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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기독교적인 유신론으로서 삼위일체론 이해

하나님아들 2012. 7. 25. 11:56

 

 

기독교적인 유신론으로서 삼위일체론 이해

 

오  영  석*

 

 

 

I. 서  론 : 삼위일체론의 재론의 의미

 

기독교 신학은 시대의 질문과 도전에 직면하면서 선교를 하고 있는 교회를 위한 학문이다. 그것은 교회로 하여금 교회되게 하는 학문적인 봉사를 한다. 교회가 선교의 사명을 바르게 수행하려면 학문적 신학의 안내를 반드시 받아야 한다. 학문적 신학은 성서 안에서 다양한 색채들로 표현되었을 뿐이 아니라, 때로 상충되게 보이는 듯한 계시 증언들의 내용과 배경들을 바르게 분석하고 그것들을 성서의 전체적인 맥락과 역사적인 교회의 해석 전통을 참조하여 새롭게 바르게 조명하려고 한다. 그래서 신학은 교회가 그때그때 증언하고 대답해야 할 신앙의 근거와 내용을 분명하게 제시하고 해명하고, 시대의 새로운 질문들에 대하여 새롭게 답변할 준비를 한다. 신학은 이 점에서 성서의 내용과 의미를 현재의 상황으로 옮겨오는 해석학적인 과제를 피할 수 없다. 그것은 단지 옛 사상과 내용을 오늘의 사람들이 이해하도록 해석하는 것만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현실의 근본적인 변화를 지향한다.
신학이 해명하는 기독교 신앙의 내용은 비신도들에겐 공개될 수 없는 비밀 제의(祭儀)를 통하여 전수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공공연한 가르침과 공개적인 증언을 통해서 전파되었다. 그러므로 초대 교회의 교부들은 밀의율(密儀律)로 전파된 이교 신비 종파들과 달리 기독교 신앙을 당당하게 공공연히 역사의 심판대 앞에서 선포하는 희망의 증언자로 등장하였다. 그 기본 원리와 실천 규범이 벳전 3장 15절에 정립되어 있다." 여러분 안에 살아 있는 희망에 대하여 설명(logos)을 요구하는 사람들에겐 언제라도 답변(apologia)을 할 차비를 하고 있으시오." 이 문장은 희랍 로마 문화권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도전과 역설이었다. 그들에게서 <아폴로기아-답변>은 고소된 당사자가 법정에서 합당한 근거를 제시하면서 관련된 사항에 대하여 해명하는 공적인 답변을 뜻한다.
위에서 언급된 기독교적인 희망은 성서에 증언된 하나님의 역사적인 구원의 활동에서 발원한다.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과 모든 경건한 자들의 희망은 계악에 충실하신 하나님이 자신의 전적인 능력으로 이루시는 해방하는 구원의 활동 안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들은 모든 경우에서 의로우신 하나님 자신이 우주적인 주권을 전적으로 행사하시어 이미 시작된 구원이 개인적으로 민족적으로 전우주적으로 완전히 성취되기를 희망한다. 이 희망은 역사적으로 성취된 하나님의 약속에서 확증되고 거기서 현실성을 담보하고 있으므로, 그것은 단순한 유토피아적인 희망과 다르다. 이 역사적인 성취의 경험은 현재에서 만족하지 않고 그것을 넘어서 모든 것을 새롭게 하는 우주적인 희망으로 나간다. 지금 이미 일어난 성취의 현실성은 더 큰 희망을 기대하게 한다. 그 성취는 약속과 성취라는 고착된 법적인 도식에 관심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성취는 몰트만이 희망의 신학에서 밝힌 대로 이미 성취된 약속에 대하여 전적으로 놀라운 것, 예기치 못한 새로운 계기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약속과 약속하는 하나님을 도외시할 수 없다. 그 성취는 약속하는 하나님의 자유로운 신실에 의존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약속이므로, 하나님은 그 약속을 성취하는 주체자로 간주되어야 한다.
초대 교회는 당시의 지배적인 세계관이었던 스토아 철학에서 생각할 수 없던 희망을 증언하고 고백했다. 스토아 철학은 인간이 이성을 현혹시키는 감정의 지배에서 벗어나 영원토록 대우주를 지배하는 법칙에 알맞게 살아가는 불요불굴의 인격을 강조했다. 그래서 엄격한 금욕주의가 예찬되고 인간은 냉정한 태도로(apatheia) 우주질서에 순응하면서 모든 열정이나 희망을 버려야 한다고 했다. 여기에서 새로운 미래와 희망은 생각될 수 없다. 이렇게 볼 때 바울이 비기독교인들을 희망이 없는 사람이라고(뎃전 4 : 13)지칭한 것은 정당하다고 할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단호히 희망을 고백하고 그것을 신앙의 삶으로 표현했기 때문에 당시에 주목을 끌게 되고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이 희망의 근거는 그 시대정신에 대한 도전으로서 스토아 철학자들이 추구하던 불변의 세계가 아니었다.
그것은 이 세계 안에서 일어난 전대미문의 구원 사건이었다. 그 사건은 미래에 전 우주와 전 인류에게 일어날 사건이 앞당겨 일어난 희망의 사건이다. 그 희망의 내용과 대상은 바로 십자가에 처형된 예수를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예언자들의 하나님이 신적인 영광의 생명으로 부활시켜 전 인류의 구원의 주로 삼았다는 것이다. 예수는 죽음의 지배를 이기고 영광의 생명으로 부활하여 하나님의 왕권과 영광에 참여하고 전 인류와 우주에 대한 우주적인 통치권을 행사하고 있다. 부활한 그는 온갖 상상을 초월하고 인간의 이해와 인식의 지평이 미칠 수 없는 그런 영역에서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살아 계신다.
이 예수는 하나님의 그리스도로서 그를 주로서 믿고 세례받은 사람들 안에 말씀과 영으로 현존하신다. 여기에 우리의 희망이 있다. 왜냐하면 죽음을 이긴 그분을 신뢰하고 따르는 사람들도 삶의 최종적인 한계인 죽음에서 해방되어 신적인 영원한 삶을 선물로 얻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기에 "우리의 희망"이 있다고 초대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그의 우주적인 지배권을 확신하고 희망을 표현하고 증언하기 시작했다. 그 희망은 인간의 모든 희망에 거슬리는 희망이고 인간의 희망 자체를 변화시킨다. 이것이 기독교의 새로운 출발이다.

기독교 신앙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킨 하나님을 믿는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이며 그를 일으킨 영원한 하나님과 관련하여 그는 누구인가? 바울이 증언한 것처럼 하나님의 깊은 사정을 통달하고 그리스도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인간의 마음에 부으고 희망을 갖도록 하는 성령은 누구인가? 요한복음에서 증언된 것처럼 그리스도를 영광스럽게 현재화하고 그와 연합을 창조하는 성령은 누구인가? 성령은 하나님 자신과 그리스도 예수와 관련하여 누구인가? 기독교의 예배에서와 성례전과 축도와 기도에서 창조자 하나님 아버지와 화해자와 구원자인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을 찬양하고 경배한다. 여기에서 마치 서로 다른 세 신들이 서로 연대하여 활동하기도 하고 중첩된 사역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기독교적인 신앙이 고백하는 하나님의 실재와 정체성에 관한 문제이다.
초대교회는 하나님의 계시 사건을 증언하는 성서의 텍스트를 주석하여 수많은 논쟁과 투쟁을 거쳐 삼위일체 교의를 창출했다. 신학자들은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세 인격은 유일하고 동일한 신적 본질(homoousios)>이라고 해명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신성은 하나이며 동일한 본질이다. 따라서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성령은 동일한 신성, 능력, 영광과 존엄, 신적 본질과 실체를 갖는다. 그러나 그 신적인 인격에서 독자성을 갖는다. 어거스틴이 밝힌 것처럼 성부, 성자. 성령은 실체, 본질, 능력에서 한 분이다. 이 한 동일한 신의 본질 안에 세 인격이 있다. 한 분 하나님 안에 세 인격들이 있다. 바르트는 인격의 상실을 우려하여 세 존재 양식들이라고 새롭게 표현한다.  교회는 전통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하고 신학은 신앙의 근본 문제를 해명해야 하기 때문에 삼위일체 교의를 침묵하면서 넘어갈 수 없다.
칼 바르트에 의하면 교의(Dogma)는 복음의 메시지에 적절하고 일치되는 하나님의 본질과 구원의 역사에 대한 바른 진술이다. 삼위일체 교의는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수 세기를 걸쳐서 모든 성서에 증언된 하나님을 바르게 인식할 뿐만 아니라, 교회의 신앙과 선포의 내용을 바르게 규정하기 위하여 깊이 반성하고 작성된 고도의 신학적인 산물이다. 그것은 성서에서 생생하게 증언되고 교회의 삶에서 구체적으로 경험되고 확증되는 하나님의 구원과 은혜의 활동에 대한 신앙의 반성적인 대답의 산물이다. 그것은 신앙의 삶에서 경험되는 하나님의 자유로운 은혜의 신비에 대하여 교회가 공동체적으로 고백하고 찬양하고 감사하는 내용을 금강석과 같은 끌로 다듬어 가장 정교하게 압축하여 표현해 놓은 예술작품이다. 신앙의 경험에는 두가지 면이 함께 강조되어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는 모든 고난과 희망의 경험과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나누는 고난 아픔 희망이다. 하나님이 인간과 함께 가지는 경험 속에서 인간의 고난, 희망, 자아가 인식될 때 하나님과 함께 가지는 인간의 역사가 바르게 인식될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 신학은 하나님과 신앙의 경험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막연하게 말할 수 없고 성서의 증언을 기초로 하고 역사적인 교회의 신학적인 해명을 참조하고 오늘의 문제와 도전을 바라보면서 구체적으로 명확하게 진술해야 한다. 하나님의 역사적인 계시활동을 증언하는 성서적인 근거에서 삼위일체론의 교의는 가능하고 필요하게 된다. 이러한 역사적 삼위일체론의 원천이 분명하게 증거되지 않고 그것이 필수적으로 인식될 수 없다면 기독교적인 삼위일체론은 불확실한 추론일 뿐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슐라이에르마허가 말한 것처럼 기독교적 신앙인의 자의식들과 신앙의 경험을 결합해놓은 것일 수도 있다. 그는 인간의 주관적인 경험의 관점에서 교의학을 신앙론으로 변형시켰으므로 그에게서 삼위일체론은 추상적 혹은 주관적 일신론으로 변형되었다. 그러면 삼위일체론은 신앙인의 자의식의 표현이기에 삼위일체론은 불필요 할 것이다. 그러므로 성서에서 해방과 구원의 주로서 자신을 계시하는 하나님을 바르게 인식하려면 성서의 증언이 지닌 삼위일체적인 원천과 그 빛이 흐리지 않도록 신학은 유의하고 그것의 의미를 새롭게 천명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삼위일체 교의의 가능성과 필연성을 제공하는 성서적인 근거를 먼저 살펴보자.


II. 기독교의 유일신론으로서 삼위일체론의 성서적 배경
 
1. 계시의 행동에서 유일한 하나님

구약과 신약은 전체적으로 유일한 하나님을 증언하고 한 분 유일하신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신앙을 분명하게 표현한다. 성서는 실천적으로 이론적으로 유일신 하나님의 신비로운 지배권과 그에 대한 신앙을 표현한다. 특히 BC 6세기 바벨론 포로생활 이후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아 들으라! 야웨는 오직 한 분이신 우리의 하나님이다"라는 신앙고백을 하루에 세번씩 바쳤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서 유일한 분이라는 것은 다음 3중의 의미를 지닌다. 주변의 다른 종교들과는 달리 이스라엘에게선 하나님 곁에 다른 신들이 존재하지 않는다. 개인의 종교생활에서와 국가의 제의에서 이스라엘은 결코 신상이나 부적, 마술로써 신들을 섬기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셈족의 중요한 종교들에서 발견되는 여성신들이 야웨 하나님의 상대자로 나타나지 않는다. 히브리어에선 "여성신"이라는 단어조차 나타나지 않는다. 페르시아 종교에서 나타난 것처럼 야웨 하나님과 경쟁하는 악신도 이스라엘에선 나타나지 않는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조장들의 하나님,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은 유일한 분이다. 그 곁에 더 높고 동등하거나 더 낮은 다른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만물의 창조자인 최고, 최상의 존재로서 모든 것을 전적으로 지배하고 이끌고 보전한다. 그는 모든 선을 선사하고, 정의를 원하고 낮은 자를 이끌어 높이고 노예를 해방하는 역사적인 주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이짚트의 억압에서 신음하던 종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낸 해방의 하나님이다. 하나님의 해방의 행동에서 이스라엘의 종교는 해방의 종교, 출애급의 종교, 구원의 종교로 나타난다. 그것이 제 2이사에선 만물을 위한 우주적인 평화의 공동체로 나타난다. 유일한 해방의 하나님은 인간의 전적인 헌신과 충성과 사랑과 신뢰를 기다리면서 인간의 사회가 정의와 사랑이 지배하는 공동체가 되기를 바란다. 그런 점에서 유일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초월적인 차원과 수평적인 차원을 포함하는 역동적인 변혁의 신앙 공동체를 지향한다.
유일한 하나님 신앙은 모든 거짓 신들과 거짓된 신앙의 근거를 뒤엎는다. 그것은 자연적인 힘들과 모든 정치적인 힘과 이념들을 신격화하는 것을 거부한다. 그것은 권력자를 신격화하여 신성불가침 하게 절대시하는 정치의 우상 숭배를 배격하고 전복시킨다. 현대인은 돈과 권력과 과학과 국가를 신처럼 경배하려 한다. 그로써 인간은 존엄성과 자유를 상실하고 돈과 권력, 과학과 유사종교의 노예로 전락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야웨 하나님에 대한 바른 신앙은 모든 권력과 이념의 한계를 정해주고 인간에게 새로운 자유의 지평을 열어준다. 여기서 E. 블로호의 견해는 적중된다. "출애급의 하나님의 본질은 전적으로 다르다. 그는 예언자들에게서 지배자들과 아편에 대한 적대감을 드러냈다. 그는 이교들의 신들처럼 지역과 백성에 매인 고정된 특성을 지니지 않았다. 그는 존재의 본질로서 미래를 지니고 있는 해방의 신 약속의 신이다. 모세의 하나님은 가나안을 약속하는 하나님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하나님이 아니다." 그는 해방하는 주이시고 역사를 이끌고 창조자이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계약의 법을 주시는 자로서 그의 백성과 계약을 체결하는 자이고 선악의 심판자이고 만물의 보전자이며 완성자이다.
이 엄격한, 살아계시는, 정열적인, 타협없는 유일한 해방의 하나님과 그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모든 백성들 중에서 이스라엘의 특징이고 모든 백성들에 대한 이스라엘의 선물이다. 기독교적인 삼위일체론은 이 유일한 하나님 신앙에서 깊이있게 논의되어야 한다. 사도들과 초대 교회의 신도들은 거의 구약의 유일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창조자 하나님과 본질의 일치를 강조하고 박해를 받으면서 그것을 선포하게 된 신학적인 배경은 주목되어야 한다.
 
2.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

예수는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잘 알려진 한 분 유일한 하나님의 주권을 선포했다. 그는 인간의 얼굴을 지닌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하나님의 이해를 순수하게, 철저하게 파악하고 그의 은혜스러운 지배를 선포하고 자신의 삶과 가르침과 선교활동을 통해서 그것을 현실화했다. 여기서 성서에서 다양하게 표현된 인간의 얼굴을 지닌 하나님의 활동을 말한 신인동형론들(Anthropomorphismen)은 하나님을 인간화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가까이 오고 인간과 밀접하게 관계하면서 역동적으로 활동하는 분으로서 표현하려는 것이다. 철학의 관점에서 추상적으로 그 본질이 규정된 신은 인간과 관계하지 않는다. 그 하나님은 인간을 도울 수 없다. 그러나 성서의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인간과 만나는 하나님은 인간을 돕고 해방하기 위하여 고난 속에 있는 인간과 함께 아퍼하면서 그와 만난다. 그래서 인간은 이웃을 만나듯이 그의 얼굴을 비추는 하나님의 얼굴과 보게되고 그를 인도하는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말을 걸고 인간의 말을 듣는다. 이것은 성서의 하나님의 인격적인 관계를 형성하고 그 관계 속에서 인간과 대화하기 때문이다. 이점에서 골비쳐는 신인동형론의 표현은 성서의 인격적인 하나님을 표현하는 유비적인 성격이라고 적절하게 말한다. 성서의 하나님은 본질에서 인간의 얼굴을 지닌다. 그는 인간을 위한 인간의 하나님, 인간과 함께 하는 살아계신 분이기 때문이다.
삼위일체 교의는 예수와 관계할 때 발생된다. 예수와 관계하면, 우리는 피할 수 없이 예수가 아버지라고 부른 하나님과 관계하고 그의 탄생과 선교와의 관계에서만 아니라, 복음의 이해와 선포와 증언에서 성령과 관계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예수의 참된 아버지는 이스라엘의 조상들의 아버지이며 예언자들을 파견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다. 그러나 예수는 이스라엘의 종교지도들과 달리 철저하게 새롭게 더 잘 하나님을 이해했다. 예수에게서 하나님은 남성적 독단이나, 엄격한 율법의 신이 아니다. 그는 전제적인 폭군도, 만사를 상부에서 지시하고 처리하는 제왕이 아니다. 그는 인간의 고통에 무관심하고 적들을 격파하여 자신의 계획을 가차 없이 이루고야 마는 무자비한 전능자가 아니다. 그는 불안, 공포, 지배욕, 자기 합리화의 투사의 산물이 아니다. 경건하게 정통교리와 계율을 내세우며 인간의 건강한 상식까지 거부하는 보수-정통주의자들의 하나님은 결단코 아니다.
예수의 하나님은 요구하지 않고 먼저 베푸시고, 억누르지 않고 기를 펴도록 북돋우시고, 의인 보다 죄인에게 관심을 기울이신다. 따라서 그는 처벌 대신에 용서를, 저주 대신에 축복을, 법의 실행 대신에 제한 없는 은총을 베푸신다. 유산을 받아 집을 나가 탕진한 아들을 효자 보다도, 창녀와 이단자를 그들의 심판자 보다 우대하신다. 예수의 하나님은 약자. 병자, 가난한 사람, 억압을 당한 자, 우는 자의 편에 서서 그들의 위로자, 치료자, 해방자, 구원자가 된다. 예수는 새로운 하나님을 내세운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이해에서 혁명을 일으킨 것이다. 큉이 지적한 것처럼 맑스, 니체, 프로이트도 예수의 하나님을 무서워하거나 거부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은 인간을 희생하여 하나님을 주장한 것도(포이에르바하), 지배자들의 신도, 거짓된 위안을 안겨주는비뚤어진 신도(맑스), 궁지에 몰린 가련한 선악윤리의 도덕가의 하나님도(니체), 폭군적 초자아, 환상적 유아기의 욕구의 투사도(프로이트)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에게서 하나님은 모세의 율법, 성전, 안식일, 종교, 윤리를 초월하여 사랑과 용서를 행사하는 은총의 하나님이다.
예수는 자신의 특유한 하나님 체험을 토대로, 하나님과의 밀접한 친분관계에서 하나님을 <압바>라고 부르고, 그렇게 하나님을 달리 새롭게 이해하고 가르쳤다. 은총의 하나님의 빛에서 율법의 본래적인 의미를 은총의 법으로 새롭게 이해된다. 유대인이 생명처럼 여기는 신성불가침적인 율법과 성전의 제의를 거슬러 예수는 자신의 선교와 활동이 하나님의 권위와 뜻에 전적으로 일치한다고 믿었다. 그는 율법 위에 올라서 하나님의 고유권한에 속하는 죄와 용서의 심판자 역할까지 행했다. 이 예수의 배후에 과연 이스라엘의 하나님 자신이 실제로 활동하는가? 하나님의 고유권마저 참월한 그의 전권주장(全權主張)은 정당한가? 그것은 신성모독이 아닌가?
그러므로 예수의 전권주장에서 참된 유일한 하나님이 문제될 수 밖에 없다. 이스라엘의 한, 유일한, 참된 하나님의 이름과 권능으로 말하고 행동하고 십자가에 처형되고 부활하게 된 이 예수와 하나님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 만일에 예수의 전권주장처럼 이스라엘의 참된 하나님 자신이 예수의 모든 말과 행동과 치료와 선교사역에 전적으로 현재했고, 하나님 자신이 그를 통하여, 그 안에서 인간을 만났고, 그와 일치했다면, 하나님으로부터 예수는 전적으로 달리 이해된다. 동시에 예수로부터 하나님이 누구이며, 그의 신성과 사랑의 내용이 무엇인지가 새롭게 드러나고, 인간의 얼굴을 지닌 하나님의 참된 형상이 새롭게 나타난다.
이것이 예수의 하나님 관계를 묻는 기독론의 문제이다. 여기서 신 문제는 가장 깊은 차원에 이른다. 기독교와 유대교, 마호�교는 구약의 유일신 하나님 신앙을 공유하지만 이 기독론의 문제에서 3종교는 서로 갈라진다. 유일신 신앙에서 기독교적인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신성과 동일한 본질을 지닌 하나님으로 믿고 그것을 고백하느냐에 있다. 기독교의 신앙인에게서 나사렛 예수는 참된 하나님의 현실적인 계시이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체이고 그의 본체의 모습이다.(히 1 : 3) 이런 의미에서 예수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래서 요한복음에서 하나님과 예수 사이의 계시의 일치성을 명백하게 표현한다. "아들을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본 것이다."(요 14 : 9, 12 : 44-45)
이것은 다음을 의미한다. 신약의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고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다. 신약의 하나님은 자신을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에서 계시했을뿐만 아니라, 이제 유일한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말과 의지와 삶과 행동, 죽음과 부활에서 자신을 전적으로 계시하였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육신하였다. 예수의 존재와 행동, 삶과 가르침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의지와 신성이 인격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래서 요한은 그를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아니라 간접으로 하나님과 같게 주와 하나님으로서 표현한 것이다. 바울은 이것을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그와 화해하게 하셨다"라는 말로 표현한다.(고후 5 : 18) 예수는 하나님 아버지만 할 수 있는 죄를 용서하므로서 성부와 동일한 신적인 권위를 행사한다. 요한일서에 의하면 그는 참 하나님이고 영생이다.(요일 5 : 20) 이 의미에서 우리는 325년의 니케아 회의의 형식을 이해할 수 있다. 예수는 "하나님에게서 유래하는 하나님이고, 빛에서 유래하는 빛이고, 참된 하나님에서 유래하는 참된 하나님이고 ... 아버지와 한 본질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적인 하나님 신앙에서 기독교적인 것은 정의, 사랑, 은총이 아니다. 그것은 구약에서도 말해진다. 유일한 하나님 신앙에서 기독교적인 것은 하나님의 본질과 동등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다. 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신앙인들은 이스라엘의 백성들을 부르시고 선택하는 하나님을 바르게 새롭게 인식하고 이 하나님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자신을 그들에게 계시한 것을 인식하고 믿는다. 신약은 예수 그리스도를 떠난 다른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기독교적인 신앙은 이 예수 그리스도를 어떤 종교적인 가르침이나 정치적인 메시아니즘과 신들의 형상들과 혼동하는 것을 거부한다. 바울의 표현에 의하면 하나님 신앙에서 기독교적인 것은 하나님과 원수인 죄인 인간을 하나님과 화해시키기 위하여 십자가에 처형되고 부활한 나사라셋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의 그리스도이며 산 자와 죽은 자들의 주님이라는 것이다. 그 안에 하나님의 모든 신성이 충만하게 거한다. 그의 대속의 죽음을 통하여 은혜로 하나님과 화해된 우리는 이제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게 된 것이다.(골 1 : 19, 롬 5 : 3)
이런 관련에서 칼빈은 기독교적인 신앙의 내용을 기독론의 빛에서 바르게 말했다.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와 동일한 자비와 인자한 마음을 찾으려면 우리는 우선 그리스도를 보아야 한다. 우리가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구하려면 그리스도 이외는 다른 곳이 없다. 그만이 생명의 샘이고, 구원의 닻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새로운 생명은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찾게 된다." 유일한 지존자 하나님을 떠나서 구원도 생명도 없다는 이스라엘의 신앙의 진리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가장 완전하게 인격적으로 현실화되었다. 누구든지 야웨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는 말씀은(요엘 2 : 32)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것에 통합되고 일치되었다.(롬 10 : 9-13) 그러므로 하나님게 속한 것은 무엇이든지 그리스도에게 속한다. 이것이 요한복음에서 분명하게 표현되었다.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요 17 : 3). 여기서 그리스도 자신인 하나님 아버지와 동일하게 영생과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으로 표현된다.
우리는 이러한 내용을 바울의 신학을 통하여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다. 유대인에게 구원의 길은 율법의 준수에 있다. 그러나 율법을 철저하게 상대화 한 예수가 율법의 파괴자로 단죄되고 처형되었다. 율법의 수호가 구원의 길이었다면 예수의 처형과 죽음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율법을 주신 하나님이 율법 파괴자로 처형된 그를 죽은 자 가운에서 부활시킴으로 예수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입증한 것이다. 그래서 예수의 부활사건으로 구원의 길로서 간주된 율법의 효력은 끝났다.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시는 구원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서 새롭게 시작되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 자신이 살아 계신 구원의 주로서 현재하고 다스리고 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이 예배하고 기도하고 찬양할 때,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듯이 그리스도를 그렇게 찬양하고 경배한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러한 새로운 인식과 고백은 그의 부활사건 안에 기초된다. 초대교회는 다양한 방식으로 그의 부활사건을 시공 안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증언한다. 그 부활은 하나님 자신이 주권적인 능력으로 세계와 인간의 역사의 구조와 조직망을 전적으로 꿰뚫고 성취한 사건이다. 그것은 역사의 종말이 돌입한 사건이며, 하나님의 현현의 사건이다. 그것은 전인류를 위한 구원사건으로서 그리스도의 본래적인 역사가 열려진 사건이다. 그러므로 예수는 초대 교인들에겐 지나간 역사의 흐름 속에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그의 인격, 그의 사역과 의미는 시간과 역사를 초월하여 전인류와 우주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결정적인 영원한 역사의 지평 속에서 파악되었다. 예수의 구원의 의미는 초대교회가 구약-유대적인 혹은 헬레니즘적인-희랍적인 언어로 표현한 것처럼 메시야, 그리스도, 주, 인자(人子),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존칭으로 나타났다. 예수의 죽음 부활 승천에서 시대가 전환되었고 하나님의 구원은 개시되었다. 하나님의 지배는 사건이 되었다. 그러므로 예수의 제자들은 랍비들과 철학자들의 제자들처럼 예수의 가르침의 유산과 말들을 반복할 수 없었다. 예수 자신이 이제 케리그마의 내용이 되었다. 그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행동이, 하나님의 역사가 완전하게 나타났고 충실하게 성취되었다고 확인되고 믿어졌기 때문이었다. 바울의 모든 신학사상들도 여기에서 근원된다.
그러면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그는 하나님과 유사한 분인가? 동질성을 지닌 분인가?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계시는 하나님 자신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경배하는 것은 유일신론적인 하나님의 존재에 부합하는가? 바울이 성부와 성자에게서 동일한 축복와 평화를 기원하는 것은 어떻게 이해되는가?(롬 1 : 7, 고전 1 : 3, 고후 1 : 2, 갈 1 : 3) 여기에 성부와 성자의 동일한 본질과 인격의 구별성과 상호 관련성이 나타난다. 그러기 때문에 구약에서 주로서 계시된 성부의 존재와 구원의 사건은 철저하게 그리스도론적으로 인식되고 해석되어야 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와 업적도 성부 하나님과의 관계 없이 이해될 수 없으므로 신론의 빛에서 천명되어야 했다. 이것이 삼위일체 교의 의 문제이고 이 문제에 대한 해답에서 기독교적인 신앙의 바탕과 핵심이 드러난다. 하나님 자신이 예수 안에서 현재했고 활동했다. 하나님의 역사가 여기서 일어났다. 그의 인격과 업적에서 하나님이 인간에 전적으로 나타났다. 하나님이 여기서 이전의 모든 계약이 역사를 확인하고 성취했고 그의 궁극적인 종말론적인 결단을 내렸다고 신약은 전체적으로 증언한다. 먼저 그리스도론에서 다음에 성령론에서 자란 삼위일체론은 이 증언을 해석하는 과제를 수행한다.

3. 성령 안에서 하나님

사도신조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 것과 제3째 조항에서 성령과 교회를 믿는다고 분명히 성령에 대하여 표현하고 있다. 오늘날 카리스마 운동과 교회갱신-성장 운동에서 성령에 관한 놀랍고 신기한 일들이 보고되지만 성령의 본질과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깊이 논구되지 않는다.
성령은 누구인가? 어떻게 그의 놀라운 사역을 이해할 수 있는가? 성령은 신적인 인격을 지닌 존재인가? 성령은 위대한 신적인 힘을 가진 신비한 힘인가? 성서 자체에서 성령의 활동은 매우 역동적이면서 다양하게 나타나기 때문에 성령의 존재와 활동을 파악하기가 어렵다. 신비롭게 작용하는 성령의 존재와 활동의 상충된 이해문제로 교회는 분렬되고 이단으로 전락하는 종파도 많이 발생하였다. 우리는 성서의 전체적인 증언에 나타난 성령을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

1) 구약에서 하나님의 영은 창세기 1장 2절에서 나타난 것처럼 말씀과 함께 하나님의 창조에 참여하고, 하나님의 계속되는 창조사역에 참여한다. 영은 생명을 선사하는 능력과 생명을 보전하고 소생시키는 존재로서 우주와 세계의 모든 생명체를 생명체가 되게 한다. 이 영은 일상생활에서 예측할 수 없이 갑자기 나타난 초자연적인 힘으로 보여지기도 한다. 나무들을 쓰러뜨리고 해일을 일으키는 폭풍의 영향을 느낄 수 있듯이 구약에서 하나님의 영은 폭풍처럼 구체적으로 경험되고 느낄 수 있게 표현된다. 하나님의 세찬 영은 바닷물을 쌓이게도 한다.(출 15 : 8, 15 : 10) 그래서 이스라엘은 홍해를 통과할 수 있었다. 이사야 27장 8절에 의하면 하나님은 적들을 벌하기 위하여 열풍(영)을 부우시어 그들을 쫓아버렸다. 그의 영이 바다물을 일으키자 바다가 그들을 덮어버렸다. 영은 바람을 불게 하여 물이 흐르게 하고 생명을 꽃피게 하고 아름답게 보전하기도 한다. 자연계에서 보여지는 이러한 놀랍고 신비로운 영은 생명을 선사하는 힘으로서 작용하기도 하고 하나님의 구원과 해방의 역사를 이루기 위한 목적으로 활동한다. 그러나 바람 자체는 하나님의 영이 아니다. 영이 바람으로 표현되는 것은 영의 임재와 활동이 바람처럼 강력하게 혹은 자유롭게 느껴지고 나타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영은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역사하기도 한다.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영의 능력이 나타나고, 말씀 안에서 영의 능력이 현실적으로 작용한다. 시편 33편에 의하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늘이 펼쳐지고 그의 입깁(영)으로 별들이 돋아난다. 하나님이 영을 불어넣으시면, 생명체들은 소생하고 영을 거두시면 죽어서 먼지로 돌아간다.(시 104 : 29-30, 146 : 4 , 욥 34 : 14) 생명이 소생하는 곳에 하나님의 영이 언급되고 죽음에 관해서 말해질 때도 하나님의 영의 활동이 함께 말해진다. 욥이 생명의 유래를 강조하고 생명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할 때, 하나님의 영에 대하여 말한다. 에스겔의 환상에서 나타난 것처럼 마른 뼈들이 다시 소생하고 살아나는 것은 하나님의 영이 새 생명을 주입하기 때문이다.(겔 37 : 1-14) 하나님이 그의 영을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거하시게 하면 그들은 살게 된다. E. 슈바이쳐에 의하면 이스라엘은 자연계 안에서 엄청난 힘으로서, 생명의 원천으로서 작용하는 하나님의 영을 인식하기 전에 이미 예언자들의 특이한 경험에서 하나님의 영의 활동을 발견하였다.
하나님의 영은 사사들의 구원의 활동에서 나타난 것처럼 거센바람처럼 그들을 압도하여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게 한다. 그래서 기드온(삿 6 : 34), 입다(삿 11 : 29), 삼손(삿 13 : 25, 14 : 6, 19, 15 : 14)들은 불가항력적인 영이 힘에 사로 잡혀 해방의 역사를 성취하게 된다.
예언자들의 체험에서 볼 수 있듯이 하나님의 영은 예기치 않게 임재하여 어떤 사람을 사로 잡아 영감을 주고, 황홀경에 빠지게도 하고,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으로 무장시켜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선포하도록 역사의 현장으로 파견된다. 예언자들이 하나님의 영을 체험할 때, 그들은 물질적 제약과 시공간의 한계와 육체와 영의 대립을 초월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에 붙잡히고 감동된 예언자들은 모든 난관을 극복하면서 시대정신과 타협하지 않고 하나님의 정의와 생명의 역사를 증언하고 하나님이 능력을 현실적으로 나타내고 고난을 받는다. 하나님의 영은 지혜와 총명의 영이므로 영에 사로 잡힌 자들의 정상적인 사고를 차단시켜 특수한 일을 하게 하지 않는다. 오히려 영은 지혜를 주고 능력을 주어서 정치적인 문제에도 바른 통찰력을 갖게 하고 나라를 다스릴 수 있는 통치력을 선사하기도 한다.(창 41 : 38, 욥 32 : 8, 사 30 : 1)
 하나님의 영을 받은 자는 가난한 자에게 복된 소식을 전하고 마음이 상한 자를 치료하고 포로된 자를 해방한다.(사 61 : 1-3) 그는 모략과 지혜의 영을 받았으므로 야웨를 경외하는 것을 기쁨으로 삼고 정의로 가난한 자를 심판하고 공의로 허리 띠를 삼고 성실로 몸의 띠를 삼으면서"(사 11 : 1-5) 하나님의 선교를 수행한다.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예언자들은 만난을 배제하고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고 그의 몸은 거룩한 정열로 불탄다. 이는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 새로운 정열과 희망과 능력을 불어넣고 그를 감동시키고 변화시켜 새 존재로 만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언자들의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과 지혜로 불타오르고 민족과 구원과 전인류와 피조물을 위한 새로운 환상을 갖는다. 이제 그들은 태풍의 눈과 같이 험준한 역사의 현장에 등장하여 상상할 수 없는 하나님의 구원의 새 역사를 증언한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영은 전인류의 구원과 전피조물의 살롬을 위한 새 생명의 공동체를 창조하려는 뚜렷한 목표가 있고 그것을 이룰 수 있는 거룩한 정열과 능력을 지니고 있다. 이것은 새로운 세계를 창조할 영의 활동과 관계된다. 그래서 구약에선 성령의 존재와 활동은 구약 자체에서 마감되거나 완성되지 않고 메시아적인 새로운 왕국, 즉 미래에서 성취될 우주적인 새 하늘과 새 땅을 향하여 열려있다. 하나님의 영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새로운 역사를 이루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우주에 충만하게 하고 황무지를 옥토로 변화시키어 생명체들이 평화롭게 살 수 있는 낙원으로 만든다. "나는 목마른 땅에 물을 부어주고 메마른 곳에 시냇물이 흐르게 하리라. 드디어 하늘의 영이 우리 위에 쏟아져 내려 사막은 과수원이 되고. 과수원은 정의의 터전이 되리라."(사 32 : 15-18)
이 새로운 세계는 단지 표면만 변화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모든 악을 추방하고 사람들에게 새로운 마음과 새 영을 주어서 그들이 기쁘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사는 데서 찾아진다.(겔 36 : 25-27) 그러면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가 함께 누우며 어린이가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을 함께 이끌게 된다. 하나님의 영으로 새롭게 할 거룩한 곳에는 상함도 해함도 없을 것이고 야웨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물이 바다를 덮은 같이 우주에 충만하게 될 것이다.(사 11 : 6-9) 하나님의 영은 단순히 개인의 회개와 소명만 회상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의 작용을 통하여 우리가 거듭 새롭게 변화되고 거룩하게 되고 영화되기를 바란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은 정의와 평화가 지배하는 새로운 세계를 원하고 그것을 이루어간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그러한 새로운 미래로 가는 길은 하나님의 영의 역사와 다스림에 자신을 개방하는 사람들과 공동체에서 시작하게 된다. 하나님이 영은 그들과 함께 미래로 들어가기를 원하고 그의 새로운 세계를 세우고 있기 기때문에 그들이 영에 대하여 개방하고 맡기기를 원한다. 그러면 하나님의 영이 그들에게 새로운 영과 새로운 마음을 선서한다. 하나님이 영의 작용으로 지금 다스릴 수 있는 사람들과 공동체에서 우주적인 정의와 평화의 공동체의 싹이 발아하고 자라기 시작한다.
이상에서 살펴본 대로 하나님의 영은 인간의 영이 아니고, 인간의 영과 본질적으로 구별되는 생명의 주관자인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영이다. 따라서 영의 경험은 인간 자신의 내면적인 경험이 아니다. 그 체험은 인간의 영이나 혼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인간과 마주서 계시는 초월적인 하나님 자신에게서 오는 것이다. 이스라엘에서 하나님의 영과 인간의 영을 구별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하나님의 영은 신비가들이 주장한 것처럼 인간의 가장 깊은 혼의 불꽃이 아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영의 관계는 어떻게 이해되는가? 영은 하나님인가? 아니면 무인격적인 신의 힘과 지혜일 것인가?
구약에서 하나님은 영이다라는 신약의 표현은 없지만, 구약의 전체적인 증언을 살펴볼 때, 영은 인간과 자연 밖에에서 와서 사람을 사라잡아 쓰면서 활동하는 하나님 자신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이스라엘 가운데 계시다는 것과 그의 영이 계시다는 것은 동의어로 쓰이고 있다.(학 2 : 4) "내가 당신의 영을 떠나서 어디로 가며 당신의 얼굴을 떠나서 어디로 가겠습니까?"(시 139 : 7) 여기서 하나님의 영과 하나님의 얼굴은 동의어로 사용된다. 하나님의 얼굴은 그의 임재를 말한다. 벨커에 의하면 영의 현재와 함께 오는 하나님의 얼굴은 하나님이 집중적으로 고도로 생동적인 방식으로 현재하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을 떠나는 것은 하나님 자신을 떠나는 것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이런 경우는 시편 51편 11절과 104편 29에서도 발견된다. 하나님의 영이 임한다는 것은 하나님 자신이 현재적으로 나타나 역동적으로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그러면 구약에서 영은 비인격적인 힘인가? 초기에 나타난 영은 비인격적인 힘으로 나타난다. 구약 자체 안에서 영은 하나님 자신 처럼 신적인 인격을 지닌 존재라고 분명하게 말한 적은 없다. 그러나 구약에서도 영은 인격적으로 작용한다. 영은 근심하고(사 63 : 10), 영은 가르침을 받지 않고 교훈을 받지않고도 바닷물과 하늘과 땅의 티끌과 산들을 측량하는 전능한 하나님으로 나타난다.(사 40 : 12-14)
그러면 영을 하나님이라고 말할 때와 창조주를 하나님이라고 표현할 때, 양자의 관계는 무엇인가? 창조자 하나님과 영으로서 하나님은 한 동일한 신의 인격인가? 양자는 동일한 신성과 영광을 지닌 하나님이지만, 바르트가 지적한 것처럼 양자 사이엔 지양될 수 없는 독자성이 있느가? 영의 독자적인 인격성은 신약에서 더욱 분명하게 나타난다. 성령의 인격성은 삼위일체의 교의 문제와 본질적으로 관련된다.

2) 신약에서 영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그이 모든 사역과 사명에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 예수는 영의 담지자이고 그는 영의 힘으로 병을 고치고 악령든 자들에게서 약령을 추방하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한다. 그것은 태초부터 인식된 하나님의 주권을 동터오게 하고 그것을 현재화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는 매우 특이하고 친밀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산다. 그는 동시에 잉태의 순간에서부터 삶의 모든 순간에서 성령으로 충만하였고, 말씀의 선포와 치료의 사역의 모든 선교활동에서 성령의 은사들을 사용하였다.(눅 4 : 21) 그리스도는 성령의 능력 안에서 기적을 행한다. 그는 영에 대하여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영 안에서 말하고 행동한다. 사람들은 그의 옷자락을 만지기만 해도 병이 낫는다. (막 5 : 30, 눅 5 : 17)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 임하여 그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갇힌 자를 해방하고 병든 자를 치료한다. 그래서 치료하는 능력이 예수와 함께 있더라(눅 6 : 19)고 한다. 여기서 예수는 성령의 능력 안에서 병을 치료했고, 필요하면 자신의 능력으로 치료할 수 있었다. 예수는 하나님 아버지와 친밀하게 관계하고, 그의 모든 활동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이 스스로를 증거하고 행동하고 말씀하고 인간과 만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 예수 안에서 구약의 예언자들의 체험이 현실이 된다. 하나님의 영은 예수의 사역을 통해서 삶을 변화시키고 새로운 사건을 일으키는 현실이 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 안에서 예언자들이 기대해오던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인식이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처음부터 진리와 성령으로 충만한 분이다.(요 3 : 34) 그러기에 성령은 그리스도의 시험에서, 세례에서, 선교사역에서 고난과 고통에서 부활과 영광에서도 그리스도와 함께 계셨다. 이런 관련에서 월드부어드는 적절하게 말한다. "그리스도는 모든 생애동안, 모든 시험과 고난 속에서도 성령의 도움과 연대를 경험하고 위로와 용기를 얻었다. 하나님이 원하신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그리스도 자신이 십자가를 걸머져야 할 결단을 내릴 릴 때도 성령은 그를 십자가로 인도하고 그와 함께 있었고 그를 도왔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모든 사역에 동참하고 함께 역사하고 고통을 경험하고, 그를 영광스럽게 한다." 몰트만은 이 내용을 아버지 하나님에 의한 아들의 사명과 성령의 보내심에서 이해한다. 예수의 사명은 역사적인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 안에 근거를 지니며, 예수의 잉태와 세례와 소명과 활동은 성령을 통하여 성령 안에서 일어난다. 이 영이 표적과 기적으로써 그의 선포를 동반한다. 그것은 아버지에게서 아들에게 온 영이다. 이 영의 활동 없이 동시에 예수가 아버지라고 부른 아버지 없이 그의 행위는 이해될 수 없다.
성령은 예수의 부활과 승천 후 하나님과 아들에게서 파견된다. 이제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제자들과 함께 머물고, 제자들을 위로하고 돕고 그리스도의 말씀을 회상하게 하고 그리스도와 신비로운 영적인 생명의 연합을 창조한다. 그리고 제자들이 그리스도에게 속하고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속하는 현실을 창조한다. 성령은 제자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활짝 열린 삶을 살게 하고 그리스도 자신이 그들의 삶에서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주시는 주로서 역사하는 것을 실감하게 한다. 하나님의 영으로서 성령은 하나님의 깊은 사정을 꿰뚫고 통찰하시기에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한다. 성령은 우리를 거룩하게 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즐거이 순종할 수 있게 하며 하나님의 자녀의 기쁨과 자유와 특권을 누릴 수 있게 역사한다.
성령은 자신을 나타내지 않고 감추면서 그리스도를 나타낸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조명하여 고난의 바른 의미를 알게 하고 그를 영화롭게 한다. 성령은 신도를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하여 생명과 의의 열매를 맺게 한다. 성령은 그리스도룰 현재하도록 역사하면서 그를 믿고 고백하는 신앙의 공동체를 창조한다. 기독교의 신앙 공동체는 성령의 임재 속에서 영광스럽게 나타난 그리스도의 생생한 지배와 주권을 고백한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영향권 아래 있는 새로운 삶이다. 성령의 선물인 기독교의 신앙은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을 통해서 생기와 힘을 얻는다. 그리스도는 말씀과 자유의 영으로 통치를 시작한 것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영의 능력으로 살고 그리스도 밖에 다른 주를 알지 못한다.
성령은 카리스마적인 은사로써 교회를 무장시키켜 복음의 선포가 말로만 아니라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과 표징으로써 증거하게한다. 이 성령의 현재적인 사역을 통해서 부활한 그리스도의 능력이 신자들에게 놀랍게 나타난다. 브룬너가 말한 것처럼 성령은 초대 교회에게 창조적인 능력을, 새로운 의지와 감정과 깨달음을 선사하고,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새로운 자원과 힘을 선사한다. 그러므로 성령의 영적인 은사들은 바울에게서 황홀과 기적에만 제한 되지 않는 새로운 시대의 선물과 힘이다.
성령의 다양한 은사들은 교회를 역동적으로 활성화시키면서 불붙은 믿음의 역사를 일으키고 세찬 의의 파도를 일으킨다. 그리스도가 성령과 말씀 속에서 부활한 주로서 현재하고 제자들에게 말씀하고 만나고, 새로운 능력을 주어 복음을 증언하기 위하여 파견한다. 성령은 말씀을 예기치 않은 새로운 방법으로 생동하게 하고 교회로 하여금 거듭 현재를 변화시키는 희망의 미래를 향하여 전진하도록 창조적인 비젼과 희망의 힘을 선사한다. 신약에서 성령은 종말의 완성을 가져다주는 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수수께끼를 해결하실 새로운 미래를 바라보게 한다. 현재에서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은 성령의 기적적인 역사이다. 성령은 종말의 착수금으로서(Angeld) 종말의 완성을 지시한다. 성령은 종말론적인 성취일 새 하늘과 새 땅의 질(質)을 미리서 확인시켜주면서 선교의 공동체가 모든 유혹과 시련과 박해를 견디고 이기면서 발전하도록 모든 자원을 공급한다. 브룬너에 의하면 성령은 영광스럽게 오시는 주님의 오심으로써 만물이 완성될 종말론의 희망을 기다리게 한다. 그러므로 믿음은 현재에 안주할 수 없고 한계를 넘어서 종말론적인 완성을 희망한다. 이 점에서 전적으로 종말론이 아닌 기독교는 그리스도와 관계 없다고 말할 수 있다. 몰트만은 종말론을 영원한 초월로 보는 전통적인 견해를 거부하고, 현실을 변혁하게 하는 하나님이 약속의 새로움으로 파악한다.
구약에서 성령의 우주적인 임재와 함께 우주적인 평화와 생명의 공동체가 실현될 것을 희망한다. 사도행전에서 의하면 이런한 약속이 오순절에 실현된 것을 확신한다.(행 2 : 16-21) 이제 종말의 완성에 대한 보증금으로서 성령의 현재적인 능력안 에서 활동하는 교회는 복음으로 태어난 새 존재의 특성인 사랑과 자유, 기쁨과 희망의 공동체, 새 인류의 전위대로 나타난다. 여기선 사람들이 그들이 받은 독특한 은사들을 갖고 서로를 섬기고 돕는 기쁨을 누린다. 인류의 비극인 모든 정치-사회, 문화-종교, 종족-지역의 한계와 특수성이 서로 수용하고 상호를 풍요롭게 하는 은사들로 변화된다. 이것이 그리스도가 이룬 화해의 사건이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현실화된 새 인류의 전위대인 공동체의 모습이다. "이제는 멀리 떨어진 너희들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써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평화이시다.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 이 둘을 한 몸으로 만드사 하나님과 화해하게 하시고 멀리 떨어진 너희에게 평화를 가져왔느니라.(엡 2 : 13-115)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성령은 신적인 능력과 인격을 지닌 분으로서 세계와 특히 교회에서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와를 증거하고 신자들을 그리스도와 연합시키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사귀게 하고 그의 자녀가 되게 한다. 성령은 말씀을 듣는 사람들에게 신앙을 선사하고 말씀을 듣는 자의 마음에 신앙의 확실성을 뿌리내리게 한다. 그것이 성령이 인치는 신앙이다.
그래서 칼빈은 신앙의 확실성은 이성과 이성의 판단이나 어떤 억측에서 찾을 수 없고 성령의 은밀한 증거에서 찾아야 한다고 한다. 하나님 자신만이 그의 말씀의 합당한 증인인 되는 것처럼 그 말씀도 성령의 내적 증거에 의하여 확증되기 전에는 사람의 마음에 받아들여질 수 없다. 성령은 계시의 말씀을 사용하여 우리를 예수 스리스도 안에나타난 하나님이 사랑을 실감하여 감동하게 하고 우리 자신을 전적으로 하나님에게 개방하게 하고, 그 사랑에 응답하는 믿음과 자유의 사람, 책임적인 존재로 태어나게 한다. 성령은 이제 믿는 자를 하나님의 성전으로 삼고, 그를 노예화한 죄의 힘에서 해방시켜 참된 자유로운 인격이 되게 한다.
이 자유는 인간 존재의 근거와 목적, 삶의의미와 내용을 새롭게 하는 하나님이 주시는 사랑 안에 기초하고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선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붙잡히고 그 사랑을 깊은 차원에서 뜨겁게 느끼고 감사하는 삶이 성령의 능력 안에 있는 신자의 삶이다. 그것이 성령의 선물인 믿음과 그 믿음을 고백하는 자유한 인간의 주체적인 행위에서 일어난다. 그러므로 성령의 사건으로 하나님의 사랑에 붙잡히는 것은 모든 억압에서 참된 자아로 해방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 이 성령은 누구인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리스도 예수와의 관계에서 성령은 행동의 주체인가? 성령은 하나님 자신인가? 아니면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에게서 흘러나오는 영적인 힘인가?
몰트만에 의하면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과의 관계에서 활동의 주체이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 종속된 분은 아니다. 그는 독자적인 인격과 주체성을 갖고 인간을 변화시키고 부활한 주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통하여 아버지를 영화롭게 한다. 성령은 이로써 주님과 사귐을 창조하고 하나님을 "압바"로 부르게 하는 아버지의 믿음의 자녀들을 불러 일으킨다. 이리하여 사람들은 성령을 통하여 아들과 아버지의 내적인 삼위일체와의 사귐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러므로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에세 흘러나오는 한 능력이 아니라, 행동의 주체이며, 인격적인 주체이다. 성령의 활동으로 아버지와 아들이 영화롭게 되고, 인간과 하나님을 연합하게 한다. 성서적인 증언에 의하면 성령은 말하고 느끼고 의지를 갖고 있으며 신자들을 위하여 간구하고 탄식하고 상처를 받는 인격자 하나님으로 나타난다. 그도 성부와 성자처럼 신적인 위험과 영광과 본질을 지닌 동일한 하나님이다. 성령은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 통달하고(고전 12 : 10) 모든 은사의 근원이고 창시자이기도 한다. 만일에 성령이 하나님 안에 존재하는 실재자가 아니라면 선택하고 지혜와 재능을 주고 의지를 갖고 행동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래서 초대 교회로부터 현재까지 성령의 인격성의 문제는 그리스도론 이후 삼위일체 교의의 중심적인 논점이 되었다.

신약의 증언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계시는 성령의 역사와 능력 안에서만 우리를 위한 구원의 사건이 된다. 성령은 참으로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시키고 하나님 자신이 성령 안에서 우리와 함께 있고 우리 안에서 역사한다. 성령은 하나님의 실재이고 하나님 자신의 영이면서 하나님 자신이다. 그러므로 아들의 역사와 같이 성령의 역사는 하나님 자신의 역사이다. 아들 안에서와 같이 성령 안에서도 하나님 자신이 현재하고 역사한다. 성서는 아버지와 아들, 아버지와 영, 영과 아들 사이의 동일성을 주장하지 않는다. 성서의 증언에서 우리는 분명하게 아들의 신성처럼 영의 신성도, 아들의 존재와 같이 영의 존재도 아버지의 신성과 존재와 일치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동시에 성서는 그들 사이에 차이도 분명하게 증언한다. 아들은 아버지가 아니고 아버지에게서 보냄을 받고 그에게 복종한다. 성령은 아버지나 그리스도가 아니고 두 분에게서 보냄을 받고 우리를 위해서 사역을 한다. 신약의 진술에서 이 하나됨과 차이가 확인된다면, 신약이 이미 제의적이며 교의적인 형태로써 자유로운 삼위일체적인 형식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에 놀랄 필요가 없다.
O. 베버는 신약에서 삼위일체론의 계기와 근거를 제공하는 귀절들을 다음과 같이 예로서 제시한다. 마 28 : 19, 고후 13 : 13, 엡 4 : 4-6, 벳전 1 : 2, 고전 12 : 3-4, 6 : 11, 고후 1 : 21, 롬 5 : 5. 8, 살후 2 : 13, 16, 갈 4 : 6, 롬 8 : 3- 4, 8-11, 14-18. 딛 3 : 4-7. 유 1 : 20-25. 물론 삼위일체론의 핵심은 이 귀절들 안에 있는 것이 아니고 신약의 전체적인 증언들의 해석에 있다.


III. 삼위일체의 뿌리

 

1. 구원의 경험에 근거한 삼위일체 신앙고백

바르트에 의하면 삼위일체론은 그 근거와 그 출발점과 그 대상을 자신을 주(主)로서 나타내는 하나님의 계시 안에서 갖는다. 그 외에 다른 근거가 없다. 삼위일체론의 근거는 계시이다. 삼위일체론은 계시를 일어난 사건에서 해석하는 과제를 수행한다. 그 해석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구원의 선물을 성령의 역사와 능력을 통해서 현재적으로 경험하고 확신한 초대 교회의 신앙 경험과 인식에서 이룩된 것이다. 해방의 신학자 보프가 말한 것처럼 기독교 교리의 뿌리에는 하나님의 신성과 신비롭게 만나는 경험이 있다. 초대 교인들은 유일신 하나님을 예배한 유대인들이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운명에서와 성령의 사건에서 초월적인 구원의 하나님을 세가지 독특한 방식에서 체험했다. 바르트가 말한 것처럼 하나님은 이 세가지 다른, 그러나 상관적인 계시의 행동에서 그 자신과 일치한다. 초대 교인들은 그들이 특이하게 만나고 경험하는 구원의 하나님의 존재와 행동을 세 상호 관련된 방식으로, 즉 기독론적으로, 성령론적으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구약의 유일신론적인 하나님의 견해는 기독론과 성령론을 떠나서 표현할 수 없었다. 우리가 경험하고 고백하는 하나님은 성령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만나는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삼위일체 신앙고백은 성령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달한다. 그 고백은 한 참된 하나님으로서 삼위일체를 말한다. 이러한 삼위일체 교의의 근원은 자신을 주로서 세번 달리 나타내신 하나님의 계시행동에 있다. 그것은 A. 슈바이쳐들이 주장한 것처럼 사변적인 신학의 산물도, 슐라이에르마허의 견해처럼 예수의 자의식이나 교회가 느끼는 공동체 정신의 산물도 아니다.
신약의 증언서 확실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작용에서 하나님과 성령이, 성령이 작용에서 하나님과 그리스도가 함께 나타나고, 함께 관계하고, 함께 참여하여 현재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점이다. 그래서 삼위일체 교의는 역사적인 구원의 활동에서 자신을 주로서 계시한 창조자 하나님,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성령의 존재와 구원의 행동의 상호관계, 상호침투, 상호작용에 대한 신앙의 경험과 인식을 압축하여 표현한 공적인 형식이다. 그러므로 삼위일체적으로 하나님을 말하는 기독교의 신앙고백에서 중요한 것은 그것이 단순히 합리적이거나 지성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와 행동에 대한 직관적인 깨달음과 중심에서 확인고 경험된 점이라는 것이다. 만일에 삼위일체의 교의가 성령을 통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하는 하나님의 존재와 행동과 만남과 경험에 뿌리를 내리지 않았더라면, 그것은 무효화되고 말았을 것이다. 우리는 이 점을 거듭 새롭게 기억할 필요가 있다. 만일에 삼위일체 교의가 신플라톤적인 철학이나 스토익 철학의 중심 개념인 로고스에 대한 사변적인 산물과, 혹은 동양적인 신비종교의 산물로 간주된다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와 교회의 신학적인 노작을 거부하는 것이 된다. 그것은 우리의 교회가 초대 교회와 하나이며 동일한 신앙 고백 위에 서 있다는 것을 부정한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내용을 논리적인 진술과 엄격한 개념으로만 표현될 수 없고 인류와 전피조물을 위하여 이루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구원의 행동을 노래와 춤과 연극과 시와 찬양으로 표현한다. 삼일일체 교의는 이 내용을 가장 간단한 개념으로써 표현하여 초대 교회에서부터 오늘의 교회에서 나타난 수많은 잘못된 기독론적인, 성령론적인 표상들과 과오와 맞서 성서가 증언하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내용을 순수하게 보호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2. 삼위일체의 교의의 형성과정

(1) 삼위일체론에 대한 논란

하나님에 대한 기독교적인 독특한 이해 방식이었던 삼위일체 교리는 형성기에서부터 지금까지 논란되었고 의혹에 쌓이기도 했다. 하나님이 단 한분인가 아니면 삼위일체인가? 삼위일체 하나님 존재문제는 신앙생활과 윤리학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가? 그 교리는 신학자들의 사변일 뿐, 교회신앙 생활과 윤리적인 관련성이 없는가? 그렇다면 그 교리는 실제적인 중요성을 상실한 것은 아닌가? 삼위일체 교리는 기독교적인 삶을 더 어렵게 하는 것은 아닌가? 그것은 독단적으로 복종만 강조하므로, 이성의 희생을 강요하지 않는가? 그 교리를 어떻게 바르게 해명하고 이해시킬 수 있는가? 삼위일체 교리는 오눌의 해석학의 신학, 정치신학, 과정신학의 논의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지 못하기 때문에 매력적인 신학이 되기 위하여 그 교리는 배제되어야 하는가? 그렇다면 기독교적인 신관은 포기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삼위일체 교의는 신성에서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동질성을 의문시하는 위험한 이단과 대결하여 아버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 하나님 사이의 동질성을 확고히 보전하고, 아버지, 아들과 성령은 세 신들을 말한 것이 아니라, 한 참된 하나님임을 단언하고 하나님은 처음부터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성부, 성자, 성령은 깨어질 수 없는 상호관계 속에서 존재하고 구원의 역사를 함께 이룬다는 것을 표현한다. 그것은 성서의 전제 내용울 가장 잘 해석한 것이다.
이 삼위일체의 뿌리는 하나님이 주신을 주로서 세번 달리 역사적으로 계시한 존재 양식들과 그의 구원의 신비에 대한 경험에 있다. 그러므로 삼위일체론적인 신앙고백은 기독론과 성령론적 구속론의 신학적인 전제가 된다. 그것은 성부와 성자와 성렁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아버지 하나님 그리스도와 성령을 경배하고 찬양하고 신뢰하는 신앙생활의 내적인 구조와 일치한다. 초대 교회는 이단의 위협 아래서 삼위일체론을 형성하여 기독교적인 신앙의 대상과 신앙의 내용을 순수하게 인식하고 보존하려 한 것이다. 그 이단은 교회사에서 거듭 일어났고 지금도 현재한다.
삼위일체론은 기독교의 유일신에 대한 신앙을 포기하지않고 성부, 성자와 성령의 세 인격들 안에서 신적인 동질성과 일치성과 한 참된 하나님임을 표현하고, 한 하나님이 포기될 수 없는 인격의 구별성에서 자신을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계시한 것과 셋 안에서 하나이고 하나 안에서 셋인 하나님의 상호 관계성을 표현한다. 이 교의는 성서 안에서 없다. 이 교의는 하나님이 자신을 주로서 계시하는 성서의 텍스트를 주석한 교회의 신학적 반성의 산물이다. 그러나 엄격한 유일신론(Monotheismus)은 그리스도와 성령 하나님에 대한 대한 신앙을 위협하고, 한 분 하나님에 대한 엄격한 사고는 기독론과 성령론을 불가능하게 한다. 엄격한 유일신론은 그리스도 없는 하나님을 생각하게 하고, 하나님 없는 그리스도롤 이해하도록 한다.
그러나 성서의 텍스트를 주석한 삼위일체론 교의는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본질적인 일치를 주장하고, 그리스도를 신적으로만 아니라, 하나님을 그리스도적으로 이해된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없이 파악될 수 없고, 그리스도는 하나님 없이 이해될 수 없다. 기독교인으로서 우리는 하나님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를 통해서 어떻게 계시되었는가를 안다. 그밖에 하나님에 관한 논의는 임시적인 의미를 갖는다. 그러므로 신론과 그리스도론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론은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발견하기 위하여 예수 자신이 하나님에 대하여 어떻게 이해했고 그는 자신을 하나님과 관계에서 어떻게 이해했으며, 하나님은 예수의 말과 행동과 주장을 어떻게 확증하였는가에서 시작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인지할 것은 삼위일체에서 셋이라는 개념은 하나님 안에서 상호관계를 지시한다는 점이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독존적인 존재가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이 상호 관계 속에서 존재하고 활동한다는 점이다. 세 인격들이 말하고 있는 것은 이 관계성이 하나님의 존재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삼위일체는 하나님의 거룩한 관계들의 신비를 말하며 그것이 하나님의 존재의 일차적인 신성의 특성이다. 이런 관점에서 나지안누스의 그레고리우스(Gregorius of Nazianus)는 말한다." 나는 즉시 삼위의 광채에 둘러 쌓이지 않고는 그 하나됨을 상상할 수 없다. 곧 바로 하나됨을 상기하지 않고선 삼위를 분별할 수 없다."
이점을 바르게 인식하기 위하여 삼위일체론을 문제시한 아리안주의의(Arianismus) 이단설, 사벨리안주의의(Sabellianismus) 이단설, 칼빈의 삼위일체론에 반대한 세르베투스(M. Servetus 1557)의 반삼위일체론, 소찌니파 (F. Sozzini 1539-1604)와 유니테리안파(Unitarians), 19세기에 등장한 역사적 예수운동과 관련된 자유주의 신학사조들을 비판적으로 대결하고 삼윌일체 교의의 정당성을 새롭게 재확인하고 새롭게 해석해야 한다.

(2) 종속적인 그리스도론을 주장한 아리우스(Arius)의 논점

아리우스는 기독교의 유일신 하나님 개념을 보전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신성을 포기한다. 그에게서 하나님은 단순한 가장 높은 실체이다. 이 실체는 나누어질 수 없는 단일성으로 인하여 모든 존재의 근거를 형성한다. 그것은 많은 것들의 원칙이요, 척도이며 다른 모든 사물들의 원인이다. 그러나 그 자신은 다른 원인을 가지지 않는다. 한 분 하나님은 나누어질 수 없기 때문에 진술될 수도 철저히 전달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창조자 하나님과 피조물과의 사귐을 이루기 위하여 중간 존재의 중재가 필요하다. 아리우스는 그것을 기독교의 전승에 따라서 "아들"이라 부르고 철학적 개념에 따라서 "로고스"라고 부른다. 이 아들은 창조의 처음 태어난 자이지만 아버지의 독생자로 이해될 수 없다. 모든 창조의 처음 태어난 자인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지혜와 이성이 나타났다.
이러한 로고스 그리스도는 단순한 인간만은 아니다. 그는 반신 반인간의 존재였다. 그는 신적이지만, 아버지와 동등하지 않다. 그는 한 분 하나님의 최초의 피조물로서 모든 피조물의 모범이 되는 피조물이다. 그는 세상에서 하나님을 계시하기 위하여 시간과 공간이 있기 전에 창조되었다.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그리스도에게 특별한 신적인 영광이 주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존재하지 않는 때도 있었다.
아리우스에게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아니라, 신적인 존재였다. 이것은 그가 하나님은 한 분 뿐임을 고수하려 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예수와 아버지 사이의 본질적인 하나됨은 배제된다. 이로써 예수는 자신을 한 분 하나님 아래 종속시킴으로 모범적인 삶을 산다. 예수가 하나님 자신과 동일한 본질이 아니므로 그를 통한 하나님과의 완전하고 충만한 사귐은 이루어질 수 없다. 여기서 중재자 그리스도론은 반신이고 반인간인 신비적인 중간 존재론으로 변형되었다. 성령도 성부와 성자에 종속되어 있다. 따라서 성령의 역사와 능력을 통한 참된 유일한 하나님과의 사귐은 불가능하다.
이것은 하르낙이 비판한 것처럼 그리스도 예수를 "창조된" 하나님 혹은 "반신적인" 존재로 변형시컨 것이다. 아리우스가 하나님의 신성의 단일성을 지키려는 관점에서 그리스도를 반신 반인간의 존재로 변형한 것은 신약 성서의 근본적인 증언에 모순될 뿐만 아니라, 제베르크가 지적한 것처럼 "신화적 요소가 기독교에 유입되어 순수한 유일신앙은 신적 인간과 반인간적 신을 믿는 다신교로 전락되었다." 325년 니케아 회의에서 아리안주의는 이단으로 배격되고 다음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와 아버지의 완전한 단일성의 교리가 관철되었다. "하나님의 독생자는 하나님의 하나님, 빛의 빛, 참 하나님이요 태어났으나 창조되지 않았고 아버지와 같은 본질이다."
칼 바르트는 아리우스의 종속설을 다음과 같이 비판하다. 아리우스는 하나님은 자신을 성부,성자와 성령의 인격과 역사에서 "주"로서 계시했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삼위일체론 자신을 이렇게 삼중적인 독특한 방식에서 계시하는 하나님은 누구인가 라는 계시의 주체에 대해서 대답한다. 성서에서 아버지, 아들, 영은 같은 본질이고 동일한 의미에서 하나님 자신이라고 명백하게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삼위일체론의 내용이다. 성서에서 증언되는 계시의 주체는 그 존재와 행동이 어떻든 간에 성부, 성자와 성령은 한 주이고 한 하나님이다. 성부는 아들과 영과의 구별에서 아들과 영과 같은 하나님 아버지이고, 성자는 성부와 성령과 구별되는 계시의 행동과 존재의 양태에서 같은 하나님이고 성령도 그러하다. 성령은 그리스도와 아버지를 계시하고 그의 사랑을 전달함에서 같은 하나님이다. 성부, 성자와 성령은 한, 동일한, 유일한 참 하나님이다. 여기에 어떤 반신이 없고 밑으로 내려간 하나님도 위로 올라간 하나님도 없다. 모두는 동일한 같은 주 하나님이다. 이렇게 하나님은 성금요일에, 부활절 아침에 오순절 성령 강림절에 어버지의 이름으로, 아들 이름으로 성령의 이름으로 자신을 특징적으로 나타냈다.
그러나 아리우스가 주장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가 "주"가 아니고 한계를 갖는 반신 반인간적인 존재라면, 인간은 그리스도를 당신(Du)으로서 만날 수 없고 그를 지배하고 처분할 할 수 있는 피조물로 전락시킨다. 아리우스적인 종속론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인 주체성을 인간의 주체성으로 편입시켜 그리스도의 "주권"을 폐기시킨다. 그것은 계시의 부정이며 따라서 인간은 그의 닫힌 세계 안에서 당신(Du)도 "주"도 없이 홀로 있을 수 밖에 없다. 그래서 교회는 아리우스와 종속주의를 거부한 것이다. 그래서 성서의 증언에 따라서 한 참된 하나님이 독자적인 세 인격들 안에서 자신을 주 하나님으로서 계시한 삼위일체론의 교의가 형성된것이다. 성부, 성자와 성령은 폐기될 수 없는 세 고유한 존재 양식에서와 상호관계 속에서 활동하는 같은 하나님이다. 성자는 성부의 동일한 영원한 신성에서 아버지와 구별되는 인격이다. 성령도 같은 영원한 신성에서 성부와 성자와는 구별되는 인격이다. 그는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동시에 신성을 갖는다. 이것이 사벨리안주의와 반대되는 삼위일체의 내용이다.
그러면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동일본질이고(homoousios) 하나님이 그리스도와 동일본질이며 성령이 성부와 성자의 동일한 본질을 지닌다면 참된 한 하나님의 존재와 행동, 즉 하나님의 하나됨은(Einheit)어떻게 이해될 것인가? 하나님의 신성은 단자론적으로(單子論, monadisch)) 이해될 수 없고 근본에서 기독론적으로, 성령론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3) 양태론적 군주론의 유일신론(Momotheismus)의 문제점 ― 사벨리우스(Sabellius)

니케아 회의 이전에 서방지역 교회의 삼위일체론은 카르타고의 터틀리안(Tertullian)을 출밤점으로 삼는다. 삼위일체론의 기초형태를 형성한 터툴리안 (195년경 입교)은 영지주의와 마르치온(Marcion)에 반대하여 한 하나님 안에 창조자와 구속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하나됨(Einheit)를 강조하고 세 인격들 안에서 하나님은 한 유일한 본질이다고 주장했다, 하나님은 영원전부터 한 분이지만, 홀로 있지 않다. 그는 창조자로서 구속주로서 보혜사 성령으로서 자신을 계시했다. 이로써 그는 삼위일체론의 기초를 형성하였다.
몰트만은 터툴리안의 견해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한 분 하나님은 수적인 혹은 단자적인(monadisch 單子的) 단일성(Einheit 單一性)이 아니라, 그 안에서 이미 구별된 단일성이다. 아버지는 아들과 구분되지만,(distincti) 분리되지(divisi) 않고, 구별되지만(discreti) 분리되지(separati) 않는다. 아버지와 아들은 신적인 단일성에서 구별되고 그 구별성에서 하나이다. 아버지는 아들을 통하여 성령을 보낸다. 이 성령은 신의 본질의 하나됨을 통하여 아버지와 아들과 결합되어 있다. 신성에서 구별된 하나됨을 설명하기 위하여 터툴리안은 태양-빛-반사, 수원-시내-하천 과 같은 상징으로 설명한다.
이로써 터틀린안은 한 동일한 질료의 구별할 수 있는 개성들을 서술하려 한것이다. 이 주장은 역동적인 군주론(Dynamistic Monarchianism)과 대조되는 이론이다. 역동적 군주론에 의하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성은 단순한 능력, 혹은 힘일 뿐이다. 그러한 힘들은 그리스도의 성격의 탁월성과 관련된다. 예수는 하나님의 로고스적 힘을 충만하게 받은 인간이었다. 위에서 온 신적 지혜가 예수 안에서 독특한 방식으로 거주하기에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이다. 예수는 성령의 감동과 의지의 일치를 통하여 하나님과 확고하게 긴밀한 연합을 이루었다. 그래서 그는 기적을 행하는 능력과 구속자의 자격을 확보하고 하나님과 일치하게 된 것이다.
사벨리우스는 하나님을 단일한 실체로 이해한다. 하나님의 존재 안에는 구별이 없으며 단일체인 하나님은 세가지 상이한 양태 혹은 형태로 자기를 계시한다. 한 하나님은 계시와 구원의 전달의 역사에서 세가지 형태를 취한다. 자기를 창조자로 나타난 것은 아버지요, 구원자로 나타난 것은 아들이며, 생명의 선사자로 나타난 것은 성령이다. 그러나 이 셋은 세 실재를 말하지 않고, 한 인격에 의하여 행해진 세 역할이다. 이들 삼자는 모두 하나이며 동일한 인격이다. 이것은 한 배우가 무대 위에서 세 역할을 수행한 것에 비교된다. 태양은 빛과 열과 둥근 형체를 가지고 있지만 오직 한 태양이 있듯이, 하나님도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세 이름을 지니지만, 오직 한 인격이 있을 뿐이다.
사벨리우스에게서 하나님은 세가지 다른 형태로 나타나 구원의 활동을 한 단일한 실체, 한 인격이었다. 창조자로 나타난 아버지의 얼굴은 율법을 준 후, 다시 본래의 상태로 환원하였고, 그것은 화육을 통하여 아들로서 나타났으나, 승천함으로써 절대적인 원실체로 돌아갔고, 마침내 성령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성령은 교회의 성화를 확보한 후 다시 구별을 모르는 단일한 실체로 되돌아 영원토록 거기에 거한다.
사벨리우스는 성부, 성자 , 성령은 나눌 수 없는 한 실체이며 동일한 인격이라고 하여 그리스도의 신성을 인정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동일한 인격과 동일한 행동의 주체로 파악하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하나님에게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 한 하나님 안으로 용해되어 버린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독특한 인격은 영지주의의 늪 속으로, 그의 신성은 말할 없이 직접적으로 한 신성으로 사라진다. 성령도 독자적인 인격을 지니지 못하고 선재적인 존재를 지닐 수 없다. 성부, 성자와 성령은 한 동일한 하나님의 다른 이름에 불과하다. 아들은 하나님의 본질의 지상적인 현현이고 성령은 성부의 숨은 신적인 본질이다.
이것이 사벨리우스의 양태론적 군주론이다. 그의 양태론적 군주론은 주로서 자신을 계시하는 성자와 성령의 뚜럿이 구별되는 세 인격의 차이를 간과한 과오를 범한 것이다. 동일한 영원한 신의 본질에서 성부는 성자의 아버지로서, 성자는 성부의 아들로서 존재하고 성령은 성부와 성자의 영이다. 이 신적인 인격들은 세 고유한 내적인 상호 관계들 안에서 존속한다. 하나님은 성부, 성자와 성령의 독자적인 구별되는 삼중적적인 계시에서 우리를 향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의 양식들과 그 인격들은 독특하고 서로 혼동될 수 없이 분명하게 구별된다. 어떤 인격도 다른 인격들 속으로 흡수될 수 없는 구별성을 지닌다. 이 구별 속에서 하나님은 상호 본질적인 관계 속에서 존재하고 함께 역사하고 우리와 만난다. 이 구별성을 간과하면 우리와 만나는 그리스도의 주체성은 사라진다. 그러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우리를 부르는 그리스도 주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우리 자신과 관계할뿐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부정이다.
사벨리우스는 삼위일체의 세 인격을 절대적으로 한 인격으로 동일시 한 중대한 과오를 범했지만, 후대의 그리스도론에서 사용된 동일본질(homoousios)의 개념을 위한 길을 예비하게 되었다.


IV. 삼위일체 교의의 형성과 그 의미

 

1. 삼위일체 교의의 확립

삼위일체 교의는 콘스탄틴노플의 회의에서(381)사실상 완성되었다. 여기엔 아다나시우스의 영향이 결정적이었다. 아타나시우스가(Athanasisus 373 경) 아리우스의 양태론적 군주론의 유일신론에 반대하고 아버지와 아들의 동일 본질을 확립하게 했다. 그는 아버지와 아들의 동일본질 관계를 확립하기 위하여 수원(水源)과 거기서 흘러나오는 시냇물의 관계로서 설명한다. 아들은 태초부터 인격적으로 존재하였다. 수원과 시냇물은 그 형태가 둘이고, 이름이 둘이지만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것같이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분리될 수 없고 아버지도 아들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 그러므로 아들은 아버지와 동일본질이고 같은 영원성이 인정되어야 한다. 이 아들은 그 기원과 본질에서 피조물과는 다른 상이한 본질이지만(heteroousis), 아버지와는 동일본질이다.(homoosios) 아들이 아버지와 <동질>이고 인격에서만 아버지와 구별된다면, 아들은 창조된 것이 아니고 아버지에게서 출생되었다. 아다나시우스는 아버지와 아들의 동일한 한 본질을 주장하기 위하여 한 본질을 표현하는 "homoousios"(wesens-eins)라는 개념을 본질의 같음을 표현하는 개념 "homoious"(wesensgleich)보다 선호하여 그 개념을 관철시켰다. 그것은 아버지의 신적인 본질에 아들이 참여한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하나님 자신이 우리에게 행동하고 말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는 성자는 성부와 영원한 동일 본질이며 인격에서만 성부와 다르다고 주장하여 진정한 삼위일체의 교리를 주장하였다.
이로써 아다나시우스는 성령론을 삼위일체론적으로 이해하게 하는 데서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아다나시우스는 아들과 아버지의 동질이라는 근거 위에 그리스도에 대한 기도,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집행, 죄의 용서, 부활이 소망을 지닌 구원론적인 성격을 세웠다. 그는 세례예식문에서 살펴볼 때, 성령이 피조물일 수 없다고 확신했다. 성령의 피조물이라면 하나님 안에 다른 어떤 본질을 지닌 것이 있다고 할 수 밖에 없다. 그러면 하나님은 삼위일체일 수 없다. 그래서 그는 성령을 아들에게 종속된 피조물이거나 어떤 신적인 힘과 천사와 같이 보는 견해와 맞서 성령은 아들과 마찬가지로 아버지와 동질이라는 것을 천명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한 분 하나님이 삼중의 인격적인 존재로 나타나고 이로써 자신을 계시한다고 가르쳤다. 여기에 카파도기아 교부들은 세 인격체가 동일한 영광과 하나님의 본질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했다. 카파도기아 학자들의 논리는 삼위일체론의 확립에 크게 기여했다. 그래서 325년 <케아 신조>에는 삼위일체론적인 관점에서 성령론이 "우리는 성령을 믿으며"라는 진술이 진일보 하여 나타났다. 그러다가 362년 아다나시우스가 주관한 알렉산드리아 회의에서 다음과 같이 성령론이 삼위일체론적으로 확립되었다. 여기서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과 동일본질이며 성령은 성부와 성자와 같은 인격"이라고 선언되었다.
이러한 삼위일체 교의는 동방 교회를 대표한 요한(754년 경)과 서방 교회를 대표한 어거스틴(430경)에서 의해서 확정되었다. 요한은 하나님을 한 실체인 동시에 성부, 성자와 성령의 세 인격이고 설명하였다. 그에 의하면 성부는 신성의 원천으로서 출생되지 않는 자이고, 성자는 출생된 자이며 성령은 나오는 자이라고 했다. 이들의 관계는 결토 혼합됨이 없이 상호 충만, 상호 침투의 관계이다. 요한은 종속설을 거부했지만 성부를 신성의 근원으로 보았기에 신플라톤주의의 유출설의 흔적이 엿보이고 성령론의 이해에서 후기에 동서 교회의 논점이된 피리오케(filioque)의 길을 열었다. 그러므로 칼 바르트가 삼위일체는 근원적인 관계에서 동시에 영원한 한 하나님이며 유일한 신적인 하나됨에서 셋이라고 주장한 것은 삼위일체론에서 깊은 의미를 지닌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단일성을 강조하여 삼위일체는 실체, 본질, 능력, 의지에서 한 하나님이다고 말했다. 삼위일체의 각 인격은 완전한 신적인 실체라는 점에서 서로 동일하며 다르지 않다.이러한 의미에서 그는 동일본질이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성자와 성령이 보냄을 받은 것은 그들이 성부 보다 열등하거나 성부에게 종속되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아버지에게서 나오기 때문이다. 삼위일체에서 세 인격은 동등하고 어느 인격도 다른 인격보다 크거나 작지 않다. 한 분 하나님 안에는 세 존재 양식이 있기에 그 중 하나도 다른 하나가 없이는 있을 수 없다. 이 세 인격 사이에는 상호의존의 관계가 있다.
어거스틴의 주된 관심은 구원의 하나님을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론에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드는 데 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단일성을 강조하고 각 인격을 신의 본질 안에 있는 상관적 삼위일체론적 구별이라고 했다. 그는 삼위일체를 다음과 같이 아름답게 표현한다. " 주 우리 하나님! 우리는 성부, 성자, 성령이신 당신을 믿습니다. 당신이 삼위일체가 아니라면, 주님은 가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하는 말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나는 당신을 기억합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주여! 한 분 하나님이신 당신! 성 삼위일체여! 내가 한 분이신 당신의 영감으로 이 책에 기록한 모든 것을 삼위이신 당신이 받아주소서. 그 속에 나의 생각이 포함되어 있거든 한 분이며 삼위이신 당신이 그것을 간과해 주소서."

2. 삼위일체론의 의미

성서의 증언에 의하면 성부, 성자와 성령은 한 동일한 본질이라고 분명하게 말하지 않지만 동일한 본질이라는 충분한 근거를 제공한다. 성부, 성자와 성령은 동일한 본질과 영광 속에서 함께 존재하고 상호관련 속에서 활동한다는 것이 확인된다. 하나님의 한 본질 안에 존재하는 세 인격 혹은 세 실재는 뚜렷이 구별되고 차이가 있다. 그 인격들의 구별과 질서는 너무나 뚜럿하기 때문에 각 인격은 다른 인격 속으로, 상호관계 속으로 해소딜 수 없는 독자성을 지닌다. 자신을 성부, 성자, 성령으로 계시하는 하나님은 상호관계들 안에서 존재하고 활동하고 분명히 구별되는 존재의 양식들 안에서 한 하나님이다. 참된 한 하나님 자신이 세번 다른 양식에서 자신을 계시한 인격들은 독자적이고 서로 구별된다. 그러나 그 신성의 본질과 영광에서 세 인격은 동일하고 일치된다. 신성의 동일 본질 안에서(consubstantialisusmus) 해소될 수 없는 독자적인 인격들의 구분성은 기독교적인 삼위일체론의 본질에 속한다. 세 인격들이 본질에서 한 분이라는 것은 신의 존재의 하나됨(일치)를 단언하면서, 신의 존재의 분열을 부정하는 것이다. 인격들이 세 이라는 것은 신의 존재와 행동에서 분리와 독존을 부정하고 하나님의 존재와 계시의 행동에서 본질적인 상호관련성과 상호침투를 뜻한다. 그래서 어거스틴 표현한 것처럼 "저 최고의 삼위일체 안에서 하나는 셋과 함께 있고 어떤 둘도 하나 없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들 안에서 영원하다. 그래서 한 분은 모두 안에서, 모두는 한 분 안에서, 모두는 모두 안에서 모두는 한 분에서 존재한다."
삼위일체 교의는 성부, 성자, 성령은 "한 분 하나님의 신적 본질이 세 인격 안에"(unitas in trintate)와 "세 인격이 한 동질의 신적 본질 안"(trinitas in unitate)에서 영원에서 영원까지 존재하고 활동했고 하고 있는 것을 표현하다. 그러므로 교회가 성서에서 증언되는 하나님을 바르게 인지하려면 역사적인 교회에서 사용된 개념과는 다른 역동적인 개념을 사용하더라도 "신적인 구원과 활동을 토대로 성부, 성자, 성령의 사귐 속에서, 상호관계와 침투 속에서 하나님의 단일성과 한 유일한 하나님 안에서 성부, 성자, 성령의 사귐을 고백해야 할 것이고 두 진술을 하나로 파악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기독교적인 삼위일체 교의는 하나님은 한 동일한 본질 안에서 세 인격들이 상호의존의 관계 속에서 존재하고 자신을 나타내기 때문에 그 중 어느 인격도 다른 하나가 없이는 있을 수 없다 것을 적시한다. 이것이 구원의 활동 속에 있는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존재 양식이다.
그래서 성부, 성자와 성부의 삼위일체 하나님의 일치와 관계는 어거스틴 이래로 삼위일체적인 관계의 일치로 이해되었다. 삼위일체적인 인격들의 관계는 그 인격득의 특징으로 간주되었다. 아버지는 아들에 대하여, 아들은 아버지에 대하여,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의 끈과 기반에서만 영으로 존재한다. 삼위일체는 단지 상호 관계에서만 존재하므로 다른 인격 없이 존재한 것이 아니다. 성부, 상자와 성령의 본질의 하나됨을 찬양하지만 성부, 성자와 성령의 역사적인 활동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인격들과 속성의 차이는 사라지지 않는다. 한 하나님은 성부, 성자와 성령의 영원한 구별을 인정하면서 찬양된다. 그 구별은 역사적으로 계시된 신적인 계시 양식과 행동들의 차이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것은 성부, 성자와 성령의 영원한 상대 안에서, 서로 위함에서 서로 함께 있음에서와 성부, 성자와 성령의 영원한 사귐과 영원한 침투 속에서 존속한다. 헤겔이 지시한 것처럼 인격성의 참됨은 타자 속으로 침투하고 침투되어짐으로 획득될 수 있으며 인격의 본질은 나와 만나는 다른 인격에 대한 헌신에서 존재한다. 삼위일체 안에서 관계성은 상호적인 자아 헌신의 일치로서 파악된다.
삼위일체 교의는 생명을 창조하고 생명을 수여하시는 살아계신 창조자 하나님, 화해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의 존재양식과 구원의 활동의 신비를 표현한다. 기독교 신앙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성의 단일성에서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상호 관계 속에 있는 사귐을 고백한다. 그러므로 삼위일체 하나님은 기독교 신앙의 대상이므로 기독교 신학은 삼위일체 하나님 인식 안에서 파악된 것을 넘어선 다른 종교-철학적인 사변들을 일차적인 대상으로 삼을 수 없다.
삼위일체 교의는 구원론에서도 중심적인 주제이다. 바르트가 말한 것처럼 하나님은 하나님을 통하여 계시되고 인식되기 때문에 하나님을 계시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은 바로 하나님이라는 의미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에서 하나님 자신이 우리를 위하여 화해의 사건을 성취하지 않았다면, 그리스도 안에서, 그를 통하여 우리는 참된 하나님과 사귈 수 없고 따라서 우리의 구원은 이루어 질 수 없다. 그러므로 삼위일체를 거부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를 통해서 이루신 하나님의 화해와 구원의 사건을 부인하는 것을 의미한다. 세계의 <창조와 화해와 성화>라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업적에 적합하게 성서적인 계시의 하나님의 존재와 활동을 해명하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와 역사에 알맞기 때문에, 신학적으로 타당하다.
그것은 성령의 능력을 통한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하나님과의 사귐에도 해당된다. 하나님이 자신을 개방하는 계시사건에서 우리와 관계할 때, 그는 본질적으로 성자와 성령의 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분으로서 자신을 알린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을 그리스도를 통해서 계시하고 성령은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사건을 인지하도록 조명한다. 성령은 계시의 말씀을 사용하여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하게 하고, 성부와 성자에 대한 믿음을 불러 일으키고 심화시킨다. 이것은 성령이 성부와 본질적인 관계 속에 있는 하나님 자신이기에 가능하다. 이러한 관련성에서 에벨링은 내용에 알맞게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로서 성령으로서 일어났고 현재하는 것은 전부 하나님 편에 속한 것이며 피조물의 차원에 속한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과 관계하는 사람은 하나님 자신과 관계한다." 따라서 성령이 하나님과 동일한 신성과 영광과 능력을 지니지고 않고, 하나님과 본질적으로 관계하지 않는다면, 그는 우리를 참 하나님과 성자에게 연합시킬 수 없다. 그러면 우리의 믿음과 구원의 역사는 빗나가고 말 것이다. 우리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존재는 성자와 성령의 내적인 관계 속에서 존재하고,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존재는 성령의 조명을 통한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자기열림을(계시) 떠나서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삼위일체의 교의는 우리의 구원문제와 직결된다.

 

V. 결  론

 

만일에 역사적인 교회가 삼위일체 교의를 확립하지 못했더라면 기독교는 정체성을 상실하고 기독교의 신앙의 내용과 대상은 삼신론(三神論)으로 전락되었던지 예수 그리스도를 영웅으로 숭배하던지 그를 반신과 반인간으로 믿든지 혹은 제2의 하나님으로 간주하는 종교로 전락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에벨링이 말한 것처럼 "삼위일체는 기독교 신앙의 전체를 하나로 요약한 것이다."
기독교는 성서적인 계시의 내용인 삼위일체에서 선포의 내용을 얻고 그 방향을 결정한다. 기독교의 신앙은 바로 살아 계신 삼위일체적인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이므로 삼위일체의 범위 안에 있지 않는 것은 기독교적인 신앙의 내용이 아닐 것이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계시는 창조 사건을 통해서 그리스도 사건을 통해서 성령의 사건을 통해서 일어났기에 "기독교 신앙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사귐 안에서 한 분, 유일한 영원한 하나님을 필연적으로 고백한다."
이로써 삼위일체 하나님 인식은 하나님의 단일성을 삼위일체의 인격의 총계로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내적인 삼위일체의 삶의 분리할 수 없는 관계성으로 이해한다. 따라서 기독교적인 신앙의 일치도 창조자 하나님. 화해자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에 대한 상이한 신앙의 내용을 논리적으로 종합한 것에서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의 분리할 수 없는 삶의 관계성과 계시 사건에서 발견된다. 바르게 인식되고 믿어지는 곳에 신앙의 이 3차원들이 근원에서 밀접하게 상호 관련된다. 그것은 유일한 신앙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내적인 상호 관계 안에서 존재하므로 영원에서부터 영원까지 고독한 존재가 아니다. 그는 동일한 한 신성 안에서 세 인격들의 사귐이며, 고립된 자아가 아니라, "나와 너"의 영원한 관계 안에서 상대이며, 영원한 "나와 우리"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러한 존재양식은 교의학에서 "내재적인 삼위일체 혹은 내적-신적인 삼위일체"로서 표현되었다. 이 내재적인 삼위일체의 존재 양식은 경륜사적인-구속사적인 삼위일체의 근거와 원형으로 이해되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역사적인 구원의 활동에서 자신을 창조자와 화해자, 성령으로 계시하기 전에 영원 전부터 영원한 내적인 상호 관계 안에서 존재하셨다. 그러나 내재적인 삼위일체론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경륜사와 구원사에서, 즉 창조와 화해와 성령의 새창조 사건에서 드러난다. 동시에 하나님은 역사적인 활동을 통해서 비로서 자신을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계시한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사적인 삼위일체 활동은 영원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 양식에 일치된다. 경륜사적인 삼위일체론은 이 점을 주목해야 그 과제를 바르게 수행할 수 있다. 내재적인 삼위일체는 구원의 경륜사적인 삼위일체이며 그 역도 같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자신 안에 없는 것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말했다. 밖으로 향하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업적은 내재적인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와 분리될 수 없다.(Opera trinitatis ad extra sunt indivisa) 그러므로 내재적인 삼위일체-본질적인 삼위일체와 경륜사적인 삼위일체 간의 역동적이고 본질적인 관련성이 주목되어야 한다.
기독교 신앙의 대상인 삼위일체 하나님이 근원적인 상호 관계 안에서, 서로를 위하여, 서로를 향하여, 서로 안에서, 서로 함께 존재하고 활동한다. 이 삼위일체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한 구원과 사랑의 하나님으로서, 우리와 함께하는 하나님으로서 자신을 계시하고 우리를 부르고 만나고 있다. 그러므로 그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도 바르트가 천명한 것처럼 근원적인 관계안에서 존재하도록 창조된 존제, 즉 함께 있는 존재(Mitsein)로서 창조된 것이다. 너와 우리와 함께 공존하지 않은 인간성은 비인간성으로 그것은 하나님의 계약의 상대자로 창조된 인간성과는 무관하다. 인간성은 이 공존의 현실이다. 판넨버르크에 의하면 삼위일체 하나님의 관계문제의 해명이 바르트의 신학에서 정점에 이르렀다. 그것은 바르트가 하나님의 형상론을 삼위일체의 관련에서 천명하고 동시에 인간의 공존 인간성(Mitmenschlichkeit)을 삼위일체론적인 형상론에서 해명한 그의 인간학에 적중된 평가일 것이다.
이렇게 기독교적인 신앙의 대상인 삼위일체 하나님이 해소될 수 없는 인격의 주체로서 근원적으로 깨어질 수 없는 상관 관계 안에서 상호 침투하면서 일하고 서로를 위하여 존재하고 있다. 그러므로 어떤 기독교적인 공동체도 삼위일체 하나님의 특성을 따라서 이웃을 위한 깊은 상호성과 상호존중와 사랑과 이해의 관계를 형성해 나가야 할 것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깊은 상호의 내적인 관계들이 기독교인들의 가정과 공동체에서 반영될 때,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현실성을 실감할 것이다. 교회는 삼위일체적인 사랑의 성례전적인 공동체로, 포괄적이며 따스한 사랑 안에서 신적인 사귐의 살아있는 신앙고백의 공동체로 부름받고 있다. 깊은 상호성과 관계된 공동체만이, 정의와 평화와 전피조물의 보전을 위해서 그 자신을 투신하는 공동체만이 삼위일체 하나님 신앙 고백에 상응하는 공동체이다.
동방의 신학자들은 성부, 성자와 성령의 각 인격은 신적인 삶의 순환 속에서 다른 인격들과 함께 역동적으로 움직이고, 함께 내적으로 얽혀서 존재하고 행동한다고 하여 삼위일체 교의를 상호관계(perichoresis)라고 규정했다. 페리코레시스(Perichoresis)와 무용의 안무 기술법을 위한 말과의 유사성을 인지한 신학자들은 하나님 생활의 이 내적인, 역동적인 상호관계와 그 힘찬 운동을 신의 춤에 비교한다. 신의 생명은 셋이 창조적인 사랑 안에서 평등한 상대로서 서로를 위하여 역동적으로 상호 작용한다. 여기서 진정으로 자신의 동일성을 지켜면서 너와 내가 <함께 있음 Mitsein>이 실현된다. 이러한 삼위일체적인 하나님의 삶은 체념, 나태, 현상 유지에 머물러 있고 탐욕과 불의로 무너져가는 우리의 공동체를 서로를 위하여 상호 작용 속에서 갱신하고 생명, 정의 평화의 공동체로 부활시키도록 자극하고 영감을 준다.
<각자는 모두 안에서, 모두를 위하여, 모두는 각자 안에서 각자를 위하여, 모두는 모두 안에서 모두를 위하여 우리는 모두 하나이다>. 여기에 인간의 공동체를 위한 삼위일체 교의의 영감과 촉구가 있고 종속되고 변두리로 밀려난 인간들과 사회구조의 개혁을 위한 예언자적인 도전이 있다. 너무나 오랫동안 삼위일체 교의는 무관심 속에 방치되고 오해와 피상적인 인식으로 무시되었다. 이제 평화, 정의, 생명의 공동체의 부활과 함께 삼위일체 교의가 다시 노래부르며 춤추게 해야 할 때가 되었다.

 


출처 : 주사랑
글쓴이 : 항공모함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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