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레오나드 레이븐 힐 목사(By Leonard Ravenhill) -
에녹은 예언하기를 “보라 주께서 일만 성도와 함께 오셨다”라고 했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그렇게 역사로 들어 오셨다 거나 번쩍이는 불 수레를 타고 마치 엘리야가 하늘로 올라간 것 같이 그렇게 예루살렘의 어두운 밤에 오셨다면, 엄청난 군중이 그를 영접하고 경배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시인이 말했듯이 “그들은 구원을 가져올 왕을 기다렸고, 그는 어린 아기로 오셨으며 오직 한 여인을 울렸을 뿐이었습니다”
성전을 깨끗이 함
그 동네 사람들은 예수님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 나라 최고의 목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그의 동네 밖으로 나섰습니다. 그는 광야의 설교자인 세례 요한으로부터 하나님의 어린 양이란 이름을 받아 들였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나귀에 자신을 태우고 도시로 들어가며 호산나 외치는 것을 허락했습니다. 이제 그는 성전에서 돈을 바꾸는 자들과 가축 파는 자들을 내어 쫓음으로 도시를 소동케 하였습니다. 거의 30여 년간 그는 사람들이 성전을 더럽히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습니다. 그들의 무례함과 탐욕에 격분하였습니다. 그는 그들이 성전 뜰을 동물의 분비물로 더럽히는 것과 오줌 냄새로 그곳을 오염시키는 것을 싫어 하셨습니다.
모든 복음서는 채찍으로 때리는 그리스도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는 예수님의 삶의 사건들을 기록하면서 매우 가치 있는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누가는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시기 전에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면서 잠시 멈추어 서서 이 위대한 도시를 보고 우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채찍을 들고 때리시는 그리스도 이전에 우시는 그리스도를 볼 수 있습니다.
그 분은 12살 때부터 그의 아버지의 일을 하셨음으로 예수님께서는 성전 뜰을 밟으셨으며 슬퍼하셨고 성전이 동물의 배설물 뿐 아니라 속이는 돈 바꾸는 자들과 가축 파는 자들의 충혈된 눈을 가진 착취자들로 더렵혀진 것에 대해 분개하셨습니다.
삼십년 동안 그 분은 아버지를 아는 것과 은혜 아래서 자라셨으며 이제는 그의 사명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을 더럽힘과 신성한 것을 모독함에 대한 단 한 사람의 공격에 대한 설명은 “너희 집에 대한 열정이 나를 삼켜 버렸다”고 하신 말씀에 함축되어 있습니다.
열정! 연약하고 시들은 오늘의 교회는 얼마나 이 같은 열정의 세례가 필요한가! 이 문맥에서 열정은 불타는 사랑입니다. 이유 없는 열정은 광신주의가 됩니다. 예수님은 광신자가 아니었습니다. 물론 그의 사랑은 그의 사명에 따른 모든 가능한 위험에 대하여는 눈이 멀었었습니다. 이 사랑은 개인의 안정은 무시하며 이를 위협하는 가능성은 고려치 않으며 그의 단어에서 “희생”이란 말은 없애버리며 클러치가 필요 없고 모든 위험을 무시하며 죄에 대해 참을 수 없어하나 광신적은 아닙니다. 주님의 진노는 화를 갑자기 터뜨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분은 그의 평생 동안 숙고하셨습니다. 지금 그 시간이 왔으며 사람들은 그의 채찍과 거룩한 분노 앞에서 달아났습니다.
영적 환경학
“오염! 오염!” 환경학자들은 우리의 음식, 공기, 물과 자동차 배기가스에 대해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 내의 오염에 대해 이렇게 외치는 설교자들은 어디 어디에 있습니까? 예수님의 마음은 주님의 선택된 선지자들을 조언자로 두고 있는 나라에 대해 애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선지자들에게 누가 귀를 기울였습니까? 그들은 왕들의 식탁에 초대 받지 않았고 그들의 주인과 같이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고 거절당했습니다. 어떤 선지자들은 질책하는 말을 했지만 그들은 또한 눈물 젖은 눈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아! 오늘날 울고 있는 설교자는 어디에 있는지 내게 말해 주십시오! 성전에서 가축을 매매하는 자들은 가축을 제물로 드리는 것보다 제물을 파는데 더 관심이 있었습니다. 오늘날도 똑같이 지금 이 시간에도 정치적 목적을 위해서는 열띤 싸움을 하지만 교회의 비참함과 누추함에 대해서는 열을 결코 올리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교회 안의 부정한 것에 대하여 십자군 원정을 할까요? 아니면 졸고 있는 성도들에게 내일이면 우리는 들림 받을 것이니까 다시 한번 먹고 마시고 즐기자라고 말하는 것이 더 낫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꼴을 한 부서진 교회(ruptured church)에 데려가지 않을 것입니다(will not rapture).
세상에서 가장 악한 것
이 순간 세상에는 놀라운 비극이 있습니다. “지혜로운” 자들이 성경을 치우고는 우리는 인간을 위해 새로운 자유를 추구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 지혜로운 자들은 그들이 그렇지 않음을 스스로 증명했습니다. 또 다른 똑똑한 자들은 그들의 머리를 짜내어 폭탄을 만들어 살아 있는 도시를 수초 만에 잿더미로 만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프가니스탄과 이란을 생각해 보세요. 캄보디아에서 매일 수백만이 피 흘리는 것과 쿠바를 떠나려고 기다리고 있는 군중을 생각해 봅시다. 이런 것들은 생각하기도 끔찍한 일들이지만 제가 보기에는 이것들보다 더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죽어가는 세상 가운데 있는 병든 교회입니다.
위대한 미국이 오늘날처럼 파괴된 적이 없었습니다. 깨어진 결혼으로 수백만의 파괴된 가정만 남겨 놓았습니다. 수십만의 10대들의 마음은 마약으로 파괴되었습니다. 사람들의 정부에 대한 신뢰와 믿음은 깨어졌습니다. 경제도 파탄이 났습니다. 한때 강력했던 달라는 가치를 잃었습니다. 모든 것이 깨어졌지만 믿는 자들의 심장만 깨뜨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이 우주적 혼돈을 대면하기 위해서 우리는 깨어진 마음이 필요합니다. 우는 것은 강단에 있어야 할 것일 뿐 아니라 명령하신 것입니다. “제사장들은 낭실과 단 사이에서 울며”(요엘 2:17), “너희는 곡할지어다”(요엘 1:13),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의 죄 때문에 울었습니다. “당신의 병에 내 눈물을 담으소서”하며 다윗도 울었습니다. 바울도 울었고 요한도 울었습니다. 세계 역사상 가장 중요한 때에 우리가 우리의 도시를 위해 울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위조된 열정
오늘날 교회의 무기력함은 거의 용서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열정이 있습니다. 몰몬교도들은 우리가 몰몬교도들로부터 개종시키는 것보다 복음주의 기독교인들로부터 몰몬교로 개종시키는 숫자가 더 많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단들은 거리에서 열정적으로 사람들이 듣게 만듭니다. 다소의 사울은 미친 듯한 열정이 있었습니다. 그는 남녀를 잡아서 감옥에 쳐 넣음으로 도시에서 도시로 다니며 가족을 파괴 시켰습니다. 기적적으로 하나님은 그를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불로 침례를 주고 그의 왕국을 위한 열성파 모델로 만드셨습니다.
교회가 오늘날과 같이 세속화된 때에 우리는 근본주의라거나 우리는 “교리”에 있어서 결코 타협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분노로 불타올라야 합니다(“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엡 4:26).
마귀가 이 시대를 장악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고통을 느껴야만 합니다. 우리는 우리 주인의 너무나 온전한 말씀보다 사람이 만든 신학에 더 충성됨으로써 우리 스스로의 길을 좇았던 것을 전능하신 분께 사죄해야만 합니다. 바울 같이 그 분의 거룩한 임재 앞에서 “내가 하는 이 한 일”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나는(내 자신의 교회를 포함해서) 교회의 차가움 때문에 아픈 가슴을 가지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열정을 품은 하나님의 사람은 한 일 즉,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위해 삽니다. 그의 열정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 대하여 그는 무감각합니다. 그는 하나님을 위하여 불타 없어지는 것이 자신에게 어떤 값을 치르게 하는지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병들거나 건강할 때나 가난할 때나 부요할 때나 존경을 받거나 멸시를 받거나 칭찬을 듣거나 무시당하거나 바보로 여겨지거나 철학자로 여겨지거나 악한 보고나 선한 보고나 키스를 하든지 저주를 하든지 그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로 고정된 자입니다!
이 사람은 오늘날의 교회가 연기 잘하는 자들과 빙고 게임, 빵 구워 파는 세일, 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딤후 3:5) 값싸고 번드르한 치장들로 더렵혀진 것을 봅니다. 그는 높은 자리에서 이혼을 용납하는 목사들을 봅니다. 아마도 그의 목사가 스스로 이혼한 목사이므로 그가 그 거룩한 직분을 받을 수 있도록 했는지도 모릅니다(디도서 1:6을 보라). 예수님은 오늘날 그의 교회가 물탄 복음에 의해 불순종으로 더렵혀진 것을 보고 계십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라”는 그 분의 계명에 순종하지 않거나 마태복음 23장 11절 말씀 즉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는 말씀을 실천하기를 기뻐하지 않습니다. 회중 가운데 금반지를 끼고 오는 사람이 있으면 우리는 그를 대우해 줍니다(약 2:2). 어떤 사람이 재산은 많고 영성은 빈약해도 그런 사람이 여전히 중직자 회의 위원으로 환영 받습니다. 우리는 젊은 소년 설교자를 기다리게 하지 않습니다(신학대학원 졸업장을 받을 때까지? 아닙니다!). 그들이 위로부터 능력으로 덧입을 때까지!
바리새인의 기도
성전에서 바리새인들은 “하나님 내가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게 부당하게 돈을 벌어들인 자나 불의한 자, 간음하는 자가 아님을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했습니다. 오늘날은 이런 기도마저도 할 수 없는 소위 “성령 충만 받은”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불의한 자는 물론이고 그들은 낮은 임금을 지불하면서 그들의 종업원들에게 “예수님을 위하여 희생을 감수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간음하는 자들 - 이런 끔찍한 부류에 속한 유명한 설교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물론 그들은 자신의 불성실에 대한 설명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많은 설교자들이 대형 집회의 주요 연사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부당히 금품을 강요하거나 착취하여 돈을 버는 자 - 라디오 설교자들은 거의 다 이것을 독점하고 있습니다. 25불짜리 성경(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이 선물용으로 100불에 제공되고 있습니다. 다른 책들도 원가보다 5배나 비싸게 팔립니다. 어떤 사람은 “당신은 남을 판단하고 있군요!”라고 말할 것입니다. 맞습니다. 나는 판단하라(요 7:24)고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의로운 판단을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다른 진실한 복음의 설교자들과 같이 나는 파수꾼이므로 다른 사람들에게 경고를 해야 합니다. “또한 심판은 주의 집에서 시작되어야만 합니다” 더 많은 돈을 얻어내기 위한 이런 미끼는 가증한 것입니다.
설교자들이 라디오와 TV를 통해 돈을 달라고 우는 소리를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 사역을 위해서”라고 말하나 그 돈의 많은 부분은 그들의 화려한 삶의 양식을 유지하는 것과 값비싼 비행기들, 화려한 성경 말씀 집회 장소를 준비하는 데 쓰여집니다. 이제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훔치는” 바리새인들이 되었습니다. 당신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당신의 주머니를 털고 당신의 집을 달라고 하다가 당신이 죽은 뒤에는 당신의 부동산을 탐낼 것입니다. 다음엔 무엇이 될까요?
하나님의 영광 훔치기
이 시대는 개성이란 우상 시대입니다. TV를 통해 복음을 전한다고 하는 자들은 주님을 위해 너무나 많은 것을 포기한 것처럼 자신들을 나타냅니다. 그들이 스타의 생활을 떠나 은퇴하고 포기해야 할 것은 지옥과 영원한 형벌입니다. 어떤 인간도 하나님을 위해 호의를 베풀지 않는다는 것을 지붕 위에 올라서 외쳐야 합니다.
부자인 복음 전하는 자들의 화려한 삶은 그들이 주님을 따르기 위해 아무 것도 버린 것이 없음을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복음 전하는 설교자를 아첨하는 말로 소개하는 것은 또 하나의 부흥의 길을 가로 막는 커다란 장벽입니다.
요한복음 5장 41절과 44절은 우리의 영혼 깊은 생각을 요구합니다. 내 심령은 무겁고 또한 불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집은 오염되어 버렸습니다. 죄인들은 비웃으며 부자가 된 설교자들에 대하여 “그들의 신조(creed)는 탐욕(greed)이며 그들의 하나님(god)은 금(gold)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돈만 밝히는 자들이 성전에 들어와 있고 하나님의 가슴이 상처 받고 있음에 대해 거룩한 분노를 일으키는 거룩한 열정의 침례가 필요합니다. 교회는 성령 안에서 시작되었으나 지금은 육신 가운데 움직이고 있습니다. 성전 위에 불기둥이 없어졌습니다. 지옥을 향해 가고 있는 무리들을 꼼짝 못하도록 붙들어 둘 수 있는 설교자가 없습니다. 로마가 불타는 동안 네로가 노래 연주를 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을지 저는 자신이 없습니다. 교회는 세상이 불타고 있는 동안 노래를 연주하고 있음을 증명할 수는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부흥을 경험하지 못하는 한 가지 이유는 우리가 부흥이 없이 사는 것에 만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집의 열정이 나를 삼켰나이다”라고 정직하게 말할 수 있는 믿는 자들의 한 세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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