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 설교 모음

[스크랩] [59강] 누가복음 19:11-27 열 므나 비유

하나님아들 2013. 2. 20. 12:37

 

예수님은 여리고에서 최종 목적지인 예루살렘으로 향하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비유 하나를 더 말씀하시게 된다. 본 비유가 삭개오의 집 안에 있던 사람들을 대상으로 말씀하신 것인지 아니면 다른 곳에서 말씀되어진 비유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누가는 삭개오 사건과 연관하여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삭개오 사건과 연관된 문맥으로 본 비유를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11절에 보면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있을 때에 비유를 더하여 말씀하시니 이는 자기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고 저희는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함이러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리고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열 므나에 대한 비유가 소개된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열 므나 비유를 말씀하시게 된 동기나 이유를 여기서 생각해야 할 것이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기 전에 이 비유를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으로 인하여 하나님 나라가 출현하리라고 기대한 사람들에게 종말에 대한 올바른 교훈을 주고자 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활동이 갈릴리 지역에서 예루살렘 쪽으로 옮겨짐에 따라 곧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러한 기대는 제자들에게서도 마찬가지로 보여진다.

18:31 이하에 보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이 가시는 목적을 분명히 밝히셨다. 예루살렘에 가면 이방인들에게 잡혀서 고난과 죽음을 당할 것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의 성취라고 하셨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러한 예수님의 뜻을 알지 못하였다. "제자들이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으니 그 말씀이 감추였으므로 저희가 그 이르신 바를 알지 못하였더라"(눅 18:34)고 한 것을 볼 때에 제자들도 다른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생각하였던 것이다.
유대인들의 일반적인 기대는 하나님 나라이지만 그들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개념은 정치적인 것에 한정되어 있었다. 당시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그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시켜줄 자가 메시야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제 본격으로 이스라엘의 수도인 예루살렘으로 가시니까 자기들의 기대가 이루어질 것이라고 기대하였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11절의 말씀은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것이라고 기대하는 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로 말씀하신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예수님의 비유는 하나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로 말씀하셨다기 보다는 오히려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하여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심으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기대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드러내고자 하시는 하나님 나라가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사실 누가는 삭개오 사건을 통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에서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눅 19:5)는 말씀과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로다"(눅 19:9)라는 말씀에서 '오늘'이라는 의미를 강조하였다. 때문에 사람들은 삭개오에게 줄 하나님 나라, 구원이 지금 당장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시게 되면 이루어질 것으로 기대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 하나님 나라에 대한 본질을 다시 한번 말씀하고자 하시는 것이다.
비유의 내용인즉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기 위하여 먼 나라로 여행을 계획하였기에 종 열 명을 불러 각각 한 므나씩 은 열 므나를 나누어 주면서 돌아오기까지 장사하라고 명령하였다. 당시는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느 상황이었기에 로마에 가서 왕권을 인정받아 돌아와서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그런 경우들이 있었다. 그런데 그 백성들 중에서는 귀인이 왕이 되는 것을 싫어하여 사절단을 보내어 귀인의 왕됨을 원치 않는 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어쨌든 귀인은 왕위를 받아 가지고 돌아와서 종들이 각각 어떻게 장사하였는지를 물었다.

그러자 한 종은 열 므나를 남겼다고 하였다. 그리고 또 한 종은 다섯 므나를 남겼다고 하였다. 각각 열 고을과 다섯 고을을 맡긴다고 말씀하였다. 그러나 또 다른 한 종은 한 므나를 수건에 싸두었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주인은 한 므나를 빼앗아 열 므나 있는 자에게 주라고 명령한다. 이 명령이 떨어지자 곁에 있는 사람이 주인에게 이미 열 므나가 있다고 일러주고 있다. 주인의 대답은 의외였다. 있는 받겠고 없는 자는 있는 것도 빼앗긴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원수들을 끌어다가 죽이라고 명령한다. 이렇게 비유는 종결되고 있다.
이 비유에서 뚜렷한 가르침은 발견할 수가 없다. 예수님이 이 비유를 가지고 어떤 결론을 내리시지 않으셨다. 그렇다면 이 비유의 의미는 무엇인가?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이 본문과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소위 달란트 비유와 유사한 점을 찾고 또 상이점을 찾으려고 한다. 그래서 같은 비유인지 아니면 다른 비유인지 결론을 내려고 한다. 물론 구조상으로는 비슷한 비유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비유를 비교하는 것을 통해 같은 비유인가 아닌가 하는 것을 가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마태복음의 달란트 비유는 달란트 비유대로 마태복음의 문맥 속에서 주어지는 교훈이 있고 본 비유는 누가복음의 문맥 속에서 주어지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있다는 점을 생각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비유에서 열 종들에게 열 므나를 나누어 주었다고 말씀하고 있지만 귀인이 왕위를 받아 가지고 왔을 때 그들이 실제적으로 어떻게 하였는가를 볼 때에 열 명의 종들이 다 등장하는 것은 아니다. 처음 두 종은 각각 열 므나와 다섯 므나를 남겼다고 하였고 또 다른 한 종은 장사하지 않고 수건에 싸두었다고 하였다. 장사를 하여 열 므나를 남긴 종에게는 "잘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17절)고 하였다. 다섯 므나를 남긴 종에게 이러한 표현은 구체적으로 없지만 그에게도 역시 "너도 다섯 고을을 차지하라"(19절)고 하였다.
왕의 칭찬은 동일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실제 종들에게 한 므나씩을 주면서 얼마를 남기라고 하신 적은 없다. 그러므로 열 므나를 남겼든지 다섯 므나를 남겼든지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물론 열 므나를 남긴 자에게는 열 고을 권세가 주어지고, 다섯 므나를 남긴 자에게 다섯 고을의 권세가 주어진다는 점을 들면서 차이를 강조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본문에서 말씀하는 것은 종들을 다 열거하면서 나머지 종들에게도 그 보상이 어떻게 배당되었는가 하는 것을 더 이상 말씀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비유에서 말씀하고자 하는 것은 남긴 것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두 부류의 존재로 나누고 있다는 것이다. 즉 장사를 하여 남긴 종과 그렇지 못한 종이다.
한 므나를 수건에 싸두었던 종의 말을 들어보면 이렇다. "주여 보소서 주의 한 므나가 여기 있나이다 내가 수건으로 싸두었었나이다 이는 당신이 엄한 사람인 것을 내가 무서워함이라 당신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나이다"(20-21절). 이 종은 장사하라는 주인의 명령을 거부하였다. 그는 주인을 전통적인 절차와 율법에 모순되는 착취적인 사업 관행을 저지르는 자로 묘사한다. 심지 않는 곳에서 거두는 악한 주인이라는 말이다.

이 종의 말을 통해 주인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가 분명히 드러난다. 이런 생각 때문에 그는 장사를 하지 않고 한 므나를 그대로 가져왔다. 이 종은 주인이 왕이 되는 것을 거부하는 자였음이 드러났다. 이는 27절에서 더욱 분명히 밝혀지고 있다. "그리고 나의 왕됨을 원치아니하던 저 원수들을 이리로 끌어다가 내 앞에서 죽이라 하였느니라." 그러기 때문에 주인의 명령을 거부하였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주인의 왕됨을 거부하였기 때문에 장사하라는 주인의 명령을 우습게 여겼던 것이다. 주인의 책망은 한 므나를 뺏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리고는 "주인이 가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릇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26절)고 하였다.
결국 주인의 왕 됨을 인정하고 그 주인의 명령을 좇아 산 자는 주인에게서 보상을 받게 될 것이다. 물론 그 보상이라는 것을 차등이 있다는 것으로 받아 들여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각각 종들에게 맞는 권세를 맡기는 것은 주인의 뜻이다. 또한 열 고을 혹은 다섯 고을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셨다는 것을 장사한 것에 대한 보상의 의미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26절 말씀에서 "무릇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이것이 단순히 물질적인 보상을 의미한다는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신 이유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자. "저희는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함이러라." 그렇다면 예수님은 비유를 말씀하심으로 하나님 나라가 당장 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임하여 있다고 선언하신 것이다. 즉 주인이 왕위를 받기 위하여 멀리 떠났다고 하더라도 종들은 주인의 명령을 무시하지 않고 그 주인의 명령을 좇아 살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행위는 주인이 멀리 있다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주인과 더불어 산다는 생각이었고 곧 주인의 명령 안에 그대로 살았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장사를 하여 므나를 남긴 종들의 삶은 먼 미래의 구원이나 심판을 기다리면서 살았던 것이 아니라 지금 예수님을 왕으로 인정하고 그 나라에 살고 있는 것이었다.
예수님을 하나님 나라로 알고 인정하는 자들은 곧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자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을 예수님을 정치적인 메시야로 보고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시켜 줄 것을 기대하였다. 하나님께서 이미 구약을 통해 언약의 말씀을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메시야에 대한 이해를 자기 편한 쪽으로 이해하였던 것이다. 이런 구도로 볼 때에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는 말씀은 물질적인 보상이 아니라 말씀에 대한 이해의 측면이 다르다는 의미이다.

비록 구약의 말씀을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지금 하나님 나라로 오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어야 하는 메시야로 인식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빼앗긴 것이나 다름이 없다. 그러나 구약의 말씀을 통해 지금 임한 하나님 나라를 인정하고 그것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 믿어진다면 그분에 의한 십자가 은혜를 받아 누리게 될 것이다. 실로 이것은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가셔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이 사실을 분명히 하기를 원하셨다(김영대목사/주성교회/2003.4.6).

 

출처 : 주성교회
글쓴이 : 김영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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