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비밀 성경본문:엡2:3-9절
우리가 신앙생활하는 데 있어서 은혜가 먼저인가? 믿음이 먼저인가?를 따질 때가 있습니다. 바울은 은혜가 먼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은혜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고 믿음은 우리의 의지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가지면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심으로 우리가 믿음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행위를 낳게 합니다. 실상 믿음이 없는 사람은 어떤 믿음의 행위도 할 수 없습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믿음으로 교회에서 헌금도 하고 봉사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으로 하는 행위가 은혜가 없으면 자기 선행이 되어서 결국 불신앙으로 빠지고 맙니다. 은혜가 먼저 있어야 우리의 섬김과 봉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왜 은혜가 먼저 있어야 할까요? 은혜는 우리가 하나님께로 받은 사랑과 은택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죽어 마땅한 죄인이고 지옥의 형벌을 면치 못하는 자들이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사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영원한 형벌에서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은혜입니다. 이러한 은혜가 있으므로 우리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쁨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살 수 없는 연약한 존재들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지내온 것도 하나님의 은혜요, 우리의 믿음을 지켜온 것도 하나님의 은혜요, 이 거룩한 예배의 자리에 참석한 것도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돈으로 계산할 수 없는 엄청난 은혜를 받았습니다. 우리가 날마다 마시는 맑은 공기, 먹는 물, 따뜻한 해빛, 발로 밟고 다니는 흙, 신선한 바람 등 엄청난 축복입니다. 더욱이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 구원, 영생, 자비와 긍휼, 자녀의 권세와 능력 등은 큰 은혜가 아닐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를 망각하고 자기 힘으로, 자신의 머리로, 자신의 능력으로 이 모든 것을 얻는 것처럼 착각하며, 교만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무디 목사님이 스코틀랜드를 여행하시면서 그곳에서 전도 집회를 하고 있었을 때였습니다. 그 집회에 한 소녀가 참석했습니다. 이 소녀는 영혼의 고민을 안고 있었습니다. 내가 어떻게 해야 구원받을 수 있을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자기는 구원받을 만한 자격이 없다는 생각 때문에 소녀의 마음은 괴로왔습니다. 나는 배운 것도 없는데. 예쁘지도 않고. 명성도 없으며, 돈도 없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렇게 깨끗하지도 않아서 구원받을 자격이 없다는 자격지심 속에서 괴로워하고 있던 이 소녀가 그 집회의 마지막 날 무디 목사님이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에 대해 설교하고 있었을 때였습니다. 설교가 아직 끝나지도 않았는데. 소녀는 우뚝 서서 정면을 향해 달려 나오며 이렇게 외쳤습니다. “내 모습 이대로, 부족한 모습 이대로 하나님은 받아 주시지요. 달려 나오는 소녀를 끌어 안으면서 무디 목사님은 돌아온 탕자를 아버지께서 그대로 받으신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자매를 받으시지요” 라고 말했습니다. 그 소녀가 눈물을 흘리면서 그 날 하나님이 자기를 받으시고 죄를 용서하셨다는 해방감에서 주님 앞에 찬양과 감격의 기도를 올리고 있을 때에 그 옆에서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성가대의 에리사 헤밀턴이라는 여자가 붓을 들어서 작사를 하기 시작했읍니다. 그리고 그 옆에 서 있던 무디 목사님과 평생을 음악 목사로 동역했던 생키가 작곡을 시작합니다. “나 주의 도움 받고자 주 예수님께 빕니다. 그 구원 하락사시사 날 받으옵소서. 큰 죄에 빠져 영 죽을 날 위해 피흘렸으니 주 형상대로 빚으사 날 받으옵소서. 내 힘과 결심 약하여 늘 깨어지기 쉬우니 주 이름으로 구원해 날 받으옵소서. 내 모습 이대로 주 받으옵소서 날 위해 돌아가신 주 날 받으소서”
우리는 먼저 본문의 흐름과 문맥을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사도바울은 예수를 믿기 전에 성도들은 세상사람(불신자)과 다를 바 없이 존재로서 1절에서 여러분도 전에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원죄와 자신들이 죄와 잘못을 저질러진 범죄로 인하여 죄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또한 2절에 우리는 죄에 얽매여 있던 때에는 이 세상 풍조를 따라 살았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가 지시하는 대로 살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허물과 죄 가운데서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상태, 전적인 타락과 부패로 진리를 발견할 수없는 암흑상태. 사탄 마귀의 지시대로 살 수밖에 없는 죄인의 상태를 말합니다. 3절에서 우리의 실상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도 현재 불신자들과 마찬가지로 전에는 본능적으로 육신의 정욕대로 살았고, 육신과 마음이 원하는 대로 행했으며,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날 때부터(본성) 진노의 자식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던 저와 여러분을 살리시사(1절) 구원의 반열에 서게 하셨습니다. 바울은 그 이유를 4절에서 설명합니다. 바울은 우리의 착함이나 선행에 의하여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자비와 긍휼이 풍성하신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를 살리셨다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4절에 보면 우리를 사랑하시므로 그 크신 사랑으로 인하여 살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리시기로 작정한 배경은 그 크신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가능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크신 사랑을 십자가에서 확증하셨습니다. 6절에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예수 안에서 우리를 그분과 함께 살리시고, 하늘에 함께 앉게 하셨습니다. 또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바울은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을 설명하는데 7절에 보면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입니다. 또한 10절에 보면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일을 행하게 하기 위하여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는 영원하시며 주님이 재림하실 그날까지 지속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그 은혜. 그 구원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그 구원이 얼마나 크고 위대합니까? 그 비밀을 알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우리가 받은 구원은 죄사함을 받은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그”라는 지시대명사입니다. “그는, 그때에, 그 가운데서, 그 큰 사랑, 그 은혜, 그가...” 여기서 그는 도대체 누구를 가리키며, 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까? 여기서 “그” 가 가리키는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과 그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절대로 잊어서는 안되는 것이 “그 은혜”입니다. 오늘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그 은혜가 무엇인지, 그 은혜가 얼마나 크고 엄청난지를 발견하며, 첫 사랑을 다시 찾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구원함을 얻게 됩니까? 엡2:8절에 보면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단어는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고" 하였으니 먼저 그 은혜가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구원은 그 은혜 안에서의 믿음이지 은혜 밖에서의 믿음은 결코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 은혜가 무엇입니까? 엡1:7절에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그 은혜'란 곧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주시는 죄사함의 은혜입니다. 죄사함을 얻는 것이 바로 구원의 본질입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최고의 사건이 무엇입니까? 죄문제를 그의 보혈의 피로 해결받은 것입니다. 인간의 죄 때문에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되었고, 이웃관계가 깨어지게 되었고, 생태계가 파괴되었을 뿐만 아니라 각종 고통과 아픔과 저주가 인간에게 미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죄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각종 제사와 절기, 정결의식법을 만드시고 행하도록 하셨습니다.
구원은 은혜로, 믿음으로 받는 것이라는 바울의 구원론이 가장 명확히 표현된 곳이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 은혜란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거저 베푸시는 하나님의 호의입니다. 얼핏 들으면 은혜처럼 좋은 것이 없지만 의외로 우리는 은혜를 별로 좋아하지 않을 뿐 아니라 심지어는 거부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내가 자격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대우를 받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은혜는 우리의 자존심을 무너뜨리고, 우리의 모든 자랑을 빼앗아갑니다. 은혜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혁혁히 드러낼 뿐입니다. 심지어 우리가 죄인이 아니더라도 하나님과의 관계는 오직 은혜일 수밖에 없습니다. 나의 존재 자체가 그분의 은혜의 결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을 화목제물로 주셨기 때문에 전적인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은혜라는 것은 공짜로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선물로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믿음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지 그것에 대한 대가를 지불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구원받는 것은 믿음 이외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믿음을 선물로 주셨기 때문에 믿기로 작정된 자들은 다 믿을 수가 있습니다.
19세기의 유명한 전도자 무디가 탄광촌을 방문하여 책임자에게 구원에 대하여 설명했습니다. 그러자 책임자는 믿기지 않는 듯 말했습니다. "그거 구원이 너무 싸군요. 사실이라고 믿어지지 않습니다. 그저 믿기만 하면 된다니 값이 너무 싸단 말입니다. 뭔가 값이 좀 들어가야 할 것같습니다." 무디는 탄광촌 책임자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당신, 오늘 갱에 들어갔습니까?" "네" "얼마나 깊이 내려갔습니까?" "수백 피트나 되지요." "그럼 어떻게 내려갔습니까?" "그건 간단하지요. 버튼만 누르면 승강기가 올라오고 내려가니까, 그걸 타고 내려갔지요." "그것밖에 하신 일이 없습니까?" "그럼요. 석탄 회사가 이미 많은 돈을 들여 승강기를 설치해 놓았으니 저는 그저 승강기를 타고 버튼만 누르면 되는걸요." "바로 그것입니다. 선생이 승강기를 타고 버튼만 누르면 되듯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 상에서 대신 죽게 하셨으니 우리는 그저 그 공로를 믿기만 하면 됩니다. 이미 십자가의 승강기를 놓으셨으니 주님의 보혈을 믿는 믿음의 버튼만 누르시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놀라운 은혜는 너무 싼 것이 아니라 가장 고귀한 희생의 대가였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의롭게 되기 위하여 아무리 금식을 한다해도 그 행위가 우리 죄를 씻을 수가 없습니다. 어떠한 스님은 10년 동안 누워서 주무시지 아니하고 앉아서 주무시고 좋은 음식을 먹지 않고 고행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뜰 때 구원에 확신이 없어 나는 죽어서 가장 낮은 지옥으로 떨어진다고 탄식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마음속에 구원의 확신은 성령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힘으로 능으로 아무리 발버둥 친다고 해서 의롭게 되어 확신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2. 우리는 받은 구원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와 영광을 얻은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고 그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이며, 자신의 기쁘신 뜻대로 하신 일입니다.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요, 사단과 죄의 종노릇하였던 신분이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와 영광을 얻게 되었습니까? 4-5절에 보면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는 것이라”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따라,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을 인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영접하는 자가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적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절)
불란서 루불박물관에 전시된 조각품들중의 하나는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할 정도의 수작이라 합니다. 그런데 애석한 일은 누가 만들었는지 그 이름을 알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눈물겨운 전설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느 가난한 조각가가 헐벗고 굶주려 가면서도 피와 땀을 짜내는 노력의 결과로 걸작품을 완성시켰는데 하루는 갑자기 날씨가 추워지기에 조각품이 얼어 상할까봐 자기가 입었던 겉옷을 벗어 덮어놓음으로써 조각품은 보존이 되었지만 그는 얼어 죽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자기의 노력을 최대로 기울여 만들었기 때문에 자신의 목숨보다 더 소중하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창조물 중에 인간은 최고의 걸작품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범죄하고 타락해도 버릴 수가 없어서 하나님은 자기의 독생자를 희생시켜서 구원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최고의 걸작품으로 만드신 인간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누구든지 자신이 만든 것은 사랑합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비결, 그 구원을 비밀을 가장 잘 보여주는 탕자의 비유가 나옵니다. 둘째 아들은 그 유산을 받아서 팔아 짐보따리를 싸가지고 먼곳으로 아버지를 떠났습니다. 그곳에서 돈이 있으니까 허랑 방탕을 하며, 귀공자처럼 살았습니다. 잘 먹고 잘 입고 잘 마심으로 친구들과 아주 호탕하게 살았는데 그렇게 살고 난 다음에 모든 재산이 다 떨어졌습니다. 그는 모든 재산을 다 잃어버렸는데 설상가상으로 기근이 다가왔습니다. 그러니 사람들마다 살기가 힘들어졌는데 둘째아들은 간신히 일거리를 하나 얻는데 시골에 가서 돼지 치는 직장을 얻었습니다. 유대 나라에서는 돼지를 치는 직업이 가장 천한 직업입니다. 그 곳에 기근이 심하게 되자 돼지가 먹는 주엄 열매로 배를 채우며, 돼지와 친구가 되어 불행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둘째 아들이 하루는 생각하기를 “우리 아버지 집에는 양식이 많은데 나는 여기서 굶어죽는구나! 이제 갈 곳은 아버지 밖에 없지 않는가? 아버지께로 회개하고 돌아가자. 아버지가 받아주시면 좋고 안 받아주면 죽더라도 아버지 곁으로 찾아가자” 그렇게 결심한 후에 아버지가 살고 있는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때에 아버지는 멀리서 그 아들을 보자 뛰어 나갔고 그 아들을 얼싸안고 입을 맞추며, 환영해 주었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보자 왜 뛰어오는지 그 이유가 있습니다. 유대 나라에서는 부모를 배반하고 나간 자식은 돌로 쳐 죽여라는 것이 그 당시의 율법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아들이 회개하고 돌아온다는 소문이 쫙 퍼지면 동네 사람들이 그를 발견하고 돌로 쳐 죽일까 싶어서 그 아들 보호하기 위해서 먼저 뛰어 나간 것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놀랍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버지가 자식에 대한 사랑은 그렇게 큽니다. 그 아들이 오는데 뛰어나가서 그 아들을 붙잡아서 품에 안으니까 그 아들이 말하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범하였으니 이제 아들이라 일컬어 안줘도 좋습니다.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그 말을 듣고 아버지는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으시고, 그냥 그 아들을 끌어안고서 종들에게 외칩니다. “이 더러운 옷을 벗기고 제일 좋은 옷을 갖다 입혀라. 그의 손에 금가락지를 끼우라, 제일 좋은 신발을 신겨라. 그리고 집에 가서 제일 좋은 송아지 한 마리를 끌고 와서 잡아라. 잔치를 베풀어라 이는 내 아들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잃었다가 다시 얻었도다” 살찐 송아지를 잡아서 나누어 먹이면서 풍악을 울리고 페스티벌을 벌립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구원이며,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기를 원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한 것은 율법을 가지고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로 인하여 구원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비록 하나님 앞에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고 버림을 받아야 마땅하지만 회개할 때에 둘째 아들에게 행하신 것처럼 우리의 과거를 묻지 아니하시고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시고 영화롭게 해주실 것입니다.
3. 우리가 받은 구원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의 영광의 보좌에 앉게 되는 주인공이 된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단순히 죄문제를 해결해 주신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함께 하늘의 영광의 보좌에 앉게 되는 주인공이 되게 하십니다. 6절에 보면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여기서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함께 일으키시고, 함께 하늘에 앉히셨다”는 중요한 특징이 있습니다. 이러한 접두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께 행하신 이 세가지의 행위들이 동일하게 우리에게도 행하신 일들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사실은 그리스도에게만 일어날 일이 아니라 성도된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일어날 사건이라는 사실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마찬가지로 살리고 일으키고 하늘에 앉히실 것입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본문의 세 동사 “살리셨다. 일으키셨다. 앉히셨다” 가 모두 부정 과거형 동사라는 점입니다. 이는 우리를 구원과 부활, 그리고 하나님과 함께 보좌에 앉게 하는 일이 이미 이루어진 것이나 다름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구원받을 뿐만 아니라 부활과 승천 그리고 천상에서 보좌를 차지하는 영광스러운 존재가 될 것입니다. “또 보좌에 둘려 이십사 보좌들이 있고 그 보좌들 위에 이십사 장로들이 흰옷을 입고 머리에 금관을 쓰고 앉았더라”(계시록4:4)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벧전2:9)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을 때 우리 역시 다시 살아났을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을 때 우리 역시 그와 함께 하늘의 보좌에 앉게 될 것이라고 간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구원의 비밀이며,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수많은 성도들은 이 사실을 알지 못하고 그냥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이 사실을 성경을 통하여 이미 지식적으로 알고도 믿지 아니합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분명하게 알게 될 때 항상 기뻐할 수 있으며, 범사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명확하게 알기 위하여 부활하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지금 부활하신 예수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골3:1절에 보면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예수님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이것은 성경적으로나 신학적으로 정확한 표현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우편에 계십니다. 그곳에서 하나님과 대화하시고, 온 세상을 통치하시고 다스리십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이 의미하는 내용입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이 구원의 비밀을 더욱 깊이 깨닫고 알아갈 뿐만 아니라 이 은혜와 구원을 선물로 주신 하나님의 이름과 그의 영광을 위하여 살 수 있는 거룩한 성도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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