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심 말씀!! 한번 더 !!!

[스크랩] 10장 오직 성경,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그리스도, 그리고 오직 영광(가톨릭교회의 남용에 대한 종교개혁의 5대 슬로건)

하나님아들 2015. 7. 4. 23:24

 

 

10장 오직 성경,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그리스도, 그리고 오직 영광

(가톨릭교회의 남용에 대한 종교개혁의 5대 슬로건)

 

 

1. 오직 성경(SOLA SCRIPTURA)

 

보헤미아의 얀 후스: 오직 성경에 헌신하고 교황주의(교황의 권위가 가장 크다), 사제주의(최상의 권위가 전통과 성직자에 있음)를 공격함.

 

1)권위

종교 개혁자들은 성경이 교회의 법칙이라고 믿었다. 모든 것을 ‘오직 성경’의 기준으로 판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성경의 권위는 절대적이며 이차적이거나 파생적이지 않다. 다른 모든 권위 즉 교황적 권위나 교리적 권위나 민간적 권위들은 반드시 성경에 종속되어져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성경을 의지하며 약속들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 칼빈주의자들은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으며, 성경에 복종하기 위해 분투하며, 우리가 아니라 성경이 우리를 판단해야 한다고 믿는다.

 

2)불오성(infallibility)과 무오성(inerrancy)

개혁자들은 성경의 철저한 불오성에 대해 가르쳤다. 성경의 모든 문장과 단어들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호흡으로 된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오직 성경만이 하나님의 무오한 말씀이라고 믿었다. 이것이 칼빈주의자로 하여금 오직 성경만이 신자의 양심을 구속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게 만들었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1장 10절, 20장 2절, 31장 4절)

 

성경만이 하나님의 말씀으로써 오류의 가능성이 없는 신적 계시말씀이며, 그 외의 다른 모든 권위들은 그 권위 아래 복종해야 한다.

 

*돋보기: 축자영감설에 대한 로이드 존스의 견해는 성경은 성령이 성경기자의 생각, 기록, 단어에까지 감동을 주면서 지배하고 활동한 결과라는 것이다.(교리강의 참고)

 

* 돋보기: 불오성이란 성경이 오류의 가능성이 있을 수 없는 성질을 지니고 있음을 의미하고 무오란 불오라는 성경의 성질로 말미암아 기록된 성경에는 오류가 없음을 의미한다. 저자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아서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기록하였다면, 성경에는 오류의 가능성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성경 영감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면 성경의 불오도 받아들일 수 없고 성경을 하나님의 계시말씀으로써 최고의 권위를 지낸 책으로 볼 수 없으며, 단지 인간의 종교적 통찰력에 의해 기록된 종교적 문서로 밖에 인정하지 못하게 된다. (총신대 신대원 조직신학-김길성 교수)

 

 

3) 자해석과 자증성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성경과 성령의 조화를 강조했다.

 

성경의 자해석: 쯔빙글리는 교회로 하여금 ‘성경이 성경을 해석한다는 것을 인식하게 해주는 성경의 참된 해석자가 성령’이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성경해석의 열쇠는 베드로를 계승한다는 로마교회 계승자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 공동체에 속해 있는 것이다. 전통이 해석에 도움을 줄 수는 있지만 특정한 성경 본문이 연구의 결과 그 본질에 있어서 명백하게 우화적이 아니라면, 성경의 참된 영적 의미는 자연적이며 문자적이다.

 

성경의 자증성: 성경이 선자의 마음속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내적 증언으로 말미암아 확증된다는 것이다.  

 

4) 자유

개혁자들은 로마 가톨릭교회의 성직자 계급으로 부터 성경을 해방시켰다. 루터의 독일어 성경처럼 자기 나라 말로 성경을 번역함으로써, 쯔빙글리에 의해 추천된 주해 설교를 통해서, 마지막으로 칼빈의 주석같이 문법적이고도 역사적인 주해를 통해서 그렇게 한 것이다. 그들은 성경이 우리의 지성을 인도해 주는 신앙의 법칙이요 매일 우리의 의무를 지도해주는 행위의 법칙이라고 가르쳤다. 성경은 칼빈이 말한 것처럼 아버지가 자녀에게 하듯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다.

 

5) 능력

종교 개혁자들은 하나님께서 성경을 그분의 진리와 능력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주셨다고 교훈했다.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서, 우리는 하나님의 영께서 성경을 통하여 우리의 지성을 변화시키고 새롭게 하기를 고대할 수 있다.

 

다른 책들이 우리에게 지식을 줄 수도 있고 심지어 우리를 개혁시킬 수도 있지만, 오직 이 한 권의 책만이 우리를 진정으로 변화시키고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 가게 할 수 있다.  

 

結: 우리는 ‘오직 성경’이라는 원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성경은 우리 자신을 보는 거울(약1:22-27)이며, 우리의 행위의 규례이며(갈6:16), 우리의 ‘행실을 깨끗하게’(시119:9) 하는 율례이며, 우리를 뜨겁게 하는 불이며(눅24:32), 우리를 먹이는 양식이며(욥23:12), 우리가 싸우는 검이며(엡6:l7), 우리의 의심과 두려움을 해결해 주는 모사이며(시119:24), 우리를 풍요롭게 해 주는 기업(시119:111,1l2)이다.

 

존 플라벨이 말했듯이, 우리는 과연 성경으로부터 ‘가장 최고의 삶과 가장 고상한 고난과 가장 유익한 죽음의 방법’을 배우고 있는가?

 

 

2. 오직 은혜(SOLA GRATIA)

 

구원의 전체 사역이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sola gratia)에 기인하도록 하기위해 하나님께서 죄인들의 구원을 주도하시고 완성시키는 것인가? 인간의 주도와 참여인가?

 

무조건적인 은혜와 자유의지의 논쟁에서 루터는 죄인이 구원의 방법을 제공하거나 심지어 그것을 취하는 일조차도 할 수 없는 무능력한 존재임을 주장했다. 그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면죄부와 순례 여행, 고행, 금식, 연옥과 성모 마리아 숭배 체계를 공격했다.  

 

칼빈주의 침례교도인 윌리엄 뉴먼, “은혜란 -- 무가치한 사람에게 베푸시는 --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호의이다”.

 

은혜를 받은 사람은 단순히 은혜 받을 자격이 없는 절망적인 죄인들이 아니라 나쁜 마음과 행실로 하나님을 대적하여 오직 지옥 형벌을 받아야 마땅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본성에 따라 하나님은 정말로 그들에게 전적으로 과분한 사랑을 베푸신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 때, 그들의 삶이 영원히 바뀐다.

 

에베소서 2장 4,5절(4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이 선언하듯이, 긍휼과 위대하신 사랑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은혜로 말미암아 그들을 구원하고 살리고 자유하게 하시며 해방시키신다. 그들이 비록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서 사랑스럽지 않고 혐오스럽기까지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사랑을 베풀어 주신다. 하나님은 그들의 죄를 사하시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심어 주시며, 하나님의 은혜에 신실하게 반응할 수 있도록 도우신다. 그러므로 무조건적이고도 주권적인 은혜가 의미하는 바는, 주권적이고도 하늘과 땅의 가장 높으신 하나님, 구원의 삼위 하나님께서 죄로 말미암아 징계 받아 마땅한 사람들에게 그들의 삶이 변하여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영원토록 하나님을 위해 살 수 있도록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고 적용하신다는 것이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이 은혜를 가리켜 유대인과 이방인을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하나님의 왕국의 공동 상속자로 만드는 은혜라고 특별히 강조한다(롬1:16). 이 은혜는 하나님과 하나님을 대적하는 죄인 사이에 화평을 수립해 준다(롬5:2). 또한 이 은혜는 죄의 권세보다 훨씬 더 강해서 죄의 지배로부터 참된 자유와 영속하는 해방을 가져다준다(롬5:20,21, 6:14), 하나님의 신적 은혜는 교회의 많은 사람에게 여러 가지 은사를 나누어 준다(롬12:6).

 

이 은혜가 궁극적으로 사망을 정복할 것이며, 은혜를 받는 모든 자들을 영생으로 이끌 것이다(롬5:20,21). 왜냐하면 이것은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기 이전에 인간의 아무런 공로 없이 그들을 구원하기로 택하신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이다(롬11:5,6).

 

은혜는 우리를 부르고(갈1:15), 우리를 중생시키며(딛3:5), 우리를 의롭다 하며(롬3:24), 거룩케 하며(히13:20,21), 우리를 보호한다(벧전1:3-5). 우리는 용서받기 위해, 그리고 하나님께 돌아가기 위해, 우리의 상한 마음을 고치기 위해, 고난과 영적 전투의 때에 강해지기 위해 은혜가 필요하다. 오직 하나님의 자유롭고도 주권적인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과 구원적 관계를 소유할 수 있다. 오직 은혜로만 우리는 회심과 거룩과 봉사와 고난으로 부르심을 받을 수 있다(엡2:8-10, 벧후3:18, 빌2:12,13, 고후1:12 참고).

 

주권적 은혜는 우리의 교만을 부숴뜨린다. 은혜는 우리를 부끄럽게 하고 겸손하게 만든다. 선택으로부터 영화에 이르기까지 은혜는 홀로 화려하게 통치한다. 요한복음 l장 16절은 우리가 ‘은혜 위에 은혜’를 받는다고 말한다. 이것은 문자적으로 ‘은혜를 향하는’ 또는 ‘은혜 위에 은혜를 조각하는 것’을 의미한다. 파도가 해안에 연이어 몰려오는 것처럼 은혜 위에 은혜가 계속해서 넘치는 것이다.

 

은혜는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신적 원리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통한 신적인 공급이다. 그것은 선택과 부르심과 거듭남을 통하여 표현되는 하나님의 대권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위하여 살고 고난 받으며 심지어 죽을 수 있도록 만들고, 그 안에서 영원히 보존되게 하기 위하여 무조건적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만드는 하나님의 신적인 능력이다.

 

 

3. 오직 믿음(SOLA FIDE)

 

루터는 타락한 죄인이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에 대해 고통스러워 하다가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1:17)”라는 말씀을 통해 ‘믿음을 통해 의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공의가 바로 의’ 라고 깨닫다.

 

칭의(거듭남)는 죄사함과 ‘의’의 전가로 구성되며 우리에게는 하나님 앞에 흠 없이 서게 만들어 주는 선천적인 의가 없으므로 루터의 표현처럼 받을 자격이 없는 죄인들에게 은혜롭게 전가되는 ‘낯선 의’(그리스도와 그분의 희생 제사적인 보혈)를 믿는 믿음이 필요하다. 이 믿음은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전가되는 의’를 받는 ‘믿음의 손’을 죄인에게 수여하시므로 되며 이 때 믿음의 손이란 ‘믿는 자의 공로’가 아니라 오직 ‘받는 도구’이다. ‘믿음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의에 참여하도록 안으로 이끌어 줄 뿐 다른 방법으로 의롭다함을 얻게 하지 않는다.’(『기독교강요』 3.9.20)(돋보기: 칭의의 근거는 그리스도의 전가된 의이지 믿음이 아님)

 

믿음은 죄인을 구세주와 연합시켜 ‘그리스도’와 ‘그분의 의로우심’을 붙잡게 한다. 믿음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살 수 있도록 우리 영혼을 그리스도의 의로 감싸고 포장한다. 그것은 우리 전인을 완전하신 그리스도께 맡기는 것이다. 믿음의 그리스도 중심성에 대해 루터는 ‘믿음은 그리스도를 붙잡고 마치 반지가 보석을 끌어안는 것처럼 그리스도를 껴  안는다’라고 기록한다.

 

개혁주의는 믿음에 무엇을 더하는 행위를 대적한다. 로마 가톨리교회는 칭의를 하나님의 선언으로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돋보기: 개신교의 칭의는 의롭다고 선포되는 법적 행위- 로이드 존스 교리강의 참고) 그를 의롭게 만들어 주는 것이라고 하여 칭의에 관한 여러 등급을 만들고 ‘칭의와 성화’를 혼합했다.

 

믿음과 은혜는 경쟁 상대가 아니다. 오직 믿음 안에서만 은혜가 존중받기 때문에 구원은 믿음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 따라서 ‘오직 은혜’는 ‘오직 믿음’을 통해서 확증되는 것이다.

 

 

4. 오직 그리스도(SOLUS CHRISTUS)

 

개혁주의는 성경과 은혜와 믿음이 다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을 강조한다고 확증한다. “엄밀히 말해 구원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아니라 믿음을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시는 그리스도 자신이시다.”(벤자민 워필드),

 

“예수 그리스도는 성경의 중심이자 경계선‘이다.(루터) 비록 하나님의 구원사역 외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자기표현이 있을지라도 그것이 하나님과 사람을 연합시킬 수는 없다.(롬 1장, 2장) 오직 그리스도와의 연합만이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다. 하나님의 공의는 오직 그리스도의 순종으로만 만족될 수 있다. 그리스도 밖에서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시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언제나 은혜롭고 인자하신 하나님 아버지이시다.

 

쯔빙글리는 『67개 조항』(1523)에서“그리스도는 그의 몸 된 모든 신자들의 머리이시다. 그분이 없이는 몸은 죽은 것이다(제7항).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이시다(제19항). 누구든지 다른 잘못된 길을 추구하거나 제시하는 사람은 영혼의 살인자이며 탈취자이다(제4항).”라고 했다.

 

반면 칼 브라텐에 의하면 현재 기독교와 천주교에서는 19세기 자유주의 개신교의 기독론 처럼 유일한 구주 예수 그리스도 대신 ‘죄가 없는 인간을 천국으로 불러들이시는 하나님, 진노하시지 않는 하나님, 십자가 없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하여 심판 없이 인간을 하늘로 불러들이시는 하나님’을 선포하고 숭배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으며 포스트 모더니즘(후기 현대주의)은 진리를 전적으로 다원적이고도 상대적인 것으로 파악하여 절대진리는 없다고 간주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삼중직(삼직)

 

➀선지자

언약의 성취: 모세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네 형제 중에서 너를 위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신18:15)라는 언약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성취된다.(“내가 그라”(요4:25~26))

 

선지자로서 예수는 하나님께서 역사를 통해 의도하고 목적하셨던 것을 계시하실 수 있는 즉 ‘영세 전부터’ 구약의 ‘선지자들의 글’의 참 의미를 가르치고 나타내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시다(롬 6:25, 26 참고). 우리는 오직 그분의 교훈과 가르침에 주의할 때만 그리스도인의 삶의 진보를 기대할 수 있다.

 

➁제사장

개혁주의는 그리스도의 제사장적 중보를 강조한다. 구원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있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할 수 없는 두 가지 때문이다.

 

첫째, 계명에 대한 순종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는 것

우리는 다 계명을 범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므로 우리 대신 우리를 위해 생각과 언행에 있어 완전하게 계명에 순종할 다른 분이 필요하다. 적극적이고 완전하게 계명에 순종하신 그 분이 필요하다.

 

둘째, ‘우리 죗값’을 지불하는 것

죄의 삯은 사망인데(롬6:23) 이 사망은 신체적․영적․영원한 사망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였음에도(롬 5:10)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와 하나님 아버지 사이에 영원한 화목을 가져오시기 위해, 죄의 지배(딛 2:14)․마귀의 권세․(히2:14)․죄와 사망의 결과로부터(딤후1:10) 우리를 자유케 하시기 위해, 무조건적으로 자원해서 목숨을 버리시므로 우리 형벌을 지불하시고 죄책을 속죄하셨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택자들을 위해 ‘계명을 향한 능동적 순종’과 ‘대속하시는 죽음의 수동적 순종’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완전히 만족시키셨으므로 오직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존전에 갈 수 있는 다른 길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유일한 대제사장이 되시어 그의 몸을 드린 단번의 제사로 우리를 구속하시고 또 살아서 우리를 위하여 계속해서 하나님께 중보하시기 때문에’(『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제31문)우리에게 전적으로 필요한 대제사장이시다.

 

➂왕

그리스도는 그분의 성령을 방편으로 모든 것을 통치하시는 영적이고도 영원한 영역에서의 왕이시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주의하여 그분을 믿으라는 명령을 하신다.(행16:31) 바울이 로마서 16:26에서 요청하는 이 ‘믿음의 순종’을 행하는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의 백성들이며 그분의 왕국에 합당한 시민들이다. ([롬] 16:26 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좇아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으로 믿어 순종케 하시려고 알게 하신 바 그 비밀의 계시를 좇아 된 것이니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케 하실 [롬] 16:27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그들에게 그리스도가 ‘영원하신 왕이 되어 그의 말씀과 성령으로 우리를 다스리고 또 우리를 변호하고 보존하시어 그 구속을 확보’하실 것이다(『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제31문)

 

칼빈: “우리가 온갖 괴로움을 다 견디며 이 땅에서 살아간다 할지라도 싸움이 끝나 개선할 때까지 우리 왕께서는 결코 우리를 궁핍한 상태로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우리의 필요를 채우실 것이다. 그분의 통치 본질이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모든 것을 우리와 함
께 나누시는 것이다. 그분의 권능으로 우리를 무장시키시고, 그분의 아름다움과 웅대함으로 우리를 꾸미시며, 그분의 부귀로 우리를 부요하게 하시는 것이다.”(기독교강요 2.15.4)

 

복음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리스도가 누구이며 그분이 우리 밖에서 어떤 일을 성취하셨는지에 대한 모든 것을 보여 준다. 즉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인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법 아래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만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의 성장을 소망하고 기대할 수 있다.

 

당신은 다음과 같은 고백의 깊이를 아는가?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골 3:3)

 

당신은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22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33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고전3:21-23)” 라는 말씀을 이해하고 있는가?

 

 

5. 오직 하나님께 영광(SOLIDEO GLORIA)

 

칼빈주의 신학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은 진리들을 강조한다.

 

1) 하나님의 목적은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시는 것이다

영광이라는 히브리어는 ‘카보드(kabod)'로 ‘무겁다’(가치나 값을 지닌다)라는 어근을 지닌 단어의 파생어이며, 헬라어는 ‘독사(doxa)'로 ‘견해’(어떤 대상에 대한 가치나 값을 매기는 우리의 생각)를 뜻한다. 이로 볼 때 영광이란 히브리 사상으로 ‘하나님 안에 본래부터 존재하는 그분의 본질적인 가치나 값’인데 반해 헬라 사상으로는 ‘그들이 보는 하나님의 말씀과 역사하심에 있는 가치나 값에 대한 지성적이고도 도덕적인 반응’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하는 모든 일을 통하여 피조물들에게 자신의 도덕적 탁월하심과 그 아름다움을 나타내신다. 또한 그들에게 복을 주심으로써 찬미를 불러 일으키사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신다(엡1: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하나님의 속성의 도덕적 탁월성은 그분의 창조, 섭리, 구속의 위대함과 가치를 통해 빛난다.(사 44:23, 요12:28, 요13:31-32) 이 탁월함을 경험한 예배자는 오직 찬미감사와 순종을 통해 하나님께만 모든 영광을 올려드린다.(요17:4, 21:19, 롬4:20, 롬15:6․9, 벧전 4:12-16)

 

이사야서 6:3에서 스랍들은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라고 선포한다. 매사에 심지어 악인에 대한 정죄를 통해서도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셔야 하며 하나님의 궁극적인 영광은 온 세상이 그분의 구원적 은혜로 충만해지는 것이다. 이에 대해 로마서 5장 21절은 다음과 같이 말씀한다.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  

 

2) 인간의 제일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칼빈주의자들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영광과 자신의 선을 위해 합력하여 역사하고 있음을 확신한다.(롬 8:28)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제1문: 살아서나 죽어서나 당신의 유일한 위로는 무엇입니까?  답: 살아서나 죽어서나 나는 나의 것이 아니요, 몸도 영혼도 나의 신실한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3) 인간의 제일되는 기쁨은 하나님을 찬미하는 것이다

인간의 삶과 말을 통해 영광을 받으실 때 하나님이 조금 더 영광스러워지시는 것이 아니다. 영광은 그분 존재의 본질적인 부분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찬미할 때 최고의 행복을 느낀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고백: “나의 인생에서 가장 위대했던 순간은 내 자신의 구원을 위해 신경 썻던 순간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과의 교제에 이끌리어 그분의 아름다움과 영광을 목도하던 순간이다……나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과 그리스도의 영광으로 충만해질 수만 있다면 내 자신이 텅 비고 없어져도 좋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송영은 하나님이 누구인지, 그분이 왜 인간의 찬미와 경배를 받기에 합당한 분인지를 알기 때문에 하나님을 드높이는 것이다.

* 돋보기: 송영은 Doxology(영광(doxa)와 말씀(logos)의 합성)로 ‘영광에 대한 말’이다. 찬양은 하나님의 영광을 말하는 것이다.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유일하신 하나님의 속성과 인격과 행동을 ‘무슨 이유 때문에 찬양하는 지’ 하나 하나 거론하는 것이다.

로마서 11장 36절에 나타난 바울의 송영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 사는 삶의 모범을 제시한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나오고’는 하나님께서 만물의 근원이심을 제시한다(요1:3). ‘말미암고’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만물을 지탱하시는 분임을 의미한다(골1:17). ‘돌아감이라’는 하나님께서 목적이심을 의미한다. 만물이 하나님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칼빈은 이 구절에 대해 “하나님은 만물의 근원이시다. 그분은 창조주이시다. 그분은 만물이 기동하며 살아가는 동인이 되시며 그 존재 목적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방편이시다. 그리고 그분은 자신의 모든 영광이 다시 자신에게로 돌아가는 마지막 목적이 되신다.”라고 주석한다.

그렇다면 칼빈주의자는 어떻게 이러한 패러다임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는가? 하나님께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받고 하나님의 성품으로 회복되기 위하여 그리스도에게로 피신해야 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창조주, 섭리주, 그리고 구속자로서 찬미하고 경배하며 기뻐해야 한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만물을 그의 손에 맡겨야 한다. 천상의 마음을 지니고 하나님과 영원토록 함께 하고픈 마음을 소유해야 한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은 그 어떤 다른 목적이나 욕망과도 비교할 수 없다. 참된 칼빈주의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통해 자신의 존재 목적과 기쁨을 찾는다.

웨스트민스트 소요리문답 제1문답: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다.

 

 

출처: 문화와 설교연구원

출처 : 생명나무 쉼터
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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