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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영원히 이기는 삶의 유업

하나님아들 2014. 4. 3. 18:25

영원히 이기는 삶의 유업

고린도전서 15:50-58

유백선 목사 ybs9191@hanmail.net 상담 : 02) 6221-6468, 010-8346-6468

 

 

이윤기 작가는 풍부한 인문교양인간살이의 진실이 녹아 있는 글을 많이 쓰는데요. 그가 쓴 <어른 학교>라는 산문집에 “깨어 있어야 보인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1993년 여름에 <서편제>의 배우 김명곤이 내가 머물던 미국 중서부로 날아와서 판소리, 민요 판굿재미있는 공연을 보여 준 일이 있습니다. 김명곤과 우리 가족은 시카고에서 뉴욕까지, 이틀 동안 4천 리나 되는 길을 자동차로 여행했습니다. 그는 자동차 안에서 내 아들딸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더군요. “무대에서 절름발이 연기를 하자면 저는 사람을 잘 관찰하고, 절뚝절뚝 저는 시늉을 배워야 한다. 하지만 저는 사람이 어디 흔하냐? 어느 날 나는 저는 사람을 관찰하려고 종로 2가에 가서 기다렸다. 그런데 세상에... 저는 사람이 어쩌면 그렇게도 많으냐? 종로 바닥이 저는 사람 천지로 보일 지경이더라. 큰 수 하나 배웠다.

 

그런데 저는 사람들로부터 배울 것이 없어지자 종로에 나가도 저는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마음에서 멀어지니까 눈에서도 멀어진 것이지. 큰 수를 또 하나 배웠다. 나는 연습 때마다 단원들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준다. 보아야 보인다고, 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다고....” 그렇습니다. 보려고 해야 보이고, 들으려고 해야 들립니다. 김명곤의 메시지는 명약관화(明若觀火)합니다. 우리가 하는 일에 깨어 있어야 보인다는 것이지요. 김명곤의 이야기는 계속되었습니다. “소리를 하든, 연기를 하든, 자기가 하는 일에 깨 어 있어야 하는데 이게 쉬운 일이 아니다. 나는 직업상 많은 사람을 만나는데, 전문가라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한 가지 특징이 있더라. 자기 하는 일에 늘 깨어 있더라는 것이다. 깨어 있는 상태에서 조금씩 쌓아가는 전문성, 그걸 뭔 수로 당하겄냐.”

여러분! 지금 내가 하는 일에 늘 깨어 있습니까? 깨어 있는 상태에서 전문성을 쌓아하고 있나요? 사람은 누구나 이기고 싶은 본능이 있습니다. 누구나 승리하는 삶을 살기 원하죠. 승리하는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늘 깨어 있는 상태로 살아야 합니다. 깨어 있는 사람이 이기는 인생을 삽니다. 깨어 있지 않는 사람은 지는 인생을 삽니다. 이기는 인생지는 인생어디서 결정될까요? 인식과 태도의 차이에서 인생의 승패가 결정됩니다.

 

이기는 사람은 늘 겸손한 태도를 갖고 있습니다. 습관을 정복한 사람이 인생에서 승리합니다. 이기는 인생을 사는 사람은 아주 평범한 진리를 인식하고 삽니다. ‘1등은 깨라고 존재한다. 정상에 오른 후에는 다시 내려와야 한다. 삶을 대하는 작은 차이가 완전히 다른 결과를 가져온다.’ 이런 인식이 자신을 겸손하게 하죠. 반면에 지는 인생을 사는 사람은 넘어졌을뒤를 돌아보는 습관이 있습니다. 지는 인생을 사는 사람은 늘 욕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영원히 성취의 만족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중국의 사상가 장자가 말했어요. “순간 세상의 모든 것에는 진정한 승자가 없다. 승리가 영원하지 않다.” 한때 승리하여 받았던 트로피에 먼지가 쌓여 있습니다. 하지만 늘 깨어 있는 사람은 의식(마음) 속먼지가 쌓이지 않습니다.

 

오늘은 6.25기념 주일로 지키는 날입니다. 우리는 과거의 역사를 통해서 인생의 지혜를 배우고, 고난을 통해서 올바른 역사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죽은 자의 희생을 통해서 자유를 지켜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나치 정권에 의해 600만 명이 학살을 당한 가슴 아픈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서쪽의 ‘기억의 산’에 있습니다. 그곳에 나치 정권에 희생된 분들을 위한 기념관이 있는데요. 그 기념관에 기록된 글이 있어요. “망각은 우리로 하여금 다시 포로가 되게 하고 기억은 우리로 자유민이 되게 할 것이다.” 이 기억과 역사의식유대인의 힘입니다. 시편 기자(119:71-72)가 말했어요.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주의 입의 법이 내게는 천천 금은보다 좋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진리를 깨우치게 됩니다. 고난을 통해서 ‘내가 누구인가? 나에게 이런 고난이 따른 것인가?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생각하고 기억하면서 자기 생명을 지키게 됩니다. 하나님의 법이 천천의 금은보다 좋다는 사실을 배우고, 깨달아야 영원히 이기는 삶을 살게 됩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통해서 우리에게 영원히 이기는 삶의 유업을 가르쳐 주십니다. 영원히 이기는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나님의 영을 부여 받아야 합니다. 왜냐? 혈과 육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본문 50절을 보세요.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하나님의 나라이어 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그렇습니다. 썩는 것은 썩지 않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합니다. 영원한 승리자하나님의 영을 받고, 하나님 나라를 이어 받은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여기서 “거듭 난다”는 말은 ‘위로부터 난다’는 뜻입니다. 성령님께서 과 같이 그 영혼을 정결하게 하여 그 더러움을 씻어 주신다는 뜻입니다. 마치 갈급한 마음을 해갈시키고, 지친 영혼새 힘을 주는 것처럼 그 영혼을 시원하고, 신선하게 만드신다는 것입니다. 신령한 영적인 은혜가시적인 물로 표증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했어요.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엡 5:26) 이 시간 성령님께서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시고, 성령님께서 거룩하게 하시기 원합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왜 거듭나게 하신 것일까요? 산소망이 있게 하려고 그러죠. 예수님을 만나고 사도가 되었던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소망이 있게 하시고”(벧전 1:3) 예수님은 왜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셨을까요? 인간의 육은 죄악 중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시 51:5) 그래서 죄와 부패가 우리의 본질 안에 뒤섞여 있습니다. 인간의 타락한 본성육에 사로잡혀서 변화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언제, 어디서든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변화됩니다. 사도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벧전 1:23) 하나님의 말씀이 내 안에서 살아 있어야 변화가 됩니다.

네덜란드의 깔뱅주의 신학자 아브라함 카이퍼중생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중생은 우리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신적인 사역이다. 성령님이 죄와 사망에 있는 사람에게 영적 원리를 주입시킴으로 말미암아 다시 태어나게 하는 것이다. 그런 고로 중생은 죄로 사망에 거하는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나는 것이며 완전히 변화되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할 때 감동을 받고 회개하고 구주를 영접하는 것이 중생이다. 믿음은 회개를 낳는다. 믿음의 첫 행위회개이다. 회개는 두 가지가 있다. 주님에게 모든 것을 의지하는 근본적인 회개와 매일매일 잘못을 고쳐가는 점진적인 회개가 있다.

 

회개도 신적인 사역으로 성화를 이루는 과정이다. 성화는 사망의 시간에 완전한 구속으로 완성된다. 육과 영이 분리되는 순간에 하나님의 은혜가 성화를 완성한다. 영화는 영혼이 영광스러운 몸과 결합하는 것이다. 고로 영화의 은총은 사망과 더불어 시작됨으로 사망은 가장 큰 복인 것이다. 중생의 체험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생명이 성령에 의하여 우리 안에 주입될 때 우리는 새 생명 안에 내가 있음을 깨닫게 된다. 자신이 의롭게 된 것을 깨달으면서 성화의 과정 속으로 들어간다. 그런 고로 구원은 중생의 경험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믿음은 그리스도를 닮은 것이다. 성령께서 중생을 통해 우리에게 믿음을 주신다. 중생한 사람은 참다운 감각과 자유로움을 갖는다. 중생한 사람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지고 있으나 천국에 계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존재하는 것이다.” 지금 내가 그리스도 안에 존재하고 있습니까?

여러분! 중생의 체험이 있어야 내가 새 생명 안에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거듭남이 이기는 삶의 비결입니다. 거듭나지 못한 인생죽음에 모든 의미를 다 빼앗깁니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죽음 앞에서 처참해집니다. 왜냐? 이생의 능력, 이생의 자랑이 다 헛된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아름다움도 헛되게 하고, 지식도 헛되게 하지 않습니까? 죽음은 모든 것을 굴복시키거든요. 죽음은 모든 활동을 정지시켜버립니다. 그래서 인간은 이 죽음을 알기 때문에 죽음의 공포에 떨고, 늘 불안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일본이 아시아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서 중일전쟁을 일으켰습니다.(1937년) 그때 중국인이 1,200만 여명이 사망하고, 중국군이 일본군에 쫓겨서 중경까지 피난했습니다. 그러자 어떤 사람이 말했어요. “중국의 조상인 공자의 무덤이 뭔가 잘못되어서 패전을 거듭하는 것이 아닐까?” 그 말에 중국 사람들의 생각이 모여져서 공자의 무덤을 파헤쳤습니다. 큰 무덤을 다 파헤치고 보니 쪽박만한 두개골 밖에 아무 것도 없더래요. 중국 사람들이 공자를 군자요, 성현이라고 기리고 숭상했는데, 공자도 영원히 이기는 삶의 유업을 얻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음부가 주께 사례하지 못하사망주를 찬양하지 못하며 구덩이에 들어간 자가 주의 신실을 바라지 못한다.”(사 38:18) 지금 주의 신실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여러분! 영원히 이기는 삶의 유업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신비한 역사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신비의 역사가 죽음입니다. 죽음은 미지의 세계이고, 누구도 시원한 대답할 수 없는 수수께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죽음을 안식, 휴식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쉬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마치 힘들게 일하는 사람에게 휴식을 준 것이 행복한 것처럼 말이죠. 하나님께서 히브리서 기자를 통해서 말씀하셨어요. “안식할 때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의 일을 쉬심과 같이 그도 자기의 일을 쉬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하지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히 4:9-11)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는 사람은 부활신앙을 갖고 있습니다.

 

왜 부활신앙이 중요합니까? 부활은 사망이 쏘는 죄를 이기게 하기 때문입니다. 본문 56절을 보면,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그랬습니다. 죄가 사망에 이르게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서 죄를 이기고, 죽음을 이기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부활은 절대적인 진리이다’라는 사실을 보여 주셨습니다. 왜냐? 그리스도의 부활이 사실이어야 내 자신의 부활도 있을 수 있으니까요. 예수님의 부활에 연합 될 때 내 생명도 뜻이 있게 됩니다. 본문 51절을 보세요.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여러분! 죽은 자들어떻게 변화될까요?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게 됩니다. 이것이 부활신앙을 가진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부활신앙은 영원히 이기는 삶의 유업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님의 창조적인 새 생명입니다. 이 창조적인 새 생명을 신령한 몸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의 부활체는 영원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다른 생명의 차원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몸과 신령한 형체를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에 들어갈 때까지 신령한 몸은 신비한 사건입니다. 그래서 육체를 가진 우리가 육체를 벗을 때까지 의심할 수밖에 없는 엄청난 진리입니다. 부활의 진리를 믿을 때 우리는 어떤 순간에서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어느 가정의 아버지가 임종이 가까워지자 여러 모로 불편한 것들이 많아졌습니다. 그런데 온 집안 식구들이 아버지를 극진히 떠받들고 있었습니다. 무엇 때문에? 아버지가 손가락에 끼고 있는 커다란 다이아몬드 반지 때문이었지요. 시집 간 딸이 와서 아버지께 부탁합니다. “아버지, 돌아가시게 되면 그 반지 저에게 주세요.” “오냐. 그러마.” 며칠 후에는 며느리가 와서 말했어요. “아버님, 돌아가시게 되면 그 반지 저에게 주세요.” “오냐. 그러마.” 그런데 그 노인이 죽을 때까지 어느 누구에게 반지를 준다고 말하지 않고 반지를 낀 채로 죽고 말았습니다. 그 반지 덕분에 자식들이 효도를 한 것이지요. 아버지가 죽은 후에 그 반지를 확인해보니까 다이아 반지가 가짜더래요.

여러분! 지금 우리는 가짜가 진짜처럼 행세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살아 있으나 죽은 자가 있고, 죽었으나 살아 있는 인생도 있습니다. 살아 있을 때와 죽음을 맞을 때, 죽고 난 후에 그 사람의 평가가 다릅니다. 이 세상에서 잠시 이기는 삶을 사는 것처럼 보였던 사람이 타계(他界)한 후에는 지는 인생으로 평가를 받기도 하니까요. 성경에서 보여주고, 성경이 말한 부활은 예수님이 중심이요, 예수님이 주인입니다. 우리가 영원히 이기는 삶을 살려면 부활의 중심이요, 부활의 주인이신 예수님과 연합해야 합니다. 왜냐? 예수님과 연합할 때 부활생명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기 위해서 ‘나는 날마다 죽는다’고 고백했습니다. 내 자아가 죽음으로 부활의 능력을 얻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죽기 때문에 날마다 이기는 삶, 부활의 삶을 삽니다. 영원히 이기는 삶의 유업을 받은 그리스도인은 부활의 능력을 가진 예수님을 통해서 날마다 재창조된 삶을 삽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님의 생명을 체험하고, 날마다 부활신앙으로 영원히 이기는 삶의 유업을 받고 감사하는 삶을 사시기를 축복합니다

출처 : EXTREME-1
글쓴이 : Extreme-1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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