선언이다. 과거를 청산하지 못한 채 결혼을 하게 되면 결혼 후에도 옛 애인에게 매이게 된다. 신혼여행 가서도 옛날 애인 꿈을 꾸고 옛날 애인 만나러 다니고 - 이거 한심한 얘기 아닌가? 옛 애인, 옛 남편과는 비교조차 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을 두고 오늘 본문은 간음이라고 단언한다. 율법에 매여 율법적 가치관, 공로와 행위의 안경으로 자기를 보고 남을 판단하는 삶은 신앙인의 간음인 것이다.
옛날 궁중에 내시로 들어가게 되면 거세를 해버린다. 남성 기능상실이다. 주변에 아무리 예쁜 여자가 많아도 유혹이 안 된다. 남성으로서는 죽은 것이다. 죽으면 유혹도 미련도 없다. 성도가 마귀로부터, 죄로부터, 율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길은 - 죽음이다.
갈라디아서 5장 24절은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결국 내게 아직 유혹이 남아 있는 것은 아직 덜 죽어서 그렇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거린다. 왜요? 덜 죽어서 그렇다. 사랑하는 여러분! 행복한 은혜 신랑과의 결혼생활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와 풍성한 생활이 준비되어 있다. 미련 없이 죽어버리자. 아니, 이미 우리는 율법에 대하여 죽은 자들이다.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는 불의한 자를 위해 필요한 것일 뿐이다. 우리는 십자가를 거쳐 은혜와 결혼한 사람들이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자원, 행복함, 풍성함, 그 모든 것이 내 것이 되었다.
3. 행복한 결혼 생활의 열망 율법 씨와 함께 살던 결혼생활과 은혜 씨와 함께 사는 결혼생활의 차이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도덕과 신앙의 차이요, 종교와 기독교의 차이이다. 그 둘의 차이를 규명하는 것은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명제를 찾아내는 것이다. 오늘 본문 5절이 율법 씨와 살던 열망이었다면, 6절은 새로운 결혼생활의 열망을 나타내고 있다. 5절에 보면 “육신” “죄의 정욕” “사망의 열매”라는 말들이 나온다. 바로 이것이 율법 씨와 사는 인생의 비극이다.
그리고 6절을 시작하며 “이제는”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는데 원문에는 “그러나 이제는”이라고 되어 있다. 무슨 말인가? “그러나 이제” 우리는 그런 비극적 삶을 살지 아니하고 은혜와 함께 사는 행복한 인생이 되었다는 말이다. 율법 씨는 맛난 반찬을 요구하지만 반찬 살 돈은 주지 않는 남편과 같다. 율법은 우리가 지켜야 할 까다로운 법을 제시하지만 그것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은 주지 못한다. 인간은 율법으로 의로워질 수 없는 존재이다. 율법 가운데 있을 때 인간은 죄의 정욕 때문에 사망의 열매만 맺고 살았다.
그러나 은혜 신랑을 만나 첫사랑 예수와 신방을 꾸미기 시작하면서부터 새로운 열망이 생겼다. “죄의 정욕”이 아니라 “사랑의 욕구”가 일기 시작했다. 은혜의 신랑 예수를 만나고 보니 그가 나를 얼마나 사랑했는가를 알게 되었다. 그는 내가 율법 안에서 저지른 죄의 삯을 지불하기 위해 내 대신 죽음을 감당했다. 그리고도 내가 돌아오기를 오랜 시간 기다리고 또 기다려 주셨다. 에덴동산에서 큰 빚을 지고 집나간 아내의 빚을 다 갚으시고 그 아내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이토록 큰 은혜를 베풀어주신 예수 신랑에게 죽음인들 아깝겠는가? 이 몸, 이 마음 다 바쳐도 부족할 뿐이지요. 예수 신랑 만나고 나니 이게 생시인가 꿈인가? 여기가 낙원이요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만 같다. 초막이나 궁궐이나 예수 신랑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찬양이 저절로 흘러나온다. 사랑이 없는 곳에 엄격하기만 한 법은 아무런 능력도, 열매도, 결과도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사랑이 넘치는 곳에 법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 자식 낳은 어미에게 아기를 돌보라는 율법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자식을 사랑하라”는 법은 어머니들에겐 모욕 일 수밖에 없다. 어머니에게 “자식을 먹여라. 입혀라. 위험에서 보호하라. 깨끗이 씻겨라.” 이와 같은 율법이 무슨 가치가 있는가? 그런 건 유모나 고아원 보모에게나 필요한 법이지요. 은혜 신랑과 사는 우리에겐 사랑의 열망만 있다.
찬송을 부르고 또 불러도 모자란다. 사랑하고 또 사랑해도 모자랄 뿐이다. 드리고 또 드려도 한없이 모자랄 뿐이다. 보고 있어도 보고 싶다. 말씀 듣고 있으면서도 또 듣고 싶다. 예배드리고는 또 예배드리고 싶어한다. 은혜신랑과 함께 사는 사람 우리의 신랑 예수를 향한 사랑의 열망이 일기 시작하면서 “어떻게 하면 내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을까?” 전혀 다른 삶의 동기가 생겨난다.
주님을 향한 사랑이 뜨거워지자 율법 안에서 그렇게 노력해도 나타나지 않던 열매들이 맺혀지기 시작한다. 거룩의 열매, 선의 열매, 의의 열매, 친절의 열매, 절제의 열매가 맺혀진다. 저절로 착해지는 복을 받는다. 저절로 기도가 되고, 전도가 저절로 되고, 펼치면 저절로 성경이고, 앉으면 기도가 저절로 되고, 용서가 된다.
본문 7장 5절 “육신에 있을 때는 죄의 정욕으로 사망의 열매를 맺더니” 이제는 성령의 새로운 열매가 저절로 맺히기 시작한다. 8장 4절에서는 “율법이 그렇게도 요구하던 그 열매가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게 된다.”고 했다. 더벅머리 더러운 몸으로 늘 부모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학교에서 선생님들의 골치를 썩이던 불량 청소년이 있었다. 부모님의 회초리도 선생님들의 가혹한 처벌도 이 아이를 바꿀 수 없더니, 어느 날 이 소년이 한 여학생을 사랑하게 되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머리를 깎고 옷을 단정히 입기 시작하고 그 여학생이 담배 냄새 싫어한다고 담배를 끊고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변화인가? 이것이 사랑의 힘이다. 법이 하지 못하던 것, 내 의지가 할 수 없는 것 - 그것을 사랑이 해낸다. 이때부터 성도들이 살아가는 삶의 원칙이 있다. 바로 은혜의 법칙이다. 율법이 아니라 은혜로 살 줄 아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교회이다. 거기는 용납이 있다. 허물이 들어 나고도 아프지 않다. 어린 신앙 인들이 더 사랑 받는 곳이 교회이다. 연약한 지체들이 더 보호를 받는 곳이 교회이다. 교회는 가족이기 때문이다.
우리 어머니들에겐 법, 규칙 이상의 용납과 용서와 이해의 폭이 있다. 우리가 어머니를 좋아하는 이유는 내 어머니 품엔 은혜가 있기 때문이다. 내 어머니는 자식 얘기라고 하면 다 속아넘어가 준다. 세상에서 제일 속이기 쉬운 사람이 어머니이다. 중학교 1학년 철없던 시절 어머니를 멋지게 한번 속여 보았다. 용돈이 필요해서 “영어 사전”산다고 돈 타고, 그 다음날 “딕셔너리” 산다고 돈 타고 또 다음날 “콘사이즈”산다고 돈 타고, 책 한 권 사 놓고 세 번씩 어머니 주머니를 긁어냈다. 그래도 어머니는 속아주신다. 속아주는 어머니가 가여워서 그 다음부터는 속일 수가 없었다. 은혜가 있고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녀를 너무 공의와 법으로 다루는 집 아이들은 비뚤어진다. 집에 들어가기 싫어 밖에서 방황한다. 그게 참 이상하다. 이것이 바로 율법의 한계다. 영화 쉰들러 리스트에 오스카 쉰들러가 독일군 장교에게 하는 말 가운데 이런 대목이 나온다. “무엇이 진정한 힘인가? 죽일 수 있으면서 죽이지 아니하고 때릴 수 있을 때 때리지 않는 것, 바로 은혜를 베풀 줄 아는 것 그것이 참된 힘이다.” 얻은 은혜보다 더 큰 힘은 없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하나님의 사람들! 그들은 좀 허술한 것 같아도 한 가지 삶의 원칙이 있다. 은혜로 살아간다. 사랑으로 살아간다. 용서로 살아간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이곳에 오실 때 예수 신랑보고 싶어 셀레이는 마음으로 달려오셨는가? 아니면 오늘 예배드리지 않고 오후에 놀러갔다가 차 사고 날지도 몰라 하며 율법에 매여 오셨는가? 여러분은 진정 죄와 율법으로부터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아는가? 죄에 매여 사는 것도 율법에 매여 사는 것도 영적인 간음이다.
오직 우리는 은혜의 끈에, 예수의 사랑에 매여서 살뿐이다. 이제 여러분은 영광스럽고 존귀한 예수 신랑의 신부이다. 그와 함께 더불어 살아간다. 잠을 자고 그와 함께 일어난다. 예수와 함께 살고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을 통해 성령의 열매를 낳는다. 예수와 함께 기뻐하고 예수와 함께 슬퍼한다. 예수님의 모든 풍성함과 부요함이 당신의 것이다. 여러분이 무엇을 하든지 어디를 가든지 여러분은 존귀한 주님의 자녀이다.
오하이오 주의 한 도시에서 675명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어떻게 하면 사람이 천국에 갈 수 있습니까?”라는 설문조사를 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중에 85% 정도의 사람들이 성경과 전혀 관계없는 엉뚱한 대답을 했다. 어떤 사람은 “교회에 등록하고 예배를 빠짐없이 참석하면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대답했다. 또 어떤 사람은 “선한 일생을 삶으로써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말했다. 어떤 사람은 “성경을 읽으면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말했다. 또 어떤 사람은 “노력하면 갈 수 있다.”고 말하고 "어떤 종교든 열심히 믿으면 갈 수 있다"고 대답했다. 모두 다 잘못된 생각이다.
교회 아무리 나와도 성경 아무리 읽어도 아무리 선하고 착한 일을 해도 아무리 종교를 열심히 믿어도 그것은 소용이 없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나요? 하나님의 선물은 예수님밖에 없는 것이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인 것이다. 예수님을 모셔들여야 구원을 받지 예수님 이외에 모든 것은 구원을 가져올 수 있는 조건이 안 된다. 천하 인간에게 구원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적이 없다.
그러므로 다른 이름이나 다른 철학이나 다른 종교를 의지하지 마시오. 예수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예수님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는 것이다. 오직 우리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선물인 예수님밖에 없는 것이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 중 가장 큰 하나님의 선물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을 우리 마음가운데 모셔들여야 구원을 받게되는 것이지 예수님 이외에 것은 우리를 구원할 수 없는 것이다.
천하 인간에게 구원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적이 없다. 그러므로 다른 이름이나 철학이나 종교를 의지할 필요가 없다. 예수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예수님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는 것이다. 율법이 죄를 드러나게 하고 준엄한 심판을 내리는데 반해 예수님은 은혜로 우리를 용서하시고, 의롭다 하시고, 하나님의 영광으로 영접하여 주시는 것이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를 거역하고 재산을 전부 탕진하고 헐벗고 굶주리고 벌거벗은 몸으로 돌아왔을 때 율법주의자인 형은 그를 용납할 수 없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지나간 과거를 용서해 주시고 품에 안아서 이 아들이 새사람이 되기를 원하셨다. 아버지는 이 아들에게 좋은 옷을 입히고 신발을 신기고 가락지를 선물하였다. 그리고 잔치를 벌였던 것이다. 율법은 우리를 정죄하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므로 이 율법에 의해서 구원에 대한 소망을 가질 수 없는 것이다. 율법은 우리의 모든 삶을 정죄하고 심판하기 때문에 율법 앞에 의롭다함을 얻을 육체가 없고 또 이 율법을 지켜서 구원받을 육체도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자비와 긍휼을 베푸심으로 우리를 용서해 주시고 우리에게 구원을 선물로 주신 것이다.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못났음에도 불구하고 버림을 받아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로 우리의 모든 죄를 갚았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 구주 예수님을 믿으면 영원히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므로 예수님을 따라가는 삶을 살 때에 율법으로 말미암는 심판을 피하고 용서와 의와 평강이 넘치는 예수님의 은혜에 거하게 되는 것이다. 율법을 행하면 산다한다. 그러면 율법을 행할 자가 누가 있겠는가? 아무도 율법을 행하지 못하지요. 오직 우리가 용서와 의로움을 받을 길은 예수 믿는 길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다. 천지 어느 곳에 보아도 우리 스스로 힘으로 죄를 청산하고 의롭게 될 수 있는 길도 방법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은 결국 예수님의 구원을 바라보도록 인도하는 어린아이의 선생과 같다. 율법 하에서 보니 완전히 죄인이요, 또 죄인이요, 또 죄인이요, 또 무서운 죄인인데 살길이 없다. 손발은 묶이고 입은 다 막고 이제는 눈도 캄캄하고 변명할 길이 없다. 그런데 거기에 오직 한 가지 길을 보여 주는 것이다. 예수님이 오셔서 율법 아래 지은 모든 죄를 예수님이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청산해 버려서 다 용서해 주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그 많은 죄가 다 청산되고 용서를 받고 의롭다함을 얻고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있다는 메시지가 주어진 것이다. 이것이 복음의 메시지요, 은혜의 메시지인 것이다.
율법 하에서 정죄를 당하고 절망에 처한 사람이 갈 수 있는 길은 예수께 나오는 길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은 오히려 우리를 예수께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초등학교 선생)노릇을 하는 것이다. 율법이 없으면 천방지축으로 자기가 잘났다고 뛰어다니는데 율법에 비추어 보니까 자기의 입을 막고 손, 발이 다 묶여지고 절망적인 죄인인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자기를 해방시켜 주고 죄에서 용서해 주고 의롭게 해주실 분은 예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고 예수 앞에 나올 수가 있는 것이다.
갈 3:23~25에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
갈 2:16에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고 말한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이 지옥 가는 것은 자기 죄 때문에 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지 않기 때문에 지옥 가는 것이다.
롬 3:23~24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의 비가 쏟아질 때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우산 밑에 들어가면 심판의 비 한 방울도 임하지 아니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우산밖에 있으면 계속 심판의 비를 맞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가 예수님 십자가 밑에 들어가면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의 비는 한 방울도 임하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다 갚아 버렸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다. 남녀노소, 빈부, 귀천할 것 없이 잘했거나 못했거나 의인이거나 죄인이거나 선인이거나 악인이거나 그런 인간적인 행동의 잣대로 셀 것이 아니다. 무조건하고 예수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받고 예수그리스도를 안 믿으면 멸망당하는 것이다. 예수 안에 들어오면 용서와 의로움을 있고 예수밖에 있으면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받아 영원히 멸망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롬 4: 25절에 "예수는 우리가 범죄 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고 말한 것이다. 더러워진 우리 외형의 모습을 물로 씻거나 혹은 성형수술을 하여 고치는 것처럼 더러워진 우리 내적 모습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보혈의 능력과 성령의 역사로 고쳐질 수가 있다.
M.R. 디한 박사는 율법과 은혜에 대해 아주 간략하게 7가지로 표현했다. (1)율법은 가장 선한 사람도 정죄하지만 은혜는 가장 악한 사람도 구원한다. (2)율법은 죄의 삯은 사망이라 말하나 은혜는 하나님의 은사는 영생이라 말한다. (3)율법은 죄의 빚을 갚으라 말하나 은혜는 이미 죗값은 지불했다고 말한다. (4)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지만 은혜는 죄로부터 구원을 받게 한다. (5)율법은 돌에 새겼으나 은혜는 마음에 기록되었다. (6)율법은 두려움을 가져오지만 은혜는 화평과 확신을 가져다준다. (7)율법은 복종을 강요하지만 은혜는 순종하는 능력을 준다.
이 세상에 옷을 한 벌 사도 값을 지불해야 된다. 천당은 값없이 간다. 예수님의 보혈의 은혜로 값없이 천국가게 되는 것이다. 이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가슴에 사무쳐지기를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
영상 설교 보기=율법 남편과 은혜 남편*하원식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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