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믿음으로
로마서 1:17
(여는 말)
(동영상 7분 15초)
오늘은 종교개혁 주일입니다. 개신교가 이 땅에 태어나게 되는 첫 출발이었습니다. 중세기까지 기독교는 로마 카톨릭과 동방 정교회로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그중에 가장 큰 세력을 가지고 있던 교회는 로마 카톨릭입니다. 초대교회로부터 시작된 기독교가 세월을 거듭하면서 조금씩 말씀에서 멀어져가고 있었습니다. 성경에도 없는 제도가 만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1215년 제4차 라테란 공의회에서 '고해성사'제도가 만들어졌습니다. 그 회의의 결과를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분별력 있는 나이에 도달한 모든 신자는 자기의 죄를 직접 자신의 사제에게 숨김없이 고백해야 하며, 사제가 부과한 속죄 행위를 수행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때부터 고해성사가 시작된 것입니다. 죄 용서함을 받는 사죄에 교리가 왜곡되기 시작했습니다. 1500년 초에는 '면죄부(免罪符)'라는 제도가 만들어 졌습니다. 죄를 지은 사람이 면죄부를 돈으로 사면 그 죄가 없어진다는 겁니다. 고해성사를 통해 속죄하던 것이 이제는 노골적으로 돈으로 죄를 해결하는 방법까지 등장했습니다. 당시 면죄부는 교황청과 사제들의 중요한 돈줄이었습니다. 면죄부를 장려하기 위해서 테뵉이라는 신부는 이렇게까지 말했습니다.
"동전이 돈궤 속에서 짤랑 소리를 내는 순간, 영혼은 연옥으로부터 천국으로 튀어 오른다."
얼마나 잘못된 방법입니까? 그뿐 아니라 중세 카톨릭 교회는 성직을 매매하는 일까지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중세기 로마 카톨릭 교회는 철저히 부패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역사에서 중세기는 암흑기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교회가 부패하고 있을 때 한 사제가 진리를 외쳤습니다. 그가 바로 종교개혁을 일으킨 마르틴 루터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이 문제를 주교에게 건의하고 교황에게 건의하였지만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자 1517년 10월 31일 그가 교수로서 신학생들을 가르치던 비텐베르크 대학 게시판에 95개 조항을 붙였습니다. 거기에 로마 카톨릭 교회의 잘못된 교리와 제도를 낱낱이 지적했습니다. 그것이 출발점이 되어 종교개혁이 일어나고, 오늘날 루터교, 장로교, 감리교 같은 개혁교회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1. 오직 믿음으로 받는 구원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의 기치를 올리게 된 것은 단순히 교회의 부패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근본적으로 교회가 잘못된 진리에 의해 노예가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루터가 성경을 통해서 밝히 깨닫고 선언한 첫째의 진리는 우리의 구원은 선행이 아니라 믿음으로 얻는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얻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사람 가운데에는 어느 누구도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어 구원받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용서하실 수 있으시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사랑과 은혜만이 구원의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그 진리가 바로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루터도 처음에는 그 진리를 잘 몰랐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라는 구절을 볼 때마다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하나님의 의", 거룩하신 하나님, 한 점 결점도 없으신 하나님을 생각할 때마다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는 두려움의 대상이었습니다. 끊임없이 실패하고 끊임없이 좌절하는 것은 자기의 내면에서 솟아나는 육체의 정욕과 탐심을 이기기 어렵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루터는 그것을 이기기 위해 끊임없이 금식을 했습니다. 심지어는 루터가 있던 수도원 원장이 루터에게 금식을 금지하는 명령을 내릴 정도였습니다. 아무리 고행을 해도 스스로 구원의 확신이 없던 그에게 성령님의 은혜로 깨달음이 왔습니다.
"하나님의 의"는 진노하시는 심판의 하나님이 아니라 독생자를 아낌없이 내어주시는 사랑의 하나님의 의라는 사실입니다. 즉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오직 그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는 믿음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가운데 어느 누구도 완벽한 삶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는 행동이 올바르기 때문에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용서하시기 때문에 구원받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8~9에서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고 했습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은혜로 주시는 선물입니다.
2. 삶으로 나타나는 믿음
그런데 한국교회에서는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말에 대해 많은 오해가 있었습니다. 이 말을 단지 선행을 할 필요가 없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은 오류입니다. 믿음은 머리 속에서만 있어서도 안되고, 종교적 의식에 머물러 있어서도 안됩니다. 믿음은 삶 속에 녹아서 삶으로 드러나는 가치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행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어떤 투자자문 전문가가 인터뷰를 한 내용을 인터넷에서 읽었는데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이분이 증권회사에 취직을 했을 때 상사가 주의를 주는데, 앞으로 영업할 때 가장 조심해야 할 사람은 교회의 장로, 권사, 목사라고 했습니다. 기독교인으로서 그런 소리를 듣는 것이 매우 기분 나빴지만 이 사람의 10년동안 증권회사 생활을 통해서 얻은 결론도 역시 똑같더라는 것입니다. 직분이 문제가 아니라 확실히 기독교인이 더 물욕적이고 세상적이고 구복적이더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흔히 쓰는 말로 "믿음 좋다"는 말은 어떤 사람들에게 씁니까? 주일을 빠짐없이 잘 지키고, 십일조를 빠짐없이 드리고, 새벽기도 열심히 하고, 기도를 해도 신령한 느낌이 들고, 신령한 은사를 받는 것 등등....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런 것이 다 소중하고 좋은 믿음을 위해 꼭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주일을 지키기를 원하시고, 예배 잘 드리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주일성수는 믿음의 기본입니다. 그러나 주일을 잘 지킨다는 것만으로 "믿음 좋다"고 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십일조나 새벽기도나 신령한 은사나 모두 그것 자체가 "믿음 좋다"라고 말할 믿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단지 믿음을 담는 그릇, 형식일 뿐입니다. 십일조는 내 소유의 전부가 하나님의 것임을 고백하는 신앙고백을 담는 그릇, 새벽기도는 내 하루를 먼저 하나님의 뜻에 맡기고 따르겠다고 결단하는 믿음의 그릇입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보다 내면의 동기,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진짜 중요한 것입니다.
종교 개혁이 왜 나왔습니까? 구원을 어떤 신앙행위의 댓가로 생각한 잘못 때문에 종교개혁이 필요했습니다. 카톨릭은 면죄부를 사고, 고해성사를 하고 하는 것 등 신앙의 행동들을 구원의 방편, 곧 믿음으로 보았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은 어떠했습니까? 그들은 율법을 지키는 행위로 하나님을 바로 섬기는 것이고 구원을 얻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레미야 시대나 이사야 시대나 마찬가지입니다. 각각의 시대에 그 당시에는 그것이 바른 믿음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어떤 행위나 공로도 구원을 얻는 바른 믿음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믿음은 아무런 선한 행동이 필요하지 않다는 말은 아닙니다. 믿음은 가치관입니다. 그렇다고 관념에 그치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은 삶입니다.
야고보서 2:17입니다.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야고보서 2장에서는 히브리서 11장에서 믿음의 본보기로 소개된 인물들의 믿음을 행함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행함은 믿음이 관념에 머물러 있지 않고 실천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성도님 중 한 분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교회 다니는 이유가 단지 구원받기 위해서라면 그것은 잘못되었다."
여러분 생각은 어떠십니까? 저는 이 말씀 안에 많은 함축된 내용을 보면서 공감합니다. 현대 한국교회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의 잘못된 행태에 대한 통찰이 들어있거든요.
단순화시켜서 말씀드리자면, 교회 다녀서 예수 믿고 천당 가면, 그 나머지는 아무 것도 신경쓰지 않는 신앙은 잘못되었다는 것이죠. 신앙생활은 삶에 거룩한 영향을 미쳐야 한다는 뜻이 아닌가 합니다. 예수 믿으면 천당 가기 이전에 이 땅에서 사람이 달라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 믿어도 여전히 거짓말하고, 예수 믿어도 여전히 탐욕스러우며, 예수 믿어도 여전히 서로 시기하고 다투며, 예수 믿어도 남 욕하는 삶을 산다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취지가 아닌가 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에는 실천이 따라야 합니다. 그런데 믿음에 따르는 행위들을 보면 우리의 믿음의 대상이 되는 하나님의 뜻과는 다른 것이 많이 보입니다.
1970년대 이래 교회도 물질과 성공을 추구하는 구복신앙으로 왜곡되어 왔습니다. 예수 믿으면 예수님을 닮는 삶의 변화가 따라야 하는데 그런 것은 없고 오직 믿음으로 구원 받으니까 예수 믿는 것으로 천국행 티켓 따놓았다고 생각합니다. 단지 열심을 내는 부지런한 신앙생활은 세상에서 성공하고, 세상에서 많이 가지며, 세상에서 높아지고자 하는 욕망들을 채우는 방법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이용하고자 하는 노력일 뿐입니다. 교회조차도 스스로도 커지고 재정이 풍족해지면 하나님의 복을 받고 능력있는 교회, 능력있는 목사로 간주합니다. 이제 능력있는 기도는 목사나 평신도나 마음 속의 탐욕을 성취하기 위한 '자기 최면' '자기 암시'처럼 간주되고 있습니다.
믿음이 요청하는 실천은 그런 실천이라고 말하면 곤란합니다.
3. 참된 믿음으로 사는 그리스도인
오늘 본문에서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라고 하였습니다. 이 부분을 영어성경에서는
For in the gospel a righteousness form God is revealed, a righteousness that is by faith from first to last
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믿음으로 믿음에 이른다"는 말은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으로 인도된다(that is by faith from first to last)"는 뜻입니다.
갈라디아 3:1~5입니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 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 /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듣고 믿음에서냐
우리가 복음을 듣고 믿어 이 세상에 죄에서 구원받아 천국 백성이 되었는데, 왜 이 세상의 탐욕과 욕망에 매이는 것을 추구합니까? 성령으로부터 복음을 받았으면 계속해서 성령으로부터 인도하심을 받아 우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게 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세상적인 모든 가치관을 내려놓고 성령님이 깨닫게 해주시는 하나님의 가치관으로 사는 것입니다. 돈도 벌지 말고, 공부도 열심히 하지 말고, 세상에서 부러운 어떤 것도 무조건 떠나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런 것을 성취하는 것에 모든 소망을 두지 말고, 그것을 성취할 때 하나님의 방식으로 하라는 뜻이지요.
믿음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이 인도하심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지난 주에도 보셨듯이 여리고 성민들 모두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인 것을 알았고, 하나님이 참 신이신줄 알았습니다. 그들은 애굽에서 재앙이 일어난 일과 홍해를 건넌 일부터 요단강 동쪽에서 아모리 왕 시혼과 바산 왕 옥이 어떻게 진멸되었는지 다 듣고 다 알았습니다. 그들의 간담이 녹았습니다. 그들은 분명히 그 모든 소문이 사실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에 구원받은 사람은 라합 밖에 없었습니다. 믿는 것을 실천한 사람이 라합 뿐이었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 2:19 말씀입니다.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바울이 쓴 이 편지, 로마서는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에게 보낸 편지가 아니라 믿는 성도들에게 보냈습니다. 그런데 15절에서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라고 하고 있습니다.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왜 복음이 필요합니까? 한 번 믿어 구원받으면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늘 그 복음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고 사는 우리의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 믿는다면서 여전히 세상사람들 처럼 탐욕스럽고, 서로 미워하며, 서로 싸우며, 거짓말하면서 죄에게 지고 마는 것입니다.
복음은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요한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믿음은 그 복음 위에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뿌리 내리고 믿음 대로 사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고향을 떠날 때 갈 바를 알지 못했지만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롬 4:18)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애굽을 탈출하여 나왔을 때, 오직 구름기둥 불기둥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만 바라보며 따라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왜 하나님을 원망하고 믿음이 없다고 책망받습니까? 생각해보십시오. 홍해를 건넌 기적을 체험했지만 먹을 양식이 떨어지고 풀 한포기 나무 한 그루 없는 광야에 던져졌을 때 무엇을 먹을까 염려하고 두려움을 갖는 것은 당연하지 않습니까? 물 한 모금 먹지 못하고 사막을 며칠이고 걸을 때 절망감이 찾아오지 않겠습니까? 그런 당연한 인간적인 반응이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믿음 없다고 웃을 수 있지만 우리가 그 상황과 처지에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을 자신이 있다고 누가 말할 수 있습니까?
믿음이란 바로 그럴 때, 인간적인 방법을 동원하지 않고, 도무지 길이 없는 것처럼 생각될 때조차, 신실하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내 운명을, 내 생명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맺는 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삶에 어려움이 있습니까? 도무지 해결책이 모이지 않는 난관이 있습니까? 그럴 때 주님께 다 맡기시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 믿음은 갑자기 생기지 않습니다. 믿음에서 믿음으로 이릅니다. 나날이 자라갑니다. 하루에 하루 분량만큼씩 믿음으로 살 때 어느 순간에 어떤 비바람에도 꺾이지 않는 거목과 같이 견고한 믿음이 자라 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삽니다.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와 능력을 매일매일 누리며 승리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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