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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주의와 영해의 특징, 그리고 문제점

하나님아들 2023. 8. 11. 16:57

문자주의와 영해의 특징, 그리고 문제점              

 

문자주의와 영해(靈解)의 지양

 

 

바른 주해를 위한 관건

 

주해와 강해의 균형을 생각한 다음에는 곧이어 주해를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문제가 뒤따르게 된다. 주해는 성경 본문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한 것인데 구체적인 원리와 방법들에 대해서는 다음 절(節)에서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고, 여기서는 주해에 앞서서 성경의 글을 단순한 문자로 보느냐 아니면 영적인 것으로 보느냐에 대한 문제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곧 성경에 기록된 글이 보통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통상적 언어로서 표현되었는지 아니면 특별한 사람들만이 해석할 수 있도록 비밀스러운 뜻을 가진 특별한 언어로 표현되었는지를 알아보자는 것이다. 이는 성경의 글을 어떤 관점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해석하는 방법이 전혀 달라지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성경은 영적인 책이지만 인간의 언어로 기록되어 있으므로 성경에서 표현된 글은 글자 그대로의 문자적인 뜻으로만 이해하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어떤 사람들은 성경이 영적인 책이므로 모든 말씀에서 문자적 의미가 아닌 특별한 영적 의미를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들은 문자주의와 영해라는 이름으로 각기 논리와 당위성을 가지고 성경해석의 역사 속에서 오랜 세월을 대립하여 오면서 성경해석을 주도하여왔으며, 오늘날까지 그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양자 사이에서 어떻게 해야할까? 다시 말해서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본문 말씀을 글자로 표현된 그대로 이해하는 것이 옳은가 아니면 거기에서 어떤 특별한 영적인 의미를 깨달아야 옳은가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정해야 한다는 말이다. 앞으로의 성경해석을 위해서는 둘 중에서 어느 한 가지를 선택하여 해석의 기본 방침으로 할 것인지, 아니면 둘 다 옳다고 하거나 둘 다 그르다고 할 것인지 분명히 결정해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문자주의와 영해가 무엇인지를 좀 더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이하에서 각각의 특징과 문제점에 대해서 자세하게 살펴보기로 한다. 

 

문자주의와 영해의 특징

 

먼저 문자주의란 무엇인가? 문자주의는 문자적 해석과는 구별된다. 문자주의는 성경 말씀을 극단적으로 지나치게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경향을 의미한다. 그러나 문자적 해석은 성경 말씀에 대하여 기본적으로는 문자적으로 해석하지만, 필요할 때는 비유적 해석도 가능한 유연성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시(詩)나 예언에 많이 나오는 비유나 상징적 표현에 대해서는 문자적으로 해석하지 않으며, 때로는 풍유적인 해석을 통하여 영적인 의미를 발견하는 경우도 있다. 따라서 문자적 해석은 종교 개혁이래 건전한 주해방법으로 인정되어 왔다. 

 

문제가 되는 것은 문자주의 해석이다. 문자주의 해석이란 모든 기록된 글은 문자로 표현된 통상적인 의미만을 가지고 있다고 전제하고, 성경말씀 역시 문자적인 뜻 외에는 어떤 특별한 의미도 없다고 하면서 오직 글자 그대로의 표현에 의존하여 문자적인 의미만을 가지고 성경을 해석하는 주해방법을 말한다. 문자주의에 의하면 성경에 등장하는 비유나 상징적인 표현에 대해서는 성경 자체가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성경이 명시적으로 비유라고 가르치는 것 이외의 모든 말씀은 문자적으로만 해석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다음에 영해(靈解)란 영적 해석의 준 말인데, 고후 3:6에서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군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고 한 말씀을 근거로 모든 말씀을 본래의 문자적 의미는 무시하고 영적 의미만을 발견하여 풍유적(諷諭的)으로 해석하는 방법이다. 이는 우의적(寓意的) 해석이라고도 하는데, 성경에 등장하는 '우화(寓話)'를 해석한다는 뜻이 아니라, 모든 성경 말씀을 '우의적'으로 해석한다는 말이다. '풍유적'이나 '우의적'이라는 말은 성경 말씀에는 배후에 영적인 의미가 있다고 전제하고 비유나 상징이 아닌 평범한 진술까지 모두 비유처럼 간주하는 것이다. 

 

따라서 풍유적 해석은 성경의 모든 말씀에서 문자적인 의미는 무시한 채 어떤 다른 의미를 찾으려한다. 즉, 본문에 등장하는 단어들을 가지고 무엇은 무엇에 해당하고 또 다른 무엇은 무엇을 가리킨다는 식으로 계속해서 어떤 것들에 빗대어서 해석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해석을 하다보면 원래 단어의 뜻은 전혀 중요하지 않으며, 오직 그것이 무엇을 가리키는지를 아는 데만 열중하게 된다. 이상에서 살펴본 문자주의와 영해는 모두 근본적으로 주해의 정신과 맞지 않는 태도를 가졌음을 알아야 한다. 

주해는 본문의 원래의 의미를 아는 것을 가장 기본으로 하는데, 사실 두 가지 방법 모두 성경 본문이 원래 의미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오히려 이들은 본문이 가르치는 최초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려고 하기보다는 자신들의 해석 방침을 가지고 성경 전체를 획일적으로 판단하는 경향이 농후한 것이다. 

 

그렇다면 둘 다 그르다는 결론이 나오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랜 세월 문자주의와 영해가 성경해석의 역사를 주도한 까닭은 무엇인가? 몇 가지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우선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경을 해석하면서 상황에 따라 여러 가지 원리를 융통성 있게 적용하는 것을 매우 불편하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간단하고 손쉬운 방법으로 문자주의와 영해를 고안한 것 같다. 또 문자주의와 영해는 묘하게도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많은 재량을 주고 있어서 마음만 먹는다면 성경을 자신들이 의도하는 것들에 대한 뒷받침하는 증거로 활용하기 쉽게 만들어 주는 점이 있기도 하다. 

 

또 영해와 문자주의 해석을 주도했던 인물들이 당 시대에 매우 영향력 있는 사람들이었다는 것도 한 몫을 했다. 사람들은 마치 고린도 교회가 사역자에 따라 분파(分派)하였던 것처럼 영해와 문자주의를 주창하고 확립시킨 사람들을 신봉하고 그들의 이론들을 더욱 보완하고 발전시키면서 후대에 전하는데 엄청난 노력들을 하였다. 자고로 사람들은 화합과 타협으로 평화스럽게 살기보다는 극과 극으로 첨예하게 대립하여 자신과 반대되는 상대를 누르기를 좋아하는 경향이 있었다는 것을 역사를 통해 보게 된다. 

 

성경해석의 역사에서도 영해와 문자주의는 조화되지 못하고 항상 대립하기만 하였는데, 만일 둘 간에 서로의 문제점을 극복하고 서로의 장점을 잘 조화시키면서 중도적(中途的)인 새로운 해석방법을 모색하였다면 진작에 바람직한 성경해석방법이 나와서 많은 유익을 끼쳤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성경해석의 양대 산맥이었던 문자주의 해석과 영적 해석의 문제점을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고 나서 그것들을 어떻게 조화시켜야 올바른 성경해석이 될 것인지를 생각해 보기로 하자. 

 

문자주의의 문제점

 

성경 말씀을 글자 그대로 해석한다는 문자적 해석은 사람들이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중구난방으로 적용하는 것을 막을 수 있기 때문에 꽤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그러나 융통성 없이 문자적으로만 해석할 때는 많은 문제를 불러일으킬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성경은 비록 인간의 언어로 기록되었지만 수많은 장르의 문학으로 이루어졌으며 그 가운데 하나님의 오묘하신 뜻이 나타났기 때문에 단순히 문자 그대로만 이해할 수 있는 성질의 책은 아닌 것이다. 

 

세상의 일반적인 문학작품도 시(詩) 같은 것들은 문자적으로만 이해할 수는 없다. 하물며 성경은 인류가 창조된 이후 타락으로부터 구원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역사를 빠짐없이 기록한 역사책이며 동시에 예언서이다. 또한 구원받은 백성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가르치는 규범적 지침서이기도 하다. 그 안에는 수많은 인간에 대한 승리와 패배의 이야기들이 얽히고 설켜있으며, 그들의 노래와 시가 있고 예언과 교훈이 있으며 잠언과 지혜가 있고, 또 수많은 비유와 상징적인 표현들이 있기 때문에 성경을 융통성 없이 문자적으로만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그렇더라도 문자주의자들은 성경은 진리이기 때문에 모든 말씀을 문자적으로 해석해야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성경은 진리이다. 그러나 그 의미는 성경 말씀이 어떤 본문을 통하여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주고 있을 때 그 뜻 가운데 그 말씀이 전체적으로 어떤 진리를 구성하는 요소가 되었다는 것이지, 성경에 표현된 어귀 하나 하나가 모두 진리라는 뜻은 아니다. 

 

성경에는 욥기에 나오는 것처럼 사단의 직접적인 말도 있고, 사람을 태워 죽이라는 느부가넷살 왕 같은 불신자들의 잔인한 말도 그대로 기록하고 있으며, 심지어 동물이 한 말까지도 그대로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이때 이 모든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진리라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모든 말과 사건을 포함하여 그것들을 통해서까지도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조건 하나님의 말씀이라면서 글자 그대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많은 자기 모순에 빠지게 된다. 

 

성경에는 확실히 문자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내용만 있는 것은 아니다. 역사적 사실을 연대기적으로 기록한 것들은 대부분 쉽게 이해할 수 있으나, 시(詩)를 비롯하여 예언과 많은 상징적 표현들은 글자 그대로 단순하게 이해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 것이다. 그런데 극단적 문자주의가 되면 성경에서 말씀하는 영적인 의미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고 성경의 모든 말씀을 인간의 통념적인 용어로 표현된 것으로 간주하여 해석을 한다. 이는 사실 매우 이성적인 태도인 것이다. 성경에는 분명히 영적인 부분이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 책과 다를 것이 없어진다.

 

주님께서는 특히 영적인 교훈을 많이 하셨는데 당시 사람들이 한 번에 쉽게 이해하지 못한 예들이 종종 있었다. 요 3:3-4에서 사람이 거듭나야한다는 주님의 말씀을 오해한 니고데모는 사람이 어떻게 자기 모태에 들어갔다가 두 번째로 다시 나올 수 있는지를 되묻기도 하였는데, 주님의 말씀에서 중생의 영적 원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문자적으로 해석한 전형적인 예인 것이다. 요 4:10-15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도 주님께서 주시겠다고 하신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오해하여 야곱의 우물에서 길어 올린 물로 착각하고 대답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밖에도 요 6:48-52에 보면 주님께서 자신을 생명의 떡이라고 하시면서 먹으라고 하셨을 때, 유대인들이 수군거리면서 사람이 어떻게 사람의 살을 먹겠느냐고 말한 것을 볼 수 있다. 이들은 영적인 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지독한 문자주의자들임에 틀림없다. 계속해서 요 6:53-66에 보면, 그러다가 결국은 제자들이라고 하는 자들까지 주님의 말씀이 어렵다고 하면서 많이 떠나간 사실까지 보게 된다. 이처럼 주님의 말씀 중에는 평범한 글자 그대로의 말씀뿐만 아니라 영적으로 깊은 의미를 가진 말씀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또한 17권의 대소선지서는 대부분 여호와의 날에 대해 예언하고 있는데, 그 날은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의 날이며 동시에 구원의 날임을 가르친다. 즉, 그 날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칼과 기근과 염병과 지진으로 심판하시지만 동시에 그 날에 남은 자들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실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런데 여기서 이스라엘을 심판하신다는 것은 육적 이스라엘 곧 유대인에 대한 심판이지만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신다는 것은 육적 이스라엘에 대한 것이 아니라 영적 이스라엘인 교회 안에서 성도를 구원하신다는 영적인 의미를 가진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신약 성경 곳곳(행 2:16-21, 행 15:15-18, 롬 9:6-8, 히 8:8-13)에서 가르치고 있기 때문에 의심할 나위가 없는 것이다. 바울 사도는 특히 롬 2:29에서 껍데기만 유대인이라고 하는 자들이 참 유대인이 아니라 오히려 이방인으로서 마음으로 믿는 자들이 이면적인 참 유대인이라고까지 하였다. 그런데도 문자주의자들은 이를 이해하지 못하여 성경에서 표현된 유대인은 현재 팔레스타인 땅에 사는 유대인들만을 가리키며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민족을 가리킬 뿐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영적으로 어둡다는 것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이다. 

 

또한 성경에는 주님의 명령이라도 글자 그대로 행할 수 없는 말씀이 있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 산상수훈에서 주님께서 오른손이 실족하였을 때 찍어버리라고 했을 때 문자적으로 시행해야 하는가? 또 오른눈이 실족케 하거든 빼어버리라고 할 때도 정말로 자기 자신이 눈을 빼버려야만 하는가? 그리고 반드시 오른눈과 오른손에 국한되는가? 왼눈과 왼손이 죄를 짓거나 우리의 입술과 혀가 죄를 지을 때는 자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인가? 

 

이런 것들을 생각할 때 아무리 문자주의자라도 주님께서 손을 자르고 눈을 빼어버리라고 하신 말씀을 문자적으로 시행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 말씀은 우리의 지체가 절대로 죄짓는 일에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강력한 경고이다. 만일 그렇지 않고 실제로 우리의 지체가 죄 지을 때마다 잘려나간다면 기독교인은 전부 장애인이 되고 말 것이다. 이 땅에 사는 동안 주님처럼 조금도 죄를 안 짓고 완전하게 살 수 있는 자가 있겠는가? 

 

또 예언서 등에는 문자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상징적 표현들이 숱하게 많다. 다니엘 7장에서 바다의 한 짐승이 올라온다든지 그 짐승이 머리가 넷이고 또 뿔이 열 개가 났는데 뿔에는 눈이 달렸다든지 하는 말씀을 보고 글자 그대로 믿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요한계시록 12장에는 해(太陽)를 입은 어떤 여인과 용이 등장하고 용은 그 여인이 해산하려는 아이를 삼키려하다가 천사들과 싸우고 패하여 땅으로 쫓겨가서 입에서 물을 강같이 토하여 여인을 떠내려가게 한다든지 하는 내용이 있는데, 이러한 표현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또 계 7:4에는 머리에 인(印) 맞은 자 144,000명이 나오는데 이를 문자적으로 해석한 어떤 이단 종파에서는 궁극적으로 구원받게 될 숫자가 144,000이라고 하기도 하였다. 이는 머리에 인 맞는다는 개념이 무엇인지 그 숫자가 상징하는 의미가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한 채 엉뚱한 해석을 한 예이다. 

 

또 어떤 경우에는 성경이 상징적 표현에 대해 해석해 주는 예도 있다. 다니엘 8장에 보면 숫염소와 숫양이 싸운다는 상징적 표현을 바사와 헬라제국의 전쟁에 대한 예언이라고 해석해주는 것을 볼 수 있다. 요한계시록 12장에서도 여자를 괴롭히는 용을 사단 마귀라고 해석해주고 있다. 그러나 여자가 누군지 아이가 누군지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으므로 그들이 무엇을 상징하는지를 해석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밖에도 욜 3:18에서 작은 산들이 젖을 흘릴 것이라든지, 슥 14:4에서 감람산이 한 가운데 갈라져 매우 큰 골짜기가 되고 산 절반은 북쪽으로 옮겨가고 나머지 절반은 남쪽으로 옮길 것이라는 예언이나, 겔 47:8에서 물이 동방으로 흘러 아라바로 내려가서 바다에 이르러 흘러내리는 물로 바다(死海)가 소성케 된다는 것 등은 문자적으로 이루어 질 수 없는 상징적 표현들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문자적으로만 해석한다는 것은 문제가 많다. 아니 불가능한 것이다. 주님께서 마 13:34에서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않으셨다고 하지 않으셨는가? 성경에는 평범한 진술도 많지만 비유와 상징적 표현도 매우 많은 것이다. 따라서 문자주의를 고집하면 성경을 바르게 해석할 수 없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문자주의는 해석 자체의 문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대개 종말론적으로 오용되어 성도의 삶에 직접적 폐해를 야기시키기 때문에 더욱 경계의 대상이 된다. 오늘날 극단적 문자주의자들은 이단성이 강한 단체들을 이끌고 있는데, 특히 문자주의 해석을 확산시키고 있는데는 세대주의적 전천년주의가 한 몫을 하고 있다. 세대주의적 전천년주의는 조금 변형된 형태의 시한부 종말론과 신비주의적 종말관 등으로 발전하여 영적으로 기독교계를 어지럽힐 뿐 아니라 국가 사회적으로도 큰 피해를 주고 있어서 큰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영해의 문제점

 

문자주의 못지 않게 영해의 해독 또한 만만치 않다. 영해를 하는 사람들은 말씀을 대하면 대뜸 무엇은 무엇을 가리키고 무엇은 무엇을 가리킨다고 시작한다. 이들에게 본문 말씀이 원래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다시 말하면 영해에 의하여 성경 말씀 본래의 의미는 아주 없어지고 전혀 다른 엉뚱한 말씀으로 둔갑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성경의 모든 말씀을 풍유적으로 해석하는 영해를 통해서 신앙 성장을 기대한다는 것은 어렵다. 성경 말씀에서 문자적인 의미를 초월하여 어떤 영적인 것을 깨닫고자 하는데, 그것이 신앙을 건전하게 자라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게 하고 신앙을 변질시키며 퇴보시키기까지 하는 결과를 낳는다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물론 성경에는 영적인 의미를 가진 내용들이 없지 않기 때문에 때로는 영해가 필요한 경우가 있다. 특히 요한복음에는 주님께서 영적으로 심오한 말씀을 많이 하셨기 때문에 영적인 의미를 찾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단순한 의미 외에 특별한 뜻이 숨어있지 않은 표현에 대해서 영해를 하다보면 본문에서 전혀 의도하지 않는 아주 특이한 의미를 끌어내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누구나 알 수 있는 간단 명료한 의미를 가진 쉬운 본문을 난해하게 만드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인 예는 눅 10:30-35에 기록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이다. 풍유적 해석가들은 주님의 그 비유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사람은 아담을 가리키고, 강도는 마귀이며, 제사장은 율법을 의미하고, 레위 사람은 선지자이며, 선한 사마리아인은 주님이라고 한다. 또 예루살렘은 하늘의 도성이며, 여리고는 세상을 뜻하며, 주막은 교회를 말하고, 두 데나리온이란 신약과 구약이라고 하거나 혹은 사랑의 두 가지 계명이라고 한다. 심지어 주막 주인은 바울 사도를 가리킨다고 하며, 선한 사마리아인이 다시 돌아온다고 한 것은 주님의 재림을 뜻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모든 단어마다 의미를 부여하면, 결국 본래의 핵심적인 교훈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대신 엉뚱한 교훈으로 둔갑하고 만다. 주님께서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수수께끼를 내듯이 단어들의 의미를 풀어보라고 하셨을 리가 없다. 주님께서는 비유를 통하여 참된 이웃 사랑의 실천이 무엇인지를 가르치신 것뿐이다. 그래서 비유를 말씀하시자마자 참된 이웃이 누가 될 수 있는지를 곧이어 물으신 것이다(눅 10:36). 주님은 비유를 들을 자라면 누구나 당장 알 수 있는 것을 물으셨을 뿐이다. 율법사도 듣고서 쉽게 대답(눅 10:37)하지 않았는가? 

 

또 한 가지 예를 들면 눅 11:5-8에서 주님은 기도에 대해 교훈하시면서 어떤 사람이 자기 집을 방문한 친구를 위해 한 밤중에 또 다른 친구에게 가서 떡 세 덩어리를 빌리면서 강청하여 끝내 받아오는 비유를 말씀하셨다. 이 비유를 들으면 누구나 하나님께 기도할 때 비유에 나오는 사람처럼 끈질기게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주님께서 그런 의도로 말씀하신 것을 알고 그대로 실천하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풍유적 해석에 의하면 한 밤중이란 모든 질서가 혼돈하여 빛이 없는 암흑을 가리키며, 특히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도덕적으로 어지러운 암흑기라고 한다. 또 떡 세 덩어리는 성부, 성자, 성령을 가리킨다고 하기도 하고, 믿음, 소망, 사랑을 가리킨다고 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주님의 기도에 대한 가르침을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 

 

비유 속에 등장하는 한 밤중과 떡 세 덩어리는 비유를 말씀하기 위한 소재(素材)에 불과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기도를 끈질기게 하라는 것이지, 그 외에 다른 뜻이 없는 것이다. 영해를 하는 사람들은 성경 말씀마다 무슨 특별한 의미가 있는 듯이 가지각색으로 해석하면서 소위 영감있는 해석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보게 되는데, 얼핏 들으면 그럴듯하지만 본문의 가르침과는 전혀 다른 종교적 상상력을 발휘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위의 비유들에 대하여 영해를 하다보면, 주님께서 우리가 쉽게 실천할 수 있도록 가르치신 것을 도저히 실천할 수 없는 공허한 것으로 만든 셈이 되고 말았다. 하나님의 백성이 쉽게 이해하고 실천해야할 말씀을 가지고 난해하게 만들어서 이상한 이론을 만들어낸다면 악한 일에 속하는 것이다. 

 

또한 영해는 주로 다중적 의미를 말한다. 성경해석 역사에서 살펴보았지만 특히 중세에 사중적 의미가 매우 유행하였는데, 모든 말씀에는 문자적, 도덕적, 알레고리적, 종말적(영적) 의미가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예루살렘에 대해서 문자적으로는 이스라엘의 수도 예루살렘이지만, 도덕적으로는 인간의 영혼을 가리킨다고 하였고, 알레고리적 의미는 교회이며, 종말적으로는 영원한 하늘나라를 가리킨다고 했다. 따라서 예루살렘에 대한 단 한 번의 언급으로 동시에 네 가지 의미를 포함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예루살렘으로 갔다는 것은 실제로 지상의 도시인 예루살렘으로 갔다는 말이며, 인간의 영혼이 도덕적으로 우월한 곳으로 갔다는 뜻이며, 교회로 갔다는 말도 되고, 하늘나라에 갔다는 것도 되므로 도저히 종잡을 수 없는 말이 된다. 

 

물론 예루살렘이 한 가지 의미만을 가지지는 않는다. 성경에서 예루살렘이라고 할 때는 대부분 유대 왕국의 수도였던 예루살렘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지만, 영적인 의미로 사용되어 교회 혹은 하늘나라를 뜻하는 경우도 있다. 구약에서 욜 3:17, 미 4:8 등에서 예루살렘이라고 한 것은 모두 신약 시대 하나님 나라인 교회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며, 신약에서 갈 4:26, 히 12:22, 계 21:10 등에서 예루살렘이라고 한 것은 분명히 영원한 하늘나라를 뜻하는 것이다. 이처럼 어떤 말씀은 영적 이스라엘을 위한 교훈적 의미를 가지기도 하고 또 특별한 영적 의미를 담고 있기도 하지만 문맥에 따라 그 의미가 파악되면 대개는 한 가지 기본적인 뜻으로 고정하여야 한다. 그렇지 않고 한 단어에 다중적인 의미가 계속 남아있게 하는 것은 혼란스럽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 단어가 여러 가지 의미를 동시에 내포하는 경우도 있기는 하다. 예를 들어 심판이라는 말은 광의적으로는 의인과 악인을 구별하는 것을 뜻하지만, 협의적으로는 불신자에 대한 정죄(요 5:24)를 의미하기도 한다. 또 심판은 BC 586년에 유다 왕국이 멸망한 1차적 심판을 비롯해서, AD 70년에 예루살렘이 초토화된 여호와의 두려운 날로서의 2차적 심판이 있으며, 궁극적으로 종말에 있을 최후의 심판의 개념도 있다. 

 

그래서 사 51:5(내 의가 가깝고 내 구원이 나갔은즉 내 팔이 만민을 심판하리니 섬들이 나를 앙망하여 내 팔에 의지하리라) 등에 나오는 '심판'이라는 말은 한 단어에 이 모든 개념이 다 포함되어 있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처럼 한 단어에 다중적인 개념이 포함되는 경우는 매우 드문 예이고, 또 영해의 다중적 해석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그런데도 모든 말씀마다 여러 가지 뜻이 동시에 숨겨져 있다고 가정하고 그것을 발견하려고 무리하게 해석한다면 전혀 엉뚱한 제멋대로의 해석이 되는 것이다. 

 

이상에서 보듯이 영해를 하면 성경을 객관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전혀 불가능하다. 영해하는 사람마다 영적 분별력이 다르기 때문에 해석하는 방법도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풍유적으로 관찰하고 해석하는 영해에 있어서는 객관적인 해석 원리를 만들기가 매우 어렵다. 영해를 한다는 방침이 정해져도 그 안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하는가에 대한 기준을 정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따라서 영해를 한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타당하게 받아들여지는 객관성이란 있을 수 없으며 매우 주관적이고 자의적인 해석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또 하나 생각하여야 하는 것은 성경 본문이 과거에 전혀 의미하지 않았던 것을 오늘날 나에게 적용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영해는 본문의 최초의 의미를 무시하므로 본문이 과거에 의미한 것이 아니라 전혀 동떨어진 별개의 의미를 창출하고 있다. 말씀을 삶에 적용하려면 먼저 본문의 뜻을 정확하게 알고 나서 그것을 바탕으로 할 때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문자주의와 마찬가지로 영해를 통해서는 바른 적용을 할 수 없으며, 올바른 신앙 성장을 기대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다. 

 

문자적 해석과 영해의 조화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문자주의와 영해로 인해 야기되는 문제가 심각하지만,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려는 자세와 또 성경에서 영적인 면을 찾으려는 태도를 무조건 잘못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다만 전적으로 문자주의 해석을 하고, 전적으로 영해를 하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앞에서 말한 것도 문자주의와 영해를 무조건 배격하라는 것이 아니라, 극단적 문자주의와 극단적 영해의 위험에서 피하라는 것이다. 

 

만일 극단에 치우치지 않는다면 성경 말씀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항상 옳다고 보아야 한다. 성경에 기록된 대부분의 표현들은 읽어서 바로 이해할 수 있는 단순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적인 의미가 있는 특별한 말씀과 비유나 상징을 분별하지 못하고 획일적으로 융통성 없는 문자주의 해석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성경에는 적지 않은 비유와 상징적 표현들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평범한 글에도 문자적인 뜻 외에 얼마든지 의미심장한 것들이 포함되어 있을 수 있는데, 성경 말씀을 전적으로 문자적인 의미로만 해석하려는 것은 보통 무리가 아닌 것이다. 

 

성경에는 어떤 경우에는 문자적으로 이해할 말씀이 있고, 어떤 경우에는 영적인 의미를 찾아야 할 말씀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올바른 성경해석은 말씀을 기본적으로는 문자적으로 해석하려고 노력하되, 뜻이 잘 통하지 않거나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여겨지는 부문에 대해서는 비유적 해석을 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이다. 여기서 비유적이라고 함은 영해라고도 부르는 풍유적 해석을 포함하여 문자적 해석과 대조

되는 모든 비유적 해석을 가리킨다. 

 

그리고 문자주의와 영해는 둘 다 본래의 의미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데 문제가 있으므로, 만일 본문의 최초 의미를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문자적인 해석과 영해를 적절하게 사용한다면 그 문제는 사라지게 될 것이다. 즉, 본문을 주해함에 있어서 자신의 신앙적 토양과 사상과 지식을 버리고 성경에서 말씀하는 것이 무엇인지 겸허한 자세로 알려고 하면, 문자주의나 영해의 위험에 쉽게 빠지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문자주의자나 영해주의자들은 해석하기도 전에 이미 자신들이 선호하는 해석방법에 대한 신념을 굽히지 않고 더욱 확고하게 한 채로 성경을 해석하므로 성경의 저자이신 성령께서 본문을 통해 비취어주시는 계시의 빛을 받을 수가 없다. 그저 자신들의 노력으로 자신들의 취향에 따라 해석할 따름인 것이다. 정확한 주해를 하려면 먼저 자신의 것을 버려야 한다. 성경을 읽으면서 뜻을 정확하게 알기 전에 곧바로 자신의 삶에 적용하기 시작하는 태도 역시 버려야 한다. 

 

이상에서 본 바에 의하면 문자주의와 영해의 문제점을 보완하면 성경해석에서 얼마든지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음을 알았다. 기본적으로 성경 말씀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당연하고, 때로는 풍유적으로 해석하는 것도 필요한 것이다. 따라서 이제는 이들을 적절히 조화시키면 건전한 성경해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문자주의라는 말은 문자적으로만 해석하겠다는 고집 같은 것을 느끼게 하므로 영해와 조화시킨다는 것은 부적절한 표현인 것 같고, 문자적 해석과 영해를 조화시킨다고 해야 맞는 말이 될 것 같다. 

 

성경해석에 있어서 문자주의나 영해처럼 융통성 없이 한 가지 해석이론을 가지고 모든 말씀에 획일적으로 적용하려는 태도는 지양되어야 한다. 성경해석을 잘하기 위한 어떤 이론이나 비결을 찾기보다는 치우치지 않는 균형감과 조화를 배워야 한다. 균형과 조화란 적당한 선에서 뒤섞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문자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정확하게 분변할 수 있는 지혜를 말한다. 그러므로 문자적 해석과 영해를 잘 조화시키려면 반드시 본문에서 비춰지는 빛을 받아야 하며, 동시에 어떻게 해석하는 것이 옳은지 판단할 수 있도록 분별하는 지혜가 필요한 것이다. 

 

안유섭 목사(아르케 아카데미 원장, 반석교회 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