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으로 드리는 영적 예배
(로마서 12:1,2)
언젠가 어느 기도원에 갔던 적이 있었습니다. 기도원 뒷산에 기도하러 올라가다가 젊은 부인 한 분이 바위 위에서 큰 소리로 방언도 하고 기도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 분은 이런 기도를 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온 세계 열방이 주님 앞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선교사를 많이 보내게 해주시옵소서.” 저는 마음속으로 “할렐루야, 아멘” 하였습니다.
그런데 여기까지는 좋았는데, 그 부인이 기도를 마치고 돌아갈 때가 문제였습니다. 기도하느라고 깔아 놓았던 신문지, 눈물 콧물 닦고 버린 휴지를 치우지 않고 그대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열정적이고 장한 기도를 하신 분이 뒷 처리가 미숙한 것을 보고 마음이 서글펐습니다.
이 부인에게 있어서 급한 것은 세계 선교가 아니라 자신의 주변 정리라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정말 세계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이라면, 쓰레기 하나라도 안 버려서 자연을 해치지 말아야 하고, 이웃을 불쾌하게 하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누가 보든 안 보든 쓰레기 하나라도 잘 치우는 것이 세계 선교의 첫 걸음이 아닐까라는 아쉬움을 가졌습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은 누구입니까? 한마디로 그들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믿음이 있다 없다 를 무엇을 가지고 알 수 있습니까? 믿음은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 믿음을 어떻게 평가하고 어떻게 측정할 수가 있습니까? 믿음이 보여 지고 객관적으로 드러나는 영역은 단 하나, 그것은 각자의 삶입니다. 믿는 자의 삶이 믿음을 말해 줍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믿는 자의 삶”을 가리켜 “영적 예배”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12:1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바울은 성도의 삶을 몸으로 드리는 영적 예배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성도의 삶을 가리키는 “몸”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성경에 보면 ‘육체’라는 단어가 있고, ‘몸’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육체와 몸을 같은 말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헬라어에서 육체를 “사르크스”라고 하고 몸을 “소마”라고 합니다. 사르크스는 썩어질 수밖에 없는 물질 같은 육체, 비인격적인 단어입니다. 그런데 소마는 인격적 단어입니다. 다시 말하면 몸이라는 소마는 육체와 정신과 영을 합한 개념입니다. 몸은 곧 인격적 결합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구체적인 온전한 생활을 의미합니다. 마음만이 아니고 몸을, 정신만이 아니고 생활 전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20세기 최고의 신학자 칼 바르트는 예배의 중요성에 대하여 세 가지로 말합니다. “예배는 가장 중요한 것이요. 가장 긴급한 것이요. 또 가장 영광스러운 일이다.” 이 위대하고 엄청난 영적 예배를 이루기 위해서 인격적 결합체인 우리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헌신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진정한 삶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이 헌신의 결단이 있기를 축복합니다.
로마서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눕니다. 1장부터 11장까지를 교리 편, 12장부터 16장까지를 실천 편이라고 합니다. 1장부터 11장까지의 내용은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12장부터는 “믿는 자의 삶”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신약성경에 나오는 바울 서신의 대부분도 서신의 앞부분은 믿음에 대한 교리를 설명하고, 서신의 뒤편에는 그 믿음의 실천사항과 신앙인의 행동규범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무조건 ‘아멘’한다고 해서 다 믿는 자가 아닙니다. 교회에서 예배를 많이 드렸다고, 신앙의 연륜이 깊다고, 열심히 충성 봉사했다고 다 삶이 변화되고 달라지는 것이 아니며, 그것이 진정한 믿음의 기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믿음과 삶에 균형과 조화가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해리 E 포스딜이라고 하는 기독교 윤리학자는 그리스도인을 둘로 나누어서 설명합니다. “하나는 aesthetic Christian, 심미적 그리스도인, 또 하나는 ethical Christian, 윤리적 그리스도인”입니다. 아주 재미있는 표현입니다.
심미적 교인이라는 것은 그저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립니다. 좋은 음악을 듣고, 찬송 한번 부르고, 좋은 설교 듣고, 수양하고, 마음을 평안하게 합니다. 단적으로 말해서 ‘감정을 순화’하는 겁니다. 신앙을 교양적으로 좋다고 말하는 것이 심미적인 교인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교회에 나와서 조용하게 위로를 받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문밖에 나가면 그만이에요.
이렇게 감정순화의 수단으로 교회에 다니는 그리스도인이 있습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분은 서울 시내 유명한 교회에 가서 성가대 찬양만 주로 감상하고 오시는 분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심미적 교인은 아닙니까?
그런가하면 윤리적 교인은 이렇습니다. 하나님 앞에 예배드립니다. 그 예배 가운데 얻은 감격이 있고, 깨달음이 있고, 결단이 있습니다. 거기서 얻은 힘대로, 거기서 공급받은 능력대로 나가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랑하라.’ 할 때에 사랑해요. ‘원수를 사랑하라.’ 할 때에 감격하고, 깨닫고, 그래야겠다고 생각합니다. 말씀의 공급하시는 힘에 따라서 용서하고 용납합니다. 믿음을 행함으로 옮깁니다. 믿는바 그대로 행합니다. 믿는바 그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윤리적 교인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란 단지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고, 감정에 몰입되어 찬송을 부르고, 특심한 마음으로 교회 봉사를 하고,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 사람만이 아닙니다. 사실 그것도 매우 중요한 교회의 사역이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 분의 삶을 모방하고, 그 분을 본받고, 그 분처럼 따라 사는 것을 말합니다. 바울은 오늘의 본문을 통해 그 분을 따라가는 것, 그 신앙의 실천을 ‘몸으로 드리는 예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제 하나님이 허락하신 이 새해를 살아가는 신앙인으로서 무엇을 따르고, 무엇을 실천하시려고 하십니까? 바울은 우리가 드려야 될 ‘영적 예배’를 설명하면서 본문 1절에서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이라는 말”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무엇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의 삶입니까?
어릴 때 외할머니집에 가면 언제나 맛있는 찌개를 끓여주셨습니다. 저는 외갓집 음식이 다 맛있었습니다. 외할머니는 항상 멸치를 통째로 넣은 채 맛있는 찌개를 끓이셨습니다. 저는 그 때 멸치를 싫어했습니다. 찌개에 멸치가 들어있으면 그걸 건져낼 수도 없고 해서, 나중에 맛있는 것을 먹기 위해 먹기는 싫지만 꾹 참고 멸치부터 먼저 골라먹었습니다. 맛이 있는 것을 나중에 먹으려고 먹기 싫은 멸치를 먼저 먹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외할머니는 제가 멸치를 좋아하시는 줄 아시고, 멸치를 다 골라 먹고 이제 찌개를 제대로 먹으려는 순간 “얘가 멸치를 좋아하는구나.” 하시며 제 찌개 위에다 멸치를 듬뿍 더 얹혀 주셨습니다. 제가 멸치를 안 좋아하는 것을 모르신 외할머니가 야속했습니다.
여러분, 저는 이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혹 우리 신앙생활도 이런 것은 아닌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 줄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그래서 자기 멋대로 판단하고 사는 것은 아닙니까? 옛날 가난한 시절, 어른들은 마른 논에 물들어가는 것과 자식 입에 밥 들어가는 것을 제일 큰 기쁨으로 여겼습니다. 특히 우리들의 어머니들은 자신들은 밥을 굶으면서도 자식들에게는 굶기지 않았습니다. 자식들이 왜 어머니는 드시지 않으시냐고 물으면 “너희들 먹는 것만 보아도 나는 배부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쌀이 부족해서 굶으시는 어머니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철없는 자식들은 정말 우리가 잘 먹는 것만 보아도 어머니는 배부르신가보다 하며 착각합니다. 혹 우리 믿음도 이런 것은 아닐까요? 구체적으로 바울은 로마서 12:2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몸으로 드리는 거룩한 산 제물’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그러면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이루기 위해 우리는 무었을 해야 할까요?
첫째,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 고 하십니다. 세대라는 말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패턴, 유행이나 풍습’ 등을 의미합니다. 세상의 관습, 세상의 재미를 말합니다. 세상 속에서 하고 싶은 일, 즐기고 싶은 일, 누리고 싶은 일 다 하면서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를 받으라.” 고 하십니다. 우리가 왜 신앙생활을 합니까? 그것은 뭔가 달라지기 위해 교회에 다니고, 좀 더 변화된 나은 삶을 살기 위해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심성을 바꾸기 위해 마음공부를 하는 곳입니다. 교회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기 위한 동호인 모임이 아닙니다.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배우고 실천하는 곳입니다. 내 기분으로 교회에 다니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말한 대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찾아 새로운 마음과 변화된 삶을 갖고자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땅의 뜻을 찾기 위해 모인 것이 아니라 하늘의 뜻을 찾기 위해서 모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하늘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나아가 이 땅을 하늘로 만드는 사람들입니다.
본문의 표현대로 우리는 ‘거룩한 산 제물’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은 이 땅이지만, 사는 것은 하늘을 향한 제물의 삶으로 살아갑니다. 제물은 바치기 위해 존재합니다. 제물은 우리 몸입니다. 우리 삶 전부로 바치는 것입니다. 이것이 몸으로 드리는 거룩한 예배입니다.
하나님께 드려지는 거룩한 제물은 첫째, ‘깨끗해야’ 됩니다. 그래서 제사장은 제물을 날마다 살핍니다. 흠이 있어도 안 되고 점이 있어도 안 됩니다. 더러워도 안 됩니다. 병들어도 안 됩니다. 구제역에 걸려도 안 됩니다. AI, 조류 인플루엔자에 걸려도 안 됩니다. 완전한 것이라야 됩니다. 반드시 깨끗하고 정결한 것을 하나님께 드리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깨끗하게 제물로 드려지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하나님께 드릴 제물의 둘째 특징은 ‘죽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산 것을 죽여서 드리는 것이지, 죽은 것을 드리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바로 살아 있는 생명을 잡아서 드린다는 것입니다. 그 생명은 한번 드리면 끝나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 드렸다가 도로 찾아갔다가, 결단했다가 포기했다가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을 드린다는 것은 하나님께 드림으로 끝낸다는 뜻입니다. 산 생명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입니다. 이것이 거룩한 산 제물이요.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인 것입니다.
저는 30여 년 전에 신학대학원을 졸업했습니다. 졸업식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까 여러 사람들에게 축하 인사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아주 재미있는 친구가 하나 있었습니다. 다짜고짜 제 손을 딱 잡더니 "청춘 매장 했군" 하는 겁니다.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곧 목사가 될 테니, 이제 인간적인 세상 재미는 다 봤다, 끝났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신학대학원 ‘졸업식은 청춘 매장식이다.’ 이렇게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듣고 보니 정말 그렇습니다. 또 정말 그래야 되지 않겠습니까?
저는 지남 1986년 3월 11일 밤을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그 다음 날인 3월 12일이 제 목사 임직식이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육군 군목으로 선발되어 그 해 7월에 군종장교로 임관이 예정되어 있기에, 목사고시를 치르고 비교적 어린 나이에 경북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안수식 전 날 밤, 여관에 있던 저는 밖으로 나와 초저녁부터 대구의 밤거리를 혼자 걸었습니다. 그날 밤 저는 목사 안수를 남들보다 빨리 받는다는 기쁨보다는 이제 하나님 앞에 헌신된 종으로 산다는 것이 매우 무거운 부담감으로 제 가슴을 짓눌렀습니다. 꿈도 많고, 하고 싶은 일도 많은 평범했던 한 청년이 목사가 되는 순간,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 길은 이제 피할 수 없는 길이었습니다. 반드시 가야하는 길이었습니다.
밤기운이 차가웠던 3월의 밤공기를 가르며 저는 그 날 마음속에 울며, 기도하며 다짐했습니다. “그래, 나를 부르신 하나님 앞에 이제 제물로 바쳐지는 거다. 그래서 나는 이제 죽은 거다. 이제는 나를 위한 일은 없고, 다시는 나에 대해서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으리라. 하나님께 생명을 드리는 것이니까. 이제 나를 죽여서 드리고, 거기서 끝을 내자. 하나님께 깨끗이 생명을 바치자. 착하고 신실한 종이 되자. 결코 다시 세상으로 돌아오는 일은 결코 없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우리의 삶을 하늘 뜻에 바치는 것, 이것이 거룩한 산 제물입니다. 주안에서 옛사람으로는 죽고, 주님과 다시 살아나 날마다 새롭게 드려지는 우리들의 헌신이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영적 예배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미국 작가 벤 다이크라는 분이 쓴 ‘대저택’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어떤 부자가 죽어 천국에 갔습니다. 천사가 인도하는 대로 천국에서 살 자기 집을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정작 가보니 보기에도 민망한 작은 오두막이 그가 살아야 할 집이었습니다. 그는 너무나 어이가 없었습니다.
자기 집 옆에서는 천사들이 으리으리한 대저택을 짓고 있었습니다. 누구 집이냐고 물었더니 땅에서 그 부자와 한 동네에 살던 가난한 의사의 집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자기에 비해 형편없는 그가 어떻게 저런 저택에서 살 수 있느냐고 항의조로 말을 했더니 천사는 부자에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당신도 알다시피 지금 짓고 있는 건축 자재는 모두 그 집에서 살 본인이 세상에 사는 동안 부지런히 이곳으로 보내 온 것들입니다. 당신도 세상에서 보내기는 보냈지만 너무 적게 보냈습니다. 당신이 평생 보낸 자재만으로는 이 오막살이의 지붕도 제대로 씌울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저 대저택을 보십시오. 당신이 잘 아는 그 가난한 의사집인데, 그는 평생 동안 남에게 나누어 주는 것을 기쁨으로 알고 살았습니다. 그가 남을 위해 쓴 것은 하나도 빠짐없이 이 곳에 도착했어요. 자재가 너무 많아 저렇게 큰 저택을 짓고도 남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정말 가슴에 와 닿는 이야기입니다.
그렇습니다. 제물을 모아도 자기 욕심을 위하여 모아서는 안 됩니다. 하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모아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바라시는 산 제사, 산 제물, 몸으로 드리는 영적 예배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기억하고 그 거룩한 산 제물을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것입니다. 바로 거기에 우리의 바라보고 가야 할 하늘 장막집이 있습니다.
미국의 역사상 최고의 부자로 손꼽히는 록펠러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우리나라 돈으로 약 500조원 정도의 재산을 모은 사람입니다. 대단하지요. 단순히 그가 부자라서가 아니라 그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누구보다도 앞장 선 사람이었기에 그는 사람들에게 더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는 전 삶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몸으로 드리는 예배를 드리다 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평생 신앙의 조언자로요, 기도의 후원자였던 어머니의 유언을 늘 가슴에 품고 다녔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 유언은 유치해 보입니다. 그러나 이 유언이 그로 엄청난 부의 축복을 받게 하였고, 몸으로 드리는 거룩한 산 제물의 삶을 살다가게 했던 것입니다.
그 열 가지 유언을 소개하겠습니다.
첫째, 하나님을 친 아버지로 섬겨라.
둘째, 목회자를 존중해라.
셋째, 아무도 원수로 만들지 말라.
넷째, 예배 시간에 항상 앞에 앉아라.
다섯째, 오른쪽 주머니는 항상 십일조 주머니로 하라.
여섯째, 주일 예배는 본 교회에서 드려라.
일곱째, 아침에 목표를 세우고 기도하라.
여덟째, 남을 도울 수 있으면 힘껏 도와라.
아홉째, 아침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꼭 읽어라.
열째, 잠자리에 들기 전 하루를 반성하고 기도하라.
이 구체적인 실천의 계명을 록펠러는 평생의 인생지침으로 알고 살았다고 합니다. 이것이 그가 물질적으로나 영적으로 축복을 받을 수 있었던 비결이기도 했습니다. 여러분들도 한번 적용해 보시면 어떨까요?
여러분, 새해, 어떤 신앙의 삶, 어떤 거룩한 산 제물, 몸으로 드리는 어떤 영적 예배를 드리려고 하십니까? 새해, 저와 여러분, 우리 교회와 가정과 직장에 부흥을 위한 영적인 목표가 반드시 있어야 할 것입니다. 성실한 신앙생활로날마다 새로워져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려지는 복된 한 해가 되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오늘의 예배가 단순히 또 하나의 예배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우리의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내어 드리는 영적 예배의 삶을 결단하는 시간이 되어 금년 한 해, 여러분과 가정, 그리고 교회 위에 더욱 풍성한 열매를 맺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CCM 주님께서 쓰시겠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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