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성서신학 역사
제 1 부 구약성서 신학의 초기 발전 단계
1. 구약성서 신학의 여명기
1787년에 젊은 독일 학자 요한 필립 가블러는 알트도르프대학 신학부 교수로 임명을 받았다. 그의 취임강연 "성서 신학과 조직 신학간의 적절한 구분과 목적"이라는 이 강연이 바로, 최초로 성서 신학을 학문적으로 추구하기 위한 기초 작업을 조직적으로 진술한 것이다.
가블러의 목적은 신학 수업에 도움이 되는 몇 가지 제안을 하면서 교회와 조직 신학으로 하여금 그 시대에 분쟁과 분열을 야기시키는 문제점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는 데 있었다.
가블러는 우선 성서 종교 또는 성서신학과 신학 그 자체, 또는 조직 신학의 분명한 차이점을 인정해야 한다고 호소하면서 조직신학을 명확히 구분해야 할것을 주장한다. 성서 저자들이 이념을 성서에서 찾아내어 주의 깊게 조화를 시키고, 보편적 사상과 연관을 맺고, 또 다른 시기의 이념과 비교 분석을 함으로써만 조직 신학에서 그 이념을 어떻게 사용할 수 있는가에 대해 결정된 것이다.
이렇게 되면 성서 신학과 조직 신학의 목표가 뚜렷해질 것이다. 신약성서 신학과 대조되는 구약 성서 신학의 기초를 수립하는데 큰 기여를 한셈이다. 그의 취임 강연은 구약성서 신학상의 시발점으로 볼 수 있게 하는 유혹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강연은 오랫도안 추구해 온 성서 연구의 결과를 발표한 것에 불과하다. 우리는 가블러의 공헌에 대한 중요성을 약화시키지 않는 범위 내에서 구약성서 신학사의 시발점을 그의 선구자들로부터 시작할 수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성서의 개념을 조직적으로 해석하게 된 최초의 형태, 즉 성서의 종교를 정통 개신교 교리입장에서 어떻게 다루었는가를 살펴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 슈미트를 우리 구약서 개요의 시발점으로 정하는 바이다. 개신교 정통주의와 입장을 반영하며, 그가 사용한 방법이 필립 멜랑히톤이나 중세기 스콜라 학자들이 이미 사용하였던 오래된 방법이기 때문이다.
세사브 티안 슈미트가 저술한 "표준 신학 주제와 관련된 구약성서와 신약성서 본문 선집은 개신교 교회 교리의 정당성을 옹호하고 증명하기 위해 성서에서 발췌한 것이다. 그는 구약성성 부분과 신약성서 부분을 따로 취급하고 있다.
편의상 그러한 구분이 구약성서 신학을 독립적인 학문 분야로 발전시키는 계기가 된것이다. 그는 교리를 선택하고 그 다음에는 거기에 맞는 성서 구절을 뽑아 주석하였다. 슈미트의 작업과 유사한 최초작품으로 또한 한 세기 전에 있었다.
요한 비간트는 교리의 입장을 옹호하는 성서 증빙자료 선집을 출판한 적이 있다. 또한 야곱 크리스트만의 "성서 신학"이라는 용어를 그의 제목에 사용했으나 슈미트 이후에는 신학교육에 관한 작업이 요한 휠제만, 요한 하인리히 마이우스 ,요한빌헬름 바이에르 등에 의해 간행되었다.
그들은 또, 그리스도인의 사상과 생활이 성서을 토대로 해야 한다는 정통적인 견해를 방영하고 있으며, 정통주의 신조는 그 교리와 신학적 체계가 모두 성서에서 나온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여기서 우리의 문제점은 17세기에 개신교에서 성서를 어떻게 해석하였느냐 하는 것과 그 방법 자체의 기원과 발전이다.
2. 개신교 스콜라 학파에서의 성서 위치
개신교 스콜라 학파는 성서와 유일한 권위를 주장한 종교 개혁의 구호를 너무나 진지하게 받아들인 나머지 성서의 교리를 모든 체계의 중심성으로 삼는 것이다. 그들은 신학자로서의 종교 개혁자들에게서 물려받은 종교적 유산을 설명하며 변호해야 한다는 신념이다. 그러나 그들은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으며, 종교 개혁의 가장 중요한 관점의 일부를 곡해하거나 또는 경시해 버린 경우도 있었다.
개신교 스콜라 학파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종교 개혁자들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가 보아야 한다. 죄많은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계시된 하나님의 은총으로서만 구원을 받을 수 있으며, 그리스도교 신앙이 무엇인가를 결정하는 권위는 교회 공의회의 결정이나 교황청의 선포와 같은 교회 전통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성서에만 있다는 주장은 루터가 로마 카톨릭교회와 결별하는 이유이다. 사실상 "성서로만으로"라는 그의 원칙은 실제로 "그리스도만으로"라는 원칙과 같은 것이었다. 즉 성서의 유일한 권위를 말했으나, 그 권위를 무분별하게 성서의 모든 책에 다 적용시킨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율법과 복음은 모두 구원시키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는 종교적인 체험을 토대로 한 것이기에, 성서의 문자를 초월하면서도 성서가 그리스도인 신앙에 관해 필요한 것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고 주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루터교가 성서의 내용과 형식이라는 두 개의 평형이 유지되지 않았기 때문에 루터의 생각은 17세기의 교조적 전통주의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쯔빙글리는 "내적인"말씀과 "외적인"말씁을 구분하고 있으며 칼빈도, 성서 권위의 올바른 주장은 "성령의 재적인 증거"에 있다고 보앗다.
칼빈이 시편의 많은 부분에 있어서의 다윗 저작설이나 베드로후서의 저작설에 의구심을 표명한 것은, 그도 전통주의자나 문자주의자가 아님을 보여준다. 그러나 다른 개혁자들 중에는 루터보다 더 강하게 성서의 객관적이고 유일한 줘위를 주장하며, 하나님의 말씁과 경전문집 사이의 관련성에 대해 주장하고 있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다.
종교 개혁자들은 "성서만으로"라는 원칙을 강조함으로써 성서을 교회의 전통과 권위 위에 두었으며, 성서를 살아 있는 교회의 전통과 분리시킴으로써 교회와 성서 사이에 간격을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그로인해, 역사, 역사의식, 비평이라는 개념이 개혁자들의 생각을 지배하게 된것이다. 이러한 역사적인 간격이 성서를 현대와 현대 독자들로 부터 분리시킴으로서 역사 비평을 일으키게 한 것이다. 개인이 성서을 판단할 수 있다는 생각은 현대의 이념, 사상 그리고 신학적 체계를 성서 본문에 유입시키거나 차출할 수 있게 한 것이다.
개혁파 스콜라 학파의 신학자들은 신학을 과학으로 보고, 아리스토텔레스와 아퀴나스의 사상과 방법론에 많이 의존하였다. 정통주의 신학자들은 성서가 그들 신학의 진리를 보장하는 무오하고도 객관적인 표준이 된다고 보았다. 칼빈 자신이 이미 그러한 발전을 향한 준비를 해 놓은 셈이다. 개신교 스콜라 학파에서는, 성서가 초자연적인 책이며, 성서의 모든 부분이 문자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이며, 인간 저자의 역할은 필사자 정도라고 여기게 되었다. 그러나, 종국에는 성서의 최종적인 권위를 이론적으로는 주장할 수 있으나 성서가 사용된 것은 각종 교리를 증명하는 것에 불과하므로, 성서의 권위는 조직 신학에 예속되었다는 위구심을 버릴 수가 없다.
3. 증빙자료("Proof-text") 신학의 기원
필립 멜랑히톤의 Loci communes의 첫판은 루터의 기본적인 이념들을 조직적으로 전개시킨 최초의 시도였다. 이 책은, 루터가 새로 발견한 복음의 해석을 간결하고도 조리있게 잘 정리해 놓았다. 그는 Rhetorica에, 연역법 논쟁에서 사용된 방안을 정의하기 위해 topos라는 마라을 사용했다. 그리고 이 표현이 시세로의 Topica를 통해 중세기 인본주의 자들에게까지 전해진 것이다. 멜랑히톤은 롬바드와는 달리, 각 개념의 내요을 정리하는 데 있어서 스콜라 학파의 변증법적 논리를 사용하지 않고 단지 여러 주제에 대한 섯서의 교훈을 제시하는 것으로 만족하였다. 루터교 스콜라 학파가 생기게 되자, 신학자들의 과업은 하나님의 은총아나에서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종교 개혁의 어린 나무를 키우고 가꾸는 일 대신에, 오히려 신앙고백서에 수록된 교리의 체계를 해석하고 변호하는 것을 주요 과제로 여기게 되었다. 그들의 신학은 본질적으로 신앙고백서를 따를 수 밖에 없었으며, 그 배열과 차례도 그대로 추종하였다.
4. "증빙 자료" 신학의 방법론
세바스티안 슈미트가 채택한 방법과, 그의 선구자들과 후계자들이 사용한 방법들을 비교해 본다면 개신교 스콜라 학파의 후손으로 출현한 만큼 그 기본적인 전제는 모계 특수성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그들은 문자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가 초자연적인 인정을 해준다는 것으로 권위를 삼는다. 위와 같은 전제하에서는 성서 신학의 일이 제한된 것일 수밖에 없다.그러므로 구약성서 신학을 운위한다는 것은, 구약성서와 신약성서 사이에 아무런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상황이므로 더 이상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이러한 방법의 약점은 그것이 너문 피상적이라는 것이며, 동시에 성서의 중요성을 제대로 밝히지 못한다는 것이다.
5. 요하네스 코세이우스의 연방 신학
구약성서 신학 연구의 초기 단계에 보다 감명적이며 창조적인 공헌은, 17세기에 코세이우스가 연방 또는 계약 신학을 구약성서 해석의 관건으로 삼은 일이다. 코세이우스는 그의 주요 대작의 서문에서, 그의 목적은 그리스도교 교리와 성서 전체의 재용 사이에 조화를 이루는 것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목적 진술이 중요한 것은, 그도 성서의 무오서과 더불어 교리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조직신학의 분위기에 젖어 있었다는 것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계약 개념을 성서에 자세히 적용시키고, 성서 역사에 나타난 모든 하나님의 말씀과 해위를 이 한 개념 속에 포함시킨 것은 포세이우스가 처음이다. 그는 창조 이전에 이미 성부와 성자 사이에 계약이 체결된 것 이외에, 두 가지 역사적인 계약에도 차이가 있음을 주장하였다.
구약성서 신학사 역구에 있어서 코세이우스의 위치가 어떠한가를 평가한다면, 그는 당대의 교리 신학 관점에서 할 수 없었던 히브리 종교의 관점을 분명히 보여준셈이다. 하나님의 구속 행위가 역사 안에서 이루어지며, 또 계약이 그의 논쟁의 중요한 심점이 되었다는 것은, 그가 구약성서의 특색을 잘보여 준 것이다. 이두가지 주제가 그 이후 구약성서 신학연구에서 계속 논의되는 것은 코세이우스의 통찰력에 의한 큰 공헌이다. 또 그가 계약 개념을 사용한 것은 19세기와 20세기에도 계속 언급되기 때문에 그는 이 방면의 선구자라 할 수 있는 것이다.
6. 구약성서의 급진적 해석
루터와 칼빈은 신앙의 규범으로서, 확신 있는 양심이나 또는 성경의 내적증거라는 형태를 통한 주관적인 확실성의 토대로서 이러한 주관적 설득력의 강조 대신, 완전히 항구적이며 객관적이고 또 무오한 성서가 그 기준이 됨을 강조한 것이다. 새로운 땅에 대한 발견과 탐험을 통한 새로운 자료의 축적과 방법론 및 과학적 지식의 발전은 16세기와 17세기에 새로운 지식의 폭발을 가져왔다. 그러한 새로운 지식은 이해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게 되었으며, 전통적으로 성서의 안목을 통해 세계를 보아 온 당애의 해석적 패러다임에 도전을 가져왔다. 새로운 지식과 정보는 성서가 제시하는 한계와는 맞지 않는 것이었다. 17세기에 가장 급진적인 성서 해석은 라 페이레르와 스피노자에 의해 아루어졌으며, 그들의 작업을 성서 신학이라고 말할 수 없다면 그들은 적어도 성서의 새로운 신학적 접근법을 계발한 것이다.
라 페이레르는 성서에 대한 많은 비평적인 문제점들을 발견하였고, 그는 이것을 자신의 논쟁에 유리하도록 사용하였다. 그의 저서는 지식을 발전시키고 축적시키는 일을 성서의 이야기나 그 관점에 포함시킬 수 없음을 드러낸 것이다. 역사적이거나 인류학적인 많은 자료는 성서의 세계관과는 일치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라 페이레르의 저서와 그의 학설을 곧 맹렬히 공격을 받았고 정죄되었다.
스피노자는 성서 내의 모순을 조화시키려는 시도나 또 성서와 철학적 사고를 조화시키려는 시도에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다.그는 오히려 그러한 문제점이 있음을 시인하고, 그로부터 성서 자료들의 기원과 역사를 이해하려고 하였다. 그의 성성에 대한 해석과 접근법은 1670년에 암스테르담에서 무명으로 발표된 [신학 및 정치의 논제] 에 잘 나타났다. 그는 성서, 계시, 그리고 성서의 진리가 철학, 이성과는 전혀 다른 범주에 속하고 있음을 증명하려고 애썼다. 우리는 스피노자에게서 성서, 기본적 교리 또는 하나님 말씀의 기본적 내용이 무엇인가를 찾아보려는 노력을 엿볼 수 있다. 그는 성서의 도덕 및 윤리적 내용을 강조하며, 이것이 비철학적 또는 철학적 혀태의 지식과 어떤 권위와 관련성을 갖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성서의 교리를 유대교의 민족주의와 그리스독교의 철학 및 교회적인 교조주의에서 해방시키려고 노력하였다.
7. 그 시대의 신학적 선택
종교개혁자들은 성서를 교회 전통과 대치되는 위치에 두고, 교회 전통의 권위를 부인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루터의 경우, 경전안에 경전을 형성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칼빈의 경우에는 그가 성서에서 차용해 왔다고 보는 신학 체계를 형성하게 되었다. 개신교 스콜라 학파에서는 교리의 원천으로서, 무오한 성서와 역사가 성서에 있는 교리만큼 중요한 것이라고 보았다.
연방신학은 연방주의는 성서에 묘사된 하나님과 인간간의 역사가 성서에 있는 교리만큼 중요한 것이라고 보았다. 라 페이레르와 스피노자와 가타이 성서에의 급진적인 접근 방법은 성서의 전통적인 주장에 대한 회의적인 태도와 성서까지도 비성서적인 지식과 철학적 고려를 통해 도전해 볼 수 있다는 생각에서 중요한 대안을 제시하게 된 것이다.
제 2 부 18세기의 구약성서 신학
1. 18세기 주요지성 및 종교운동
18세기의 주요 지성 및 종교 운동 구약성서 신학의 역사상 18세기가 가장중요한 것은 ,구약이 처음으로 신학연구에서 독립적인 학문 분야로 인정을 받았기 때문이다.
첫째는 스콜라 학라 정통주의의 해체와 밀접히 관련된 것이다. 두번째는, 총아라 할 수 있은 이성주의이다. 이성주의는 문학과 성서의 종교를 연구하는 데 점차 많이 사용되었으며, 성서 비평과 밀접한 연관을 맺게되었다. 18세기의 구약성서 신학이 태동하고 발전되는 시기의 지성적이며 종교적인 분위기를 좌우한 것이 사실이다.
경건주의에서는 주관적인 종교적 체험으로 나타나며, 이성주의에서는 이해를 위한 인간의 이성과 그 능력을 강조하는 데서 나타나고 있다. 경건주의 중요 특색은 성서읽기, 기도, 상호 격려, 도덕적의 금욕적 표중 등을 그리스도교생활의 덕목으로 간주하는 "교회 내의 교회", 즉 커다란 교회 조직체 내의 조그만모임, 또는 핵을 형성해 나가게 되었다. 경건주의 자들이 종교적 확실성을 올바른 교리에서보다는 경험에서 찾으려고 하므로, 이 조그만 옴이미들을 움직이는 정신이나 이념을 루터교 정통주의 관점과 엄연히 달랐음이 확실했다.
스패너는 개신교 스콜라 학파와 신학 교육에 대해 지극히 비판적이었다. 그의 의하면 스콜라파 신학은 "신앙의 기초가 성서라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그 위에 인간의 탐구라는 나무와 지푸라기만 쌓아올리기 때문에 금은 보이지 않고" 또 " 그리스도와 그의 가르침의 단순함에 대한 핵심과 기쁨을 파악하기 힘들다.
경건주의와 이성주의 사이의 협력은 양자가 모두 스콜라 학파의 신하가에 반대하는한 서로 도와 주었으나, 이성주의자들의 승리로 끝났다. 이성주의란 인간 본성의 내적인 선함과 충족감에 대한 신념, 그리고 계시나 교회 교리가 갖는 권위에 대항해 인간의 시성적 역량을 의지하며, 또 경건주의가 강조하는 주관적인 체험도 반대하는 이상, 여러가지 개별적인 사상의 운동이 한테 뭉친 것이라 볼 수 있다.
아르미니안주의자들은 성서에 대해서만은 정통주의자들과 유사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들은 성서의 유일한 권위를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들의 생각은 구약성서 신학 연구에 직접적으로 영햐을 끼친 것은 없고, 다만 개혁파 스콜라주의의 붕괴에 기여한 것뿐이다. 그들의 신학은 결정적으로 반삼위일체이며, 그리스도의 인성에 더 많은 역점을 두어 그리스도의 삶을 순종과 지혜의 예표로 삼았다.
그들은 다른 개신교 사상가들과 별차이가 없는 권위를 주장하는 입장을 취하게 되었다. 하나님 의지에 대한 자기 계시의 길은 예수님의 새애와 가르침이기 때문에, 그들은 신약성서의 증거로서 구약성서를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신약성서 만을 특별히 거룩하고 신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자연주의 자들은 이성만으로도 족하며 또 이니강의 도덕적 선함을 강조한다. 그들에게 있어서 공통적인 것은 종교를 그 기본적이고도 우주적인 요소로 축서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자연신론자들은 성서에 특별한 관심을 갖지 않았기 때문에 이스라엘과 초기 그리스도교 종교를 역사 비평적 방법으로 재구성하는 일에 애를 쓰지 않았다.
독일 이성주의는 고트프리드 빌헬름 라이이프니쯔에 의해 처음으로 진지한 사상 형태를 표출하게 되었다. 볼트의 신학적 견해는 자연신론자의 것과 유사하다. 즉 하나님은 기계적인 우주를 창조하신 "첫번째 원인"이며, 인간 내면에는 하나님이 지으신 자연적성품의 일부로서 덕스러운 삶을 위해 필요한 올바른 행동의 모든 원칙이 내재해 있다고 보았다. 그는 관용적인 시성주의적 철학자들과 신학자들은 교리를 자연적 이성과 사고의 범주로 재해석해 보려고 시도하였다.
칸트의 [순수 이성 비판]은 인간 마음에서 내면적인 이념들을 제외시켜 버리고, 지식은 밖에서 마음으로 온다고 보았다. 그가 유대교가 세속적인 성격을 띠었다고 하는 것은 내세에 대한 시념이 결여되어 있고 아주 사소한 일까지도 보상과 형벌의 원칙을 적용시키기 때문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계몽주의적 이성주의는 보편적인 진리를 찾으려고 애쓰며 이성과 사고의 역할을 강조했지만 낭만주의는 개체에 관심을 가지며 동정, 열성, 상상력의 역할을 강조하였다. 우리는 칸트가 시대정신을 가장 명확하게 기술해 놓았음을 발견할 수 잇다. 그에게서 찾을 수 있는 두개의 인용문은 그 시대의 창조적 사상가의 면모를 가장 잘 드러내고 있다. 모든 전통적인 권위가 다 이성의 심판대 앞에 놓여져 준엄한 심판을 받게 되었다. 그 과정를 통해 새로운 견해와 사고의 패턴을 지니게 된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와 같은 대담한 재구성은 인간의 이성과 인가나의 도덕적 역량을 충분히 믿기 때문에 가능해졌으며, 종교생활과 사고의 초기 형태가 종교의 참된 성격이라고 여겨지는 새 시대의 개념과 일치하지 않으면 과거를 경시하는 경향이 드러러지게 드러나고 있다.
2. 18세기 구약성서 신학의 발전
18세기에는 이성주의가 주동적인 위치를 차지하였지만 그 밖에 정통주의와 경건주의의 소리도 18세기초반 그리고 이성주의의 적대자가 약해진 그 이후에도 계속해서 들을 수 있었다. 새로운 발전의 특색은 그것이 복음주의자들과 이성주의자들의 지원을 받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18삥기에는 "성서 해석"에 대한 많은 저서와 토론이 나오게 되었다.
성서연구와 신학 분야에서 역사 기록에 대한 관심이 18세기 후반부에 강하게 드러났다. 만하은 역사신학과 역사비평적 방법이 이 시대에 뿌리를 두고 있다. 모든 신학자들은 아직껏 성서가 신학의 기초라 믿고 전승받은 역사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 준 것이다.
성서 연구 분야에 있어서 어워 연구, 본문비평, 문법적 분석, 그리고 역사 비평이 주석 작업에 적용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보니, 이제껏 성서 저자가 가지고 있었다고 여겨 온 견해나 이념 등이 실제로는 본문 자체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조직 신학이나 또는 신학적 목적을 위해 본문안으로 주입된 것임이 밝혀지게 되었다.
제믈러가 성서 연구에 끼친 큰 공헌은 문법적 역사적 방법을 만들어 낸 데 있지 않고, 오
히려 그 방법의 성격과 목적을 분명히 밝히고, 그 방법이 어떻게 신구약 성서의 글을 해석할 수 있는가를 보여 준 데 있다. 그의 주석 원칙은, 항상 성서 본문의 유일한 의미는 문자적인 것이 아니면 가장 명백한 것이라는 주장이고, 이것이야 말로 곧 저가가 의미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이것이야 말로 곧 저자가 의미한 것이라고 본 것이다.
자카리에게는 성서 신학자의 주요 관심이 불변하고 영속적인 중요성을 띤 성서의 이념이라고 보았다. 그는 역사 비평의 영향을 받아, 성서 역사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성서 자체에도 발전이 있음을 인정하게 된 것이다. 성서는 역사적 기원을 가지고 있다는 인식하에서, 자카리에는 성서의 배열을 위한 신의 섭리가 우리들의 지침을 위해 보존되어야 하지만 그럼에도 각 책의 저자는 후세대를 위해 특수한 상황은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가블러는 그의 저서에서 '지실한' 성서 신학과 '순수한' 성서 신학, 즉 광범의한 의미의 성서 신하과 좁은 의미에서 신학을 구분하고 있다. 또한 가블러는 순수한 성서 신학이 조직 신학에 공통성을 제공하며, 조직 신학 형성에 제한적인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였다. 우리는 그가 구약성서 신학을 독립된 학문 분야로 기초를 놓는 데 공헌하였으며, 또 동시에 "종교사"의 접근법을 예기했다고 본다.
폰 암몬은 구약성서의 신관이 민족적인 기원을 가졌다고 보고, 그것은 모든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한 예수의 개념과 대조가 된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는 구약성서에 대한 적대적 감정을 솔직히 시인하면서, 그것을 이성적 방법으로 정당화시키려고 애를 썼다. 또한, 바우어는 구약성서 신학이란 본질적으로 히브리 종교사상이 발전된 단계를 분석하는 데 있다고 보았다. 그는 시편 8편, 19편, 104편, 욥기 38-41장에서만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그의 개념이 이스라엘 사상가들과 얼마나 다른가 하는 것을 느꼈으며, 객관성을 살리기 위해서는, 히브리 개념을 열거하며, 더 이상 집중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대신 그 뿌리까지 찾아보아야 했을 것이다.
3. 구약성서 신하에 끼친 18세기의 공헌
18세기는 종교의 미래 연구에 커다란 특색을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정통주의는 성서의 통일성을 강조했지만, 이성주의적 비판은 성서의 사상에 다양한 차이점이 있음을 밝혀 냈으며 그 다양성의 역사적 기원을 찾으려 하였다. 그리고 히브리 종교는 역사적 연구를 토대로 한 것만이 정당한 것이라는 겨론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성서의 역사적 발전과 특수성의 강조 때문에 완전히 체계화시킨다는 것이 점점 더 힘들어지게 되었다.
제 3 부 19세기 구약성서 신학
1. 신학적 사상의 주요 동향
19세기는 개신교 정통주의의 붕괴와 그 정통주의 붕괴에 중요한 역할을 한 이성수의 신학의 퇴조로 인해 불가피하게 모든 것이 새롭게 재건되는 때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낭만주의, 이상주의, 자연과학을 통한 발견과 새로 시작된 사회과학이 가져온 충격, 비그리스도교 문화와 종교에 대한 새로운 관심, 그리스도의 원칙을 사회에 적용시키는 데서 일어나는 다양한 것으로 만들었다.
19세기 중반에 가장 중요한 신학자 슐라이에르마허는 그리스도야말로 하나님과 인간의 직접적결합의 상징인 만큼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해를 위한 중보자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 즉 그의 신학은 그리스도 중심적이다. 성서는 그리스도교 신앙보다 앞설 수 없으며 또 그리스도교 교리를 위한 자료로 사용되어질 수도 없는 것이다.
즉 슐라이에르마허는 그리스도교 신학이 구약성서를 토대로 이룩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것은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을 반영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19세기의 초반기인 1930년대까지 구약성서 신학은 아무런 진전을 보지 못했으나, 다만 전통저거인 초자연주의자와 이성주의자들만이 관심을 가질 정도였다.
헤겔의 사상은 변증법적인 논리를 토대로 한것이며, 그의 사상은 하나의 이념으로부터 시작하여 그 반대 이념, 그리고는 이양자의 결합에 이르는 계속적인 과정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논리의 궁극적인 바탕은 인간 체험에있다고 보았다. 즉 과학적개념, 문학운동, 국가 정책, 심지어는 철학적 원칙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에 이와 같은 율동적 패턴이 있음을 그는 발견한 것이다.
구약성서 신학에 있어서 헤겔이 중요한 것은 그의 변증법적 법칙에 따라 세계의 종교를 분류하고 그 가치를 등급으로 나누었다. 느는 최초의 종교가 자연숭배라고 보았다. 그러나 역사에 대한 그의 관시미은 그리스도교 사회 철학자인 에른스트 트뢸취에게 지대한 영향를 끼쳤다./
헹스베르크의 생각은 [구약성서의 기독록]에 잘 나타나고 있는데, 여기서 그는 그리스도에 관한 교리를 구약성서의 빛으로 이해해 보려고 하였다. 그의 이넙과 전체는 초기 루터교통주의와 관련된 것이다. 성서는 완전히 영감을 받은 책이므로 구약과 신약에 동등한 가치가 있는 것이며, 그는 역사 비평적 방법을 정면으로 배격하였으며, 그의 [기독론]은 구약성서가 고난을 받고 죽은 메시야의 대속적인 속제의 교리를 가르친다는 결론에 도전하는 여러 비평가들의 해석과 더불어 투쟁하기 위한 것임이 명백해졌다.
또한 폰 호프만이 제시하는 점진적인 계시에 대한 생각, 이스라엘의 역사를 구속의 역사로 해석하는 것, 역사적 사건의 매체를 통해 계시가 전해진다는 독특한 생각, 그리고 성서의 내적인 통일성을 찾아 보려는 진지한 관심등은 커다란 발견이다. 그는 역사적 연구가 성서 해석에 중요하며 특히 역사가 하나니미의 계시와 성서를 이해할 수 있는 관건이라고 본 것이다.
리출 학파는 종교의 실천적이고도 윤리적인 요소를 강조하였으며, 성서 연구는 예수의 가르침을 통해 드러난 실천종교의 기본이넘에 집중되었다. 여러가지 면에서 그것은 비철학적이고 반철학적이며, 과격한 역사 비평과 성서의 자료가 완전히 역사적으로 신뢰할 수 있다고 순진하게 받아들이는 입장에 중간 노선을 취한 것이다.
역사주의의 궁극적인 목적은 모든 문화의 완전한 발전을 보여 줌으로써 역사적인 종합체계를 이루어 보자는 것이다. 트뢸취의 대부분 주요 저서들은 20세기초반에 발표된 것이지만, 그래도 그의 작품은 역사주의의 딜레마를 극복하려는 시도를 보이고 있는데 역사주의의 기본 전제를 포기하지는 못하고 있다. 그가 이해하는 역사적 인과 법칙에서는, 역사가 미래 개방적이며 결코 결정론적인 것은 아니다.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과 법칙의 과학적 모델을 수정할 필요가 있다.
19세기 유산은 지속되었으며, 구약 종교를 연구하는 사람들 중에 성서의 문헌과 역사, 신앙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19세기의 공헌에 깊은 감사를 느끼지 않는 이가 없었다. 19세기 마라에 발전된 성서 신앙과 문헌에 대한 입장은 20세기가 시작되기 전의 10년과 20세기 시작 이후 10여년간 일시적으로 구약성서 신학 연구에 퇴보를 가져 온 결정적인 요소가 된었다.
2. 19세기 구약성서 신학과 종교 연구
카이저 연구에 있어서 한 가지 새로운 점은 그가 비교종교 연구를 강조하여 다른 종교와의 관계에서 성서 종교의 위치를 설정하려고 한 것이다. 그는 각종 종교의 특색을 살펴보더고, 그런 다음 성서 자료에서 이와 같은 특색을 찾아내었다. 그의 작업은 유대교와 그리스도교가 서로 연관지을 수 있도록 종교들의 비판적인 연구의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그람베르크는 구약성서 신학을 종교적 이념의 역사라고 보았다. 그는 이스라엘의 문헌을 통해 발췌할 수 있는 여러 가지 개념들을 이용해 자신이 취급하는 주요 범주로 만들었다. 방법론적인 면에서, 볼 때 그람베르크의 작업을 주제별 접근법과 귀납적 역사적 접근 방법을 혼용한 것이다. 그의 목적은 찾을 수 있는 데까지 찾아 구약성서와 외경 안에 있는 종교적 이념의 발전을 기술하는 것이다. 그람베르크 연구의 또 다른 측면을 우리가 살펴보아야 할 것은 그가 한편으로는 성직자가 계급제도와 제의를 두고 다른 한편으로는 신정주의와 예언을 두는 특이한 구분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온건한 이성주의자인 폰 쾰른은 구약성서 신학 개념에 대한 분명한 정의를 내리지 않았으나 그의 작품을 통해 추리할 수 있는 것은, 이스라엘 역사의 두 시기에 해당하는 헤브라이즘과 유다이즘의 종교적 사상을 조직적으로 토론함을 뜻했을 것이다.
그의 방법은 역사적 분석과 논리적 종합의 통합으로서, 전자는 자료를 적절하게 연대순으로 배열하여 이스라엘종교의 기원과 발전을 주는 동시에 히브리 종교와 유대교의 차이점을 들추어 내는 것이며, 후자는 이 별도의 시기들이 어떠한 체계적인 신학을 가지고 있는가를 보여 주는 것이다. 그래도 그는 기존 견해의 함정을 피하지 못하였다. 그가 죄와 구원이란 항목을 따로 만들지않고, 단지"인간의 영적인 성품"이나 "하나님에 대한 종교적 도덕적 관련성"이라 말하며, 마치 성서 저자들이 별 관심을 갖지않은 것처럼 묘사한 것은 커다란 잘못이다.
역사적 이유에서 드베테는 그리스도교 교의학의 제1무인 성서 교의학을 두개의 독립된 부분으로 구분하였다. 그러나 양자간 상관 관계가 있음을 애써 주장하였다. 구약성서안에서도 히브리 신앙의 초기 단계인 히브리 종교와 에스라가 시작한 변형된 종교 형태인 두 양상으로 구분하였다. 그의 의하면 모든 종교는 그것에 의존하며, 또 그것에 따라 배열되는 기본적인 이념을 가지고 있다. 그는 히브리 종교의 기본적 원칙 또는 기초적인 이념이 거룩한 뜻을 가진 하나님에 대한 윤리적이고도 비신화적인 이념이라고 보았다.
바케트는 히브리 신앙을 일반 대중의 미신과 다신교로 설명하는 일반적 이상주의적 관행을 공격하며, 그 종교의 핵심을 찾고자 하면 모세 종교나 대중의 예배에서가 아니라 예언자의 의식 속에서 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부우너는 히브리 종교 신조의 실제 내용을 재발견하려는 시도에서, 어떤 구체적인 이념이 조금 빠르거나 늦게 나왔다는 것이 큰 문제가 되지 않기에 역사비평은 제외시킬 수도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렇다고 바우어가 역사적 발전의 가치를 시인하지 않았다는 마라은 아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가 한일은 성서자체가 제시하는 발전의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다.
19세기 초자연주의들의 구약성서 신학에서는 바움가르텐-크루시우스, 스토이델, 헤비니크 세 사람은 주목해 볼 만하다. 바움가르텐-가크루시우스는 "이성주의적 초자연주의"를 대표하며, 초기 영국 반자연신론 변증가들과 마찬가지로 이성주의를 가지고 초자연주의를 옹호하려고 하였다. 또한 스토이델이 구약성서를 다루는 방법은 종교적 이념 발전과 변천을 염두에 둔 것이고 조지신학적인 형태와 역사적인 형태와 역사적인 형태의 결합에 중요성을 두는 것으로 보았다. 초자연주의중 가장 보수적인 쾨스니히베르크은 구약 종교의 본질적 성격을 "구속사"의 입장에서 설명하고 있다.
온건주의파 슐추는 맨처음 시작할 때, 구약성서 신학을 성서 신학의 중요한 부분으로 취급할 것이라고 분명히 밝혔다. 그가 그렇게 주장했던 것은, 성서에 단일성 성격을 가진 하나의 종교만 있을 뿐, 시간과 장소에 따라 종교의 다양한 형태를 갖는 집합체적 종교는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그의 의하면 구약성서 신학도 두 가지 목적이있다.
첫째 "그 성장 과정을 통해 드러난 계시 종교의 역사적 진술"이다. 그리고 두번째는 "거룩한 책들이 역사적 발전 과정에서 서로 내면적 관련을 통해 드러나는 도덕 및 종교적 관점이다.
율러는 폰 호프만의 에어랑겐 학파가 관심을 가졌던 구원사의 사상적 패턴을 밀접하게 따른 것이데, 이러한 사상은 스와비아 경건주의에도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이다. 그는 성서의 종교가 창세기의 창조로부터 시작해서 점진적으로 발전하여 그리스도의 인격과 하나님 행위의 유기적인 발전, 즉 "하나의 커다란 구원의 체계"라고 보았다. 그러나 그의 대한 비판 중의 하나는 그가 구약성서 신학을 다루면서 이스라엘의 역사적 체험과 백성들의 공적, 사적, 제의적 생활에 대한 토론을 분별없이끌어들인다는 점이다.
에발트는 성서의 가르침을 그 역사적 발전 과정에서 보아야 할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그런데 역사는 이러한 가르침의 확실성을 규정하는 일련의 사건이기도 하다. 이점에서는 폰 호프만과 윌리의 견해와 유사하다. 그러므로 역사는전달되어진 교리로서 계시의 일부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딜만 그역시 구약성서 종교를 계시 중앙에 두었으며, 그 계시의 내용과 외형적인 신정주의 및 제의적 표현은 모세를 통해 중재 되었으나. 그것 역시 예언자들에 의해 새롭게 발전되어 나갔다.
19세기의 마지막 20여년 간은 독일의 성서 분야 연구가 독일 이외 많은 지역에서 보급되기 시작하였고, 독일인이 아닌 외국인도, 독일인 보다는 조심스럽게 전통적이지만 점차 성서의 바판적이고도 역사적인 연구에 공헌을 하기 시작하였다. 무엇보다도 구약성서 신학이 영국와 미국 신학자들 사이에 크게 논의가 된 것은, 앤드류 브루스 데빗슨의 업적 때문이다. 그의 목적은 역사와 이념을 서로 생생한 관계로 엮는 것이고, 구약성서 신앙의 과정을 시기별로 추구하는 것이며, 시초로부터 시작해서 예언자 말기에 비교적 완성된 전과정을 보여 주려는 것이었다. 그는 구약성서의 과제를 "하나님의 나라를 구약성서 시대에 건설하시려는 하나님의 위대한 활동을 묘사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3. 구약성서 신학의 쇠퇴와 이스라엘 종교사의 우세
19세기가 끝난 20세기가 시작될 무렵 쇠퇴와 일시적 무관심 현상이 일어나게 되었다. 구약성서 신학의 조직 신학적인 서술이 이제는 완전히 이스라엘 종교의 역사적 연구로 대치되어 버렸다. 이스라엘 종교 역사의 목적 중 하나는 구약성서를 읽고 이해할 수 있는 종교 및 역사적 상황을 제공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종교사 학파에서는 벨하우젠과 다른 문서 비평가들을 비판했다.
그 이유는 "그가 자료 분석을 강조하는 데 너무나 기계적이며, 역사적이지 못하고, 이스라엘 종교와 주변 민족 종교와의 관련성에 관심을 갖지 않으며, 또 이스라엘 종교의 참 정신을 보여 주는 보다 깊은 뿌리를 의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구약성서에 서술적 가치가 있음을 깨닫게 된 것은 궁켈과 그 주변 인물들에게 중요한 해석학적 의미를 지니게 했다.
이들 역사서의 주요목적은 이스라엘 종교 역사적 초기에 발견될 수 있는 단계로부터 그리스도 시대에까지 전기간을 더듬어 보는 것이다. 이들 "역사서"는 역사적이고 또 객관적이로 시도된 연구로서, 저자 자신이 특수한 신학이나 철학적 편견을 가진 어떤 권위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가블러의 원칙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이다.
4. 19세기 발전의 요약
종교가 연구의 초점이 되었다는 것은 이제 더 이상 성서를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어진 말씀, 신적인 계시의 기록, 또는 신학적 사색을 위한 문헌의 보고로 취급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성서에 기록된 종교적 역사 역시 신학이나 교리의 역사나 또는 교리 및 신학 발전의 역사로 읽을 수 없게 된 것이다. 또한 19세기 연구의 특색으로서 특히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널리 유포된 것은 포로기 이후의 유대 종교와 특히 후기 유대교에 대한 약화이다. 유대교는 신명기로부터 시작한 율법이 최종적으로 법제화된 것이며, 그것은 곧 종교적 창의성 과 연언 운동의 종식을 고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신정주의적 교회는 율법을 토대로 발전된 것이므로 매력도 없고 도움도 못되는 제도라고 보았다.
제 4 부 구약성서 신학의 재생
독일에서 시작되어 1930년대에 이르러서는 구약성서 신학의 부흥을 목적하게 되었다.
1. 구약성서 적절성의 문제
성서의 역사적 비평적 그리고 종교사 학파인 방법의 적요을 전통적인 주장을 제거시겼으며 역사비평의 암목을 통해서 본 구약성서는 인간적인 책에으로 오래 전의 상황에 얽매어 있고 그 내용은 다양하며 대조적이고 역사적 제목은 정확지 못하고 고대 다른 문화 문헌과 놀라울 정도의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 학자들과 기평가들은 구약성서의 적절성에 관한 문제, 또는 이스라엘 종교의 가치에 대한 문제로 씨름을 하며 여러가지 해답을 찾아내었다.
그러나 비평가들 중에는 구약성서와 이스라엘 종교그 자체의 본연적인 가치를 찾아보고자 애쓴 이들도 많았다. 종교사 학파 운동의 회원들은 신학적이거나 또는 계시적인 용어보다는 종교적이며 인본주의적이고 또 경험적이다. 궁켈은 구약을 학문적으로 다룰 때 성서는 인간적 방법으로 인간에 의해 산출된 책일 수밖에 없으며 과학은 어느 책 어느 민족에게나 적용될 수 있는 방법으로 구약성서와 이스라엘 백성를 대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구약성서 분야도 역사 광학의 당당한 회원임을 주장하게 된것이다. 우리는 영감이 과거의 교리를 아무 전제 없이 포기할 때에만 구약성서가 그 위해서을 나타낸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궁겔이 종교적인 태도, 그리고 영적,심미적 감수성까지도 강조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에게 있어서 적절히 수행된 성서 신학이란 실제로 종교적 실체의 서술과도 같은 것이었다. 한편 많은 학자들이 이스라엘 종교 그 자체로나 또는 그리스도교에 앞선 종교라는 점을 부인하였으며, 심지어 구약성서를 경건의 자리에서 배제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하기 까지도 하였다. 16세기 구약성서를 유지하겠다는 결정은 아마도 종교개혁자들이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19세기 이후에도 교회가 그것을 경전문헌으로 간주하고 있는 것은 종교와 교회가 무력화되었기 때문이다.
2.구약성서 신학 관심의 재생
1920년대에는 독일에서는 구약성서 신학이라는 전통적인 분야와 성서의 "신학적인 주석"의 부흥을 요청하는 운동이 일어났다. 이 부흥은 구약 학계의 내면적인 발전의 결과에 기인한 것이기도 하다. 구약성서 신학의 새로운 발전에 대한 요청은 물론 이스라엘종교사 학파에서 시도하는 바와 같이 현재 구약성서를 해석하는 방법을 바판하거나 또는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뛰어넘는 새로운 운동인 것이다.
바르트의 성서 중요성에 대한 해석에는 역사 비평과 본문 비평의 여지가 많다. 성서에서 인간적이고 역사적인 상황에 관련된 것은 이것들이 계시의 핵심에 영향을 미치지않기 때문에 그에게는 본질적인 문제가 되지 않는다. 성서는 계시와 동일한 것이 아니며, 단지 계시에 대한 인간적 증언을 담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의 직접적 관심사는 구약성서 신학에 대한 바르트의 직접적인 영향이 미미하다는 것과 바르트가 학파가 구약성서에 관한 어급을 한 것은 구약성서가 그리스도를 증거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구약성서의 죄에 대한 언급도 그의 신학 체계 속에 반영되고 있다. 그러므로 그가 당시대 신학계에 생각할 문제를 제시한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가 아니라 구약성서의 신학적 경향이다. 우리가 여기서 구약성서의 계시로 발전된 결과와 개인과 종교적 공동체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알려진 것들을 어떻게 서술하느냐에 관심을 두는 것이다. 그러기에 다양한 종교적 공동체의 회원이 함께 연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같은 종교적 신념을 가진 사람들만이 그 결과를 수용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아이스펠트는 구약성서 신학의 주제를 '신앙으로서만' 터득할 수 있다고 선언했는데, 아이히로트는 거기에 중요한 진리의 요소가 담겨 있는 것은 사실의 불가능성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역사가 주관적으로 개입해야만 역사적 사건과 일치되어 과거를 현재를 위한 새로운 실체로 끌어낼 수 있는 것이다.
역사적 사실은 역사적 문헌을 통해서만 수립될 수 있다. 만약, 예수 그리스도가 순전히 초자연적 인물이라면 역사적 문헌은 거짓이 될 것이다. 그분이 초자역사적 인물이 아니라는 증거로 역사적 문헌을 통해 역사적 문헌을 통해 역사적 사실을 알게 하기 위해 우리는 구약솨 신약성서를 가지게 된 것이다.
1940년대와 1950년대에 널리 유포된 두 개의 해석 방법은 논쟁적이었다. 그런데 이 방법들은 피셔의 약간의 관심을 유지하면서 그의 접근 방법을 과감히 변용시킨 것이다. 유형론적인 접근법은 초대 교부 시대에 널리 사용되던 방법으로서, 구약성서의 사건들도 약속과 기대 또는 성취와 실현이라는 구도하에 유사한 사건들을 신약성서에서 찾는 것이다. 이 방법은 본문의 표피적 또는 문자적, 역사적 의미보다는 내면적인 의도를 찾아보려는 것이다.
우리는 가능한 사건의 연속이 무엇인가를 확정하고 그 사건에 준한 인간의 반응이 무엇인가를 알아 본 다음, 이 양자의 통일을 통해 하나님이 어떻게 계시되는가를 살펴볼 수 있는 것이다.
3. 이스라엘 종교에 관한 논의
19세기에 발전된 이스라엘 종교 연구를 위한 방법론은 그 시기 동안 계속 커다란 변화없이 대부분의 역사서에 적용되었다. 그런데 1920년대와 종교사 학파적 관심의 연장인 소위"신학와 제의"학파가 소개됨으로써 이스라엘 종교 분석에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다. 오래된 이스라엘 종교 역사의 대부분은 구약 종교와 고대 근동 종교를 비교하면서 소위 발전론적 패로다임을 가지고, 이스라엘 종교의 변형과 성장과정을 통해서 없어지고 성장한 부분이 고대 근동 종교 내에 잔존한 흔적을 찾으려 하였다.
벨하우젠이나 둠과 같은 대부분의 19세기 학자들에게 있어서 이스라엘 종교 역사는 제의의 중심화, 야웨 경배의 주요 요소인 윤리 등 몇몇 종교적 사상은 역사와 밀접히 관련된 것이었다.
카우프만의 작업은 이스라엘 종교의 몇가지 기본적 해석을 지지하고있다. 그의 주요 강조점은 율법이 이스라엘 종교의초기 단계, 즉 문서 예언서 이전 단계의 문서적 결실이다.
이스라엘은 자신의 유일신교적인 관점에만 집착되어 있고 또 이웃 나라와의 종교적 간격이 너무나 넓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방 종교의 성격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했다. 또한 카우프만은 이스라엘 종교와 야웨 종교와 신화의 성격이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이스라엘 종교의 기본적인 이념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초월하셨다느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카우프만의 입장이 어느 정도 정확한 것인가를 가리기보다는 유일신 사상이 성서 전승에 대한 보수적 태도와 더불어 그로 하여금 이스라엘 종교의 성격과 역살글 이해하는 관건이 되었다는 점이다. 이 점에있어 카우프만의 입장은 히브리 성서의 유일신적 신학을 조직 신학적으로 서술해 놓았다고 볼 수 있다.
4,. 구약성서 신학(1920-1950)
1920년에서 1950년까지 구약성서 토론에 커다란 배겨이 형성 되었고 1950년 경에는 성서 연구와 성서 신학이여러 해 동안 누리지 못했던 학문적인 지위에 도달하게 된것이다. 제1차 세계 대전 종료 4년후, 구약성서 신학 연구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부흥이 처음으로 구체화된 것은 쾨니히의 저서가 출판되면서부터이다.
그의 접근법은 그리스도교의 교의학에서 비어 온 하니님, 인간, 죄, 구원등의 주제로 개요를 삼은 조직적인 것이었다. 아이히로트는 계속해서 변하는 역사적 상황에도 불구하고 구약성서의 기록이 꾸준하고 기본적인 경향과 성격을 드러내는 종교를 제시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그의 저서 제1판에서 "계약"을 넓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계약"은 구약성서 메시지의 구조적인 통일성과 변치 않는 기본적인 경햐을 보여 주기 위해 보존되고 있는 중심적 개념이다. 이 개념을 통해서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특별한 관곗을 맺고 있다는 본질적인 확신이 집중되어 있는 것이다. 아이히로트는 우리가 구약서서 자체가 가지고 있는 변증적 성격을 감안하여 연구 과정을 설정해야 한다고 하면서"하나님에 대한 이스라엘 신앙을 연구하는 데는 세가지 범주가 있다고 보았다. 그서은 하나님과 백성, 하나님과 세상, 그리고 하나님과 인간이다". 그의 저서의 가장 대표적인 특색인 계약 개념이 구약성서 신학의 중심적 개념이라는 점을 살펴볼 때, 그의 의도를 실천하는 데는 많은 어려움이 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가 계약 개념을 그 체게의 중십부에 놓게 된 근거는 계약 개념이 하나님 이해에 대한 이스라엘의 독특성을 수립했다는 확신 때문이다.
에른스트 젤린의 [종교사를 토대로 한 구약성서 신학]이라는 제목은 일견 역사적 관점과 조직적 관점까의 복잡한 관련성의 문제에 대해 최종적으로 그것을 해결해 보려는 진지한 시도가 이루어졌다는 인상을 받게 한다. 그가 역사와 신학을 별도로 취급하는 것이 정당한 이유는 각 부분의 기능이 다르다고 본 데있다. 그는 종교사를 "이스라엘과 유다국가 종교의 발전과 성장이 하나님 계시의 형태로 발전하고 형성해 나가는 거서을 그 시도부터 예수 그리스도시기까지 묘사하는 것"이 그 목적이라 보았다.
묄러의 저서는 "구원사"의 관점을 보여 주는 또하나의 예가 된다. 그리고 그리스도 중심적인 관점이 그들의 과업에 절대적이라는 주장을 그들의 마지막 장에서 구약성서의 위치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교로 완성이 되는 구원 경륜안에서만 농의될 수 있다는 데 잘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성서 종교의 연구에 있어 그 저자들이 성서의 참정신을 포착하는 데 실패했다.
하이니쉬는 그의 구약성서 신학을 다룰 때 교의학의 중심 주제인 하나님, 창조, 인간행위, 죽음후의 삶, 구원 등과 같은 중점적인 문제를 중심으로 엮어 나간다. 그는 동시에 역사적 관점을 활용하여 어떤 이념들의 점진적 발전을 시인하고, 또 비성서적인 예도 많이 사용하고 있다.
버리우스는 자신의 성서 신학에 대한 해석이 성서로부터 따 온, 완전하고도 논리적이며 명확한 논리 체계를 요구하는 거서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기에 성서 종교가 표현을 요구하는 형태는 역사적 관점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그가 주장하는 역사적 관점은 역사비평의 보질적 요소를 포함할 뿐 아니라, 역사적 안목이 그의 방법론 중 중요한 요소를 다루고 있다.
오토저스티스 바압의 교의적 취급 방법의 약점은 "역사적 방법 대한 관심 저하"이며, "탐구의 자유"를 반대하는 것이며, 이 방법의 공헌은 "역사적 계시의 지속성"과 역사는 하나님을 떠나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참된 통찰력"을 주장하는데 있다.
역사적 접근법은 과학적이고 증명될 수 있는 것이며, "사회적 구체성과 역동성"을 제공하기 때문에 생생하다. 그러나 이것은 구약성서의 종교적 통일성을 약화시킬 수 있다. 그러므로 당면 과제는 객관적 연구의 특색인 과학적 기술을 얻어낼 수 있는 귀납저기고도 개관적인 서술을 하는 것이다.
덴탄의 책은 개신교 스콜라 학파로부터 계속된 구약성서 신학 학문 분야의 역사를 개괄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하반부에서는 온당한 방법론적인 원치기을 형성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덴탄을 "성서 신학"으로부터 시자가을 하는데 성서 신학이 구약신학을 포함하는, 보다 광범위한 상황을 제공한다고 보았다. 덴탄이 제기하는 방법론의 성격과 관련된 또 하나의 문제는 구약성서 신학의 필요성을 가장 잘 드러내느냐 하는 "조직 형태"의 문제이다.
그는 하나님 이념의 중심성이 "신학"을 운위할 수 있는 정당성을 보여하지만, 그래도 구약성서에서 "분명한 교리의 체계"는 발견할 수 없으며, 단지"하나님에 관한 기본적 이념들과 관련된 복잡한 종교적 이념들"만이 있다고 말한다.
5 방법론과 접근법
역사 비평과 종교의 역사는 신학자가 신학적 구상을 시도하기 전에 탐구해야 할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는 점은 인정하지만, 신학과 종교사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부정한 아이스펠트를 따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이들 토론에서 구약 종교는 실제로 처음부터 통일성을 지니고 있다는 인상을 강하게 풍기고 있다. 성서 신학에 있어서 전체, 방법, 표현의 형태 등에 관해 일반적 통일성과 광범위한 공감대를 형성했던 단 하나의 시기는, 우리가 본대로 개신교 스콜라 학파 시절이다. 그 시대의 성서 학자들은 성서가 신학을 위한 자료이며 규범이라는 종교개혁의 지침을 진지하게 받아들여, 성서를 동질적이고 변증적인, 하나님이 주신 증빙자료를 만든 것이다. 성서 신학은 역사적 학문으로서, 역사적 사실과 기록된 사상을 객관적인 방법으로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이다.
성서 신학에서 사용되어질 수 있는 방법은 건전한 언어학과 불편부당한 과학적 주석 방법르로서 해석자의 주관적인 신학적 편견에 구애받지않고, 여러가지 다양한 성서 저자들이 제시한 생각과 이념들을 그대로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구약성서 신학의 정당한 방법론을 수행한 대부분의 사라마들은 거의 서술적 기능을 택한 것이다. 서술 방법을 포기하고 가치 판단의 방법을 선호한 유일한 사람은 아이스펠트였으며, 버로우스와 바압은 양측을 결합시키는 중도적인 입장을 취했으나, 실제로는 구약성서에 담긴 종교적 이념과 평가하기보다는 서술하는 쪽으로 기울어졌다.
구약성서 신학 또는 성서 신학은 가치 평가저기며 규번적인 특색을 지녀야 하는 것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가치 판단적인 기능을 지지하는 몇 가지 강조점이 이미 제시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종교의 현상학적, 또는 서술적인 측면이외에 궁극적인 진리와 가치에 대한 확고하고도 정당한 관심을 표명해야 한다고 것과 구약성서 신학이 고대 히브리 종교와 초기 그리스도교 종교에 대한 하나님의 판단을 묻고,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를 묻는 것이다.
또한 바압이 주자아하는 대로 구약성서 자체의 진실성에 대한 주장은 "본문이나 역사적 사건과 또같은 정도의 중대성을 부여해야 한다.
6. 소위 성서 신학 운동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15년간, 성서와 신학은 종교개혁 이후 지금까지 누려보지 못한 호황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성서의 우위성을 강조하게 된 이 기간을 가리켜 사람들은 성서 신학 운동이란 말로 부르고 있다. 지난 세대에는 진보적인 그리스도인들이 성서의 역서적 비펴을 강조하마으로써 많은 부분에 대한 권위와 적절성을 의심할 수 밖에 없었으며, 한편 보수주의자들은 일반저거으로 역서적 비평을 반대함으로써 성서의 신적인 권위를 유지했던 것이다.
성서 신학운동에 나타난 광범위한 신학적관심은 성서의 중요성을 다시 강조하는 것과 성서와 성서 신학의 역할은 전세계 보편 교회 냉 있는 분파들을 극복할 수 있는 안목을 제공할 수 있으리라고 보았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에 초점을 둔 바르트 신학이나 신정통주의 신학은 성서를 초점으로 하는 신학연구에 주력하였다.
성서 신학운동은 단순히 세계 대전이후의 산물만은 아니다. 그것은 여러가지 면에서 이미 시작된 신학적 운동이 가속화이며 그 과정의 성숙이라 볼 수 있다. 최근 그 운동의 여러 가지 특색이 부정적을 묘사되고 있는 것도 사실은 그 뿌리가 초기 학자들에게 있는 것이다.
제 5 부 최근의 구약성서 신학
20세기 중반 이후 구약성서 신학 연구에 중대한 발전이 많이 일어났고, 또 새로운 문제가 방법론도 거론되었다. 1950년대는 구약성서 신학에 관한 활발한 활동이 전개되다가,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신학에 관한 저서들이 자취를 감추고 이스라엘 종교 역사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고개를 들기 시작하였다.
1. 1950년대의 구약성서 신학
프리젠은 다른 해석자들과는 달리 제의 문제와 원리 문제도 함께 논의하면서, 계시는 이스라엘 종교의 실제 관행과 관심사에 적용되고 있음을 강조한다. 그가 방법론 항목에서 강하게 그리스교적 강조점을 주장한 것은 그의 개혁 교회 교의학적 배경을 반영하는 것이겠지만, 신학의 내용을 해설하는 데는 거의 나타나지 않고 있다. 그는 구약성서 신학이 규범적이어야 한다는 쪽으로 기울지만, 이것이 실제 관행에서 어떤 기능을 가져 와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분명하지 못하다.
죠지어네스트 라이트는 하나님의 계시나 지식이 "국가를 설립하게 된 사건의 경위를 설명하는 과정"."역사적 사건의 추리" 또는 하나님이 행하신 것의 결과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라이트가 성서의 교육적 요소는 희생시키면서 설화적 요소만을 강조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설화 그 자체는 하나님에 관한 제안에 권위를 부여하지 못한다.
설화는 단지 현대 그리스도인이 다시 반복할 수 있는 성서 개념에 지가나지 않는다. 대부분의 신학자들과 더불어 구약성서가 그리스도교 성서라는 진술을 할 필요를 느꼈다. "일부 고립된 구절이 아닌 구약성서 전체를 통해 발견할 수 있는 구약성서 신학은 기독록일 수 밖에 없다. 그것도 옛 계약을 통해 오랜 역사와 사건을 통해 계시된 것은 그리스도안에서 완전히 성취가 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그리스도교에 대한 그의 옹호는 재빠르게 경의를 표한 것에 불과하다.
반 임슈트는 의식적으로 구약성서 신학을 "교리의 논리적 배열"로 설명하려 하였다. 그는 그렇게 함으로써 "두 계시의 연속성과 유사성을 분명히 보여주며, 동시에 옛법외의 완전성을 분명히 들추어낸다고 보았다. 그는 비평적이고 역사적인 문제에 관해서는 보수적인 입장을 취했다.
나이트는 그리스도교리적 해석과 더불어 교회 생활 안에서 구약성서를 해석하려는 관심이다. 그는 그의 신학에서 "구약성서가 교회를 위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가정이 그로부터 얻어지는 추론, 즉,구약성서를 그리스도론적 안목으로 읽으려는 경향은 그의 다른 출판물에도 확실히 드러나고 있다. 페인은 구약성서 신학 역사와 계시 및 영감에 대한 토론을 제시한 후 진리를 알게 하는 것이고, 영감은 진리를 틀리지 않게 기록하는 것이다. 그는 구약성서 안에서 언약에 대한 여섯 개의 계속적인 계시가 마지막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될, 기대되는 역사의 구조를 형성한다고 보았다.
2. 게르하르트 폰 라드
폰 라드는 그의 신학서를 통해 예전의 방법론에 도전하며, 새로운 방법론을 제시함으로써 구약성서 신학 연구의 신기원을 시작하였다. 그는 중심적인 개념, 전반적인 주제, 이스라엘의 사고나 신앙 세계에 대한 가정, 또는 조직 신학적인 범주를 가지고 구약성서 신학을 조직화라는 것을 반대하였다. 그것에 대한 대안으로써 그는 "신학자에게 중심이 되는 주제는 이스라엘의 영적,종교적 세계나 자료를 통해 재구성할 수 있는 신앙의 세계 등이 아니라, 야웨 하나님에 대한 이스라엘 자신의 분명한 주장이다. 그가 언급한 개론적인 연구란, 독일에서는 궁극적으로 궁켈에게 뿌리를 둔양식 비평과 전승사 연구를 말하는 것이다. 궁켈은 구약성서의 다양한 전승들을 그 내용, 형태, 삶의 자리등을 분석해 보면 여러가지 장르로 구분할 수 있는데, 이들은 원래 독립적인 부분으로 존재하다 점차 커다란 뭉치로 합쳐지게 된 것이라고 보았다.
폰 라드는 그의 신학을 이스라엘의 역사전승 신학과 이스라엘의 예언 전승 신학을 다루었다.
3. 성서 신학 운동 특색의 재평가
성서 신학이 그 절정에 도달했고 신학적 해석 그 자체와 갈라진 교회가 합쳐지는 희망이 성서 신학에 있다는 그리스도교 세계관을 통하여 낙관주의가 팽배해 있을 1940년대와 1950년대 초에도 그 운동은 이미 공격을 받기 시작하였다. 역사를 통한 계시의 강조가 가장 호된 공격을 받았다. 이 주제는 대부분 초기접근법의 기초였으며, 폰 라드와 라이트가 채택한 방법이기도 하다.
1962년 바아는 "역사가 하나님 계시의 절대적인 초자연적 환경이라는 주장"에 도전했다. 그는 성서 본문이 하나님의 행위보다는 말씀하시는 하나님에 더 중요성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역사를 통한 그리고 구원사에 대한 강조는 구원사에 대한 구약성서가 보고하는 이스라엘 역사와 역사 비평적 방법을 통해 재구성된 이스라엘 역사 사이의 긴장을 심화시켰다.
그리고 역사안에서 계시 이외에, 성서 신학이 도전을 받은 두번째의 성서의 통일성에 대한 강조점이다. 구약성서의 통일성에 대한 커다란 충격은, 폰 라드가 구약성서는 하나가 아닌 서로 다른 여러 개의 신학으로 구성되었다고 말한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15년간 성서 신학에 적용한 여러가지 요소들이 1960년대에 와서 진지하게 도전을 받게 된 것이다. 이 운동은 약점과 모순점 등이 많이 폭로되었으나, 비평은 성서 신학 그 자체에 대한 공격이 아니라 신학하는 방법이 잘못 것을 공격한 것이다.
4. 적절한 신학에 대한 최근 탐구
1950년에 구약성서 신학서들이 놀라울 정도로 많이 양산되었고, 특히 폰 라드의 저서가 출판된 이후에 10여 년 간 냉철한 비판적 분석 시기가 이어졌다. 우리가 앞서 개신교 스콜라 학파의성서 신학 취급방법에서 그러한 접근법을 사용한 것은, 성서의 세계 이외의 외부로부터 오는 신학적 관심 때문임을 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료를 그러한 접근법으로 배열하는 것은, 성서의 안목을 종교 공동체의 고백적 생활에 통합시키는 데 기여를 할 수 있을 뿐아니라 범주나 구조가 같기 때문에 신학자체의 학문적인 추구에도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구약성서 신학을 점진적이며 역사적인 접근법으로 취급하느데는 몇 가지 장점이 있다. 그것을 성서의 구조, 특히 처음두 부분의 체계를 따른다는 인상을 준다. 또한 역사 비평적 연구는 이스라엘 신앙과 성서가 현재의 경전 순서대로 시작되었고, 또 작용하였는가에 의구심을 갖게 되는 것이다.
구약성서를 변증법적으로 취급한 또 하나의 저서 클레멘츠의 책이다. 이 책은 구약성서 신학의 완전한 서섦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서술이지만, 그 주요 관심은 유대인과 그리스도인의 구약성서 이해가 얼마나 다르냐에 있는 것이다. 메켄지의 저서는 전통적인 조직 신학의 개요를 벗어난 최초의 카톨릭작품으로서, "문서적인 기록을 통한 이스라엘이 야웨를 체험한 방식"을 중심으로 그의 신학 체계를 형성하였다. 메켄지가 주제를 선택하는 주요 원칙은 본문에 보도되었으며, 또 이스라엘이 얼마만큼 체험하였는가에 있다.
첨멀리는 그의 신학을 하나님의 이름, 또는 "나는 야웨다"라는 자기 주장을 중심으로 엮어 간다. 그에게는 야웨가 중심적 초점이며, 구약성서 증거의 내적이며, 권위적인 지속성을 제공하는 것이다.
5. 구약성서 신학의 당면 문제
현재, 연구 단계에서 논의되고 있는 구체적인 문제점들을 살펴보기 전에 몇 가지 공통된 관심사는 성서 신학과 조직 신학과의 관계, 그리고 성서의 권위이다. 소위 성서 신학운동은 신학 작업에서 성서의 규범적이고 권위적인 역할을 더 강조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계시관이 역사안에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만남에 초점을 두는 쪽으로 바꾸어지게 되었다.
스멘트는 이 문제에 관한 논문에서, 19세기초부터 이스라엘 종교의 " 중심적 이념", 또는 "중심적 원직"을 찾아보려는 시도가 있었음을 개관한다. 그러나 중심적에 대한 탐구가 전면에 다시 부각된 것은, 종합적 접근법의 원칙으로 계약개념을 사용한 아이히로트의 저서 때문이다. 최근에는 구약성서의 내용을 조직화하는 데 두개의 원칙이 제시되고 있다. 스멘트는 벨하우젠이 제시한 바 있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웨와 야웨의 백성 이스라엘"이라는 옛공식으로 되돌아갈 것을 주장한다.
또한 헤르만은 구약성서의 중심을 보다넓은 안목으로 찾아본다. 그는 신명기 안에 성서의 주제가 많이 실려있기 때문에 신명기가 구약성서 사상의 중심이 된다고 주장한다. "구약성서 신학의 기본적 문제는 바로 이 책안에 집중되어있다.
17세기 이래 아담과 이브로 부터 시작되는 성서의 역사가 세계의 역사에 관한 여러가지 새로운 증거와 맞지 않는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구약성서에 기록된 세계역사와 이스라엘 역사에 대한 기록이 문제가 되었다. 동시대 사람인 바트케는 1835년에 다음과같이 썼다. 히브리인들은 역사적 사색을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객관적으로는 역사적인 것처럼 보이나 구약성서중 어느책도 진정한 의미에서 역사기록이라 불리울 수 있는 것은 없다.
폰 라드는 "구약성서는 역사서이다."라고 선언하기는 했지만 그의 신학은 고백적인 역사 혹은 구원사적인 입장을 따른것이다. 역사의 두가지 형태에 대한 견해차이 그리고 역사안에서의 계시문제에 관해선 우리가 앞에서 살펴보았으나 여기에 관한 최종적인 결론은 아직 나오니 않고 있다.
게제는 신학이란 본질적으로 발전의 역사적 과정으로 이해한다고 말한다. 그의 프로그램은 전승구축의 신학이라 불리운다. 그는 신약성서에 까지 전승구축의 과정을 추적하여 총괄적인 성서신학을 쓸 계획이다. 그런데 이것은 매우 힘든 과제로 보인다. 왜냐하면 많은 구약전승들이 신약성서에서는 활용되지 않고 구약성서에서 그 마지막 형태로 끝나는 수가 많기 때문이다.
지난 2세기 동안 이스라엘 종교사와 구약성서 신학관의 관계성은 항상 논쟁적 이었다. 구약성서에는 종교와 계시관의 구분이 명확지 않다. 대부분 구약성서 문헌은 하나님의 자기계시를 전제하므로써 신계시의 가능성과 방법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는다.
계시와 종교의 실천사이에는 아무런 구분도 존재하지 않는다. 구약성서 자체에는 이와같은 구분이 없기 때문에 신약이나 역사가 다. 이념과 실천을 다룰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구약성서와 고대 이스라엘의 신앙과 실천을 이해하고, 또 구약성서 전승이 시작되고 발전된 역사적 상황을 이해하는 데는 둘 다 가치 있는 방법이다.
유대교의 회당과 그리스도 교회는 그 초기 시절부터 경전이라는 이름이 붙은 거록한 글들의 수집물을 가지고 있었다. 경전이란 요어는 '권위있는 글들'이라는 거룩한 책들의 목록을 규정하기 위해서 사용되어진 것이다. 그러나 성서에 대한 비평 연구가 시작되고 또 역사적 접근법이 대두되자 성서가 어떠어떠하게 형성되었고 믿었던 일반적 가정이 도전을 받게 되었다. 경전은 공동체의 신앙과 전승의 기초이며 또 창조자란 생각이 개신교 내에서도 바꾸어져 개신교에서까지도 경전이 공동체의 신앙과 전승의 결과라고 보게 되었다.
최근, 경전에 대한 새로운 강조와 더불어 일반적으로 "경전 비평"이라 불리워지는 방법이 새롭게 대두되었다. 만약 경전이 성서 신학을 알 수 있는 최종적인 범위라면 종교사에서 얻을 수 있는 통찰력과 결론을 수용할 수 없다. 경전만을 고려의 대상으로 삼으면 외경이나 비성서적인 중간기의 문헌, 쿰란사본, 기타 자료들이 그 기능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 경전의 벽들은 전승의이전 역사나 또는 그들이 갖는 의미의 보편성을 제거하는기능으로 사용되어서는 안된다.
구약성서는 역사책이다. 그것은 창조로부터 종말까지, 다시 말해, 세상의 통제권이 인자에게 주어질 때까지의 이스라엘, 멸마으 그리고 세상에 관한 하나님의 역사를 들려주는 것이다. 이 역사를 구원사라 말할 수 있다. 창조는 구원사보다는 건축에 더 큰 관심을 가졌고,이스라엘 종말론도 새역사와 새 이스라엘을 말하는 것과 더불어 새 하늘과 희망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18세기말 성서의 역사를 구분하는 일에서는 유대교를 제쳐놓는 것이 상례가 되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이와 같은 생각은 더 굳어지고 독일에서의 반유대주의 사상으로 더 결력하게 되었다. 무어는 이와같은 포로기 이후의 유대교에 관해"고대 유대교의 신학적 체계가 아니라 현대 독일의 신학 체계가 성서 말기 시대와 초기 유대교의 사상과 생활위에 주입된 것이라고 설명한다. 불행하게도 포로기 이후 시대와 초기 유대교에 대한 그러한 오해와 풍자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오랫동안 남아 있었다.
폰 라드는, 초기이스라엘은 역사와 관련이 있었으나 후에는 상실 했다고 기술한다. 그가 구원전승 묘사의 기본적인 자료로 사용하는 고백적 신조, 또는 역사적 사건을 강조하는 신조는 사실상 초대의 것이 아닌 후대의 것으로 후대 이스라엘 삶의 결과인 것이다.
포로기 이전과 이후 차이점의 일부는 정치적인 실재에 있다. 포로기 이전에는 이스라엘이 왕정국가로서, 시민은 영토와 정치적 독립성을 상실했기에 공동체와 그 삶을 제도 중심으로 조직화시킬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밖에 후대 유대교의 여러 가지 특징들이 신명기에도 이미 발견되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성서 시대와 비성서 시대를 극단적으로 구분하는 것은 적당치 않은 것이다.
서 평
초창기 신학의 출새은 교회의 교리를 체계화 하는 과정에서 생겨났다. 그래서 그 당시 성서신학은 독자적인 목소라거 아니라 교회의 목소리라 할수 있겠다. 구약주석에서도 객관적으로 볼때 너무 기독교를 강조하였으며 신약의 입장에서 구약을 평가하였다. 구약신학이란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목소리를 체계화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구약성서 신학사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구약성서 신학의 발전사를 거시적인 안목에서 쓴 것이 바로 이 책이라고 할 수 있다. 프루스너 교수는 이 책에서 최초의 성서신학을 학문적으로 주구하기 위한 기초작업을 조직적으로 진술한 가블러로 시작하여 태동의 문제점으로부터 18세기 구약성서 신학이, 구약성서 신학연구에서 독립적인 학문분야로 인정받았다는 중요한 사실과 경건주의, 이성주의, 자연과학등 다양성으로 발전 되어졌음을 말하고 있다.
성서 신학이라는 학문의 시대가 이 때 출현하여 19세기 신학 흐름의 주춧돌이 되기도 하였다. 19세기는 슐라이에르마허가 교회의 권위 성서의 권위 이성까지도 거부하면서 자신의 체제 핵심을 그리스도교의 종교적 체험에 두고 발전시켰다. 종교사학파도 이 때 발전하였다. 무엇보다도 19세기 구약성서 신학을 살펴 본다면 역사 비평적 방법이 우세하고 구약성서의 권위가 실축되는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그후 1920-1950년대는 구약성서 신학이 이스라엘 종교연구등 새로운 신학발전이 일어났으며 방법론과 접근법에 괸한 논쟁도 있었다.
1950년대에는 구약성서 신학에 관한 저서들이 많이 출판된 구약신학의 "황금시대"라 할 수 있으며 최근에는 다시 구약성서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다시금 재평가 하는 작업들이 일어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아직 구약성서 신학의 과제들이 많이 남아 있다. 성서신학과 조직신학과의 관계, 현대철학사조와의 연대성, 방법론의 문제들이 많지만 이런것을 통해서 구약성서 신학은 더불어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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