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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16:16-29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27)-예수와 제자들이 가이사랴 빌립보에 도착했을 때 예수님은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을 가시다가 노중에서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제자들을 향해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1막의 사역을 마무리 하시면서 제2막의 사역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제1막에서는 1. 제자들을 선택하여 주시고. 2.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수 많은 기적과 이적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이러한 배경에는 시청각 교육을 통해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이스라엘이 기다리고 있는 메시야임을 보여주시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제2막을 시작하시면서 선택된 제자들이 정작 자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점검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본격적으로 자신이 누구이며 그리고 자신이 이땅에 오신 목적이 무엇인지 제자들에게 알려 줄 필요를 느끼신 것입니다. 그래서 제 2막을 준비하시면서 과연 제자들이 자신에 대해서 얼마나 깨닫고 있는지 점검하실겸 이 질문을 하신 것입니다.
첫째 너희는 나를 누구랴 하느냐
28)- 먼저 주님은 세상 사람들이 자신을 누구로 보는지 물으셨습니다. 여짜와 가로되 제자들이 대답하기를 1. 세례요한 2. 엘리야 3.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에 관해서 알고 있는 내용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 사람들이 자기를 누구냐고 물으신 배경에는 다른 목적이 있었습니다. 내용인즉 세상 사람들이 자기를 보는 관점이 잘못 알고 있고 그들은 자신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이러한 질문을 유도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말한 것은 잘 모르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질문한 내용에는 다른데 있었습니다. 29) '또 물으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랴 하느냐'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있던 예수님은 돌연히 제자들을 보시면서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말들을 하고 있는데 그러면 너희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지 아니면 어떻게 나를 알고 있는지 제차 확인해 볼겸 이렇게 물으신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 예수님이 누구인지 분명히 알고 믿음생활을 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인지 확실하게 알아야 복을 받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시간 예수님이 누구인지 분명히 아는 영적인 지식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이 지식이 근본이요. 참된 지헤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축복받는 비결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이 신앙고백위에 서 있는 종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신앙고백을 하지 않는 기독교는 참된 기독교가 아닙니다. 그리고 예수님과도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둘째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29) 이때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신앙고백을 해 드렸습니다. 우리 기독교의 진수가 나오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도 베드로처럼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라는 단호한 신앙고백을 해야 할 줄 믿습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하지 못하는 사람은 참된 그리스도인이라 할수 없습니다. 아무리 인간적으로 유능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라는 신앙고백을 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와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처럼 '주는 그리스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라고 신앙고백을 하는 사람은 참된 그리스도인입니다. 진실된 그리스도인인지 진실되지 아니한 그리스도인지를 알아 볼려면 예수님이 누구십니까라고 질문을 해 보면 알아 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시간 우리 자신들에게 내가 누구냐고 물으신다면 어떻게 대답 하시겠습니까. 베드로처럼 예수님은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대답을 하시겠습니까. 아니면 다른 대답을 하시겠습니까.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신앙고백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산앙고백을 하지 못하는 사람은 가짜입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혈통으로나 육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선택 받은 사람만 아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질문은 대단히 중요한 질문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다가 어머니 뱃속에 있는 어린 생명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어린 생명이 엄마 뱃속에서 어떻게 생존하는지 다 잘 알 것입니다. 어린 생명은 어머니 태줄과 연결되어 어머니의 영양분을 공급받고 생명을 보존 합니다. 만약 태줄이 끊어져 버린다면 어린 생명은 생명을 보존 할 수 없습니다. 이와 마찬 가지로 우리의 신앙 고백은 생명의 태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신앙 고백을 하지 못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생명과 연결된 생명의 태줄이 끊어진 사람입니다. 생명되신 예수님과 태줄이 끊어진 사람은 영혼이 죽은 사람입니다. 베드로의 신앙 고백은 너의 신앙 고백이 아니라 나의 신앙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너의 신앙 고백이 아무리 잘해도 나의 신앙 고백이 되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너의 교회가 아무리 훌륭한 신앙고백을 해도 내 교회에서 하지 못한다면 그 교회는 잘못된 교회입니다. 우리 교회가 바른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신앙 고백이 바르게 고백 되어 져야 합니다. 예수님은 나의 신앙고백을 통해서 나의 구세주가 되어 주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주십니다. 그동안 우리는 너의 고백속에 우리의 믿음이 좌우 되었습니다. 텔리비젼에 나오는 유명한 목사님의 신앙 고백이 나의 고백처럼 착각을 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것은 목사님 신앙고백이지 내 신앙고백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내가 바로 만나 바른 산앙고백을 해야 진짜 나의 신앙고백이 되는 것입니다. 이 점을 명심하고 내가 인격적으로 주님을 만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신앙 고백을 해야 합니다. 원수 마귀는 우는 사자처럼 주님과 연결된 생명의 태줄을 끊어 버릴려고 여러가지 근심, 걱정을 가져다 주고 있습니다. 염려나 근심 때문에 예수님과 연결된 생명의 태줄에서 끊어져 나가면 안 됩니다. 생명의 태줄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는 방법은 오직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라는 신앙 고백속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생명의 태줄은 바로 베드로의 신앙 고백입니다. 예수님의 태줄에 붙어 있어야 생명을 공급받고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십번 수백번씩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신앙고백을 할 때 풍성한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혹시 요즘 우리 교회는 어떤 신앙 고백을 하고 있습니까.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퇴색되어 가고 있지 않은지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희미해진 교회는 더이상 소망이 없습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위에 세워지지 않은 교회는 모레위에 세운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왜 중요하냐면 자기가 큰 교회를 일꾸고 부흥시켜 많은 업적을 이룩한 사람일수록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변수가 될 수 있습니다.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왕노릇 하는 사람들은 이 신앙고백이 걸림돌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존경받고 추앙 받는 사람들일 수록 신앙고백은 거추장스러울 수 있습니다. 야 그 사람 정말 대단해, 그 사람은 우리 민족의 구세주야 그 사람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못했을 거야. 그 사람 때문에 이렇게 복을 받고 사는 거야 하는 사람 일수록 신앙고백은 한이 될 것입니다. 지극히 조심해야 합니다. 조심하지 아니하면 넘어지게 됩니다. 공든탑이 무너지게 됩니다. 오늘날 이단, 삼단, 사단들이 극성을 부리고 있습니다. 교회를 혼란스럽게 하고 있습니다. 이단들의 잘못에 대해서 종지부를 찍을 수 있는 방법은 한가지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누구십니까라고 물어보고 어떻게 대답을 하는 가를 알아 보면 정확하게 가려 낼 수 있습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통해서 모든 시비를 가려 낼 수 있습니다. 거짓된 이론을 속아낼 수 있습니다. 어느 교회든, 어느 그리스도인이든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하지 못하는 교회는 거짓된 교회요 거짓된 그리스도인입니다. 교회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바르게 고백되어질 때 바른 교회가 될 수 있고 바른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세째 네가 복이 있도다
16:17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우리가 살면서 느끼는 것은 부부라도 상대의 마음을 전혀 알 수 없고 헤아릴 수 없습니다. 알고 싶어도 알 수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의 한계입니다. 남녀가 만나서 결혼을 해서 살지만 남녀의 사랑은 1년이면 다 거널난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인간의 의지와 사랑은 이렇게 유약하고 연약한 것입니다. 부부라도 항상 사랑으로 충만하게 살지 못하고 체념하며 좌절하며 갈등하며 부조화에 속에서 사는 것이지 진짜 조화있게 사는 사람은 드문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조회있게 사는 방법과 우리의 인격이 분열되지 아니하고 끝까지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어디에서 올까요. 우리의 복, 건강, 환희, 소망은 어디에서 찾아 올까요. 베드로의 고백속에서 우리가 가질 수 있는 모든 복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언제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게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라는 신앙고백속에 우리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모든 보화, 보물, 인격, 사랑, 소망이 다 들어 있는 것입니다. 사실 복을 의미할 때 동양적인 복을 연상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오복(무병장수, 건강, 물질)을 받아야 동양적인 관점에서 복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러한 복들이 다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바로 알고 바른 신앙고백을 한다면 모든 축복을 받은 거나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고백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풍부와 궁핍과 배부름과 배고픔과 성공과 실패의 모든 비결'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하는 복은 이러한 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군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곤난과 매 맞음과 간힘과 요란한 것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과'(고린도후서6;4-5) '영광과 욕됨으로 말미암으며 약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말미암으며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고린도후서6:8)라고 사도바울은 간증하고 있습니다 '근심하는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린도후서6:10)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복은 우리가 무엇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복이 있다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바로 알고 바른 신앙고백을 할 때 복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소유했기 때문에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신앙고백이 행복을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복은 어떠한 복입니까. 우리가 설령 좌절해도, 실패해도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용기와 능력을 부어 주십니다. 다 빼앗겨도, 다 잃어 버려도 주님이 다시 다 채워주시고 충당해 주시는 복입니다. 비어 있는 곳에 차고 넘치도록 안겨 주시는 복입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복은 마르지 않는 복입니다. 줄어들지 않는 복입니다. 감소되지 않는 복입니다. 축소되지 않는 복입니다. 흔들어 안겨 주시는 복입니다. (누가복음 6:38) ' ' 우리가 기도하면 다시 회복해 주시고 채워주시는 복입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는 신앙고백을 통해서 하나님의 복을 받아 누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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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알곡모으기
글쓴이 : 묘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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