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 설교 모음

[스크랩] 나의 친구로 오신 예수 (요한복음 15:13-15)

하나님아들 2016. 6. 30. 17:06

sg130929        나의 친구로 오신 예수 (요한복음 15:13-15)

  

 

어느 교회에 주일학교 시간에 선생님이 유치원 아이들에게 예수님은 우리의 친구라는 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유치원 아이가 집으로 돌아와서 엄마에게 질문을 합니다. “예수님이 내 친구가 된다면 목사님도 친구가 될 수 있는 거지?” 엄마는 아이가 목사님과 친근해 지는 것이 좋아서 “당연히 목사님도 친구가 될 수 있지!”라고 답변을 했습니다. 그 때부터 이 유치반 아이는 목사님을 볼 때마다 “어이 친구 반가워!” “친구야! 친구 방에 들어가서 놀아도 되지!”하며 목양 실에 들어와 온갖 말썽을 부리며 놀다 가곤 합니다. 목사님이 심기가 불편하기는 하지만 예수님도 우리를 친구로 삼아주셨다는 것을 생각하면 어린 친구의 당돌함을 받아주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답니다. 

 

논어 학이(學而) 편에 “친구가 있어 먼 곳으로부터 찾아오니 또한 즐겁지 아니하겠느냐?(유붕 자원방래 불역락호(有朋 自遠方來 不亦樂乎)”라 말이 있습니다.

랄프 왈도 에머슨(Ralph Waldo Emerson)은 “친구를 얻는 유일한 길은 자신이 먼저 친구가 되는 것이다”라고 말했는데, 저 멀리서 우리에게 성큼 다가온 친구에게 등을 돌리지 말고 돌이켜 얼굴을 맞대야 합니다. 로렌스 피터(lawrence peter)는 “누가 그대의 진정한 친구인지는, 그대 자신이 웃음거리가 될 때 드러난다. 진정한 친구는 그대의 실수를 영원한 잘못이라고 느끼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친구에는 네 종류의 친구가 있다고 합니다. 첫째 꽃과 같은 친구, 꽃이 피어서 예쁠 때는 그 아름다움에 찬사를 아끼지 않습니다. 그러나 꽃이 지고 나면 돌아보는 이 하나 없듯 자기 좋을 때만 찾아오는 친구는 바로 꽃과 같은 친구입니다. 둘째 저울과 같은 친구, 저울은 무게에 따라 이쪽으로 또는 저쪽으로 기웁니다. 그와 같이 나에게 이익이 있는가 없는가를 따져 이익이 큰 쪽으로만 움직이는 친구가 바로 저울과 같은 친구입니다. 셋째 산과 같은 친구, 산이란 온갖 새와 짐승의 안식처이며 멀리 보거나 가까이 가거나 늘 그 자리에서 반겨줍니다. 그처럼 생각만 해도 편안하고 마음 든든한 친구가 바로 산과 같은 친구입니다. 넷째 땅과 같은 친구, 땅은 뭇 생명의 싹을 틔워주고 곡식을 길러내며 누구에게도 조건 없이 은혜를 베풀어 줍니다. 한결 같은 마음으로 지지해 주는 친구가 바로 땅과 같은 친구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옛날부터 그 친구를 한문으로 지기(知己)라고 불러왔습니다. 지금 많이 그 말을 쓰지는 않죠. 지기(知己), 그 알 지(知)자에다가 자기 할 때 기(己)자, 그래서 나를 알아주는 사람, 나와 더불어 마음을 같이 할 수 있는, 그리고 내 마음을 이해 줄 수 있는 사람, 이런 친구를 내 인생에서 갖는 다는 것은 분명한 행복의 요소가 아닐 수가 없습니다. 이런 친구를 일찍이 어려서 부터 갖고 있을수록, 또 그런 친구가 주변에 여러 사람 있을수록, 우리 인간의 행복지수는 높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얼마 전 어린 시절에 같이 자랐던 친구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이 친구는 그동안 연락을 잘 안하고 지내던 친구입니다. 내가 먼저 전화를 해도 전화통화가 잘 안되고 전화 통화를 해도 서먹하던 친구였습니다. 그런 친구가 웬일인지 먼저 안부 전화를 한 것입니다. 그래서 집사람에게 “그 친구 이제 철이 들어가는가 봐!” 전화 준 것이 하도 반가워 시간을 내서 충청북도에 살고 있는 이 친구를 한 번 방문할 계획입니다. 

 

     

가장 큰 사랑

 

 

13절에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친구는 친구가 어려움을 당할 때 도와줍니다. 친구는 친구가 외로울 때 위로해 줍니다. 친구는 친구가 기뻐할 때 함께 기뻐하여 줍니다. 친구는 자기의 하는 일을 말해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친구라고 불렀습니다. 약2:23에 "이에 성경에 이른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이사야41:8에도 "나의 종 너 이스라엘아, 내가 택한 야곱아,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아"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친구라고 불러주신 아브라함에게 비밀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18:17에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너희들은 나의 친구라고 말씀하시면서 "나는 친구인 너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릴 것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사랑이 가장 위대한 사랑입니다.

 

 

스티븐 존슨 박사는 진정한 친구에 대해서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당신이 곤경에 처했을 때 금방 부를 수 있는 친구, 당장에 달려올 수 있는 친구가 있습니까? 없다면 당신은 친구가 없는 사람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한참 설명해야 하고, 간곡히 부탁하면 마지못해 와줄 친구는 있어도, 만사를 제쳐놓고 달려올 그런 친구가 보이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 14절 말씀을 보십시오!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주님께서는 분명히 우리의 미쁘고 좋은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문제는 우리도 역시 미쁘고 좋은 주님의 친구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친구란 상호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그 비결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것은 당신이 명하는 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본문 15: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주의 계명은 주께서 제자들을 사랑하신 것 같이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쓰인 '같이'(헬, 카도스)라는 말의 원어는 '만큼', '그대로', '처럼' 등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따라서 주께서는 제자들을 사랑하신 것만큼 서로 그 사랑을 베풀고 나눠야 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14절을 보면 “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과 친구가 될 수 있는 길은 바로 예수님이 명하신 계명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베풀어주신 사랑대로 행하면 주님의 친구가 된다는 것을 명하시고 있습니다. 친구가 되어 주신 주님을 우리 역시 친구로 모시고 살려면 주님의 계명을 따라야 합니다. 그 계명은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하며 살라 하시는 것입니다. 17절에서도 이 사실을 강조하십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라.” 좋은 친구가 있으면 아무리 먼 길도 지루하지 않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좋은 친구란 그만큼 좋다는 것을 보여준 속담입니다. 좋은 친구는 하나님이 주신 최고의 선물입니다. 그런 친구 얼마나 되십니까? 성도들은 친구가 없어도 한 분의 친구는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가장 좋으신 친구입니다.

 

 

친구는 과연 어떤 사람이 친구라고 생각하십니까? 런던타임즈가 친구의 정의에 대해서 현상 모집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 현상모집에서 당선된 1, 2 3등이 나왔습니다. 3등으로 당선된 사람의 정의입니다. “내가 기쁜 마음을 가지고 만나면 기쁨이 배가 되고, 내가 고통스러울 때 만나면 고통이 반으로 감해지는 사람이 친구이다.” 2등은 “너무 괴로워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침묵할 때, 그 말 없는 말을 이해해주는 사람이다.” 1등입니다. “온 세상과 모든 사람이 다 나를 버릴 때, 그 때 찾아와 주는 사람이다.”라고 했습니다.

성경에는 “친구는 사랑이 끊어지지 아니하고 형제는 위급한 때를 위하여 났느니라”(잠17:17) “많은 친구를 얻는 자는 해를 당하게 되거니와 어떤 친구는 형제보다 친밀하니라”(잠18:24)고 하였습니다.

 

 

요한복음 15장 13절에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참된 친구, 영원한 친구가 되어주신다는 결정적인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지 않으시면, 우리는 그의 친구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신하여 그 죄 값인 사망을 지불하지 않고는, 결코 우리가 그와 함께 하거나 가까이 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우리를 그의 친구로 만들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자신의 목숨을 우리의 대속물로 지불하신 것입니다(막 10:45). 그 결과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예수님의 친구로 영광을 받게 된 것입니다. 실로 값비싼 예수의 목숨이 지불된 결과, 우리는 그의 친구가 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의 친구가 되는 데는 예수의 목숨이 지불되었습니다. 그 값은 은이나 금이 아니고,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였다고 하였습니다.

    

 

사랑의 묘약

 

 

잠언3:7-8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 이것이 네 몸에 양약이 되어 네 골수를 윤택하게 하리라.” 잠17:22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

사랑은 묘약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를 가장 뜨겁게 사랑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곁에 두고 우정을 나누며 살면 우리는 아주 강력한 사랑의 묘약을 취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사랑을 할 때에는 뇌에서 엔돌핀(Endorphin), 페닐에틸아민(Phenylethylamine), 옥시토신(Oxytocin)을 분비시킨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이러한 홀몬은 우리 몸을 치유해 주며 건강을 유지시켜 주는 홀몬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사랑을 할 때 면역계(Immune System)에서는 T-임파구(T-Iymphocytes)가 증가하여 면역을 높여주며 암(Cancer)까지도 예방하고 치유할 수 있다고 합니다. . 또한 사랑할 때 내분비계(Endocrine System)에서는 각종의 홀몬을 분비시켜서 평화를 가져오고 생명력과 치유력을 높여주게 됩니다.

 

 

미국 캔사스 주의 토페가에 있는 메닝거 재단에서는 사람이 사랑을 할 때에는 혈액 중의 젖산치(Galactic acid value)가 감소된다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혈중 젖산치가 감소되면 피로를 모르게 만들고 엔돌핀 수준이 높게 되어 행복감을 가져다주기 때문에 훨씬 통증도 덜 느끼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가장 강력한 몰핀 효능을 가지고 있기도합니다.

1979년 미국 오하이오 주립대학 의학부에서는 여러 마리의 토끼에게 대량의 콜레스테롤을 투여 하였습니다. 그들 중에 애정 깊은 보살핌을 받은 토끼가 그렇지 않은 토끼보다 동맥경화증과 심장 발작이 일어날 확률이 50%나 감소되었다고 임상 결과를 보고하였습니다.

 

 

믹멜렌이라는 전문의학자는 미움은 질병을 생산하는 감정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미워할 때 우리의 몸속에 화학적 반응이 일어난다고 합니다. 이 화학 반응에서 생성된 독성이 질병을 유발시키는 원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일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사랑함으로써 우리의 몸속에 독성이 생성되지 않고 육체 속에 치료하는 힘이 생산되도록 해야만 합니다. 두레치유원의 김영준 원장은 “마음이 사랑과 평화 속에 있을 때는 모든 유전자들이 최대의 기능을 갖추고 있으므로 이에 접근하는 발암 물질로부터 DNA의 돌연변이를 막아내어 암이 생기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친구로 받아들이신 이유는 보다 깊고 넘치는 사랑을 함께 나누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친구로 택하여 주신 데는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1)열매를 맺게 하려는 이유입니다. 2)열매를 맺을 뿐 아니라 열매가 항상 있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 말씀은 계속적으로 열매를 거둘 수 있게 하여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추수하면 추수한 알곡을 다 먹어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종자를 남겨 둡니다. 아무리 어려운 때에라도 종자 씨는 먹지 않습니다. 그래서 봄에 다시 씨를 뿌릴 수 있습니다. 성령의 열매도 한 번 맺는 것으로 끝나면 안됩니다. 성령의 열매가 항상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전도의 열매도 한 번 전도하여 열매를 맺는 것으로 끝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계속적으로 전도의 열매를 맺어가야 합니다. 그래서 이 땅에 교회가 계속하여 성장하고 성숙해가야 합니다. 3)기도응답을 받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를 친구로 선택하여 주신 것이 기도의 응답을 받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친구 되신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면 이루어 주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친구가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친구가 좋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요14:13-14에서도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요15: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이런 실화가 있습니다. 너무나도 친한 두 친구가 있었습니다. 같은 마을에서 태어났고, 줄곧 같은 학교를 다녔던 죽마고우였습니다. 군대에도 같이 가게 되었습니다. 그때 1차 대전이 일어났습니다. 둘은 같은 부대원이 되어 월남전에 참전하게 되었습니다. 숱한 전투를 치루며 죽을 고비도 여러 번 넘겼습니다. 그러던 중 종전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상황에 전투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치열한 전투였습니다. 그 와중에 두 친구 중 한 명이 돌격 중에 적탄에 가슴을 맞고 한참 격전 중인 한 가운데 지점에서 쓰러졌습니다. 부상을 입고 헐떡이는 것을 본 다른 친구가 뛰어나가려고 했습니다. 그때 소대장이 팔을 붙잡았습니다. " 저 애는 살려봤자 전투불능 상태야. 그리고 우리가 진격이나 퇴각할 때도 그는 짐만 될 뿐이야. 게다가 너까지도 위험해? 어쭙잖은 감상은 집어치워." 그러나 그 친구는 신음하는 친구를 버려 둘 수 없었습니다. 소대장의 팔을 뿌리치고 총탄이 빗발치는 전장의 정점을 향해 뛰어나갔습니다. 얼마 후 그는 피범벅이 된 친구를 등에 업고 참호 안으로 돌아왔습니다. 등에 업혔던 친구는 이미 죽어 있었고, 업고 온 친구 역시 여러 곳에 총탄을 맞아 숨을 헐떡이며 피를 흘리고 있었습니다. 화가 난 소대장이 소리쳤습니다. "내가 뭐랬어? 네 친구는 죽었어. 너 역시 큰 부상을 입지 않았나. 우리 소대의 전투력 손실도 마찬가지야! 그런 무모한 행동이 도대체 무슨 이득을 줄 수 있어?" 소대장의 다그침에 친구는 희미한 미소로 대신했습니다. 그리고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대답했습니다. "저는 큰 이득이 있었습니다. 그 친구가 제게 말하더군요. `네가 올 줄 알았어!'라고요"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진정한 친구이십니다.

    

 

요한일서 4장 10절에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유대인의 격언 중에 친구에 관한 이런 말이 있습니다. ‘친구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는데 그 첫째는 음식과 같은 친구로 매일 빠져서는 안 되고, 둘째는 약과 같은 친구로 이따금 있어야만 하고, 셋째는 병(病)과 같은 친구로서 이를 피하지 않으면 안된다’ 라고 하였습니다. 내 곁에 어떤 친구를 두느냐에 따라 내 인생이 확연히 달라지게 됩니다. 병과 같은 친구를 두면 늘 내게 아픔과 고통을 안겨 주게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매일 매일 평안을 주며 약이 되어줄 친구가 필요할 것입니다. 이같이 완벽한 친구가 이 세상에 얼마나 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이 자처하셔서 내가 원하는 진정한 친구가 되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롬5:8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불의한 존재였습니다. 우리는 더러운 정욕의 노예로 살아가는 사람이었습니다. 타락하여 버려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을 우리를 건져내시려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죄인이 지시는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종의 신분에서 친구의 신분으로

 

 

오늘 본문 15절을 보면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라고 했습니다. 성경에는 주님과 우리 성도들과의 관계를 여러 가지로 말씀해 주시고 있는데 예수님이 우리를 종이라 하지 않고 친구라고 불러주신다는 것입니다. 종과 친구는 다릅니다. 친구는 만나면 반갑고 부모에게 못할 말도 서로 나누고 위로받는 아주 특별한 관계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들은 말씀을 제자들에게 모두 다 전해주셨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친구는 단지 얼굴을 아는 정도가 아니라 정말 가깝고 서로 신뢰하는 매우 친근한 관계를 가지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주님은 종과 친구의 차이를 설명해 주십니다. 종은 주인의 삶을 공유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친구는 모든 것을 공유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친구라 하십니다. 그러기에 아버지 하나님께 들으신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아낌없이 알게 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무슨 지식을 나누시겠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 앞의 13절 말씀을 보십시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이 말씀 들으면 누가 떠오르십니까? 이 말씀을 하신 주님이 떠오르지요? 그분이야말로 당신께서 하신 말씀대로 친구인 우리를 위하여 당신의 목숨까지 버리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네 친구라고 하신 말씀 속에는 항상 어디 까지든지 너와 동행자가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짧은 인생을 살면서 끝까지 내 동행자가 있다고 하는 것, 나와 함께 같이 인생을 살면서 의논하고 한 목표를 향해서 살아갈 수 있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마음 든든한 모습인지 모릅니다.

 

근대 인류 역사에 있어서 저는 가장 불행했던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아돌프 히틀러?라고 이야기 합니다. 유태인 600만 명을 죽이는 그런 참극의 주인공 이였던 아돌프 히틀러에 대해 그의 전기 작가는 그의 불행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아돌프 히틀러의 불행은 친구가 없었던 불행 이였다? 히틀러의 전기를 쓰기 위해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히틀러의 어린 시절부터 절친했던 친구입니다. 히틀러는 이 친구를 매우 소중하게 여겨 요직에 중용하게 되는데 군수물자를 공급하는 책임자가 되게 했습니다. 친구의 이름은 “엘버트 스피어?인데 히틀러하고 어린 시절을 함께 보냈던 아주 절친한 친구입니다. 스피어는 말하기를 ?그에게 단 한명의 친구가 있을 수 있었다면 그것은 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즉 환상가였고 자신의 카리스마에만 몰두했을 뿐 이였다. 그는 우정에 반응할 줄 모르는 사람이였다. 그는 본성적으로 우정을 거부하였고, 매사에 우리와 공감할 수 있는 것을 의도적으로 피했다. 심지어 그는 우리와 더불어 함께 체리 열매를 먹으며 즐거워하는 것조차도 거부했다. 우리 모두는 단지 그의 거대한 이기심의 투사체에 불과했다. 이 우정을 거부했던 사람, 이것이 바로 내 친구 히틀러의 불행 이였다? 라고 탄식했다고 합니다. 오늘 이 시대를 일컬어 고독의 시대라고 합니다. 진정한 친구를 삼을 수 없는 외로운 시대입니다.

저는 얼마 전 80을 훌쩍 넘긴 형님뻘 되는 친척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동네 친구, 고등학교까지의 동창친구가 약 360명 정도 되는데 다 세상을 떠나고 100여명 남짓 남았다고 한탄합니다. 나이가 들수록 주변의 친구는 떠나가고 새로운 친구는 사귈 수 없습니다. 오직 내 유일한 친구요 온전한 친구는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벗으로 삼았던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 예수님을 친구 중의 친구로 삼아 그 분과 함께 일평생 동행하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출처 : 지저스보이(Jesusboy)
글쓴이 : 물맷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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