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기도문 강해 김세윤
주기도문의 서론 - 1 -
주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인 주기도문 은 성도들이 매일 낭송하며 기도할 만큼 자주 대하는 것일 뿐아니라 사실은 성도들의 신앙생활에서 필요한 가장 중요한 내용들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기도문을 할 때마다 정성을 다하여 바른 의미를 알고 진심으로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며,이 기도문을 잘 살펴보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입니다.
우선 주께서 가르처 주신 기도의 본문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주기도문의 본문은 우리에게 두 개의 판(版), 즉 마태복음판과 누가복음판으로 주어져 있습니다. 마태판은 마태복음 6장9~13절까지의 말씀이고, 누가판은 누가복음 11장2~4절까지의 말씀입니다.
먼저 마태복음 6장9~13절 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게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다음은 누가복음 11장2~4절 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기도하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소서하라.
왜 두개의 주기도문 본문이 있는가
우선 소위 ‘공관복음서 문제’에 속하기도 하는 신학적인 문제 한가지를 짚고 넘어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문제는 다름이 아니라 방금 읽었듯이 주기도문에 대한 마태복음의 본문과 누가복음의 본문이 서로 다르다는 것에 대한 것입니다. 즉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의 본문이 마태판과 누가판이 서로 다른데,이 문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느냐에 관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약 신학을 연구하는 데 있어, 공관복음서 가운데 마가복음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으면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는 기록되어 있는 마태판과 누가판의 공통 본문들을 학자들은 ‘Q자료’라는 이름을 붙여 부릅니다. 이 용어를 사용하여 방금 제기한 주기도문의 마태판과 누가판이 다르다는 문제에 대하여 간략하게 이해하고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이 문제에 대한 첫 번째로 가능한 설명은, 이 두 자료 곧 주기도문에 대한 마태판과 누가판이 우리가 보통 편리하게 부르는 ‘Q자료’에서 온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마태복음과 누가복음 두 복음서 본문에 모두 있기 때문에 이 주기도문은 Q 라는 자료에서 온 것일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또 다른 설명은, 마태복음판은 이른바 마태의 특수자료(보통 M이 라는 기호사용)에서, 누가복음은 누가의 특수 자료(보통 L이라고 표시)에서 이 주기도문을 각각 전승받아 기록했을 가능성입니다.
세번째로 가능한 설명은,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중 하나는 Q에서 자료를 받았고, 그 나머지 하나는 자신의 특수자료 즉 M이나 L에서 전승받았을 가능성입니다.
마지막으로 생각해 볼수 있는 것은, 누가가 마태에 의지하여 썼을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나오는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의 본문에 대하여 왜 이렇게 복잡하
게 생각합니까? 주기도문을 수록하고 있는 성경 본문에 대한 마태복음판과 누가복음판이 상당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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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통점이 있으면서, 동시에 상당 부분 다른 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방금 말씀드린 몇가지 가설들 가운데서 어느 것이 가장 합당한지를 판정하기란 상당히 어렵습니다.
따라서 가능성 있어 보이는 네 가지 가설들 가운데 어느 것이 정확하고 옳은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최근 대다수의 학자들은 그 네 가지 견해 가운데 처음 세가지의 하나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많은 학자들은 첫 번째 견해를 가장 가능성이 많다고 지지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누가복음판 주기도문의 문학적 맥락
다음으로, 주께서 가르치신 이 기도를 ?펴보기 위해서는 먼저 이 기도 본문들이 들어 있는 맥락을 먼저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누가복음판의 주기도문에 대한 문학적 맥락을 먼저 보도록 하겠습니다. 누가복음 11장 2~4절의 주기도문 본문에 앞서는 1절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처 주옵소서.
예수의 제자 가운데 한 명이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했습니다. “세례 요한도 그의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었는데, 이제 선생님도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셔야 합니다” 라는 것입니다.
문맥으로 볼 때, 예수는 그 요청에 응하여 기도를 가르쳤습니다.
여기서 일단 우리는 제자들이 예수에게 이런 요청을 했다는 것이 사실은 매우 놀라운 것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에수의 제자들은 유대인이었고, 유대인들은 기도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 입니다. 다시 말해, 제자들이 기도를 할 줄 몰라서 예수에게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구약의 시편들이 사실은 다 기도 아닙니까? 더욱이 예수 당시 유대에는 유대인이라면 누구나잘 알고있는 유명한 기도들이 이미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는 ‘카디쉬(Kaddish)’라는 좀 짧은형태의 기도이고, 다른 하나는 ‘18번 축복 기도’즉 ‘세모네 에레스(Shemone Esre)’라는 긴형태의 기도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카디쉬와 같은 기도문들을 매일 두세 번씩 낭송 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기도를 많이 알고 있었고, 많이 하고 있었고, 시편 기도를 따라서 하곤 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예수에게 기도를 가츠쳐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제자들의 요청은 상당히 놀라운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기도를 가르쳐 달라는 제자들의 요청에 아무런 의문이 없는 것처럼 그냥 넘어갈수 없습니다. 왜 제자들이 굳이 또다시 예수에게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했을까 하는 질문이 당연히 생깁니다.
주기도문 은 새로운 하나님 나라 운동의 요약이다
기도를 잘 알고 있었고 기도를 늘 많이 하면서 지낸 유대인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이 예수에게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요청한 데는 다음과 같은 배경이 있습니다.
예수 당시에는 메시아가 곧 와서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리라는 기대가 유대인들 간에 팽배해 있었습니다. 그리고 메시아가 와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도록 하려면 그에 앞서 유대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새롭게 헌신하고 순종하는 일들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회개와 헌신과 순종을 새롭게 다짐해야 한다는 이런 현상을 한마디로 말하면 부흥 운동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 당시 유대인들과 유대교 내에는 종말을 대비한 부흥 운동이 많이 일어났고, 이 운동을 하는 사람들과 단체들도 참 많았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우리가 성경에서 자주 보는 바리새인들의 운동입니다. 바리새인들도 회개하고 율법을 철두철미하게 지킬 정도로 하나님께 헌신함으로써 메시아가 빨리 와서 하나님 나라가 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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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도록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 바리새 운동은 이스라엘 전체를 하나님의 제사장 민족으로 보려는 민족적 이상을 실현하려고 한 중산층 평신도 경건 운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에센파 운동도 그 예입니다. 1947년부터 이스라엘 사해 주변의 쿰란(Qumran) 이라는 동네의 동굴에서 이른바 사해 문서들이 발견되기 시작했습니다. 이 문서들의 발견과 함께 주목 받게 된 예수 당시 사해 주변 쿰란에 모여 살던 일단의 무리들을 에센파(Essenes)라고 합니다. 이들은 쿰란 동굴에 은거하면서 성경 즉 구약을 연구하고, 서로 새롭게 회개하고 율법을 새롭게 잘 지키기로 헌신했는데, 이들도 바로 예수 당시에 있던 그 부흥 운동을 한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이런 부흥 운동을 한 사람 중에 하나가 우리가 잘 아는 세례 요한입니다. 세례 요한의 메시지가 무엇이었습니까?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천국 즉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라는 것, 다시 말해 임박한 종말과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는 것이 세례 요한의 메시지였습니다. 그 심판에 대비해 회개하기를 촉구했고, 그리고 회개에 대한 표징으로 세례를 받도록 즉 옛 죄를 다 씻어 내는 의식을 하라는 그런 회개와 부흥 운동을 한것입니다. 세례 요한의 운동이 바로 회개와 헌신의 부흥 운동인 것입니다. 곧 도래할 하나님의 나라를 맞을 준비를 하도록 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 에센인들, 그리고 세례 요한처럼 이런 부흥 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신학적인 이해와 이상과 소망 등을 담아 표현하는 특별한 기도문을 작성했습니다. 이런 기도문들은 부흥 운동을 하는 각각의 단체들이 내세우는 하나님에 대한 이해, 하나님의 구원사에 대한 이해, 자신들의 이상과 소망 등을 아주 압축적으로 반영하는 것이었습니다. 앞서 소개한 카디쉬 기도가 그렇고, 18번 축복 기도가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요한도 자기의 신학과 종말론적 소망을 표현하는 기도문을 자신의 제자들에게 가르쳐서 날마다 하나님께 기도하도록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의 회개와 부흥 운동에 대한 신학을 잘 표현하고 그 운동의 소망과 이상을 잘 표현하는 기도를 가르쳤던 것 같습니다. 그것은 당시의 관행으로, 부흥 운동을 하는 단체들에게 흔히 있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원래 예수와 예수의 제자들은 세례 요한이 이끄는 운동에 동참한 사람들 이었습니다. 우리는 사복음서에서 모두 그 흔적을 볼 수 있는데, 특별히 요한복음 1장 19~51절까지 본문이 그것을 잘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는 원래 세례 요한의 제자였고, 때문에 요한의 부흥 운동에 동참했습니다. 그러다가 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이후 요한의 운동으로부터 점차 독립하여 하나님 나라(the Kingdom of God) 운동을 새롭게 시작한 것으로 사복음서들은 모두 그리고 있습니다.
사복음서 모두 예수가 세례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았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마3:13~17,1:9~11: 눅3:21~22: 요1:29-34)
여기서 우리는 세례 요한과 예수의 관계에 대해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는 세례 요한의 운동에 동참한 분으로, 일단 세례 요한이 선포한 회개이고 하나님의 나라 도래를 준비하라는 메시지를 이어 받습니다. 회개하고 하나님의 통치에 스스로를 헌신해야 한다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세례 요한의 가르침을 이어받습니다. 그러면서도 강조점을 좀 달리합니다.
요한이 불로 임하실 하나님의 심판을 강조한 반면, 예수는 심판을 통한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강조했습니다. 불로 비유되는 심판을 말씀하지만 심판을 통한 하나님의 용서에 강조점을 두었습니다. 강조의 초점이 다르게 나타납니다.
이처럼, 예수는 요한 운동에서 독립하여 하나님 나라 운동을 새롭게 한다는 점에서 요한의 가르침과 일부 비슷하면서도 상당히 새로운 가르침을 통해 새로운 정신, 새로운 강조점으로 하나님 나라 운동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이 심판에 대비한 극도의 절세적 삶 또는 금욕적 삶을 요구했다면, 예수는 그와 반대적인 방향으로 나아간 것을 복음서에서 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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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자신의 하나님 나라 복음을 따라 죄인들을 영접하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용서를 선언하고, 그들과 먹고 마시는 잔치를 자주 벌이는 모습을 많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밖에도 여러 가지 비슷한 점과 대조점을 찾아볼 수 있지만, 이렇게 예수는 요한 운동에서 독립하여 새로운 정신, 새로운 이상, 새로운 소망, 새로운 태도 등을 표방하며 하나님 나라 운동을 시작 했습니다.
이와 함께 요한의 제자이던 일부 사람들이 예수와 함께 또는 예수를 따라서 예수의 제자가 되어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에 동참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를 따라 나선 제자들 중 하나가 예수에게 기도를 요청합니다(눅11:1)
기도를 요청하는 이 장면은 풀어 설명하자면 이런 것입니다.
“선생께서 이제 하나님의 구원사의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여 요한 운동과는 강조점을 좀 달리하는 하나님 나라 운동을 하니, 선생을 따르는 우리가 계속해서 요한이 가르쳐준 기도를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요한이 자기 시대에 자신이 주도한 하나님 나라 운동을 위해 그에 맞는 기도문을 가르쳤듯이 선생도 선생의 구원사의 새 시대에 걸 맞는 기도를 가르치셔야 하지 않습니까? 기도를 가르쳐 주십시오”
이것이 바로 누가복음 11장 1절과 2절의 전반부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예수의 공동체에 자신들의 신학과 자신들의 이상과 소망을 담아서 표현하는 새로운 기도가 필요하게 된 것입니다. 요한이 가르친 기도가 요한의 신학을 담아서 요한 공동체의 정체성을 잘 나타냈듯이, 예수 운동도 예수의 가르친 신학과 예수의 이상과 예수의 소망 등을 잘 담아 표현함으로 예수 공동체, 예수가 지금 새롭게 구성하는 하나님 나라 공동체의 정체성(Identity) 을 가장 잘 나타낼 기도가 필요하게 되리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예수에게 이런 기도를 가르쳐 달라 한 것에 대한 응답으로 이 주기도문이 주어진 것입니다.
누가복음의 주기도문 본문의 전(前) 문맥은 이와 같은 배경 속에서 제자들이 예수에게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요구한 것에 대한 응답으로 이 주기도문이 주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나오게 된 것이 바로 누가복음판이 소개하고 있는 주기도문입니다. 이 ‘주기도문’ 이라는 단어는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요약하여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나 ‘주기도문’ 이라고 하는 것보다는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라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어쨌든 이런 맥락에서 누가복음을 보면,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야말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함으로써 새롭게 창조하고 구성하려는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의 신앙과 이상과 소망을 가장 잘 담아 표현해 주는 것임을 암시받을수 있습니다. 즉 이 기도는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의 정체성을 가장 집약적으로 잘 나타내 주는 그런 성격의 기도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하나님나라 운동에 동참하는 모든 제자들이 함께, 항상, 가장 기본적으로 드려야 하는 기도가 주기도문이며, 이는 또한 기독교 신앙의 중심적인 자리를 차지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주기도문은 예수의 가르침과 사역 전체의 요약 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여 예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에게 하나의 새로운 기도문을 가르쳐 주게 됩니다.
주기도문을 교회의 기도로 공식화하다
여기서 우리는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 가 교회안에서 공식적인 기도문으로 자리잡은 것과 관련
그 배경을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예수님 당시 유대교 안에는 아마 몇 개의 중요한 기도문들이 공적인 기도로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중에 두 개의 기도를 이미 여러분에게 소개했습니다
그 하나는 ‘카디쉬’라는 기도로서, 이 기도는 유대 회당에서 설교 끝에 함께 낭송한 기도이며, 짧막한 형태의 기도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18번 축복 기도’입니다. 이 기도는 유대인들이 하루에 세번 즉 아침과 오후가 시작되는 시간 그리고 저녁이 시작되는 시간에 각각 반드시 드려야 하는 기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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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18번 축복 기도’야말로 모든 유대인들에게는 가장 기본적인 기도였습니다.
카디쉬(Kaddish)기도 |
그분의 이름이 높여지고 거룩히 여겨지이다 그분이 그분의 뜻에 따라 지으신 세상 안에서 그분이 자신의 나라 / 다스리심이 다스리게 하시길 너희들의 생애에 그리고 너희들의 날들에 그리고 이스라엘 집안 전체의 생애에 신속히 그리고 조만간 그분의 위대한 이름이 영원에서 영원까지 찬양되소서 이에대해 말하라. 아멘 |
18번 축복 기도(Tepillah, Shemone Esre) |
1.주님,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아브라함의 하나님,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전능하시고 무서우신 하나님, 하늘과 땅을 지으신 지고하신 하나님, 우리의 방패 그리고 우리의 조상들의 방패이신 하나님, 매세대마다 우리의 의지할 분이신 당신을 축복하나이다. 아브라함의 방패이신 주님, 당신을 축복하나이다 2.당신은 전능하셔서 교만한 자들을 겸손케 하시는 이시고, 강하시고 포악한 자들을 심판하시는 분이십니다. 당신은 영원히 사시고 죽은 자들을 일으키시며, 바람을 불게 하시고 이슬을 내리시며, 산 자들에게 공급하여 주시고 죽은 자들을 살리시며, 단숨에 우리의 구원이 일어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죽은 자들을 살리시는 주님, 당신을 축복합니다. 3.당신은 거룩하시고 당신의 이름은 경외로우시며, 당신 외에는 다른 신이 없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이신 주님, 당신을 축복합니다. 4.우리 아버지, 우리에게 당신으로부터 오는 지식을 주시고, 당신의 율법 으로부터 오는 이해와 판단력을 주시옵소서, 지식을 주시는 주님, 당신을 축복합니다. 5.주여 우리를 당신께로 돌이키소서, 우리가 회개하겠나이다. 예전과 같이 우리의 날들을 새롭게 하소서, 회개를 기뻐하시는 당신을 축복합니다. .6.우리 아버지, 우리가 당신께 죄를 지었사오니 우리를 용서하소서, 우리의 악행들을 지워 버리시고 당신의 시야에서 제거하소서, 당신의 자비가 풍성하시니까요. 용서를 풍성히 베푸시는 당신을 축복합니다. 7.우리의 고난을 보시고, 우리를 위해 호소하시며, 당신의 이름을 인하여 우리를 구속하소서, 이스라엘의 구속자이신 주님, 당신을 축복합니다. 8.우리 하나님이신 주여, 우리의 심장의 아픔을 치유하시며, 슬픔과 탄식을 우리로부터 제거하시소 우리의 상처를 치유하소서,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의 병자들을 치유하시는 당신을 축복합니다. -6- 9.우리 하나님이신 주여, 우리를 위해 금년을 축복하시고, 금년의 모든 생산을 풍성하게 하소서, 우리의 최후 구속의 해를 빨리 가져오소서. 땅에 이슬과 비를 내려주시고, 당신의 사랑의 보고로부터 세상을 만족케 하시며, 우리 손의 일을 축복하소서, 해마다 축복하시는 주님, 당신을 축복합니다. 110..우리의 해방을 큰 나팔을 불어 선포하시고, 깃발을 들어 우리의 흩어진 자들을 모으소서,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의 추방당한 자들을 모으시는 주님, 당신을 축복합니다. 11.우리의 심판관(사사)들을 예전과 같이 회복시키시고 우리의 지혜자들을 처음과 같이 회복시켜 주소서, 오직 당신만이 우리를 다스리소서 심판을 사랑하시는 주님, 당신을 축복합니다. 12. 그리고 배교자들에게는 소망이 없게하시고, 교만한 나라는 빨리 우리의 생애에 뿌리 뽑히게 하소서 그리고 나사렛 당원들과 이단자들은 빨리 망하게하시고, 그들의 생명책에서 지워지게 하시며, 그들이 의인들과 함께 기록되게 하지마소서 교만한 자들을 겸손케하시는 주님,당신을 축복합니다. 13. 당신의 자비가 의로운 개종자들에게 풍성히 내리게 하시고, 당신의 기쁜 뜻을 행하는 자들과 더불어 우리에게 풍성한 상을 주소서, 의인들의 신뢰처이신 주님, 당신을 축복합니다. 14. 우리 하나님이신 주여, 당신의 풍성한 자비로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에, 당신의 도성 예루살렘에, 영광의 거처인 시온에, 당신의 의로운 메시아 다윗가의 왕권에 자비를 베푸소서, 예루살렘을 세우시는 다윗의 하나님이신 주님, 당신을 축복합니다. 1 15. 우리 하나님이신 주여, 우리의 기도의 음성을 들으시고, 우리에게 자비로우소서, 당신은 은혜로우시고 자비로우시니이다. 기도를 들으시는 주님, 당신을 축복합니다. 1 16. 우리 하나님이신 주여, 시온에 기꺼이 거처하소서,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당신의 종들로 하여금 당신을 섬기게 하소서, 우리가 경외심으로 예배하는 주님, 당신을 축복합니다. 17. 우리 하나님이신 주님,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당신이 우리에게 허락하시고, 우리에게 그리고 우리보다 앞선 우리의 조상들에게 행하신 모든 선하심과 은혜와 자비를 인하여 찬양하나이다. 우리가 실족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고 하면, 오 주여, 당신의 은혜가 우리를 구출합니다. 오로지 선하신 이인 주여, 당신을 축복합니다. 18.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 당신의 도성, 당신의 기업에 당신의 평화를 가져오소서, 그리고 우리 모두를 함께 축복하소서, 평화를 이루시는 주님, 당신을 축복합니다. |
따라서 당시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 즉 소위 ‘주기도문’이 처음에는 아마도 ‘18번 축복 기도’와 함께 드려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다 점차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가 18번 축복 기도를 대 신했다가 마침내 교회의 유일한 공통 기도로 자리를 잡게 된 것 같습니다. 이와 같은 점진적인 변화의
과정은 어렵지 않게 이해할수 있습니다. 초대 교회는 점차 이방인 선교를 하게 되었고 그를 통해 이방인 들이 많이 늘어나고 18번 축복 기도의 전통을 받아들이지 않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늘어나는 상황에 이르게 됩니다.
특히 주후 66~70년까지의 유대 전쟁을 기점으로 해서 교회와 유대교는 완전히 분리하게 됩니다. 이 유대 전쟁 직후, 유대교 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을 이단자로 규정하고 유대 회당에서 많이 축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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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에대한 유대교의 태도가 18번 축복 기도에 반영 되어 있는데, 그 열두번째 기도는 이렇습니다.
“배교자들에게는 소망이 없게 하시고 교만한 나라는 빨리 우리의 생애에 뿌리 뽑히게 하소서, 그리고 나사렛 당원들과 이단자들은 빨리 망하게 하시고 그들이 생명책에서 지워지게 하시며, 그들이 의인들과 함께 기록되지 말게 하소서, 교만한 자들은 겸손케 하시는 주님, 당신을 축복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을 저주하는 대목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반영 합니까? 이 무렵에 벌써 예수당 혹은 나사렛당 곧 그리스도인들을 이단자로 규정해 그들을 유대 회당에서 축출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음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이때 교회와 유대 회당이 좀더 명백히 분리되면서 교회가 유대교와 공식적으로 관계를 끊게 됩니다.
이 무렵, 즉 한편으로는 이방인들이 점점 교회의 다수가 되어가고 다른 한편으로는 유대교에서 교회가 분리되는 상황 속에서 18번 축복 기도는 이제 교회의 기도로는 사라지고 맙니다. 그 대신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가 교회 공동체의 기본적인 공중 기도로 자리잡게 된 것입니다.
마태복음판 주기도문의 문학적 맥락
이제 마태복음판의 주기도문 문맥을 살펴보겠습니다. 마태복음 5장에서 7장까지를 이른바 산상수훈이라고 하는데, 산상수훈 전체를 놓고 보면 그 한가운데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가 위치 하고 있습니다.
마태는 이 주기도문을 산상수훈 본문의 구조상 한가운데 즉 핵심에 위치시켜 놓았습니다. 이와같은 구조는 주기도문이 얼마나 중요한지 를 명확하게 보여 줍니다. 산상수훈은 크게 다섯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 첫째가 마태복음 5장3-16인데, 이것을 소위 팔복이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새롭게 창조하고 구성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선언하신 여덟 가지 복을 가리킵니다. 이 여덟 번의 복 선언은 마태복음 5장에서 시작하는 산상수훈 전체의 서문에 속합니다. 이 팔복선언을 통해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심령이 가난하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도록 애통해 하고 평화를 도모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함을 밝히셨고, 이를 통하여 마침내 세상의 소금이 되고 빛이 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나의 제자인 너희가 팔복이 말하는 그런 사람이 되어 세상에서 빛의 노릇을 하는 것이 너희의 사명이다” 라고 하신 것입니다. 또한 팔복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면 제일 먼저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를 말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자기 스스로 자신의 생명과 안전을 확보하려고 생각하지 말고 오로지 하나님의 하나님 노릇 해주심에 자신들의 소망을 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사탄이 악과 고난으로 통치하는 세상에서 애통해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온유한 사람이 되어야 하고, 의에 대하여 주리고 목말라하는 사람,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8-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며, 곧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에서 위로를 받을 자들이 라는 것입니다. 이 여덟 가지를 통해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가 어떤 사람들로 구성되는지를 구체적으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팔복의 말씀은 사실상 하나님의 백성의 정체성(Identity)을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 팔복 선언을 중심으로, 이어지는 13-16절 말씀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가 세상에서 소금으로 존재하여 부패를 마고 세상을 살맛나게 하는 공동체가 된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공동체는 세상에 대해 빛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빛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빛, 곧 하나님의 계시의 전달자라는 의미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제자들 곧 교회 공동체는 하나님의 계시와 구원의 전달자입니다. 제자들의 사명을 규명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백성의 정체성과 사명이 마치 동전의 앞뒤처럼 연결되고 잇습니다. 여기까지가 산상수훈의 서론에 해당합니다. 두번째 단락은 5장17-48절인데, 소위 반대 어법(antipathical statement)을 통해 새로운 법이 제시됩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의 새로운 원리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새로운 법 선언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이 가운데서 특히 우리에게 많이 알려져 있는 대표적인 것은 살인에 관한 법과 간음에 대한 법일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이런 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옛 사람들에게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이 주어졌음을 너희들이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들에게 말한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으면 간음을 한 것이다. 또 옛 사람들에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이 주어졌음을 너희가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들에게 말한다. 형제를 미워하고 ‘바보’ ‘멍텅구리’ 라 하면 살인을 한 셈이다. 그러면 공회에 넘겨져 재판을 받게되고 하나님의 심판에 이르게 된다.” 여기서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들은 원래 어디서 나왔습니까? 십계명에서 나왔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 계명들은 원래 모세의 율법입니다. 그런데 예수의 가르침은 계명들을 언급한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는 형식으로 표현되었습니다. 즉 이것은 예수께서 지금 자신이 선언하는 법이 모세의 율법을 능가하는, 모세의 율법보다 완벽한 것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17-48절까지 선언한 예수의 새로운 법의 성격이 무엇인지를 보여 줍니다. 모세의 법의 성격은 무엇입니까?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등과 같이 인간 행위의 외형적 최소한을 규제하는 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에 비해, 지금 예수가 선언하는 이 새로운 법의 성격은 어떻습니까? 행위를 유발시키는 동기의 내면적 최대한을 규제하고 요구하는 법임을 보여 줍니다. 모세의 옛 법에 의하면, 살인 이라는 외형적 행위 최소한을 규제하는 것이므로 실제로 남의 목을 칼로 치지 않으면 살인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새 법은 그런 살인 행위를 유발시키는 형제에 대한 무시의 태도나 증오의 태도 등 과 같은 동기의 내면의 최대한을 규제하는 법입니다. 간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을 좀더 극명하게 드러내기 위해 예수께서는 반대 어법을 사용하여 말씀하십니다. ‘행위의 외적 최소한’ 을 규제하는 법이 아니고, 그 ‘행위를 유발시키는 동기의 내면적 최대한’ 을 규제하고 요구하는 법임을 확연히 드러내는 것입니다. 결국 이것은 예수가 모세의 권위를 훨씬 능가하는 권위를 가지신 분으로 하나님의 법을 모 세를 통해 계시된 것보다 훨씬 더 완벽하게 계시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이것이 마태복음 5 장입니다. 다음, 세 번째로 구분할 수 있는 단락은 이어지는 6장1-18절입니다. 이 부분은 종교적 삶의 실천들 곧 경건 행위들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금식, 기도, 자선 행위 등과 같은 유대교의 대표적인 종교 행위들이 언급됩니다. 그런데 바로 이곳에 주기도문이 있습니다. -9- 네 번째 단락은 6장19절에서 7장11절까지인데, 여기에는 십계명의 제1계명에 대한 예수의 설교가 나옵니다. 제1계명이 무엇입니까? 여호와 외에는 다른 신을 섬겨서는 안된다. 우상 숭배해서는 안된다 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헌신을 가르키는 것으로, 우상 숭배를 배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헌신의 반대말은 우상 숭배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가장 절실하게 우리 모두에게 위협적으로 다가오는 우상의 형태로 내세우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다름 아닌 돈을 섬기는 것 곧 맘모니즘(Mammonisim)입니다. 누구도 하나님과 맘몬(Mammon)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시 유대인들을 향하여 사실상 이렇게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 너희들이 실제로는 맘몬을 섬기면서도 말로는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데, 그런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따라서 우리가 진정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면,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하고 순종하는 자라면, 맘몬을 의지하는 우상 숭배를 포기하고, 우리에게 하나님 노릇 해주시고 아빠 노릇 해주시는 그 하나님께 의지하여 일용할 양식을 그 하나님께로부터 얻는 그런 자세로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공중에 나는 새를 보고 또 들에 피는 백합화를 보면서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빠는 공중에 나는 새를 먹이시고 들에 핀 백합화를 입히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돈으로 자신의 안녕과 안전을 확보하려는 그런 우상 숭배를 청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상 숭배를 청산하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삶은 곧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자세로 나타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6장19절에서 7장11절까지의 이 단락은 십계명의 제1계명, 즉 하나님만 의지하고 섬기면서 우상 숭배는 배격해야 한다는 것에 대한 설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사랑의 이중 계명에 대한 예수님의 설교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긴 설교가 이어진 다음 7장12-27절의 단락, 즉 마지막 결론적 권면이 다섯 번쩨로 나옵니다. 여기서는 열매 곧 행위의 열매를 보고 그 나무를 알 수 있다고 합니다. 그것을 예수께서는 지금 자신이 새롭게 제시하시는 이 법을 듣기만 하는 자는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어리석은 자요, 이것을 듣고 행하는 자는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지혜 있는 자라는 비유를 제시하시면서 마지막으로 권면하십니다. 주기도가 제자의 삶에 중심이다 이처럼 마태복음의 산산수훈을 다섯 부분으로 구분할수 있습니다. 방금 분석한 구조에 따르 면,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는 산상수훈의 전체 문맥에서 가운데 부분 곧 6장1-18절의 종교 행위에 대한 가르침 단락에 들어 있습니다. 이 종교 행위에 대한 가르침의 단락인 6장1-18절 의 종교 행위에 대한 가르침 단락에 들어 있습니다. 이 종교 행위에 대한 가르침의 단락인 6장1-18절의 본문에 대해서도 좀더 자세하게 구조를 분석할 수 있습니다. 이 단락에서는 세 개의 대표적인 종교 행위 혹은 경건 행위를 다루고 있습니다. .첫째는 자선 혹은 구제입니다.(6:1-4), 예수께서는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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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가르칩니다. 당시 유대인들 처럼 자기를 드러내 놓고 자랑하면서 자기 과시나 자기 만족을 위해 자선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새로운 가르침을 주십니다.
둘째는 기도에 대한 가르침입니다(6:5-15)
셋째는 금식에 대한 가르침입니다(6:16-18), 금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지 말라고 강조합니다. 우리는 가끔 40일 금식 기도 한다고 광고하고 다니는데,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금식을 하려면 즐겁게 하라는 것입니다. 금식에 대한 새로운 가르침입니다.
유대교의 대표적 종교 행위인 자선과 기도와 금식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이 단락에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가 들어 있으며, 자선과 기도와 금식에 대한 가르침 중에서도 기도에 관한 가르침 속에 이 주기도문이 속합니다. 즉 자선, 기도, 금식으로 대표되는 유대교의 종교 행위에 대한 예수의 새로운 가르침의 중심 부분에 기도를 위치시켰고, 그 기도에 대한 예수의 새로운 가르침에 주기도문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의 구조에 대하여 한걸음 더 들어가 자세히 관찰해 보면, 이 기도에 대한 가르침 부분에서도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는 중심 자리를 차지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6장5-15절이 기도에 관한 가르침인데, 6장5-9절 전반부에서 그릇된 기도들을 먼저 다룹니다.
첫 번째는 유대인들의 그릇된 기도를 지적하고, 두 번째는 이방인들의 그릇된 기도를 비판합니다. 그리고는 “너희들은 그렇게 기도하면 안된다” 고 하시면서, 이제 드디어 예수께서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이어지는 14-15절에서 주기도문의 강조점을 되새김하는 방식으로 다시 한번 이웃에 대한 죄 용서를 요구 하면서 (그렇게 함으로써 죄 용서의 문제를 강조하시면서) 이 단락을 마칩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마태복음의 주기도문과 관련된 문학적 문맥은 아주 조직적으로 짜여져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원래 문학적으로 아주 정교하게 구성된 복음서입니다. 예컨데, 마태복음 전체는 다섯개의 강론과 다섯 개의 설교로 아주 정교하게 교직(交織)되어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마태복음은 문학적으로 아주 치밀한 구조를 가진 책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태는 마태복음 전체를 그렇게 정교하게 문학적으로 조직했을 뿐만 아니라, 이와 같은 자신의 문학적 성향을 산상수훈 문맥에도 그대로 적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앞에서 본것처럼, 마태는 산상수훈도 굉장히 정교하게 구성해 놓았습니다.
마태는 산상수훈을 매우 치밀한 문학적 구조로 짜면서 주기도문을 그 한가운데 위치하도록 했습니다. 즉 산상수훈(마5장-7장) 가운데서도 가운데 부분에 종교적 관행 혹은 종교 행위에 대한 가르침을 위치 시켰고(마6:1-18), 또 그 종교 행위에 대한 가르침 중에서도 중심 위치에 기도에 관한 가르침을 배열했으며(마6:5-15), 그 가르침 중에서도 또 중앙 핵심부에 주기도문이 자리하도록 하는(마6:9b-10) 문학적 구조를 취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태가 예수의 가르침을 기록할 때 예수께서 강조한 부분을 잘 살리기 위해 일부러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산상수훈이라는 예수의 제자도 실천에 대한 가르침의 ‘핵심의 핵심’ 에 위치하도록 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마태복음의 주기도문은 매우 치밀한 문학적 구조 속에 담겨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시사하는 것입니까? 왜 주기도문은 산상수훈의 핵심 중에 핵심에 위치하도록 구
조되어 있는 것일까요? 마태는 이러한 문학적 구조를 통해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요?
그것은, 모세의 율법을 능가하는 완벽한 법을 우리에게 전하신 예수님, 다시 말해 하나님의 뜻을 완벽하게 계시해 주시고 전달해 주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잘 실천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
의 백성이요 예수님의 제자로서 해야 할 도리인데, 그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고 예수의 가르침을 잘 순종하는 동력이 바로 이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에서 나온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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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도가 우리의 제자도의 가장 기본이고 우리의 제자도를 가능케 하는 것임을 말하기 위해 마태는 이렇듯 정교하게 산상수훈을 조직했고, 그 핵심에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넣어 놓
았습니다. 결국 그가 말하고자 한 것은, 기도야말로 하나님의 백성의 삶에서 가장 근본 도리이다. 이 기도로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가 삶의 힘을 얻는다. 혹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도의 가장 중심에 기도가 있다는 것 등입니다.
하나님의 백성 됨의 가장 핵심에 기도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기도가 어떤 기도입니까?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 입니다. 하나님 백성됨의 가장 근본 또는 중심에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로서 우리는 이렇게 기도해야 하며, 이 기도를 하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가 선포하는 하나님 나라의 제자들로 살아가는 방식임을 마태는 말하고 있습니다.
주기도문은‘하나님 백성’이 하는 기도이다
그러면 이제 범위를 좁혀 주기도문이 들어 있는 마태복음 6장의 주기도문 전후 문맥 즉 6장5-15절의 단락을 분석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기도 부분의 중심에 주기도문 위치 |
① 6:5 (유대인들의) 위선적인 공중 기도 ⇒ 그 이유 / 세상적 상 받음 ② 6:6 올바른 기도 : 아버지께 드리는 은밀한 기도 ⇒ 그 이유 / 아버지의 상 ③ 6:7-8a 이방인들의 그릇된 다변의 기도 ⇒ 그 이유 / 그릇된 신학 ④ 6:8b 올바른 기도의 이유 : 너희 아버지께서 너희의 필요를 아신다. ⑤ 6:9-13 올바른 기도에 대한 가르침 6:9b-13 주기도문 6:9b 부름 6:9c-10 세 개의 ‘당신’ 청원들 6:11-13 세 개의 ‘당신’ 청원들 바)6:14-15 죄 용서 |
마태는 여기서도 자신의 문학적 특성을 좇아 본문을 아주 정교하게 구성해 놓고 있습니다. 자선, 기도, 금식으로 대표되는 세 가지 중요한 종교 행위들 가운데 기도를 다루는 이 단락에서, 마태는 기도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기록함에 있어서 유대인들의 위선적인 기도를
지적하는 것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구에서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유대인들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서 떠들썩하게 기도하여 사람들에게 자신이 얼마나 기도의 사람이고 얼마나 경건한 사람인지 내세우려 했는데, 예수님은 그들을 향하여 외식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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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들이라고 진단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유대인들처럼 하지말고 “너는 기도할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게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마 6:6)고 가르칩니다.
기도라는 것은 하나님과 나 사이의 은밀한 만남과 대화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가능한 한
은밀한 중에 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과의 만남이 의식이 되고 하나님에 대한 개인적인 절실한 헌신이 이루어집니다.
사람들에게 보이기위해 기도하면 남에 대한 의식이 더 커지고, 다른 사람 앞에서 나의 체면과 명예가 어떻게 될까 하는 염려가 우리를 압도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하는 기도가 되지 못하기 쉽습니다. 우리는 심지어 통성 기도하는 순간에도 내가 하나님께 은밀하게 한다는 정신
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남에게 뽐내려고 혹은 남을 의식해서 기도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기도를 청산 유수처럼 잘하는 사람을 간혹 보는데, 그 사람이 오랫동안 신앙 생활한 것을 은근히 자랑하거나 연약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자신을 과시하려는 마음을 갖고 있다면, 그것은 곧 유대인처럼 기도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기도 관행’ 에 대항하여 이렇게 가르친 예수는 이제 ‘이방인들의 기도 관행’ 에 대항해서도 새롭게 가르칩니다. 여기서 예수가 지적하는 이방인의 기도 관행의 특징은 중언부언하는 기도입니다. 그래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이방인처럼 중언부언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7절 말씀을 봅시다.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왜 중언부언하지 말아야 합니까? 구약성경에 의하면, 우상이란 나무 조각이나 돌 조각에 불과한 것입니다. 나무 조각이나 돌 조각을 새겨서는 신이라고 했기 때문에, 구약 선지자들은 우상에 대해 뭐라고 합니까? 눈이 멀었고 귀가 먹었다고 했습니다. 아무리 기도해 봐야 듣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엘리야와 대결한 바알 선지자들이 아무리 소리 높여 기도해 봐야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 이방인들의 우상은 나무 조각과 돌 조각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자기들이 섬기는 우상이 귀먹고 눈먼 존재이기 때문에 이방인들은 자꾸 중언부언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우리의 문제와 필요를 다 아시는 아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까 한마디만 하면 됩니다. 아니 우리가 아뢰기도 전에 미리 아시는 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중언부언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한국 사람들이 특별히 조심해야 할 게 바로 이 중언부언하지 말라는 가르침이 아닌가 합니다. 종종 중언부언하는 기도를 듣게 되는데, 그렇게 기도하는 사람은 아마 이방인들이 그들의 신에 대하여 갖고 있는 생각과 비슷하게 하나님을 생각하기 때문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만일 중언부언하는 기도를 한다면 이방인과 같은 셈입니다.
그러면 왜 유대인처럼, 이방인처럼 기도하지 말라는 것입니까? 8절을 봅시다.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시기 때문에 유대인처럼도, 이방인처럼도 기도하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아주 의식적으로 이 주기도가 ‘하나님 나라 백성’ 의 기본적인 기도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이 기도는 ‘유대인’ 의 기도와도 다르고 ‘이방인’ 의 기도와도 다르다는 것입니다.
즉 기도는 기도하는 자의 정체성을 보여 주는 것이며, 예수의 제자라면 지금 예수께서 새롭게 가르치는 대로 기도해야 합니다. 물론 내용으로 보면 유대의 기도들과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 사이에 같은 부분이 잇지만 이 문제는 뒷부분에서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그러면, 마태복음 6장에 나오는 주기도문의 바로 위아래 붙어 있는 근접 문맥을 조금 더 분석해 보겠습니다. 9절부터 13절까지가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 곧 ‘주기도문(Lord’s Prayer)’ 입니다.
김세윤 박사의 주기도문 강해
주기도문강해 전문 입니다. 페이지는 letter size 에 맞도록 한것 입니다.
주기도문의 서론 - 1 -
주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인 주기도문 은 성도들이 매일 낭송하며 기도할 만큼 자주 대하는 것일 뿐아니라 사실은 성도들의 신앙생활에서 필요한 가장 중요한 내용들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기도문을 할 때마다 정성을 다하여 바른 의미를 알고 진심으로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며,이 기도문을 잘 살펴보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입니다.
우선 주께서 가르처 주신 기도의 본문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주기도문의 본문은 우리에게 두 개의 판(版), 즉 마태복음판과 누가복음판으로 주어져 있습니다. 마태판은 마태복음 6장9~13절까지의 말씀이고, 누가판은 누가복음 11장2~4절까지의 말씀입니다.
먼저 마태복음 6장9~13절 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게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다음은 누가복음 11장2~4절 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기도하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소서하라.
왜 두개의 주기도문 본문이 있는가
우선 소위 ‘공관복음서 문제’에 속하기도 하는 신학적인 문제 한가지를 짚고 넘어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문제는 다름이 아니라 방금 읽었듯이 주기도문에 대한 마태복음의 본문과 누가복음의 본문이 서로 다르다는 것에 대한 것입니다. 즉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의 본문이 마태판과 누가판이 서로 다른데,이 문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느냐에 관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약 신학을 연구하는 데 있어, 공관복음서 가운데 마가복음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으면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는 기록되어 있는 마태판과 누가판의 공통 본문들을 학자들은 ‘Q자료’라는 이름을 붙여 부릅니다. 이 용어를 사용하여 방금 제기한 주기도문의 마태판과 누가판이 다르다는 문제에 대하여 간략하게 이해하고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이 문제에 대한 첫 번째로 가능한 설명은, 이 두 자료 곧 주기도문에 대한 마태판과 누가판이 우리가 보통 편리하게 부르는 ‘Q자료’에서 온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마태복음과 누가복음 두 복음서 본문에 모두 있기 때문에 이 주기도문은 Q 라는 자료에서 온 것일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또 다른 설명은, 마태복음판은 이른바 마태의 특수자료(보통 M이 라는 기호사용)에서, 누가복음은 누가의 특수 자료(보통 L이라고 표시)에서 이 주기도문을 각각 전승받아 기록했을 가능성입니다.
세번째로 가능한 설명은,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중 하나는 Q에서 자료를 받았고, 그 나머지 하나는 자신의 특수자료 즉 M이나 L에서 전승받았을 가능성입니다.
마지막으로 생각해 볼수 있는 것은, 누가가 마태에 의지하여 썼을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나오는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의 본문에 대하여 왜 이렇게 복잡하
게 생각합니까? 주기도문을 수록하고 있는 성경 본문에 대한 마태복음판과 누가복음판이 상당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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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통점이 있으면서, 동시에 상당 부분 다른 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방금 말씀드린 몇가지 가설들 가운데서 어느 것이 가장 합당한지를 판정하기란 상당히 어렵습니다.
따라서 가능성 있어 보이는 네 가지 가설들 가운데 어느 것이 정확하고 옳은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최근 대다수의 학자들은 그 네 가지 견해 가운데 처음 세가지의 하나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많은 학자들은 첫 번째 견해를 가장 가능성이 많다고 지지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누가복음판 주기도문의 문학적 맥락
다음으로, 주께서 가르치신 이 기도를 ?펴보기 위해서는 먼저 이 기도 본문들이 들어 있는 맥락을 먼저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누가복음판의 주기도문에 대한 문학적 맥락을 먼저 보도록 하겠습니다. 누가복음 11장 2~4절의 주기도문 본문에 앞서는 1절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처 주옵소서.
예수의 제자 가운데 한 명이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했습니다. “세례 요한도 그의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었는데, 이제 선생님도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셔야 합니다” 라는 것입니다.
문맥으로 볼 때, 예수는 그 요청에 응하여 기도를 가르쳤습니다.
여기서 일단 우리는 제자들이 예수에게 이런 요청을 했다는 것이 사실은 매우 놀라운 것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에수의 제자들은 유대인이었고, 유대인들은 기도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 입니다. 다시 말해, 제자들이 기도를 할 줄 몰라서 예수에게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구약의 시편들이 사실은 다 기도 아닙니까? 더욱이 예수 당시 유대에는 유대인이라면 누구나잘 알고있는 유명한 기도들이 이미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는 ‘카디쉬(Kaddish)’라는 좀 짧은형태의 기도이고, 다른 하나는 ‘18번 축복 기도’즉 ‘세모네 에레스(Shemone Esre)’라는 긴형태의 기도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카디쉬와 같은 기도문들을 매일 두세 번씩 낭송 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기도를 많이 알고 있었고, 많이 하고 있었고, 시편 기도를 따라서 하곤 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예수에게 기도를 가츠쳐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제자들의 요청은 상당히 놀라운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기도를 가르쳐 달라는 제자들의 요청에 아무런 의문이 없는 것처럼 그냥 넘어갈수 없습니다. 왜 제자들이 굳이 또다시 예수에게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했을까 하는 질문이 당연히 생깁니다.
주기도문 은 새로운 하나님 나라 운동의 요약이다
기도를 잘 알고 있었고 기도를 늘 많이 하면서 지낸 유대인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이 예수에게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요청한 데는 다음과 같은 배경이 있습니다.
예수 당시에는 메시아가 곧 와서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리라는 기대가 유대인들 간에 팽배해 있었습니다. 그리고 메시아가 와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도록 하려면 그에 앞서 유대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새롭게 헌신하고 순종하는 일들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회개와 헌신과 순종을 새롭게 다짐해야 한다는 이런 현상을 한마디로 말하면 부흥 운동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 당시 유대인들과 유대교 내에는 종말을 대비한 부흥 운동이 많이 일어났고, 이 운동을 하는 사람들과 단체들도 참 많았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우리가 성경에서 자주 보는 바리새인들의 운동입니다. 바리새인들도 회개하고 율법을 철두철미하게 지킬 정도로 하나님께 헌신함으로써 메시아가 빨리 와서 하나님 나라가 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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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도록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 바리새 운동은 이스라엘 전체를 하나님의 제사장 민족으로 보려는 민족적 이상을 실현하려고 한 중산층 평신도 경건 운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에센파 운동도 그 예입니다. 1947년부터 이스라엘 사해 주변의 쿰란(Qumran) 이라는 동네의 동굴에서 이른바 사해 문서들이 발견되기 시작했습니다. 이 문서들의 발견과 함께 주목 받게 된 예수 당시 사해 주변 쿰란에 모여 살던 일단의 무리들을 에센파(Essenes)라고 합니다. 이들은 쿰란 동굴에 은거하면서 성경 즉 구약을 연구하고, 서로 새롭게 회개하고 율법을 새롭게 잘 지키기로 헌신했는데, 이들도 바로 예수 당시에 있던 그 부흥 운동을 한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이런 부흥 운동을 한 사람 중에 하나가 우리가 잘 아는 세례 요한입니다. 세례 요한의 메시지가 무엇이었습니까?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천국 즉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라는 것, 다시 말해 임박한 종말과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는 것이 세례 요한의 메시지였습니다. 그 심판에 대비해 회개하기를 촉구했고, 그리고 회개에 대한 표징으로 세례를 받도록 즉 옛 죄를 다 씻어 내는 의식을 하라는 그런 회개와 부흥 운동을 한것입니다. 세례 요한의 운동이 바로 회개와 헌신의 부흥 운동인 것입니다. 곧 도래할 하나님의 나라를 맞을 준비를 하도록 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 에센인들, 그리고 세례 요한처럼 이런 부흥 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신학적인 이해와 이상과 소망 등을 담아 표현하는 특별한 기도문을 작성했습니다. 이런 기도문들은 부흥 운동을 하는 각각의 단체들이 내세우는 하나님에 대한 이해, 하나님의 구원사에 대한 이해, 자신들의 이상과 소망 등을 아주 압축적으로 반영하는 것이었습니다. 앞서 소개한 카디쉬 기도가 그렇고, 18번 축복 기도가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요한도 자기의 신학과 종말론적 소망을 표현하는 기도문을 자신의 제자들에게 가르쳐서 날마다 하나님께 기도하도록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의 회개와 부흥 운동에 대한 신학을 잘 표현하고 그 운동의 소망과 이상을 잘 표현하는 기도를 가르쳤던 것 같습니다. 그것은 당시의 관행으로, 부흥 운동을 하는 단체들에게 흔히 있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원래 예수와 예수의 제자들은 세례 요한이 이끄는 운동에 동참한 사람들 이었습니다. 우리는 사복음서에서 모두 그 흔적을 볼 수 있는데, 특별히 요한복음 1장 19~51절까지 본문이 그것을 잘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는 원래 세례 요한의 제자였고, 때문에 요한의 부흥 운동에 동참했습니다. 그러다가 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이후 요한의 운동으로부터 점차 독립하여 하나님 나라(the Kingdom of God) 운동을 새롭게 시작한 것으로 사복음서들은 모두 그리고 있습니다.
사복음서 모두 예수가 세례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았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마3:13~17,1:9~11: 눅3:21~22: 요1:29-34)
여기서 우리는 세례 요한과 예수의 관계에 대해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는 세례 요한의 운동에 동참한 분으로, 일단 세례 요한이 선포한 회개이고 하나님의 나라 도래를 준비하라는 메시지를 이어 받습니다. 회개하고 하나님의 통치에 스스로를 헌신해야 한다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세례 요한의 가르침을 이어받습니다. 그러면서도 강조점을 좀 달리합니다.
요한이 불로 임하실 하나님의 심판을 강조한 반면, 예수는 심판을 통한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강조했습니다. 불로 비유되는 심판을 말씀하지만 심판을 통한 하나님의 용서에 강조점을 두었습니다. 강조의 초점이 다르게 나타납니다.
이처럼, 예수는 요한 운동에서 독립하여 하나님 나라 운동을 새롭게 한다는 점에서 요한의 가르침과 일부 비슷하면서도 상당히 새로운 가르침을 통해 새로운 정신, 새로운 강조점으로 하나님 나라 운동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이 심판에 대비한 극도의 절세적 삶 또는 금욕적 삶을 요구했다면, 예수는 그와 반대적인 방향으로 나아간 것을 복음서에서 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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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자신의 하나님 나라 복음을 따라 죄인들을 영접하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용서를 선언하고, 그들과 먹고 마시는 잔치를 자주 벌이는 모습을 많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밖에도 여러 가지 비슷한 점과 대조점을 찾아볼 수 있지만, 이렇게 예수는 요한 운동에서 독립하여 새로운 정신, 새로운 이상, 새로운 소망, 새로운 태도 등을 표방하며 하나님 나라 운동을 시작 했습니다.
이와 함께 요한의 제자이던 일부 사람들이 예수와 함께 또는 예수를 따라서 예수의 제자가 되어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에 동참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를 따라 나선 제자들 중 하나가 예수에게 기도를 요청합니다(눅11:1)
기도를 요청하는 이 장면은 풀어 설명하자면 이런 것입니다.
“선생께서 이제 하나님의 구원사의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여 요한 운동과는 강조점을 좀 달리하는 하나님 나라 운동을 하니, 선생을 따르는 우리가 계속해서 요한이 가르쳐준 기도를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요한이 자기 시대에 자신이 주도한 하나님 나라 운동을 위해 그에 맞는 기도문을 가르쳤듯이 선생도 선생의 구원사의 새 시대에 걸 맞는 기도를 가르치셔야 하지 않습니까? 기도를 가르쳐 주십시오”
이것이 바로 누가복음 11장 1절과 2절의 전반부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예수의 공동체에 자신들의 신학과 자신들의 이상과 소망을 담아서 표현하는 새로운 기도가 필요하게 된 것입니다. 요한이 가르친 기도가 요한의 신학을 담아서 요한 공동체의 정체성을 잘 나타냈듯이, 예수 운동도 예수의 가르친 신학과 예수의 이상과 예수의 소망 등을 잘 담아 표현함으로 예수 공동체, 예수가 지금 새롭게 구성하는 하나님 나라 공동체의 정체성(Identity) 을 가장 잘 나타낼 기도가 필요하게 되리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예수에게 이런 기도를 가르쳐 달라 한 것에 대한 응답으로 이 주기도문이 주어진 것입니다.
누가복음의 주기도문 본문의 전(前) 문맥은 이와 같은 배경 속에서 제자들이 예수에게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요구한 것에 대한 응답으로 이 주기도문이 주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나오게 된 것이 바로 누가복음판이 소개하고 있는 주기도문입니다. 이 ‘주기도문’ 이라는 단어는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요약하여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나 ‘주기도문’ 이라고 하는 것보다는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라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어쨌든 이런 맥락에서 누가복음을 보면,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야말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함으로써 새롭게 창조하고 구성하려는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의 신앙과 이상과 소망을 가장 잘 담아 표현해 주는 것임을 암시받을수 있습니다. 즉 이 기도는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의 정체성을 가장 집약적으로 잘 나타내 주는 그런 성격의 기도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하나님나라 운동에 동참하는 모든 제자들이 함께, 항상, 가장 기본적으로 드려야 하는 기도가 주기도문이며, 이는 또한 기독교 신앙의 중심적인 자리를 차지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주기도문은 예수의 가르침과 사역 전체의 요약 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여 예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에게 하나의 새로운 기도문을 가르쳐 주게 됩니다.
주기도문을 교회의 기도로 공식화하다
여기서 우리는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 가 교회안에서 공식적인 기도문으로 자리잡은 것과 관련
그 배경을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예수님 당시 유대교 안에는 아마 몇 개의 중요한 기도문들이 공적인 기도로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중에 두 개의 기도를 이미 여러분에게 소개했습니다
그 하나는 ‘카디쉬’라는 기도로서, 이 기도는 유대 회당에서 설교 끝에 함께 낭송한 기도이며, 짧막한 형태의 기도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18번 축복 기도’입니다. 이 기도는 유대인들이 하루에 세번 즉 아침과 오후가 시작되는 시간 그리고 저녁이 시작되는 시간에 각각 반드시 드려야 하는 기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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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18번 축복 기도’야말로 모든 유대인들에게는 가장 기본적인 기도였습니다.
카디쉬(Kaddish)기도 |
그분의 이름이 높여지고 거룩히 여겨지이다 그분이 그분의 뜻에 따라 지으신 세상 안에서 그분이 자신의 나라 / 다스리심이 다스리게 하시길 너희들의 생애에 그리고 너희들의 날들에 그리고 이스라엘 집안 전체의 생애에 신속히 그리고 조만간 그분의 위대한 이름이 영원에서 영원까지 찬양되소서 이에대해 말하라. 아멘 |
18번 축복 기도(Tepillah, Shemone Esre) |
1.주님,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아브라함의 하나님,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전능하시고 무서우신 하나님, 하늘과 땅을 지으신 지고하신 하나님, 우리의 방패 그리고 우리의 조상들의 방패이신 하나님, 매세대마다 우리의 의지할 분이신 당신을 축복하나이다. 아브라함의 방패이신 주님, 당신을 축복하나이다 2.당신은 전능하셔서 교만한 자들을 겸손케 하시는 이시고, 강하시고 포악한 자들을 심판하시는 분이십니다. 당신은 영원히 사시고 죽은 자들을 일으키시며, 바람을 불게 하시고 이슬을 내리시며, 산 자들에게 공급하여 주시고 죽은 자들을 살리시며, 단숨에 우리의 구원이 일어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죽은 자들을 살리시는 주님, 당신을 축복합니다. 3.당신은 거룩하시고 당신의 이름은 경외로우시며, 당신 외에는 다른 신이 없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이신 주님, 당신을 축복합니다. 4.우리 아버지, 우리에게 당신으로부터 오는 지식을 주시고, 당신의 율법 으로부터 오는 이해와 판단력을 주시옵소서, 지식을 주시는 주님, 당신을 축복합니다. 5.주여 우리를 당신께로 돌이키소서, 우리가 회개하겠나이다. 예전과 같이 우리의 날들을 새롭게 하소서, 회개를 기뻐하시는 당신을 축복합니다. .6.우리 아버지, 우리가 당신께 죄를 지었사오니 우리를 용서하소서, 우리의 악행들을 지워 버리시고 당신의 시야에서 제거하소서, 당신의 자비가 풍성하시니까요. 용서를 풍성히 베푸시는 당신을 축복합니다. 7.우리의 고난을 보시고, 우리를 위해 호소하시며, 당신의 이름을 인하여 우리를 구속하소서, 이스라엘의 구속자이신 주님, 당신을 축복합니다. 8.우리 하나님이신 주여, 우리의 심장의 아픔을 치유하시며, 슬픔과 탄식을 우리로부터 제거하시소 우리의 상처를 치유하소서,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의 병자들을 치유하시는 당신을 축복합니다. -6- 9.우리 하나님이신 주여, 우리를 위해 금년을 축복하시고, 금년의 모든 생산을 풍성하게 하소서, 우리의 최후 구속의 해를 빨리 가져오소서. 땅에 이슬과 비를 내려주시고, 당신의 사랑의 보고로부터 세상을 만족케 하시며, 우리 손의 일을 축복하소서, 해마다 축복하시는 주님, 당신을 축복합니다. 110..우리의 해방을 큰 나팔을 불어 선포하시고, 깃발을 들어 우리의 흩어진 자들을 모으소서,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의 추방당한 자들을 모으시는 주님, 당신을 축복합니다. 11.우리의 심판관(사사)들을 예전과 같이 회복시키시고 우리의 지혜자들을 처음과 같이 회복시켜 주소서, 오직 당신만이 우리를 다스리소서 심판을 사랑하시는 주님, 당신을 축복합니다. 12. 그리고 배교자들에게는 소망이 없게하시고, 교만한 나라는 빨리 우리의 생애에 뿌리 뽑히게 하소서 그리고 나사렛 당원들과 이단자들은 빨리 망하게하시고, 그들의 생명책에서 지워지게 하시며, 그들이 의인들과 함께 기록되게 하지마소서 교만한 자들을 겸손케하시는 주님,당신을 축복합니다. 13. 당신의 자비가 의로운 개종자들에게 풍성히 내리게 하시고, 당신의 기쁜 뜻을 행하는 자들과 더불어 우리에게 풍성한 상을 주소서, 의인들의 신뢰처이신 주님, 당신을 축복합니다. 14. 우리 하나님이신 주여, 당신의 풍성한 자비로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에, 당신의 도성 예루살렘에, 영광의 거처인 시온에, 당신의 의로운 메시아 다윗가의 왕권에 자비를 베푸소서, 예루살렘을 세우시는 다윗의 하나님이신 주님, 당신을 축복합니다. 1 15. 우리 하나님이신 주여, 우리의 기도의 음성을 들으시고, 우리에게 자비로우소서, 당신은 은혜로우시고 자비로우시니이다. 기도를 들으시는 주님, 당신을 축복합니다. 1 16. 우리 하나님이신 주여, 시온에 기꺼이 거처하소서,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당신의 종들로 하여금 당신을 섬기게 하소서, 우리가 경외심으로 예배하는 주님, 당신을 축복합니다. 17. 우리 하나님이신 주님,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당신이 우리에게 허락하시고, 우리에게 그리고 우리보다 앞선 우리의 조상들에게 행하신 모든 선하심과 은혜와 자비를 인하여 찬양하나이다. 우리가 실족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고 하면, 오 주여, 당신의 은혜가 우리를 구출합니다. 오로지 선하신 이인 주여, 당신을 축복합니다. 18.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 당신의 도성, 당신의 기업에 당신의 평화를 가져오소서, 그리고 우리 모두를 함께 축복하소서, 평화를 이루시는 주님, 당신을 축복합니다. |
따라서 당시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 즉 소위 ‘주기도문’이 처음에는 아마도 ‘18번 축복 기도’와 함께 드려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다 점차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가 18번 축복 기도를 대 신했다가 마침내 교회의 유일한 공통 기도로 자리를 잡게 된 것 같습니다. 이와 같은 점진적인 변화의
과정은 어렵지 않게 이해할수 있습니다. 초대 교회는 점차 이방인 선교를 하게 되었고 그를 통해 이방인 들이 많이 늘어나고 18번 축복 기도의 전통을 받아들이지 않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늘어나는 상황에 이르게 됩니다.
특히 주후 66~70년까지의 유대 전쟁을 기점으로 해서 교회와 유대교는 완전히 분리하게 됩니다. 이 유대 전쟁 직후, 유대교 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을 이단자로 규정하고 유대 회당에서 많이 축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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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에대한 유대교의 태도가 18번 축복 기도에 반영 되어 있는데, 그 열두번째 기도는 이렇습니다.
“배교자들에게는 소망이 없게 하시고 교만한 나라는 빨리 우리의 생애에 뿌리 뽑히게 하소서, 그리고 나사렛 당원들과 이단자들은 빨리 망하게 하시고 그들이 생명책에서 지워지게 하시며, 그들이 의인들과 함께 기록되지 말게 하소서, 교만한 자들은 겸손케 하시는 주님, 당신을 축복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을 저주하는 대목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반영 합니까? 이 무렵에 벌써 예수당 혹은 나사렛당 곧 그리스도인들을 이단자로 규정해 그들을 유대 회당에서 축출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음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이때 교회와 유대 회당이 좀더 명백히 분리되면서 교회가 유대교와 공식적으로 관계를 끊게 됩니다.
이 무렵, 즉 한편으로는 이방인들이 점점 교회의 다수가 되어가고 다른 한편으로는 유대교에서 교회가 분리되는 상황 속에서 18번 축복 기도는 이제 교회의 기도로는 사라지고 맙니다. 그 대신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가 교회 공동체의 기본적인 공중 기도로 자리잡게 된 것입니다.
마태복음판 주기도문의 문학적 맥락
이제 마태복음판의 주기도문 문맥을 살펴보겠습니다. 마태복음 5장에서 7장까지를 이른바 산상수훈이라고 하는데, 산상수훈 전체를 놓고 보면 그 한가운데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가 위치 하고 있습니다.
마태는 이 주기도문을 산상수훈 본문의 구조상 한가운데 즉 핵심에 위치시켜 놓았습니다. 이와같은 구조는 주기도문이 얼마나 중요한지 를 명확하게 보여 줍니다. 산상수훈은 크게 다섯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 첫째가 마태복음 5장3-16인데, 이것을 소위 팔복이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새롭게 창조하고 구성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선언하신 여덟 가지 복을 가리킵니다. 이 여덟 번의 복 선언은 마태복음 5장에서 시작하는 산상수훈 전체의 서문에 속합니다. 이 팔복선언을 통해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심령이 가난하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도록 애통해 하고 평화를 도모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함을 밝히셨고, 이를 통하여 마침내 세상의 소금이 되고 빛이 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나의 제자인 너희가 팔복이 말하는 그런 사람이 되어 세상에서 빛의 노릇을 하는 것이 너희의 사명이다” 라고 하신 것입니다. 또한 팔복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면 제일 먼저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를 말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자기 스스로 자신의 생명과 안전을 확보하려고 생각하지 말고 오로지 하나님의 하나님 노릇 해주심에 자신들의 소망을 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사탄이 악과 고난으로 통치하는 세상에서 애통해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온유한 사람이 되어야 하고, 의에 대하여 주리고 목말라하는 사람,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8-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며, 곧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에서 위로를 받을 자들이 라는 것입니다. 이 여덟 가지를 통해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가 어떤 사람들로 구성되는지를 구체적으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팔복의 말씀은 사실상 하나님의 백성의 정체성(Identity)을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 팔복 선언을 중심으로, 이어지는 13-16절 말씀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가 세상에서 소금으로 존재하여 부패를 마고 세상을 살맛나게 하는 공동체가 된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공동체는 세상에 대해 빛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빛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빛, 곧 하나님의 계시의 전달자라는 의미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제자들 곧 교회 공동체는 하나님의 계시와 구원의 전달자입니다. 제자들의 사명을 규명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백성의 정체성과 사명이 마치 동전의 앞뒤처럼 연결되고 잇습니다. 여기까지가 산상수훈의 서론에 해당합니다. 두번째 단락은 5장17-48절인데, 소위 반대 어법(antipathical statement)을 통해 새로운 법이 제시됩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의 새로운 원리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새로운 법 선언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이 가운데서 특히 우리에게 많이 알려져 있는 대표적인 것은 살인에 관한 법과 간음에 대한 법일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이런 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옛 사람들에게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이 주어졌음을 너희들이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들에게 말한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으면 간음을 한 것이다. 또 옛 사람들에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이 주어졌음을 너희가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들에게 말한다. 형제를 미워하고 ‘바보’ ‘멍텅구리’ 라 하면 살인을 한 셈이다. 그러면 공회에 넘겨져 재판을 받게되고 하나님의 심판에 이르게 된다.” 여기서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들은 원래 어디서 나왔습니까? 십계명에서 나왔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 계명들은 원래 모세의 율법입니다. 그런데 예수의 가르침은 계명들을 언급한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는 형식으로 표현되었습니다. 즉 이것은 예수께서 지금 자신이 선언하는 법이 모세의 율법을 능가하는, 모세의 율법보다 완벽한 것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17-48절까지 선언한 예수의 새로운 법의 성격이 무엇인지를 보여 줍니다. 모세의 법의 성격은 무엇입니까?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등과 같이 인간 행위의 외형적 최소한을 규제하는 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에 비해, 지금 예수가 선언하는 이 새로운 법의 성격은 어떻습니까? 행위를 유발시키는 동기의 내면적 최대한을 규제하고 요구하는 법임을 보여 줍니다. 모세의 옛 법에 의하면, 살인 이라는 외형적 행위 최소한을 규제하는 것이므로 실제로 남의 목을 칼로 치지 않으면 살인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새 법은 그런 살인 행위를 유발시키는 형제에 대한 무시의 태도나 증오의 태도 등 과 같은 동기의 내면의 최대한을 규제하는 법입니다. 간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을 좀더 극명하게 드러내기 위해 예수께서는 반대 어법을 사용하여 말씀하십니다. ‘행위의 외적 최소한’ 을 규제하는 법이 아니고, 그 ‘행위를 유발시키는 동기의 내면적 최대한’ 을 규제하고 요구하는 법임을 확연히 드러내는 것입니다. 결국 이것은 예수가 모세의 권위를 훨씬 능가하는 권위를 가지신 분으로 하나님의 법을 모 세를 통해 계시된 것보다 훨씬 더 완벽하게 계시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이것이 마태복음 5 장입니다. 다음, 세 번째로 구분할 수 있는 단락은 이어지는 6장1-18절입니다. 이 부분은 종교적 삶의 실천들 곧 경건 행위들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금식, 기도, 자선 행위 등과 같은 유대교의 대표적인 종교 행위들이 언급됩니다. 그런데 바로 이곳에 주기도문이 있습니다. -9- 네 번째 단락은 6장19절에서 7장11절까지인데, 여기에는 십계명의 제1계명에 대한 예수의 설교가 나옵니다. 제1계명이 무엇입니까? 여호와 외에는 다른 신을 섬겨서는 안된다. 우상 숭배해서는 안된다 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헌신을 가르키는 것으로, 우상 숭배를 배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헌신의 반대말은 우상 숭배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가장 절실하게 우리 모두에게 위협적으로 다가오는 우상의 형태로 내세우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다름 아닌 돈을 섬기는 것 곧 맘모니즘(Mammonisim)입니다. 누구도 하나님과 맘몬(Mammon)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시 유대인들을 향하여 사실상 이렇게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 너희들이 실제로는 맘몬을 섬기면서도 말로는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데, 그런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따라서 우리가 진정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면,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하고 순종하는 자라면, 맘몬을 의지하는 우상 숭배를 포기하고, 우리에게 하나님 노릇 해주시고 아빠 노릇 해주시는 그 하나님께 의지하여 일용할 양식을 그 하나님께로부터 얻는 그런 자세로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공중에 나는 새를 보고 또 들에 피는 백합화를 보면서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빠는 공중에 나는 새를 먹이시고 들에 핀 백합화를 입히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돈으로 자신의 안녕과 안전을 확보하려는 그런 우상 숭배를 청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상 숭배를 청산하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삶은 곧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자세로 나타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6장19절에서 7장11절까지의 이 단락은 십계명의 제1계명, 즉 하나님만 의지하고 섬기면서 우상 숭배는 배격해야 한다는 것에 대한 설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사랑의 이중 계명에 대한 예수님의 설교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긴 설교가 이어진 다음 7장12-27절의 단락, 즉 마지막 결론적 권면이 다섯 번쩨로 나옵니다. 여기서는 열매 곧 행위의 열매를 보고 그 나무를 알 수 있다고 합니다. 그것을 예수께서는 지금 자신이 새롭게 제시하시는 이 법을 듣기만 하는 자는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어리석은 자요, 이것을 듣고 행하는 자는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지혜 있는 자라는 비유를 제시하시면서 마지막으로 권면하십니다. 주기도가 제자의 삶에 중심이다 이처럼 마태복음의 산산수훈을 다섯 부분으로 구분할수 있습니다. 방금 분석한 구조에 따르 면,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는 산상수훈의 전체 문맥에서 가운데 부분 곧 6장1-18절의 종교 행위에 대한 가르침 단락에 들어 있습니다. 이 종교 행위에 대한 가르침의 단락인 6장1-18절 의 종교 행위에 대한 가르침 단락에 들어 있습니다. 이 종교 행위에 대한 가르침의 단락인 6장1-18절의 본문에 대해서도 좀더 자세하게 구조를 분석할 수 있습니다. 이 단락에서는 세 개의 대표적인 종교 행위 혹은 경건 행위를 다루고 있습니다. .첫째는 자선 혹은 구제입니다.(6:1-4), 예수께서는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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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가르칩니다. 당시 유대인들 처럼 자기를 드러내 놓고 자랑하면서 자기 과시나 자기 만족을 위해 자선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새로운 가르침을 주십니다.
둘째는 기도에 대한 가르침입니다(6:5-15)
셋째는 금식에 대한 가르침입니다(6:16-18), 금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지 말라고 강조합니다. 우리는 가끔 40일 금식 기도 한다고 광고하고 다니는데,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금식을 하려면 즐겁게 하라는 것입니다. 금식에 대한 새로운 가르침입니다.
유대교의 대표적 종교 행위인 자선과 기도와 금식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이 단락에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가 들어 있으며, 자선과 기도와 금식에 대한 가르침 중에서도 기도에 관한 가르침 속에 이 주기도문이 속합니다. 즉 자선, 기도, 금식으로 대표되는 유대교의 종교 행위에 대한 예수의 새로운 가르침의 중심 부분에 기도를 위치시켰고, 그 기도에 대한 예수의 새로운 가르침에 주기도문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의 구조에 대하여 한걸음 더 들어가 자세히 관찰해 보면, 이 기도에 대한 가르침 부분에서도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는 중심 자리를 차지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6장5-15절이 기도에 관한 가르침인데, 6장5-9절 전반부에서 그릇된 기도들을 먼저 다룹니다.
첫 번째는 유대인들의 그릇된 기도를 지적하고, 두 번째는 이방인들의 그릇된 기도를 비판합니다. 그리고는 “너희들은 그렇게 기도하면 안된다” 고 하시면서, 이제 드디어 예수께서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이어지는 14-15절에서 주기도문의 강조점을 되새김하는 방식으로 다시 한번 이웃에 대한 죄 용서를 요구 하면서 (그렇게 함으로써 죄 용서의 문제를 강조하시면서) 이 단락을 마칩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마태복음의 주기도문과 관련된 문학적 문맥은 아주 조직적으로 짜여져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원래 문학적으로 아주 정교하게 구성된 복음서입니다. 예컨데, 마태복음 전체는 다섯개의 강론과 다섯 개의 설교로 아주 정교하게 교직(交織)되어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마태복음은 문학적으로 아주 치밀한 구조를 가진 책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태는 마태복음 전체를 그렇게 정교하게 문학적으로 조직했을 뿐만 아니라, 이와 같은 자신의 문학적 성향을 산상수훈 문맥에도 그대로 적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앞에서 본것처럼, 마태는 산상수훈도 굉장히 정교하게 구성해 놓았습니다.
마태는 산상수훈을 매우 치밀한 문학적 구조로 짜면서 주기도문을 그 한가운데 위치하도록 했습니다. 즉 산상수훈(마5장-7장) 가운데서도 가운데 부분에 종교적 관행 혹은 종교 행위에 대한 가르침을 위치 시켰고(마6:1-18), 또 그 종교 행위에 대한 가르침 중에서도 중심 위치에 기도에 관한 가르침을 배열했으며(마6:5-15), 그 가르침 중에서도 또 중앙 핵심부에 주기도문이 자리하도록 하는(마6:9b-10) 문학적 구조를 취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태가 예수의 가르침을 기록할 때 예수께서 강조한 부분을 잘 살리기 위해 일부러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산상수훈이라는 예수의 제자도 실천에 대한 가르침의 ‘핵심의 핵심’ 에 위치하도록 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마태복음의 주기도문은 매우 치밀한 문학적 구조 속에 담겨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시사하는 것입니까? 왜 주기도문은 산상수훈의 핵심 중에 핵심에 위치하도록 구
조되어 있는 것일까요? 마태는 이러한 문학적 구조를 통해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요?
그것은, 모세의 율법을 능가하는 완벽한 법을 우리에게 전하신 예수님, 다시 말해 하나님의 뜻을 완벽하게 계시해 주시고 전달해 주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잘 실천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
의 백성이요 예수님의 제자로서 해야 할 도리인데, 그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고 예수의 가르침을 잘 순종하는 동력이 바로 이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에서 나온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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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도가 우리의 제자도의 가장 기본이고 우리의 제자도를 가능케 하는 것임을 말하기 위해 마태는 이렇듯 정교하게 산상수훈을 조직했고, 그 핵심에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넣어 놓
았습니다. 결국 그가 말하고자 한 것은, 기도야말로 하나님의 백성의 삶에서 가장 근본 도리이다. 이 기도로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가 삶의 힘을 얻는다. 혹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도의 가장 중심에 기도가 있다는 것 등입니다.
하나님의 백성 됨의 가장 핵심에 기도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기도가 어떤 기도입니까?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 입니다. 하나님 백성됨의 가장 근본 또는 중심에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로서 우리는 이렇게 기도해야 하며, 이 기도를 하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가 선포하는 하나님 나라의 제자들로 살아가는 방식임을 마태는 말하고 있습니다.
주기도문은‘하나님 백성’이 하는 기도이다
그러면 이제 범위를 좁혀 주기도문이 들어 있는 마태복음 6장의 주기도문 전후 문맥 즉 6장5-15절의 단락을 분석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기도 부분의 중심에 주기도문 위치 |
① 6:5 (유대인들의) 위선적인 공중 기도 ⇒ 그 이유 / 세상적 상 받음 ② 6:6 올바른 기도 : 아버지께 드리는 은밀한 기도 ⇒ 그 이유 / 아버지의 상 ③ 6:7-8a 이방인들의 그릇된 다변의 기도 ⇒ 그 이유 / 그릇된 신학 ④ 6:8b 올바른 기도의 이유 : 너희 아버지께서 너희의 필요를 아신다. ⑤ 6:9-13 올바른 기도에 대한 가르침 6:9b-13 주기도문 6:9b 부름 6:9c-10 세 개의 ‘당신’ 청원들 6:11-13 세 개의 ‘당신’ 청원들 바)6:14-15 죄 용서 |
마태는 여기서도 자신의 문학적 특성을 좇아 본문을 아주 정교하게 구성해 놓고 있습니다. 자선, 기도, 금식으로 대표되는 세 가지 중요한 종교 행위들 가운데 기도를 다루는 이 단락에서, 마태는 기도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기록함에 있어서 유대인들의 위선적인 기도를
지적하는 것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구에서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유대인들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서 떠들썩하게 기도하여 사람들에게 자신이 얼마나 기도의 사람이고 얼마나 경건한 사람인지 내세우려 했는데, 예수님은 그들을 향하여 외식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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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들이라고 진단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유대인들처럼 하지말고 “너는 기도할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게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마 6:6)고 가르칩니다.
기도라는 것은 하나님과 나 사이의 은밀한 만남과 대화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가능한 한
은밀한 중에 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과의 만남이 의식이 되고 하나님에 대한 개인적인 절실한 헌신이 이루어집니다.
사람들에게 보이기위해 기도하면 남에 대한 의식이 더 커지고, 다른 사람 앞에서 나의 체면과 명예가 어떻게 될까 하는 염려가 우리를 압도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하는 기도가 되지 못하기 쉽습니다. 우리는 심지어 통성 기도하는 순간에도 내가 하나님께 은밀하게 한다는 정신
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남에게 뽐내려고 혹은 남을 의식해서 기도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기도를 청산 유수처럼 잘하는 사람을 간혹 보는데, 그 사람이 오랫동안 신앙 생활한 것을 은근히 자랑하거나 연약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자신을 과시하려는 마음을 갖고 있다면, 그것은 곧 유대인처럼 기도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기도 관행’ 에 대항하여 이렇게 가르친 예수는 이제 ‘이방인들의 기도 관행’ 에 대항해서도 새롭게 가르칩니다. 여기서 예수가 지적하는 이방인의 기도 관행의 특징은 중언부언하는 기도입니다. 그래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이방인처럼 중언부언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7절 말씀을 봅시다.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왜 중언부언하지 말아야 합니까? 구약성경에 의하면, 우상이란 나무 조각이나 돌 조각에 불과한 것입니다. 나무 조각이나 돌 조각을 새겨서는 신이라고 했기 때문에, 구약 선지자들은 우상에 대해 뭐라고 합니까? 눈이 멀었고 귀가 먹었다고 했습니다. 아무리 기도해 봐야 듣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엘리야와 대결한 바알 선지자들이 아무리 소리 높여 기도해 봐야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 이방인들의 우상은 나무 조각과 돌 조각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자기들이 섬기는 우상이 귀먹고 눈먼 존재이기 때문에 이방인들은 자꾸 중언부언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우리의 문제와 필요를 다 아시는 아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까 한마디만 하면 됩니다. 아니 우리가 아뢰기도 전에 미리 아시는 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중언부언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한국 사람들이 특별히 조심해야 할 게 바로 이 중언부언하지 말라는 가르침이 아닌가 합니다. 종종 중언부언하는 기도를 듣게 되는데, 그렇게 기도하는 사람은 아마 이방인들이 그들의 신에 대하여 갖고 있는 생각과 비슷하게 하나님을 생각하기 때문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만일 중언부언하는 기도를 한다면 이방인과 같은 셈입니다.
그러면 왜 유대인처럼, 이방인처럼 기도하지 말라는 것입니까? 8절을 봅시다.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시기 때문에 유대인처럼도, 이방인처럼도 기도하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아주 의식적으로 이 주기도가 ‘하나님 나라 백성’ 의 기본적인 기도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이 기도는 ‘유대인’ 의 기도와도 다르고 ‘이방인’ 의 기도와도 다르다는 것입니다.
즉 기도는 기도하는 자의 정체성을 보여 주는 것이며, 예수의 제자라면 지금 예수께서 새롭게 가르치는 대로 기도해야 합니다. 물론 내용으로 보면 유대의 기도들과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 사이에 같은 부분이 잇지만 이 문제는 뒷부분에서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그러면, 마태복음 6장에 나오는 주기도문의 바로 위아래 붙어 있는 근접 문맥을 조금 더 분석해 보겠습니다. 9절부터 13절까지가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 곧 ‘주기도문(Lord’s Prayer)’ 입니다.
김세윤 박사의 주기도문 강해
주기도문강해 전문 입니다. 페이지는 letter size 에 맞도록 한것 입니다.
주기도문의 서론 - 1 -
주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인 주기도문 은 성도들이 매일 낭송하며 기도할 만큼 자주 대하는 것일 뿐아니라 사실은 성도들의 신앙생활에서 필요한 가장 중요한 내용들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기도문을 할 때마다 정성을 다하여 바른 의미를 알고 진심으로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며,이 기도문을 잘 살펴보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입니다.
우선 주께서 가르처 주신 기도의 본문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주기도문의 본문은 우리에게 두 개의 판(版), 즉 마태복음판과 누가복음판으로 주어져 있습니다. 마태판은 마태복음 6장9~13절까지의 말씀이고, 누가판은 누가복음 11장2~4절까지의 말씀입니다.
먼저 마태복음 6장9~13절 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게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다음은 누가복음 11장2~4절 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기도하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소서하라.
왜 두개의 주기도문 본문이 있는가
우선 소위 ‘공관복음서 문제’에 속하기도 하는 신학적인 문제 한가지를 짚고 넘어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문제는 다름이 아니라 방금 읽었듯이 주기도문에 대한 마태복음의 본문과 누가복음의 본문이 서로 다르다는 것에 대한 것입니다. 즉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의 본문이 마태판과 누가판이 서로 다른데,이 문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느냐에 관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약 신학을 연구하는 데 있어, 공관복음서 가운데 마가복음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으면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는 기록되어 있는 마태판과 누가판의 공통 본문들을 학자들은 ‘Q자료’라는 이름을 붙여 부릅니다. 이 용어를 사용하여 방금 제기한 주기도문의 마태판과 누가판이 다르다는 문제에 대하여 간략하게 이해하고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이 문제에 대한 첫 번째로 가능한 설명은, 이 두 자료 곧 주기도문에 대한 마태판과 누가판이 우리가 보통 편리하게 부르는 ‘Q자료’에서 온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마태복음과 누가복음 두 복음서 본문에 모두 있기 때문에 이 주기도문은 Q 라는 자료에서 온 것일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또 다른 설명은, 마태복음판은 이른바 마태의 특수자료(보통 M이 라는 기호사용)에서, 누가복음은 누가의 특수 자료(보통 L이라고 표시)에서 이 주기도문을 각각 전승받아 기록했을 가능성입니다.
세번째로 가능한 설명은,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중 하나는 Q에서 자료를 받았고, 그 나머지 하나는 자신의 특수자료 즉 M이나 L에서 전승받았을 가능성입니다.
마지막으로 생각해 볼수 있는 것은, 누가가 마태에 의지하여 썼을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나오는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의 본문에 대하여 왜 이렇게 복잡하
게 생각합니까? 주기도문을 수록하고 있는 성경 본문에 대한 마태복음판과 누가복음판이 상당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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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통점이 있으면서, 동시에 상당 부분 다른 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방금 말씀드린 몇가지 가설들 가운데서 어느 것이 가장 합당한지를 판정하기란 상당히 어렵습니다.
따라서 가능성 있어 보이는 네 가지 가설들 가운데 어느 것이 정확하고 옳은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최근 대다수의 학자들은 그 네 가지 견해 가운데 처음 세가지의 하나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많은 학자들은 첫 번째 견해를 가장 가능성이 많다고 지지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누가복음판 주기도문의 문학적 맥락
다음으로, 주께서 가르치신 이 기도를 ?펴보기 위해서는 먼저 이 기도 본문들이 들어 있는 맥락을 먼저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누가복음판의 주기도문에 대한 문학적 맥락을 먼저 보도록 하겠습니다. 누가복음 11장 2~4절의 주기도문 본문에 앞서는 1절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처 주옵소서.
예수의 제자 가운데 한 명이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했습니다. “세례 요한도 그의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었는데, 이제 선생님도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셔야 합니다” 라는 것입니다.
문맥으로 볼 때, 예수는 그 요청에 응하여 기도를 가르쳤습니다.
여기서 일단 우리는 제자들이 예수에게 이런 요청을 했다는 것이 사실은 매우 놀라운 것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에수의 제자들은 유대인이었고, 유대인들은 기도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 입니다. 다시 말해, 제자들이 기도를 할 줄 몰라서 예수에게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구약의 시편들이 사실은 다 기도 아닙니까? 더욱이 예수 당시 유대에는 유대인이라면 누구나잘 알고있는 유명한 기도들이 이미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는 ‘카디쉬(Kaddish)’라는 좀 짧은형태의 기도이고, 다른 하나는 ‘18번 축복 기도’즉 ‘세모네 에레스(Shemone Esre)’라는 긴형태의 기도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카디쉬와 같은 기도문들을 매일 두세 번씩 낭송 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기도를 많이 알고 있었고, 많이 하고 있었고, 시편 기도를 따라서 하곤 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예수에게 기도를 가츠쳐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제자들의 요청은 상당히 놀라운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기도를 가르쳐 달라는 제자들의 요청에 아무런 의문이 없는 것처럼 그냥 넘어갈수 없습니다. 왜 제자들이 굳이 또다시 예수에게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했을까 하는 질문이 당연히 생깁니다.
주기도문 은 새로운 하나님 나라 운동의 요약이다
기도를 잘 알고 있었고 기도를 늘 많이 하면서 지낸 유대인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이 예수에게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요청한 데는 다음과 같은 배경이 있습니다.
예수 당시에는 메시아가 곧 와서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리라는 기대가 유대인들 간에 팽배해 있었습니다. 그리고 메시아가 와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도록 하려면 그에 앞서 유대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새롭게 헌신하고 순종하는 일들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회개와 헌신과 순종을 새롭게 다짐해야 한다는 이런 현상을 한마디로 말하면 부흥 운동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 당시 유대인들과 유대교 내에는 종말을 대비한 부흥 운동이 많이 일어났고, 이 운동을 하는 사람들과 단체들도 참 많았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우리가 성경에서 자주 보는 바리새인들의 운동입니다. 바리새인들도 회개하고 율법을 철두철미하게 지킬 정도로 하나님께 헌신함으로써 메시아가 빨리 와서 하나님 나라가 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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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도록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 바리새 운동은 이스라엘 전체를 하나님의 제사장 민족으로 보려는 민족적 이상을 실현하려고 한 중산층 평신도 경건 운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에센파 운동도 그 예입니다. 1947년부터 이스라엘 사해 주변의 쿰란(Qumran) 이라는 동네의 동굴에서 이른바 사해 문서들이 발견되기 시작했습니다. 이 문서들의 발견과 함께 주목 받게 된 예수 당시 사해 주변 쿰란에 모여 살던 일단의 무리들을 에센파(Essenes)라고 합니다. 이들은 쿰란 동굴에 은거하면서 성경 즉 구약을 연구하고, 서로 새롭게 회개하고 율법을 새롭게 잘 지키기로 헌신했는데, 이들도 바로 예수 당시에 있던 그 부흥 운동을 한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이런 부흥 운동을 한 사람 중에 하나가 우리가 잘 아는 세례 요한입니다. 세례 요한의 메시지가 무엇이었습니까?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천국 즉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라는 것, 다시 말해 임박한 종말과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는 것이 세례 요한의 메시지였습니다. 그 심판에 대비해 회개하기를 촉구했고, 그리고 회개에 대한 표징으로 세례를 받도록 즉 옛 죄를 다 씻어 내는 의식을 하라는 그런 회개와 부흥 운동을 한것입니다. 세례 요한의 운동이 바로 회개와 헌신의 부흥 운동인 것입니다. 곧 도래할 하나님의 나라를 맞을 준비를 하도록 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 에센인들, 그리고 세례 요한처럼 이런 부흥 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신학적인 이해와 이상과 소망 등을 담아 표현하는 특별한 기도문을 작성했습니다. 이런 기도문들은 부흥 운동을 하는 각각의 단체들이 내세우는 하나님에 대한 이해, 하나님의 구원사에 대한 이해, 자신들의 이상과 소망 등을 아주 압축적으로 반영하는 것이었습니다. 앞서 소개한 카디쉬 기도가 그렇고, 18번 축복 기도가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요한도 자기의 신학과 종말론적 소망을 표현하는 기도문을 자신의 제자들에게 가르쳐서 날마다 하나님께 기도하도록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의 회개와 부흥 운동에 대한 신학을 잘 표현하고 그 운동의 소망과 이상을 잘 표현하는 기도를 가르쳤던 것 같습니다. 그것은 당시의 관행으로, 부흥 운동을 하는 단체들에게 흔히 있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원래 예수와 예수의 제자들은 세례 요한이 이끄는 운동에 동참한 사람들 이었습니다. 우리는 사복음서에서 모두 그 흔적을 볼 수 있는데, 특별히 요한복음 1장 19~51절까지 본문이 그것을 잘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는 원래 세례 요한의 제자였고, 때문에 요한의 부흥 운동에 동참했습니다. 그러다가 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이후 요한의 운동으로부터 점차 독립하여 하나님 나라(the Kingdom of God) 운동을 새롭게 시작한 것으로 사복음서들은 모두 그리고 있습니다.
사복음서 모두 예수가 세례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았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마3:13~17,1:9~11: 눅3:21~22: 요1:29-34)
여기서 우리는 세례 요한과 예수의 관계에 대해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는 세례 요한의 운동에 동참한 분으로, 일단 세례 요한이 선포한 회개이고 하나님의 나라 도래를 준비하라는 메시지를 이어 받습니다. 회개하고 하나님의 통치에 스스로를 헌신해야 한다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세례 요한의 가르침을 이어받습니다. 그러면서도 강조점을 좀 달리합니다.
요한이 불로 임하실 하나님의 심판을 강조한 반면, 예수는 심판을 통한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강조했습니다. 불로 비유되는 심판을 말씀하지만 심판을 통한 하나님의 용서에 강조점을 두었습니다. 강조의 초점이 다르게 나타납니다.
이처럼, 예수는 요한 운동에서 독립하여 하나님 나라 운동을 새롭게 한다는 점에서 요한의 가르침과 일부 비슷하면서도 상당히 새로운 가르침을 통해 새로운 정신, 새로운 강조점으로 하나님 나라 운동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이 심판에 대비한 극도의 절세적 삶 또는 금욕적 삶을 요구했다면, 예수는 그와 반대적인 방향으로 나아간 것을 복음서에서 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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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자신의 하나님 나라 복음을 따라 죄인들을 영접하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용서를 선언하고, 그들과 먹고 마시는 잔치를 자주 벌이는 모습을 많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밖에도 여러 가지 비슷한 점과 대조점을 찾아볼 수 있지만, 이렇게 예수는 요한 운동에서 독립하여 새로운 정신, 새로운 이상, 새로운 소망, 새로운 태도 등을 표방하며 하나님 나라 운동을 시작 했습니다.
이와 함께 요한의 제자이던 일부 사람들이 예수와 함께 또는 예수를 따라서 예수의 제자가 되어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에 동참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를 따라 나선 제자들 중 하나가 예수에게 기도를 요청합니다(눅11:1)
기도를 요청하는 이 장면은 풀어 설명하자면 이런 것입니다.
“선생께서 이제 하나님의 구원사의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여 요한 운동과는 강조점을 좀 달리하는 하나님 나라 운동을 하니, 선생을 따르는 우리가 계속해서 요한이 가르쳐준 기도를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요한이 자기 시대에 자신이 주도한 하나님 나라 운동을 위해 그에 맞는 기도문을 가르쳤듯이 선생도 선생의 구원사의 새 시대에 걸 맞는 기도를 가르치셔야 하지 않습니까? 기도를 가르쳐 주십시오”
이것이 바로 누가복음 11장 1절과 2절의 전반부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예수의 공동체에 자신들의 신학과 자신들의 이상과 소망을 담아서 표현하는 새로운 기도가 필요하게 된 것입니다. 요한이 가르친 기도가 요한의 신학을 담아서 요한 공동체의 정체성을 잘 나타냈듯이, 예수 운동도 예수의 가르친 신학과 예수의 이상과 예수의 소망 등을 잘 담아 표현함으로 예수 공동체, 예수가 지금 새롭게 구성하는 하나님 나라 공동체의 정체성(Identity) 을 가장 잘 나타낼 기도가 필요하게 되리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예수에게 이런 기도를 가르쳐 달라 한 것에 대한 응답으로 이 주기도문이 주어진 것입니다.
누가복음의 주기도문 본문의 전(前) 문맥은 이와 같은 배경 속에서 제자들이 예수에게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요구한 것에 대한 응답으로 이 주기도문이 주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나오게 된 것이 바로 누가복음판이 소개하고 있는 주기도문입니다. 이 ‘주기도문’ 이라는 단어는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요약하여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나 ‘주기도문’ 이라고 하는 것보다는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라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어쨌든 이런 맥락에서 누가복음을 보면,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야말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함으로써 새롭게 창조하고 구성하려는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의 신앙과 이상과 소망을 가장 잘 담아 표현해 주는 것임을 암시받을수 있습니다. 즉 이 기도는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의 정체성을 가장 집약적으로 잘 나타내 주는 그런 성격의 기도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하나님나라 운동에 동참하는 모든 제자들이 함께, 항상, 가장 기본적으로 드려야 하는 기도가 주기도문이며, 이는 또한 기독교 신앙의 중심적인 자리를 차지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주기도문은 예수의 가르침과 사역 전체의 요약 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여 예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에게 하나의 새로운 기도문을 가르쳐 주게 됩니다.
주기도문을 교회의 기도로 공식화하다
여기서 우리는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 가 교회안에서 공식적인 기도문으로 자리잡은 것과 관련
그 배경을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예수님 당시 유대교 안에는 아마 몇 개의 중요한 기도문들이 공적인 기도로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중에 두 개의 기도를 이미 여러분에게 소개했습니다
그 하나는 ‘카디쉬’라는 기도로서, 이 기도는 유대 회당에서 설교 끝에 함께 낭송한 기도이며, 짧막한 형태의 기도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18번 축복 기도’입니다. 이 기도는 유대인들이 하루에 세번 즉 아침과 오후가 시작되는 시간 그리고 저녁이 시작되는 시간에 각각 반드시 드려야 하는 기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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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18번 축복 기도’야말로 모든 유대인들에게는 가장 기본적인 기도였습니다.
카디쉬(Kaddish)기도 |
그분의 이름이 높여지고 거룩히 여겨지이다 그분이 그분의 뜻에 따라 지으신 세상 안에서 그분이 자신의 나라 / 다스리심이 다스리게 하시길 너희들의 생애에 그리고 너희들의 날들에 그리고 이스라엘 집안 전체의 생애에 신속히 그리고 조만간 그분의 위대한 이름이 영원에서 영원까지 찬양되소서 이에대해 말하라. 아멘 |
18번 축복 기도(Tepillah, Shemone Esre) |
1.주님,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아브라함의 하나님,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전능하시고 무서우신 하나님, 하늘과 땅을 지으신 지고하신 하나님, 우리의 방패 그리고 우리의 조상들의 방패이신 하나님, 매세대마다 우리의 의지할 분이신 당신을 축복하나이다. 아브라함의 방패이신 주님, 당신을 축복하나이다 2.당신은 전능하셔서 교만한 자들을 겸손케 하시는 이시고, 강하시고 포악한 자들을 심판하시는 분이십니다. 당신은 영원히 사시고 죽은 자들을 일으키시며, 바람을 불게 하시고 이슬을 내리시며, 산 자들에게 공급하여 주시고 죽은 자들을 살리시며, 단숨에 우리의 구원이 일어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죽은 자들을 살리시는 주님, 당신을 축복합니다. 3.당신은 거룩하시고 당신의 이름은 경외로우시며, 당신 외에는 다른 신이 없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이신 주님, 당신을 축복합니다. 4.우리 아버지, 우리에게 당신으로부터 오는 지식을 주시고, 당신의 율법 으로부터 오는 이해와 판단력을 주시옵소서, 지식을 주시는 주님, 당신을 축복합니다. 5.주여 우리를 당신께로 돌이키소서, 우리가 회개하겠나이다. 예전과 같이 우리의 날들을 새롭게 하소서, 회개를 기뻐하시는 당신을 축복합니다. .6.우리 아버지, 우리가 당신께 죄를 지었사오니 우리를 용서하소서, 우리의 악행들을 지워 버리시고 당신의 시야에서 제거하소서, 당신의 자비가 풍성하시니까요. 용서를 풍성히 베푸시는 당신을 축복합니다. 7.우리의 고난을 보시고, 우리를 위해 호소하시며, 당신의 이름을 인하여 우리를 구속하소서, 이스라엘의 구속자이신 주님, 당신을 축복합니다. 8.우리 하나님이신 주여, 우리의 심장의 아픔을 치유하시며, 슬픔과 탄식을 우리로부터 제거하시소 우리의 상처를 치유하소서,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의 병자들을 치유하시는 당신을 축복합니다. -6- 9.우리 하나님이신 주여, 우리를 위해 금년을 축복하시고, 금년의 모든 생산을 풍성하게 하소서, 우리의 최후 구속의 해를 빨리 가져오소서. 땅에 이슬과 비를 내려주시고, 당신의 사랑의 보고로부터 세상을 만족케 하시며, 우리 손의 일을 축복하소서, 해마다 축복하시는 주님, 당신을 축복합니다. 110..우리의 해방을 큰 나팔을 불어 선포하시고, 깃발을 들어 우리의 흩어진 자들을 모으소서,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의 추방당한 자들을 모으시는 주님, 당신을 축복합니다. 11.우리의 심판관(사사)들을 예전과 같이 회복시키시고 우리의 지혜자들을 처음과 같이 회복시켜 주소서, 오직 당신만이 우리를 다스리소서 심판을 사랑하시는 주님, 당신을 축복합니다. 12. 그리고 배교자들에게는 소망이 없게하시고, 교만한 나라는 빨리 우리의 생애에 뿌리 뽑히게 하소서 그리고 나사렛 당원들과 이단자들은 빨리 망하게하시고, 그들의 생명책에서 지워지게 하시며, 그들이 의인들과 함께 기록되게 하지마소서 교만한 자들을 겸손케하시는 주님,당신을 축복합니다. 13. 당신의 자비가 의로운 개종자들에게 풍성히 내리게 하시고, 당신의 기쁜 뜻을 행하는 자들과 더불어 우리에게 풍성한 상을 주소서, 의인들의 신뢰처이신 주님, 당신을 축복합니다. 14. 우리 하나님이신 주여, 당신의 풍성한 자비로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에, 당신의 도성 예루살렘에, 영광의 거처인 시온에, 당신의 의로운 메시아 다윗가의 왕권에 자비를 베푸소서, 예루살렘을 세우시는 다윗의 하나님이신 주님, 당신을 축복합니다. 1 15. 우리 하나님이신 주여, 우리의 기도의 음성을 들으시고, 우리에게 자비로우소서, 당신은 은혜로우시고 자비로우시니이다. 기도를 들으시는 주님, 당신을 축복합니다. 1 16. 우리 하나님이신 주여, 시온에 기꺼이 거처하소서,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당신의 종들로 하여금 당신을 섬기게 하소서, 우리가 경외심으로 예배하는 주님, 당신을 축복합니다. 17. 우리 하나님이신 주님,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당신이 우리에게 허락하시고, 우리에게 그리고 우리보다 앞선 우리의 조상들에게 행하신 모든 선하심과 은혜와 자비를 인하여 찬양하나이다. 우리가 실족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고 하면, 오 주여, 당신의 은혜가 우리를 구출합니다. 오로지 선하신 이인 주여, 당신을 축복합니다. 18.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 당신의 도성, 당신의 기업에 당신의 평화를 가져오소서, 그리고 우리 모두를 함께 축복하소서, 평화를 이루시는 주님, 당신을 축복합니다. |
따라서 당시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 즉 소위 ‘주기도문’이 처음에는 아마도 ‘18번 축복 기도’와 함께 드려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다 점차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가 18번 축복 기도를 대 신했다가 마침내 교회의 유일한 공통 기도로 자리를 잡게 된 것 같습니다. 이와 같은 점진적인 변화의
과정은 어렵지 않게 이해할수 있습니다. 초대 교회는 점차 이방인 선교를 하게 되었고 그를 통해 이방인 들이 많이 늘어나고 18번 축복 기도의 전통을 받아들이지 않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늘어나는 상황에 이르게 됩니다.
특히 주후 66~70년까지의 유대 전쟁을 기점으로 해서 교회와 유대교는 완전히 분리하게 됩니다. 이 유대 전쟁 직후, 유대교 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을 이단자로 규정하고 유대 회당에서 많이 축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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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에대한 유대교의 태도가 18번 축복 기도에 반영 되어 있는데, 그 열두번째 기도는 이렇습니다.
“배교자들에게는 소망이 없게 하시고 교만한 나라는 빨리 우리의 생애에 뿌리 뽑히게 하소서, 그리고 나사렛 당원들과 이단자들은 빨리 망하게 하시고 그들이 생명책에서 지워지게 하시며, 그들이 의인들과 함께 기록되지 말게 하소서, 교만한 자들은 겸손케 하시는 주님, 당신을 축복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을 저주하는 대목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반영 합니까? 이 무렵에 벌써 예수당 혹은 나사렛당 곧 그리스도인들을 이단자로 규정해 그들을 유대 회당에서 축출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음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이때 교회와 유대 회당이 좀더 명백히 분리되면서 교회가 유대교와 공식적으로 관계를 끊게 됩니다.
이 무렵, 즉 한편으로는 이방인들이 점점 교회의 다수가 되어가고 다른 한편으로는 유대교에서 교회가 분리되는 상황 속에서 18번 축복 기도는 이제 교회의 기도로는 사라지고 맙니다. 그 대신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가 교회 공동체의 기본적인 공중 기도로 자리잡게 된 것입니다.
마태복음판 주기도문의 문학적 맥락
이제 마태복음판의 주기도문 문맥을 살펴보겠습니다. 마태복음 5장에서 7장까지를 이른바 산상수훈이라고 하는데, 산상수훈 전체를 놓고 보면 그 한가운데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가 위치 하고 있습니다.
마태는 이 주기도문을 산상수훈 본문의 구조상 한가운데 즉 핵심에 위치시켜 놓았습니다. 이와같은 구조는 주기도문이 얼마나 중요한지 를 명확하게 보여 줍니다. 산상수훈은 크게 다섯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 첫째가 마태복음 5장3-16인데, 이것을 소위 팔복이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새롭게 창조하고 구성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선언하신 여덟 가지 복을 가리킵니다. 이 여덟 번의 복 선언은 마태복음 5장에서 시작하는 산상수훈 전체의 서문에 속합니다. 이 팔복선언을 통해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심령이 가난하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도록 애통해 하고 평화를 도모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함을 밝히셨고, 이를 통하여 마침내 세상의 소금이 되고 빛이 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나의 제자인 너희가 팔복이 말하는 그런 사람이 되어 세상에서 빛의 노릇을 하는 것이 너희의 사명이다” 라고 하신 것입니다. 또한 팔복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면 제일 먼저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를 말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자기 스스로 자신의 생명과 안전을 확보하려고 생각하지 말고 오로지 하나님의 하나님 노릇 해주심에 자신들의 소망을 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사탄이 악과 고난으로 통치하는 세상에서 애통해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온유한 사람이 되어야 하고, 의에 대하여 주리고 목말라하는 사람,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8-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며, 곧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에서 위로를 받을 자들이 라는 것입니다. 이 여덟 가지를 통해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가 어떤 사람들로 구성되는지를 구체적으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팔복의 말씀은 사실상 하나님의 백성의 정체성(Identity)을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 팔복 선언을 중심으로, 이어지는 13-16절 말씀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가 세상에서 소금으로 존재하여 부패를 마고 세상을 살맛나게 하는 공동체가 된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공동체는 세상에 대해 빛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빛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빛, 곧 하나님의 계시의 전달자라는 의미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제자들 곧 교회 공동체는 하나님의 계시와 구원의 전달자입니다. 제자들의 사명을 규명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백성의 정체성과 사명이 마치 동전의 앞뒤처럼 연결되고 잇습니다. 여기까지가 산상수훈의 서론에 해당합니다. 두번째 단락은 5장17-48절인데, 소위 반대 어법(antipathical statement)을 통해 새로운 법이 제시됩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의 새로운 원리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새로운 법 선언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이 가운데서 특히 우리에게 많이 알려져 있는 대표적인 것은 살인에 관한 법과 간음에 대한 법일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이런 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옛 사람들에게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이 주어졌음을 너희들이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들에게 말한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으면 간음을 한 것이다. 또 옛 사람들에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이 주어졌음을 너희가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들에게 말한다. 형제를 미워하고 ‘바보’ ‘멍텅구리’ 라 하면 살인을 한 셈이다. 그러면 공회에 넘겨져 재판을 받게되고 하나님의 심판에 이르게 된다.” 여기서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들은 원래 어디서 나왔습니까? 십계명에서 나왔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 계명들은 원래 모세의 율법입니다. 그런데 예수의 가르침은 계명들을 언급한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는 형식으로 표현되었습니다. 즉 이것은 예수께서 지금 자신이 선언하는 법이 모세의 율법을 능가하는, 모세의 율법보다 완벽한 것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17-48절까지 선언한 예수의 새로운 법의 성격이 무엇인지를 보여 줍니다. 모세의 법의 성격은 무엇입니까?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등과 같이 인간 행위의 외형적 최소한을 규제하는 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에 비해, 지금 예수가 선언하는 이 새로운 법의 성격은 어떻습니까? 행위를 유발시키는 동기의 내면적 최대한을 규제하고 요구하는 법임을 보여 줍니다. 모세의 옛 법에 의하면, 살인 이라는 외형적 행위 최소한을 규제하는 것이므로 실제로 남의 목을 칼로 치지 않으면 살인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새 법은 그런 살인 행위를 유발시키는 형제에 대한 무시의 태도나 증오의 태도 등 과 같은 동기의 내면의 최대한을 규제하는 법입니다. 간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을 좀더 극명하게 드러내기 위해 예수께서는 반대 어법을 사용하여 말씀하십니다. ‘행위의 외적 최소한’ 을 규제하는 법이 아니고, 그 ‘행위를 유발시키는 동기의 내면적 최대한’ 을 규제하고 요구하는 법임을 확연히 드러내는 것입니다. 결국 이것은 예수가 모세의 권위를 훨씬 능가하는 권위를 가지신 분으로 하나님의 법을 모 세를 통해 계시된 것보다 훨씬 더 완벽하게 계시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이것이 마태복음 5 장입니다. 다음, 세 번째로 구분할 수 있는 단락은 이어지는 6장1-18절입니다. 이 부분은 종교적 삶의 실천들 곧 경건 행위들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금식, 기도, 자선 행위 등과 같은 유대교의 대표적인 종교 행위들이 언급됩니다. 그런데 바로 이곳에 주기도문이 있습니다. -9- 네 번째 단락은 6장19절에서 7장11절까지인데, 여기에는 십계명의 제1계명에 대한 예수의 설교가 나옵니다. 제1계명이 무엇입니까? 여호와 외에는 다른 신을 섬겨서는 안된다. 우상 숭배해서는 안된다 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헌신을 가르키는 것으로, 우상 숭배를 배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헌신의 반대말은 우상 숭배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가장 절실하게 우리 모두에게 위협적으로 다가오는 우상의 형태로 내세우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다름 아닌 돈을 섬기는 것 곧 맘모니즘(Mammonisim)입니다. 누구도 하나님과 맘몬(Mammon)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시 유대인들을 향하여 사실상 이렇게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 너희들이 실제로는 맘몬을 섬기면서도 말로는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데, 그런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따라서 우리가 진정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면,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하고 순종하는 자라면, 맘몬을 의지하는 우상 숭배를 포기하고, 우리에게 하나님 노릇 해주시고 아빠 노릇 해주시는 그 하나님께 의지하여 일용할 양식을 그 하나님께로부터 얻는 그런 자세로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공중에 나는 새를 보고 또 들에 피는 백합화를 보면서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빠는 공중에 나는 새를 먹이시고 들에 핀 백합화를 입히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돈으로 자신의 안녕과 안전을 확보하려는 그런 우상 숭배를 청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상 숭배를 청산하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삶은 곧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자세로 나타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6장19절에서 7장11절까지의 이 단락은 십계명의 제1계명, 즉 하나님만 의지하고 섬기면서 우상 숭배는 배격해야 한다는 것에 대한 설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사랑의 이중 계명에 대한 예수님의 설교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긴 설교가 이어진 다음 7장12-27절의 단락, 즉 마지막 결론적 권면이 다섯 번쩨로 나옵니다. 여기서는 열매 곧 행위의 열매를 보고 그 나무를 알 수 있다고 합니다. 그것을 예수께서는 지금 자신이 새롭게 제시하시는 이 법을 듣기만 하는 자는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어리석은 자요, 이것을 듣고 행하는 자는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지혜 있는 자라는 비유를 제시하시면서 마지막으로 권면하십니다. 주기도가 제자의 삶에 중심이다 이처럼 마태복음의 산산수훈을 다섯 부분으로 구분할수 있습니다. 방금 분석한 구조에 따르 면,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는 산상수훈의 전체 문맥에서 가운데 부분 곧 6장1-18절의 종교 행위에 대한 가르침 단락에 들어 있습니다. 이 종교 행위에 대한 가르침의 단락인 6장1-18절 의 종교 행위에 대한 가르침 단락에 들어 있습니다. 이 종교 행위에 대한 가르침의 단락인 6장1-18절의 본문에 대해서도 좀더 자세하게 구조를 분석할 수 있습니다. 이 단락에서는 세 개의 대표적인 종교 행위 혹은 경건 행위를 다루고 있습니다. .첫째는 자선 혹은 구제입니다.(6:1-4), 예수께서는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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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가르칩니다. 당시 유대인들 처럼 자기를 드러내 놓고 자랑하면서 자기 과시나 자기 만족을 위해 자선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새로운 가르침을 주십니다.
둘째는 기도에 대한 가르침입니다(6:5-15)
셋째는 금식에 대한 가르침입니다(6:16-18), 금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지 말라고 강조합니다. 우리는 가끔 40일 금식 기도 한다고 광고하고 다니는데,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금식을 하려면 즐겁게 하라는 것입니다. 금식에 대한 새로운 가르침입니다.
유대교의 대표적 종교 행위인 자선과 기도와 금식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이 단락에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가 들어 있으며, 자선과 기도와 금식에 대한 가르침 중에서도 기도에 관한 가르침 속에 이 주기도문이 속합니다. 즉 자선, 기도, 금식으로 대표되는 유대교의 종교 행위에 대한 예수의 새로운 가르침의 중심 부분에 기도를 위치시켰고, 그 기도에 대한 예수의 새로운 가르침에 주기도문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의 구조에 대하여 한걸음 더 들어가 자세히 관찰해 보면, 이 기도에 대한 가르침 부분에서도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는 중심 자리를 차지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6장5-15절이 기도에 관한 가르침인데, 6장5-9절 전반부에서 그릇된 기도들을 먼저 다룹니다.
첫 번째는 유대인들의 그릇된 기도를 지적하고, 두 번째는 이방인들의 그릇된 기도를 비판합니다. 그리고는 “너희들은 그렇게 기도하면 안된다” 고 하시면서, 이제 드디어 예수께서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이어지는 14-15절에서 주기도문의 강조점을 되새김하는 방식으로 다시 한번 이웃에 대한 죄 용서를 요구 하면서 (그렇게 함으로써 죄 용서의 문제를 강조하시면서) 이 단락을 마칩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마태복음의 주기도문과 관련된 문학적 문맥은 아주 조직적으로 짜여져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원래 문학적으로 아주 정교하게 구성된 복음서입니다. 예컨데, 마태복음 전체는 다섯개의 강론과 다섯 개의 설교로 아주 정교하게 교직(交織)되어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마태복음은 문학적으로 아주 치밀한 구조를 가진 책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태는 마태복음 전체를 그렇게 정교하게 문학적으로 조직했을 뿐만 아니라, 이와 같은 자신의 문학적 성향을 산상수훈 문맥에도 그대로 적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앞에서 본것처럼, 마태는 산상수훈도 굉장히 정교하게 구성해 놓았습니다.
마태는 산상수훈을 매우 치밀한 문학적 구조로 짜면서 주기도문을 그 한가운데 위치하도록 했습니다. 즉 산상수훈(마5장-7장) 가운데서도 가운데 부분에 종교적 관행 혹은 종교 행위에 대한 가르침을 위치 시켰고(마6:1-18), 또 그 종교 행위에 대한 가르침 중에서도 중심 위치에 기도에 관한 가르침을 배열했으며(마6:5-15), 그 가르침 중에서도 또 중앙 핵심부에 주기도문이 자리하도록 하는(마6:9b-10) 문학적 구조를 취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태가 예수의 가르침을 기록할 때 예수께서 강조한 부분을 잘 살리기 위해 일부러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산상수훈이라는 예수의 제자도 실천에 대한 가르침의 ‘핵심의 핵심’ 에 위치하도록 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마태복음의 주기도문은 매우 치밀한 문학적 구조 속에 담겨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시사하는 것입니까? 왜 주기도문은 산상수훈의 핵심 중에 핵심에 위치하도록 구
조되어 있는 것일까요? 마태는 이러한 문학적 구조를 통해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요?
그것은, 모세의 율법을 능가하는 완벽한 법을 우리에게 전하신 예수님, 다시 말해 하나님의 뜻을 완벽하게 계시해 주시고 전달해 주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잘 실천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
의 백성이요 예수님의 제자로서 해야 할 도리인데, 그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고 예수의 가르침을 잘 순종하는 동력이 바로 이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에서 나온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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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도가 우리의 제자도의 가장 기본이고 우리의 제자도를 가능케 하는 것임을 말하기 위해 마태는 이렇듯 정교하게 산상수훈을 조직했고, 그 핵심에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넣어 놓
았습니다. 결국 그가 말하고자 한 것은, 기도야말로 하나님의 백성의 삶에서 가장 근본 도리이다. 이 기도로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가 삶의 힘을 얻는다. 혹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도의 가장 중심에 기도가 있다는 것 등입니다.
하나님의 백성 됨의 가장 핵심에 기도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기도가 어떤 기도입니까?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 입니다. 하나님 백성됨의 가장 근본 또는 중심에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로서 우리는 이렇게 기도해야 하며, 이 기도를 하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가 선포하는 하나님 나라의 제자들로 살아가는 방식임을 마태는 말하고 있습니다.
주기도문은‘하나님 백성’이 하는 기도이다
그러면 이제 범위를 좁혀 주기도문이 들어 있는 마태복음 6장의 주기도문 전후 문맥 즉 6장5-15절의 단락을 분석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기도 부분의 중심에 주기도문 위치 |
① 6:5 (유대인들의) 위선적인 공중 기도 ⇒ 그 이유 / 세상적 상 받음 ② 6:6 올바른 기도 : 아버지께 드리는 은밀한 기도 ⇒ 그 이유 / 아버지의 상 ③ 6:7-8a 이방인들의 그릇된 다변의 기도 ⇒ 그 이유 / 그릇된 신학 ④ 6:8b 올바른 기도의 이유 : 너희 아버지께서 너희의 필요를 아신다. ⑤ 6:9-13 올바른 기도에 대한 가르침 6:9b-13 주기도문 6:9b 부름 6:9c-10 세 개의 ‘당신’ 청원들 6:11-13 세 개의 ‘당신’ 청원들 바)6:14-15 죄 용서 |
마태는 여기서도 자신의 문학적 특성을 좇아 본문을 아주 정교하게 구성해 놓고 있습니다. 자선, 기도, 금식으로 대표되는 세 가지 중요한 종교 행위들 가운데 기도를 다루는 이 단락에서, 마태는 기도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기록함에 있어서 유대인들의 위선적인 기도를
지적하는 것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구에서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유대인들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서 떠들썩하게 기도하여 사람들에게 자신이 얼마나 기도의 사람이고 얼마나 경건한 사람인지 내세우려 했는데, 예수님은 그들을 향하여 외식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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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들이라고 진단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유대인들처럼 하지말고 “너는 기도할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게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마 6:6)고 가르칩니다.
기도라는 것은 하나님과 나 사이의 은밀한 만남과 대화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가능한 한
은밀한 중에 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과의 만남이 의식이 되고 하나님에 대한 개인적인 절실한 헌신이 이루어집니다.
사람들에게 보이기위해 기도하면 남에 대한 의식이 더 커지고, 다른 사람 앞에서 나의 체면과 명예가 어떻게 될까 하는 염려가 우리를 압도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하는 기도가 되지 못하기 쉽습니다. 우리는 심지어 통성 기도하는 순간에도 내가 하나님께 은밀하게 한다는 정신
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남에게 뽐내려고 혹은 남을 의식해서 기도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기도를 청산 유수처럼 잘하는 사람을 간혹 보는데, 그 사람이 오랫동안 신앙 생활한 것을 은근히 자랑하거나 연약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자신을 과시하려는 마음을 갖고 있다면, 그것은 곧 유대인처럼 기도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기도 관행’ 에 대항하여 이렇게 가르친 예수는 이제 ‘이방인들의 기도 관행’ 에 대항해서도 새롭게 가르칩니다. 여기서 예수가 지적하는 이방인의 기도 관행의 특징은 중언부언하는 기도입니다. 그래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이방인처럼 중언부언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7절 말씀을 봅시다.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왜 중언부언하지 말아야 합니까? 구약성경에 의하면, 우상이란 나무 조각이나 돌 조각에 불과한 것입니다. 나무 조각이나 돌 조각을 새겨서는 신이라고 했기 때문에, 구약 선지자들은 우상에 대해 뭐라고 합니까? 눈이 멀었고 귀가 먹었다고 했습니다. 아무리 기도해 봐야 듣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엘리야와 대결한 바알 선지자들이 아무리 소리 높여 기도해 봐야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 이방인들의 우상은 나무 조각과 돌 조각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자기들이 섬기는 우상이 귀먹고 눈먼 존재이기 때문에 이방인들은 자꾸 중언부언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우리의 문제와 필요를 다 아시는 아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까 한마디만 하면 됩니다. 아니 우리가 아뢰기도 전에 미리 아시는 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중언부언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한국 사람들이 특별히 조심해야 할 게 바로 이 중언부언하지 말라는 가르침이 아닌가 합니다. 종종 중언부언하는 기도를 듣게 되는데, 그렇게 기도하는 사람은 아마 이방인들이 그들의 신에 대하여 갖고 있는 생각과 비슷하게 하나님을 생각하기 때문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만일 중언부언하는 기도를 한다면 이방인과 같은 셈입니다.
그러면 왜 유대인처럼, 이방인처럼 기도하지 말라는 것입니까? 8절을 봅시다.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시기 때문에 유대인처럼도, 이방인처럼도 기도하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아주 의식적으로 이 주기도가 ‘하나님 나라 백성’ 의 기본적인 기도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이 기도는 ‘유대인’ 의 기도와도 다르고 ‘이방인’ 의 기도와도 다르다는 것입니다.
즉 기도는 기도하는 자의 정체성을 보여 주는 것이며, 예수의 제자라면 지금 예수께서 새롭게 가르치는 대로 기도해야 합니다. 물론 내용으로 보면 유대의 기도들과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 사이에 같은 부분이 잇지만 이 문제는 뒷부분에서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그러면, 마태복음 6장에 나오는 주기도문의 바로 위아래 붙어 있는 근접 문맥을 조금 더 분석해 보겠습니다. 9절부터 13절까지가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 곧 ‘주기도문(Lord’s Prayer)’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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