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 설교 모음

[스크랩] 비밀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 존스토트

하나님아들 2016. 4. 8. 23:22

‘그리스도와 함께’(with Christ)라는 말은 즉시 장례식과 공동묘지를 생각나게 한다. 왜냐하면 가장 흔한 묘비문 중의 하나가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with Christ which is far better, 빌 2:13)라고 한 성경 구절이거나 혹은 ‘그리스도와 함께’ 라는 문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래 전 1662년에 사용된 장례식의 기도문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전능하신 하나님이시여, 금후로 주 안에서 세상을 떠난 자들의 영혼이 주와 함께 거하게 하시오며, 주와 함께 충성된 자들의 영혼이......기쁨과 복락 가운데 거하게 하시옵소서.”

또한 우리들은 이제까지 쉐필드의 제임스 몽고메리(James Montgomery of Sheffield)가 지은 유명한 찬송가를 많이 불러왔다. 이 찬송가는 데살로니가전서 4:17에 근거한 것으로 1835년에 처음 출판되었다.

“주와 함께 영원히!”

아멘, 그대로 이루어지이다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라 하셨사오니

다시는 죽음이 없으리이다

여기 이 육체 가운데 거할 때엔

나 주를 떠나 방황합니다.

하지만 밤마다 장막을 칠 때마다

매일 한걸음 더 본향에

그리하여 마지막 내 숨 거둘 때

휘장이 둘로 갈라지리니

죽음으로써 나는 죽음에서 벗어나

영원한 안식을 얻으리이다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하셨사오니

그 말씀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보좌 앞에서 다시 아뢸 말씀은

“주와 함께 영원히!”

약 이백 년 전, 유명한 청교도 설교자였던 리차드 백스터(Richard Baxter)도 이와 비슷한 말로 죽음에 대해 쓴 일이 있는데, 그 중심 사상은 빌립보서 1:22,23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

주여, 살든지 죽든지

그것은 나의 관심사가 아니옵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만이 내 할 일이오니

주의 은혜로 허락하여 주옵소서

그리스도께서는 나를 인도하시되

자신이 이전에 지셨던 짐보다 가벼운 것만을 내게 주시나이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는 사람은 누구나

감당해야 할 짐이 있사옵니다.

나는 영생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오며

믿음의 눈도 흐리기만 하오나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것을 아시오니

나로 하여금 주와 함께 거하게 하시옵소서

‘그리스도와 함께’ 라는 말을 들었을 때, 우리가 즉시 하늘나라를 연상했다면, 그것은 신약성경의 영향 때문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주 예수께서도 이와 같이 기도하셨다.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요 17:24). 이 기도를 하시기 전에 주님은 마가의 다락방에서 사도들에게 이렇게 약속하셨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1-3). 그리고 얼마 후,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주님은 회개한 강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

이러한 예수님의 기도와 약속들은 초대 교회 신자들의 뇌리에 깊숙이 박혀 있었음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이와 동일한 내용이 사도들의 서신에서와 특히 바울 서신에서 되풀이되고 있기 때문이다. 바울의 초기 서신들 가운데 하나인 데살로니가전서는 준미의 재림에 대한 기대로 가득 차 있는데, 바울은 말하기를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남은 자들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될 것이며, 그리하여 영광스럽게도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살전 4:15-18; 참고 고후 4:14). 이와 유사하게 다음 장에서 바울은 선언하기를,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든지 자든지(다시 말하면, 주님이 다시 오실 때 우리가 살아 있든지 아니면 그 전에 즉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 고 말하고 있다(살전 5:9-11). 또 다른 예는 바울의 후기 서신인 빌립보서에 나타났는데, 이 편지는 바울이 순교를 눈 앞에 두고 감옥에서 쓴 것이었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은 것도 유익함이니라......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빌 1:21-24).

신약성경에서 보여주는 하늘나라의 기쁨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있게 된다는 이 한 가지 사실에 집중되어 있다. ‘그리스도와 함께’ 라는 말은 우리가 지금 이해하고 경험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친밀하게, 개인적으로 주님과 연합하는 것을 말한다. 실로 우리가 그 때 직접 경험하게 될 주님의 임재에 비하면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주님의 임재는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래서 적어도 바울은 자기의 육체가 쇠하여 가는 도중에 용기를 낼 수 있었던 이유를 설명하면서 담대하게 이렇게 말하고 이TEk. “우리가......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고후 5:6-8). 이것이 현세에서의 삶과 내세에서의 삶을 특징으로 구분짓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생에서 육신을 입고 살 동안에는 제 아무리 사는 것이 그리스도요, 아무것도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과 비교할 수 없노라고 외쳤던 바울일지라도(빌 1:21;3:8) 자신이 “주와 따로 거한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바울이 사용한 동사는 자기 나라를 떠나 오래 여행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생에서 나그네인 것이며, 오직 내세에서만 참다운 의미에서 ‘거하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때라야 우리가 ‘주와 함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바울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 있으며, 그 말을 지지하려 할 것이다. 사실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에서 보이지 않는 동반자 되시는 그리스도와 더불어 산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보다 훨씬 더 놀라운 것을 간절히 열망하고 있다. 어느 날 우리는 믿음으로만 알아왔던 예수 그리스도를 실제로 보게 될 것이다. 그 날이 오면,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주님을 목도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비록 지금은 우리가 주님을 볼 수 없어도 주 안에서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는” 것이다(벧전 1:8). 그 날이 오면, 우리는 또한 죄와 죄책감으로 인해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친밀한 관계 속에서 ‘주와 함께’ 있게 될 것이다. 안개는 말끔히 걷히고, 의심과 어둠의 시간들은 끝이 나며, 우리는 주님의 임재로 인해 만족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그곳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영원한 즐거움”이 있게 될 것이다(시 16:11).

이 땅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지냄

그러나 아직은 그 때가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시를 움직일 수가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것으로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러는 동안에 우리는 마음을 다해 이 땅에서 감당해야 할 우리의 임무를 다해야 한다. 거라사의 귀신들린 사람들이야말로 이러한 의무를 감당치 않으려다가 예수께로부터 엄한 말씀을 들었던 사람이었다. 이 사람은 이전에는 옷도 입지 않고, 정신이 나가서, 아무도 그를 제어할 수 없었으나, 이제는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예수님과) 함께 있기를 간구” 하였다. 사실 이것은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는 간청이었다. 그는 온전하게 되었다. 예수께서는 그를 새 사람으로 만드셨다. 그러니 그가 자기를 구해주신 분과 더불어 방해받지 않고 끊임없는 교제를 나누고 싶어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틀림없이 이전에 자기가 헤매고 다니며 자기 몸을 상하게 했던 그 무덤과 산으로 다시 돌아가기를 원치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그가 나고 자랐을 인근 마을로 돌아가고 싶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 대신에 그는 예수님과 함께 지내고 싶었던 것이다. 누가 그를 비난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예수님은 허락지 아니하시고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친속에서 고하라”(막 5:1-20을 보라). 그는 회피할 수 없는, 증거와 섬김의 의무를 지게 된 것이었다.

거라사의 귀신들린 자는 예수님을 따르는 다른 수많은 사람들의 선구자인 셈이었다. 그들은 경건한 체하는, 현실도피적인 그리스도인들로서 이 세상을 벗어난다는 의미에서 ‘예수님과 함께’ 있기를 원한다. 그들은 구원의 단계를 단축하기를 원하며, 껑충 뛰어 곧바로 천국에 진입하기를 원한다. 물론 이해할 수 없는 바는 아니지만, 그것은 비난받아 마땅한 것이다. 우리는 하늘나라의 영원한 평화 속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게 되기에 앞서 고통스럽고 힘겨운 이 땅에서의 임무를 감당하는 가운데, 보는 것으로가 아니라 믿음으로 여기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지내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아마 고린도 교회에도 이와 같은 성급함이 있었던 것 같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들의 삶이 완전히 새롭게 되었기 때문에, 이제는 자신들이 개종하기 이전에 했던 결혼 서약이나 인종적인 유전 형질이나 사회적인 신분 등과 같은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교제의 장벽을 무너뜨리셨다. 그래서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다(갈 3:28). 그러나 장벽이 없어졌다고 해서 사람과 사람을 구별하는 현실적인 차이까지 없어진 것은 아니다. 바울은 분명히 기록하기를, 만약 종이 자유할 수 있거든 힘써 그렇게 하라고 했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 없는 경우에는 어떻게 하라고 가르쳤는가? 그는 이렇게 말했다.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고전 7:24).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해서 반드시 우리의 사회적 환경이 실제로 바뀌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과 함께’ 라는 말씀이 환경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변화시키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그 말씀이 모든 환경을 완전히 변화시키는 것이다. 새뮤얼 러더포드는 17세기에 살았던 스코틀란드의 신학자로서 영국 국교를 신봉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투옥된 사람이었는데, 그는 자신이 유명한 <편지>(Letters)에서 이렇게 말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젯밤 내 감방에 오셔서 감방 안의 모든 돌들이 루비처럼 빛났다.” 또한 구세군을 설립한 윌리엄 부스 장군의 영애(令愛)는 우리 모두에게 ‘장군’(the Marechale)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녀도 스위스의 너셔텔(Neuchatel)에서 수감되어 있는 동안 이러한 시를 썼다.

내 영혼이 가장 사랑하는 주님

나는 이곳에 주님과 홀로 있나이다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시므로

나의 감방은 천국이 되었나이다

악한 자들이 나를 핍박하여

씁쓸한 곳으로 몰아내었을지라도

그들은 자기들이 모르는 예수게서

나의 기쁨이 되신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옵니다.

주님의 음성에 내 슬픔은 사라지고

하늘의 광명이 두루 비치나이다

철창과 빗장도 주님을 제지할 수 없사오며

주의 사랑스러운 얼굴에서 나를 떼어놀을 수 없사옵니다.

그리고 피터 야코블레비히 빈스(Peter Yakovlevich)도 1936년 러시아의 감옥에서 자기 가족들에게 편지하면서, 주 예수께서 그에게 힘을 주셔서 자기가 그분의 충성된 증인이 되기를 기도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는 이렇게 썼다. “주님과 함께 감옥에 있는 편이 주님없이 자유로운 것보다 더 낫다.” (Three Generations of Suffering, George Petrovich Vins의 전기, Hodder & Stouhgton, 1976, p.41).

위의 세 사람의 예들에서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의 약속이 성취된 것을 볼 수 있다. 주님께서는 만일 우리가 주님과 함께 세상으로 나아가서 어디에서든지 주님 편에 선다면 우리와 함께 해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 요약하면, ‘그리스도와 함께’ 있다는 것은 하늘나라에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초대도 받지 않고서 우격다짐으로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는 없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피할 수 없는 이 땅에서의 의무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우리는 여기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는 것을 경험할 수 있고, 그럼으로써 지상에서 하늘나라를 미리 맛볼 수 있다.

썬다 씽(Sundar Singh)은 인도의 시크교도 집안에서 태어나, 15세 되던 해에 환상을 보고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는 이 사실을 즉각 그의 가족들에게 알렸다. 훗날 그는 이렇게 썼다. “어떤 가족은 내가 미쳤다고 했고, 어떤 가족은 내가 꿈을 꾼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내가 끝내 돌아서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부터는 나를 핍박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핍박은 내가 그리스도 없이 지냈을 때 겪었던 그 비참한 불안에 비한다면 아무것도 아니었으며, 앞으로 다가올 고난과 핍박을 견디는 일도 내게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With and Without Christ, Sadhu Sundar Singh, Cassell, 1929, p.102). 얼마 되지 않아 썬다 씽은 고향을 떠나 순회하는 성자(sadhu)가 되었다. 그가 지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것이 그리스도 없이 지내는 것>(With and Without Christ)이라는 흥미로운 제목의 책이 1929년에 출판되었는데, 이 책의 목적은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삶과 그리스도가 없는 삶의 차이를 보여주려는” 것이었다. 1장의 제목은 “그리스도가 없는 비그리스도인”(Non-Christians without Christ)이고, 2장의 제목은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는 비그리스도인”(Non-Christians with Christ)인데, 이것은 비록 세례는 받지 않았지만 “은밀하게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믿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3장은 “그리스도가 없는 그리스도인”(Christian without Christ)인데, 여기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나는 자신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면서도 전혀 그리스도를 경험해 본 일이 없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그들을 ‘그리스도가 없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른다......그들은 알맹이 없는 조개와 같고, 영혼 없는 육신과 같다.” 4장의 제목은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는 그리스도인(Christian with Christ)' 이며, 이어지는 마지막 두 장에서는 자기의 개종과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체험을 이야기하고 있다.

성자(sadhu) 썬다 씽은 다음과 같은 말로 이 책을 결론짓고 있다. “그리스도가 없었을 때, 나는 물 없는 고기 혹은 물 속에 빠진 새와 같았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함께 살면서부터 나는 사랑의 바다에서 살고 있으며, 이 세상에 살면서도 하늘나라에 있는 것 같다(엡 2:5-6). 이 모든 것들을 인하여 주님께 영원히 찬송과 영광과 감사를 돌린다.”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됨

신약성경에는 ‘그리스도와 함께’ 있다는 말의 의미를 가장 잘 나타낸 구절이 있다. 다음의 짤막한 구절들 속에는 ‘그리스도와 함께’ 혹은 ‘그와 함께’ 라는 말이 최소한 네 차례 이상 등장한다.

너희가 세상의 초등 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의문(儀文)에 순종하느냐......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골 2:20; 3:1-4).

위의 구절들을 살펴볼 때, ‘그리스도와 함께’ 있다는 말에 대한 바울의 개념은 단순한 그분과의 교제보다 훨씬 더 풍부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즐겨 부르는 찬송가의 가사 - “인생의 좁은 길에서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며, 나와 이야기하시네” - 그 이상인 것이다. 물론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더불어 교제케” 하시기 위함이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친구가 되신다고 주장하기를 부끄러워할 필요가 전혀 없다. 예수께서도 친히 사도들에게 “(내가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요 15:15)라고 말씀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있다는 말은 그분과의 교제를 나눈다는 것 그 이상을 의미한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구속사역 가운데 그분의 죽음, 부활, 승천, 그리고 재림과 같은 네 가지의 중요한 사건에 동참함을 의미한다. 우리는 이미 앞의 세 가지 사건을 경험하였으며, 그 날이 오면, 네 번째로 ‘그와 함께’ 하는 경험을 누리게 될 것이다.

첫째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말씀부터 살펴보자. 이런 말을 처음 듣는 사람은 정말이지 괴이하기 짝이 없는 말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라고 했고, 또 “내가 세상을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혔느니라”고 했다(갈 2:20;6:14). 그리고 이 구절들에서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만 언급했던 바울 사도가 다른 곳에서는 믿고 세례를 받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이렇게 말하였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롬 6:3).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혼자 돌아가신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믿음으로(내적으로) 그분과 연합되고, 세례로(외적으로) 그분과 연합된 주의 모든 백성들이 그분의 죽음에 동참하고, 그분과 함께 죽은 것이다.

이 말은 무슨 의미인가? 보통 무엇이 끝났다고 표현하려 할 때, 그것이 ‘죽었다’라고 말하는 것이 가장 극적인 방법이다. 죽음은 종말을 의미하며, 죽음은 끝을 의미한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를 믿기 이전의 옛 생활이 끝났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우리가 그것에 대해 ‘죽었다’고 표현한 것이다. 우리의 이전의 삶은 죄와 자아, 두려움과 죄악의 굴레에 매여 있던 삶이었고,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음으로 하여 보이지 않는 악의 권세[‘세상의 초등 학문’(the elemental spirits of the universe)]에게 종 노릇하던 삶이었다. 그렇게 지내던 시절에 우리는 때로 이렇게 탄식하지 않았던가? “내가 나의 죄악과 내 죄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만 있다면, 나를 좌지우지하는 악한 세력들로부터 벗어날 수만 있다면.” 나는 그처럼 탄식하였다. 그 때 나는 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마땅한 죄의 대가를 치르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리고 그 안에서 이 일을 이미 행하셨다는 사실을 배우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만일 우리가 믿음으로써 개인적으로 그리스도와 연합된다면, 우리는 그분과 함께 죽고 그분의 죽음이 곧 우리의 죽음이 되며, 따라서 죄의 값이 지불되고 빚이 해결되어 결국 우리가 옛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는 사실을 배웠다.

둘째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다”는 말씀을 살펴보자. 우리는 옛 생활에 대해 죽었을 뿐만 아니라 새 생활에 대하여 살았다. 죄악과 속박으로 얼룩진 옛 생활이 끝났을 뿐 아니라 용서와 능력과 자유의 새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우리는 그분의 죽으심 뿐만 아니라 부활하심에 있어서도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 때문에 우리의 커다란 소망은 더욱 더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을 알고자” 하는 것이다(빌 3:10). 신약성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적인 부활이야말로 - 육체적인 부활로 인해 단순히 몸의 노화가 방지된 것이 아니라 새로운 형태의 몸으로 변화된 것이다 - 하나님이 능력이 역사상 가장 최고도로 드러난 사건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부활은 사실상 새로운 창조 행위이기 때문에, 그것은 우주적인 창조와도 연결된다(롬 4:17;엡 1:19 이하 참조).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일으키신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하셔서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 죄의 굴레 아래 죽어있는 우리를 일으키셨으며, 오늘날 우리의 삶에도 역사하심으로써 죄의 권세를 우리 발 앞에 굴복시키시는 것이다(엡 1:19-2:10).

셋째로, “우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감취었다.” 는 말씀을 살펴보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으시고 부활하신 이후에 하늘로 올리우셔서 우주적인 권위를 상징하는 자리인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다. 주님의 백성들은 주님의 구원 사역 가운데 이 세 번째 사건에도 동참한다. 왜냐하면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키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셨기” 때문이다(엡 2:6). 그래서 이제는 우리의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어”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감추인 생명을 지니고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이 땅에 살고 있지만, 그와 동시에 그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늘나라에서 살고 있다. 그들은 멸시를 당하고 핍박을 받으며 매를 맞고 패배하고 짓밟히지만, 실제로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리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 자신도 이 땅에 계실 때에는 사람들이 이해할 수도 없고 침해할 수도 없는, 감추인 삶을 사셨다. 때로 기적을 행하실 때는 예수님의 영광이 드러나기도 하였으나 평상시에는 늘 감취어 있었다. 그래서 주님은 누구에게나 하나의 수수께끼요, 불가사의였다. 그들은 의구심 가운데 “이 사람이 목수가 아니냐”고 물었다. 그들은 예수님의 권위 있는 말씀과 행동을 그분의 비천한 출신 배경과 조화시켜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은 주님을 이해할 수도 없었고, 알아보지도 못했다. 예수님의 존재는 그들에게 감취어 있었다. 그렇지 않고 그들이 주님이 누구신지 알았다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박지 아니하였을” 것이다(고전 2:8).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더욱 더 철저히 감취어 계신다. 그분은 대중들의 눈에서 사라지셨다. 어디에서도 그분을 찾아볼 수 없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주저없이 그분의 존재를 부인한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감추인 삶을 산다. 겉으로 보기에는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 용서를 받기 이전의 삶이나 이후의 삶이 동일해 보인다. 우리의 신분증과 국적과 고향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 우리의 부모님과 남편과 아내와 자식들과 형제자매들과 친척과 친구들도 바뀌지 않았다. 우리의 피부색이나 머리칼과 눈의 색깔도 여전하다. 우리는 전과 다름없이 키가 크거나 혹은 작으며, 말랐거나 혹은 살이 쪘으며, 잘 생겼거나 혹은 평범하게 생겼다. 심지어는 기본적인 기질도 전과 다름없다. 그러나 우리는 새로운 사람들이며, 새롭다고 인침 받는 사람들이다. 우리의 내부에서 변화가 일어났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보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이며, 하나님의 양자(養子)가 되어 그분의 가족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요일 3:1,2). 이제는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신다(롬 8:9).

이제 우리는 새로운 생명, 영원한 생명을 받았으며(롬 6:23;요일 5:12,13), 이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감취어’ 있다. 참으로 우리의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어 있지만, 이 새로운 생명은 여러 가지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 - 하나님께 대해 새롭고 겸손한 확신을 지닌다든지, 역경 속에서도 새로운 마음의 평정을 유지한다든지, (아직까지는 부분적이지만) 전에 없는 절제력을 보인다든지, 이렇게 저렇게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상처를 입은 사람들에 대해 새로운 사랑과 동정심을 보인다든지 하는 것 등이 그 증거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모두 외적인 표시일 따름이고, 그 생명 자체는 감취어 있다. 우리는 감추인 그리스도와 함께 감추인 삶을 살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우리 생명’ 이 되신다(골 3:4). 사람들이 우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비밀이시기 때문이다.

넷째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나타나리라”는 말씀을 살펴보자. 어느 날엔가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통치하고 계신 예수께서 다시 오실 것이다. 감추인 예수께서 나타나실 것이다. 예수님의 재림은 초림 때와 완전히 다를 것이다. 물론 동일한 예수님이시오, 영원한 독생자이시고 성육하신 아들이시며, 유일한 신인(神人)이신 점은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과거에는 비천하고 부끄러운 모습으로 오셨던 예수 그리스도께서 장차 다시 오실 때에는 눈부시게 위엄있는 모습으로 오실 것이다. 과거에는 예수께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오셨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배척을 당하셨다. 그러나 장차 다시 오실 때에는 당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나타내 보이실 것이며, 그리하여 우주적으로 인정과 찬사를 받게 되실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와 함께’ 나타날 것이다. 우리의 비밀은 밝혀질 것이다. 우리가 어떤 사람들이었는가 하는 것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오로지 하나님의 긍휼로 인해 그분의 구속 받은 자녀가 되었다는 것이 알려지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 어떤 의미로는 우리의 이해를 초월하는 -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그 영광에 참예하게 될 것이다.

이처럼 예수님의 죽음, 부활, 승천 및 재림은 역사적인 사건들일 뿐 아니라 바로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과거에 참예했고, 지금도 참예하며, 미래에도 참예하게 될 개인적인 사건들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개인적으로 연합되고, 그분의 백성으로서 그리스도와 함께하고 있는 우리는 과거에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부활했으며, 현재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감취어 있고, 미래의 어느 날에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나타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신약성경에서 말한 바,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있다는 말씀의 주된 의미이다.

실제적인 결과들

그리스도의 죽음, 부활, 통치 및 재림에 참예한다고 말할 때 부딪히게 되는 어려움은 이런 것이다. 즉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그것은 아무 의미도 없는 꾸며낸 이야기로서, 그리스도인들의 현실도피를 정당화해주는 변명거리로나 사용된다면 또 모를까 실제적인 모든 문제들에 있어서는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으며, 우리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바울 사도가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심오한 신학을 펼친 까닭은 그것을 매일 구체적인 삶에 적용시키기 위함이었다.

캔터베리의 전(前) 대주교였던 마이클 람제이(Michael Ramsey)는 ‘슬픔과 기쁨’ 이라는 제목으로 행한, 어느 서품식의 강설에서 ‘주 안에서 기뻐한다’는 말을 이렇게 설명했다. “하나님 안에서 기뻐한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도성(都城)이시오, 환경이시오, 우리가 숨쉬는 공기가 되신다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성 어거스틴은 말하기를 ‘하나님께서는 우리 영혼의 도성이시다’라고 했습니다. 그 도성에 살면서 우리는 우리의 현재 상황에서 당하는 슬픔을 마다하지 않으며 - 실로 우리는 이러한 슬픔에 더욱 민감해지기를 기대할 수도 있습니다 - 다만 그 슬픔을 하나님의 관점으로, 하늘의 관점으로, 영원한 관점으로 바라봅니다. 나는 오늘날 우리들의 교회가 의심과 불확실함과 부정적인 생각과 의욕 상실에 사로잡혀 있는 주된 이유는 우리가 영혼의 도성이신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교회가 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도성에 있을 때, 우리는 포괄적인 안목을 가지고 문제들에 대처해나가면서 성도들의 기쁨에 참예하게 되는 것입니다(A Christian Priest Today, A. M. Ramsey, SPCK, 1972).

첫째로, 우리에게는 새로운 시야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옛 생각에 대하여 죽고 새 생활에 대하여 살아났기 때문에 “위엣 것을 찾으며”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다(골 3:2,3). 그런데 ‘위에 있는 것’과 ‘아래에 있는 것’ 또는 ‘하늘에 있는 것’과 ‘땅에 있는 것’ 간의 차이가 종종 오해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오해하기를, 바울은 지금 그리스도인들에게 세상에서 감당해야 할 그들의 임무는 뒤로 제쳐두고 신비한 체험에 몰두하라고 권유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말씀은 우리에게 가정과 직장과 사회에서 감당해야 할 임무들을 버려두고 종교 속으로 들어가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위엣 것’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의와 평강으로 통치하고 계신 것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땅엣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기 중심적인 우리의 옛 생활에 속한 것들이다. 이와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는 까닭은, 바울 사도가 5절에서 ‘땅에 있는’ 이라는 동일한 표현을 사용하면서, 그것은 “음란과 부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고 정의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들 대신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하는 최고의 선(善)인 ‘위엣 것’을 찾아야 한다. 우리는 그것을 ‘생각하고’ 한결같은 마음으로 추구해야 한다.

바울의 권면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라”는 예수님의 명령과도 궤를 같이 한다(마 6:33). 이것이 우리의 지배적인 생각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머릿속으로만 하나님의 통치를 인정할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과 동료 인간들의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그리스도를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의로우신 통치에 착념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에게는 새로운 표준이 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부활한 우리들이 예전처럼 살며 예전처럼 행동할 수는 없는 일이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바울은 논지를 펴나가기 위해 성적인 부도덕을 예로 들었다. 그 이유는 그것이 유일한 죄이거나 가장 나쁜 죄이기 때문도 아니고, 그리스도인들이 성에 대해 병적인 강박 관념을 지니고 있기 때문도 아니라, 부도덕이야말로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는 말씀의 현저한 예증이 되기 때문이다(5절). 성적인 부도덕은 다른 사람의 희생을 바탕으로 자신의 만족을 추구하기 때문에 ‘탐욕적’ 이며, 하나님을 보좌에서 몰아내려는 오만하기 이를 데 없는 감정이기 때문에 ‘우상 숭배적’이다. 바울은 점잔을 빼며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진노가 이처럼 탐욕적인 우상 숭배에 굴복한 사람들에게 임하는 것이다(6절).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행하였다고 덧붙인다(7절). 그러나 이제 그들은 새로운 표준을 가지고 있다. 탐욕 대신에 절제가 있으며, 우상 숭배 대신에 예배가 있다.

셋째로, 우리에게는 새로운 관계가 있다. 우리가 내버려야 하는 것은 부도덕한 삶과 탐욕적인 우상 숭배만이 아니다. 우리는 “분과 악의와 훼방과 부끄러운 말”과 거짓말 등과 같은 모든 더러운 옷들을 “벗어 버려야” 한다(8,9절). 그대신 우리는 “긍휼가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과 같은, 찬란하고 새로운 그리스도인의 옷을 “입어야” 한다. 우리는 서로 용납하고 피차 용서해야 하며, “이 모든 것 위에” - 가장 훌륭하고 가장 빛나는 옷이라고 할 수 있는 - “온전하게 매는 띠인 사랑을 더해야” 한다(12-14절). 이처럼 완전히 새로운 옷으로 갈아 입어야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그것은 새로운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은 우리의 새로운 삶이 새로운 공동체 안에서 사는 삶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더 이상 인종이나 사회적 지위로 인한 장벽이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거기는 헬라인과 유대이니이나 할례당과 무할례당이나 야인(野人)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분별이 있을 없기” 때문이다(11절).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자기에게 돌아오는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이 새로운 삶의 독특성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된다. 새로운 삶에는 새로운 시야가 있고, 새로운 표준이 있으며, 새로운 관계가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독특성은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때 주어지는 것들이다. 바울은 기독교 윤리의 공고한 기반을 확립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죄에 대하여 죽고, 능력으로 부활했으며, 승천하여 감취어졌다가 승리의 환호 가운데 나타나리라는 엄청난 진리를 선포한 것이다. 그래서 만일 우리가 새로운 시야(그리스도의 의로운 통치를 구하는 삶)와 새로운 표준(절제와 예배와 경건)과 새로운 관계(새로운 공동체 안에서의 겸손과 사랑)를 계발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어떤 사람들인지를 기억해야만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으며, 우리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감취어 있고, 장차 그리스도와 함께 나타날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사람들인가하는 것의 핵심은 바로 우리가 구원 사역의 각 단계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다는 사실에 있다. 우리를 변화시키는 데 있어서 이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하는 진리는 없다. 우리가 이러한 진리를 붙들게 될 때, 우리는 과거와 현재는 현저하게 달라질 것이다. 우리는 뒤로 물러갈 수도 없으며, 그렇다고 그 자리에 머물러 설 수도 없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내용출처 : <중심되신 그리스도>(존 스토트, 박성호역/여수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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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대한민국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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