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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예수와 바울?

하나님아들 2014. 3. 25. 18:36

 

 

 

 

                                        예수와 바울 |
 

 

오우성/계명대 교수

 

Ⅰ. 머리말

예수와 바울 또는 바울과 예수의 관계는 전통적으로 주(主)와 사도, 종 또는 사자(使者)인 이해되어 왔다. 예수의 삶과 교훈을 바울은 선교사로서 이방에 전파하며 변화된 상황에 맞게 복음을 신학적으로 체계화했다. 이것은 곧 예수의 종교 혹은 복음과 바울신학의 관계로 요약될 수 있다. 그러나 20세기 초에 들어서면서 브레데(W. Wrede)는 그의 저서 바울 (Paulus, 1904)을 통해서 개진한 학설로 인하여 바울과 예수의 주제는 신약학계의 새로운 관심이 되었다.

바울과 예수의 주제를 다루기 전에 우리는 다음 사항들을 고려해야 할 필요가 있다. 우선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는, 우리가 이 주제를 연구하는 데 필요한 자료가 대체로 신약정경에 국한되어 있다는 지적이다. 정경 형성의 목적과 과정을 배경으로 해서 지금 우리가 보유하고 있는 자료를 유일한 근거로 삼을 때 예수와 바울 사이의 연계성은 어떤 특정한 방향으로 이미 전제되어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루터가 1522년 그의 신약성서 번역본의 서문에서 언급했던 것같이 신약의 문헌들이 과연 기독교 신앙을 불러일으키는지의 여부가 그 문헌의 정경성의 시금석이라고 한다면, 현재의 자료는 엄격히 말해서 예수와 바울 사이의 관계를 전체적으로 이미 규정해 놓고 있으며,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바울과 예수 사이의 동질성과 상이성의 관찰은 한계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루터 이후 역사비평학의 발전은 신약의 이해를 변화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으며 비록 제한되어 있기는 하지만 현재 자료의 연구 분석을 통해 바울과 예수의 관계를 새롭게 조명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Ⅱ. 역사적 관계

예수와 바울은 다 유대인이지만 출생, 성장, 교육, 환경, 성격, 설교방식, 사역방식이나 사역대상에서 차이가 난다. 예수께서는 오직 팔레스틴 유대교의 배경을 가졌고 랍비 교육을 받지 않음이 분명하다(막6:2; 요 7:15) 그의 설교방식은 농촌과 어촌의 일상적인 소재를 이용한 비유에 큰 비중을 두었다.

이에 반해 바울은 유대 율법교육을 받은 바리새인이었으며 동시에 헬라의 수사학과 철학 등을 수학하였다. 그가 자주 헬라식 논증방식(diatribe)을 사용한 점에서 이를 알 수 있다.

예수와 바울 사이에는 어떠한 역사적 연계성이 있을까? 바울은 예수께서 지상생활을 하실 때 그를 만나거나 또는 설교를 들은 적이 있었을까? 예수의 생애와 바울의 생애는 같은 시대로 서로 만날 수 있었던 가능성이 전혀 없었다고는 말하기 어렵다.

바울 서신 가운데서 첫번째로 우리의 관심을 끄는 구절은 자신의 사도권에 도전하는 사람들에게 던진 논쟁적 질문이다.“(내가)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고전9:1). 이 구절 외에는 바울이 그의 서신 어디에서도 주님을 보았다고 기록한 곳이 없다. 사도행전 1장 22절, 2장 32절을 근거로 유추해 보면, 사도로서의 필수조건 가운데 하나는 예수의 부름을 입고 그와 함께 사역했거나 부활하신 예수를 목격해야 한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대부분의 학자들에 따르면 이 구절에서 바울이 보았다고 하는 분은 공생애 기간 중의 예수가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이다. 고린도전서 9장 1절에서와 같이“예수 우리 주”의 호칭을 사용한 로마서 4장 24절도 부활의 주를 가리키고 있다. 결국 바울은 자신의 사도적 적법성의 근거로 역사적 예수가 아닌 부활하신 주님을 목격한 것을 들고 있다.

고린도후서 5장 16절에서 바울은“그리스도도 육체대로(οατα σαρκα)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 적고 있다. 이 구절을 해석하면서 바이스(J. Weiss)는 바울이 육안으로 예수를 보았다는 의미로 이해했다. 그것도 단순한 목도가 아니라 인격적으로 대면했다고 생각했다.1 유닉(W. C. Unnik)의 주장대로 바울이 소년시절을 예루살렘에서 보내고 사도행전(22:3)의 증언대로 가말리엘 밑에서 교육받았다고 볼 때 그가 예수님을 직접 만났을 가능성이 있지만,2 불트만(R. Bultmann)의 말처럼 바울이 예수님을 육신적으로 대면했다고 결론을 내리는 데는 무리한 점이 많다.3

'보다'라는 동사는 고린도전서 15장 5-8절에서 수동형으로(ωΦθη)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난 많은 증인들을 기술하는데 쓰이고 있다. 이 부활의 증인 목록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맨마지막에 자신에게도 나타나신 것을 밝히고 있다(15:8). 크레이그(C. T. Craig)의 말대로 초대 교인들과 마찬가지로 바울도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성은 안식 후 첫날의 빈 무덤 사건보다는 그에게 나타나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확립되었다.4 이러한 연유로 해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부활의 증인들에 관한 전승을 되풀이하고 있으며, 이 목록이 초대교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브루스(F. F. Bruce)는 고린도전서 15장의 ωΦθη(보이시다)라는 동사를 근거로 예수와 바울 사이의 관계에 대해 의미있는 해석을 하고 있다. 그는 부활 증인 목록에서 문법적으로 그리스도께서 주체가 되어있는 것과 같이 실제에 있어서도 바울이 그리스도를 본 것은 바울 자신의 의지나 계획에 의한 것이 아니라고 지적한다.5 빌립보서 3장 12절에서 바울은 이 사실을 더욱 적극적으로“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붙잡힌 바”되었다고 표현하고 있다. 예수와 바울의 관계성은 주체자로서 예수께서 그에게 나타내신 것이 없었다면 성립할 수 없는 그런 종류의 것이었다. 바울의 이해에 따르면 예수께서 그에게 보이심은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갈라디아서 1장 16절에서 그는 이것을“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라고 고백하고 있다. 이상의 내용은 사도행전 9장 1절 이하에 기록된 바울의 다메섹 도상에서의 경험과 본질적으로 일치하고 있다. 즉 바울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의해서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고 그에 합당한 권위를 부여받았다.

 

Ⅲ. 바울이 받은 전승과 계시

바울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부름을 받고 그의 메시지의 많은 부분은 직접적인 계시에 의존하고 있었지만, 원시기독교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이미 형성되어 전해 내려온 전승의 비중을 무시할 수 없다. 바울이 받은 전승은 주로 예수의 말씀과 행적 전승과 초대교회의 신앙고백 전승으로 구성되어 있다. 부세트(W. Bousset )나 불트만같은 종교사학파 학자들은 헬레니즘 기독교 공동체의 전승을 강조하고 브루스(F. F. Bruce)같은 학자들은 팔레스틴 기독교 공동체(cf갈 1:18)의 전승에 역점을 두지만, 바울이 받은 전승의 중요성을 약화시키거나 망각함은 원시기독교 공동체의 역할과 기능을 과소 평가하는 것이 된다.

전경연 교수는 바울이 받은 중요한 전승을 다음과 같이 열거한다. 부활(고전15:3ff), 주의 만찬(고전11:23ff;10:1-5, 14-22), 양자론적 그리스도론(롬1:3-5; 빌2:9; 행 2:36), 성육론적인 것(롬8:3;고전 10:4;고후 8:9; 갈4:1), 신앙고백의 단편들(롬10:8-9; 갈2:16; 고전13:13; 살전13:3), 마라나타(고전16:22; 빌4:5), 그리스도 찬송시(빌2:6-11), 주의 말씀(고전7:10, 9:14, 11:23;롬 12:14, 17, 21 등), 세례(롬6:3;고전 1:13-17, 주기도문 암시 (롬8:15)등.6

이외에도 전승에 의하여 바울은 역사적 예수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알고 있었다. 예수께서는 율법 아래(롬15:8) 유대인으로(롬9:5) 여자에게서 나셨고(갈 4:4) 다윗의 자손(롬1:3)으로서 그의 몸은 진정한 육체를 입으셨고(골1:22) 형제들이 있었으며(고전4:5) 잡히시던 밤에 만찬을 베푸시고(고전11:23) 고난 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셨다(빌2:8)

브루스(Bruce)는 바울의 메시지에서 전승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바울의 유대적 배경을 잘 설명하는 것으로 보았다. 바울은 παρελαβον(받았다)―παρδωκα(전하였다)의 형식을 택하여 종종 자신이 받은 전승을 인용한다.7 브루스에 따르면 바울의 전승은 윤리적이며 관행적인 규례, 그리스도의 말씀과 행위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고 한다. 유전이라고도 불리는 윤리적 권면은 데살로니가후서 2장 15절, 3장 6, 10절과 고린도전서 11장 2, 22절에서 찾아볼 수 있고, 그리스도의 말씀은 역사적 예수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있는 것으로 고린도전서 11장 23-25절이 대표적인 것이고, 기본적 메시지로는 갈라디아서 3장 1절과 고린도전서 15장 3-11절(십자가와 부활)을 들 수 있다.8

바울은 먼저 믿은 자들로부터 이상과 같은 지식들을 전해 받았지만 그가 이해한 예수 그리스도는 그가 직접 받은 계시가 없이는 설명될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는 다메섹 도상 이후에 그에게 임한 많은“주의 환상과 계시”(고후12:1)인 계속되었으며 이것은 일시적인 한 사건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의 사역기간 중에 계속된 관계이다. 바울이 받은 계시와 전승의 관계에 대해서는 나중에 상술하겠지만 바울이 어떤 전승을 어떻게 받았든지간에 궁극적으로 그것은 그가 받은 계시에 종속되었다는 브루스의 견해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9

서신의 성격상 수신자들이 이미 소유하고 있는 정보와 지식에 관해서는 재론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면 바울의 현 서신들을 통해서 알 수 있는 전승과 계시는 제한적이다. 바울이 예수의 말씀이나 받은 계시와 환상을 언급할 때도 세세한 부분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키고 자신의 논리전개상 필요한 부분만을 밝히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우리의 관심을 끄는 질문은 바울이 전승과 계시를 얼마나 받았는가가 아니고 전승을 어떻게 계시로써 새롭게 해석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Ⅳ. 예수의 복음과 바울의 복음

1. 신학적 논쟁 개관10

바우르(F. C. Baur)와 브레데(Wrede) 이전에는 예수의 메시지와 바울의 메시지를 대체로 예수의 종교와 바울의 신학으로 이해해 왔다. 그러나 19세기 후반기 튀빙겐학파의 창시자인 바우르는 이 주제를 신학적 토론의 장으로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바우르에 따르면 바울은 예수의 단순한 유대교적 신앙을 독자적인 절대종교로 발전시켰다.

바우르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브레데는 이 주제를 본격적으로 다루면서 바울이 예수의 복음을 구속의 종교로 만들었다고 비판한다. 브레데는 바울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장 잘 이해한 사람이라고 본 당시의 벨하우젠(Wellhausen)과 하르낙(Harnack)의 견해를 부인한다.

그는 [바울(Paulus)]11에서 바울이 이해한 신적인 그리스도와 복음서에 묘사된 육신적 예수 사이에는 조화될 수 없는 간격이 있음을 지적한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바울은 역사적 예수와 그의 메시지보다는 유대 묵시문학의 영향을 받아 형성한 메시야관으로 예수를 이해했다. 다시 말하면 바울은 예수를 만나기 전에 이미 천상의 메시야관을 가지고 있었고 이것을 그가 경험한 그리스도에 적용시켰다는 것이다.

이 견해는 바울이 받은 전승과 직접계시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점이 문제시된다. 바이스(J. Weiss)와 홀츠만(H. J. Holtzmann)은 이 견해를 비판하면서 예수와 바울간의 공통된 메시지인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강조하였다. 종교사학파의 하이트뮬러와 부세트는 바울과 예수간의 메시지 차이는 헬레니즘계 기독교 공동체의 주(퀴리오스) 기독론이 바울에 미친 영향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이에 대해 A. 슈바이쳐는 예수와 바울 간의 사상적 연속점을 유대 묵시사상에서 나타나는 종말론적 기대와 심란사상에서 찾았다. 키텔(G. Kittel)은 그의 논문 “Jesus oder Paulus에서 예수와 바울의 선교에서 공통분모는 종말론임을 밝히고 예수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윤리를 역설하였으나 바울은 하나님의 심판 죄에서의 해방 의인 사상에 역점을 두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양자가 전파하는 메시지는 본질적으로 동일하다고 보았다.12

종교사학파 전통에 서 있는 불트만은 예수와 바울간의 사상적 차이는 헬레니즘계 기독교 공동체의 전승 영향 때문으로 판단했다. 바울은 이 케리그마 속에 내포된 신학적 주제들을 그의 선교상황에서 재해석함으로 기독교 신학의 창시자가 되었다고 분석한다.13

융엘(E. Jungel)은 [바울과 예수(Paulus and Jesus)]에서 예수의 선포와 바울의 의인론 사이에는 종말론적 성격이 공통적으로 반영되어 있으며 하나님나라와 의인론 사이에 형식상의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용적으로는 깊은 연관성을 맺고 있다고 주장한다.14

큄멜(W. G. Kummel)은 구원 하나님 사상 율법 기독론 등과 같은 개별적인 주제들을 비교 분석함으로써 예수와 바울 사이에는 서로 다른 구속사적 정황에도 불구하고 본질적인 일치를 보이고 있다고 결론 짓는다.15

브루스는 [바울과 예수(Paul and Jesus)]에서 바울의 복음을 전승과 계시로써 살피고 주제별로 예수의 가르침과 바울의 신학사상을 분석하여 바울이 예수의 충실한 사자(使者)임을 밝히고 있다.16

이상의 신학적 논쟁을 배경으로 하여 아래에서는 최근의 저서인 브루스와 큄멜의 저작을 기초로 하여 예수와 바울의 메시지를 비교 연구해보고자 한다.

 

2. 주제별 고찰

불트만같은 이는 역사적 예수의 가르침이 바울에게서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레슈(A. Resch)는 예수의 말씀이 바울의 아홉 개 서신에 925가지나 들어있다고까지 주장한다.17 우리는 이 두 극단적인 견해 가운데 어느 한편을 선택하기보다는 바울 서신에 나타난 주요 주제들이 예수의 가르침과 어떤 연계성을 가지고 있는지 비교 분석하는 편을 택한다.

바울 서신을 처음 읽는 사람에게도 그의 서신에는 예수의 비유, 이적기사, 병자, 치유, 예수의 세례, 광야에서의 시험, 변화산 사건, 구체적인 수난, 설화 등이 언급되어 있지 않음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이 점으로 보면 바울의 메시지가 예수의 설교나 행위를 요약하거나 약간의 수정을 가미하여 발전시킨 것이 아니라는 점은 명확하다. 따라서 이 글에서 주제별로 고찰하는 것은 문자적 또는 외형적인 유사성이나 상이성보다는 양자의 메시지에 깔려있는 근본적인 정신이나 사상에 대한 비교 분석에 초점을 맞춘다.

구속사(Heilsgeschichte)에 대한 관점에서 예수와 바울은 어떻게 이해될 수 있는가? 불트만학파에서는 바울이 구속사적인 관점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에베소서 1장 9절 이하에서 나타나는 이 관점으로 인하여 이들은 이 서신의 바울 친저성을 부인한다. 그러나 브루스에 따르면 바울의 주요 서신들에서도 구속사적 체계가 있다고 본다. 예를 들면 갈라디아서 4장 4절에서 바울은“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것은 예수께서 공생애 시작에 선포한“때가 찼고 하나님나라가 가까웠으니”(막1:15)라는 메시지와 유사하다. 예수와 바울의 메시지 사이에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구속이 임박했음을 말하는 점은 동일함을 알 수 있다.

양자의 차이는 구속사상의 상황변화와 관련이 있다. 즉 하나님나라를 선포하신 예수께서 선포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예수의 시점과 바울의 시점 사이에는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 현실화된 사건이 가로놓여 있다. 예수의 사역 가운데 미래사였던 것이 바울에게는 과거사가 된 셈이다. 구약의 예언이 약속되어진 분을 통하여 역사화된 이후의 시기에 바울은 사역을 시작한 것이다.

부버(M. Buber)는 이것을 믿음의 시기를 기준으로 한 두 가지 형태의 믿음으로 표현한다.18 A. 슈바이쳐는 산맥의 비유를 통하여 이것을 설명한다. 즉 예수께서는 죽음과 부활이라는 산맥을 앞에 두고 있는 반면 바울은 그것을 뒤로 하고 있다19는 것이다. 큄멜에 따르면 바울은 부활절과 성령강림절에 일어났던 신적인 구속을 체험한 사람으로서 현실을“변화된 구원사적 상황에 상응하게 해석하고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예수의 선포와는 원칙적인 일치 속에 있다.”20

모팻트(J. Moffatt)는 [바울과 예수(Paul and Jesus)]에서 예수는 칭의(稱義)를 설교하지 않았고 이 교리는 오직 바울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한다.21 그러나 누가복음 18장의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비유에서 예수께서는 세리가 바리새인보다도“더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라고 선포하셨다. 예레미아스는 셈족의 표현방식에 비추어 보면 바울의 교리보다는 누가의 표현이 더 원초적이기 때문에 죄인들을 의롭다고 선포하신 분은 예수라고 주장한다.22 하나님의 은총과 용서를 받기에 합당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무조건적으로 베푸신다는 예수의 가르침은 포도원의 품꾼 비유(마20:1-16), 빚을 탕감받은 채무자(눅7:41f), 탕자의 비유(눅 15:11-32) 등에서 뚜렷하게 나타나 있다. 예수의 이 비유들과 교훈들에는 은혜의 주도권은 언제나 하나님께 있고 의롭다 하시는 분은 하나님 한 분이시라는 신념에 기초해 있다.

융엘은 바울의 칭의교리와 예수의 가르침 사이의 비교 연구를 통해서 양자간에 종말론적 성격의 공통성이 있음을 발견한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마침이 되는 것은(롬10:4) 그 안에서 종말(εσχατον)이 도래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23

케제만(E. Kasemann)은 바울의 칭의교리를 기독론에 대한 그의 해석이라고 본다. 그의 기독론은 예수의 십자가의 의미를 해석함으로 형성되었고 십자가상의 예수로 말미암아 이전에 지니던 우리 자신과 세상에 대한 환상과 인간적 의를 고집하고서는 하나님 앞에 바로설 수 없음을 역설한다.24

큄멜은 죄인이 회개하면 용서받는다는 신념은 본질적으로 구약성서적임을 상기시킨다. 바울에게서 하나님의 용서는 회개하도록 부르시는 예수의 부름이나 죄인들과 사귀는 그 교제에 근거되어 있지 않고,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믿음에 근거한다.“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4:25) 그러나 예수는 하나님의 용서와 자신의 죽음과 부활사건과의 결합을 알지 못했다. 큄멜에 따르면 이 결합은 원시교회의 전승에서부터 근거하고 있으나 바울에 의해서 강조되었다.25

예수는 율법에 하나님의 의지가 계시되어 있음을 인정하고 이것이 자신의 사역으로 완성된다고 보았다(마5:17 이하) 그러나 산상수훈의 반대명제(antithesen), 안식일 논쟁(막2:23, 3:6), 또는 정결법 논쟁(막7:15)을 근거로 해보면 율법의 문자적 준수는 도리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으로 확신했다(막10:56 참조) 바울도 율법의 선한 의지를 인정하나(롬7:14), 구원의 방법으로써의 율법은 부인했다. 바울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율법시대는 종언을 고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을 때만 율법이 완성된다. 바울이 율법이 죄를 유발한다는 점을 지적한 점은 예수에게서 볼 수 없는 점이며 율법과 죄에 대한 바울의 이러한 견해는 예수 이후의 발전이다.

예수의 속죄의 죽음에 대해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15:3)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 구절은 그가 밝힌 대로 그가 받은 것을(παρλαβον) 고린도 교인들에 전한 것(παρδωκα)이기 때문에 바울의 해석이라고 보기보다는 전체가 전승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마태복음 14장 49절에서 예수의 체포를 성경을 이루려 함이라고 해석한 것이나 이사야서 53장 10-12절에서 “많은 사람들의 죄를”위하여 사망에 이른다는 기록을 보면 속죄 사상은 바울 이전의 원시 전승에 속한다고 판단된다. 브루스에 따르면 원시 전승이라면 셈족의 어조를 가져야 한다는 예레미아스의 질문은 큰 문제가 못된다.26

세례와 성만찬의 교리는 바울이 원시 공동체로부터 물려받았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으로써의 세례에 대한 이해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는 것으로써의 성만찬의 개념은 동양의 신비주의 종교와 접촉이 잦았던 헬라세계의 기독교 공동체에서 연유한다. 예수는 세례를 베풀지 않았으며 성만찬은 주로 공동체 식사로 이해하여 그것을 통하여 교제를 계속하여 그의 피로 맺은 새 계약을 지켜나갈 것을 요청했다.

예수의 교회 이해는 바울의 교회론과 현격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로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이해한 바울의 사상은 예수의 가르침 속에서 연계성을 찾기가 어렵다 임박한 재림과 심판의 주로서의 인자개념으로서는 역사적으로 존속하는 교회의 존재와 본질을 설명할 수 없다.

주의 종들 또는 사도들에 대한 처우나 권리에 대해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9장 14절에서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명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 명령은 문자 그대로라면 사복음서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지만 의미상으로 보면 하등의 차이가 없는 명령이 복음서 두 곳에 기록되어 있다.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보내실 때 “일꾼이 저 먹을 것(τροπη)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마10:10)고 하신 말씀에서는 제자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음식의 대접을 받을 권리가 있음을 말한다. 이에 대해서 예수께서 70인을 파송하실 때에는 “일꾼이 그 삯(μισθο)을 얻는 것이 마땅하다.” 10:7)고 말씀하신다. 브루스에 따르면 바울은 그 어디에서도 먹을 것(τροπη)을 구하려는 의도는 없었고 그가 말하고 있는 것은 급료(μισθο)였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브루스는 이것과 관련되는 본문으로 디모데전서 5장 1718절을 들고 있는데 여기에 보면 장로들 특히 설교와 가르치는 장로들에 대한 지역교회의 의무를 말하면서 누가의 본문 즉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를 문자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27

그런데 바울은 예수의 이 명령들을 분명히 알고 있었음에도 왜 자신은 그것을 그대로 따르지 않았는지에 대하여 질문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바울은 왜 자신이 손수 일을 하면서 복음을 전파했는가 이에 대해 등간(D. Dungan)은 예수의 직제자들에게는 문자 그대로 이 지침이 지켜졌겠지만 바울은 그것을 절대적인 명령으로 이해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바울이 이 규례를 자신에게 적용하지 않은 이유를 고린도전서 9장 14절 이하에서 명백히 밝히고 있다. 즉 그는 복음을 임의로 전하는 것이 아니라 부득불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9:16) 그러나 직분이 있기 때문에 당연히 보수를 요구할 권리가 그에게 있지만 그 권리를 유보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상을 받고자 한다는 점(9:18) 등이다.

예수도 인간은 죄인이며 용서를 필요로 함과 마귀가 주관하는 세상의 세력들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마6:12) 그러나 바울의 인간관은 예수의 그것보다 인간의 죄성과 죄의 보편적 우주적 세력을 더 강하게 묘사하고 있다(롬5-7장 참조).

이상에서 언급한 주제들 외에도 예수와 바울의 메시지 사이에는 유사한 점들이 많다. 예를 들면 하나님께 대한“아바”라는 호칭도 예수와 바울 사이에 공통적으로 사용되고 있다(막14:36; 롬 8:15; 갈 4:6) 바울에게 있어서 하나님과 인간간의 소외된 관계 회복에 대한 직접적인 증거는 성령의 내재였다. 바울은 이 영을 양자의 영 또는 그 아들의 영으로 묘사한다.“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갈 4:6)

이혼에 관한 바울의 명령(고전7:10 이하)은 마가복음 10장 11절 이하의 예수의 말씀과 관련이 있다. 세금 문제에 대한 견해는 예수의 경우 마가복음 12장 13절 이하에서 바울의 경우는 로마서 13장 17절에서 각기 유사한 견해를 밝히고 있다. 브루스는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잠ποδοτ)"라는 로마서 13장 7절의 말은“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αποδοτ)" (막 12:17)는 예수의 말씀이 일반화된 것이라고 본다.28

 

Ⅴ. 바울이 이해한 예수

원시기독교 공동체가 체험한 예수의 죽음 부활과 구원 사건은 바울이 예수를 이해하는 대전제이다. 바울에게는 인간 예수와 부활하신 주님과는 의심할 나위없이 동일한 분이었다. 따라서 바울의 복음은 역사적 예수의 삶과 메시지에 근거하고 있다는 결론은 타당한 것이다.

바울의 서신에 예수께서 행하신 세세한 사역에 대한 언급이 생각보다는 적은 것이 사실이지만 바울의 주요 관심은 예수에 대한 객관적 사실을 전달하기보다는 계시를 근거로 해서 해석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을 선포하는 것이었다.

바울에게서 예수의 삶은 낮아지심과 겸손의 모범이었다(빌2:6; 고후10:1). 섬기는 자로서의 예수의 모습을 바울은 예수께서 종의 형체(빌2:7)를 입으셨다고 표현했다.

바울이 한 "예수는 주(主)이시다"는 신앙고백은 근본적으로 모든 크리스천들의 신앙고백과 동일하다. 이 신앙고백은 동시에 예수를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다는 부활의 주에 대한 고백이다. 그는 능력으로써 인정되는 하나님의 아들(롬1:4)이요, 하나님 우편에 승귀하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분이시다(롬8:34). 그는 또한 영광 중에 오실 심판의 주로서 모든 권세와 정사와 능력을 멸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서 완성하실 분이다(고전15:24ff). 그는 육체를 입고 온 역사적 인물(갈 4:4; 빌 2:8)이면서 동시에 먼저 존재하신 분이었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생성되는 만물 이전에 계신 분이었다.

바울은 하나님 스스로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종말론적 구원을 일으키셨다고 믿었다. 그리스도의 영은 따라서 미래의 완성에 대한 보증금(고후5:5)이기 때문에 바울에게서 구원의 현재성은 미래성과 불가분의 관계를 이루고 있다. 성령을 통한 공동체의 형성과 그것에 참여하는 것이 곧 예수와 연합을 의미하며, 이 연합은 또한 그 안에서 시작된 종말론적 구원사 참여에 필수적인 조건이다. 구속사적으로 볼 때 모세 이후 그리스도 이전까지는 율법 아래 있었으나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세대가 열렸으며 이때에 바울 자신은 복음을 전 세계에 선포해야 하는 사역에로 부르심을 입었다고 믿었다. 따라서 바울에게서 예수 그리스도는 구속사의 주관자이며, 그는 부르심을 입은 사자요 종이었으며 따라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께 복종해야 할 의무를 지니고 있었다(갈 1:1;고전 1:17;롬 1:1등)

 

Ⅵ. 맺음말

바울의 메시지를 십자가교(Crosstianity)인 빗대어 말하면서 그것이 인류에게 끼친 해독 운운하며 바울에게서 벗어나 예수께로 돌아가자고 하는 사람들도 없지 않았으나 바울에게서 벗어나면 동시에 예수에게서도 벗어난다. 예수와 바울은 대립적으로 선택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바울은 예수를 통하여 진리를 알게 되었으며, 예수에 의하여 시작된 구원 역사에 부르심을 입은 사도이다.

인류 역사상 바울만한 사상가가 없지 않았다. 그의 위대성은 그가 고백한 대로 그리스도 예수를 터로 삼아 그의 영에 붙잡혀 순종하며 살았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큄멜의 말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란 결국 바울의 증거 안에서 이 증거의 기초와 사실이 되시는 예수 자신을 만나는 것뿐이다.

 

주(註)

1. Paul and Jesus (London, 1909), pp 47이하

2. Tarsus or Jerusalem? (London, 1962)

3. Existence and Faith (1964), p. 133

4. The Beginning of Christianity (New York, 1943), p. 135

5. Paul and Jesus, 이길상 역 [바울과 예수](서울:아가페 출판사 1988) p. 65

6. 전경연 문상희 외 공저 [신약성서신학](대한기독교서회, 1963) pp. 184f

7. 바울의 전승에 관해서는 A. M. Hunter, Paul and His Predecessors (London:S. C. M. Press, 1940, 1961);O. Cullmann, Tradition, The Early Church, p. 59ff참조

8. F. F. Bruce, 위의 책 p. 45

9. 위의 책 p. 27.

10. 성종현 교수는 신약총론(장신대출판부, 1991) pp. 587-605에서 예수의 선포와 바울의 신학 간의 불연속성을 주장하는 학자들과 연속성을 주장하는 학자들을 소개하고 있다. 전자에 속하는 학자로 F. C. 바우르, W. 브레데, A. 율리셔, W. 하이트뮬러, W. 부세트, M. 켈러, R. 불트만과 국내의 안병무 교수외 민중신학자들을 열거하며 후자에 속하는 학자들로 J. 바이스, A. 슈바이쳐 E. 폭스, E. 융엘, G. 메이천, F. F. 브루스, W. G. 큄멜, M. 헹엘 등을 든다.

11. Paul, tr by Lummis (Boston:American Unitarian Association, 1907)

12. Luthardtsche Kirchenzeitung, s 577ff

13. Existence and Faith(Living Age Books), pp. 183-201

14. 허혁 역 바울과 예수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1986)

15. 박창건 역 주요 증인들에 따른 신약성서 신학 (성광문화사, 1987) 특히 p.p 290-302, 383-389

16. 이길상 역 바울과 예수(아가페 출판사, 1988)

17. Der Paulinismus und die Logia Jesu Texte und Untersuchungen, neue Folge 12 (1904)

18. Two Types of Faith(London, 1951), pp. 44이하

19. The Mysticism of Paul the Apostle(London, 1931) p. 113

20. 위의 책 p 389

21. Biblical World, 32(1908), pp. 168이하

22. The Miracle Stories of the Gospels(London, 1941), p. 61

23. Paulus und Jesus(Tubingen, 1962), p. 24

24. Perspective on Paul(London, 1971), p. 73

25. 위의 책 p. 296

26. 위의 책 p. 51 참조 JJeremias, The Eucharistic Words of Jesus (Oxford, 1955), pp. 129 이하

27. 위의 책 p. 91

28. 위의 책 p. 97

 

오우성/서울대 상대, 프린스톤 신학대학원, 드루대학교(철학박사)에서 공부했으며 지금은 계명대학교 조교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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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개혁하는 교회
글쓴이 : 청지기(K.M.Y)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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