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당신은 거듭났습니까?"
이 질문에 대해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여러분 중에는 "그렇습니다. 저는 거듭났습니다"라고 거침없이 대답할 분이 계십니다. 또 어떤 분은 "글쎄요? 잘 알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대답하는 게 맞겠죠?"라고 하실 분도 계십니다. 그런가 하면 손사래를 치면서 "나는 그런 거 믿지 않습니다. 꼭 그렇게 말해야 합니까?"라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입니까?
이것은 여러 이단 종파의 전도자들(evangelists of the cults)이 믿는 사람들을 흔들기 위해서 사용하는 질문 중 하나입니다. 이 질문을 던지면 믿는다는 사람들 중 절반 이상은 흔들리게 되어 있습니다. 자신이 거듭난 사람인지를 확신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예, 저는 거듭났습니다"라고 대답하면, 이단 종파의 전도자들은 단박에 또 다른 질문을 던집니다. "언제 거듭났습니까? 그 날짜와 장소를 기억합니까?"
이 질문에 또 절반 이상이 무너집니다. 거듭났음을 확신하게 만드는 사건을 체험한 사람들은 많지 않고, 또한 그 사건의 시간과 장소를 기억하는 사람은 더 적기 때문입니다. 이 질문에 당황하여 눈빛이 흔들리는 것을 보는 순간, 전도자들은 finish blow를 날립니다. "당신은 헛 믿었습니다. 그 믿음으로는 구원받지 못합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여기, 확실하게 구원받는 길이 있습니다."
이렇게 이단 종파의 전략에 무너져 인생을 망치고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아픔을 안겨 준 사람들이 많이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사람들이 이 질문으로 우리에게 도전해 오기 전에 우리 스스로 자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사람 상대하지 않으면 되지 뭐 걱정인가?"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 질문은 믿음의 본질에 관한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렉셔너리를 따라 읽은 오늘의 본문은 '거듭남의 진실'(what it is to be born again)에 대해 가장 중요한 말씀 중 하나입니다. 저는 오늘 이 말씀을 통해 거듭남에 대해 생각해 보려 합니다. 우리의 믿음에 있어서 가장 근본적이고 또한 핵심적인 문제입니다. 바라기는, 오늘 이 말씀이 끝난 후에는 "당신은 거듭났습니까?"라는 질문에 대해 분명한 대답을 할 수 있기 바랍니다.
사실, 이 질문에 대해 거침없이 "예!"라고 답하는 사람들 중에 거듭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이해하고 대답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거듭난 증거가 전혀 없는데도 교리적인 학습의 결과로 "나는 거듭났습니다"라고 대답하는 사람들을 저는 그동안 많이 보아왔습니다. 반면,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라고 대답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거듭난 증거가 분명한데 본인 자신은 그렇게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거듭남에 대한 근거 없는 맹신이 한 편에 있고, 거듭남에 대한 근거 없는 불신이 다른 한 편에 있습니다. 오늘의 이 말씀으로 인해 거듭남에 대해 제대로 판단하실 수 있기 바랍니다.
2.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은 니고데모입니다. 1절에 보니 그는 '바리새파 사람'(a Pharisee)이었다고 하고, 10절에 보니 '이스라엘의 선생'(a teacher of Israel)이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율법을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가르치는 '바리새파 율법학자'(a Pharisaic scribe)였던 것 같습니다. 또한 그는 '유대 사람의 한 지도자'(a ruler of Jews)였다고 말합니다. 7장 50절에 비추어 볼 때, 로마 정부가 허락한 유대인 자치 정부 산헤드린(Sanhedrin)의 의원이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니고데모는 당시에 보통 사람이 꿈꾸던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권력도 있었고, 재산도 많았으며, 거기에 더하여 율법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있었고 믿음이 독실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시각으로 볼 때 하나님의 축복을 다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2절에 보니 "밤에" 찾아왔다고 합니다. 그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다는 사실은 여러 가지를 의미합니다.
첫째, 니고데모와 예수님의 신분 차이를 암시합니다. 당시로서 예수님은 이름 없는 갈릴리 전도자였고 니고데모는 당시 유대인들 중에 Top 1%에 속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 그런 사람이 예수님을 찾는다는 것은 체면 구기는 일이었습니다. 밤을 틈 타 찾아온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둘째는 니고데모의 절박한 사정을 의미합니다. 산헤드린 의원이요 율법학자로서의 위신을 접어 두고 예수님을 찾을 수밖에 없었던 그의 영적 어둠을 상징합니다. 그의 영적 어둠이 무엇이었습니까? 니고데모와 예수님의 대화에 그 어둠의 원인이 드러납니다. 만나자 마자 니고데모가 "랍비님, 우리는, 선생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임을 압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지 않으시면, 선생님께서 행하시는 그런 표징들을, 아무도 행할 수 없습니다"(2절)라고 칭찬하지요. 예수님은 이 칭찬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그의 의중을 꿰뚫어 보신 듯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다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 (3절)
예수님은 니고데모의 고민을 아셨습니다. 왜 그 밤중에 자신을 찾아왔는지를 아셨습니다. 그는 하나님 나라를 보고 싶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싶었습니다. 육신과 이성의 한계를 초월하여 하나님의 세계와 닿고 싶었습니다. 물질로는 만족되지 않는 깊은 영혼의 갈증을 채우고 싶었습니다. 권력으로도, 지식으로도, 명성으로도, 재산으로도 해결되지 않는 영혼의 허기를 해결하고 싶었습니다. 그 갈망을 채우기 위해 율법을 연구하고 실천해 보았습니다. 또한 그 열망을 해결하기 위해 성실하게 제사도 드렸고, 온갖 선행도 실천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해결책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은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혹시나 그분에게 해답이 있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그분은 뭔가 다른 점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세계와 소통하는 분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분을 찾아가 도움을 받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율법학자 체면에 어떻게 무명의 전도자를 찾아가 도움을 구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것은 마치 하버드 대학교 신학부 교수가 신학교를 졸업하고 아리조나에서 목회를 시작한 어느 전도자에게 찾아가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그래서 고민했을 것입니다. 많이 망설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번 기회를 놓치면 영영 자신의 문제를 풀 길이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밤에 예수님을 찾아 온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알아보셨습니다. 니고데모는 마음에도 없는 말로 대화를 시작했지만 예수님은 다짜고짜로 핵심을 찌릅니다. "네가 찾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내가 안다. 너는 하나님 나라를 찾고 있지? 그 나라를 보려면 다시 태어나야 한다. 다른 길은 없다."
3.
니고데모에게 준 예수님의 대답을 이해하려면, 두 가지 표현을 제대로 이해해야 합니다.
첫째, "하나님 나라를 본다"는 표현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의미하고, "본다"는 말은 "깨닫다"는 뜻입니다. 우리 중에 감추어져 있는 하나님의 임재에 마음의 눈을 뜨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실상에 눈을 뜨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보는 것"은 영이신 하나님과 소통하는 것이며, 그분에게서 흘러나오는 사랑과 평화와 기쁨을 맛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덧 없어 보이던 자신의 존재를 하나님 안에서 다시 보고 그 영원한 의미를 깨닫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살다가 마침내 하나님 품에 이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같은 의미를 전하기 위해 다른 표현을 사용하기도 하셨습니다. 3장 16절에서 보듯, "영생을 얻으라"라고 말씀하기도 하셨습니다. '영생'은 옛날 진시황이 소망했던 '죽지 않는 삶'(life without death)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말씀한 '영생'은 '죽음을 넘어서는 생명'(life beyond death)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과 연합되면 우리의 존재는 죽음을 넘어서는 생명으로 옮겨가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구원을 받으라"고 말씀하기도 하셨습니다. '구원'은 하나님과 분리됨으로 인해 발생한 모든 상태(죄, 노예됨, 죽음, 심판, 정죄, 징벌)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결국, "하나님 나라를 본다"는 말이나, "영생을 얻는다"는 말이나, "구원을 얻는다"는 말은 모두 같은 뜻입니다. 하나님에게 눈 뜨고 하나님과 연합되고 하나님의 생명 안에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둘째, "다시 태어나야 한다!" 는 표현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시자 니고데모가 반문합니다. "사람이 늙었는데, 그가 어떻게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태어날 수야 없지 않습니까?"(4절) 그는 육신적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으로 오해했던 것입니다.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말씀에 사용된 헬라어 전치사 '아노텐'(anothen)은 '다시' 혹은 '새로'라는 뜻으로 쓰이지만, '위로부터'라는 뜻으로 쓰였습니다. 예수님은 두 가지 뜻을 모두 의도했다고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위로부터" 즉 "하나님에 의해" 태어나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계속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5절)
"위로부터 새로 태어난다"는 말은 "성령으로 난다"는 뜻입니다. "물과 성령"이라는 말은 "물 즉 성령"이라는 뜻입니다. 성령은 양수(amniotic fluid)처럼 영적인 태아를 형성시킵니다. 성령은 그렇게 성부 하나님과 함께 온 세상을 형성하셨습니다. 사람 형체로 빚은 흙덩어리에 성령이 들어가자 '생령'(living soul)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그처럼, 성령이 임하시면 달라집니다. 새로와집니다. 겉모양은 동일하지만 보는 것과 듣는 것 그리고 생각하는 것과 사는 것이 달라집니다. 그래서 "다시 태어났다"고 말합니다. 그것을 "하나님에게서 태어났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께서 의로우신 분임을 알면, 의를 행하는 사람은 누구나 다 하나님에게서 났음을 알 것입니다. (요일 2:29)
하나님께서는 그 크신 자비로 우리를 새로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벧전 1:3)
결국, "위로부터 새로 지어졌다"는 말이나 "성령으로 지어졌다"는 말이나 "하나님에게서 태어났다"는 말은 다 같은 뜻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보려면, 영생을 얻으려면 혹은 구원을 받으려면, 하나님으로부터 임하는 영향력을 입어야만 한다는 뜻입니다. 육신을 입은 인간으로서는 자신의 능력으로는 하나님의 세계로 뚫고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세계에서 인간의 마음에 뚫고 들어오는 무엇이 있을 때 비로소 하나님을 볼 수 있고 그분의 다스림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습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4.
그래서 다시 한 번 여쭙니다. 여러분은 거듭나셨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에게서 난 사람입니까? 성령으로 새롭게 지어지셨습니까?
이렇게 질문을 하면, 많은 분들이 반문을 합니다.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습니까? 거듭났는지 어떤지를 판별하는 기준이 있습니까?"
이 지점에서 조심해야 합니다. 이 문제에 대해 믿는 사람들을 혼란시키는 사람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뚜렷한 체험이 있어야 거듭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어떤 사람은 방언의 은사를 받아야만 거듭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우리의 오감으로 확인할 수 있는 현상이 동반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교리를 학습시키고는 거듭났다고 믿으라고 세뇌시키고도 합니다. 그런 까닭에 어떤 사람들은 거듭나지 않았음에도 거듭났다고 주장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거듭났음에도 확신을 가지지 못합니다.
자신이 거듭난 사람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두 가지의 기준이 있습니다. 이 두 가지 기준을 잘 기억해 두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이 문제에 대해 더 이상 혼란을 겪지 않을 것입니다.
첫째, 거듭났음을 알게 해 주는 내적 증거(internal evidence)가 있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사도 요한이 아주 분명하게 정리했습니다.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사람은 다 하나님에게서 태어났습니다. (요일 5:1)
이 말씀을 거꾸로 하면, 하나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는다는 뜻이 됩니다. 예수님을 성부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원자로 믿는 믿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이미 거듭난 것입니다. 바울 사도 역시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예수는 저주를 받아라"하고 말할 수 없고, 또 성령을 힘입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는 주님이시다"하고 말할 수 없습니다. (고전 12:3)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받아들이고 그분을 향해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믿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이미 성령을 받은 사람이며, 하나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실로 그렇습니다. 2천년 전에 유대 땅에 살다가 정치범으로 몰려 십자가에 처형된 그 청년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그분을 향해 "주님!"이라고 부르는 마음의 변화는 기적입니다. 이미 그렇게 믿는 분들은 그것이 얼마나 큰 기적인지 실감하지 못할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임하시면 일어나는 변화들은 그 외에도 많습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기쁨도 생겨나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평강이 마음에 들어차며,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함도 생깁니다. 전에는 생각지도 않았던 일을 소망하게 되고, 꿈도 꾸지 않던 일을 마음에 품고 기도하게 됩니다. 그 모든 것이 이미 거듭 났다는 증거입니다. 하지만 그 모든 변화의 가장 깊은 뿌리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입니다. 다른 것은 없어도 됩니다만, 예수 그리스도를 온 세상의 구원자(Savior)요 나의 주님(Lord)으로 믿는 믿음이 있다면, 이미 거듭난 사람입니다.
5.
둘째, 거듭났음을 알게 해 주는 '외적 증거'(external evidence)가 있습니다.
이것에 대해서도 사도 요한은 아주 분명하게 밝혀 두었습니다.
하나님에게서 난 사람은 누구나 죄를 짓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씨가 그 사람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 그가 하나님에게서 났기 때문입니다. (요일 3:9)
이 말씀을 표면적으로 읽으면 "거듭난 사람은 죄를 짓지 않을뿐 아니라 죄를 지을 수도 없습니다"라는 뜻이 되어 버립니다. 만일 그런 뜻이라면, 사도 요한은 횡설수설하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바로 앞에서 이렇게 말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죄 없다고 말하면, 우리는 자기를 속이는 것이요, 진리가 우리 속에 없는 것입니다. (요일 1:8)
"우리" 라고 표현한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사도 요한은 믿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거듭난 사람도 죄를 짓는다는 현실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자신에게는 죄가 없다고 말한다면 그 사람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왜 3장 9절에서는 "거듭난 사람은 죄를 짓지 않으면 지을 수도 없다"고 말하는 것일까요? 그 단서를 우리는 헬라어 원문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 문장의 동사는 모두 현재형(presence tense)으로 되어 있습니다. 헬라어의 현재형은 영어와 달리 '지속적인 행동'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NIV는 이렇게 번역해 놓았습니다.
하나님에게서 난 사람은 죄 짓는 상태에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씨앗이 그들 안에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죄짓는 상태에 머물러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에게서 났기 때문입니다.
거듭난 사람은 때로 죄를 짓지만 죄 가운데 똬리를 틀고 주저 앉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씨앗이 그들 안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죄를 불편해 하고 죄를 미워하는 마음이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또한 성령께서 죄를 털고 일어날 능력을 주십니다. 이렇게 본다면, 거듭난 사람은 죄에 대해 다음과 같은 네 가지 단계를 변화를 거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첫째, 죄를 죄로 아는 변화가 일어납니다.
과거에는 아무 가책없이 즐기던 일들이 죄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성령이 임하시면 가장 먼저 '회개의 은혜'(convicting grace)를 경험하게 되어 있습니다. 자신의 죄성을 깨닫고 죄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 죄를 불편하게 느끼는 변화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씨앗이 우리 안에 자라기 시작하면 죄에 대해 불편해지기 시작합니다. 한 편에는 죄를 탐하는 마음이 있지만, 다른 한 편으로 그것을 불편하게 느끼는 마음이 자랍니다. 죄를 짓고 나면 과거에 없던 묵직한 마음이 느껴집니다.
셋째, 죄의 속박으로부터 자유해지는 변화가 일어납니다.
과거에는 벗어나려 해도 벗어날 수 없었는데, '위로부터 오는 은혜'를 입고 나면 그 결박이 느슨해집니다. 여전히 죄의 유혹과 결박을 느끼지만, 그것을 이길만한 영적 능력이 자랍니다.
넷째, 죄가 아니라 의를 행하는 변화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씨앗이 우리 안에서 자라감에 따라 하나님의 의를 행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께서 의로우신 분임을 알면, 의를 행하는 사람은 누구나 다 하나님에게서 났음을 알 것입니다. (요일 2:29)
6.
이 두 가지의 증거를 가지고 자신을 돌아 보면 비교적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습니다. 하늘이 두 쪽 나는 체험이 없었어도 상관 없습니다. 방언을 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했던 날의 황홀함을 기억하지 못해도 상관 없습니다. 그런 것으로 판단해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당신은 거듭났습니까?"라는 질문 앞에서 속절 없이 흔들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내적 증거를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에게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이 있습니까?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육신을 입고 우리 가운데 오셨다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당신의 죄에 대한 징벌을 담당하셨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 나시고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셔서 세상 끝날까지 통치하시다가 온 세상을 새롭게 변모시키시리라는 사실을 믿습니까? 그 믿음으로 그분을 주님으로 받아들였습니까? 그리고 매일 그분을 의지하고 살아가십니까?
이번에는 외적 증거를 보십시오. 죄에 대한 여러분의 태도에 달라진 것이 있습니까? 과거에 아무렇지 않게 행하던 일이 이제는 거북해서 하지 못하게 된 것이 있습니까? 전에는 즐기던 것들이 이제는 불편해진 것이 있습니까? 죄를 탐하는 마음이 여전히 있지만, 그것에 대한 불편함이 점점 늘어가고 있습니까? 전에는 즐기고 나면 개운했는데, 그것을 즐기고 나면 마음에 묵직한 것이 느껴집니까? 그뿐 아니라, 전에는 마음에도 없던 일을 열망하게 되고 하나님의 뜻을 찾는 변화가 일어났습니까? 나와 내 가족만 생각하고 살았는데, 이웃이 보이고 고통 받는 사람들이 보입니까? 그 전에는 이익만을 생각했는데, 이제는 의로운 것을 생각하게 되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이미 거듭나셨습니다. 대단한 변화가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새 생명이 잉태되고 나서 몇 주일 동안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합니다. 영적 생명도 그렇습니다. 처음에는 변화가 baby step으로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미세한 변화가 중요합니다. 하늘의 터치가 일어난 것입니다. 하나님에게서 태어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씨앗이 심겨져서 싹을 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내적 증거와 외적 증거가 있다면, 더 이상 의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영적 상태를 묻는 사람에게 겸손하게 그러나 분명하게 대답하시기 바랍니다. "예, 저는 하나님의 은혜로 거듭났습니다." 그리고 거듭남의 내적 증거와 외적 증거가 더 풍성해지도록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에게서 태어나는 것은 노력으로 되지 않지만, 거듭난 사람으로서 성장해 가는 데에는 우리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예배와 기도와 말씀 묵상과 섬김과 사랑의 교제를 통해 내적 증거와 외적 증거가 더 풍성해 지도록 힘써야 합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내적 증거와 외적 증거를 살펴 보니 거듭났다는 답이 안 나오는 분들이 계십니까? 그렇다면 더 미루지 마시고 거듭남의 사건이 일어나도록 조치를 취하셔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주님께서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거듭나지 않고는!" "거듭나야만!" 다른 길은 없다는 뜻입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하나님 나라를 보려면, 영생을 얻으려면 혹은 구원을 받으려면 거듭 나야 합니다. 성령으로 새로 지음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지어져야 합니다.
거듭남의 사건이 일어나게 하려면 어떤 조치가 필요합니까? 니고데모의 이야기를 통해 아주 중요한 깨달음을 얻어야 합니다. 거듭나는 것은 인간의 노력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율법 연구를 통해 거듭나는 것이라면 니고데모는 예수를 찾아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제사를 정성스럽게 드려서 거듭나는 것이라면 니고데모는 그 밤에 편안히 잠을 자도 되었을 것입니다. 십일조와 구제와 봉사를 열심히 하여 거듭나는 것이라면 니고데모는 그 누구보다 먼저 그 일을 이루었을 것입니다. 권력이나 돈으로 할 수 있는 일이면 벌써 이루고도 남았을 것입니다. 그 무엇으로도 되지 않았기에 그는 체면 불구하고 한밤중에 예수님을 찾아간 것입니다.
인간 편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다만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는 주님에게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진실하게 영접해 들이는 것뿐입니다. 니고데모처럼 자신의 지식과 신앙 경력과 모든 것을 내려 놓고 십자가 앞에 무릎 꿇는 것입니다. 때로는 너무 많은 지식이 구원의 걸림돌이 됩니다. 너무 명석한 두뇌가 영생의 길을 외면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너무도 큰 권력과 재산이 하나님 나라를 보지 못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니고데모는 그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에 속지 않았습니다. 우리에게도 니고데모의 태도가 필요합니다. 지금 이대로의 자신에게는 아무 희망도 없음을 인정하고 하늘로부터 은혜를 내려 주시기를 구해야 합니다. 그럴 때 주님께서 그 마음 안으로 들어오셔서 새로운 창조를 일으키십니다.
7.
그래서 다시 여쭙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거듭났습니까? 부디, 저와 여러분, 우리 모두가 이 질문에 대해 겸손히 그러나 기쁨으로 "예, 그렇습니다. 주님의 은혜로 제가 거듭났습니다. 제 안에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씨앗이 제게 있습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대답할 뿐 아니라, 거듭난 사람답게 죄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의롭게 살아가는 일에 매일 진보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오, 주님
저희가 목마릅니다.
저희가 허기에 지쳤습니다.
저희가 어둠 속에 살고 있습니다.
저희가 죄에 갇혀 있습니다.
저희가 무덤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는 주님의 음성을
외면하고 살아갑니다.
오,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위로부터 지어지기를
성령으로 다시 빚어지기를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되기를 구합니다.
오, 주님
마음의 문을 활짝 엽니다.
오셔서
제 안에 새 일을 시작하소서.
아멘.
'은혜 설교 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스크랩] 신자가 받아야 할 13가지 축복 (0) | 2017.07.15 |
|---|---|
| [스크랩] 몸으로 드리는 영적 예배 (0) | 2017.07.15 |
| [스크랩] "날로 새롭다" (고린도후서 4:16-18) (0) | 2017.07.15 |
| [스크랩] 내가 성소에서 깨달았습니다(시편 73편 1절~17절) (0) | 2017.07.15 |
| [스크랩] 정필도목사/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고후 5:17-19) (0) | 2017.07.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