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 설교 모음

[스크랩] 예수님은 목수이십니다

하나님아들 2016. 2. 17. 17:48

막 6: 1-6

예수님은 목수이십니다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사 고향으로 가시니 제자들도 좇으니라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 가로되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뇨 이 사람의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 됨이뇨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하시며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인에게 안수하여 고치실뿐이었고 저희의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 이에 모든 촌에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시더라. [마가 6: 1-6]

 

 

저는 아직 헤아려 보지 못했습니다만 성경학자들의 말을 빌리면 우리 주님이 이 땅에 계실 때 부르던 칭호, 별명, 이름이 700여개나 된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 인격과 사역에 있어서 너무나 뛰어 나신 분이시기에 주님을 묘사하는 수백 가지의 이름, 칭호가 있음이 별로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럼 왜 그렇게도 많습니까?

기억하기도 어렵고 복잡한 그 많은 이름들이 우리들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각기 다른 우리 주님의 이름에서 우리에게 그 이름대로 나누어주시는 축복들이 각기 다른 양상으로 듬뿍 듬뿍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이름마다 각기 다른 축복들을 우리에게 나누어주시기 위한 것이다 그 말입니다.

자!

그럼 우리 예수님의 이름들, 칭호를 아는 대로 짚어 봅시다.

 

만 왕의 왕, 만주의 주, 임금, 나사렛 사람, 우리의 보증,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나중이요, 맏아들, 어린양, 임마누엘, 하나님의 아들, 인자, 주, 예수, 그리스도 ----

 

그런데 이 많은 칭호 중에 목사라던가 장로라는 칭호가 없음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요즘 같은 목사 장로 수난시대가 또 어디 있을라구요. 오나가나, 어디서나, 두셋만 모였다하면 수군거리는 소리, 빈정대는 소리, 원망 불평하는 곳엔 꼭 목사, 장로이름이 들어가더라고요.

 

여러분! 제 이름은 이규근 입니다. 오얏나무 이, 양토 규, 뿌리 근, 오얏나무를 양토 규, 양질의 토양에 깊이 뿌리 내려 흔들림 없이 “굳세어라 금순아” 하라고 지어주신 저희 부모님의 깊은 배려에 감사를 드립니다.

 

여러분 우리 주님 이 땅에서 사역하고 계실 때, 그리고 제자들과 또 다른 많은 사람들을 가르치시고 좋은 말씀으로 먹이실 때, 여러 가지 서로 다른 여러 직업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을 성경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성경 마태 13: 3이하에서 “씨를 뿌리는 자, 곧 농부가 밭에 씨를 뿌리려 나가서” 라고 말씀하셨으나 그러나 우리 주님은 농부는 아니었습니다. 요한 14: 14 -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자기 양들을 위하여 ---” 그러나 주님 이 땅에 계실 때 목자도 아니었습니다.

 

여러분은 아시죠?

우리 주님이 어떤 분이셨는가를 ---

예! 그분은 목수이셨습니다.

 

오늘 본문입니다. 막 6: 3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 뭐요? 목수가 아니냐?”

예 ! 목수이십니다. 우리 주님은, 예수님은 목수이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 왜 하필이면 “목수”라는 것하고 연관을 가졌을까요

 

옛날 우리 군에 있을 때, 사람들이 하는 말, “사람 하나하고 군바리 하나하고 간다” 그랍디다.

그러니까 군인하고 사람하고는 따로 취급했다 그 말이죠.

 

유대나라 속담에도“저기 목수 하나하고 사람 한 분하고 간다” 그랬다고 합디다.

그만큼 목수라는 것이 최하 인생, 하찮은 인생이라는 것을 반영하는 것 아니겠어요 ?

 

여러분! 요 14: 1 이하의 말씀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목수의 가정에 태어나 자라오는 동안 아버지를 도와 목수의 일(Jab)을 하셨고 또한 그때로부터 지금까지 2,000년이 지난 지금 이 시간 1997년 1월 26일. 1월 마지막 주 지금 이 시간까지도 목수이신 채로 우리가 가 있을 처소를 마련하시기 위해 집을 짓고 계신다고 하는 내용이 요 14: 1 이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의문이 가지 않습니까?

하고많은 직업 중, 하고많은 가정 중, 하고많은 사업 중, 왜 하필 “목수”이셨을까하는 의문 말입니다.

 

지금부터 우리 주님이 목수이신 내용을 서로 쉐어할 때 하나님으로부터 내리는 크나큰 은혜를 함께 받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첫째로 우리 주님이 이 땅에 오실 때 목수의 가정, 목수의 집안에 태여 나셨습니다.

마 13: 55 -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라고 증거 합니다. 우리 주님이 태여 나신 집안이 목수의 직업을 가진 집안, 목수라는 직업으로 생계를 꾸려나가는 가정이었다 그 말입니다.

 

어떤 집안에 태여 나느냐? 는 참 중요하다고 봅니다. 저의 형님은 전에 대구 동산병원 원장님이셨는데 그 아들도 역시 의과 대학을 나와 그 병원에서 일 하던데요. 그 형님은 지금 의료 선교사로 외국에 나갈 준비중입니다.

 

저희 집안은 일찍이 우리 할아버님이 서양 선교사로부터 복음을 받고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 들여 구원을 얻은 후 저희 아버님을 신학공부를 시키셨다고 합니다.

 

신학을 마치고 목사고시를 치르려는 시기에 할머님, 할아버님이 연달아 돌아가시는 바람에 집안의 장손이셨던 아버님은 평생을 장로님으로 고향의 시골교회를 받들어 섬기시며 청빙받아 오시는 젊은 목사님들을 지극정성으로 모시며 늘 기쁨과 만족함으로 여생을 보내심을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면서 저희 큰집(우리 할아버지의 조카)과 늘 비교해 보곤 했어요.

 

그 집은 또 대대로 제사(지금도 종가 어른으로 행세함) 지내는 일과 미신적인 일에 전념하시는데 그 집 아들(지금 나하고 동갑인)과 그 손자 모두 불신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왜 이런 말씀을 드리느냐 하면 만약 저도 저의 큰집같이 불신자의 집안, 그 가정에서 태여 났다면 지금 내가 목사로서 주의 복음을 전하며 살고 있을까요?

 

다시 본론으로 돌아갑시다. 당시 유대 백성들이 “목이 빠져라”하고 바라고 고대하던 바와는 전혀 다른 영 딴 곳에 예수님은 오셨습니다. 당시 유대는 로마 식민지로 고통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루속히 이 나라를 건질 메시아가 이 땅에 왕으로 오실 것이며 그때는 우리 모두 태평성세를 누릴 것이라고 왕으로 오실 분을 학수고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왕궁에서 왕자로 태여 날 메시야, 아니면 위대한 장군의 후예로 이땅에 와서 로마로부터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해낼 위대한 군사지도자, 대장으로 오시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 말입니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우리 주님은 하찮은 집안, 보잘 것 없는 가문, 비천한 목수의 집안에 태어나셨습니다.

 

왜입니까?

성경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예수는 근로자로 오실 것이며, 종으로, 곧 목수로 오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구약성경 곳곳에서 주님이 「비하의 신분」으로 오실 것을 예언합니다.

 

사 52장, 사 53장 등에서는 고난받는 종에 대한 묘사로 그리스도가 비하의 신분으로 이 땅에 오실 것을 쭉 -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신약에서는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나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로” 오심을 기록했습니다.

빌 2: 5-8에서는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신 종의 모양으로 오신 그리스도이심을 말해 줍니다.

 

보통사람들,

저는 우리 한글 단어 중 참으로 아름다운 두 단어가 수난을 당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하나는 “동무”라는 단어로 그것이 그만 김일성의 전용구가 돼버려, 전에 우리가 학교 다닐 땐 그 말 함부로 했다간 붙잡혀 가서 곤혹을 치르는 무서운 단어가 돼 버리고 말았습니다.

 

또 한 단어가 지금 우리가 생각해야 할 “보통 사람”이란 단언데 이건 우리들, 민초들이 쓰도록 내버려두어야 하는 데, 지금은 우리와 다른 방에 가 있는 노태우씨가 빌려간, 아니 가저가버려, 그 말 쓰기가 좀 머쓱했습니다.

 

아무튼 우리 주님은 진짜 보통사람들, 정말로 평범한 민초들과 자신을 동등히 여기셨던 분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 느끼는 것은 수천, 수만의 백성들이 우리 주님이 말씀하시고 가르치실 때, 눈방울을 또록또록, 조는 사람 하나 없이 하나같이 기쁜 마음으로 경청한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우리 주님이

그들이 어떤 자들이며,

그들의 요구가 어떤 것인지를 자상하게 알고 계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루종일 얼마나 지치고 힘들었을까,”

“얼마나 피곤할까,”

무엇을 바라고 이 자리에 나왔는지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그 말입니다.

 

어떻게요? 어떻게 그걸 아셨을까요?

 

서울에서만 자란 우리 집 아이가 즈네 엄마가 “옛날 우리가 너희만 했을 땐 먹을게 없어서 참 배고프게 지냈단다” 하니까 대뜸 하는 말이 “엄마, 엄마, 냉장고에 다 있는데 왜 배고파?” 그러던 데요

 

주님 자신이 목수의 집안, 비천한 가문, 목수로서의 정직한 노동의 존엄성을 아셨고, 뿐만 아니라 주님은 일하는 것, 그리고 피곤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수많은 격언을 갖고 있습니다.

“아들에게 일하는 법을 가르치지 않는 것은 그에게 도적이 되라는 것과 같다”

유대인들은 누구나 그들의 아들들에게 일하는 법을 가르쳤습니다.

심지어 랍비들조차도 그들의 「싸이드잡」이 따로 있다고 했습니다.

유대인의 의사나 변호사들도 노동하는 일들이 따로 있다고 합니다.

성경의 사도 바울도 따로 직업이 있었습니다. 장막 짓는 일이 그것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 구별됨이 없이 우리와 똑 같이, 우리와 같이, 나와 여러분과 구별됨 없이, 그 분 자신이 당신을 우리와 같게 여기셨다고 말해주는 무언의 웅변입니다.

 

어떤 낮은 자리에도 처할 줄 아시는 주님!

나와도 동등의 자리에 계시면서 나의 길을 열어 주시기 위해 우리 주님은 목수로, 목수의 가정에 오셨습니다.

 

두 번째로 -

주님이 목수의 가정에 태어나 목수였던 아버지를 따라 당신께서도 목수로 일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목수이신 예수”라고 말합니다.

 

저희 할아버님은 농사꾼이셨고 저희 아버님은 장로로 계시면서 대목(도목수)으로 일했습니다. 그래서인진 몰라도 저도 어깨 넘어로 본 그 일로 미국 와서는 카펜터 흉내내며 돈 벌어가며 공부했는데요.

 

목수가 하는 일이 뭡니까?

어떤 물건을 만들기도 하고, 고치기도 하고, 짖기도 하고 다듬기도 하는 것 등입니다.

우리 주님도 만들고 고치는 일에 능숙했습니다.

 

여러분! 저는 지금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다같이 눈을 감으십시오. 그리고 지금부터 저랑 함께 타임머신을 탑시다.

그리고 2,000년 전 유대땅 나사렛 요셉의 집, 예수님의 고향으로 가봅시다.

 

동네 사람들이 모두 서로 즐겁게 오가며 인사하고 분주히 움직이는 모습이 보입니다.

아, 어떤 학생이 낑낑거리며 그가 앉아 공부하던 걸상을 들고 우리 주님께 오고 있군요. 우리 주님 농방에 앉았다가 황급히 달려나가서 그 학생의 걸상을 받아 들고 들어서는 군요. 부서지고 망가진 부분을 콧노래를 불러가며 뚝딱뚝딱 고치고 있습니다.

 

저 쪽에서 또 한 분 어른이 발 갈던 쟁기를 메고 오는군요. 서로 다정하게 인사합니다.

그리고는 후다닥 손질해서 돌려 보냅니다. 그리고 이젠 주문 받아 다 만든 시집갈 앞집 처녀의 화장대를 잘 포장해서 딜리버리 나가는군요.

 

우리 주님은 이렇게 하루하루를 즐겁고 건강하게 만드시고 고치시고 손질하시면서 바쁘게 일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우리주님은 이 세상에 오시기전 우주를 세우셨습니다.

 

요 1: 3입니다.

“천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라고 기록합니다. 주님께서 우주를 지으셨습니다.

 

오늘날은 주님께서 자기의 교회를 세우고 계십니다. 마 16: 18입니다.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운다”고 말씀합니다. 주님이 세우시는 이 성전에서 우리가 “산 돌 곧 에벤”이라고 베전 2: 5에서 베드로는 힘주어 설파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주를 지으셨고 교회를 세웁니다.

그러나 사탄 마귀는 반대로 그것을 허무는 자, 곧 파괴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요 10: 10에서 “도적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 온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세우려 오셨습니다.

 

또 지금 우리 주님은 하늘에다 집을 짓고 계십니다.

요 14: 2, 3입니다. 다 같이 찾아봅시다. 신약성경 172페이지.

요 14: 1-4까지 우리 다 한 목소리로 크게 읽어봅시다.

 

신약성경 172 페이지, 요 14: 1-4입니다. 시작 -.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려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도 있게 하리라.” 아멘 -

 

우리가 주님을 나의 구주로 앎에 있어서 놀라운 것은 내가 어디로 가는 가를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요. 아무리 돈을 많이 가진다 해도, 그것 모르는 사람이 참 많다고요.

그러나 사랑하는 아리조나 중앙장로교회 성도 여러분과 나는 그것을 압니다.

 

거기까지 가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지, 또 얼마나 오래 가야 하는지,

또 언제 거기 가는지는 우리는 모릅니다.

 

내가 거기까지 가기 전에 우리 주님이 먼저 오실 지 ?

아니면 내가 죽음에서 그쪽으로 옮겨 갈 것인지 ?

곧 예수 안에서 잠자다가 하늘에서 깨여 날 것인지 ?

들림 받아 공중 잔치가 벌어지는 곳에 서 있을지 ?

 

그런 것은 알 수 없읍니다마는,

그것은 아버지만 아시고 아들도, 그 누구도 아무도 모른다고 했으니, 우리 주님이 그것은 가르쳐 주시지 않았기에 모르지마는,

 

그러나 하늘에서 우리를 위해 주님께서 손수 집을 세우고 계심을 확신시켜 주시는 내용이 방금 읽은 성경입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

처소(토포스) - 구체적인 현 주소, 아리조나 중앙장로교회.

“내가 다시 와서 나 있는 곳에 너희도 함께 있게 하리라” -

나 있는 곳(모나이) - 전부터 있던, 예비된 천국, 하늘나라.

그러니까 뭡니까?

그냥 두리 뭉실, 어물어물, 얼렁뚱땅이 아니고, 정확하게 내가 가서 있을 내 집, 여러분의 본향을 우리 주님이 지금 세우고 계신다 그 말입니다. 할렐루야!!

 

또 우리 주님은 우리의 인생도 세워 주십니다.

인생의 갈 길은 딱 두길 입니다

첫째는 나의 주님이 나를 위해 세워 주시는 길이고,

그리고 또 하나는 마귀에 의하여 무너져 내리는 멸망의 길입니다.

쵸이스가 없어요, 누구나 이길, 아니면 저길 뿐입니다.

 

여러분!

우리들, 사람의 힘만으로는 마귀를 이길 수 없다고 했습니다.

내 인생을 세워주시는 주님의 길로 가지 않으면 마귀에 의해서 무너져 내리는 길로 가야 합니다.

마귀 곧 죄는 사람의 마음과 감정과 의지를 파괴하는 무서운 힘, 사람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매직 파워를 갖고 있습니다. 그것으로 우리의 몸과 마음을 여지없이 무너뜨립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 주님은 나를 세우십니다.

오늘 본문입니다.

막 6: 2.- “이 사람의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뇨?”

라고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5절을 보십시오.

본문 6: 5-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인에게 안수하며 고치실뿐이었고 - ” 라고 합니다.

 

왜? 주님이 역사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6절이 우리에게 말해 줍니다.

같이 읽어봅시다.

 

“저희의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

예! 다른 번역에는 “그들이 믿지 않음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라고 적었습니다.

여러분!

주님은 오늘 이 시간도 나와 여러분을 세우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게 하시기를 즐겨하신다. 그 말입니다.

 

목수는 나무들을 보면서 그 나무들에게서 가능성을 찾아냅니다.

예수님이 책장을 짜 맞추기 위해 목재소에 들러서 “나는 이 나무의 재질을 알 수 있어” 하고 얼마나 말했을까요.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목수들이 송판때기 하나 골라잡으면서도 이쪽으로 뒤집어 보기도 하고 저쪽으로 눞여 보기도 하고 눈 가까이 가져가서 그 바르기를 가늠하는 모습들을 많이 목격 하시잖아요?

 

왜 그럽니까?

나무를 고르는 겁니다. 쓸만한 것을 찾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여 그 재질의 가능성을 가늠하는 것입니다.

 

요것으로는 찬장 만드는데 쓰고,

저것으로는 받침대로 쓰고,

이것은 기둥감으로,

저것은 대들보로,

하나도 버림 없이 여기저기 맞추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주님은, 예수님은 나를 보시면서, 당신을 보시면서 여러분 하나하나를 관찰하시면서 “나는 네 속에서 가능성을 찾았다” 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교회 오시기 위해 거울 앞에 앉으면서 이 뺨 저 뺨 이렇게 툭, 저렇게 툭 치면서 “아이고 왜 이다지도 안 생겠노?” 코도 좀 우뚝 서고 눈도 좀 툭 시원하게 뚤릴 것이지- 요게 뭐꼬!“ 하시면서, 쑥 빠진 미국여자 코 크고 눈 크고 잘 생겠다 싶은 외국여인 부러워 해본 적 있으십니까?

 

걱정 마십시오. 우리의 코가, 당신의 코가, 적은 것이 아니라 그들의 코가 온 얼굴 가득 덮여 있어서 그런 것입니다. 그들의 코가 쓸데없이 너무 커서 우리 코가 작아 보이는 것뿐 하나 불편할 데 없습니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낙담하거나 주저앉지 마십시오.

 

사업이 슬로우 입니까?

몸의 건강 상태가 좋지 않습니까?

염려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할 수 있습니다. 할 수 있고 말고요.

 

자! 보십시오.

예수님이 어느 날 시몬을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구나. 너를 장차 게바라 하리라”고 요한복음 1: 42절에서 말했습니다. 옆에 있던 그의 친구들이나 또 다른 제자들은 픽! 하고 코웃음 쳤을 것입니다.

 

시몬 속에는 게바, 즉 반석 같은 것은 애당초에 찾을 수 없었거든요.

그러나 예수님은 그 속에서 가능성을 보셨습니다.

그 시몬이, 그 베드로가 주님의 수제자로서 얼마나 큰 일을 하셨는지는 여러분들이 더 잘 아시잖아요?

 

또 주님은 다소 사람 사울 이라는 청년에게서도 가능성을 읽었습니다. 그가 다메섹에 거꾸러졌을 때에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우사, 사울을 바울로 다시 태어나게 하시고, 그로 이방인의 사도가 되어 오늘날 우리 한국 사람에게 까지도 주의 복음을 전파하게 하신 역사를 보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 주님은 여러분 속에서도 가능성을 찾으시고 계십니다.

주님은 풀랜은 세우시고 당신을 지켜보시고 계십니다.

 

이 몸뚱이가 내 것인 양 내 살 궁리만하고 걱정이 태산같아 한숨만 푹푹 쉬고 있습니다만은 내 자신을 목수이신 우리 주님께 내어 마낄 때 목수이신 우리 주님께서는 적절히 사용하실 툴을 손에 잡으시고 다듬어져야 할 곳을 다듬고, 측량하여야 될 곳을 측량하시고, 모난 부분을 깍아 내시고, 공이처럼 단단한 부분은 파내고, 굽은 심령은 먹줄을 팅겨 바르게 곳게 잡고, 깎고, 다지고, 대패질로, 톱질로, 끌로 파고, 다듬어서 하나의 훌륭한 재목으로 재창조하여 내여 놓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내게 사용할 정확한 때를 아시며 크리스챤으로 내 삶을 빛내게 할 적절한 시기를 아시며 적재 적소에서 당신의 귀한 자녀로서 영광 받으시기를 소원하고 계십니다.

주님은 목수의 방법대로 시작하신 일을 꼭 이루십니다.

하루를 천년같이, 천년을 하루같이-, 내가 주님께 제대로 쓰여지기를 기다리고 계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할렐루야!

 

마지막으로 -

그런 주님이 그 죽음까지도 나무에 매달려 죽으셨습니다.

목수의 아들로, 목수의 집안에 태어나 아버지를 도와 목수의 일을 하시면서 공생애를 준비하신 주님께서 오래 참으심으로 시몬을 베드로로, 사울을 바울로 재창조하시고 지금은 나 또한 그렇게 만드시는 주님께서 마지막 돌아 가실 때도 나무에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여러분!

우리 주님이 어떻게 죽으셨어요?

 

스데반은 돌에 맞아 순교했습니다.

주님의 동생 야고보는 칼에 목이 잘려 죽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나무에 못밖혀 죽었습니다.

 

나무에 -

평소에 그렇게 즐겨 쓰시던 나무에, 그리고 못을 박던 그 망치에 의해 손과 발에 대못이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평소에 그렇게 즐겨 쓰시던 나무, 기둥을 다듬고 집을 세울 때 애용하시던 연장으로 이제는 나무가 아닌, 사람을, 주님을 거기 매달아 못을 밖아 죽이다니!

 

베전 2: 24입니다.

베드로는 “친히 나무에 달려,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감당하셨으니-”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주님은 나무에 못 박히는 목수의 죽음을 당했습니다.

왜 주님이 그러한 죽음을 당했는지 아십니까?

주님은 당신과 내가, 여러분과 우리 모두가 구원을 얻도록 그러한 죽음을 당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목수로 생각할 때마다, 곳곳에 널려 있는 나무들을 볼 때마다 내 인생의 삶을 위해 지불하신 그 댓가를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은 죄로부터 우리를 구원해야 했습니다.

 

그 죄가 무엇입니까?

 

목수가 모든 모난 부분과 어그러진 부분과 이가 맞지 않는 부분과 비뚤어진 부분을 깎고, 다듬고, 바르게 짤라 맞추듯, 우리 죄를 위해 대신 목수의 죽음을 죽으심으로 우리를 죄로부터 깨끗하게 다듬어 놓았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할 때 주님이 우리를 바로 구원합니다.

그리고 그때에 우리가 마땅히 되어야 할 바로 그 모습으로 우리를 만들기 위해 우리의 인생에서 일 하시길 시작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은혜입니다.

 

누가 당신의 인생을 세우고 있습니까?

사탄이 당신의 인생을 파괴하고 있지나 않는지요?

내 스스로는 바로 설 수 없습니다.

목수이신 예수님께 내 인생을 맡기면 주님은 나를 구원하시며 내게로부터 무엇인가를 만드십니다.

 

주님은 목수이십니다.

주님의 일생을 세 구분으로 나누어 본다면 첫째 木生(나무 위에 나셨다. 말구유에 뉘이셨으니), 둘째 木長(목수로 30년 생활하셨으니), 셋째 木死(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으므로)로 구분합니다.

 

그런 주님의 생애가 우리에게 큰 구원의 기쁨을 안겨 줍니다.

이제 나를 통채로 주님께 맡기고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출처 : 덕향의 미국 이야기
글쓴이 : 덕향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