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우리는 요즈음 졸업 시즌을 지나고 있습니다. 5월에는 대학교와 대학원 졸업이 있었고, 이제부터는 초, 중, 고등학교의 졸업식이 시작됩니다. 졸업 가운을 입고 서 있는 아이들을 볼 때면 어김없이 드는 생각이 있지요. "세월, 참 빠르다!"
아이들이 자라는 것은 참 빨라 보입니다. 갓난 아이가 금새 걸어다니고, 걸어다니던 아이가 얼마 후엔 뛰어다니고, 그러던 아이가 눈 깜짝할 사이에 비린내 나는 소년, 소녀가 됩니다. 그러다가 얼마 후엔 목소리가 변하고 얼굴에 여드름이 돋아납니다.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저의 시골 할머니는 그러셨습니다. "낳기가 어렵지, 낳아 놓으면 쉬워! 애들 크는 거 금방이여!"
한 생명이 잉태되어 태어나는 것은 저절로 되는 일 같지만 실은 우주가 창조되는 것 같은 기적입니다. 그 기적은 전적으로 '주어지는 은혜'입니다. 그 과정에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받아들이고 품고 기다리는 것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생명이 태어나는 것으로 다 되는 것은 아닙니다. 태어나는 것은 자체로 하나의 기적이지만, 그것은 또 다른 시작입니다. 태어난 생명은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그리고 정서적으로 건강하게 자라나야 합니다. 그것은 저절로 되지 않습니다. '어머니날 노래' 가사에 있듯이 "진 자리 마른 자리 갈아 뉘시고 손 발이 다 닳도록 고생하는" 손길이 필요합니다.
저는 지난 주일에 '거듭남'에 대해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거듭나는 것', '성령에 의해 다시 지어지는 것'혹은 '하나님에게서 나는 것'은 모두 같은 뜻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거듭나는 것은 하나님이 만들어내시는 기적입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다만 예수 그리스도 앞에 무릎 꿇고 진실하게 그분을 모셔 들이는 일뿐입니다.
거듭나는 것은 기적같은 일입니다만, 그것으로 다 되는 것은 아닙니다. 아이를 잉태하고 순산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 이치입니다. 새로 태어난 영적 생명이 건강하게 자라가야 합니다. 거듭난 새생명을 키우는 일은 많은 관심과 노력을 요구합니다. 아기를 키우는 일은 눈에 보이고 손에 만져지니 그래도 쉬운 편입니다. 거듭난 생명은 만질 수도 없고 볼 수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거듭났는지를 잘 모르는 것이고 또한 자주 잊는 것입니다. 그러니 거듭난 생명을 키우는 일에는 더욱 게을러집니다.
이 점에 대해 지난 주에 읽은 요한복음 3장에서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니고데모에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시면서 주님은 이렇게 덧붙이십니다.
육에서 난 것은 육이요, 영에서 난 것은 영이다. (요 3:6)
위로부터 거듭나는 것은 육신적인 태어남과는 전혀 다르다는 말씀입니다. 거듭난 것을 육신적인 감각으로 알 수는 없다는 뜻입니다. 육신적인 생명을 생각하듯이 영적 생명을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거듭난 생명에 대해 이해하려면 영적 세계에 눈을 떠야 한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내가 말한 것을, 너는 이상히 여기지 말아라. 바람은 불고 싶은 대로 분다. 너는 그 소리는 듣지만,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는 모른다.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은 다 이와 같다. (요 3:7-8)
영적 세계를 모르는 사람에게 있어서 거듭나는 것은 마치 '바람 잡는 일'처럼 보이고 '귀신 씨나락 까먹는 말'처럼 들리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성령이 임하셔서 우리 안에 새로운 생명을 창조하시는데, 그 사건은 마치 바람 부는 것처럼 언제 어디서 어떻게 일어났는지 모르게 일어납니다.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것을 보고 바람이 불고 있음을 아는 것처럼,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도 그렇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만들어 놓은 변화를 보고 성령으로 다시 지어졌음을 깨닫고 그렇게 믿는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영적 생명을 키우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그것은 마치 바람의 방향과 세기와 질을 예민하게 관찰하면서 경기를 하는 골프 선수와 같다 할 수 있습니다. 옛날로 치면, 돛을 달고 배를 조종하는 숙련된 어부와 같다 할 수 있습니다. 영적 생명을 키워가려면 영적인 차원에서 일어나는 변화에 예민해져야 합니다. 히브리어와 헬라어에서 '바람'이라는 단어를 '성령'에 대한 비유로 사용했다는 사실은 아주 의미 심장합니다. 거듭나는 것은 육신적인 생명과는 전혀 다른 것이며, 따라서 영적 세계에 눈 뜨고 영적인 바람 즉 성령에 예민해져야만 영적 생명을 키워갈 수 있습니다.
2.
오늘 우리는 렉셔너리를 따라 고린도후서 4장 16절부터 18절을 읽었습니다. 여기서 바울 사도는 '겉사람'과 '속사람'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겉사람'은 어머니의 모태에서 태어난 자연인 바울을 가리킵니다. 인간이면 누구에게나 주어져 있는 육신과 마음을 가리킵니다.
반면, '속사람'은 성령을 통해 믿는 사람 안에 태어나고 자라가는 새로운 존재를 가리킵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죽었던 '영'(spirit)이 살아나면서 새로운 자아 정체성(self-identity)이 형성됩니다. 전에는 자신이 한 남자와 한 여자의 하룻밤 사랑의 결과로 태어났다고 생각했는데, 거듭나고 난 다음에는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자신을 새롭게 바라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고 자신을 보니 자신이 달라 보이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나는...
1) 하나님께서 지으셨고,
2) 예수께서 구원하셨으며,
3) 성령께서 내주하시는 거룩하고 영원한 존재입니다.
과거에는 자신의 가치를 겉사람 즉 외모와 키와 지능지수와 운동신경과 노래실력 같은 것으로 따졌는데, 이제는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자신을 새롭게 보게 되었습니다. 오늘 읽은 고린도후서 4장에서 바울은 그것을 "질그릇 안에 담긴 보물"이라고 불렀습니다. 겉사람만 있다면 질그릇에 불과하지만, 하나님에 의해 새로 지어졌기에 보물이 된 것입니다.
겉사람만 있다면, 인생은 안개와 같고 이슬과 같다 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나고 보니 내 존재가 영원의 차원으로 옮겨졌고 내 안에 하나님의 영원한 씨앗이 자라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겉사람만 있을 때는 육신이 질그릇처럼 덧없어 보였는데, 거듭나고 보니 성령을 모신 거룩한 성전임을 깨닫습니다. 성령께서 지어주신 속사람으로 인해 부모님에게서 난 겉사람까지 영원하게 되었음을 깨닫습니다.
물론, 거듭난 사람도 그렇지 않은 사람처럼 한 번은 죽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 죽음은 겉사람만에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육신의 죽음은 하나님의 씨앗을 품고 있는 속사람을 해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집니다. (고후 4:16)
과거 번역에서는 "우리의 겉사람은 후패하나"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사도는 노쇠함으로 인해 겪을 수밖에 없는 자연적인 후패함과 함께, 복음을 전하기 위해 당하는 고난과 어려움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도가 복음을 전하기 위해 당한 고난은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로 인해 그의 겉사람은 항상 고난 속에 있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 바로 전에 사도는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방으로 죄어들어도 움츠러들지 않으며,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으며, 박해를 당해도 버림받지 않으며,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예수의 죽임 당하심을 우리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그것은 예수의 생명도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기 위함입니다. (고후 4:8-10)
여기서 사도는 가정법을 사용한 것이 아닙니다. 실제 상황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사방으로 죄어들어오는 상황에 처한 것이 수도 없이 많았고, 답답한 일도 여러 번 당했으며, 박해와 거꾸러뜨림을 헤아릴 수 없이 겪었습니다. 이런 일들을 겪으면서 바울의 육신과 정신은 점점 약해져 갔습니다.
하지만 바울 사도가 정작 강조하고 싶었던 사실은 그 다음에 나옵니다.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집니다.”
"날로"라는 번역은 좀 부족합니다. 원어는 "헤메라 카이 헤메라"입니다. 대부분의 영어 성경에서는 "day by day"라고 번역했는데, 우리 말로도 "매일 매일" 혹은 "하루가 다르게"라고 번역했더라면 좋았을 것입니다. 즉, 자신의 육신은 점점 낡아지고 늙어지고 장애를 겪기도 하지만 속사람은 하루가 다르게 새로워지고 자라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겉사람이 후패하는 것을 보아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3.
하루가 다르게 속사람이 성장하는 것은 저절로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속사람이 자라는 것을 가장 중요한 과제로 두고 그 일이 일어나도록 매일 매일 노력해야 합니다. 정신과 의사로서 많은 저서를 남긴 스캇 펙(M. Scott Peck)은 이제는 고전이 된 책 <The Road Less Traveled>(아직도 가야 할 길)에서 두 가지의 유명한 명제(statements)를 남겼습니다. "인생의 목적은 영적 성장에 있다"는 명제와 "영적 성장은 끝이 없는 길이다"라는 명제입니다. '영적 성장'이라는 말은 '속사람의 성장'을 뜻합니다.
실로 그렇습니다. 거듭나고 보면 압니다. 영적 세계에 눈을 뜨고 보면 압니다. 인생의 성패는 영적으로 얼마나 성숙하느냐에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것은 목사나 선교사 혹은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해당하는 말이 아닙니다. 누구에게나 해당하는 말입니다. 인간이 참 인간이 되는 것, 인간이 진정으로 행복해지는 것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로 쓰여지는 것--이 모든 것은 우리 각자가 거듭난 사람으로서 끝없이 자라감으로 이루어집니다. 개인 사업을 하는 사람도, 가르치는 사람도, 과학과 기술을 연구하는 사람도, 노동을 하는 사람도, 주부로 사는 사람도 그리고 은퇴한 사람도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거듭나고 거듭난 생명을 키우는 것이 가장 우선적인 인생의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마지막 숨이 다할 때까지, 매일 매일, 쉬임없이 자라가야 합니다. 속사람이 없이는 겉사람은 마침내 방전되어 버린 건전지처럼 되기 때문입니다. 반면, 속사람이 살아 있으면 겉사람의 후패함에 상관 없이 충만한 생명을 누리며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살 수 있습니다. 어디를 가든, 무슨 일을 하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가 됩니다.
잠시, 우리 자신을 돌아 보십시다. 우리의 겉사람도 하루가 다르게 후패하고 있는 것을 보십니까? 고린도후서를 쓸 당시에 바울 사도는 대략 지금 제 나이 쯤 되었을 것입니다. 당시에는 지금보다 평균 수명이 더 짧았으니 저와 같은 나이더라도 지금의 저보다 훨씬 더 나이 들어 보였을 것입니다. 50년 전만 해도 제 나이면 이미 노인의 그늘이 완연했습니다. 그렇기는 합니다만, 제게도 후패함의 과정이 점점 심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번에 교회 사진첩을 만든다 하여 새로이 사진을 찍었습니다. 새로 나온 사진을 보고 그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저는 제 머리카락이 빠지는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머리 숱이 적었다고 믿고 살았습니다. 이번에 나온 사진과 10년 전 사진을 비교하고는, 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제 머리카락은 빠지고 있습니다. 원래부터 숱이 적었던 것이 아니라 빠져서 숱이 적어졌습니다. 머리카락도 후패합니다.
겉사람의 후패함을 생각하니 기억나는 장면이 있습니다. 고 김수환 추기경께서 말년에 방송에 나와 대담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 때 그분은 노환으로 인해 죽음이 멀지 않을 때였습니다. 그분은 의자에 몸을 비스듬히 기대고 말씀을 하셨는데, 조금 지나자 입술의 한쪽에 침이 고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분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계속 말씀을 하시니 조금 지나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고 더 지나자 줄줄 흘러 내렸습니다. 참, 민망했습니다.
이렇게 되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한 대 fitness club에 다닌 적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꽤 나이 든 분이 운동 기구 위에서 날라다니는 것을 보았습니다. 나중에 여쭈어 보니 80이 넘은 분이었습니다. 그렇게 하여 후패함을 조금 늦출 수는 있겠지요. 하지만 후패함의 길을 영영 막을 수는 없습니다. 누구나 병에 들게 되어 있고, 노화로 인해 생기는 장애를 겪게 되어 있으며, 때로는 사고를 만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중에는 아직 젊어서 실감이 나지 않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어린이, 청소년 혹은 청년들이 갑작스러운 질병으로 무력화되는 일이 얼마나 자주 일어나는지요! 우리 교회에 속한 자녀들 중에도 하루 아침에 바이러스의
공격으로 인해 심장이 무력화된 청년도 있고, 전신마비 상태에 빠진 소년도 있습니다. 정말 장담할 수 없는 것이 겉사람입니다. 질그릇이 언제 어떤 일을 당하여 깨어질지 모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거듭나고 거듭난 생명을 키워가는 일은 겉사람의 후패함에 대한 가장 좋은 준비라 할 수 있습니다. 속사람이 날로 새로워지면,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지고, 자존심의 근거가 달라지고, 인생의 목표가 달라지며, 행복의 이유가 달라지며, 살아가는 이유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질병을 얻었다고 해서 세상이 끝난 것처럼 좌절하지 않습니다. 장애를 당하여 짓눌리지 않습니다. 사고를 당하여 무너지지 않습니다.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는 것 같은 상황에 몰려도 압도당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전부가 아님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은 그 무엇도 존재 이유의 '전부'가 되지 못합니다. 거듭난 사람의 존재의 이유는 겉사람에 있지 않습니다. 속사람에 있고 또한 하나님 나라에 있습니다. 영원한 것에 있습니다. 그렇기에 이 세상의 것들 중 어느 것을 잃을 때 슬퍼하고 아파하고 상심하기는 해도 낙심하는 데까지 이르지는 않습니다. 겉사람이 전부라면 이 세상의 것을 잃을 때 전부를 잃었다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진정으로 거듭났고 또한 속사람이 살아 있는 사람이라면 이 세상의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 이미 주어져 있음을 기억하고 현실에서 당하는 '겉사람의 후패'를 극복해 낼 것입니다.
4.
아울러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 사도가 '겉사람의 후패'를 말할 때, 자연적인 노화 혹은 삶의 여정에서 당할 수 있는 고난만을 생각하고 말한 것이 아닙니다. 그가 사방으로 죄어들어오는 상황에 처했던 것도, 답답한 일을 당했던 것도, 박해를 당했던 것도, 거꾸러뜨림을 당했던 것도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일하다가 당한 것이었습니다. 자신만을 위한다면 당하지 않아도 될 고난을 자초한 것입니다.
우리는 두 달이 넘도록 니카라구아의 전구 선교사님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분이 당한 일이 이와 같습니다. 그분을 담임목사로 모시고 싶어하는 대형 교회들이 미국 안에 여럿입니다. 그럼에도 그분은 니카라구아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알기에 그곳에서 헌신하셨고, 그로 인해 모함을 받아 구치소에 갇혀 있습니다. 더운 날씨에 좁은 구치소에서 오래 지내다 보니 이제는 건강에 이상 징후가 생기고 있다고 합니다. 더욱 기도해야 할 일입니다.
왜 바울 사도는 이런 일을 당해야 했으며, 전구 선교사님이 이런 일을 당해야 합니까? 벌써 5개월 가까이 북한에 억류되어 생사를 알 수 없는 토론토 큰빛교회의 임현수 목사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그분들이 그런 일을 당해야 했습니까?
거듭났기 때문입니다. 그분들 안에 있는 속사람을 따라 일하다가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분들은 겉사람이 당해야 하는 불편과 손해와 상처를 괘념치 않았습니다. 그분들에게는 겉사람의 안전보다 속사람의 열망이 더 중요했습니다. 바울 사도가 당시에 겪었던 일들은 전구 선교사님이나 임현수 목사님의 그것보다 더 심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는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고후 4:16)
여기서 "낙심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어떤 중요한 일을 할만한 열정을 잃어버리다"라는 뜻으로 사용되는 말입니다. 자연적으로 오는 노쇠함과 질병과 장애로 인해 낙심하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위해 헌신하다가 그로 인해 오해를 받거나 모함을 받아서 혹은 손해를 당하거나 박해를 당하여 혹은 심신이 지치고 힘들어서 그만 두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이 낙심입니다. 속사람이 날로 새로워지면 겉사람에 일어나는 일로 인해 낙심하지 않습니다. 계속하여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지금 우리가 겪는 일시적인 가벼운 고난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영원하고 크나큰 영광을 우리에게 이루워 줍니다. 우리는 보이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봅니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고후 4:17-18)
사도는 여기서 자신이 당해 온 고난을 "일시적인 가벼운 고난"이라고 말합니다. 일반인의 기준으로 볼 때 사도가 당했던 고난은 결코 가볍지 않았습니다. 또한 사도는 어디를 가나 그런 고난을 당해야 했습니다. 일생동안 고난이 떠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사도는 자신의 고난이 가볍고 일시적인 것이라고 말합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습니까?
사도는 그 비결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보는 데 있다고 암시합니다. "바라본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코페오'(skopeo)는 현재형으로서 "주목한다" 혹은 "묵상한다"는 뜻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본다"는 말은 "보이지 않는 것을 계속 묵상한다"는 뜻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이 무엇입니까? 자신 안에 심겨진 하나님의 씨앗을 말합니다. 자신 안에 주어진 영원한 생명을 말합니다. 자신을 에워싸고 있는 하나님 나라를 말합니다. 그것을 계속 묵상했기에 겉사람이 당하는 고난을 "일시적인 가벼운 것"이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준비하는 중에 "보이지 않는 것"을 오래도록 묵상하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마음을 모은 채로 눈을 감고 오래도록 제 안에 있는 속사람을, 제 안에 주어진 영원한 생명을, 그리고 저와 온 우주를 에워싸고 있는 하나님 나라를 골똘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오래도록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저 자신이 새롭게 느껴지고 온 세상이 달라 보이는 영적 신비감에 잠겼습니다. 기도를 끝내고 생각해 보니,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나의 묵상이 그동안 너무 "일시적이고 가벼운 것"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늘 "보이는 것"에 붙들려 살면서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이토록 가볍게 그리고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가니, 우리의 속사람이 자랄 수 없는 것입니다.
5.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난 주에 이어 다시 한 번 여쭙니다. 여러분은 거듭나셨습니까? 성령으로 다시 지음받았습니까? 하나님에게서 나셨습니까? 거듭남의 내적 증거와 외적 증거가 여러분에게 있습니까?
그렇다면 오늘 바울 사도가 말한대로 속사람이 매일같이, 하루가 다르게 새로워지도록 힘쓰시기 바랍니다. 보이는 것에만 붙들려 살지 말고, 보이지 않는 것을 더 자주, 더 오래, 더 깊이 묵상하도록 힘쓰십시오. 겉사람의 조건과 상황에만 마음 쓰지 말고, 여러분 안에 있는 속사람에 대해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 대해 더 마음을 쓰십시오. 그것이 진짜입니다. 겉사람의 조건에 속지 말고 속사람이 겉사람을 다스리도록 힘쓰십시기 바랍니다.
10
우리 교회는 끝없이 행사를 만들어 교인들을 몰아세우지 않습니다. 한국 교회와 군대가 공유하고 있는 믿음이 하나 있습니다. "다른 생각하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돌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인들이 교회에 철저히 묶이도록 줄기차게 돌립니다. 목회자도 교인도 그것이 잘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영적으로 자랄 줄로 착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목사와 교인들을 모두 빈껍데기로 만드는 속임수입니다. 교회에 행사는 많고 모이는 사람들은 많은데 정작 거듭남의 증거는 없는 참담한 결과로 이어집니다.
우리 교회는 스스로 찾아서 영적 성장을 이루도록 돕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모든 교인들로 하여금 '목사가 필요 없는 교인'이 되도록 세우는 것이 우리의 목표입니다. 모든 교인들이 스스로 알아서 영적 성장을 위해 힘쓰도록 돕기를 원합니다. 그럴 때 진정한 동역이 이루어지고 교회는 더욱 거룩한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그런 교인들이 많아질 때 사역을 기쁨으로 감당하는 사람들이 많아질 것이며, "상처 받았다", "지쳤다", "쉬겠다"는 말들이 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속사람이 성장하는 일에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무엇이든 찾아 보면 우리 교회 안에 다 있습니다. 뜨거운 기도와 찬양을 원하십니까? 토요일 오전 7시에 Youth Chapel에 오시기 바랍니다. 조용한 기도와 묵상을 원하십니까? 새벽기도회에 나오십시오. 진지한 성경공부를 원하십니까? 여러분에게 맞는 강의를 찾아가십시오. 마음을 터놓고 삶을 나누는 영적 교제를 원하십니까? 속회가 그런 모임이 되도록 힘쓰십시오. 누군가를 위해 섬기고 싶습니까? 지역 사회의 어려운 이웃을 섬기는 사역팀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도움을 찾아서 속사람이 날로 새롭게 되도록 힘쓰시기 바랍니다. 날로 새로워지는 영적 능력으로 숨이 다하는 순간까지 기쁨으로 섬기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아직 거듭남의 기적을 경험하지 못한 분이 있습니까? 속사람은 없고 겉사람으로만 살아가고 있습니까? 다시 권면 드립니다. 더 이상 미루지 마시기 바랍니다. 겉사람만으로 사는 인생처럼 희망없고 불쌍한 것은 또 없습니다. 겉사람이 후패하고 무너져내릴 때 여러분의 모든 것이 무너지도록 내버려 두지 마시기 바랍니다. 부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심으로 거듭나는 기적을 위해 주님 앞에 겸손히 무릎 꿇으시고, 속사람이 날로 새로워지는 신비를 경험하게 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주님,
겉사람만으로는 살 수가 없습니다.
겉사람만으로는 희망이 없습니다.
다시 한 번 구합니다. 거듭남의 은혜를 주소서.
속사람을 자라게 하소서.
속사람을 따라 살아감으로
겉사람의 후패함을 두려워하지 않고
주님의 나라를 위해 살게 하소서.
날로 새롭게 하시고
늘 기뻐하게 하시며
항상 감사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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