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고린도후서 12:7~10
(여는 말)
영화의 한 장면을 보신 후에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영화 상영)
이 영화는 "레 미제라블(Les Miserables)"이라는 제목의 영화입니다. 프랑스의 문호 빅토르 위고의 소설을 영화로 만든 작품입니다. 최근에 영화로도 제작되고 뮤지컬로도 온세계에 공연되어 많은 감동을 주었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 이 소설을 아동용으로 번역하면서 "아! 무정"이란 제목으로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대부분 그 주인공의 이름인 "장발장"으로 더 잘 알려져 있습니다.
시대적 배경은 프랑스 대혁명 발발이후 왕정과 공화정이 엎치락 뒤치락 하던 1800년대 초반입니다. 주인공 장발장은 젊을 때 너무 배가 고파 우는 조카를 위해 이웃 빵집의 빵을 훔치다 잡혀 감옥에 들어갑니다. 5년 징역형을 선고받은 후 4차례의 탈옥을 시도하였고 잡혀 19년을 감옥에 갇혀 노역을 하며 고통을 당하다 가석방이 되어 풀려납니다. 감옥에서 보낸 19년동안 그의 마음은 늘 억울함과 분노로 이글거리며, 기회가 있는 대로 저항하며 모든 사람과 싸우는 짐승과 같은 삶이었습니다.
가석방으로 감옥에서 나왔지만 그는 가는 곳마다 경찰에게 자기 행선지를 밝혀야 하는 보호관찰자의 신세였습니다. 그런 장발장의 손에 19년간 노역한 값으로 감옥에서 받은 돈은 있었으나 어떤 여관에서도 잠을 재워주지 않았고, 어떤 식당에서도 음식을 팔지 않았습니다. 그는 길거리에서 자고 굶으며 감옥 안보다 더한 절망 가운데서 세상을 향한 분노를 불태우고 있었습니다.
오늘 보신 장면은 그 상황에서 어떤 성당의 신부님을 만나 은혜를 입는 장면입니다.
1. 은혜에 감사할 때 누리는 복
장발장은 자기에게 호의를 베풀고 먹여줄 뿐 아니라 침대에서 잠을 자게 해 준 그 신부께 감사하기는 커녕 은수저를 훔칩니다. 훔치다 들키자 은혜를 베푼 그 신부님을 때려 실신시킨 후 도망을 칩니다. 눈에 띄는 행색과 행동으로 금방 경찰에게 붙들려 잡혀왔을 때, 얼굴에 맞은 상처를 그대로 지닌 채 신부님은 장발장을 배은망덕한 도둑이라고 나무라기는커녕 은촛대까지 주었는데 왜 가지고 가지 않았느냐고 하면서 도둑이 아니라고 오히려 감싸줍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잊지 말게. 새 사람이 되기로 한 약속을"
"왜 이런 호의를 베푸십니까?"하고 묻는 장발장에게,
"이젠 자넨 우리 형제네. 이 은으로 자네의 영혼을 샀네. 이제 증오에서 벗어나게. 대신 내가 자네에게 하나님을 돌려주네."
19년동안 감옥에 갇혀 있던 장발장. 그가 지금 비록 석방되어 나왔지만 그는 여전히 증오와 분노의 감옥에 갇혀 있었던 것입니다. 그에게 있어서 진정한 자유는 바로 이 마음의 감옥에서 풀려나는 것입니다.
그후 장발장은 새로운 인생을 삽니다. 마들렌느란 새로운 이름으로 채석장 노동자 생활을 하다가 워낙 성실하여 채석장 주인의 뒤를 이어 사장이 되고 '비구' 라는 조그만 시의 시장이 됩니다. 채석장 사장으로서 그는 가난한 빈민에게 생존을 할 수 있는 일자리를 주는 사람입니다. 채석장 인부 출신으로 사장이 되었다고 자기를 무시하고 공개적으로 모욕을 주던 포쉬르방이 마차에 깔려 죽게 되었을 때 목숨을 걸고 마차를 들어올려 그를 구해줍니다. 채석장 직공으로 일하다 해고되어 딸을 위해 창녀가 된 판틴느의 마지막을 돌봐주고 그 딸 코제트의 아빠가 되어줍니다. 끝까지 자기를 추격하며 비밀을 들추고 감옥으로 되돌려 보내려고 하는 형사 쟈베르 때문에 도망자 신세가 되지만 채석장의 모든 주식을 노동자들에게 나이에 비례해서 나누어줍니다. 새로운 딸이 된 코제트의 연인 청년 혁명가 마리우스를 죽음에서 구해주며, 심지어 형사 쟈베르조차 죽음의 위기에서 살려줍니다.
감옥 안에서나 석방된 이후에나 언제나 증오와 분노로 이글거리던 장발장의 인생이 복된 인생으로 바뀌었습니다. 비록 그의 행복을 그냥 두고 보지 못하는 악한 경찰 쟈베르 때문에 끊임없이 도망다니는 신세가 되지만, 그는 채석장의 사장으로서, '비구'시의 시장으로서, 코제트의 아버지로서, 언제나 이웃을 섬기며 사랑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의 이런 인생의 전환은 전적으로 신부님이 베풀어준 그 자그마한 호의에 대한 감사의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은혜를 입고 감사하는 마음이 그 안에 눌어붙어 있던 증오심을 녹여서 그를 얽어매던 사슬로부터 풀려나게 하였습니다. 하나님께로 되돌려 놓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감사하는 인생이 복된 인생입니다. 신약성경의 절반을 기록한 바울 사도는 그의 편지에서 끊임없이 감사함을 표현하며, 그의 편지를 받는 성도들에게 감사하라고 가르칩니다.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범사에 감사하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라"
바울이 왜 감사하라고 하였을까요? 감사함이 주어진 인생을 풍요롭게 사는 비결이기 때문입니다.
감사하는 생활을 하느냐, 감사하지 못하고 불평불만의 생활을 하느냐 여하에 따라서 우리의 환경이 수도원이 될 수도 있고 감옥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 하면서도 감사와 찬양의 삶을 잃어버린 사람은 신앙의 참 맛을 잃어버린 무늬만 신앙인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바울의 삶은 오늘날 세상 사람들의 기준에서 형통한 삶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가정도 없이 평생을 혼자 독신으로 살았습니다. 그는 수중에 재산 한 푼 없었습니다. 그는 권력을 누리거나 편안한 삶을 사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오늘 본문 앞의 11장에서 바울이 걸어간 험난한 인생이 요약되어 있습니다. 고린도후서를 쓰고있는 그 당시까지만 보아도 그는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하고 매도 수도 없이 맞았습니다. 40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으며, 태장으로 맞기를 세번, 돌로 맞아 죽은 줄 알고 버려졌다가 살아나기를 한 번, 타고 가던 배가 파선하기도 했으며, 강도를 당하기도 하고, 이방인들로부터 탄압을 받기도 하며, 형제 유대인들로부터 위협을 받기도 합니다. 시냇물에서 당하는 위험, 광야에서 당하는 위험, 바다에서 당하는 위험이 끊임이 없었습니다. 자지 못하고 굶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기를 이루 헤아릴 수 없이 겪었습니다.
그런 고난 가운데에서도 바울은 언제나 감사하라고 권면하며 스스로 감사한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울이 어떤 환경에서나 굴하지 않고 승리하게 한 능력이었습니다.
2. 주시지 않는 것도 은혜
감사하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 합당한 이유를 찾는 것이 감사하는 삶의 비결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면 바울이 하나님께 감사하는 이유를 스스로 발견해나가는 장면을 봅니다.
바울에게는 육체의 가시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스스로 명확하게 밝히지 않아서 설이 구구합니다. 어떤 사람은 바울을 괴롭힌 눈별, 안질이 있었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바울이 간질병(epilepsy)이 있었다고 합니다. 대체로 간질병설이 유력합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바울은 대단한 이적과 기사를 행한 사람입니다. 독사에 물려도 아무렇지도 않으며,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 (행 19:12)
하는 기록도 있습니다. 대단한 영적 능력의 주인공입니다. 그런데 그가 간절하게 구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몸에 있는 병이 낫지 않습니다. 열심히 설교를 하다가 입에 거품을 품고 쓰러져 경련을 하는 간질병 환자 바울을 상상해 보십시오. 얼마나 참혹한 일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데도 얼마나 지장이 되었겠습니까?
바울은 세 번이나 주께 간구했다고 8절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간구한 것은 단순히 "고쳐주세요. 믿습니다." 이런 식으로 기도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아마 적어도 금식하며 절절히 하나님께 호소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병을 고쳐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 은혜가 그만하면 너한테 충분하다. 그만 구해라. 너가 약할 때 내 능력이 더 강하게 드러난단다."
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깨달은 바울은 이 때부터 자기의 약한 구석 있는 것에 오히려 감사하며 자랑합니다. 그래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 자기에게 머물게 됨을 알았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어떨 때 감사합니까? 우리는 어떤 문제가 있고 기도하여 그 문제가 해결되고 무언가 풍성한 물질이나 기회가 쏟아질 때 감사합니다. 그럴 때 감사해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그렇지 않을 때도 감사하라고 합니다. 기도해도 응답이 없을 때, 아니 "안돼, 그건 들어줄 수 없어."라고 거절로 대답하실 때, 그때도 감사하라고 합니다.
우리 생각에는 모든 것이 우리가 원하는 대로 잘 되면 더 쉽게 감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무엇이든 우리가 원하는 대로 잘 되면 다 자기가 잘 난 줄만 압니다. 그래서 누구에게도 감사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오히려 하나님이 필요 없다고 생각합니다. 감사는 커녕 도리어 불신앙으로 빠집니다.
바울 사도는 주시지 않으시는 것도 은혜라고 고백합니다. 주시지 않으시기 때문에 더욱 하나님께 의지하게 되고, 더욱 의지할 때 그리스도의 능력이 강하게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며 무언가를 구했는데, 거절 당하여도 감사하실 수 있으십니까? 시험을 잘 치기를 바라고 기도했는데 성적이 맘에 들게 나오지 않아도 감사하시겠습니까? 비자가 꼭 잘 나오기를 기도했는데 잘 되지 않아도 그 일로 인하여 감사하실 수 있습니까? 모든 상황 속에서 감사하는 능력이 곧 신앙입니다.
3. 내게 족함을 깨닫는 것이 은혜
이재철 목사님의 글 중에 이런 내용이 기억납니다. 우리 한국에도 방문한 적이 있는 일본의 다하라 요네꼬 여사의 이야기입니다. 오네꼬 여사는 젊은 시절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소유에 대해 한 번도 만족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갖지 목한 것에대한 절망 속에서 살았습니다. 마침내 자기 집착과 자기 절망을 이기지 못한 젊은 요네꼬는 달려오는 전차에 뛰어들어 자살을 기도했습니다. 자살은 미수에 그쳤고, 그 결과는 너무나도 참담했습니다. 두 다리와 왼팔은 아예 덜어져 나가버렸고, 그나마 하나 남은 오른 손의 손가락도 두 개가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두 다리와 두 팔, 10개의 발가락과 10개의 손가락 중에서 남은 것이라고는 오른 팔에 붙어 있는 손가락 세 개 뿐이었습니다. 멀쩡한 사지를 가지고서도 자살을 시도할 정도였다면 손가락 세 개 밖에 남지 않은 극한적인 상황에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죽어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 후 요네꼬 여사는 전혀 새로운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자기 집착에서 벗어난 그녀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였습니다. 어느날 세 개의 손가락 밖에 붙어 있지 않은 오른 손을 내려다 보던 중, 자신에게 손가락이 무려 세 개나 남아 있다는 감격적인 깨달음이었습니다. 없는 것에만 집착하던 그녀가 자기에게 있는 것의 소중함. 자신에게도 줄 것이 있음을 확인한 것입니다. 그녀는 그 세 개의 손가락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고, 그 책의 제목을 『산다는 것이 황홀하다』고 붙였습니다.
두 다리도 잃고 한 팔도 잃고, 단지 손 가락 세개로 살면서 『산다는 것이 황홀하다』라고 고백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삶은 황홀합니까? 풀리지 않는 실타래같은 고난이 있고 역경이 있습니다. 고통이 있고 고민이 있습니다. 얽힌 인간관계가 있고 갈등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홀함을 볼 수 있는 사람에게 우리의 삶은 황홀합니다.
이 부분을 자칫 오해하면 '현실 안주', '의욕 상실'과 혼동하게 됩니다. 마냥 '이게 내 팔자려니'하고 자포자기하는 수동적이고 운명론적인 태도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내게 족한 줄 아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관점에서 내 자신의 형편과 처지를 들여다보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해내는 적극적인 태도입니다. 오히려 더욱 하나님께 의지하여, 내 힘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문제에 묶여 있는 자기 스스로를 풀어내는 '해방 의지'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내게 족하므로 나는 오직 나의 연약함을 자랑한다"고 하는 바울 사도의 고백은 자신의 연약한 부분에 더욱 강하게 역사(work)하시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적극적으로 초청하는 신앙입니다.
신앙은 인생의 해석입니다. 인생을 바라보는 관점(view point)입니다. 똑 같은 상황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이 인생의 해석을 달리합니다. 그 인생을 바라볼 때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는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이요, 선지자요 예언자입니다.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입니다.
(맺는 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북반구와 계절이 반대라서 이제 막 여름이 시작되기 때문에 추수라는 말은 우리에게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 해를 마무리한다는 측면은 일치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해를 결산하는 감사주일로 이해하고 이 절기를 지킵니다. 무엇으로 감사하시겠습니까?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그 무한하신 은혜를 발견하시고 감사하시는 가운데, 주님이 주시는 참된 평강과 기쁨을 누리는 복된 그리스도인, 능력의 주인공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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