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 설교 모음

[스크랩] 최고의 계명과 하나님나라

하나님아들 2016. 2. 17. 17:45

제목 : 최고의 계명과 하나님나라

본문 : 마가복음 12장 28~34절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이 서기관은 이전까지의 그 어떤 율법학자들과는 달이 예수께 매우 우호적인 태도로 접근합니다. 지금까지의 질문자들이 매우 호전적이고 도발적인 태도였던데 비해 이 율법학자는 매우 우호적이고 존중하는 태도로 예수님께 질문을 던졌습니다.

 

지금까지의 질문자들이 눈에 보이는 피상적인 문제를 들먹였던데 비해 율법학자는 본질적인 문제에 눈길을 돌렸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한마디도 놓치지 않고 깊이 새겨들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매우 지혜로운 분이라는 것, 하나님의 율법을 제대로 이해하고 계시다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알 수 있었습니다. 하여, 이대로 예수님 곁을 떠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 말씀을 들으면서 마음속에 생긴 궁금증이 있었는데 그걸 묻지 않고는 떠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는 드디어 예수님께 다가가 물었습니다. “모든 계명 가운데서 가장 으뜸 되는 것은 어느 것입니까?” 막 12:28입니다. 모든 계명중 첫째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이 질문을 듣자말자 금세 알았습니다. 이자의 질문 내용이나 태도가 다른 율법학자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금방 알아 채린겁니다. 자고로 질문을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는 법 아니던가요. “모든 계명 가운데서 가장 으뜸 되는 것이 뭔가”를 물었다는 것은 이 사람이 수많은 계명들을 부지런히 외우고 따르다가 율법 속에서 길을 잃는 사람이 아니라 율법 가운데 율법이 뭔지, 율법이 말하고자 하는 본질이 뭔지를 고민하고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는 걸 암시하는 것입니다. 그는 단지 율법을 달달 외우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율법을 통해 뭘 말하려고 하는 지를 고민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말입니다.

 

계명의 최고봉

 

예수님은 제대로 된 율법학자를 만난 기쁨에 마음을 툭 터놓고 대답했습니다. “첫째는 이것이다. 우리 하나님이신 주님은 오직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것이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는 것이다. 근데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막 12:30~31)

 

이 말씀을 살펴보면 두 가지 점이 매우 이채롭습니다.

 

우선 ‘첫째’, ‘둘째’라고 언급한 것이 이채롭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지금까지 무슨 말씀을 하실 때 첫째는... 둘째는.. 하고, 나열식으로 말씀하신 적이 거의 없었읍니다. 예수님은 거의 언제나 핵심을 꿰뚫는 촌철살인(寸鐵殺人)의 한마디를 툭 던졌지 장황하게 나열식으로 말씀하지는 않으셨습니다.

 

때문에 ‘첫째’, ‘둘째’라고 짚으신 것은 단지 항목의 나열이 아니라 우선순위를 분명히 하기 위해 꼭 필요해서 그렇게 말씀한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보다 앞서야 한다는 것,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형제 사랑의 밑바탕이라는 것, 또한 이 우선순위가 뒤바뀌면 안 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기 위해 조금은 낯선 방식인 ‘첫째’ ‘둘째’로 이야기하신 것이라고 봅니다.

 

두 번째로 이채로운 것은 위의 서기관이 질문할 때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 그러니까 모든 계명중에 가장 으뜸 되는 최고의 계명 한가지는 무엇입니까”하고 물었는데 예수님은 두 가지로 대답했다는 점이 이채롭습니다. 서기관은 분명히 가장 으뜸 되는 계명 한 가지를 알고 싶었습니다.

 

둘이 아니라 하나를 알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둘을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잘못 대답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매우 정확하게 대답하셨습니다. 그 둘 모두가 가장 으뜸 되는 하나의 계명이라고 옳게 대답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말씀을 한번 곱씹어보십시오. 한번 잘 음미해 보십시오. 그러면 그 둘이 단지 둘이 아니라는 것, 사실은 그 둘이 나란히 있어야 으뜸 되는 하나의 계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은 절대 떨어져서는 안 되는 하나다 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만 사랑하는 것으로는 으뜸 되는 계명이 될 수 없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만으로도 으뜸 되는 계명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한 몸처럼 될 때에 비로소 으뜸 되는 계명이 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둘은 결코 두 가지 계명이 아닙니다. 그 둘은 하나의 계명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 말씀이 백 번 옳습니다. 우선순위에 있어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앞서야 할 일이지만 거기서 끝나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우선이어야 하고, 신앙의 근본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만으로 신앙이 온전해지는 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만으로는 최고의 계명이 성립할 수 없습니다. 물론 수평적 관계만으로도 신앙은 온전해 질 수 없고, 최고의 계명이 성립될 수도 없습니다.

 

신앙은 사회적 관계만은 아닙니다. 신앙은 휴머니즘을 포함하지만 휴머니즘이 곧 신앙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진정한 신앙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통합될 때만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사도 요한이 말했습니다. “누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 형제자매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라고, 보이는 자기 형제자매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는 없는것이라고,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자기 형제자매도 사랑해야 한다고,”요한 1서 4: 20~21에서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종교적 헌신과 뜨거운 예배로 증명되는 게 아니라 형제를 향한 사랑으로 증명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반드시 형제를 향한 사랑으로까지 연결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순전히 말뿐일 것이며 그것은 거짓입니다.

 

최고의 칭찬을 들은 율법학자

 

예수님 말씀을 듣고 마음 깊이 공감한 서기관은 “선생님, 옳은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오 그 밖에 다른 이는 없다고 하신 그 말씀은 옳습니다”(막 12: 32)라며 ‘옳소’를 연발했습니다. 그동안 내놓고 말은 못했지만 지금까지 자기가 율법을 연구하면서 깨달은 것도 바로 그것이었는데 예수님 말씀을 들으니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았습니다.

 

그 동안은 같은 계명을 앞에 놓고서도 대부분의 율법학자들과 뜻이 통하지 않아 답답했습니다. 뭔가가 복잡하게 뒤섞여 있고, 주변 것들이 중심에 들어와 목소리를 높이는 게 영 마땅치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달랐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 한 마디를 들을 때마다 그의 영혼은 해방되어 춤추는 듯 했으며, 그의 내면 깊이 공명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는 너무 기쁜 나머지 “옳습니다.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몸 같이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와 희생제보다 더 낫습니다”(막 12:33)라며 화답하듯 자기 견해를 덧붙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도 “너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며 율법학자를 한껏 추켜세우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율법학자가 화답한 말 -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와 희생제보다 더 낫다 - 를 살펴보면, 그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뭔지를 제대로 알고 있었다고 보입니다. 율법의 본질을 꿰뚫어 알고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그 당시에 대부분의 율법학자들은 종교적 차원에서 종교적 행위를 강조하는 게 고작이었습니다. 번제와 희생제를 최고로 생각하는 수준이었다 그말입니다.

 

그런데 이 율법학자는 번제와 희생제를 넘어 하나님나라를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율법을 이해하는 수준이 종교적 차원을 넘어 하나님나라에 가까워 있었습니다. 하여, 그는 예수님으로부터 최고의 칭찬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너는 하나님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라고 말입니다.

 

사랑-신앙의 진정성을 판가름하는 잣대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신앙의 두 축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형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거나 영생을 얻기 위함이 아니고, 종교적 관습이나 문화적 특성 때문이 아니라, 그분을 아는데서 나오는 사랑일 때, 그것이 참 신앙입니다. 그리고 그런 신앙으로만 하나님나라가 열립니다. 하나님나라의 삶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성경을 함 볼까요. 욥을 놓고 하나님과 사탄이 내기를 한 것도 따지고 보면 신앙에 있어서 사랑의 문제가 핵심이었습니다.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것이 무엇 때문이냐’ 하는 것이 욥기의 핵심 논제였습니다(욥 1:9~11).

 

하나님은 하나님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했고, 사탄은 하나님이 욥을 축복하시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만일 모든 축복을 허물어뜨리면 욥은 반드시 하나님을 저주할 것이라고 사탄은 장담했습니다.

 

욥기서가 다루고 있는 문제 - ‘무엇 때문에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것인가’ 하는 문제는 신앙에 있어서 가장 치열한 문제고 가장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무엇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느냐’ 하는 문제야말로 신앙의 진정성 여부를 판가름할 수 있는 유일한 잣대입니다.

 

진정한 신앙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행하는 것이어야지, 이것을 행하고 저것을 행함으로써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내고, 내 신앙을 증명하고, 뭔가를 보장받겠다고 한다면, 그것은 본질에서 떠난 것이라 그말입니다. 부패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큰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그것도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사랑하는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옳습니다. 사랑이 소중하고 가치 있어서가 아닙니다. 사랑이 진정한 인격적 관계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사랑 외에는 모든 것이 부차적인 문제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불특정 다수의 교회와 우리의 신앙은 어떠합니까? 교회가 설교하는 걸 들어보면 지나칠 정도로 수직적 관계만을 강조하고 그것에만 모든 에너지를 집중하고 있는 느낌이 듭니다. 물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보다 앞서야 되고 강조되어야 하는 것이 마땅하나 ‘첫째’만 강조하고 줄째는 소홀히 하지 않나 하는 느낌이 듭니다.

 

예수님처럼 ‘둘째’도 말해야 합니다. ‘첫째’와 ‘둘째’가 분리되면 안 됩니다. 둘이어서는 안 됩니다. 언제나 하나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교회를 들여다보면 ‘첫째’만 있지 ‘둘째’가 없습니다. 아니죠. 사실은 ‘둘째’가 없으니 ‘첫째’도 없는 것이죠.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말은 무성하지만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자는 드물다 그말입니다.

 

나를 위해 하나님을 조종하고 이용하려는 자들은 많으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찾아보기 어렵다는 말입니다. 욥기에서 치열하게 논쟁했던 것처럼 사랑은 그냥 사랑이어야 합니다. 다른 무엇을 위한, 다른 무엇 때문에 하는 사랑은 이미 사랑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냥 사랑하라고 했지 선교를 위해 사랑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사랑했는데 선교적 열매가 나타난 것과 선교적 열매를 위해 사랑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것입니다. ‘사랑’이라는 말은 같을지 몰라도 결코 같은 ‘사랑’이 아닙니다.

 

동화에 나타난 하나님나라

 

<하느님의 눈물>이라는 짧은 동화가 있습니다. 얼마 전에 작고한 권정생의 작품인데 거기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눈이 노랗고 털빛도 노란 토끼가 있었습니다. 그 토끼의 이름은 돌이입니다. 어느 날 돌이 토끼는 칡넝쿨이랑 과남풀을 뜯어 먹다가, 뜯어 먹히는 풀들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때부터 돌이 토끼는 마음 내키는 대로 풀을 뜯어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배는 고프고 먹기는 해야겠는데, 그렇다고 함부로 뜯어 먹을 수도 없게 된 돌이는 할 수 없이 풀들에게 묻기 시작했습니다. “널 먹어도 되겠니?” 그러나 죽느냐 사느냐 하는 질문 앞에서 풀들은 바들바들 떨기만 할 뿐 차마 말을 하지 못하다가 “차라리 먹으려면 묻지 말고 그냥 먹어”라고 체념하듯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나니 돌이는 더더욱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아침부터 저녁까지 쫄쫄 굶은 돌이는 붉게 물든 해님에게 아무 것도 먹지 못했다고 넉두리를 늘어 놓았습니다. 그러고 나서 돌이는 하나님에게 무얼 먹고 사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보리수나무 이슬하고 바람 한 줌, 그리고 아침 햇빛 조금 마시고 살지”라고 대답합니다. 돌이는 “어머나! 그럼 하느님, 저도 하느님처럼 보리수나무 이슬이랑, 바람 한 줌, 그리고 아침 햇빛을 먹고 살아가게 해주셔요” 하고 희망 섞인 주문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래, 그렇게 해주지. 하지만 아직은 안 된단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너처럼 남의 목숨을 소중히 여기는 세상이 오면 금방 그렇게 될 수 있단다”라며 알듯 말듯 한 말씀을 하시는 거였습니다. 돌이는 물었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 모두가요?” “그래, 이 세상사람 모두가.” 해님은 얼굴을 감추기 전에 다시 말했습니다. “하지만, 내가 이렇게 애타게 기다리는데도 사람들은 기를 써가면서 남을 해치고 있구나.” 그 순간 돌이 토끼 얼굴에 물 한 방울이 떨어져 내렸습니다. 하나님이 흘린 눈물이었습니다.

 

작가 권정생은 이 아름다운 동화를 통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남의 목숨을 소중히 여기는 세상이 바로 하나님나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생명도 짓밟지 않으면서 자기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세계, 풀 한 포기의 생명도 소중하게 여기는 세계가 바로 하나님나라라고 말입니다. 권정생은 이 동화에서 ‘사랑’이라는 말을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지만, 남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고 보호해주는 것이 바로 사랑이라고, 풀의 이야기를 듣고 풀을 뜯어먹지 않는 것이 사랑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나라의 핵심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면 이미 하나님나라입니다. 하나님나라는 신비한 영적 세계나 거룩한 종교적 세계가 아닙니다. 하늘 저편에 있는 세계가 아닙니다. 하나님 홀로 영광을 받는 세계도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세계, 하나님과 이웃, 그리고 모든 생명이 다함께 소통하는 세계, 바로 그 세계가 하나님나라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런 세계를 그림처럼 감동적으로 묘사했습니다. 이사야서 11:6-9 말씀입니다.

 

“그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삽니다.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눕습니다. 송아지와 새끼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풀을 뜯습니다. 어린 아이가 그것들을 이끌고 다닙니다. 암소와 곰이 서로 친구입니다.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눕습니다.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습니다.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 곁에서 장난치고 있습니다. 젖 땐 아이가 살무사의 굴에 손을 넣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서로 해치거나 파괴하는 일이 없습니다.” 찾아서 같이 보기 원합니다 구약성경 979페이 이사야서 11: 6~9 절 말씀입니다.

 

6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 에게 끌리며 7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8 젖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9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이 얼마나 놀라운 세계입니까?!! 메시아가 다스리는 시대가 오면 우리 모두가 꿈에도 사모하는 그런 세계가 펼쳐질 것이라고 이사야는 그림처럼 묘사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에게 최고의 계명이 실천되는 세계가 바로 그런 세계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 하나님나라가 있다고 말입니다.

 

이로써 계명이 무엇인지가 분명해졌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모든 계명, 예수님이 말씀하신 모든 것은 종교적인 체제를 굳건하게 세우기 위한 종교적 율법이 아니라는 것, 오직 하나님나라의 삶을 살게 하는 방편이라는 것이 분명해졌습니다.

 

계명은 하나님나라가 어떤 나라인지를 보여주는 지도이며, 하나님나라의 삶을 살 수 있도록 가르치는 교과서입니다. 또한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나라 백성만이 계명을 들을 수 있고 계명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이 최고의 계명을 인식하고 깨달은 율법학자에게 “너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막 12:34)고 말씀하신 것도 계명을 이해하는 것과 하나님나라의 삶을 사는 것이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잘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아멘.

 

 

출처 : 덕향의 미국 이야기
글쓴이 : 덕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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