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 설교 모음

[스크랩] 좋은 터를 마련하는 삶 (디모데전서 6:17-19)

하나님아들 2016. 6. 30. 17:07

sg130922     좋은 터를 마련하는 삶 (디모데전서 6:17-19)

 

 

가끔 사람들이 이런 말을 합니다. '예식장에서는 뒤에 앉으라. 예식이 끝나자마자 먼저 가서 자리를 차지하고 음식을 먹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는 앞에 앉아라. 말씀을 들을 때 성령의 은혜가 앞자리에 가장 강력하게 임하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시내버스 기사가 교회를 와서 유심히 교인들을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예배 후에 목사님이 버스 기사와 함께 차를 마시며 대화를 했습니다. 버스기사가 교회에 온 목적은 별난 것이었습니다. "목사님, 버스 운행 중 승객이 많을 때에 뒷좌석은 비어도 가질 않습니다. 이 교회는 어떻게 성공적으로 교인들을 뒷좌석으로 보내는지 배우러 왔습니다."

 

 

스스로 만족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6절).

 

프랑스의 극작가인 빅토르 위고(V. M. Hugo, 802-1885)는 우리네 인생에 세 가지 싸움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첫째는 자연과의 싸움이고, 둘째는 이웃과의 싸움이며, 셋째는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그는 이 세 가지 싸움 가운데 가장 힘든 싸움은 '자신과의 싸움'이라고 말합니다. 6절에 보면 “지족하는 마음이 있으면...”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지족이라는 말의 원문적인 의미는 “스스로”란 말과 “만족하다”란 말의 합성어입니다. 현재 내가 소유한 것의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고 만족하고 감사하는 마음의 상태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4:11절에 “내가 궁핍함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라”고 말씀했습니다. 여기 자족(自足)한다는 말의 더 심오한 원문의 의미는 “자연스럽게 산다”, 또는 “어떤 환경에도 적응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정말 행복하고 부요한 자가 되길 원한다면 지족하는 마음, 스스로 만족할 줄 아는 자족하는 비결을 배워야 합니다.

 

 

서울의 한 집사님이 하루는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인생이 참 따분하였습니다. '직장과 집만 왔다 갔다 하며 세상 재미라고는 조금도 맛보지 못하고 살다니… 나도 세상 재미가 어떤가 한 번 구경이나 해 보자.' 그래서 술집에 한 번 가 볼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서울에 있는 술집에 갔다가 혹 아는 사람을 만나면 큰 코를 다칠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 집사님이 서울에 있는 술집에는 갈 자신이 없어서 부산에 있는 술집에 갔습니다. 여러분, 하지 않던 일을 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아십니까? 술집에 가니 아가씨가 말했습니다. "사장님, 어서 오세요." 그러면 가만히 있으면 될 텐데 집사님이 말했습니다. "저는 사장이 아닙니다." 아가씨가 술을 부어 주었습니다. "아니오. 제가 부어 마시지요." "아니에요. 제가 부어 드리겠어요."하며 아가씨가 부어 주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하며 어쩔 줄을 모르는 것이었습니다. 술집 종업원이 보니 정말 이상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무리 보아도 간첩임에 틀림없었습니다. 신고하면 3천만 원의 상금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손님은 처음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파출소에 신고했습니다. 경찰들이 완전 무장해서 집사님을 잡으러 왔습니다. "왜 이러세요? 왜 이러세요?"하며 끌려갔습니다. 조사를 하니 간첩이 아니라 집사님이었던 것입니다. 그 기사가 신문과 주간 잡지에 크게 보도되었습니다. 여러분, 집사님이라도 주님의 인도를 따라야 기쁘지, 주님 인도를 따르지 않고 엉뚱한 것을 좇아가면 난처하게 되고 망신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스스로 만족할 줄 알며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탐심을 가진 사람은 스스로 만족하며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탐심은 만족할 줄 모르는 병입니다. 자신의 몸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정도의 영양분을 섭취하면 만족감, 포만감을 느껴야 하는데, 먹을 만큼 먹어도 포만감을 느끼지 못해서 계속해서 음식을 섭취하는 폭식증이 있습니다. 신체적으로 폭식증이 있듯이, 영적인 폭식증도 있는데 이것이 바로 탐심입니다. 영적 폭식증인 탐심은 자기학대적인 영적 병으로 만족할 줄 모르는 병입니다. 먼저 탐심에 빠지면, 물질에 집착하고, 소유에 집착하여 어떠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모든 것을 얻으려고 합니다. 탐심에 빠지면 물질이 자신의 신이 되어 물질을 섬기는 자가 됩니다. 탐심에 빠지면, 더 큰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물질이 삶의 목적이 되어 버립니다. 목적 자체가 되어 버린 물질에 눈이 가려져 주위의 사람들을 자신의 탐심을 채우는 수단으로만 여깁니다. 또한 물질에 눈이 가려져 우리 삶에 귀한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영원을 보지 못하고, 영원한 상급을 보지 못하는 영적 소경을 만들어 버립니다.

 

 

탐심의 해악성은 자신의 탐심에 자신이 걸려 넘어져 낭떠러지에 떨어져 버리는 인생으로 만든다는 것입니다. 탐심에 빠지면 정당한 과정을 거치지 않고 일확천금을 얻으려고 하다가 낭패를 당합니다. 그래서 9절에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ruin)과 멸망(destruction)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탐심은 우리 인생을 망가뜨릴 수 있는 엄청난 파괴력을 지닌 것입니다. 본문 10절의 말씀은 더 잘 살아보고, 더 행복하게 살기 위해 물질에 집착했는데, 결국은 염려와 근심으로 자기 자신을 찌르는 자학적인 삶을 살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탐심의 치명적인 해악성입니다. (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지족하는 마음 즉 스스로 만족하며 사는 사람은 물질의 노예로부터 탐심의 함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라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라고 하였습니다. '정함이 없는'의 헬라어 '아델로테티'는 '불확실성'이라는 뜻입니다. 재물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을 수 있으므로 믿을 것이 못 됩니다. 잠언 23장 5절에도 "정녕히 재물은 날개를 내어 하늘에 나는 독수리처럼 날아가리라"고 하였습니다. 오직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후(厚)하신 분으로 그의 자녀에게 영육 간에 필요한 모든 것을 풍족히 채워 주시는 분이십니다.

 

가난한 자든 부자든 바람과 같은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만을 소망하여야 합니다. 쉽게 흔들리는 '재물의 터'를 쌓지 말고 영원히 흔들리지 않는 '하나님의 터'에 모든 것을 쌓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터'는 우리를 풍성하고 즐겁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터' 안에는 풍성한 재물과 즐거움이 있습니다. 하나님 떠난 모든 것은 쉽게 흔들리고 무너집니다.

 

일제 강점기 때 일입니다. 만주 명월구라는 곳에 '감사 장로님'이라는 훌륭한 장로님이 계셨습니다. 그분은 큰 부자였는데, 애국 운동을 하다가 일본 형사에게 잡혀서 형무소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큰 부자 장로님이 형무소에서 온갖 고생을 다 하며 지내자니 이만저만 힘이 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때 사도 바울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아하, 사도 바울도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갇혔는데… 매를 맞아도 감사했는데… 아무것도 아닌 내가 사도 바울을 경험하는구나.' 그러자 너무 기쁜 나머지 그만 밥그릇을 들고 춤을 추었다고 합니다. 변기 통 옆에서 밥을 먹다가 밥그릇을 들고 한바탕 춤을 추자 간수가 "저 영감이 미쳤구나"하면서 보고를 하였습니다. 경찰서장이 그 보고를 듣고 장로님을 불러내었습니다.

 

 

"영감, 밥을 먹다가 변기통 옆에서 춤을 추었다면서?" "예" 싱글벙글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뭐가 좋아서 춤을 추었지?" "바울과 실라가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들어갔는데 거기서 감사하고 찬송을 부르니 감옥 문이 열렸습니다. 그래서 나도 옥문이 열리라고 춤을 추었습니다." "감옥 문이 쇠문인데 어떻게 열려. 이 영감쟁이가 정말 미쳤군. 정말 미쳤어. 이 영감쟁이를 집으로 보내 버려. 무엇 때문에 미친 사람을 가두어 놓는 거야?" 그래서 정말 옥문이 열려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다가 감옥 같은 어려운 일이 있어도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명의 길을 걸어가면 하나님께서 책임지실 줄로 믿습니다.

 

 

영국의 한 신문사가 현상금을 걸고 돈의 정의를 바로 내리는 사람에게 1천 파운드를 주겠다고 했습니다. (지금 환율로 환산하면 약 2000만원) 그랬더니 수많은 경제학자나 기업가를 제치고 신문을 배달하는 소년이 당첨이 되었습니다. 그가 내린 정의는 이렇습니다. "돈이란, 천국 말고는 어디든지 갈 수 있는 여권이다. 돈이란, 행복을 제외한 모든 것을 갖다 주는 공급원이다." 어떻게 이 신문배달 소년이 이런 말을 했을까요? 실물경제에 밝았기 때문이지요. 이 소년은 신문을 배달하면서 부잣집도 보고 가난한 집도 보았습니다. 세상에 돈이 가지는 위력이 얼마나 큰가를 몸소 체험했기 때문에 이런 말을 했던 것입니다.

물질이 가져다 줄 거짓된 안정감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바울 사도의 말씀 그대로 우리는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어야 합니다. 주시는 하나님(GIVER)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인 물질(GIFT)보다 훨씬 더 위대한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썩어 없어질 물질에 소망을 두지 말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선한 사업에 힘쓰는 사람이 되라.(17-19절)

 

행복은 크게 세 가지 차원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1차원의 행복은 자기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세상에는 1차원의 행복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공부를 하는 것도, 사업을 하는 것도, 일을 하는 것도 오직 자기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하는 사람들은 1차원의 행복에만 머물러 있는 사람들입니다. 2차원의 행복은 가족을 위한 것입니다. 혈연으로 맺어진 자기 가족을 위해서 일생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 부모, 남편, 아내, 자녀, 손자, 손녀, 친척을 위해서 피땀 흘리면서 노력을 하고, 그 노력을 보람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더 귀한 일은 3차원의 행복입니다. 3차원의 행복은 자기 자신도 아니요, 가족도 아니요, 전혀 다른 사람,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 이웃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에게서 요구하시는 행복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명령하신 사랑의 2중 계명,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중에서 이웃 사랑을 통해서 이 행복을 우리가 진정으로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를 오직 은혜로 구원해주신 이유도, 이 행복을 누리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3차원의 행복을 많이, 풍성히 누리시고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이러한 3차원의 행복을 풍성히 누릴 수 있도록, 디모데전서 본문을 통해서 우리에게 친절하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17절에서는 디모데에게 부탁하기를, 부한 자들로 하여금 헛된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두게 하라고 하면서, 18절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누려야할 진정한 행복에 대해서 권면합니다. ‘선한 일을 행하라’, ‘선한 사업에 부하라’, ‘나눠주기를 좋아하라’,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우리는 지금 이렇게 살고 있습니까? 이 네 가지 권면대로 살고 있으면, 그 사람은 진실로 3차원의 행복을 누리며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

왜 이렇게 사는 것이 참된 행복인지, 바울이 19절에서 증거합니다.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여기서 ‘좋은 터’란 ‘좋은 보화’란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곧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고 동정하는 자가 되면, 이것이 다 미래에 자기를 위해서 좋은 보화를 쌓는 것과 같아서 결국에는 참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웃을 위해서 무엇인가 행할 수만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참된 행복이요 궁극적인 행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문 18절에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자기만을 위하는 사람은 절대로 부한 자가 될 수 없습니다.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에서도 부자는 영적으로는 가장 헐벗은 자요 불쌍한 자였습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예수님은 찾아 온 관리에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부자인지라 슬퍼하며 돌아갔다고 하였습니다. 성경에서 강조하는 진리는 하나님이 주신 물질이나 재능을 가지고 자기만을 위한 재물로 사용하지 말고 남을 위해 섬기고 봉사하라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선행의 열매를 맺는 자에게는 후손들이 잘 되는 축복을 주십니다. 본인이 받는 축복도 귀하지만, 자손이 받는 축복은 더욱 귀합니다. 시37:25~26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 하였도다 저는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고 꾸어 주니 그 자손이 복을 받는 도다” 옛날 청교도들은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보다 더 주신 것은 우리에게 두 가지 책임을 부여한다. 하나는 감사의 책임이고, 다른 하나는 나눔의 책임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항상 검소한 생활을 실천하면서 이웃을 돌보며 섬기는 사람을 실천하였습니다. 이런 청교도 신앙을 계승한 사람들은 한결 같이 하나님의 은혜로 복된 삶을 영위했습니다.

 

 

본문 18절에 보면 첫째, 선한 일을 행하라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악한자가 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요 청지기인 우리는 누구보다도 선한 일을 행해야 합니다. 둘째, 선한 사업을 많이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냥 착하게 사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이웃에게 유익이 되고 도울 수 있는 선한 사업을 해야 합니다. 셋째,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라. “나눠 주기를 좋아한다”는 말의 헬라어는 “유메타도투스”인데 그 의미는 “대가 없이 주다” “인색하지 않게 주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너그러운 자가 되라”는 말씀은 헬라어로 “코이노니쿠스”인데 그 뜻은 “함께 나누다” 또는 “교제하다”는 뜻입니다. 다른 사람들과 사랑의 교제를 나무며 풍성하고 넉넉하게 주는 자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행 20:35절에 “남에게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복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신 28장에도 말씀하시길 “남에게 꾸어 줄지언정 꾸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였습니다. 감리교회의 창시자 요한 웨슬리 목사님은 신앙과 경제관에 있어서 철저하게 가르치셨습니다. 그는 “돈의 사용법”이라는 설교에서 경제관을 세 가지로 말씀하였습니다. 첫째 규칙,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벌어라”(Gain all you can). 둘째 규칙, 저축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저축하라(Save all you can). 셋째 규칙,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주어라”(Give all you can). 예수님은 누가복음 6:38절에서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요함이 주는 의미

 

부자는 선한 일을 많이 하라는 것입니다. 부자는 하나님이 물질을 후하게 주셨기 때문에 부자가 되었습니다. 자기가 잘 나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넘치도록 선물을 주셨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지요. 그러므로 부자 역시 후하게 나누어주시는 하나님을 닮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부족한 나에게도 이렇게 분에 넘치는 은혜와 선물을 베푸셨다면 이제 나 역시 그 후하게 나누어주시는 하나님을 본받아 베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물질의 축복은 어떤 면에서 하나님이 주신 은사이기도 합니다. 부함의 은사를 활용하여 선한일,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부요함에 대해서 알아야 할 것은 영적인 부자가 진짜 부자라는 것입니다. 부자에는 육적인 부자가 있고 영적인 부자가 있습니다. 영적인 부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본문 말씀 그대로입니다. 마음을 높이지 않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않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사람입니다. 그리하여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어서, 결국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게 하는 것입니다. 여기 19절의 '참된 생명'이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지상에서 물질을 바로 사용하는 사람은 꼭 거기에 비례해서 참된 생명, 즉 영생을 위하여 그만큼의 좋은 터를 쌓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물질을 후히 주시는 하나님을 본받아 우리 역시 후히 나누고 베풀 때 천국에서 얻게 될 참된 생명은 훨씬 더 확고해질 것입니다.

 

피터 마샬이라는 미국의 교계에서 존경받는 목사님이 계십니다. 어느 날 목사님에게 어떤 남자가 찾아와서 고민을 털어놓았습니다. ‘목사님, 저는 한 동안 십일조 생활을 잘했습니다. 십일조 생활에 연봉이 2만 달러 일 때는 십일조로 2천 달러를 드리는 것이 어렵지만 그래도 기꺼이 드렸습니다. 그런데 이제 연봉은 50만 달러입니다. 그러니 이제 5만 달러는 십일조로 드려야 하는데 그것이 잘 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라고 상담했습니다. 그 사람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마샬 목사님은 ‘당신의 말을 들어보니 확실히 문제가 있군요. 이 문제를 가지고 함께 기도하고 싶은데 그렇게 하시겠습니까?’ 그 사람은 반가운 표정으로 ‘그렇게 하겠습니다’ 고 대답했습니다. 목사님은 그 남자의 손을 잡고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사랑의 주님, 이분이 십일조 헌금 문제로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간구하오니 이 분을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이분이 십일조를 드리기에 부담이 없는 정도로 이분의 연봉을 줄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이 일화는 십일조 헌금이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도전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돈이 없으셔서 헌금과 십일조를 강조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십일조를 말씀하시는 것은 세상의 물질주의, 물질의 우상숭배에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려는 하나님이 방법입니다. 물질의 욕심과 물질의 우상숭배로부터 자유하며 해방 된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물질주의로부터 해방되기 위해서는 세상에서 가장 비옥한 땅인 갈대아 우르 지역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향하는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의 결단을 필요로 합니다. 그것은 영적인 도전입니다. 도전이라는 것을 어떤 도전이든지 쉬운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물질주의에서 자유과 해방을 선언하며 십일조 생활을 할 때 복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께서 더 귀한 것으로 채우시며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진정한 복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말씀합니다.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 이 세상을 떠날 때 가지고 갈 것 없는 것이 우리네 삶입니다. 이 세상에 아무도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다 놓아야 합니다. 이것처럼 공평한 것이 없습니다. 이집트 왕들은 어떻게 무엇을 좀 가져가 보려고 피라미드도 만들고 자신을 미라로 만들어 영원히 변치 않도록 조치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지금 시신으로 있을 뿐입니다. 거기에 영광이 없습니다. 있다고 생각하면 착각입니다.

예수님은 마6:19에서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보물을 땅에 쌓아두는 일은 너희를 위하는 일이 아니라” 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자신을 위하여 땅에 보물을 쌓아두려고 합니다. 부자가 되는 것은 바로 땅에 보물을 쌓아 두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위하여 가장 먼저 해야 할일이 보물을 땅에 쌓아두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믿지 않는 사람이나 믿는 사람이나 별 차이가 없습니다. 가장 확실한 노후설계는 보물을 땅에 쌓아두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쌓아두는 것입니다.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아멘

 

 

 

 

 

 

 

 

 

 

출처 : 지저스보이(Jesusboy)
글쓴이 : 물맷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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