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화

비전 예화들

하나님아들 2024. 6. 14. 10:11

비전 예화들 

 

다이아몬드와 숯의 비밀
 
다이아몬드와 숯은 구성원소가 같다.그러나 하나는 다이아몬드라는 희귀한 보석이 됐고 다른 하나는 값어치 없는 흔한
숯이 됐다.천사도 하늘에 있는 천사는 하나님을 보필하는 종이 됐고 범죄해 땅에 떨어진 천사는 사람을 유혹하는 사탄
이 됐다.

어떻게 생성되느냐,어떤 마음을 품느냐가 그 존재의 가치를 결정하게 된다.새해를 맞이해 마음속에 무엇을 품고 살아갈
것인가?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속에 품으라고 권면한다.누구나 닮고 따라야 할 인생의 정도는 예수님이다.그분은 신을
향한 절대신앙과 인간을 향한 절대사랑을 친히 보여주셨다.예수님을 본받는 삶을 사는 사람은 다이아몬드가 될 것이며
결코 숯이 되지 않을 것이다. 

자신을 잘 가꾸어서 다이아몬드같이 귀한 가치를 소유하는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
 

 

 

 
 
 

 

 

인류와 꿈
 
미국에서 발간되는 교육잡지에 “한 어린이가 우주선이 발사되는 모습을 바라보는 그림을 그려놓고 그 밑에 당신은 당신
의 꿈만큼 성공할 수 있다”는 미래의 꿈에 대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그리고 “정신이 가리키는 곳으로 성장은 따르기 마련이다”란 글이 쓰여 있었다.

와트는 끓는 물주전자를 보다가 증기기관에 대한 꿈을 꾸었고 그것을 만들어냈다.뉴턴은 사과나무에서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만유인력의 법칙에 대한 꿈을 꾸었고 그 이론을 만들어냈다.하늘을 나는 꿈을 꾸었던 라이트 형제는 비행 기를 만들었다.사람들이 꾸는 꿈은 위대한 업적의 근원이 되었다.

꿈을 꾸는 사람은 인류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환경과 문화,그리고 좋은 기계를 만들어내고 있다.즉 컴퓨터는 우연히 만들 어진 것이 아니라 꿈을 꾸는 사람에 의해서 만들어졌다.우리가 꾸는 좋은 꿈은 놀랄 만한 힘을 가지고 있다.왜냐하면 그
좋은 꿈은 좋은 가치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이런 꿈은 우리를 괴롭히지 않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새해가 되면 새해에 실천해야 할 꿈을 꾸고 그 이 반드시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면서 노력한다.우리 모
두 하나님과 함께 생활할 좋은 꿈을 꾸어야 하겠다.그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그 꿈의 실현으로 교회가 부흥되고, 보다 더 좋은 환경을 만들도록 힘써야 하겠다. 

 

 

 
 
 

 

 

기독교문화의 창달을
 
문화라는 용어는 19세기 인류학자들에 의해 채택된 언어지만 지금은 학문적인 분야뿐만이 아니라 사회 각 분야에서 폭
넓게 사용되는 중요한 개념이 되어 있다. 문화는 인간이 자연상태에 그냥 머물지 않고 노동에 의해서 자연을 변화시키
고 스스로도 자연상태로부터 벗어나 새롭게 형성시켜온 물질적이며 정신적인 모든 성과를 일컫는 말이다.

문화는 민족이나 국가,그리고 사회와 시대의 옷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나라마다,종교마다 각기 다른 문화를 가지고 있
다.그러므로 문화를 생활 패턴이라고 부른다. 문화가 중요한 것은,그 구성원들이 공유하고 있는 문화가 건전하고 고등하
면 국가제도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구성원들을 지켜주기 때문이다.그러나 문화가 건전하지 못하고 하등하다면 군사력이
강력하거나 경제력이 월등해도 대(代)를 잇지 못하는 수가 많다.

게르만족은 5세기에 로마를 점령했으나 로마의 선진문화에 동화되어 게르만 국가를 성립시키지 못했다. 그런가하면 7세
기 초에 기독교 분파인 네스토리우스파가 경교(景敎)라는 이름으로 당나라에 전파된 일이 있었다. 황실에도 포교하였고
장안에 여러 개의 교당을 세웠다.그러나 경교는 독자적인 문화를 갖지 못하고 중국문화에 함몰되어 복음의 가치조차 보
전하지 못하고 소멸됐다.

우리가 기독교문화 창달을 주장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최근 한국기독교총연합회 통계에 근거한다면 우리나라의 기독교
인구는 1380만명으로 국민의 34%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문화가 무엇이냐고 묻는 이들이 많다. 이 물음은 곧 기독
교적 옷이 무엇이냐 혹은 기독교적 삶의 방식이 무엇이냐고 묻는 것과 같다고 본다.

기독교인이면서도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미신적 행위를 무비판적으로 채용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건
전한 전통까지 모두 우상행위로 거부하는 이들이 있다.이들은 모두 기독교문화를 오해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지금까지 기독교의 보이는 상징은 십자가요,나타내보여야 하는 정신은 사랑이라고 알려져 있다.십자가와 예수님의 사랑
에 근거한 삶의 모습이 기독교문화인 것이다.이같은 기독교문화는,문학이나 예술로 보여줌으로써 그것이 무엇이냐고 묻
는 이들에게 답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우리나라의 불교문학은 조선조 김만중의 구운몽과 현대 김동리의 여러 작품이 있다.영국의 기독교문학은 셰
익스피어의 작품들이 있으며 러시아의 기독교문학은 톨스토이나 도스토예프스키 등의 작품이 있다. 이들은 자기들의 종
교문화를 문학이라는 그릇에 담아 전하고 있다.그럼으로써 자기들의 종교문화를 전파하는데 지대한 역할을 하였던 것이
다.

이제 우리는 셰익스피어와 같은 문학가를 키워야 한다.한국의 톨스토이를 발굴,육성해야 한다.지금까지 나타났던 어떤
사상보다 가장 위대한 기독교 세계관과 가치관에 근거한 삶의 모형들을 만들어 보여주어야 한다. 유럽의 기독교문화는
1000년,2000년을 이어서 사람들로하여금 교회중심의 삶을 유지하고 기독교 안에 머물게 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제 우리가 한국의 기독교문화를 말할 때 기독교의 진리를 삶의 행동양식으로 보여주어야 한다.지금까지 우리나라의
기독교문화는 절기적으로는 크리스마스 축제가 있으며 매 주일 교회중심의 예배문화가 있다.여기에 기독교문화 창달을
위한 한두 가지의 예를 부연한다면 우선 부활절을 성탄절과 함께 기독교 축제의 절기로 지켜나가야 할 것이라고 본다.

성탄절이 인류에게 기쁨을 주는 날이라면 부활절은 소망의 날이기 때문이다.소망을 담은 카드나 편지를 주고받으며 상
심해 있는 이들에게 위로를 주기에 매우 좋은 절기임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또 봉사의 날을 정하여 기독교인 모두가 참
여하고 나눔의 날을 정하여 기독교인의 아름다운 삶을 나타내보임으로써 사회구성원 모두가 함께 하는 기독교 문화를
창달해나가야 할 것이다.

기독교의 미래는 결코 어둡지 않다.대도시 초등학생들의 60%가 교회에 나가고 있다는 보고가 있다.자라나는 이들을 기
독교문화 속에서 살아가도록 한다면 한국 기독교의 내일은 희망이 있다.창달되는 기독교의 문화가 기독교의 진리를 담
아 전하는 유용한 그릇이 되도록 해야 한다. 

 

 

 
 
 

 

 

비전과 확신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금문교와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건축을 위하여 애쓰던 스트라우스는 재정문제 뿐만 아니라 주민들의 연이은 송사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스트라우스는 한 은행에 600만달러 규모의 채권 발행을 요청하였습니다.

은행장이 “이 다리의 수명은 얼마나 되겠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스트라우스는 “영원입니다. 끝없이 서 있을 것입니다”라며 확신을 가지고 대답했습니다. 확신에 가득 찬 비전에 감동받은 은행장은 채권 발행에 협조,금문교 건설을 위한 획기적 전환점을 마련하였습니다.

많은 사람의 눈에는 급한 물살과 자신의 재산권 침해가 크게 보였지만 금문교라는 비전을 확실히 본 스트라우스의 눈에는 끝까지 튼튼히 서 있을 다리가 보였고, 그로 인해 도움을 받을 샌프란시스코의 수많은 시민들이 보였던 것입니다.
지금 우리들은 어떠한 비전을 보고 있습니까? 우리가 하늘나라를 비전으로 삼는다면 스트라우스 이상의 확신으로 세상을 감동시킬 수 있는 일들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호롱불
 
강원도 탄광촌에 한 소년이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소년은 하루 종일 친구들과 뛰어 놀다 아름다운 빛을 내는 보석을 주웠습니다. 날이 저물어 탄광에서 아버지가 돌아오자 소년은 자랑스럽게 보석을 내밀었습니다.
"아빠, 이것 보세요. 예쁘죠? 놀다가 주었어요. 난 이런 보석 같은 사람이 될 거예요. 늘 이렇게 반짝이는 보석 같은 어른 말 이예요."

그 말을 들은 아버지는 한참동안 소년을 가만히 바라보더니 창가에 걸려있는 호롱불 쪽으로 걸어가 성냥으로 불을 밝혔습니다. 어두웠던 방안이 환해졌습니다. 아버지는 소년에게 호롱불을 보여 주며 말했습니다.
"얘야, 보석 같은 사람보다 이런 호롱불 같은 사람이 되려무나."

소년은 바람만 불면 훅 꺼져 버리는 작고 보잘 것 없는 호롱불 같은 사람이 되라는 아버지의 말이 잘 이해되지 않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러자 아버지가 자상히 설명해 주었습니다.
"아들아, 보석은 태양 아래에서만 아름다움을 뽐낼 수 있단다. 태양의 힘을 빌려 빛을 내는 건 참된 빛이 아니란다. 너는 이 호롱불처럼 세상이 어두울 때 제 몸을 태워 세상과 사람들의 가슴을 환하게 밝혀주는 사람이 되거라." 

 

 
 
 

 

 

 

비전이란 먼저 보는 것
 
어느 한 남자와 자기 자신의 자녀와 동네 놀이터에 갔습니다. 그런데 그 놀이터가 너무 다듬어지지 않았고 누추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곳에서 놀고 있는 자신의 아이를 바라보면서 좀더 근사한 놀이터가 왜 없을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는 마음속에 꿈을 꿉니다. 과학과 자연이 어우러지고 새로운 꿈이 펼쳐질 수 있는 그러한 공원을 꿈꿉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믿음으로 일구어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에 그러한 공원이 로스엔젤레스 교외에 만들어졌습니다. 그것이 디즈니랜드(Disneyland)입니다. 이 꿈을 꾸었던 사람이 월트 디즈니입니다. 그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또다른 꿈을 꿉니다. 온 세계 어린이들이 함께 어울릴 수 있는 공원을 만들자는 꿈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디즈니월드(Disneyworld)를 구상합니다. 그리고 그 프로젝트는 실천에 옮겨졌습니다. 그래서 미국의 올랜도라는 곳에 디즈니월드가 건설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월트 디즈니는 디즈니월드가 완성되기 전에 죽고 맙니다.

드디어 디즈니월드가 완공되고 이제 오픈을 합니다. 그리고 각계인사가 와서 축하 의식(ceremony)를 갖습니다. 그때 한 인사가 나와 축사를 하면서 월트 디즈니가 이것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것에 대해 정말 안타까운 일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에 월트 디즈니의 미망인인 디즈니 여사가 단 위에 올라왔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이렇게 회중들을 향해 미야기 했습니다. “죄송하지만 저는 아까 하신 분의 말씀을 정정해야 하겠습니다. 제 남편은 이미 월트 디즈니를 보았습니다. 그분의 마음속에는 언제나 디즈니월드가 있었고 그 디즈니월드를 보며 살았습니다.”

비전(Vision)이란 먼저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냥 보는 망상이나 몽상이 아니라, 자기의 욕심에 기초를 두는 야망이 아니라 믿음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비전과 야망
 
비전과 야망, 비슷한 말 같지만 전혀 다른 뜻을 가진다. 모두 미래를 지향하는 언어지만 그 동기는 전혀 다르다. 비전은 위로부터 오지만 야망은 사람의 야심에서 태어나기 때문이다.

성경에는 자신의 욕심과 야망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기회를 놓친 사람이 등장하곤 한다. 사무엘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이 왕을 세워 달라고 하나님께 조른 적이 있다. 결국 제비뽑기를 통하여 초대 왕으로 기름 부은 사람은 외모와는 달리 수줍음을 많이 타는 사울이었다. 그러나 사울은 오래지 않아 왕다운 면모를 잃어버리고 만다.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요”라는 백성들의 외치는 소리를 듣는 순간 그만 시기심에 사로잡히고 말았기 때문이다.

사울에게 있어서 하나님께서 맡기신 왕이라는 청지기적 직분이 이제는 자신이 지켜내야 할 소유의 자리로 바뀌게 된 것이다. 내 자리를 넘보는 어떤 자도 용납할 수 없다는 야심이 백성을 잘 섬기고 나라를 통치하라는 순수한 비전을 마침내 삼켜버리게 된다. 비전의 도구로 주신 왕의 직분을 개인의 야심을 이루는 자리로 전락시킨 사울을 향하여 하나님은 냉정하게 ‘내가 그를 버렸다’고 말씀하신다.

성경에는 또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있다. 광야의 사람, 세례요한은 주의 길을 예비하라는 사명을 맡은 자였다. 그에게는 오실 주님을 선포하는 소망과 꿈이 있었다. 예수님의 공생애가 시작되면서 세례를 베풀던 요한을 보고 그의 제자들은 야심을 품기 시작했다. 예수님보다 요한이 더 유명해지기를 기대한 것이다. 그러나 요한은 이러한 유혹을 철저하게 거부한다. “그는 흥하여야 하고 나는 망하여야 하리라”. 이것이 비전을 성취하기 위한 세례요한의 철학이었기 때문이다.

세례요한은 광야에서 받은 말씀,주의 길을 예비하라는 소중한 비전을 값싼 야심과 거래하지 않았다. 광야에서 홀로 있을 때 주셨던 하나님의 음성이 그의 가슴에 언제나 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전과 야망은 종이 한 장 차이인지도 모른다. 비전이라고 주장하지만 속 내용은 야심일 수도 있다. 비전은 하나님으로부터 온다. 그래서 하나님의 방법대로 성취해가야 한다. 처음 주셨던 순전한 동기를 상실하는 순간 우리가 말하고 있는 비전은 야망으로 전락해 버리기 쉽다. 우리는 지금 야망을 소유하고 있는가,그렇지 않으면 비전을 소유하고 있는가. 

 

 

 

 
 
 

 

 

비전 발전소
 
금융회사에 근무하던 집사님이 회사로부터 명퇴 압력을 받게 되었다.거기에 응하지 않자 대기발령을 당했다.
 그 집사님은 오히려 그 대기발령 기간에 제자훈련을 받기로 결심했다
. 훈련받는 중에 회개기도와 함께 “저의 남은 생을 주님께서 계획하신 대로 사용해 달라”는 간구가 터져나왔다.
그런 회개와 확신이 있은 뒤, 다시 발령을 받아 근무하게 되었고 예상 밖의 영업 실적을 쌓게 되면서 1년2개월 만에 실적이 회복되었다고 한다.


때로 하나님은 우리 자신의 비전을 하나님의 비전에 맞추게 하시려고 우리를 낮추기도 하신다.
하나님이 중요하게 보시는 것은 낮아질 때의 마음가짐이다.
우리가 올바른 마음을 갖게 될 때 하나님은 높이시고 회복시켜 주신다.
시련은 올바른 비전을 만들어내는 비전 발전소다.
비전이 만들어지면 모든 것도 함께 회복될 것이다. 

 

 

 
 
 

 

 

비전입니까 욕망입니까
 
신명기 34;1∼7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마 23;12)

모세는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 중의 하나입니다. 모세는 왕은 아니었지만 민족을 구원한 가장 위대한 인물로 꼽힙니다. 모세의 최종 목표가 무엇입니까? 바로 가나안 땅 정복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비스가 산꼭대기에 이르게 했습니다. 그러면서 가나안 땅 전체를 보게 합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눈앞에 보입니다. 그의 최종 목표가 이루어지기 직전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는 “너는 그리로 건너가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신 34:4). 모세는 하나님의 뜻을 거절하지 않고 순종했습니다. 만일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갔다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세를 높이려고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백성의 어리석음을 아시고 모세를 귀환시켰습니다. 어떻게 보면 모세는 버림받은 사람처럼 보이지만 모세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 것입니다(히 12:5∼11).

지도자는 비전을 가진 사람입니다. 내 꿈과 내 방향이 아닌 주님이 자신에게 가르쳐주신 방향이 바로 비전입니다. 모세의 비전 즉,방향은 무엇이었습니까? 가나안 땅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입니다. 비전에는 타협의 여지가 없습니다. 낙심도 없습니다. 오직 전진만 있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비전을 가진 사람의 자세입니다. 시험과 고난이 다가올 때,내 인생의 날이 얼마 남지 않다고 생각될 때에도 방향을 바꾸지 않습니다.

오직 주님이 보여주신 비전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진정한 비전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을 십자가 뒤에 숨기고 하나님에 뜻에 순응합니다. 모세도 자신의 욕망과 꿈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습니다. 반면 비전이 아닌 욕망이 있는 사람들은 어려움에 처했을 때 타협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비전과 욕망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이 우리를 높이면 낮아집시다. 주님이 우리를 더 높이시면 엎드립시다. 그리고 우리를 드러내지 말고 오직 주님만 높입시다. 그러면 우리는 주님의 축복을 영원히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늘날 많은 사람은 자신의 욕망,꿈,그리고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한 목표를 설정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비전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습니까? 비전입니까? 욕망입니까? 
 

 

 

 
 
 

 

 

야망과 비전
 
야망(野望)과 비전(vision)은 비슷한 말인 것 같지만 전혀 정반대입니다.
야망은 영어로 ambition 이고, 비전은 한문으로 통찰(洞察)입니다.
야망(ambition 野望)-대망, 공명심, 포부, 향상심, 명예심, 패기, 열망, 야심
비전(vision洞察) - 환히 내다봄, 꿰뚫어 봄
야망은 개인적인 욕심을 이루는 것이고
비전은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는 동전의 양면처럼 함께 할 수는 없습니다.

야망을 이루기 위해서는 비전을 버려야 하고
비전을 이루기 위해서는 야망을 버려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야망이 이글이글 불타는 일을 하면서
그것이 하나님의 비전이라고 착각을 합니다. 예를 들면
교회를 개척하면서 '하나님, 1만명이 모이는 교회를 목회하고 싶습니다' 하고 기도하면서 그게 하나님의 비전이라고 말합니다.
왜 1만명 목회를 하고 싶습니까? 솔찍히 그게 폼나고 좋아 보이니까...


그런데 1만명 목회를 하는 목회자들에게 물어보면, 어떻게 하다보니 그렇게 되었지 처음부터 1만명 목회를 할 생각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 어떻게 하다보니... 가 바로 하나님의 비전(통찰)에 해당합니다. 

 

 

 
 
 

 

 

비전이란?
 
하나님께서는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한다’(잠 29:18)고 경고하셨습니다.여기에서 ‘묵시’란 ‘비전’을, ‘방자히 행한다’는 ‘신중함이나 자제력을 상실한 경거망동’을 뜻합니다.
따라서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한다’는 말은 ‘비전이 없으면 인간은 경거망동한다’는 의미입니다.

비전이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통찰력입니다. 위대한 비전의 시인이란 위대한 통찰력을 지닌 시인을 일컫습니다. 따라서 비전을 지닌 자의 시선은 언제나 오늘을 뛰어넘어 보다 먼 곳을 향해 있습니다.

 동시에 자신의 시선이 맞닿아 있는 그곳에 자기 자신을 맞추기 위해 부단히 애쓰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흔히 장래성이 있어 보이는 사람을 가리켜 “비전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는 미래에 대한 통찰력으로 지금부터 미래의 자신을 스스로 일구어 가기에 그에게는 장래성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비전이 없는 인간이 방자해지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비전이 없다는 것은 그의 시선이 목전에 머물러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런 자는 눈에 보이는 대로, 기분 내키는 대로, 감정대로, 욕구대로 살아가게 마련입니다. 그 결과 그의 삶은 방자해지지 않을 도리가 없습니다. 비전이 없으면 목사든, 교인이든, 그 누구든 방자해집니다. 이런 관점에서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비전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비전을 품은 자녀
 
자녀를 세상의 리더로 키우고 싶은 것이 부모들의 한결 같은 바람일 것이다. 요셉과 같은 꿈을 가진 자녀,욥처럼 고난을 극복하는 믿음의 자녀,바울처럼 꿈을 계획 속에 실현시키는 자녀로 키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진정한 리더란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을 품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꿈이 내 꿈이 될 때 그것은 비전이 된다. 그라고 그 비전을 품었을 때 하나님께서 길을 여시고 인도해주신다.
단 내가 하고 싶은 일에 대한 관점보다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어떤 일을 하길 원하실까’를 생각해야 할 것이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7)

얼마 전에 취재로 만난 부산의 김미애 변호사가 그랬다. 그녀는 중2 때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방직공장에 다니며 야간여상을 졸업했다. 쇼핑센터 점원으로,초밥집 사장으로 억척스럽게 생계를 꾸려갔던 그녀가 뒤늦게 대학에 진학해 변호사가 된 것을 보고 사람들은 ‘아름다운 인생역전’ ‘드라마 같은 인생’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거기엔 두 가지 비결이 있었다.

하나는 자신이 하나님의 딸이란 신앙의 정체성이 확실했고 또 하나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비전이 분명했다는 것이다. 그녀는 “하나님께 내 갈 길을 보여달라고 많이 울고 기도했어요.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보다 더 많이 울며 절박하게 매달렸던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절실하게 부르짖은 기도로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에게 비전을 주셨지만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이 아닐까? 그래서 현재의 모습이 초라해도 내 안에 확실한 꿈이 있다면 고난을 이길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것이다.

그것은 김 변호사 외에도 취재를 통해 만난 수많은 성공한 크리스천들의 공통점이었다. 하나님께선 뜻에 합당하면 기적처럼 길을 열어주셨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다윗 같은 정치인,요셉 같은 관료,카네기 같은 부자,그리고 훌륭한 사회운동가,정상의 예술인이 돼야 세상을 바꿔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정체성을 확고히 해야 한다. 또 비전과 소명의식에 걸맞은 윤리의식이 꼭 필요하다. 신앙에 기초한 철저한 윤리적 삶은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존경심과 함께 “나도 저렇게 살아야겠다”는 마음을 갖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영향력이며 리더십이다.

내 가족과 이웃,민족을 목숨 걸고 사랑하는 것,그리고 내 가족과 민족을 뛰어넘어 열방을 사랑하고 세계를 품는 사람이 진정한 리더이다.

 

 

 

 
 
 

 

 

교회밖의 사람을 위한 사명
 
토머스 갤로데트는 19세기 목사였다. 그는 사람을 섬기기 위해서 목회자가 되었다. 그런데 4살짜리 아기를 둔 부모가 겔로데트 목사를 찾아 왔는데 목사가 보니 선천성 농아가 틀림없었다. 수심과 근심에 가득 찬 부모와 철부지 4살의 아기를 쳐다보면서 겔로데트 목사는 이 농아아이가 대학에 들어가서 직장을 가지게 되는 비젼을 꿈꾸었다.

그는 자신의 교회내에 고네티켓 농아학교라고 간판을 내걸고 농아학교를 시작했다. 학생이라고는 이 4살된 아이와 소문을 듣고 온 두 명의 어린이였다. 교사는 목사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비젼과 사명을 느낀 겔로데트의 농아학교는 훗날 세계위인의 농아종합대학교가 되었다.


링컨 대통령 시절 대학으로 승격하면서 겔로데트의 아들 에드워드 겔로데트가 초대학장이 되었고 최초로 예배드리는 농아인 교회 예배당을 창립하였다. 시작은 초라해도 비젼은 성취되고 만다. 그러나 그 비젼 속에 복을 나누어주려는 사명감이 없으면 개인의 야망으로 끝나고 마는 것이다. 겔로데트와 그의 두 아들이 모두 농아인에 대한 교육과 선교를 통해 복을 나누려는 사명이 있었기에 누구도 생각지 못한 장애인들의 삶이 질적으로 달라지는 복을 누리게 된 것이다.


이처럼 우리도 나의 비젼 때문에 다른 사람이 복을 얻게 하는 사명을 가져야 한다. 교회가 영적 부흥을 일으켜 시설과 재정의 복을 받는 축복의 비젼을 갖다. 그러나 그것은 많은 교회밖의 사람을 위한 사명과 관련되어야 한다. 

 

 

 

 
 
 

 

 

비전과 위기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은 소유와 죽음을 초월한 사람이라고 한다.그리고 또 하나의 무서운 사람은 비전의 소유자다. 간디는 '꿈이 없는 사람은 죽은 사람'이라고 했다.
비전은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고, 또한 엄청난 잠재력을 폭발시키는 도화선이 된다.

 백여 년 전 미국 시카고에 대화재가 있었다. 모두가 비탄에 빠져 있을 때, 한 가게에 이런 방이 나붙었다.
'우리 가게가 이번에 몽땅 불에 타버렸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비전은 아직 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일부터 정상 영업을 하겠습니다'


비전은 어려운 때일수록 필요하다. 상황이 어렵다고 해서 비전을 창고에 처박아 놓는다면 비전은 '非展'이나 '悲前'으로 전락하고 만다. 비록 끼니를 제대로 잇지 못하고, 오막살이가 다 쓰러져 가더라도, 비전이 있다면 그 집엔 희망이 있다.



가족은 그 희망을 바라보며 어려움을 이겨나갈 수 있다.
공사장의 흙을 나르는 허름한 트럭에 이런 글귀가 붙어 있었다.
'공사장 트럭 운전한다고 나를 깔보지 마십시오.

이래봬도 큰딸은 OO대학에 다니고, 작은 아들은 OO대학에 다니고 있습니다 .
' 자식의 미래를 준비하는 아버지이기에 그는 자부심을 갖고 힘든 상황을 즐거운 마음으로 이겨낼 수 있는 것이다.
현재의 상황이 어떠하냐는 것과 비전이 있느냐 없느냐는 것은 다르다


. 어려운 때일수록 오히려 비전이 필요하다. 

 

 

 
 
 

 

 

비전의 힘
 
몇 년 전 어느 날, 내가 사는 곳 근처에 붕어빵 장사가 생겼습니다. 한 중년 여자가 붕어빵을 파는데, 붕어빵 장사라고 생각되지 않을 귀부인 같은 용모를 가졌습니다. 게다가 표정도 밝아서 손님이 많아졌습니다. 얼마 후부터는 남편도 나와서 붕어빵 장사를 도와주었습니다. 남편도 잘생기고, 인상도 좋고, 목소리도 매력적이었고, 친절했습니다. 무슨 사연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분들의 사는 모습이 너무 귀하게 보였습니다.

얼마 후에 그 부부는 형편이 좋아졌는지 남색 소나타를 끌고 다녔고, 다시 얼마 후에는 근처에 아이스크림 할인점을 내고 동시에 그 할인점 앞에서 계속 붕어빵 장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얼마 후에는 다른 아이스크림 할인점에 납품하는 일까지 했습니다. 그렇게 자존심을 포기하고 한 단계씩 밑바닥부터 올라가는 모습을 보니까 맨 몸으로 비전만 가지고 성공을 일구는 미국 이민자들의 삶의 궤적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비전은 자본이나 인맥보다 중요합니다. 미국 이민자들이 맨 몸으로 성공할 수 있었던 힘의 원천은 바로 비전이었습니다. 한국에서 명문대학을 나왔어도 야채가게에서 허드렛일을 기쁘게 하고, 공장과 생선가게와 세탁소에서 일하는 것을 부끄럽지 않게 생각하는 놀라운 자존의식의 원천도 바로 비전이었습니다. 그처럼 눈물겹도록 열심히 살고 어느 정도 세월이 흐르면 상당한 재산도 모아 삽니다. 그것이 비전의 힘입니다.

지금 유대인들은 미국을 좌지우지합니다. 뉴욕 월가의 돈줄을 잡고 있고, 언론계와 문화계와 영화계도 잡고 있습니다. 나사의 과학자 중 절반이 유대인이고, 노벨상 수상자의 30%가 유대인이고, 미국 변호사의 20%가 유대인이고, 뉴욕 의사의 절반이 유대인이라고 합니다. 그 유대인의 힘은 자녀 교육에서 나왔습니다.

한인 이민자들의 자녀 교육의 열정과 비전은 유대인보다 더합니다. 그런 모습 속에서 미래의 한국인의 영향력을 그려보게 됩니다. 지금도 미국 곳곳에서 한국인의 저력을 보여주고 있고, 한인 이민 2세들은 무서울 정도로 미국 주류사회에 파고들고 있습니다. 작은 성공의 열매로 자녀 교육의 비전에 힘을 쏟아 장래를 준비했기 때문입니다.

비전은 작은 성공을 큰 성공으로 만듭니다. 비전을 가진 사람의 성공은 작은 성공이라도 결코 무시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비전은 죽지 않고 시간과 함께 반드시 지경을 넓혀나가기 때문입니다. 비전은 찬란한 내일을 보게 하는 영혼의 멀티비전입니다. 성공 비결은 따로 없습니다. 성공 비전이 성공 비결입니다.

가슴에 자신을 설레게 하는 찬란한 비전을 가지십시오. 이민을 가야만 비전을 새롭게 품을 것이 아니라 지금의 처지와 상황에서 비전을 새롭게 품어보십시오. 직장이 없으면 허드렛일부터 시작하면 됩니다. 지금 힘들고 어려워도 ‘이민자의 비전’을 가지고 새롭게 시작하면 누구에게나 ‘코리안 드림’은 현실화될 수 있을 것입니다. 
 

 

 

 
 
 

 

 

비전의 탄생
 
조직의 비전은
한 사람의 작품이 아니다.
나는 마틴 루터 킹의 비전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그것은 루터 혼자만의 비전이 아니었다.
비전을 표명하기까지 그는
수천 명의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의견을 들었다.
그의 비전은 수백만 명의 희망과 꿈을 표현하고 있었다.
비전을 창조하는 과정은
비전의 내용만큼이나 중요하다.
- 켄 블랜차드의《비전으로 가슴을 뛰게 하라》중에서 -


* 비전의 탄생도 길과 같습니다.
길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누군가 한 사람이 먼저 가고, 많은 사람들이
함께 걸어가면 그곳이 곧 길이 되는 것입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걸어갈수록 더 큰 길이 되듯이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사람들의 뜻과 꿈과 희망이
담길수록 더 큰 비전이 창조됩니다. 

 

 

 

 
 
 

 

 

비전을 이루는 방법
 
비전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비전이 시작되고
또한 비전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여러 가지 우리가 이해하지 못할 환경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것이다.

꿈을 꾸는 것은 내 자신이지만 비전을 이루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내 삶의 간절한 소망의 문을 여는 열쇠도 오로지 주님께 있음을 고백합니다.
비전을 향해 가는 길이 험난할지라도
주님 영광에 나의 목표가 있기에 그 길 끝에 승리함이 있음을 선포하며 나아갑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이사야 41:10) 

 

 

 

 
 
 

 

 

비전
 
비전이란 현재 보이는 것뿐이 아니라 미래의 그림을 보는 것입니다.
비전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만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미래를 비전이라는 안경을 가지고 미리 보는 것입니다.

지금 현실에 근거하여 우리의 꿈을 세우고 계획하는 것은
주님이 주신 비전을 완전히 보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요?
갈렙과 여호수아는 믿음의 눈으로 보이지 않는 미래의 꿈을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의 눈이 아름다운 가나안 땅을 얻게 했습니다. 보이지 않지만 볼 수 있는 것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비전입니다. 

 

 

 

 
 
 

 

 

인격의 크기, 비전의 크기
 
위대한 꿈을 가진 사람은 큰 문제와 싸웁니다. 인격의 크기는 바로 그가 붙들고 씨름하는 비전의 크기입니다.그래서 도전적이고 열정적인 사람은 자신의 생애를 걸 수 있는 큰 문제를 붙듭니다.

무엇이 위대한 꿈, 위대한 비전일까요?

그것이 이루어지면 나도 좋지만 다른 사람에게 더 좋은 것이 아닐런지요.
 한 걸음 더 나아가 나에게는 고통이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희망이 되는 것, 또 한 걸음 더 나아가 나를 비우고 버릴수록 다른 사람에게는 더욱 많이 채워지는 것, 그것이 위대한 꿈이며 위대한 비전일 것입니다. 인격과 비전의 크기는 거의 정비례합니다.

 

 

 
 
 

 

 

입을 넓게 열라
 
시편 81 장 10 절
"나는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 네 하나님이니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시81:10)

어떤 선생님이 생물 시간에 자기 반 학생들에게 벼룩이 얼마나 높이 뛰는지 실험을 해보도록 했습니다. 학생들은 수십 마리의 벼룩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얼마나 높이 뛰는지를 지켜보았습니다.
그런 다음 선생님은 커다란 유리 그릇으로 뛰는 벼룩을 덮어서 관찰하도록 하였습니다.


 이제 벼룩들은 뛸 때마다 유리 그릇에 부딪혀서 더이상 높이 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릇에 부딪히지 않을 정도로 뛰었습니다. 선생님이 유리 그릇을 치웠지만 여전히 벼룩들은 유리 그릇이 있는 것처럼 그 높이로만 뛰었습니다.
 벼룩들은 그들이 설정한 한계 이상을 뛸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기 기준에 따라 하나님께 뚜껑을 덮어버리곤 합니다.

우리의 입을 넓게 열어 구해야 할 때 자신이 정한 한계선에 따라 입을 벌리고 채워 주기를 기다립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고 말씀하시는 분이십니다.
 설령 하나님이 2리터를 주신다 할지라도 1리터 용기에는 1리터밖에 담을 수 없습니다.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채우심을 바라보며 자신의 입을 넓게 여는 자에게 하나님은 더 많이 채워 주십니다. 

 

 

 
 
 

 

 

비전이 없었기 때문에
 
미국에 한 작은 마을이 있었다. '메인'이라는 마을인데 정부에서 그 지역에 댐을 만들기로 결정하고 "앞으로 몇 개월 후면 당신들을 더 좋은 곳으로 이주해 주고 이곳 전체를 댐으로 만들어 물로 채울 것입니다." 라고 발표했다.그 후부터 그 도시는 더러워지기 시작했다.

주민들은 쓰레기를 치우지 않았다.

집을 가꾸지 않았다. 모든 것이 다 무너지기 시작했다.
 아무도 마을을 관리하지 않았다.
이유는 한 가지이다. 그 도시에 대한 비전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에 대한 비전을 갖지 않는다면 자신의 인생을 포기한 것이다.

 인생에 대한 비전을 갖는 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비전이 있을 때 우리는 자신을 가꾸고 책을 읽는다. 정원사는 정원을 어떻게 가꿀 것인가에 대한 꿈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부지런히 정원을 가꾼다.
하나님께 쓰임 받기를 원하는 사람, 하나님께 쓰임 받으려는 비전을 가진 사람은 끊임없이 자기를 가꾸고, 성품을 계발한다. 

 

 

 

 
 
 

 

 

마지막 꿈 하나를 잃은 대신에
 
스위스의 장 앙리 뒤낭 (Jean-Henry Dunant)은 최초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스위스의 유명한 은행장이었습니다. 그의 꿈은 그 당시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프랑스의 황제 나폴레옹을 만나는 것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을 개인적으로 만나는 것뿐만 아니라 나폴레옹의 프랑스와 함께 경제 협력의 기회를 마련하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꿈이 이루어질 기회가 왔습니다.

1859년 6월 스위스의 경제 사절로 프랑스에 간 그에게 황제를 만날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나폴레옹은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을 위해 전쟁터에 가고 없었습니다. 그래서 뒤낭은 실망하지 않고 꿈을 이루고자 위험한 이탈리아 북부의 솔페리노 전쟁터로 달려갔습니다.

프랑스 및 사르디니아 연합군 그리고 오스트리아군 사이의 참혹한 전투가 막 끝난 카스틸료네 마을에 도착했습니다. 거기서 그는 피투성이가 되어 뒹굴고 있는 수많은 시체를 보게 되었고 전쟁의 참혹함과 인간 생명의 허무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전쟁은 끝이 났습니다. 그러나 뒤낭은 더 이상 나폴레옹을 만날 생각은 하지도 않은 채 그곳에 머물면서 오래 동안 의사를 도와 부상병을 돕고 시체들을 치우는 작업을 계속했습니다. 뒤낭은 나폴레옹을 만나겠다는 꿈을 버리고 새로운 꿈 하나를 간직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평화에 대한 꿈이었습니다.

'전쟁은 이 세상에서 반드시 사라져야 한다. 그리고 전쟁터에서 부상당한 사람들을 도와주기 위해 나는 어떤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의 이런 생각은 잠시도 잊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몇몇 친구들과 함께 1859년 적극적으로 이 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국제적십자 운동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는 제1회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였고 이것은 조국 스위스와 전 세계의 평화를 위한 조직이 된 것입니다. 적십자의 기(旗)는 색상과 순서 배치만 다를 뿐 스위스와 국가와 똑같은 깃발입니다.

뒤낭은 그가 꿈에 그리던 한가지의 소원을 잃은 대신 더 크고 보람찬 꿈을 실현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꿈은 소중하지만 더 큰 꿈을 위해 기와의 꿈을 버릴 줄 아는 넓은 마음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 생각됩니다. 

 

 

 

 
 
 

 

 

미래 지향적인 뉴턴
 
뉴턴은 자타가 인정하는 미래지향적인 과학자였다.
그가 미래지향적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사건이 있었다. 뉴턴이 어느 날 책상 앞에 앉아 연구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때 파리 한 마리가 눈앞에서 빙빙 돌며 귀찮게 굴었다.
 여러번 쫓았지만 다시 와서 얼굴 주위를 맴돌았다.

뉴턴은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그는 벌떡 일어나서 파리를 잡았다.

 죽이지는 않고 창문을 열고 밖에 내던졌다.
그리고 한 말 “세계는 넓은데 왜 내 얼굴 주위만 맴돌며 괴롭히느냐?”
좁은 테두리에서 매일 빙빙돌며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저 높고 넓은 영적 세계를 보고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떡은 가장자리부터
 
첫째 약속과 희망의 땅, 둘째 실지의 회복, 셋째 하나님의 감독, 넷째 젖과 꿀이 흐르는 복지라는 깊은 뜻을 지표로 해서 한반도를 변화시켜 가나안으로 만들고 나아가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땅으로 만들고자 한 가나안 농군학교의 김용기 장로님을 아십니까?

그는 한 손에는 성경을, 한 손에는 괭이를 들고 나라와 민족의 미래를 위해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나라와 민족을 생각하게 된 데는 계기가 있습니다.
그는 어릴 적부터 큰 꿈을 품고 세계지도를 자주 펼쳐 보곤 했는데, 지도에 그려진 우리나라 땅이 너무 좁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왕 태어날 거면 중국에서 태어났어야 하는 건데 … ’하는 생각에 그는 중국 심양의 조선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는 동네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그 곳에 도착한 지 며칠 안 되어 교회에 주일예배를 드리러 온 그에게 목사님이 물었습니다.

“자네는 어찌하여 이곳까지 왔는가?”

그는 “조선 땅이 너무 좁아 넓은 곳에서 포부를 펼치려고 왔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목사님은 전병 가게로 들어가더니 그에게 전병 한 개를 사주며 “그걸 가운데부터 먹어 보게”라고 했습니다.
그는 “이걸 어떻게 가운데부터 먹을 수 있습니까?” 하고 되물었습니다.
그러자 목사님은 “떡 하나도 한복판에서 먹을 수 없으면서 어떻게 세계를 한 가운데에서 먹으려 하는가?


 떡은 가장자리부터 먹는 법이니 지금 당장 조선으로 돌아가게”라고 말했습니다.
 깊이 깨달은 그는 조선으로 돌아와 땀 흘리는 농부가 되었고, 그는 이제 세계를 향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지금 당신의 자리가 가장자리라고 불평하진 않으십니까? 

 

 

 

 
 
 

 

 

올바른 비전
 
어느 구두 판매원이 구두 판매 시장을 확대하기 위하여 아프리카의 어느
부족을 방문하였다. 그는 그 부족 사람들이 모두 맨발이라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국내 본사에 이런 전문을 보냈다. “구두 주문 취소. 이 부족에게는 구두시장 없음”

후에 다른 판매원이 동일한 부족을 찾아갔다. 가자마자 그는 즉시 본사에 이런 전문을 보냈다. “구두 주문 곱절로. 이 부족에는 구두 시장 무한함.”

한 판매원은 비젼이 없었으나 다른 판매원은 부족 사람들 모두가 구두를 신을 수 있다는 비젼이 있었던 것이다.

성경은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한다”고 했다(잠29:18) 요즈음에는 비젼이라는 말이 유행한다. 거창한 비젼을 가지고 있는 자는 위대하고 그렇지 못한 자는 초라하게 보일 정도의 세태가 되었다. 그래서 그런지 어떤 젊은이들은 마치 세계를 삼킬 듯한 비젼을 품고 그것을 자랑하기도 한다.

필자는 신입생을 면접하면서 자신이 어거스틴이나 칼빈보다 더 위대한 인물이 될는지 여부는 후대의 역사가 평가할 것이라는 야망을 밝히는 수험생을 발견하고 어안이 벙벙했다. 물론 비젼이 없이, 되는 대로 살아가는 젊은이는 죽은 청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신자의 경우 잘못된 비젼을 올바른 비젼으로 착각해서는 안된다. 잘못된 비젼은 자기 속에서 나온 것으로서 자신의 이기적 야망을 채우기 위한 비젼이다. 그것은 천국에서 좌정승 우정승 하겠다는 비젼, 자기 선전, 자기의 인기, 자기 권력에 굶주린 비젼이다. (막10:42)

올바른 비젼은 하늘로부터 받은 비젼으로서. 자신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높이기 위한 갈망으로 불타는 비젼이다. 그것은 사나 죽으나 그리스도의 영광이 드러나도록 섬기기 위한 비젼이다 

 

 

 

 
 
 

 

 

불가능의 가능
 
1985년 5월 15일,미국 콜롬비아 대학의 학위수여석에 낯선 동양인 한 사람 이 감격적인 눈물을 흘리며 참석하고 있었다.이름은 전재경,나이는 50세.특별히 눈길은 끈 것은 그가 여느 사람과 달리 맹인아라는 사실이었다.

전박사 는 충남 부여에서 목수였던 아버지의 2남 5녀 중 여섯째로 태어나 다른 아 이들처럼 정상으로 자랐으나,7살되던 해 당시의 유행병인 안절을 앓다가 실 명하게 되고 그때부터 고통과 불행의 나날을 보냈다.


그러나 서울맹아학교에 입학한 그는 좌절과 고통을 견뎌내며 열심히 공부했으므로 드디어 건국대 역사지리학과에 입학할수 있엇다.
 4년의 과정을 무사히 마친 그에게는 여러 가지 장애요소가 많았지만 그대로 포기하지 않고 미국연수 1년 예정으로 도 미하여 장학금까지 받는 행운도 얻었다.


그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는 생활로 뉴욕의 복잡한 지하철을 세번이나갈아 타고 가야 하는 맹인전용도관을 20년이나 왕복했고,50세가 되는 해인 1985년 드디어 철학박사 학위를 받게 된 것이다.
그는 공부하던 중 그의 아내 에드나와 결혼했는데 신앙적 인 아내의 도움이 없었다면 그의 학문연구가는 전혀 불가눙했을 것이라고 고백하였다.


역사상 승리의 월계관을 쓴 인물들은 모두가 자기의 운명을 저 주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고 평정으로 대처하였던 사람들이다.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선한 뜻을 위해 태어 났다.(엡2:10) 

 

 

 
 
 

 

 

내다보는 지혜
 
미국의 알라스카 주는 텍사스 주의 두 배가 넘고 미국 본토의 5분의 1에 해당하는 큰 땅 덩어리입니다.
본래 알라스카는 소련 땅이었던 것을 1867년에 720만 달러를 주고 사들였습니다.
정부가 알라스카를 사들이자 의회가 떠들고 일어나 국무장관 슈워드와 죤슨 대통령을 소환하여 맹공격을
퍼부었습니다. 이유는 아무 쓸모도 없는 땅을 엄청난 돈을 주고 그것도 의회를 무시하고 제맘대로 사들였다
는 것이었습니다.
의회에 불려나간 대통령은
“죄송합니다. 이미 사버린 걸 어떻게 하겠습니까? 의회를 거칠 마음이 있었지만 그렇게 되면 매스컴이 떠들
고, 소문이 퍼지게 되고, 그렇게 되면 소련이 팔지 않겠다고 하거나 값을 많이 달라고 할 것 같아서 국무장관과
의논해서 샀습니다”라고 사과했지만, 의원들은“이 바보들아, 정 얼음이 그렇게 필요하다면 겨울에 꽁꽁 언
미시시피 강의 얼음을 깨다가 너희 집 안방에 둘 것이지 미쳤다고 쓸모도 없는 땅 덩어리를 720만불씩이나 주면
서 사들였느냐”고 욕을 퍼부었습니다.


그 후 의회가 조사단을 파견하여 알라스카를 조사해 보았더니 금과 백금이 가득하고, 풍요한 어장과 산림
이 우거져 있고, 석유가 무진장 매장되어 있었습니다.
코가 납작해진 의회는 대통령에게“의회에서 있었던 당신의 사과를 되돌려 드립니다.

알라스카는 얼음창고 가 아니라 보물창고입니다. 잘 샀습니다”라고 칭찬했다는 것입니다. 

 

 

 
 
 

 

 

비전이란 무엇인가?
 
째즈 음악가이며 작곡가이고 잘 알려진 밴드 리더였던 듀크 앨링톤은 누군가가 리듬의 정의를 물었을때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당신이 리듬을 가지고 있다면 정의를 내릴 필요가 없고,리듬을 갖고 있지 못하다면 어떤 정의도 도움이 안될 거요."

비전이란 무엇인가? 엘링톤의 말을 인용해 보면 "만일 당신이 비전을 갖고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알 것이고,비전을 갖고 있지 못하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어떤 교회 지도자는 비전을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며 그것을 보이게 만드는 것"이라 하였다. 또 어느 지도자는 '비전은 현재와 미래를 잇는 다리"라고 말했으며, 어떤 목회자는 "거룩한 꿈"이라 표현했다.

좀 더 충실하고 자세한 정의를 내려보자. 사역에 대한 비전은 하나님께서 그의 택하신 종에게 보여 주시는 것으로서 현재보다 나은 미래에 대한 선명한 그림을 마음 속에 그리는 것이며,하나님과 자신 그리고 상황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당신은 비전을 가지고 있는가? 

 

 

 
 
 

 

 

우산장사와 짚신장사
 
어떤 곳에 아들 둘을 둔 할머니 한 분이 살고 계셨다.

그런데 큰아들은 우산 장사이고 작은아들은 짚신장사였다.

 이 할머니는 두 아들의 장사 때문에 매일 매일을 근심과 걱정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날이 개여 햇볕이 쬐는 날이면 큰아들의 장사가 안될 것을 걱정해야 했고, 그러다가 비라도 쏟아지는 날이라면 작은아들의 장사를 걱정해야 했다.

그러니 해가 떠도 걱정, 날이 흐려도 걱정이었다.

이것을 지켜보던 한 동네 청년이 할머니를 위로하며 근심과 걱정에서 헤어날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할머니, 그렇게 나쁜 것만을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마시고 좀더 긍정적인 면을 생각하여, 만일 해가 뜨면 작은아들의 장사가 잘 될 것을 기뻐하고 비가 오면 큰아들의 장사가 잘 될 것을 기뻐하십시오."

그렇게 되면 비가와도 걱정이 없고 해가 떠도 걱정이 없게 된다는 말이다.

똑같은 현실을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그 결과가 크게 달라질 수가 있는 것이다. 

 

 

 

 
 
 

 

 

비젼을 품은 사람
 
<인류의 미래는 인간의 상상력 (想像力)과 비젼(Vision)에 달려있다>는 말입니다.
우리 나라의 장군들이나 정치가들도 이런 말을 할 정도의 수준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 개인이나 한 민족의 장래는 물론이려니와 세계인류 전체의 장래 역시 얼마만큼의 상상력과 비젼을 품고 있느냐에 달려 있다 하겠습니다.
잠언 29장 18절에 이르기를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고 하였습니
다. 여기서 묵시란 말이 바로 영어로는 비젼이란 말입니다.
영어성경에서는 이구절을 다음과 같이 번역하였습니다.
where there is no vision, the people are unrestrained. But happy is he who keeps the law."
글에 담긴 뜻을 그대로 번역하자면 비젼이 없는 백성들은 제멋대로들 행하여 망할 길로 가게 되고 여호와의 법을 지키는 백성은 행복을 누리게 된다는 뜻이 됩니다.
지금 이 나라와 사회가 이렇게 어려운 처지에 이르게 된 원인은 비젼있는 지도자가 없어 백성들에게 비젼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비젼이 있고 없음에 따라 한 시대와 백성들의 삶의 행(幸)과 불행(不幸)이 갈라집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소중한 비젼이 어디에서 어떻게 얻어지는 것이겠습니까?
사도행전 2장 17절에서는 베드로가 요엘 선지자의 예언을 인용하여 이르기를 성령받으면 젊은이들이 환상 곧 비젼을 품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모두가 추구하여야 할 바의 첫째가 성령의 은혜를 사모하여 성령받음으로서 비젼을 보게되고 그 비젼으로 이 시대의 나갈 바를 바로 제시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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