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야 산다(死則生)(마16:21-27)
모든 그리스도인의 최대의 관심은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입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더라도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고자 합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영광을 위해 모인 교회 안에는 아무 다툼이나, 문제나, 어려움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을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나 모든 기독교모임에서 문제가 될 때마다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은 모두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는 것이다"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 막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모습을 베드로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16장 16절에서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놀라운 신앙고백을 합니다. 이 고백이 있고 난 다음 21절에서 주님께서는 자신이 십자가 지실 것을 이야기하십니다. 이때 베드로가 말하기를 "주님 절대로 죽으시면 안됩니다. 제발 십자가 진다는 말씀은 하지 마십시오"라고 말을 합니다.
주님이 십자가 지시려 할 때 죽지 말라고 간청한 베드로가 과연 "누구를 위해 누구의 영광을 위해" 그 말을 했습니까?
그것은 분명 자신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영광을 위해 십자가 지시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어떠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시기를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이 말씀을 볼 때 마다 두려운 마음에 듭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간다고 말을 하고 있지만, 결과적으로 주님의 영광이 아닌 주님의 영광을 가로막는 사단의 종노릇을 할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왜 우리가 모든 것을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고 하는데, 그것이 진정으로 주님께 영광이 되지 않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가 24절에 있습니다.
"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베드로가 주님을 위하겠다고 했지만 결과적으로 그렇지 못하게 된 원인은 그가 자기를 부인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주님을 위해, 그 영광을 위해 살겠다 라고 하지만 우리가 자아를 부정하는 삶을 살지 아니하면 결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최대의 원수와 적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수와 적을 외부에서 찾으려 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 때문이고 합니다. 또 환경 때문이라고 합니다. 심지어 나를 넘어지게 하는 사탄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사실 엄밀하게 따져보면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삶을 살지 못하는 최대의 원수는 바로 우리 "자아" 라는 사실을 발견해야합니다.
/아무리 우리에게 외부적인 유혹과 극심한 고난이 있어도 우리 자아가 그것에 끌리지 않으면 됩니다. 나의 자아가 죽고 없어지면 나의 모든 문제는 해결되어지고, 교회 안에 모든 문제도 사라지고, 우리는 오직 주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정하고 나를 ?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25절에서 “2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한문으로 하면 생즉사(生則死) 사즉생(死則生)입니다. 이 말은 이순신 장군이 했던 말입니다. "살려는 자는 죽고 죽고자는 자는 산다"는 말입니다. 작년에 목회대학원에서 마태복음을 강의하시던 양용의 교수님께서 이 본문을 말씀하시면서 이순신이 당시에 왜군 중에서 천주교인들이 있었는데, 그들을 통해서 성경의 이 말씀을 인용하지 않았는가? 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온전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 수 있습니까? 내가 죽어야합니다.
여러분 어떻게 우리 가정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가정이 될 수 있습니까? 내가 죽어야합니다.
우리나라가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나라가 될 수 있습니까? 우리 모두가 죽어야합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가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교회가 될 수 있습니까? 그것도 우리 모두가 죽어야합니다.
그래서 따라서 해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죽어야 삽니다” 내가 죽어야 가정이 살고 나라가 살고 교회가 삽니다.
여러분 고등종교와 하등종교의 차이가 무엇인줄 아십니까? 하등종교는 내가 죽지 않고 남을 죽이게 하는 종교입니다. 그러나 고등종교는 내가 죽어서 모든 사람을 살게 하는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고등종교를 뛰어넘은 살아있는 종교입니다.
그래서 칼빈은 신앙생활의 첫 걸음을 자기 부정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또 여기 문제가 하나 더 있습니다. 모든 문제가 내 속에 있으며, "자아"라는 것이 사라지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데, 자아가 쉽게 죽지 않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나의 자아가 죽어질 수 있습니까?
우리는 많은 경우 나의 자아가 죽어지기 위해서 내가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가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자아를 죽이기 위해서 도를 닦으려고 노력합니다. 오욕칠정(五慾七情)과 백팔번뇌(百八煩惱)가 모두 자아에서 시작되니 도를 닦음으로 자아를 죽이라고 석자는 말합니다. 그런데 이런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노력해서 나를 죽이려고 해도 “십년공부 도루아미 타불”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자아를 죽일 수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어떻게 말씀합니까?
고린도후서5장 14절에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예수님이)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었은즉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의 자아)이(가) 죽은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그를 믿는 우리 자아도 그와 함께 죽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진정으로 예수님께서 여러분들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사실을 믿으십니까? 예
또 여러분들이 예수님의 십자가와 함께 옛 자아가 함께 죽었다는 사실도 믿으십니까?
만일 여러분들이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죽으신 것은 믿는데, 그와 함께 내가 죽었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면 여러분들은 모두 구원파입니다. 오늘 오후시간에 이것에 대해서 더 상세히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원파를 세상가운데 심판하고 계시는 것은 우리의 신앙가운데도 구원파와 같은 신앙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원파를 심판하심으로 오늘 한국교회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마지막으로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예수님만 십자가에 죽이시고, 나의 옛 자아가 더 고집스럽게 살아있게 하기 위함이 절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그와 함께 우리 모두를 죽이시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 사실을 온전히 믿을 수 있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이것은 십자가에서 이미 이루진 사실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날마다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사실을 믿고, 날마다 죽은 자로 살아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롬6: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자아)을 죄에 대하여는 (십자가에서)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여기서 너희가 십자가에서 너의 옛 자아가 죽은 자로 여긴다는 말이 중요합니다.
//이것을 쉽게 말씀을 드려보겠습니다.
술을 끊지 못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노력을 해도 술을 끊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술병을 감추었습니다. 그래도 끝까지 술을 찾아서 먹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했겠습니까? 그 지방에 있는 모든 술 공장을 다 폭파시켜서 없앴습니다. 이렇게 술 공장을 없애도 여전히 이 사람을 술을 찾습니다. 완전히 끊지 못합니다. 계속해서 술을 찾습니다. 그때 이 사람은 이제 무엇을 생각해야합니다. “아 이제 술 공장은 없어졌다. 나는 이제 술을 먹을 수 없다. 그래서 술을 먹고 싶지만, 이제는 자신이 술을 먹지 못하는 사람으로 날마다 여기며 살아가야겠구나”라고 합니다. 이렇게 술 공장이 없어진 줄 알고 자신이 이제는 술을 먹지 못하는 사람으로 여기며 살아갈 때 언젠가 그 사람은 완전히 술을 끊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옛 자아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음을 믿는다고 해서 우리가 즉각적으로 우리의 삶 가운데 옛 자아가 죽은 모습을 살아 갈 수 없습니다.
내가 주님과 함께 죽었다고 믿지만, 여전히 누가 나에게 좋지 않은 이야기를 하면 속이 상합니다. 또 누구와 말다툼을 하다보면 여전히 나의 옛 자아가 살아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를 어떻게 보느냐 내가 이래 봐도 옛날에 이런 사람이었어”라고 큰 소리를 칩니다. 그래서 여전히 아직 살아있는 자아를 내세웁니다.
//이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순간적으로 나의 옛 자아가 살아 있고, 나타나려고 할 때 무엇을 생각해야합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 그를 믿는 내가 그와 함께 죽었다”고 생각해야합니다. 그렇게 나의 자아가 주님과 함께 죽었음을 생각하고, 그 순간에 자신을 죽은 자로 여기며 살아가야합니다.
/외국인들이 공항 활주로에서 벗어나 우리나라를 보니까 온통 십자가가 있는 것을 보고 너무나 놀랐다고 합니다. 우리 동네만 하더라도 건물 하나가 지나면 십자가가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교회의 제일 꼭대기에 십자가가 서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십자가가 아래 있는 모든 것은 무덤입니다.
우리교회에 십자가가 서 있는 것은 “우리는 이제 세상에 대하여 죽은 자들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옛 자아에 대해서 죽은 자입니다” 라고 하는 뜻입니다.
그래서 날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이미 죽은 자로 여기며 살아가시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이미 죽은 자로 여기면서 날마다 자아를 죽이며 살아갈 때 어떤 일을 우리가 경험할 수 있습니까?
첫째는, 죽을 때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지난주에 이순신장군의 명량이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레미제라블 이후에 가장 성경적인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그 영화의 주제는 두려움의 극복이었습니다.
정유재란 때 우리나라의 수군이 완전히 전멸해서 배가 12척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일본군의 배는 330척이었습니다. 그리고 승리한 일본군이 수많은 양민을 학살하고 심지어 전리품으로 코까지 베어갔습니다. 또 거북선조차도 불타서 없었습니다. 그래서 모두가 일본군에 대해서 두려워 떨고 있을 때였습니다. 이때 이순신의 아들이 이순신에게 묻습니다. “아버지 물러서십시오, 과연 나라가 아버지를 위해서 해 준 일이 무엇입니까? 임금도 아버지를 믿지 않고 버렸습니다. 그러니 고향으로 돌아가십시오” 라고 말합니다. 그때 이순신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나라는 백성이고, 나의 충은 오직 백성을 향하는 것이다. 백성이 없는 나라가 어떻게 존재하겠는가?”고 합니다.
그러면서 이순신은 이렇게 말합니다. “330척을 가진 왜군들도 이순신 장군 나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큰 문제는 군사들의 두려움이다. 그런데 나는 군사들의 두려움을 이용하려고 한다. 군사들의 두려움을 잘 이용해서 극복하면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는 용기가 된다”고 했습니다. 그때 아들이 묻습니다. “아버지 어떻게 군사들의 두려움을 이용한다는 말입니까? 어떻게 두려움을 극복하고 용기를 가질 수 있습니까”라고 합니다. 그때 이순신이 이렇게 말합니다. “희생이다. 나의 희생이 두려움을 극복하게 할 것이다”고 합니다.
이 말을 처음에 아들은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아들이 먼 곳에서 330척과 싸우는 아버지를 보았습니다. 이순신은 혼자서 330척앞에 나갔습니다. 그러니까 다른 11척은 배들은 모두 두려워서 물러섭니다. 그때 옆에 있던 장수가 그 나머지 11척을 어떻게 할까요 합니다. 그러니까 이순신은 가만히 두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이순신장군이 제일 앞장서서 싸웁니다. 살고자는 자는 죽고 죽고자 하는 자는 살리라는 정신으로 앞선 자가 희생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러니까 그 모습을 보던 군사들이 두려움을 극복하고 이순신과 함께 용기 있게 나갑니다. 그리고 지켜보던 백성들도 이순신을 도와줍니다. 그 영화는 왜군 330척을 완전히 물리는 장면이 나오지 않습니다. 왜군들이 잠시 물러나고 난 다음에 두려움을 극복하고 이제 용기를 가진 군사들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영화는 끝이 납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 제일 무서운 사람이 누구인줄 아십니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죽기를 각오하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어떤 교사는 그 영화에 나오는 일본군을 보면서 그들을 우리를 위협하는 사탄으로 보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영화에 나오는 전쟁을 영적인 전쟁으로 보았다고 합니다.
여러분 사탄이 일본군의 330척과 같은 권세로 어떻게 우리를 위협합니까? 두려움으로 위협을 합니다.
우리를 두렵게 하는 사탄의 권세를 어떻게 이길 수 있습니까? 희생과 죽음입니다.
무엇보다 더 앞선 자의 희생과 죽음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장수이신 예수님은 제일 먼저 우리를 위해서 희생하시고 죽으시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도 그 예수님의 모습을 본받아서 앞선 자부터 희생과 죽음의 정신으로 나가야합니다. 그래야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두려움을 극복하고 믿음으로 인한 용기를 가지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때 나는 빠지고 나대신 누군가만 죽으라고 해서는 되지 않습니다.
나는 죽지 않고 나 대신에 누군가 만 죽으라고 외친다면 그 사람은 바리새인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은 죽지 않고 예수님만을 희생재물로 세우고 그만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했습니다. “목사가 죽어야 교회가 산다는 말이 있습니다. 장로가 죽어야 교회가 산다는 말이 있습니다. 교인이 죽어야 교회가 산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 죽지 않고 누구만 죽어야한다고 말하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물론 제일 앞선 자가 희생의 본을 먼저 보여 주어야합니다. 그러나 한 사람만 아닙니다. 누구만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예수님을 본받아서 죽어야합니다.
그럴 때 사탄과의 영적인 전쟁에서 두려움을 극복하고 승리하게 될 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둘째 죽을 때 부활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빌3:10,11).
우리가 죽으려 할 때 제일 두려운 것은 내가 죽으면 나는 어떻게 되지 라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죽으면 내가 사람에게 무시를 당하지 않을까 라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내가 죽으면 나의 모든 자존심이 짓밟힐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내가 죽으면 나의 미래는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죽어야 산다는 것을 아는데도 쉽게 죽지 못합니다.
이것에 대해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우리에게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빌3: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생략)-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라고 합니다.
여기서 보면 사도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을 할고자 하여 예수님의 죽으심을 본받아서 날마다 자아가 죽어지는 삶을 삶으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한다고 합니다.
빌립보서를 보면 이 부활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그를 높여주신 부활을 말합니다.
빌2장8절에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부활)”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십자가까지 낮아지게 하신 예수님을 살려주시고, 높여주신 것이 부활입니다.
사도바울이 어떻게 예수님을 본받아서 날마다 자신을 죽이는 삶을 살 수 있었습니까?
그것은 자신이 죽으면 하나님께서 그를 살려주시고 높여주실 것이라는 부활의 신앙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죽을 수 있습니까?
우리가 죽을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죽으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려주신다는 부활의 신앙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죽기까지 낮아지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높여 주시는다는 부활의 신앙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죽어도 살 수 있음을 참으로 믿으십니까?
죽으면 도리어 하나님께서 높여주심을 참으로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이 부활의 하나님을 믿음으로 마음껏 죽으시기 바랍니다.
죽으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나를 살려주시고, 높여주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날마다 나 지신을 죽임으로 날마다 살려주시고 높여주시는 부활을 경험하시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셋째, 죽을 때 하나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요12:32).
요12장32에서 “내가 땅에서 들리면(십자가에서 들려 죽으면) 모든 사람(모든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로) 내게로 이끌겠노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흩어진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을 하나로 예수님께로 불러 모으는 역할을 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죽을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명량이라는 영화가 며 칠되지 않았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폭발적인 관심을 가지게 하는 이유는 요즘 시대상을 반영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남북만 아니라 모든 부분에 있어서 서로 갈라져 있습니다. 모든 것을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리면서 서로 하나가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국민들이 바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순신과 같은 백성을 위해서 희생하는 지도자입니다.
여러분 만일 이 나라 정치인들만 있고 지도자들만 있고, 백성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아니라가 과연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교회를 건물로 비유한다면 이 교회에 기둥만 남고 벽들이 사라진다면 과연 교회가 온전하게 서 있을 수 있겠습니까?
오늘 날 하나님은 과연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고 계십니까?
국가로 말한다면 지도자는 백성을 위해서 존재해야합니다. 백성을 희생시키는 지도자가 아니라 자신이 희생해서 백성을 살게 하는 지도자를 하나님은 원하십니다.
또 교회로 말하면 성도를 희생시키는 지도자들이 아니라 앞선 자들이 먼저 희생하고 죽음으로 성도들을 하나로 따르게 하는 것을 하나님은 원하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서로 하나가 되자고 해도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 높이 들린 예수님의 십자가 앞으로 나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 십자가에서 우리 모두가 함께 죽을 때 비로소 그 십자가에서 우리가 비로소 하나가 될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네째, 마지막으로 죽을 때 하늘나라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게 되는 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나라입니까? 우리의 육신만 죽고 부활한 나라가 아닙니다. 우리의 모든 옛 자아가 완전히 죽은 나라입니다. “죽은 생선은 아프지 않다”는 말이 있습니다. “왜 우리는 자주 내가 상처를 받았다. 내가 제일 아프고 힘들다” 라고 합니까? 그래서 그 상처가 내게는 나를 찌르는 가시가 되고 타인에게는 그를 죽이는 칼이 됩니다. 언제까지 교회가 계속해서 이런 상처의 문제에만 메 달려야 합니까?
우리 모두가 이 시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서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다시 한반 더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날마다 나 자신을 죽은 자로 여기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지금이라도 나의 모든 옛 자아가 죽은 자로 살아가면 이 땅에서도 저 영원한 하늘나라를 경험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죽은 자는 자신의 문제로 더 이상 분노하지 않습니다. 죽은 자는 아무도 미워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함께 옛 자가가 죽은 자입니다.
또 예수님의 부활과 새롭게 살아난 자들입니다.
그래서 이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새로운 피조물로 살아난 자들로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나라의 꿈과 비전을 가지고 살아가시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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