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복음주의 지성 운동의 대표자 존 스토트 목사와의 대담
지난 3월 4일 오후 네 시 경 존 스토트 박사가 옥스퍼드시의 성 안드레 교회에서 열린 복음주의신학대회에서의 강연을 마치고 위클리프 홀로 들어섰다. 대담을 맡은 정성욱 교수는 지고 교수인 옥스퍼드대학의 알리스터 맥그래스 교수의 안내로 존 스토트 목사를 소개받고 대담에 들어갔다
신앙 배경과 이력
안녕하십니까? 스토트 목사님! 만나서 반갑습니다.
저 또한 반갑습니다. 정 목사님!
피곤하시지는 않으신지요? (78세의 노령을 의식한 물음이었다. 노령에도 불구하고 대단히 정정해 보였다)
괜찮습니다. 많이 피곤하지는 않군요.
자 이제 대담을 시작하겠습니다. 먼저 가족을 소개해 주시죠. 결혼을 안하셨으니까 부모님과 형제들 중심으로 소개해 주십시오.
저는 1921년 4월 27일에 태어났으며 저의 아버지는 의사였던 아놀드 스토트경입니다. 아버지는 런던 서쪽 끝의 해리가(Harley Street)에서 일하셨습니다. 저는 BBC 방송국과 옥스포드가의 상점들 가까이의 랑함 플레이스, 올 소울즈 교구에서 성장했습니다. 전쟁중에 몇 년 동안 그곳을 떠난 적이 있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과학적인 무신론자였습니다만 저의 어머니는 경건한 루터교인이셨습니다. 저는 어머니의 기독교적인 영향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신앙 배경이 궁금합니다. 성공회 배경에서 자라셨나요? 언제 예수님을 영접하셨는지 그리고 학교 이력에 대해서도 궁금합니다.
저는 케임브리지 대학의 트리니티 칼리지와 리들리 홀에서 신학 교육을 받았으며 1945년에 목사로서 랑함 플레이스, 올 소울즈 교회로 돌아왔습니다.
제가 예수님을 영접한 것은 1938년 제가 17세 되던 해 어느 주일 밤이었습니다. 저는 주님께 제 자신이 저의 삶을 뒤죽박죽으로 만들었음을 고백하고 저의 죄를 자백하였습니다. 저는 그리스도께서 저를 위하여 죽으신 것을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저의 삶 속으로 들어오시기를 요청하였습니다. 저는 다음날 일기에 이렇게 썼지요. “그리스도는 나의 안으로 들어오셨으며, 이제 내 안에서 통치하신다”라고요.
현재 세계복음주의협회(World Evangelical Fellowship)와 국제기독학생회(Inter Varsity Fellow ship), 그리고 현대 기독교 연구운동 등에 연관되어 활동하시는 것으로 아는 데 좀 더 설명을 해주십시오.
저는 정 목사님과 독자 여러분들이 세계복음주의협회가 구성되기 전에 세계복음주의연맹(World Evangelical Alliance)이 먼저 존재했음을 알고 있으리라 믿습니다. 사실 세계복음주의연맹은 영국복음주의연맹의 다른 이름이었습니다. 이 단체는 1846년에 조직되었습니다.
저는 1945년에 목사 안수를 받았고, 그 후 영국복음주의연맹에 가담하였습니다. 그러나 1951년 네덜란드에서 복음주의대회가 열렸고 그 기간 중 세계복음주의협회가 구성되었습니다. 그후 영국복음주의연맹은 자체 조직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저는 1951년부터 세계복음주의협회의 회원으로 활동해왔으며, 1951년에 그 단체의 교리적, 신앙적 기반을 닦는데 큰 역할을 감당하였습니다. 저는 또한 50여 년 전 국제복음주의학생회(Inter -national Fellowship of Evange -lical Student)의 발족 초기부터 참여해왔습니다. 저는 이 단체의 후원을 받아 전세계를 여행하고 여러 나라들을 방문한 바 있습니다.
정 목사님께서 현대 기독교 운동연구라고 부르신 것은 런던현대기독교연구소를 말씀하시는 것이죠? 그 연구소는 18년전인 1982년에 설립되었고, 저는 주요 설립자 중 한 사람입니다. 그 연구소의 초대 소장으로 일하였고, 그러던 중 65세가 되어 퇴직하면서 명예총재직을 맡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은 어디에서 주로 활동해 오셨습니까? 영국입니까? 나머지 시간은 주로 어느 대륙 어느 나라에서 보내셨는지요? 과거와 현재를 포함해서 말씀해 주시죠.
저는 1945년에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그후 약 5년간은 교구의 부목사(curate)로 사역하였습니다. 섬겼던 교회는 런던의 중심부의 랑함플레이스에 있는 올 소울즈 교회(All Souls Church)였습니다.
1950년 담임 목사님께서 돌아가셔서 제가 후임으로 담임목사(rector)가 되었습니다. 올 소울즈 교회에서 1950년부터 1975년까지 25년간 담임목사로 사역하였습니다. 그후 저는 명예담임목사가 되었고, 지금까지 세계 여러 곳을 다니며 사역하고 있습니다. 결국 55년간 사역을 해온 셈입니다.
올 소울즈의 담임목사가 된 지 2년 후인 1952년 저는 처음으로 대학복음화대회를 인도해달라는 초청을 받았습니다. 대회가 처음 열린 곳은 저의 모교인 케임브리지대학이었습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1952년 부터 1977년까지 저는 전세계에 걸쳐서 50회의 대학복음화대회를 인도하였습니다. 1956년에는 미국과 캐나다에서, 그리고 나서 아프리카, 아시아, 호주, 뉴질랜드 등 전세계에서 대학 복음화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지금은 나이가 너무 많기 때문에 대학복음화대회 인도 초청은 거절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나이 탓으로 젊은 대학생들과 의사소통이 쉽지 않군요. 그러나 여전히 세계 곳곳을 방문하며 사역하고 있습니다. 두주 전에는 3주간의 동아프리카 사역을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특히 우간다와 케냐 지역에서 사역을 했습니다. 그리고 다음 주 목요일부터는 미국 지역을 3주 동안 순회하며 사역할 계획입니다. 저는 요즈음 1년중 6개월은 올 소울즈 교회의 목회에 협력하는 일에 보내며, 3개월은 세계순회사역에 그리고 3개월은 연구와 저술에 보내고 있습니다.
스토트 목사의 경건의 시간 그리고 독신 생활
요즈음 우리 한국교회에서는 큐티(경건의 시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날마다 성경을 어떻게 읽고 묵상하고 계신지요?
저는 약 30년 전에 저에게 어떤 매일 성경읽기표를 소개해 주신 로이드 존스 목사님께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성경읽기표는 1842년에 로버트 머리 맥체인 목사가 고안해낸 것입니다. 맥체인 목사님은 그의 회중들이 성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통독하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 성경읽기표를 만들어 회중들이 1년에 구약성경을 한 번, 신약성경을 두 번 통독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이 성경읽기표에 따라 성경을 읽게 되면 매일 네 장 정도의 성경을 읽게 됩니다. 예를 들어 매해의 첫날인 1월 1일에는 창세기 1장, 에스라 1장, 마태복음 1장, 사도행전 1장을 읽게 되죠. 이러한 방식은 창세기를 계속 읽어 내려갈 때 생길 수 있는 지루함을 방지해 주는 좋은 방식입니다.
특히 새해 첫날 읽게 되는 네 장은 성경에 나타난 네 개의 큰 시작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창세기 1장은 우주와 역사의 시작을, 에스라 1장은 바벨론 포로로부터 해방된 이스라엘의 새로운 시작을, 마태복음 1장은 예수님의 탄생과 사역의 시작을, 사도행전 1장은 교회의 시작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죠. 이런 방식으로 성경을 읽게 되면 전체 성경에 나오는 중요한 사건과 주제들을 한꺼번에 조망할 수 있게 되는 유익이 있습니다.
저는 맥체인식 성경읽기표를 특히 모든 목회자들에게 강력하게 추천합니다. 왜냐하면 목회자들은 성경 전체를 잘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업에 종사하는 그리스도인이나 일반 성도들에게는 좀 부담이 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목회자들에게는 아주 좋은 성경읽기 모델이 될 것입니다.
조금 더 개인적인 질문을 드리고자 합니다. 박사님께서는 사도 바울처럼 독신 생활을 통해 전적으로 주님을 위해 살아오셨습니다. 독신 생활이 주님과의 교제를 더욱 깊게 해 주었는지요? 가톨릭과 같이 주님께의 헌신을 위한 독신 헌신 제도를 복음주의에서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제 생각에 독신 생활이 가져다 주는 제일 큰 유익은 ‘자유로움’일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7장에서 사도 바울이 말씀한 것처럼 독신으로 살게 되면 아내와 가족의 일보다는 주님의 일에 더 큰 관심을 기울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사역자로 하여금 자신의 사역에만 전념할 수 있게 해줍니다.
또한 저는 고린도전서 7장에서 가장 중요한 구절은 7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으니 하나는 이러하고 하나는 저러하니라” 따라서 결혼하는 것도 하나님의 은사이며, 독신으로 사는 것도 하나님의 은사입니다. 양쪽 다 하나님의 은사인 것입니다. 우리는 각자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잘 분별해야 합니다.
저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성직자 독신 제도를 반대합니다. 왜냐하면 그 제도는 강제적이고 의무적인 독신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9장 11절에서 “사람마다 이 말을 받지 못하고 오직 타고난 자라야 할지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독신은 어떤 사람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사입니다. 한두 해 전에 IVF 출판부에서 이 문제에 관한 상당히 좋은 책이 출간되었습니다.
그 책의 제목은 「독신의 문제」(The Single Issue)이며, 중국계인 알버트 슈(Albert Hsu)가 저술했습니다. 그 책의 마지막 부분에 부록이 있는데, 그 부분은 제가 썼습니다. 저는 그 부록에서 알버트 슈가 제기한 독신에 대한 여러 문제들에 대한 답변을 제시했습니다. 그 책을 참조하시면 많은 유익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7장에서 독신을 하나의 은사로 규정하고 있으므로, 저는 가톨릭의 강제적이고 의무적인 독신 제도가 신약성경의 가르침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믿습니다. 또 한 가지 좋은 증거는 디모데전서 3장과 디도서 1장에 나오는 장로와 감독의 자격 요건 중에, 그들이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자기 집을 잘 다스리는 자여야 한다는 조항이 있습니다. 이것은 초대교회때부터 목회자들의 결혼 생활을 전제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목회자들의 독신은 예외적인 것이지, 의무적인 규범이 될 수 없습니다.
대표적인 저서들
너무 명쾌한 설명을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자 그럼 이제 목사님의 현재까지의 사역에 대한 좀더 상세한 질문들을 드리겠습니다. 지금까지 많은 집필을 하셨는데 인생의 어느 시기에 어떤 책을 어떤 동기로 집필하셨는지 소개해 주셨으면 합니다. 또 앞으로의 집필 계획에 대해서도 들려주시면 좋겠습니다.
저는 몇 권의 책을 집필했는지 세어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쓴 저서의 숫자를 생각하는 것은 다윗이 인구 조사를 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교만하게 범죄한 것과 같은 행위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저의 개인 비서에 따르면 지금까지 40에서 45권의 책을 저술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중 한 권은 영어로는 출판되지 않고, 한국어로만 출판되었습니다. 그 책은 제가 한국의 의과대학생 수련회에 가서 강의한 내용인데, 한국의 IVP에서 출판했고, 영국에서는 출판되지 않았습니다.
제가 쓴 책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십자가」(The Cross of Christ)가 가장 중요한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다른 어느 책보다도 그 책에 저의 영혼과 마음을 쏟아 부었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가 우리 기독교 신앙의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제 자신의 신앙의 중심에 십자가가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종종 “내가 만일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인도되지 않았다면 나는 하나님을 결코 믿을 수 없었을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의로운 방식으로 우리와 같은 죄인을 의롭다고 인쳐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가장 중요한 신학적 저술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독교 윤리에 관한 저술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현대 사회문제와 기독교적 답변」(Issues Facing Christians Today)입니다. 그 책은 현재 제3판이 출간되었습니다. 그리고 목회적으로 가장 중요한 책은 「현대 교회와 설교」(I Believe in Preaching)입니다. 또한 성경 강해중에서 가장 중요한 책은 Bible Speaks Today시리즈를 통해 출간된 「로마서 강해」, 「산상수훈 강해」, 「사도행전 강해」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목사님의 BST시리즈 「로마서 강해」를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특별히 로마서 7장에 대한 목사님의 강해는 탁월했습니다. 목사님께서는 7장을 강해하시면서 7장에는 성령님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는데 반하여, 8장에는 반복적으로 성령님이 언급되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셨습니다. 즉 성령님의 인도를 받는 삶과 그렇지 않은 삶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주신 것이죠. 그것이 제게는 많은 유익이 되었습니다.
목사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기쁩니다. 저는 아직도 로마서 7장이 강해하기 어려운 본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언급할 만한 책이 있다면, 그것은 최근 출간된 「복음주의의 진리」입니다. 아마도 이 책은 저의 마지막 저술이 될 것 같습니다.
저는 이 책을 제가 복음주의 교회에 남겨주고 싶은 저의 마지막 유산이라고 부르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이 책의 내용은 제가 60년 이상 동안의 신앙생활을 통해 가장 깊이 깨닫게된 복음의 정수를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 또한 목사님의 「복음주의의 진리」라는 책을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목사님께서는 그 책에서 우리가 믿는 복음의 삼위일체적 성격과 차원을 강조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하나님 아버지의 구원 계획,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 그리고 성령님의 지속적인 구원 적용 사역을 포함한 총체적인 은혜의 소식이라는 목사님의 주장은 21세기를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이해하고 적용해야 하는 진리라고 믿습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기쁩니다. 물론 제가 저술한 책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책은 「기독교의 기본 진리」(Basic Christianity)입니다. 이 책은 지금까지 50여 나라의 언어로 번역이 되었고, 200만 권 이상 보급된 것 같습니다. 저는 이 책이 다시 쓰여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초판이 1958년에 나왔기 때문에 좀 오래되었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비하심으로 이 책을 여전히 사용하시고 계십니다. 한 권 더 언급하고 싶은 책은 「현대를 사는 그리스도인」(The Contemporary Christian)입니다. 왜냐하면 「현대 사회문제와 기독교적 답변」은 기독교 윤리에 관한 책인 반면, 「현대의 그리스도인」은 기독교 교리와 제자도에 관한 책이기 때문입니다.
앞으로의 저술 계획은 어떠신지요?
정 목사님, 혹시 최근에 제가 쓴 새(Birds)에 대한 책을 아십니까? 저는 상당히 열정적인 조류 관찰자이며 동시에 조류 사진작가입니다. 한국의 조류 관찰자 중에 윤무부 교수라는 분이 있습니다. 이름이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맞는 것 같습니다. 윤 교수님께서는 친절하게도 한국의 조류 관찰을 위해 저를 두 번이나 안내해 주셨습니다. 그때 찍은 사진을 담은 책이 한국의 IVP에서 한국어로 출판 되었습니다.
이 책은 칼라 판이며, 제가 찍은 150여 장의 사진들을 담고 있습니다. 각 장마다 우리들에게 주는 교훈을 담고 있지요. 그래서 이 책의 제목은 「새: 우리의 선생님」(Birds: Our Teachers)입니다. 이것이 일반은총 영역에 관련된 저의 저술중 대표적인 것입니다.
목사님께서 저의 미래 저술 계획에 대하여 물으셨는데, 목사님께서는 ‘현대기독교에 대한 런던강좌’(London Lectures in Con temporary Christianity)에 대하여 알고 계십니까?
예, 그렇습니다. 런던 강좌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 런던 강좌는 매년 한 번씩 열립니다. 강좌의 내용 또한 출판됩니다. 올해는 새로운 천년의 시작이기 때문에, 런던현대기독교연구소에서 제게 강좌를 부탁했습니다.
강좌의 주제는 새 천년을 맞이하면서 예수님에 대하여 다시 생각해보는 것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저는 이 기회를 통해 ‘비교할 자가 없는 예수 그리스도’(The Incompar able Christ)라는 제목의 강연을 네 차례에 걸쳐서 할 예정입니다. 이 강좌는 내년에 출판될 것입니다.
멘토에 대하여
확고한 복음주의자로 사역해오셨는데, 목사님의 복음주의 신앙에 영향을 준 멘토들이 있다면 누구를 들 수 있을까요?
제가 먼저 언급해야 할 분은 저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신 분입니다. 그 분은 내쉬 (E. J. H. Nash) 목사님이십니다. 내쉬 목사님은 특별한 비전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것은 어린 중고등학생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분은 제가 다니는 학교에 방문하여, 복음을 전했습니다. 저는 그분의 입술로부터 처음으로 그리스도와 구원에 대한 복음을 들었습니다. 바로 그날 저는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갔고, 주님을 영접했습니다. 내쉬 목사님은 제가 회심한 후 저에게 매주 한 번씩 5년 동안 양육의 편지를 보내주셨습니다. 그것은 정말로 헌신적인 신앙 양육의 모습이었습니다. 그 편지들의 내용은 때로는 격려를, 때로는 가르침을, 때로는 책망을 담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저는 상당히 제멋대로 하는 어린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내쉬 목사님은 저를 위해 매일 기도해 주셨습니다. 따라서 제가 그 분께 진 빚이 얼마나 되는가는 제가 하늘에 올라가서야 알게 될 것입니다. 바로 이 내쉬 목사님이 저의 고등학교 시절과 대학 시절에 주된 멘토였습니다.
내쉬 목사님 외에 다른 멘토들이나 영향을 받은 분이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예를 들어 칼빈 같은 좀더 클래식한 신학자들도 좋습니다.
물론 저는 존 칼빈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더불어 언급하고 싶은 분은 17세기 영국의 청교도인 리차드 백스터(Richard Baxter)입니다. 그는 1665년에 「개혁 교회의 목사」(The Reformed Pastor)라는 책을 저술했습니다. 저는 제가 목사 안수를 받기 직전 주간 동안 이 책을 읽었습니다. 이 책은 저에게 큰 영감과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19세기 영국 성공회 감독이었던 라일(J. C. Ryle)이 있습니다. 라일은 복음주의자였습니다. 라일은 1880년부터 1900년까지 리버풀 지역의 감독이었습니다. 저는 그 분이 저술한 모든 책을 읽었습니다. 특히 거룩함(holiness)에 대한 그의 책 「거룩에 대한 개혁파 교리」(The Reformed Doctrine of Holiness)를 감명깊게 읽었습니다. 미국의 벤자민 워필드도 있습니다. 저는 그가 쓴 「계시와 영감」(Revelation and Inspiration)을 읽고 성경관을 확립하였으며, 성경 중심 기독교 신앙의 기초를 닦았습니다. 이 외에 다른 여러 사람들을 언급할 수 있겠지만 이 정도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의 사역에서 가장 획기적인 사건들은 어떤 일이었는지요? 1974년 로잔언약문 작성에 참여한 일이었을까요?
(웃음). 저는 그렇게 생각지 않습니다. 제가 먼저 언급해야 할 사건은 1950년 제가 29세의 젊은 나이에 올 소울즈 교회의 담임목사가 된 것입니다.
저는 그때 매우 젊었고, 또 목사 안수를 받은지 4년밖에 되지 않은 신출내기였습니다. 그런 제가 런던 중심에 있는 큰 교회의 담임목사가 된 것은 의심할 바 없이 획기적인 일이었습니다. 저는 미숙한 29세의 나이에 교회의 지도부로 끌어 올려졌고, 그 일을 잘 감당해야 했습니다.
2년 후인 1952년 저는 처음으로 케임브리지대학에서 대학복음화대회를 인도하였습니다. 수천 명의 학생들이 매일 밤 그 집회에 참석하였고,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로 돌아왔습니다. 그 이후 저는 대학복음화대회의 주강사로서 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런던대학과 옥스포드대학을 포함한 전세계의 대학들로부터 초청을 받아 대학복음화대회를 인도하였습니다. 그 일 역시 획기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미국 일리노이주에서 열리는 어바나학생선교대회(The Urbana Student Missionary Convention)를 들 수 있습니다. 3년마다 IVF의 주관 아래 미국 일리노이주 어바나에서 학생선교대회가 열립니다. 요즈음에는 만명이상의 학생이 모이는 거대한 대회가 되었습니다. 저는 1964년부터 다섯 차례에 걸쳐 이 대회에 매일 아침 성경강해 강사로 초청되어 학생들을 대상으로 성경을 강해하였습니다. 각 대회 때마다 4-5회씩 강해를 하게 됩니다. 저는 1964년, 67년, 70년, 73년, 76년대회에 계속 초청되었습니다. 이 대회에서 매일 아침마다 만여명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성경을 강해하는 것은 대단한 특권이었습니다.
한 가지 더 언급할 것은 1967년 킬리(Keele)에서 열린 전국 성공회 복음주의자 대회(National Evangelical Angl ican Cong ress)입니다. 제1차 킬리대회에서는 1천여 명이 모였고, 10년 후인 1977년 노팅햄대회에서는 2천여 명이 모였습니다. 이 두 대회는 참으로 획기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두 대회가 있기 전 영국 성공회 교회 내에서 복음주의운동은 그 위치를 견고히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두 대회 기간 중에 이러한 점들을 회개하였고, 복음주의자들이 영국 성공회 내에서 좀 더 가시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며 복음을 충실히 전할 것을 결단하였습니다. 동시에 교회를 넘어 사회에서도 복음주의자들의 위치를 확고히 할 것을 다짐하였습니다.
우리 복음주의자들은 국가와 세계에 대하여 우리가 책임이 있음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이 일이 1967년에 이루어졌고, 7년 후인 1974년 스위스 로잔에서는 전세계의 복음주의자들이 함께 모여서 복음주의 교회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헌신을 다짐하게 된 것입니다. 저는 사회적 책임에 대한 복음주의자의 새로운 인식이야말로 획기적인 사건이었다고 믿습니다.
복음주의자의 사회적 헌신은 20세기 초반에 미국의 월터 라우쉔부쉬(Walter Rauschenbush)가 제창했던 ‘사회복음’(Social Go spel)과 전혀 다르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라우쉔부쉬는 결정적인 실수를 저질렀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사회주의 사회를 동일시하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우리 복음주의자들은 성경적인 복음이 사회에 던져줄 수 있는 의미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는 것이지, 사회주의적 복음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분명히 해야합니다.
런던현대기독교연구소를 어떤 목적으로 만드셨는지요? 이 연구소의 사역과 성격을 듣고 싶습니다.
이 연구소의 주된 프로그램은 10주간의 코스로서 ‘현대세계에 사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으로 불립니다. 이 프로그램은 매년 9월에서 12월까지 열리며, 전세계에서 약 50여 명이 참가합니다.
저는 성경의 권위와 해석에 대한 강의를 비롯하여, 현대 세계의 성격, 현대 세계에서의 제자도와 선교 등에 관한 강의를 해오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인과 현대 세계 사이의 다리 놓기 작업을 하는 것입니다. 이 사역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20대 젊은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4주 코스도 있습니다. 이 코스는 하나님과 세계에 대하여 열린 마음을 가진 세계 도처의 젊은이들을 위한 것입니다. 매달 50여 명 정도의 젊은이들이 참가하고 있으며, 큰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목사님께서 생각하시기에 런던 연구소는 프란시스 쉐퍼 박사가 일으켰던 라브리 운동과 유사점이 있는지요?
예, 그렇습니다. 저는 프란시스 쉐퍼 박사를 개인적으로 알았습니다. 그는 저보다 10세 가량 나이가 많았습니다. 저는 쉐퍼 박사를 만나기 위해 스위스의 라브리 공동체 본부를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라브리 운동과 런던 연구소의 긴밀한 관계는 기구적 차원이 아닌 개인적 차원에서 형성되었습니다. 라브리 교수 출신인 제람 바즈는 미국 미주리의 세인트루이스에 있는 카베넌트칼리지(Covenant College)에서 프란시스 쉐퍼연구소를 이끌고 있습니다. 제람 바즈는 원래 영국 사람입니다. 그는 미국으로 가기 전 영국 라브리에서 사역할 때 런던연구소의 자문위원으로도 활동했습니다. 그래서 수년 동안 런던 연구소에서 여러차례 정규 강의를 했습니다.
그리고 역시 영국 라브리 교수 출신인 리차드 윈터 박사도 우리 연구소에서 강의한 바 있습니다. 현재 그는 미국 세인트루이스에서 사역하고 있습니다. 영국 출신으로 미국에서 활동하는 사회학자 오스 기니스(Os Guiness) 역시 런던 연구소의 자문위원이었고 또 강의를 한 바 있습니다.
결국 강의자들 사이에 상호관계가 있었고 또 강의가 중첩되는 부분이 있었군요.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복음주의적 에큐메니칼 정신을 실현한 것같이 보이는군요.
예, 그렇습니다. 그리고 주말마다 세미나를 열 때, 영국 라브리 운동에 속한 몇 분을 함께 모셔서 강의를 듣습니다. 이것은 정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복음주의적이면서도 에큐메니칼한 정신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런던연구소와 같은 취지의 연구소들이 현재 전세계 20여 곳에 이미 설립되었거나 설립중에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간다에 이미 비슷한 연구소가 있습니다. 지난 3주간 저는 이 연구소를 방문하고 왔습니다. 이 연구소의 이름은 기독교적영향연구소(Institute for Christian Impact)입니다. 이 곳 외에 잠비아와 짐바브웨 등지에도 비슷한 연구소가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연구소들이 함께 동역할 수 있는 협의체를 구성할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목사님께서는 세계 IVF의 부회장으로 섬기고 계신데 IVF를 통해 본 세계 학생 복음주의 운동의 현황과 전망은 어떤지요? 어떤 나라에서 학생 복음주의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습니까?
사실은 국제 복음주의 학생회(International Fellowship of Evangelical Student)가 국제적인 명칭입니다. 저는 다년간 이 단체의 부회장으로 섬겨왔습니다. 또한 영국의 IVF 그룹인 대학간 그리스도인 연합(University-College Christian Fellowship)의 회장직을 세 차례나 수행하였습니다.
국제 복음주의 학생회에 관해서 말한다면, 저는 최근의 긍정적인 발전에 깊은 인상을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50년 전에 저희들에게 하나의 비전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세계 각국에서 자율적인 복음주의 학생 운동이 일어나야 한다는 비전이었습니다.
여기서 ‘자율적’이라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개념입니다. 각국의 복음주의 운동이 자율적일 때만 미국이나 영국 등과 같이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본부로부터 통제를 받는 비능률성을 벗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기본적인 교리나 풍토 등은 함께 공유해야 되겠지요. 하지만 각국의 복음주의 운동은 각각의 집행부에 의해서 관리되며, 철저한 자율성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50년 전에 가졌던 우리의 비전이 지금 실현되고 있는 것을 보면서 저는 감동을 받습니다. 많은 제3세계의 복음주의 지도자들이 이러한 비전을 가지고 국제 복음주의 학생회를 통해 훈련을 받고 있습니다. 현재 학생 복음주의 운동이 가장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는 나라는 나이지리아입니다. 수천 명의 학생들이 매년 열리는 연례 수련회에 참가하고 있습니다.
사실상 30여 개의 이슬람 국가를 제외한 모든 나라에서 복음주의 학생 운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 말은 175개 국가에서 학생 복음주의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놀라운 일임에 틀림없습니다. 50년 만에 이렇게 크게 성장한 것은 정말로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요 은혜입니다.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성경 해석에 대하여
이제 목사님의 성경 해석에 대하여 질문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기독교 기초 교리 입문서와 아울러 많은 성경 주해를 집필해오셨습니다만, 목사님께서 특별히 애착이 가는 성경이나 특정 구절이 있는지요? 그리고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저는 성경 66권 중에서 특별히 애착이 가는 성경이 없습니다. 저는 66권 전부를 좋아합니다. 만일 제가 좋아하는 성경 구절을 말해 보라고 강요하신다면, 저는 갈라디아서 6장 14절을 꼽고 싶습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이 구절은 저의 책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주요 본문 구절이었고, 또 저는 십자가가 기독교 신앙의 중심이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이 구절이 특별히 애착이 갑니다.
목사님의 대답은 의외입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요한복음 3장 16절이나 마태복음 11장 28절 등을 꼽을 것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일동 웃음). 비록 우리는 목사님의 성경해석학에 익숙하지만, 한 번 더 묻도록 하겠습니다. 성경 해석에 있어서 목사님의 접근 방법은 무엇인지요? 그리고 어떤 참고 자료들을 이용하시며, 통찰이나 적용점은 어떻게 찾아내시는지요?
제가 「성경연구 입문」(Underst anding the Bible)에서 논의한 것처럼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서는 세 가지 기본 원리가 있습니다.
첫 번째의 원리는 단순성(simplicity)의 원리입니다. 그것은 성경 본문의 자연스러운 의미를 찾아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화적 해석을 거부하며, 공상적인 해석을 거부합니다. 오히려 단순하며, 분명하며, 자연스러운 의미를 추구합니다. 물론 이 자연스러운 의미가 비유적인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의 가장 자연스러운 의미를 찾아내야 합니다. 이것이 단순성의 원리입니다.
두 번째의 원리는 역사성(historicity)의 원리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어떤 역사적 맥락에서 말씀하셨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어떠한 말씀도 하나님께서는 문화적 진공 상태에서 말씀하시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모든 말씀은 어떤 문화적 컨텍스트에서 전달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던 과거의 역사와 문화로 되돌아가 이를 신중하게 고려해야 합니다.
세 번째는 조화(harmony)의 원리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나님 당신과 모순되는 것을 말씀하시지 않는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성경 본문을 마음대로 조작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이 성경 스스로를 해석할 수 있게 함으로 성경 내용의 조화로운 해석을 추구합니다.
성경 해석의 참고 자료를 예로 들면 무엇보다 헬라어 신약성경이 포함될 것입니다. 또한 성경어구 사전(concordance)을 참조합니다. 저는 고전적인 성경 주석류를 참고합니다. 하지만 그것들을 참조하기 전에 스스로 본문에 대한 묵상을 먼저 하고나서 다른 참고 자료들을 이용합니다. 그리고 헬라어 사전 역시 자주 참조합니다.
성경 해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시간을 많이 투자하라는 것입니다. 통찰과 적용점을 얻는 길은 얼마나 많은 시간을 들여 본문을 묵상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반복해서 읽고 또 읽고 또 읽다보면 본문이 이해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지배적인 해석이 떠오를 때까지 우리는 읽고 또 읽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목사님께서는 누구의 성경주석에서 가장 큰 도움을 받으셨습니까?
저는 특정한 어떤 개인의 주석으로부터만 도움을 받지는 않았습니다. 여러 사람들로부터 도움을 받았죠. 갈라디아서의 경우 루터의 「갈라디아서 주석」이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스위트 교수의 「마가복음 주석」, 웨스커턴의 「요한복음 주석」, 리차드 롱거네커의 「사도행전 주석」 등 다양한 주석가들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오늘날 성경을 해석하고, 설교하며, 강해함에 있어서 가장 큰 어려움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가장 큰 어려움은 의심할 바 없이 문화적인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성경 해석에 있어서 세 가지 문화가 한꺼번에 연관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먼저 특정한 앵글로색슨 문화의 배경을 가지고 성장한 ‘내’가 있습니다. 둘째로, 성경은 고대 근동과 헬라-로마문화권에서 기록되었습니다. 셋째로, 그리고 ‘나’는 제3의 문화권에서 성장한 다른 사람들에게 성경의 내용을 전달해 주어야 합니다.
이렇게 세 가지 문화가 한꺼번에 충돌하고 있습니다. 성경 해석에 있어서 우리는 이 사실을 좀 더 심각하게 고려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 ‘문화적 전이’ (cultural tran- sposition)라는 개념을 도입하였습니다. 그래서 런던 연구소에서는 학생들에게 ‘문화적 전이’를 가르칩니다.
여기서 ‘문화적 전이’라는 것은 다음과 같이 이해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의 한 단락을 만나게 될 때, 우리는 이 단락의 내용이 당시의 특정한 문화 상황의 컨텍스트에서 기록되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께서 이 본문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밝혀내야 합니다. 이것이 일차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정당한 일입니다.
그 다음에 우리는 이 본문을 다른 문화의 상황에 재맥락화 (re- contextualise) 하여야 합니다. 요한복음 13장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내용을 예로 들어 봅시다. 당시 유대 문화권에서 발을 씻기는 행위는 집을 방문한 친구나 손님들에 대한 하나의 사회적으로 통상화된 예의였습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집을 방문하게 되면 그 집의 노예나 하인들이 손님의 발을 씻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현대 문화권에서 우리는 맨발로 걸어다니지 않습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집에 노예급에 해당하는 하인이 없으며, 길거리 역시 훨씬 깨끗할 뿐 아니라 자동차나 여타 교통 기관을 이용해서 여행을 합니다. 따라서 발을 씻기는 행위가 필요없으며 실제로 그렇게 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친구의 집을 방문하면 집주인은 우리가 발을 씻을 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단지 ‘손을 씻으시겠습니까?’라고 물어 옵니다. 결국 문화적 상황이 완전히 바뀌어져 버린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요한복음 13장을 성경에서 제거해야 할까요? 이 본문이 완전히 다른 문화적 상황에서 기록되었기 때문에 나에게 주는 교훈은 없으며 따라서 필요없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우리는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또 다른 극단이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상상력을 사용하지 않는 딱딱한 문자주의’ (wooden and unimaginative literalism)라고 부릅니다. 이러한 태도를 가진 사람은 방문한 손님들에게 ‘신발을 벗으십시오 그러면 발을 씻어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해야겠죠.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예수님께서 무슨 교훈을 주시려고 하는가에 초점을 예수님께서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요13:15)고 하신 말씀의 본 뜻을 이해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서로 섬겨야 한다는 것이며, 사랑하는 자는 그것이 아무리 천하고, 불결하고, 힘든 일일지라도 섬김의 일을 감당해야한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요약하면 오늘날 제가 친구의 발을 씻지 않는다 하더라도 친구의 신발을 기쁘게 씻어줄 수는 있으며, 친구의 집에 있는 화장실을 즐거운 마음으로 청소해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행해야 할 바른 섬김은 더럽고 추한 일도 마다하지 않는 자세에서 비롯됩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말씀드린 ‘문화적 전이’의 실례입니다. 이것은 성경 본문이 우리에게 말하는 의미(meaning)는 그대로 보존하되 이 교훈을 실천하는 문화적 형식(cultural form)을 현대 문화에 맞추어 변형시키는 것입니다.
목사님께서는 오늘날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는 현대적인 이슈를 성경적인 관점에서 분석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많은 저술들을 내셨습니다. 목회자나 평신도들에게 이러한 일에 대한 조언을 주신다면?
이 문제는 사회윤리적 이슈에 해당하는 것이군요. 저는 여기서 원리들(principles) 과 정책들 (policies)을 구분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영국 성공회 대주교였던 윌리엄 템플(William Temple)이 제안한 것입니다. 저는 템플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으며, 특히 원리와 정책에 대한 그의 구분을 긍정적으로 평가합니다.
목회자들은 원리에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반면에 목회자들은 사회적 이슈에 대한 법률의 개혁을 위해 여러 가지 정책을 개발하는 일을 정치가들에게 맡겨야 합니다.
실업이라는 문제를 예로 들어 봅시다. 실업 문제는 거의 모든 나라에 있어서 심각한 문제가 되어 있습니다. 목회자들은 실업 문제에 대하여 설교해야 합니까? 누군가가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입니다. 저의 대답은 ‘예’ 이기도 하며 ‘아니오’ 이기도 합니다.
노동에 대한 성경적인 철학을 개발하는 것은 우리 목회자들의 책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노동이 하나님께서 아담을 에덴동산에 두신 이래로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하나님의 창조 목적의 일부라는 것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에덴 동산을 지키고 관리함에 있어서 아담의 협력을 요구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 목회자들의 임무는 실업이 매우 심각한 사회적 악 (social evil)이라는 것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회중들 가운데 정치인들이 있다면 그들이 이 문제를 반드시 해결해야한다는 강력한 권고를 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 정치인들과 경제인들을 일으켜 주시고, 그들이 사회의 여러 가지 문제들을 해결하는 일에 헌신하게 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정치와 경제의 문제들을 적절한 정책을 통하여 해결하는 일은 목회자들의 일이 아니라 기독교적 신앙과 철학을 가진 정치인과 경제인의 일인 것입니다. 목회자들은 기독인 정치인들과 경제인들이 사회 문제 해결을 위해 일하도록 격려하며 권면해야 합니다.
노동은 하나님의 뜻이므로 많은 사람들이 실업의 상태에 빠져있는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할 것을 촉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현실의 문제에 굴복해서는 안됩니다. 이 문제들과 싸워야 합니다. 실제적으로 좋은 정책을 고안하면서, 현실의 악과 싸우는 일은 기독인 평신도들에게 맡겨져 있습니다.
목회자들은 이 싸움을 독려하고 영적, 사상적으로 지원해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원리와 정책을 구분하는 것의 실례가 됩니다. 저는 목회자들이 이것을 잘 알고 있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결국 목회자들은 성경적 원리를 밝히고 전함에 있어서 자신감을 가져야 하며, 평신도들이 이것을 그들의 상황에 잘 적용할 수 있도록 도와야한다는 말씀이군요.
예, 그렇습니다. 저는 이러한 주제들을 다루기 위해서 「현대사회 문제와 기독교적 답변」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목회자들이 이 책을 읽으면 사회적 이슈들을 접근하는 원리들을 얻는 데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이 책에서 자연보호, 환경, 인종, 성 문제 등에 관한 성경적 원리들을 다루었습니다. 그리고 「현대의 그리스도인」과 「현대 교회와 설교」를 저술하여 원리와 정책에 대한 구분을 논의하였습니다.
그렇다면 현존하는 설교자 중에 추천할 만한 분은 누구일까요? 그리고 바른 성경 이해를 위해 참고할 만한 책을 추천해 주십시오.
우선 마틴 로이드존스 목사님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비록 로이드존스 목사님은 약 15년 전에 세상을 떠나셨지만, 그 분의 책은 지금도 읽을 수 있습니다.
미국인 목사님 중에 강해 설교에 뛰어나신 분은 제임스 몽고메리 보이스(James Boice)목사님이십니다. 그는 필라델피아의 제10장로교회의 담임목사님으로 사역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미국 고든콘웰신학교의 총장으로 계시는 월터 카이저(Walter Kaiser) 박사를 들고 싶군요. 이 분은 구약 신학자이시면서 성경 강해에 있어서 탁월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해돈 로빈슨 (Haddon Robinson) 박사를 추천하고 싶습니다. 그는 고든 콘웰 신학교의 오켕가 설교연구소 (Ockenga Institute of Preaching) 의 소장을 맡고 있습니다. 로빈슨 박사는 설교에 관한 훌륭한 책을 저술하였고, 강해설교의 중요성을 매우 강조하고 있습니다.
영국에는 로이드존스 목사님의 후임으로 웨스트민스터채플에서 설교하고 있는 켄달(R. T. Ken dall) 목사를 들 수 있겠군요. 스코틀랜드에도 몇 분이 있습니다. 최근 은퇴하신 글래스고우의 에릭 알렉산더 (Eric Alexdander) 목사님 역시 강해 설교에 뛰어나십니다. 동아시아의 싱가포르에서 사역하는 바비 승(Bobby Sng ) 박사를 들 수 있습니다. 그는 의사입니다. 그는 한 때 싱가포르 IVF의 총무로 사역하였고, 탁월한 강해 설교를 해왔습니다.
복음주의 지성운동
목사님은 특히 복음주의 지성 운동에 관심이 많으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 세계 안에 반지성주의적 경향이 있다는 지적을 하신 것으로 아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흐름을 말씀하시는 것인지요? 쉐퍼박사가 주장한 것처럼 전천년주의에 치우침으로 초래된 위험과 연관된 것입니까?
저는 쉐퍼 박사의 지적이 옳다고 믿습니다. 전천년주의 (Premill ennialism)는 반지성주의를 가져온 하나의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전천년주의자들은 거리낌없이 사회적 이슈들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중요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들에게 사회는 점점 더 악해져 갈 것이고, 또 그렇게 되는 것이 더 좋은 일이니까요. 왜냐하면 사회가 더 나빠질수록 주님의 재림이 가깝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만일 우리가 사회를 향상시키면 주님이 오시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반지성주의를 초래한 또하나의 요인은 은사주의 운동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은사주의자들 중 일부는 지성의 중요성을 무시해 왔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러한 은사주의자들에게 고린도전서 14장 20절의 말씀을 들려주고 싶습니다.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 아이가 되라. 지혜에 장성한 사람이 되라” 이 말씀은 우리가 어린아이와 같이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지성과 지혜를 개발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강조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한 구절은 마태복음 11장 28-30절의 말씀으로 주님께서는 주님의 멍에를 메고 주님께 배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선생과 스승이 되시는 주님께 굴복하고 그 분의 가르치심을 경청해야 합니다.
목사님은 기독교 지성과 영성이 어떻게 다르다고 생각하십니까? 말씀과 영성이 조화를 이룬 청교도 영성 운동과 복음주의 지성 운동의 공통점과 차이점은 무엇인가요?
먼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저는 개인적으로 ‘영성’이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유는 두 가지 입니다.
첫째는, ‘영성’이라는 말이 로마 가톨릭적인 용어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개신교가 사용할 수 있는 적합한 용어가 있다고 믿습니다. 그것은 ‘제자도’입니다. 제자도는 신약성경적인 용어이며, 제자도는 성경 읽기, 묵상, 예배, 기도, 봉사, 전도등 모든 것을 포용해낼 수 있는 용어입니다.
둘째는, 영성이라는 말을 사용할 경우 잘못하면 영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에 대한 위험한 분리 현상을 영속화시키게 됩니다. 즉 어떤 것은 영적이며, 어떤 것은 세속적이라는 이원론적인 사고와 행동을 낳게 된다는 것이죠.
우리 복음주의자들은 이것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하에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살아갈 때 우리는 우리 삶의 모든 영역이 영적인 영역임을 인정하고 고백해야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저는 ‘영성’이란 단어를 가급적이면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목사님께서는 제임스 휴스턴과 유진 피터슨 등의 영성 작가들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제임스 휴스턴은 저와 개인적으로 절친한 친구입니다. 유진 피터슨과는 잘 아는 사이는 아니지만 저는 그분을 몇 번 만난 적이 있습니다. 사실 저는 그 두 분들이 하고 계시는 사역을 아주 좋아하며 지지합니다. 다만 저는 ‘영성’이라는 단어를 주의깊게 사용해야 된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영성’이라는 단어보다는 ‘제자도’ 또는 ‘제자성’이라는 단어가 더 성경적이며 또한 ‘영성’이라는 단어보다도 더 포괄적인 것을 담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목사님 혹시 헨리 나우웬을 알고 계시며, 그 분의 책을 읽으신 적이 있으신지요?
예, 물론입니다. 그는 최근에 돌아가셨죠. 저도 그분의 책을 세 권 읽었습니다. 저는 헨리 나우웬이 로마 카톨릭의 신부이면서도 어떤 부분에 있어서 상당히 개신교적인 신학 사상을 견지하고 있음에 놀랐습니다. 물론 여전히 그의 신학 사상에는 카톨릭적인 요소가 남아 있습니다. 저는 그 점에 있어서 불편을 느꼈습니다.
그럼 그 분의 칭의론에 대하여 검토할 기회가 있으셨는지요?
유감스럽게도, 그럴 기회를 가지지는 못했습니다. 저는 나우웬의 영성에 관한 저술인 「상처입은 치유자」(The Wounded Healer)와 다른 책을 읽었습니다. 저는 나우웬이 ‘무력한 어린아이 또는 십자가에 무력하게 달린 처절한 희생자’와 같은 카톨릭적인 예수상(像)을 비판하는 것을 읽고 기뻤습니다. 그는 라틴아메리카를 방문하였을 때 영광스러운 승리자로서의 부활하신 예수상이 가톨릭 교회 안에 거의 없음을 한탄스러워 했습니다. 카톨릭적인 영성에서 중요한 예수의 이미지는 나약한 어린 아이와 십자가에 못박힌 희생자의 이미지입니다. 그래서 저는 나우웬이 이 점을 지적한 것을 읽고 매우 기뻤습니다.
따라서 목사님은 기독교 지성과 영성을 구분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시는군요?
저는 기독교의 제자도가 기독교의 지성을 포함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기독교적 지성만을 개발할 것이 아니라 기독교적 정신과 기독교적 양심과 기독교적 정서, 그리고 기독교적 의지 등 우리 인간 존재의 모든 영역이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 아래에 놓여져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기독교적 제자도 또는 제자로서의 삶을 구성하는 요소입니다.
결국 모든 것을 통합하는 개념이 제자도라는 말씀이시군요?
적어도 저에게는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 아래 있는 제자의 삶 바로 그것입니다.
청교도 영성에 대해서 간단히 언급해 주시죠.
청교도 영성에 있어서 제가 가장 경탄하는 부분은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인간에 대한 지식입니다. 그들은 진실로 사람이 어떤 존재인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인간의 존엄뿐 아니라 인간의 부패성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영적, 도덕적, 목회적 사역은 심오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인간의 죄악성에 대하여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복음주의 지성운동의 뒤를 이을 만한 차세대 리더들을 추천하신다면 어떤 분들이 계시는지요? 또한 복음주의 지성 운동을 소개하는 대표적인 책들이나 단체들을 소개해 주십시오.
저는 먼저 오스 기니스(Os Gui- ness) 박사를 언급하고 싶군요. 또한 옥스퍼드 대학의 알리스터 맥그래스 박사 그리고 고든 콘웰 신학교의 데이빗 웰즈 (David Wells) 박사를 들 수 있겠습니다. 정 목사님도 웰즈 박사의 책을 아시죠.
이외에도 데이빗 쿡 (David Cook) 박사, 그리고 마이클 쉴루터 (Michael Schluter) 박사를 들 수 있습니다. 그는 케임브리지에 희년센터를 설립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아마 존 와이아트(John Wyatt) 박사를 들 수 있는 데요, 그는 의과대학 교수로서, 2년 전에 런던 인스티튜트에서 ‘삶과 죽음의 문제’에 대한 강의를 한 바 있습니다. 그는 의료 윤리에 속하는 낙태와 안락사 문제 등의 전문가로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 분은 아직까지 40대이기 때문에 앞으로도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될 것입니다.
목사님께서는 5세기 이후 사막 교부들의 영성운동에 대해서는 어떤 평가를 내리시는지요? 이들로부터 복음주의자들이 배울 수 있는 것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글쎄요. 사막 교부들에 대하여 제가 가장 어려움을 느끼는 것은, 그들이 사막으로 은둔한 행위를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7장 15절에서 말씀하신 내용과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이점에서 사막 교부들과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는 주 예수님의 사역 가운데서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주 예수님은 높은 산 같은 한적한 곳으로 홀로 가셔서 기도하시고는, 다시 사역을 위하여 사람들 가운데 돌아오시는 일을 반복했습니다.
주님은 사역에의 참여와 혼자만의 묵상을 위한 은둔 사이를 균형 있게 유지하셨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주님의 삶에 있어서 혼자만 묵상을 위한 은둔은 사실상 사람들과 세상 가운데서 더 능력 있는 사역을 위한 것이었다는 점입니다. 사막 교부들은 이점을 잘못 이해한 것 같습니다.
교회의 사회적 책임이라는 관점에 있어서 칼빈주의의 장점과 약점은 무엇입니까? 또 칼빈주의와 웨슬리주의를 비교해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저는 먼저 칼빈의 종교개혁과 메노 시몬스 등이 중심이 된 급진적 종교개혁 운동을 비교해 보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이해한 바로는 급진적 종교개혁자들은 세상과 사회를 떠나서 믿는 이들만의 공동체를 이루어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또한 세상이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로 죄악에 물들어 있기 때문에 사회 개혁을 위한 노력은 헛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생각함으로써 그들은 로마서 13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고 있었습니다. 로마서 13장에 따르면 그리스도인들은 국가내에서 존재하며, 국가의 권세를 인정하고, 국가가 국가로서 바른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그러나 급진주의자들은 국가가 죄악에 완전히 물들어서 회복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국가를 떠나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급진주의자들과는 대조적으로 칼빈은 성경적인 입장을 견지하였습니다. 칼빈에 따르면 국가는 하나님의 다스림 가운데 생겨났으며, 국가는 정의를 실행하고 선행을 장려하며 악행을 심판하는 책임과 의무를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았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이 국가와 정치의 영역에 참여하지 않아야 할 이유는 전혀 없으며 오히려 그리스도인들은 국가 제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국가가 국가로서 하나님께 부여받은 의무를 잘 감당하도록 도와야 한다고 역설하였습니다.
바로 이 점이 칼빈과 급진주의자들 간의 중대한 차이점이었습니다. 따라서 칼빈주의가 성경적인 원리대로 꽃 핀 나라들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의 사회적 참여로 인한 정치, 사회적 변혁이 많이 이루어진 바 있습니다.
그렇다면 웨슬리의 입장은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웨슬리는 복음의 능력을 믿었습니다. 그는 윌리암 윌버포스의 친구로서 윌버포스가 노예제 폐지 운동에 헌신하도록 격려한 바 있습니다. 사실 웨슬리가 쓴 많은 편지들 중 마지막 것은 웨슬리가 윌버포스에게 노예제 폐지 운동에 진력하도록 독려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웨슬리는 그리스도인들의 사회 참여로 사회를 완전케할 수는 없지만 사회의 상태를 향상시킬 수 있다고 확고히 믿었습니다. 우리 복음주의자들은 이 세상이 유토피아로 변화될 수 있다고 믿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회가 어느 정도는 개선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목사님께서는 칼빈의 하나님 주권에 대한 강조와 웨슬리의 인간의 자유와 책임에 대한 강조를 어떻게 조화시키십니까?
사실 이것은 매우 어려운 문제입니다. 칼빈주의자였던 조지 휫필드와 웨슬리는 결국 이 문제에 대한 의견을 달리하였고 끝내는 나누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칼빈주의자와 웨슬리주의자가 한 자리에 앉아서 서로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듣고 나눈다면 둘 사이의 차이점 보다는 공통점이 많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런 점에서 찰스 시므온을 좋아합니다. 그는 진리는 어떤 하나의 극단에 있는 것이 아니고, 또 두 극단의 혼합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양 극단의 주장을 조화나 화해시킬 수 없다 하더라도, 이 양극단의 두 입장에 동시에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사람이십니다. 인간의 지성은 이 두 가지 사실이 함께 진리일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두 가지 모두 진리라고 믿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주권자이시며, 동시에 인간은 책임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두 가지를 함께 가르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두 가지를 함께 받아들여야 합니다. 비록 우리의 지성으로는 이 두 가지를 조화시킬 수 없더라도 말입니다.
변화하는 세상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대응
우리는 전세계적으로 급변하는 변화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특히 세계는 인터넷과 정보화시대로 접어들었습니다. 이러한 변화의 시대에 그리스도인이 잘 대처하는 태도는 무엇인가요? 새로운 트렌드에 민감하고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것이 좋을까요 아니면 신중한 자세를 취하는 것이 좋을까요?
저는 이 분야에 대한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뭐라고 말씀드리기 어렵군요. 하지만 저는 인터넷과 정보화에 대한 기독교적 평가를 반드시 해야 된다고 믿습니다. 이러한 정보화에는 여러 가지 위험과 동시에 좋은 기회들이 함께 공존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정보화에 대하여 무조건적인 거부나 무조건적인 승인이라는 무책임한 자세를 취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 정보화라는 추세 속에는 동시에 선한 것과 악한 것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를 잘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이같은 변화의 시대에 도시 한복판의 선교 전략 그리고 제3세계와 아프리카지역 등에 대한 선교전략에 대해 말씀해주시죠.
저는 여러 도시에서 선교한 바 있는 사도 바울의 선교 전략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별히 에베소와 고린도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있는 데 이는 이 두 도시가 상당히 큰 대도시였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이 두 곳의 선교를 위해 사도 바울은 좋은 전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 두 도시의 유대인들로부터 배척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 도시 내의 비종교적 채널들을 이용하였습니다. 고린도에서 그는 하나님을 공경하는 디도 유스도라하는 사람의 집에서 복음을 증거하였고, 에베소에서는 두란노라고 하는 강의장을 이용하여 선교하였습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의 본을 따라야 하며, 따라서 비종교적인 채널들을 개발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시청이나 관공서에서의 강의, 대학에서의 강의 등 여러 가지 토론의 장들을 활용하여 선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 선교가 교회 내부에서만 일어나도록 제한 시켜서는 안됩니다. 바울이 아덴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우리는 시장거리나 도시의 광장으로 나가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복음 전도 사역과 더불어 우리는 세상에 대하여 복음을 변호하는 능력을 길러야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와 에베소에서 변증 작업을 시도한 바 있습니다. 저는 Bible Speaks Today시리즈의 사도행전 강해에서 이것을 다룬 바 있습니다. 비종교적인 채널을 통한 복음전도의 세 가지 방식에 대해서 소개하였습니다.
올해에는 미국과 러시아의 대통령 선거를 비롯하여 국제 정세가 급변하고 있습니다. 이같은 국제 정세의 변화에 대하여 복음주의 교회의 태도는 어떠해야 합니까? 그리고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장단점에 대해서도 말씀해주십시오.
이 질문은 너무 큰 질문이어서 한 권의 책을 써야 답변이 될 것같습니다. 먼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만일 우리 복음주의자들이 여러 정치 제도들 중 하나를 그리스도의 것으로 세례주려고 한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실수라는 것입니다.
물론 저는 민주주의적인 정치 절차가 성경적으로 변호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민주주의는 인간의 타락을 심각하게 고려합니다, 그래서 정치 권력을 소수에게 집중시키지 않습니다. 권력을 가진 소수가 타락하면 대단히 위험할 수 있다는 것을 고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불어 민주주의는 창조의 원리를 진지하게 고려합니다. 왜냐하면 민주주의는 타인의 의견 수렴 없이 정책 결정을 내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민주주의의 본질은 정책 결정에 있어서 가능하면 많은 수의 사람을 관련시키자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민주주의적인 정치절차가 가장 성경적인 정치제도라는 것을 성경을 통해 변호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민주주의는 성경의 창조와 타락 원리를 적절하게 표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는 모두 장점과 단점을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자본주의를 받아들입니다. 왜냐하면 자본주의는 창조적인 주도권을 중시하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주신 은사와 재능들을 활용하도록 격려합니다. 또한 에덴 동산의 아담처럼 이땅에 있는 여러 자원들을 잘 개발하도록 격려합니다. 이것은 자본주의가 강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본주의의 이러한 점은 장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여러 단점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본주의는 탐욕과 부패를 가져왔습니다. 저는 자본주의의 이러한 점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사회주의를 더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사회주의가 가난한 자들에 대한 정의의 실현에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회주의는 거대한 정부가 개인의 주도권을 억압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폴란드의 어떤 정치가의 다음과 같은 말을 좋아합니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차이를 당신들은 알고 있습니까? 자본주의는 사람이 사람을 착취하는 제도이며 사회주의는 그말을 거꾸로 하면 됩니다. 즉 사회주의 역시 사람이 사람을 착취하는 제도입니다.” 저는 이 말을 매우 좋아합니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모두 사람을 착취하는 제도가 될 수 있습니다. 둘 중 어느 하나도 그리스도의 제자로 세례받을 수 없습니다. 회개하지 않으면요.
정말 통찰력있는 지적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자본주의나 사회주의나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제자도를 독려하고 증진시키는 길밖에 없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주님이십니다”라는 말은 기독교의 가장 근본적인 신앙고백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주권은 우리 삶의 모든 부분에 침투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정치든, 경제든, 윤리이든, 사회이든, 교육이든 무엇이든지 간에 예수님은 모든 영역의 주님이십니다. 저는 이점에서 아브라함 카이퍼의 말을 좋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적인 통치를 벗어나는 영역은 단 한 평도 없다.” 이것은 우리 기독교의 위대한 고백입니다.
한국 교회를 몇 번 방문하셨는데, 한국교회에 어떤 조언을 주고 싶으신지요?
저는 영국의 한 방문객이 한국의 문화와 교회에 대하여 이러쿵저러쿵 말한다는 것이 좀 건방진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두 가지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첫째는, 한국 교회가 교회의 크기에 대하여 지나치게 집착하는 것 같습니다. 교회 성도수의 크기에 따라 교회를 평가하는 경향은 문제가 있습니다. 물론 교인수의 크기도 하나의 기준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여러 다른 요소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그 교회가 성경적인지, 또 교회에서 성경을 평신도들에게 잘 가르침으로 평신도들이 신앙 생활을 잘 영위하고 있는지, 그리고 기도가 살아 있는지 등의 기준도 중요합니다.
둘째는, 유교적인 스타일의 리더십 문제입니다. 담임목사는 지나친 존경을 받거나 때로는 숭배되기까지 합니다. 그것은 위험합니다. 기독교의 리더십은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이어야지 공자를 따르는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한 정신을 본받아야한다는 것이며, 주님의 종으로서의 리더십, 즉 섬기는 자로서의 리더십을 개발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유교적인 권위주의적 리더십의 폐해는 한국뿐 아니라, 일본, 중국, 대만의 교회에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들 나라에서는 예수님보다도 공자를 더 따르는 위험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희 잡지는 미국에서 발행되는 크리스쳐니티 투데이와 같은 성격으로 발행되고 있습니다. 문서를 통한 복음 운동을 잘 해나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저는 교회의 삶에 있어서 「크리스채니티 투데이」나 「소금과빛」 같은 잡지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저는 이러한 잡지들이 진지한 서평란을 가지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 서평을 통해서 어떤 책을 읽어야 하는지 목회자나 평신도가 안내를 받을 수 있다면 유익할 것입니다. 어떤 책의 내용이 무엇이며, 무슨 이유로 이 책을 읽어야하며, 또 읽지 않아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서평란은 교회의 삶에 중요한 기여를 하게 됩니다.
또한, 이러한 잡지들은 교회 내에서 현재 유행하고 있는 흐름들을 포착해서 그것들에 대한 성경적인 평가를 내려줌으로써 목회자와 평신도가 이러한 문제들에 대하여 깊이 생각할 수 있도록 도와 주는 것은 큰 의미가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두 가지 이유로 이러한 잡지들을 읽습니다. 또한 고정적인 신학적, 신앙적 상담란을 만들어 궁금한 점들에 대한 적절한 답변을 해 줌으로써 성도들의 신앙생활에 유익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목사님과 로이드존스목사님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오해가 좀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목사님께서 로이드존스 목사님을 매우 존경하신 것으로 아는데 이에 대하여 좀 설명해 주십시오.
로이드존스 목사님은 저보다도 15-20세 정도 연상으로 제 아버지와 비슷한 세대이셨기 때문에 저는 그 분을 애정 어린 마음으로 존경하였습니다. 저는 그를 참된 하나님의 사람으로 존경하며 사랑하였습니다.
저는 여러 차례 개인적으로 로이드존스 목사님을 찾아가서 조언을 구한 바 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그 분의 조언을 소중히 여겼기 때문입니다. 저는 로이드존스 목사님이 저술한 책을 거의 모두 읽었습니다. 예를 들어 전 아홉 권의 로마서 강해를 한 글자도 빼놓지 않고 읽었습니다. 따라서 저는 로이드존스 목사님의 팬이며, 팬 클럽의 회원들 중 한 사람입니다.
물론 제가 로이드존스 목사님과 모든 면에서 의견을 같이 한 것은 아닙니다. 특별히 우리는 서로 다른 교회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로이드존스 목사님은 복음주의자들이 교리적으로 혼합된 교단들인 성공회나 감리교나 장로교 안의 회원으로 남아서는 안된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1966년에 그는 복음주의자들이 성공회 교단을 떠나야 한다는 것을 매우 설득력 있게 주장하였습니다. 그는 복음주의자들이 독립교회를 이루어야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사실 그때 그 모임의 의장은 저였습니다. 제가 청중석에 앉아 있는 젊은 목사들을 보니 그들은 얼굴이 붉어진 채로 목사 사직서를 쓰려고 고민스러운 얼굴로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때 그들이 좀더 시간을 가지고 이 문제를 생각할 것과 좀더 신중할 것을 부탁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중간에 끼어 들어서 로이드존스 목사님의 입장을 반박하였습니다. 특히 그분의 ‘남은 자’ 사상을 반박하면서 ‘남은 자’는 교회 안에 있어야 하지, 교회를 떠나서는 안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때 많은 사람들은 저 같은 젊은 사람이 로이드존스 목사님 같은 분에게 공적인 자리에서 반대 의사를 표명한 것에 놀랐습니다.
그 회의가 있은 후 저는 로이드존스 목사님을 찾아가서 제가 의장의 권한을 오용한 것을 사과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제가 로이드존스 목사님의 의견에 반대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드렸습니다. 저는 지금도 그 당시에 그렇게 한 것이 좋은 의도를 가지고 한 일이라고 믿습니다. 이 점은 정 목사님께서도 이해하시리라 믿습니다.
남은 여생에 꼭 이루고자 하시는 계획이나 목표가 있으시다면 어떤 것일까요?
저는 제게 남아있는 여생이 몇 시간일지, 며칠일지, 몇 달일지, 아니면 몇 년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매일 아침 저 자신의 생명의 한계를 기억하고 주님께 기도합니다. 만일 오늘이 나의 마지막 날이라면, 저는 ‘주님의 부르심을 받을 준비를 하기 원합니다’라는 기도를 드립니다.
과거에 청교도들이 기도한 것처럼 잘 사는 것뿐 아니라 잘 죽기를 원한다고 기도합니다. 따라서 저는 사도 바울이 말한 대로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라는 고백을 죽음의 순간에 드릴 수 있게 되기를 바라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죽을 때까지 주님 앞에서 신실함을 지키는 것이 저의 남은 여생 동안 이루고 싶은 주된 소원입니다.
아시아의 종교들을 공부하신 적이 있는지요? 이런 종교들에 대한 복음주의자들의 자세는 어떠해야 합니까?
저는 요한이 말한 대로 예수 그리스도만이 참 빛이시며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으로서 세상을 지으신 창조주이심을 믿습니다. 우리 주 예수님은 창세로부터 창조의 일을 하셨고 지금도 계속적으로 창조주로서의 사역을 감당하신다고 믿습니다. 저는 우리가 믿지 않는 자들로부터 또는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로부터 배울 수 있는 진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진리는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은 일반 계시의 진리입니다.
주님은 세상의 빛으로서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에게도 이성의 빛과 양심의 빛을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십자가에 죽으심을 통한 구속 그리고 부활 이 세 가지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유일한 것으로, 이 점에서 그는 어떤 경쟁자도 동등자도 후계자도 허락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그는 유일하십니다. 우리는 그분의 유일성과 궁극성을 변증해야 합니다.
장시간의 대담에 감사드립니다.
아니요. 제가 감사를 드립니다.
대담을 마치고
지난 1월, 「소금과빛」 편집부가 존 스토트 목사님과의 대담 가능성을 타진해 왔다. 사실 스토트 목사님과 개인적인 친분이 없었기 때문에 어떤 방식으로 접근해야 할 지 잘 몰랐다.
그러던 중 박사학위 논문 지도교수인 알리스터 맥그래스 교수에게 소개를 부탁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떠올라, 교수님께 말씀을 드렸다. 감사하게도 3월 4일 옥스포드 지역 목회자들을 위해 위클리프홀이 주관하는 복음주의신학대회에 스토트 목사님이 주요 강사중 한 분으로 초청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스토트 박사 외에 마이클 그린 박사와 맥그래스 교수가 주강사로 초청되어 있었다).
맥그래스 교수가 직접 스토트 박사께 「소금과빛」의 대담 의사를 담은 편지를 보내 주시겠다고 하셔서 교수님께 모든 일을 맡겼다. 얼마 후 스토트 목사님께로부터 긍정적인 회신이 왔고, 결국 대담 날짜와 시간은 3월 4일 오후 네 시 그리고 장소는 위클리프 홀의 맥그래스 교수 연구실로 정해졌다.
거의 80세가 다 된 노인 스토트 목사! 그는 고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건강하였다. 뿐만 아니라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과 정열은 어느 젊은이보다 더 뜨겁고 강렬하였다.
무엇보다 때묻지 않은 어린아이 같은 그의 얼굴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그의 검소한 옷차림은 그가 세계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사람인지 아닌지 쉽게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주 예수님과 복음만을 위해 결혼도 하지 않은 채 평생을 꿋꿋이 살아온 자태가 몸에 베어 있었다.
자신을 ‘스토트 아저씨’라고 부르라는 그분의 말씀은 매우 친근하게 다가왔다. 마음을 열고 질문에 답해 주셨기에 두 시간에 걸친 대담은 사뭇 진지하고, 활기가 넘치며, 간혹 웃음을 자아내는 즐거운 시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쉬운 것은 시간이었다. 빡빡한 일정 가운데 겨우 얻은 두 시간이어서 한 가지 한 가지의 질문에 대해 좀더 깊이 들어가기 어려운 점이 매우 아쉬웠다.
대담 도중 스토트 목사님이 ‘영성’이라는 용어를 싫어하며, ‘영성’보다는 ‘제자도’라는 말을 써야 한다고 강조한 것은 예리한 지적이었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한국 교회가 너무 무비판적으로 가톨릭적인 용어와 의미로서의 ‘영성’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질문을 내심 가지게 되었다. 스토트 목사님은 시종일관 같은 입장을 견지했고 ‘제자도’와 ‘제자로서의 삶’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사실 ‘영성’이란 말은 좀더 인간의 주권과 능력을 높이는 말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삶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굳이 ‘영성’이라는 말을 계속해서 사용하고자 한다면 ‘제자의 영성’이라는 말을 사용함으로 영성의 실체와 내용을 분명히 하는 노력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또 한 가지 한국 교회가 교회를 건물의 크기와 성도 수로 평가하는 경향성이 있음을 지적했을 때 공감이 되었다. 큰 교회가 좋은 교회라는 의식이 팽배하다 보니 비록 숫자는 적지만 주님 앞에서 신실하게 목회하는 ‘작은 교회’ 목사님들과 그러한 교회의 형제자매들을 무시하거나 경시하는 잘못된 풍조가 어느새 우리 한국교회에 자리잡게 되었음을 반성하고 돌이켜야 함을 느꼈다. 하나님의 구원이 사람의 숫자에 있지 않다는 말씀을 재삼 되새기게 된다.
대담과 정리/ 정성욱 목사 사진/ 정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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