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 설교 모음

마태복음 17:14-23, 신념과 믿음

하나님아들 2026. 2. 6. 23:02

마태복음 17:14-23, 신념과 믿음

 

1. 옛날 한국의 유행가 중에 제목을 잘 모르겠는데 이런 가사를 가진 노래가 있었습니다. "님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를 찍으면 남이 된다." 반대로 말하면, 남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를 빼면 님이 된다는 뜻입니다. 우리 말에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말이 바로 그런 뜻입니다. 얼마 전에 한국에 있는 제 친구 목사가 카카오톡으로 재미있는 글귀를 몇 개 보내줬는데, 이 글귀는 띄어쓰기에 따라서 의미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서울시 장애인 복지관'을 띄어쓰기를 달리하니까 '서울 시장 애인 복지관'이 되었고, '당신은 무지개 같아요'는 '당신은 무지 개 같아요'가 됐습니다. 그리고 '희망 의상실'은 '희망의 상실'이 되어버렸습니다. 

 

2. 영어에도 이런 것이 있습니다. ‘God is no where’에서 w가 앞으로 가면 ‘God is now here’가 되어서 뜻이 완전이 달라져버립니다. 이처럼 단어의 점 하나, 혹은 띄어쓰기 하나, 혹은 철자 하나의 차이가 완전히 다른 뜻을 가져다줍니다. 그런데 우리가 성경을 이해할 때에도 별 것 아닌 차이가 전혀 다른 의미를 가져다주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3. 예를 들면, '신유'와 '신유의 은사'입니다. 여러분, 신유가 무엇입니까? 신유(神癒)란 병을 고친다는 뜻입니다. 한자어로 말하면, 신(神)은 하나님을 의미하고, 유(癒)는 '병을 고치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신유란, 하나님의 힘으로 병을 고침받는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들에게 한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오늘날에도 신유는 일어납니까? 일어나지 않습니까? 오늘날에도 신유의 역사는 분명히 일어납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은 분명히 살아계셔서 직접 병을 고쳐주심을 우리는 확실히 믿습니다.

 

4. 그러면, 다른 질문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오늘날에도 신유의 은사가 존재합니까? 다시 말하면, 오늘날에도 병자에게 병 낫기를 명할 수 있고, 실제로 병고침을 일으키며, 또한 언제 치료의 역사가 일어날지 확실하게 맞출 수 있는 그런 은사를 가진 사람이 존재하느냐는 질문입니다. 아마 어떤 분들은 존재한다고 믿고, 또 어떤 분들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을 것입니다. 일단 그에 대한 답은 조금 미루고 오늘 본문의 말씀을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5. 한 사람이 간질로 고생하는 아들을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습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아들을 데리고 온 사람은 아버지였고, 이 아들은 외아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아들은 어렸을 때부터 간질로 고생하였습니다. 그런데 결론적으로 말해서 제자들은 이 아들의 병을 고쳐주지 못했습니다. 이 아버지가 처음에는 예수님을 만나러 왔는데, 변화산에 올라가고 안계시니까 제자들에게 고쳐달라고 부탁을 한 것인지, 아니면 처음부터 제자들에게 부탁을 하려고 온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마는 어쨌든 제자들은 못고쳤습니다. 

 

6. 사실, 제자들이라면 충분이 이 병을 고칠 수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10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12명의 제자들을 파송하실 때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셨기 때문입니다(마10:1). 그런데 못고쳤습니다. 왜 못고쳤을까요? 나중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이렇게 여쭈었습니다. 19절, “…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Why couldn't we drive it out?")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20절, “가라사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He replied, "Because you have so little faith.) 예수님은 제자들이 믿음이 적어서 병을 고치지 못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7. 여러분, 그러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큰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20절, “가라사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니라.” (He replied, "Because you have so little faith. I tell you the truth, if you have faith as small as a mustard seed, you can say to this mountain, 'Move from here to there' and it will move. Nothing will be impossible for you.")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큰 믿음이란 산을 옮길 만한 믿음입니다. 

 

8. 그렇다면, 산을 옮길 만한 큰 믿음은 무엇입니까? 같은 내용이 마가복음에도 기록되어졌는데, 거기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막9:29,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He replied, "This kind can come out only by prayer.") 그러니까 종합을 해보면, 큰 믿음이란 기도하는 믿음이요, 믿음으로 기도하면 산을 옮길 수도 있고, 병도 고칠 수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9. 여러분들은 큰 믿음을 가지셨습니까? 열심히 기도하십니까? 그래서 정말로 산을 옮기셨습니까? 그런데 여기에서 산을 정말 문자적인 산으로 이해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물론 정말 믿음으로 기도하면 산이 옮겨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의미로 산을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만약 문자적 산이라면 우리가 믿음으로 기도할 때마다 산은 사라져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좀처럼 발생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반대로 산이 사라지지 않도록 기도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누구의 기도를 들어주셔야 합니까? 

 

10.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 산을 상징적으로 해석합니다. 믿음으로 기도하면, 산이 옮겨질 만큼의 크고 놀라운 일들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불가능해 보이는 일일지라도 믿음의 기도는 불가능을 가능케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 말도 맞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기도하면, 하나님은 정말로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엄청난 일들을 일으키시는 줄 믿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이 산을 인생의 고난이나 고통으로 해석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음으로 기도하면 고난의 산, 고통의 산을 하나님께서 옮겨주신다고 믿습니다. 물론 이 말도 맞습니다. 정말로 우리가 믿음으로 기도하면, 하나님은 우리 인생의 앞에 놓여 있는 고난과 고통을 산을 옮겨주실 것입니다. 

 

11. 그렇다면, 믿음이란 정말로 무엇입니까? 진짜 불가능도 가능케 하고, 고난과 고통도 극복할 수 있는 힘이 믿음입니까? 우리는 때때로 믿음과 신념을 착각할 때가 있습니다. 믿음과 신념은 그야말로 님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 찍는 차이만큼 전혀 다른 뜻입니다. ‘아’ 다르고 ‘어’ 다른 것입니다. 신념이란 그야말로 어떤 일에 대한 자기 확신을 말합니다. 내 앞에 있는 불가능해 보이는 일들도 능히 이룰 수 있다는 확신이 신념이며, 고난과 고통 조차도 극복할 수 있다는 확신이 신념입니다. 

 

12. 그런데 사람들은 이 신념과 믿음을 혼동합니다. 자기 신념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라고 믿습니다.고등학교를 졸업하는 학생은 원하는 대학에 합격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꼭 합격시켜 주실 것으로 믿고 기도합니다. 부모도 그렇게 믿고 기도합니다. 어느 직장에 취직하려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취직시켜주실 것이라고 믿고 기도합니다. 사업을 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번에 시작하는 비즈니스가 정말 대박나게 해 주실 것이라고 믿고 기도합니다. 

 

13. 우리의 삶 자체가 다 이런 식입니다. 내 앞에 있는 꿈과 목표가 산입니다. 또한 그 꿈과 목표를 이루는데 방해가 되는 고난과 고통이 산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기도합니다. “하나님, 꼭 산을 정복하게 해주세요. 믿습니다. 꼭 고난과 고통을 이기게 해주세요. 믿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자기 신념일 뿐이지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런 신념들이 어느새 우리의 믿음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큰 믿음은 무엇입니까? 반드시 산을 정복하겠다는 신념이 곧 큰 믿음입니다. 그리고 열심히 기도하면 그 신념을 하나님께서 반드시 들어주실 것이라고 믿는 것이 곧 큰 믿음입니다.  

 

14. 그래서 기독교의 복음이 인간의 신념의 복음이 되어버렸습니다. 무슨 일이든지 꿈을 가지고 열심히 노력하라, 적극적이고 긍정적으로 살고, 또한 창조적이며 모험적으로 도전하라, 그러면 산도 옮길 수 있다… 물론 우리에게는 이런 신념이 필요합니다. 이런 신념이 없이 어떻게 우리가 공부를 하고, 취직을 하고, 결혼을 하고, 자녀를 키우며, 가정생활을 하고, 비즈니스를 경영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것은 나의 신념일 뿐이지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15. 제가 오늘 설교를 준비하면서 이 본문을 가지고 다른 목사님들은 어떻게 설교했나 알아보기 위해서 다른 목사님의 설교도 들어보고 설교문도 찾아서 읽어보았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설교가 다 신념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제가 그 중의 한 목사님의 설교문을 그냥 통째로 한번 인용해보겠습니다. “큰 믿음을 가지면 불가능한 일도 가능해진다. 결국 산을 옮긴다는 말은 인간적으로 보면 불가능하고 절망적인 것을 믿음으로 극복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비전과 함께 모험을 감행하는 실천이 있어야 합니다. 실천없는 믿음은 역사하지 못하고 죽은 것입니다.

 

16. 우리 00교회는 참으로 잠재력이 많고, 또 교인들이 최고의 수준들입니다. 또 제가 믿기에는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 있습니다. 다만 비전이 좀 부족하고 모험을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적어도 아무 것도 없는데서 이 큰 성전을 짓고, 16만평의 기도원을 지은 교회입니다. 지금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라는 것은 이것과 비교하면 아주 미미한 아주 작은 것입니다. 그까짓 것들입니다. 이제 여러분들이 사업상의 어떤 꿈을 가지고 있읍니까 신앙의 모험적인 실천이 있어야 열매가 맺어집니다. 

 

17. 그런데 이 비전을 이루려면 창조적인 선언과 함께 기도하고 구한 것은 받았다고 믿는 절대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그냥 되는 것이 아니고 바다야 잠잠하라고 선언해야 합니다. 산아 물러가라고 선언해야 합니다. 질병아 물러가라고 선언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창조적인 선언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긍정적 사고방식을 가져야 합니다. 절대로 부정적으로, 비관적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바로 이것이 중요합니다. 특히 지도자들에게 이런 긍정적 사고방식(positive thinking)이 있어야 합니다.

 

18. 미국 오하이오주 감리교회 목사인 노만 빈센트 필(Norman Vincent Peale) 목사는 적극적 사고방식으로 유명합니다. 그는 항상 불가능은 없다고 믿었읍니다. 그가 쓴 책 가운데 ‘삶의 용기와 신념의 결단’(Treasury of Courage and Confidence)이란 책은 저 자신에게도 큰 힘을 준 책입니다. 특별히 그는 기도의 능력을 많이 활용한 사람입니다. 기도란 하나님에게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미국의 로버트 슐러(Robert Schuller) 목사는 절대가능의 신조를 가지고 일생을 산 사람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읍니다. "산이 앞에 가로막힌다 해도 나는 단념하지 않으리라. 나는 계속 도전하리라. 나는 산에 오르리라. 아니면 산밑에 터널을 파고 통과하리라. 아니면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그대로 산을 변화시켜 금광으로 만들리라."

 

19.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 안에 있는 믿음을 과소평가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비록 겨자씨처럼 작아도 활용만 하면 큰 힘을 나타냅니다. 문제는 그것을 묻어두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묻어두면 없어지고 말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의 신앙을 묻어두지 말고 그 비결을 배워서 산을 옮기는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 여러분, 이런 설교를 해야 은혜 받으시지요? 그러나 이것은 오늘 성경본문을 완전히 곡해했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의 복음 자체를 완전히 왜곡해버렸습니다. 위에서 언급된 노만 빈센트 필 목사는 기독교 안에 긍정적 사고를 가지고 들어온 원조입니다. 그는 기독교의 믿음을 단지 긍정적인 사고, 혹은 자기 신념, 혹은 자기 계발로 바꾸어버렸습니다. 그리고 그의 제자가 바로 로러트 슐러 목사입니다. 슐러 목사는 1955년 오렌지카운티에 소위 자동차 교회로 시작된 수정교회(Crystal Cathedral)를 개척하여 미국의 대표적인 대형교회로 성장시킨 장본인입니다.

 

21. 그러나 우리가 다 잘 알다시피 수정교회는 지난 2010년에 결국 파산했으며, 현재는 오렌지카운티 카톨릭 교단에 팔려서 성당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여러분, 1만여장의 아름다운 유리벽과 세계에서 가장 큰 파이프 오르간으로 유명한 이 교회가 왜 몰락하였습니까? 물론 재정적인 문제도 있고, 슐러 목사의 가족들 간의 분쟁도 원인이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복음의 상실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면, 소위 긍정적 사고, 자기 신념을 바탕으로 한 성공신학(success theology), 번영신학(prosperity theology)이 문제였습니다. 무조건 믿습니다하고 밀고 나가면 산도 옮길 수 있다는 자기 신념이 문제였습니다.  

 

22.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과 자기 신념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내 신념을 가지고 그것이 마치 하나님의 뜻인 것처럼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자기 신념이 큰 것을 큰 믿음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그 큰 신념을 하나님께서 꼭 이루어주실 것이라고 믿어서도 안됩니다. 그렇게 큰 믿음을 가지고 시작한 교회도 결국 문을 닫았습니다. 물론 이 땅의 유형교회는 문을 닫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신념으로 성장한 교회는 설령 문을 닫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것은 이미 교회가 아닙니다. 

 

23. 그러나 예수님은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어도 산을 옮길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큰 믿음은 산처럼 큰 믿음이 아니라 오히려 겨자씨처럼 작은 믿음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께서 큰 믿음을 강조하시려면 믿음 자체를 산에 비유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너희 믿음이 산만큼 크면 큰 일을 이룰 수 있다… 그런데 겨우 눈에 보일듯 말듯한 겨자씨에 믿음을 비유하셨습니다. 그 조차도 제자들의 믿음이 겨자씨만큼도 안된다고 지적하셨습니다. 

 

24. 여러분, 마태복음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말씀입니다. 마태복음은 마태가 유대인들을 향해 쓴 책인데, 유대인들은 여전히 구약시대, 즉 자신들만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이 말은 새로운 시대, 즉 신약시대를 믿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신약시대가 무엇입니까? 이제는 이스라엘만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아니라 이방인까지 포함해서 누구든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있는 교회시대가 곧 신약시대입니다.  

 

25. 그래서 마태복음 16장에서 예수님은 이 교회에 대해서 말씀하셨고, 곧 이어 자신의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예언하셨습니다. 그리고 17장에 와서 오늘 본문 앞부분에는 예수님께서 3명의 제자들과 함께 변화산에 올라가셨습니다. 여러분, 변화산 사건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2절,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There he was transfigured before them. His face shone like the sun, and his clothes became as white as the light.) 이것은 예수님의 부활을 예고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왜 자신의 고난과 부활을 예고하셨습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의 복음을 통해서 이 땅에 확장되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26. 그래서 예수님은 지금 제자들의 믿음을 겨자씨에 비유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반드시 확장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마태복음 13장에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7가지 비유 중에 3번째 비유가 바로 겨자씨 비유입니다. 이 겨자씨 비유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겨자씨만한 하나님의 나라가 큰 나무처럼 크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겨자씨 자체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나라의 최초의 씨앗입니다. 

 

27. 그런데 이 씨앗이 땅에 떨어져 죽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실패가 아니라 오히려 부활의 승리로 나타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씨앗은 이제 제자들을 통하여, 교회를 통하여 이 땅에 뿌리를 내리고, 가지를 내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믿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질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나라는 점점 확장되어질 것입니다.   

 

28. 그러면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이 겨자씨이신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그리고 겨자씨와 같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믿음입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복음을 통해서 확장된다는 믿음입니다. 예수님이 적다고 지적하신 믿음은 바로 이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믿음을 제자들이나 유대인들이 갖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들이 그 믿음을 소유하게 하시려고 병도 고치고, 오병이어의 이적도 행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이적은 이적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믿음을 주는 것이 주목적이었습니다. 

 

29. 그런데 제자들은 아직 그러한 믿음이 확고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바로 이전 16장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의 죽음을 말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17장의 변화산에서도 베드로는 산을 내려가지 않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이제 산을 내려가서 나의 죽음과 부활을 목격하라, 그리고 사람들에게 그것을 전함으로써 교회를 세우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키라는 것인데 베드로는 그것을 아직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30. 물론 간질병에 걸린 외아들을 데리고 온 아버지도 이 믿음이 없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그 아들을 고쳐주기는 하셨지만 예수님의 관심은 병고침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17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O unbelieving and perverse generation," Jesus replied, "how long shall I stay with you? How long shall I put up with you? Bring the boy here to me.) 이것은 예수님께서 그 아들의 아버지에게 하신 말씀인데, 마가복음에 보면 그 자리에 다른 무리들과 서기관들도 함께 있었습니다. 

 

31. 그러므로 예수님은 지금 새로운 신약시대를 연 하나님의 아들인 자신을 믿지 않는 유대인들을 준엄하게 책망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언제까지 병고침에만 관심을 가질 것이냐, 언제까지 기적만  쫓아다닐 것이냐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왜 병을 고치지 못했습니까? 하나님 나라에는 관심이 없고 단지 병고치는 은사에만 관심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자기 힘으로 뭔가 해보려고 하니까 신유의 은사를 이미 받았음에도 병고치는 일에 실패혔던 것입니다.   

 

32.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병을 고치거나 산을 옮기고자 하는 신념이 아니라 믿음이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어떤 믿음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믿음입니다. 그 믿음만 있으면 두렵지 않습니다. 제자들에게 그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근심하였습니다. 22-23절, “갈릴리에 모일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죽음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심히 근심하더라.” (When they came together in Galilee, he said to them, "The Son of Man is going to be betrayed into the hands of men. They will kill him, and on the third day he will be raised to life." And the disciples were filled with grief.)

 

33. 이천년 후를 살아가는 오늘 우리들도 별반 다를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야말로 내 믿음의 전부임을 진심으로 깨닫지 못하니까 두려운 것입니다. 대학에 합격하지 못할까봐 두렵습니다. 취직하지 못할까봐 두렵고, 사업이 대박나지 못할까봐 두렵습니다. 그리고 육신이 병에 걸려서 두렵습니다. 

 

34. 그러나 예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믿는 사람은 어떻습니까? 롬14: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If we live, we live to the Lord; and if we die, we die to the Lord. So, whether we live or die, we belong to the Lord.) 이 말씀이 저와 여러분들의 비장한 신앙고백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신념으로 사는 자는 성공만 추구하며 실패를 두려워하지만, 믿음으로 사는 자는 어떤 상황에서도, 심지어 죽음이 내 앞에 있다 할지라도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며 사는 사람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35. 이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오늘날에도 과연 신유의 은사가 존재합니까?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존재하지 않습니다. 병고치는 은사는 구약시대를 마감하고 신약시대를 여는 사도들에게만 주어진 특별한 은사였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교회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는 더 이상의 신유의 은사는 필요치 않습니다. 바울 사도의 경우가 그 증거가 될 수 있습니다. 바울 사도 역시 신유의 은사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형제요, 동역자요, 동료 군사인 에바브라를 고칠 수 없었습니다(빌2:25-27). 또한 바울은 선교여행 때 자기와 동행한 드로비모를 고치지 못하고 아픈 채로 밀레도에 남겨 두었습니다(딤후4:20). 

 

36. 또한 바울은 자기의 후계자 디모데를 고칠 수 없었고 대신 일반적인 음식처방을 해주었습니다(딤전5:23). 바울은 심지어 자신의 병도 고치지 못하였습니다(고후12:7-10). 이런 상황에서 바울은 두 가지 일을 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께 기도했고, 둘째는 적절한 약을 사용하였습니다. 기도할 때조차 하나님은 부정적인 대답을 해주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병고침의 은사는 새로운 시대를 열기 위한 특별한 은사이지 결코 성도의 건강을 위해서 주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37. 그러나 신유 그 자체는 오늘날에도 분명히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신유와 신유의 은사를 혼돈하시면 안됩니다. 분명 하나님은 오늘날에도 우리의 병을 고쳐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떤 특정한 사람에게 신유의 은사를 주심으로써 병을 고치게 하시지 않습니다. '아' 다르고 '어' 다른 것이니다. 다만, 하나님은 성도의 기도를 통해서 직접 병을 고치실 뿐입니다. 약5:14,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Is any one of you sick? He should call the elders of the church to pray over him and anoint him with oil in the name of the Lord.) 우리가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이 고쳐주실 뿐입니다. 

 

38. 그러나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성도가 병 낫기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그가 병에서 회복될 것인지, 그 병을 가지고 살아가며 연단을 받을 것인지(고후12:8-9), 아니면 죽음을 통해 주님과 함께 거하는 영생의 복을 누릴 것인지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달려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큰 믿음이라고 해서, 혹은 신유의 은사를 가졌다고 해서 항상 병을 고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신념으로 사는 자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39. 말씀을 맺겠습니다. 정말 우리의 신앙은 정말로 점 하나 차이, 혹은 모음 하나 차이, 혹은 띄어쓰기 하나 차이로 다릅니다. 과년 우리는 신념으로 사는 자들입니까? 정말 믿음으로 사는 자들입니까? 과연 우리는 정말로 하나님의 신유의 능력을 믿고 사는 자들입니까? 아니면 인간의 신유의 은사를 추구하며 사는 자들입니까?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죽음과 부활신앙으로 사는 자들입니까? 아니면 눈 앞에 산을 정복하겠다는 자기 신신념으로 사는 자들입니까?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들이 바른 신앙, 바른 신학, 바른 믿음, 바른 복음을 따라 사는 진정 믿음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