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과 악! 빛과 어두움의 역사!

바티칸과 W.C.C.의 세계종교통합운동

하나님아들 2022. 2. 23. 07:49

 

 2013. 9. 25. 14:47
 

(달라이 라마와 토마스 머튼)

 

 

1. W.C.C.가 주도하는 에큐메니즘의 실상


   에큐메니컬 운동이라고도 불리는 ‘에큐메니즘’(Ecumenism)은 교회일치운동 내지는 교회연합운동 등으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이 용어는 ‘집’을 뜻하는 그리스어 'oikumene'에서 유래한 것으로, 온 세계를 하나의 집으로 삼는다는 ‘세계교회’의 실현을 지향하는 운동으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의 에큐메니즘은 여러 갈래로 나누어진 개신교회의 재일치를 당면과제로 삼고 있으나, 궁극적으로는 종교개혁을 통해 갈라졌던 로마가톨릭, 즉, 천주교와의 합일까지 지향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에큐메니즘의 구심점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기관이 지금까지 설명한 W.C.C.(세계교회협의회)입니다.


   그런데 전술한 바와 같이 천주교는 종교개혁 당시나 지금이나 전혀 개선된 것이 없습니다. 개선되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비성경적인 방향으로 지금까지 흘러왔습니다. 교황을 하나님처럼 섬기고 교황의 교시가 성경의 권위보다 더 우위에 있으며 마리아 여신을 예수님보다 더 높이는 지경까지 이른 천주교와의 연합은 그 자체로 배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지금 개신교는 W.C.C.를 통해 스스로 이러한 천주교의 품에 들어가려 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W.C.C.가 보여준 지금까지의 행보는 결국 바티칸으로 흡수합병 되기 위한 물밑작업에 불과합니다.


   다음 기회에 살펴보겠지만 전 세계의 대부분의 마크르스주의자들은 바티칸(예수회)의 끄나풀이거나 이미 바티칸(예수회)에 의해 포섭되어 직/간접적으로 통제받고 있습니다. 소련이 붕괴되지 않았을 때만 해도 교황청과 공산주의는 적대세력이었으나 지금은 ‘신세계질서’(New World Order)라는 공통의 비전을 두고서 아주 긴밀한 밀월관계에 들어간 상황입니다. W.C.C.가 마르크스주의(막시즘)으로 심각하게 오염되어 있다는 사실은 W.C.C.를 향한 바티칸의 영향력이 그만큼 강하다는 것을 암시하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특히, 2002년도를 기점으로 W.C.C.는 아예 대놓고 교황청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행보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2002년부터 본격화되는가 싶더니 2011년에 이르러서는 급기야 W.E.A.까지 끌어들여서 교황청과의 적극적인 연합을 도모하고 있습니다.

 

 

   이상의 보도 자료들을 통해 여실히 드러나듯 성경에 예언된 바 있는 말세에 교회에서 일어나는 대대적인 배교의 선봉장은 바로 W.C.C.입니다. W.C.C.는 개신교회들을 하나로 묶어서 바티칸을 향해 통째로 들어 바치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의 개혁정신을 상실한 연합은 그저 야합이요 배교일 뿐이며 그 결과는 영원한 지옥입니다. 이런 자각 때문인지 심지어는 한국교회 에큐메니칼 운동의 본산이라고 할 수 있는 장로회 통합교단의 전국장로연합회에서도 W.C.C.에 대한 반대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그리고 최근에서는 한국성경신학회에서도 성경의 절대성과 전도의 필요성을 부인하는 W.C.C.에 대해 강력하게 성토했습니다.

 

 

   종교개혁의 선봉장인 마틴 루터(Martin Luther)는 바티칸에 대해 다음처럼 말했습니다. [Martin Luther, First Principles,196-197, 유석근, 『밝혀진 적그리스도의 정체』, 448에서 재인용.]


   “단지 바벨론 왕국이며 바로 적그리스도의 왕국일 따름이다. 마치 교황은 자신이 하나님인 것처럼 교회 안에 앉아 있으면서 그의 가르침과 의식으로 영혼의 죄와 파멸을 증가시키는데, 누가 조의 사람이고 누가 멸망의 아들인가? 이러한 모든 장황은 여러 세기 동안 교황의 횡포에 의해 이루어졌다.”


   장로교의 창시자인 종교개혁자 장 칼뱅(John Calvin)은 바티칸에 대해 다음처럼 말했습니다. [John Calvin, Tracts, Vol.1, 219, Ibid., 449에서 재인용.]


   “나는 교황이 그리스도의 대리자가 됨을 부인한다. 그는 복음을 맹렬히 핍박하는 가운데 자신이 적그리스도라는 것을 그의 행실을 통해 증명한다. 나는 그가 베드로의 후계자가 되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나는 그가 교회의 머리가 되는 것을 부정한다.”


   스위스의 종교개혁자 쯔빙글리(Huldreich Zwingli)는 바티칸에 대해 다음처럼 말했습니다. [Huldreich Zwingli, Principle Works of Zwingle, Vol.7, 135, Ibid., 452에서 재인용.]


   “나는 사탄 즉 적그리스도의 세력과 권력이 행해지는 것을 안다… 교황제도는 사라져야만 한다. 다른 수단에 의해서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만이 교황을 더 완전히 패주시킬 수 있다. 이는 세상이 올바른 길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자마자 강제적이지 않게 교황에게서 떨어져 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대표적인 종교개혁자들이 바티칸에 대해 강력하게 성토하고 있으며 그 바티칸은 그때 이후로 조금도 변한 것이 없으며 오히려 더욱 배도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런 바티칸이 개신교를 다시 흡수합병하기 위해 내세운 것이 종교다원주의에 기반을 둔 W.C.C.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배교의 축인 바티칸과의 재결합을 추구하는 야합운동에 참여해서는 안 됩니다. 이에 대해 스코틀랜드 자유교회 창시자들 중 하나이며 초대 의장을 역임한 토마스 차머스(Thomas Chalmers) 목사는 다음처럼 기도했습니다. [유석근, 『밝혀진 적그리스도의 정체』, 416.]


   “주님, 우리의 약함을 도우사 주님을 배반한 큰 배도자들을 기다리고 있는 멸망의 구덩이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우리는 로마 교황이 예수 그리스도의 자리를 침해할 것에 대해 성경에 분명하게 지적되었음을 보았습니다. 따라서 로마가톨릭 교회와 연합하지 않고 매우 가증한 그들의 배교에 대해 계속 굳건하게 대항하도록 하여 주소서.”


   현대 복음주의의 거장인 마틴 로이드 존스(D. Martyn Lloyd Jones) 목사 역시 바티칸에 대해 다음처럼 말했습니다. [유석근, 『밝혀진 적그리스도의 정체』, 388.]


   “나는 전혀 주저하지 않고 로마가톨릭주의로 알려진 이 체제야말로 ‘마귀의 가장 뛰어난 걸작품’이라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이 체제는 기독교의 믿음과 성경의 가르침에서 심하게 이탈된 체제이므로 나는 주저하지 않고 16세기의 종교개혁자들과 더불어 이 체제를 ‘배교 체제’라고 단언하는 바입니다.”


   교회교육잡지인 월간 《교사의 벗》 발행인으로 25년 이상 사역하고 있는 강정훈 목사도 이에 대해 아주 적절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강정훈, 『로마에서 시작된 카톨릭 교회』(서울:푸른초장, 1991), 203.]


   “어떤 이들은 제3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로마가톨릭 교회는 변화되어 가고 있다고 말한다. 무엇이 변했단 말인가? 그들의 교리가 변했는가? 사실상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직 기독교와의 대화를 시도하고 있다는 것 밖에는 달라진 것이 없다. 그들의 기독교와의 대화는 ‘타종교와의 대화’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다. 그들은 기독교와의 대화를 통해 ‘떨어져나간’ 기독교를 다시 교황청의 지배권 아래에 넣으려 하고 있고, 타종교와의 대화를 통해서는 혼합 종교를 만들어 세계를 통치하려는 야욕을 갖고 있을 뿐이다. 그들은 기독교와의 연합과 대화를 가장하여 기독교를 혼란시키며 파괴시키려 하고 있을 뿐이다.”


   그동안 W.C.C.에 대해서 옹호하는 아티클들을 살펴보았으나, 지금까지 지적한 부분에 대해 제대로 해명하는 내용은 접한 적이 없습니다. 만약 W.C.C.를 옹호하려면, 자꾸 논점 일탈의 오류를 범하지 말고, 소개한 두 책 및 본서에 제시된 바 W.C.C.의 치명적인 위험성에 대한 객관적 증거들에 대해 역시나 객관적인 자료에 기초하여 논리적으로 반박한 다음, W.C.C.의 장점을 역설하시기 바랍니다. 종교다원주의, 혼합주의, 뉴에이지, 막시즘 및 바티칸과의 결탁 등 어느 것 하나도 조금의 혐의도 없이 명쾌하게 해명되지 않는 한, 그것만으로도 W.C.C.와 함께 하지 않을 이유로는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애당초 한국 교회 및 전 세계 교회의 분열과 반목은 W.C.C.의 에큐매니즘을 정당화시키는 이유가 조금도 되지 못합니다. 그것은 A를 주장하기 위해 전혀 상관없는 B를 근거로 제시하는 범주의 오류요 논점을 흐리려는 잔머리일 뿐입니다. 교회분열의 문제는 W.C.C.가 아니더라도 성경대로 믿는 신실한 교회들끼리 모색해야할 문제이지 종교다원주의, 혼합주의, 뉴에이지, 막시즘/바티칸과의 결탁 등의 더러운 혐의를 뒤집어쓰고 있는 W.C.C.가 훈수를 둘 계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물론 W.C.C.가 강조하는 이웃사랑은 성경적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맥락 가운데서의 이웃사랑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보다 우선시될 때 가장 교묘하고도 치명적인 우상숭배가 탄생합니다. W.C.C.가 채택한 해방신학은 이웃사랑을 우상화하는 신학이요 하나님보다 의로운 척하는 신학이요 감히 하나님을 가르치려 드는 망령된 신학입니다. 한마디로 그것은 사탄의 신학입니다.


   언제든지 좋은 것은 가장 좋은 것의 최대의 적이 될 수 있습니다. W.C.C.는 언제나 좋은 것(이웃사랑)을 빙자하여 가장 좋은 것(하나님사랑)을 배격합니다. 좋은 가치들(인권, 자유, 평등, 섬김, 약자에 대한 배려 등)들을 이용하여 가장 좋은 가치(복음의 핵심진리)를 무너뜨립니다. 사실 W.C.C.에 참여하는 교회들 가운데에는 예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신실한 성도들이 많음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W.C.C.는 이미 태생부터 구조적으로 왜곡되었기 때문에 구성원들의 신실함은 무색해질 따름입니다.


   “무릇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사 64:6).


   W.C.C.의 지도부는 십중팔구 종교다원주의자들이요 종교혼합주의자들이요 뉴에이지운동가들이요 바티칸의 끄나풀들이기 때문에 희망이 없습니다. 에큐매니즘의 진정한 정신이 구현되려면 먼저 W.C.C.부터 해체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연합을 가장한 야합세력의 거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종교다원주의자나 막시즘 및 바티칸의 지지세력은 여전히 W.C.C.에 남을 것입니다. 해체될 수 없다면 탈퇴해야 합니다. 마땅히 참여할 연합운동 단체가 없어서, 혹은 무지해서 멋모르고 W.C.C.에 참여한 개인이나 단체는 당장 거기서 탈퇴해야 합니다. 이제 무심결에 W.C.C.에 참여하고 있는 단체나 개인은 거기서 벗어나서 새로운 연합운동을 일으켜야 합니다. 야합운동을 배격하고 진정한 연합운동을 일으켜야 합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연합운동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은 진리 안에서의 연합운동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서 결코 부분만 취해서는 안 됩니다. 먼저 전후 문맥을 살펴야하며 같은 주제에 대해 다루고 있는 성경 전체의 맥락을 살펴야 합니다. 그래서 상호 간에 모순 없이 통전적인 해석을 도출해야 합니다. 교회연합이라는 주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W.C.C.가 걸핏하면 강조하는 것처럼 교회의 연합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연합만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세상 풍조에 휩쓸리지 말고 분리되어 거룩함을 지킬 것을 명령합니다. 종합하면, 성경적인 연합은 진리 안에서의 연합을 의미합니다. 이에 대해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가 아주 잘 지적하고 있습니다.


   “참된 교리란,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에 대한 우리의 관점,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고유한 신성을 역설하는 것, 동정녀 탄생, 이적과 초자연적인 것, 그의 속죄, 희생, 대속, 죽음, 그리스도의 문자적이고 육체적인 부활, 성령의 인격과 그 사역 등이다. 이러한 것들이 구원의 진수가 되는 교리들이다. 그것이 전파되어야 할 교리요, 교회의 참된 표지로 첫 번째가 되는 메시지이다. 교회는 이러한 것들을 믿기 때문에 언약 가운데서 함께 모인 사람들의 모임이다.” [마틴 로이드 존스, 서문강 역, 『시대의 표적』(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2007), 339.]


   그렇다면 참된 연합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할까요? 사실 이에 대해는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가 강연을 통해 다음처럼 명쾌한 해답을 제시한 바 있습니다. [하이웰 R. 존스, 박영옥 역, 『마틴 로이드존스의 진리로 하나』(서울: 목회자료사, 1998),61-63.]

 

 

 
   …합동과 연합을 말하기 전에 “교회란 무엇인가”하는 첫 번째 질문을 제기하도록 합시다. 우리가 이러한 질문에서 시작한다면 마틴 루터가 밟는 길을 따르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필수적인 일입니다. 왜일까요?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입니다. 이런 경험을 알고 있는 사람에게, 즉, 성경에 유일한 권위를 부여하는 사람에게는 무엇보다도 로마교회와의 타협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질문들을 제기하고 영적인 해받을 발견하는 사람은 로마와 타협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로마가톨릭 교회는 ‘또 다른 복음’에 대해 가르칩니다. 그것은 전혀 다릅니다.

   주교를 교회의 본질이라고 말하는 사람들과 복음주의자들은 타협을 할 수 없습니다. 복음주의자가 감독의 서품을 받지 않은 사람은 진실로 서품을 받지 않은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과 타협을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복음주의자와 신성모독적인 ‘미사’를 믿는 사람들 사이에는 타협이 있을 수 없습니다. 복음주의자와 침례에 의한 거듭남을 믿는 사람 사이에는 타협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루터는 로마서와 시편과 갈라디아서를 연구하고 강의나 설교를 준비하면서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따라서 단절은 불가피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복음주의자들에게 있어서 그런 사람들과의 타협이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부인하는 교회 내의 다른 사람들, 그리고 하나님의 본질을 부인하는 것처럼 보이고 주 예수 그리스도가 호모였다는 식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과 함께 멍에를 매는 것 역시 그에게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복음주의자들과 그런 가르침 사이에는 일치점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빛과 어두움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이에 대해 항의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지만 당신은 로마교회가 변하고 있음을 잊고 있지 않습니까? 당신은 루터에 빠져 있지 않습니까? 당신이 20세기에 살고 있다는 사실과 로마 교회가 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 변화를 시험해봅시다. 로마교회는 오늘날 루터시대의 교회와 동일하지 않습니다. 어떤 점에서 그런가요? 그 이후 로마교회는 ‘교황 무오설’의 교리를 확실하게 공표했습니다. 그것은 1870년에 행해졌습니다. 또 다른 것은? 로마교회는 마리아의 ‘원죄 없는 잉태론’과 ‘성모몽소승천’ 교리도 확실하게 공표했습니다. 더구나 성모 마리아 숭배는 굉장히 증가했습니다. 그 당시 로마교회와 현재의 로마교회 사이의 유일한 차이는 지금이 훨씬 나쁘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루터시대 이후로 면죄부의 악습 문제를 처리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또한 교리의 가치를 절하하여 루터 당시보다 훨씬 더 나쁘게 만들었습니다. 그 점을 잊지 맙시다.


   그 다음에는 다른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성경에 대한 그들의 새로운 태도는 어떤가?” 그것을 살펴봅시다. 여러분은 로마교회의 성경에 대한 새로운 태도가 주로 고등비평적인 태도이며, 로마교회로 들어오는 것이 복음주의가 아니라 근대사상, 자유주의, 고등비평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 친구 여러분, 속지 마십시오! 그것이 로마가톨릭 교회의 진상입니다.


   …이제 한 가지를 여러분에게 간구함으로서 마칠까 합니다. 우리 주변의 상황은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에큐매니칼 운동은 날마다 발전하고 있으며 로마의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이것은 제 말이 아닙니다. 위대한 메서디스트 구약교수인 노만 스네이스(Noman Snaith)가 최근에 그것을 책에서 기술했습니다.


   …그 운동은 로마뿐만 아니라 소위 세계 종교라고 하는 것과의 통합을 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점을 깨달아야 합니다. 또한 각 지방의 지역교회협의회는 복음주의 원리들을 타협하는 대가로서만 가능하다는 것도 깨달아야 합니다. 복음주의자들이 조직된 교회, 특히, 로마가톨릭 교회에 스며들어 개혁하고 복음적인 교회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생각은 정말 말도 안 되는 착각입니다. 어떤 단체도 일찍이 진정으로 개혁된 경우는 없었습니다. 이것은 역사의 평가입니다. 이와 같은 때에 중립을 지키는 것은 매우 비겁한 짓입니다. 사실을 몰라서 그런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복음주의자인 우리는 이런 상황에서 무엇을 해야 할까요? 제 대답은 우리가 요한계시록 18장 4절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라”는 위대한 훈계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의 백성아, 그녀에게서 나오라. 그리하여 그녀의 죄들에 동참자가 되지 말고 그녀의 재양들을 받지 말라”(계 18:4). 거기서 나오라! 그러나 같은 마음을 지닌 모든 그리스도인과 교제하는 데로 들어가십시오. 진리를 수호하고 타협과 주저와 중립과 로마가톨릭의 계획과 에큐매니칼 운동에 기여할 뿐인 모든 것을 거부하는 복음주의협의회와 같은 연합체로 들어가십시오. 나와서 들어가십시오!

 

 


   그렇습니다. 로이드 존스의 목사의 강력한 권고 그대로 우리는 W.C.C.로부터 ‘나와서’ 진정한 연합운동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전술한 것처럼 일제강점기 당시 한국의 거의 모든 성도들을 배교의 길로 이끌었던 장본인은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이었습니다. 주기철 목사님과 같은 극소수를 제외한 모든 목회자들이 앞장서서 배교를 주도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한국교회에서도 동일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야합평화론에 감염된 목회자들과 신학자들이 종교다원주의를 확산시키며 또다시 한국교회를 배교의 길로 이끌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W.C.C.에 동참하는 것은 신사참배에 동참하는 것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지금까지 자세하게 설명한 것처럼 W.C.C.는 명백한 종교다원주의 운동이며 그 배후에는 바티칸이 있고 북한정권도 문선명의 통일교를 통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대로라면 개신교는 세계의 다른 종교들과 더불어 종교개혁 이후로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이 오히려 개악에 개악을 거듭해왔던 바티칸에 의해 흡수합병 될 것입니다. 지금은 강제력이 없으나 말세의 적그리스도가 출현하여 전체주의적인 세계독재정부를 출범시키면 본격적으로 종교재판이 재개될 것입니다. 물론 종교재판의 주역은 적그리스도의 앞길을 예비하는 거짓선지자의 역할을 충실하게 감당해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할 바티칸이 될 것입니다.


   공신력 있는 기독교 기관인 ‘천주교 정보 연구국’(Catholic Research Information Bureau, CRIB)에서는 다음과 같은 경고의 나팔을 불었습니다. “속지 말라. 천주교회는 카멜레온과 같다. 천주교는 개신교 국가들 내에서는 관용적이고 우호적이며 도덕적 권위가 지고한 듯 보이지만 국민 다수가 천주교인 곳에서는 전혀 딴판이다. 그들은 결코 자유의 수호자가 아니다. 그들은 상황에 따라 색깔을 바꾸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색깔은 절대로 천주교이 진짜 색깔이 아니다.” [유석근, 『밝혀진 적그리스도의 정체』, 367.]


   팀 리하이(Tim Lahaye) 목사 역시 다음처럼 경고하고 있습니다. “내가 아는 한도 내에서 천주교는 개신교도들에게 가한 핍박을 죄로 자인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우리를 ‘분열된 형제’라고 부르는 것은 개신교도들에게 인정을 얻기 위한 방편에 불과합니다. 천주교의 권력이 재차 강화되면 다시 한번 종교재판이 일어나리라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오늘날 천주교 지배적인 국가 콜롬비아, 스페인 등을 보면 개신교도들을 이방인처럼 취급하여 교회를 불사르는 등 종교적인 자유를 박탈하고 있습니다.” [팀 리하이, 김의자 역, 『요한계시록 해설』(서울: 보이스사, 1980), p.426, Ibid., 367에서 재인용.]


   강정훈 목사도 동일하게 지적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로마 카톨릭 교회는 변화되어 가고 있다고 말한다. 무엇이 변했단 말인가? 그들의 교리가 변했는가? 사실상 변한 건 아무것도 없다. 오직 기독교와의 대화를 시도하고 있다는 것 밖에는 달라진 것이 없다. 그들의 기독교와의 대화는 '타종교와의 대화'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다. 그들은 기독교와의 대화를 통해 '떨어져나간' 기독교를 다시 교황청의 지배권 아래 넣으려 하고 있고, 타종교와의 대화를 통해서는 혼합 종교를 만들어 세계를 통치하려는 야욕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들은 기독교와의 연합과 대화를 가장하여 기독교를 혼란시키며 파괴시키려 하고 있을 뿐이다.” [강정훈,『로마에서 시작된 카톨릭교회』(서울: 푸른초장,1991), 203, Ibid., 368에서 재인용.]


   일찍이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 역시 천주교의 음모를 간파하여 『경보를 발하라』(Sound and alarm)라는 제목의 연설 가운데 다음처럼 경고했습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진리로 하나』(서울: 목회자료사, 1998), 118-119; 126-128, Ibid., 440-442에서 재인용.]

 

 



   로마 카톨릭 교회는 복음주의적인 개신교 입장을 받아들이는 쪽으로 교리적인 변화를 가져오지 않았습니다. 전혀.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은 이 점을 깨닫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물론 그것은 로마교회의 공식적인 대변자들이 전략을 바꾸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우호적인 태도를 보입니다. 그들은 우리를 분리된 형제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이 이런 종류의 상황을 다루신 일을 기억하십시오.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마 7:15).

   그들이 변장하지 않고 오는 것이 더 좋습니다. 하지만 지금 그들은 양의 옷을 입고 다가오는데 우리의 복음주의자들은 이것을 모르고 로마 카톨릭 교회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에큐메니칼 운동의 가장 위대한 권위자 중 한 사람인 스티븐 닐 감독은 어떤 점에서는(사회적인 면에서) 로마가 과거 그 어느 때보다도 우리에게 가깝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그들이 우호적으로 접근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는 덧붙여서 사실상 교리적으로는 로마 카톨릭 교회가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전보다 지금 우리와 더 멀리 떨어져 있다고 말합니다. 그가 에큐메니컬 운동과 세계교회협의회를 믿는다 하더라도 그는 상황을 솔직하게 시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우리는 이 대 전쟁에 가담했으며 여러분은 이 전쟁에 직면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이 전쟁에서 중립을 지킬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로마교회와 마리아 숭배라는 이 의심스러운 태도에 대해 중립적인 입장을 취할 것입니까? 교황은 10월 한 달 동안 특별히 마리아에게 기도하라고 교인들에게 부탁했습니다. 그것이 옳은 일입니까? 그것이 사소한 문제입니까?


   우리는 이 전투에 나서야 합니다. 우리는 싸우기를 원치 않습니다. 우리의 일을 계속하는 것이 더욱 좋습니다. 그러나 이런 변화가 일어나고 평신도들이 동요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일어서서 말하고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려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독교회의 전반적인 미래를 위해 대전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때에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교회가 무엇입니까? 이 세상은 무엇을 기다리고 있습니까?


(중략)


   여러분이 복음주의를 부인하는 교회에 속해 있으면서 "나는 복음주의자이다. 난 지금 복음의 일을 하고 있다."고 말해봐야 소용없습니다. 나팔이 불분명한 소리를 내면 아무도 전쟁을 준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함께 이 말을 해야 하며 우리는 죽은 자들을 깨울 수 있는 목소리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우리는 크게 외치고 경보를 발해야 합니다. 이것은 사도들의 영광의 외침이었습니다.


   주님에 대한 두려움을 안다면 어찌 나팔소리를 죽이고 작은 평화와 인기에 영합하여 정반대의 생각을 가진 다른 사람들과 연합할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는 없습니다. 또한 진리를 수정하거나 적들과 연합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찍이 분명한 나팔 소리가 들려야할 때가 있었다면 지금이 바로 그때입니다. 우리 모두 함께 협력합시다! 함께 헌신합시다.


   그리고 나팔의 분명한 소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회개하고 믿음을 가지며 초대교회를 수립하라는 분명한 소리를 모든 사람에게 분명하게 외쳐야만 합니다. 이 악하고 왜곡된 세대들 가운데서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를 수호해야만 합니다.


   그러면 누가 우리 주님의 편에 있나요? 그 사람으로 하여금 이것을 선언하게 하고 그들로 하여금 이것으로 말미암아 고통당할 준비를 하게 합시다. 주님의 편에 누가 서 있나요? 여러분이 어디에 있는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하나님으로 모신다면 그분을 따르십시오. 그러나 바알을 섬긴다면 그를 따르십시오. 여러분이 신약 성경적 교회가 복음주의 교회임을 믿는다면 확고하게 그 입장에 서십시오.


 

 

   실제로 교황청에서는 오늘날에도 개신교를 이단으로 간주하고 있음을 천주교의 교리문답을 통해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변기영, 『뜨리뗀 공의회 간추린 교리문답』(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1983) ,24-25, op.cit., 368-369에서 재인용.]

 

 

   천주교의 교리에 다르면 이단에 대한 합당한 반응은 화형시키는 것입니다. 다만, 지금은 세속권이 뒷받침되지 않아서 참고 있는 것뿐입니다. 천주교가 제2차 바티칸 회의(1962-65) 이후 개신교회의 성도들을 향해 ‘분열된 형제’라고 부르며 부지런히 ‘화해’와 ‘일치’를 외쳐온 것은 강정훈 목사의 지적처럼, 오직 개신교회를 교황권 아래로 흡수하여 중세 암흑기의 위상을 되찾고자 하는 야심 때문입니다.


   오늘날 ‘음모론’이라는 이름으로 경시되는 음모의 진짜 주체는 바로 바티칸입니다. 중세시대에서의 세속권을 다시 회복하기 위해 꾸미고 있는 음모인 것입니다. 실제로 음모론에 등장하는 다양한 세력들(프리메이슨, 빌더버그 그룹, 로스차일드 가문, 패이비언 사회주의, 록펠러 가문, CRF, UN, IMF, 연방준비은행 등등)은 바티칸의 장기말일 뿐입니다. 이는 바티칸이 일루미나티(예수회의 비밀이름)의 창설 이후로 지금까지 치밀하게 진행되어온 음모이며 그 키워드가 바로 ‘신세계질서’(New World Order)입니다.


   현재 천주교가 주축이 되어 진행되는 ‘세계종교통합운동’이란, 실제로는 바티칸의 휘하에 세계의 모든 종교를 흡수합병 시키는 과정입니다. 종교다원주의란, 실제로는 로마카톨릭 안으로 모든 종교를 흡수합병 하는 과정일 뿐입니다. 지금은 우호적 흡수합병의 모양새를 취하고 있으나 머지않아 적대적 흡수합병으로 바뀔 것입니다. 전 세계 종교계의 지각변동이 일단락되면 또다시 종교재판이 부활될 것이며 중세 암흑기와 같은 처참한 마녀사냥이 시작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첫 번째 대상은 바로 우리 개신교도들입니다.


   바티칸은 지금 현재 종교다원주의에 근거하여 세계의 모든 종교를 급속하게 천주교 안으로 통합시키는 작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개신교 안에서는 이미 W.C.C.가 그 일을 진행하고 있으며 빌리 그래함의 공작으로 인해 W.E.A까지 넘어간 실정입니다. 바티칸이 만약 세속권을 다시 거머쥐게 된다면 종교재판의 부활은 필연적입니다. 그리고 변함없는 교리 그대로 천주교로의 개종을 거부하는 모든 개신교도들에 대한 무참한 고문과 학살이 자행될 것입니다. 이는 과거에 그들이 저지른 행적을 통해 충분히 짐작해볼 수 있는 일입니다. [Baron Porcelli, 생명의서신 편집부 역, 『성전에 앉아 있는 죄의 사람』(서울: 생명의서신, 2004) 참조.]


   A.D. 1215년, 라테란(Lateran) 제4차 종교회의의 종교법령은 이교도와 이단의 제거에 더욱 정열을 쏟았습니다. 천주교 성직자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세속권력들이 두드러지게 뭉쳤습니다. A.D. 1227년 나본(Narbonne) 종교회의가 동일한 노선을 밟았고 그 이후 톨로스(Toulouse) 종교회의에서는 아이들이 부모를 이단자로 비난하도록 강요받았고 성경읽기가 평신도에게는 금지되었습니다. 이어지는 종교회의마다 동일한 노선을 취했습니다.


   성경대로 믿는 크리스천에 대한 교황의 학살은 예수회 신부 그레트져(Gretzer)가 자신의 저서에서 인정하듯이 역사에 또렷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360년부터 1380년까지 종교개혁자 위클리프(Wycliff)와 그를 따르던 롤라드인들에게 퍼부어졌고, 약 40여년 후엔 보헤미아에서 신앙개혁가 후스(John Huss)를 처형했습니다. 교황은 1464년부터 1498년까지 보헤미안인들과 영국 사람들을 박해한 것뿐만 아니라, 이탈리아에서 사보날로라(Savonarola) 같은 사람들에게 박해를 가했습니다. 왈덴시스(Waldemses) 크리스천들에 대한 학살사건, 볼 루이스(Vll Louis) 크리스천들의 학살사건 등은 어느 누구의 피라도 응결시킬 수 있도록 치밀하게 계산된 잔학한 행위의 반복이었습니다.


   보수적인 견해에 의하면 15세기 동안 로마 천주교의 손에 죽임을 당한 사람들의 숫자는 대략 2,500,000명으로 보는데, 다울링(Dowling)은 스코트(Scott)의 교회사를 인용하여 프랑스에서 1,000,000명의 왈덴 크리스천들이, 네델란드에서 36,000명의 크리스천들이, 또 스페인 종교 재판소에서 150,000명, 그리고 제수이트(예수회)가 죽인 성경대로 믿는 크리스천들 900,000명을 언급합니다.


   종교재판과 박해와 살육의 도구로써 더욱 유효할 수 있게 하기 위해 1478년에 개편되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역사가 로렌트(Lorent)에 따르면, 스페인에서는 1480-1498년에 8천 명의 크리스천이 화형 당했고 9만 명의 크리스천이 다른 형벌에 처해졌으며 1499-1506년 사이에는 1,600명 이상이, 또 1515-1570년에는 2,536명이 화형 당했습니다. 1524년에는 2만 명 이상이 처형되었고 이들 중 천 명가량이 트리아나 세빌르(Triana Seville)라는 한 도시에서 화형 당했습니다.


   이처럼 애당초 대량학살(Genocide)은 히틀러와 나치가 만들어낸 아이디어가 아니라 바티칸의 교황이 만들어낸 공식교리였습니다. 이교도, 그러니까, 모든 개신교도들에 대한 대량학살에 대한 교리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천주교의 공식교리로 남아있습니다. 쉽게 말해, 그들은 언제든지 상황만 변하면 과거처럼 개신교도들을 잔혹하게 학살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머지않아 그 시기가 도래할 것입니다. 천주교가 주도하고 있는 종교통합운동이 이미 전 세계의 모든 종교를 다 집어삼키고 있습니다. 참된 개신교도들만이 남을 것이고 그때부터 천주교는 다시금 종교재판을 부활시킬 것입니다. 


   과거의 종교재판소는 독창적인 기관으로 천주교에 대항하는 유럽의 모든 사람을 말살할 목적으로 세워졌습니다. 이것은 프랑스, 밀라노, 제네바, 아라곤, 그리고 사르디니아에서 폴란드까지(14세기), 그리고 다시 니헤미아에서 로마까지(1543) 퍼져나갔습니다. 스페인에서는 1820년까지 존속했습니다. 종교 재판소는 1229년, 1233년, 1234년에 절정을 이루었습니다. 이 천주교 도살장은 13세기를 거쳐 14세기 말에도 그 살인과 약탈, 고문을 멈추지 않으며 15세기에서 16세기까지 지속되었습니다.

 
   이를테면, 17세기(1641)에 아일랜드의 천주교는 10월 23일(이그나티우스 로욜라 기념일)을 개신교도들에 대한 학살의 날로 정하여 하루에 150,000명을 죽였습니다. 성경대로 믿는 크리스천들은 땅에 모가지만 내놓고 매장된 채로 굶어 죽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몸이 찢어져서 유혈이 낭자한 몰골로 미사에 끌려갔습니다. 한 사람은 톱으로 켜져서 몸이 둘로 쪼개졌고 그의 부인은 목청이 잘려 나갔고, 그의 어린 아들은 골이 깨어져 버렸는데 그 시체가 돼지우리에 던져졌습니다. 어떤 크리스천들은 허리에 줄을 묶어 말이 시궁창을 달리는 동안 질질 끌려 다니다가 죽기도 했습니다. 수천 명이 팔과 손, 다리를 잘렸으며 그 상태로 피를 흘리며 죽어갔고, 티로(Tyrone) 지방에서는 하루에 삼백 명을 익사시켰고, 오륙십 명이 한 집에 감금시켜 놓고 태워 죽였습니다.


   1655년 1월 25일 교황 클레멘트 8세의 재임 기간에 무장한 폭도들은 성경대로 믿는 크리스천들이 사는 삐에드몽으로 갔습니다. 지오반니 앙드레 미샬랭(Giovanni Andrea Michialine)은 그의 앞에서 세 아들이 칼에 베임 당하는 것을 목도해야만 했는데, 한 폭도가 그의 넷째 아들 다리를 잡고 벽에 내동댕이쳐 머리가 깨졌습니다. 천주교 폭도들은 10살짜리 소녀를 나무 곳간에 몰아넣고 불을 피워 그녀를 불에 달군 후 그녀의 어머니와 함께 죽였습니다. 지오반니 로스타그날(Giovanni Rostagnal)은 80세의 노인인데 코와 귀를 잘랐고 숨이 끊어질 때까지 그의 몸에서 살점을 베어내었습니다.

 

 

   야콥 비로네(Jacob Birone)는 학교 선생님이었는데 벌거벗겨서 뜨겁게 달군 족집게로 그의 손톱과 발톱을 뽑고는 허리에 줄을 묶어 양쪽에서 두 폭도가 거리에 끌고 다니는 바람에 몸에는 깊은 상처가 나고 거의 죽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 둘은 매 순간 그에게 “자 이래도 미사를 드리지 않겠는가?”하고 물었는데, 그는 모든 폴리시안즈나 보고마일즈가 믿었듯이 미사는 마귀에게 속한 것임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의 목을 베었고 시신은 강에 던져버렸습니다.


   야콥 로제노(Jacob Roseno)는 성인들에게 기도하라는 강요를 받았으나 어떤 마니캐안도 불가리안도 또 소위 다른 ‘이단들’도 그런 가증스런 일을(딤전2:5) 하지 않았기에 천주교 폭도들은 그를 심하게 매질하고 여러 발의 총알을 쏘아댔습니다. 그의 숨이 끊어지는 순간에 그들은 또 “성인들에게 기도해라!”하고 악을 썼으나 그의 대답은 “No”였습니다. 그들은 그의 목을 칼로 끊어버렸습니다. 천주교 폭도들은 야균도 미살리노(Jacopo Michalino)라는 종의 생식기를 떼어냈는데 그 떼어낸 부분의 출혈을 막는다고 불을 켠 양초를 갖다 댔습니다. 그 다음에는 족집게로 손톱, 발톱을 뽑고 끈으로 그의 머리를 묶어 조였는데 어찌나 조여 맺는지 눈알과 골이 빠져나왔습니다.


   이와 같이 로마가톨릭은 어떠한 이견이나 반대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천주교가 지배한 수세기 동안 로마교가 참된 성도들을 죽인 수는 이전에 로마제국이 죽인 수보다 더 많았습니다. ‘암흑시대’라고 후세의 사가들이 명명한 로마가톨릭 지배하의 약 1,200년 동안 5,00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교황권의 박해를 받아 죽었던 것입니다. 이는 100년마다 평균 400만 명 이상의 비율로 죽은 셈인데, 당시의 세계 인구를 감안할 때 상상을 초월하는 수치입니다. 당시의 100만 명은 어림잡아 지금의 1000만 명에 상응하는 수치이기 때문입니다.


   천주교가 지배하는 신성로마는 그 잔인성에 있어서 이교도들의 로마를 훨씬 압도하고도 남음이 있었습니다. 소위 말하는 암흑시대는 주후 약 312-1517년 종교개혁이 시작될 때까지 약 12세기 동안 지속되었으며, 오늘날에도 백성과 무리와 열국과 방언들 위에 앉아서 만만치 않은 권세를 떨치고 있습니다. 머지않아 신세계질서(New World Order)가 달성되면 바티칸은 성경의 예언대로 다시금 세속권을 거머쥐게 될 테고 종교재판을 부활시켜서 동일한 만행을 자행할 것입니다(계시록 17장). [유석근, 『알이랑 고개를 넘어 예루살렘으로』(서울: 도서출판 예루살렘, 2011), 276.]


   끝까지 배교하지 않는 개신교도들에 대해 바티칸이 어떤 식으로 박해할지는 충분히 짐작이 가고도 남는 일입니다. 그들은 1,200년 동안 인류 최고의 고문 기술을 축적시켜두었기 때문입니다.


   『폭스의 순교사』에 따르면 중세시대 때 성경대로 믿는 성도들은 천주교에 의해 이단으로 정죄되어 온갖 종류의 처참한 고문을 당하다 참혹하게 순교했습니다. 천주교 사제들은 그들에게 끓는 기름을 붓거나 관절을 잡아 비틀었습니다. 창자를 끄집어내거나 온 몸을 창으로 찔렀습니다. 채찍질을 통해 살점을 뜯어냈으며, 이마를 쇠사슬로 죄여서 눈알이 튀어 나오게 만들었습니다. 인두로 남성과 여자의 성기를 지졌으며, 가위로 여성의 가슴을 잘라내기도 했습니다. 갈고리로 살을 긁어내거나 철판 위에 생사람을 올려놓고 삼겸살 굽듯이 굽기까지 했습니다. 나사로 손가락을 죄어 부러뜨리고 혀를 뽑아냈으며 펄펄 끓는 기름과 타르를 퍼붓기도 했습니다. 생매장하거나 익사시키는 것은 다반사였습니다. 생살을 바늘로 꿰매거나 산 채로 맹수들에게 뜯어 먹히도록 만들었습니다. 심지어는 창을 여성의 성기로 찔러 넣어 정수리까지 통과시켰습니다. 그야말로 꼬치를 꿰듯이 꿰어버린 것입니다.


   이처럼 천주교는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상상을 초월하는 고문으로 성경대로 믿고자 하는 성도들이나 개신교도들을 박해하고 학살했습니다. 무엇보다 천주교의 종교재판을 대표하는 것은 바로 화형입니다. 산 채로 죄인을 태워 죽이는 화형은 원래 이로교마가 초대교회의 성도들을 박해할 때 사용하던 형벌인데 바티칸이 그대로 답습한 것입니다. 단순히 성경을 소지했다는 이유만으로, 단순히 라틴어 대신 다른 언어로 성경구절을 낭독했다는 이유만으로, 단순히 교황권의 정책을 부정했다는 이유만으로 무수한 사람들이 화형에 처해졌습니다.

 

    화형 집행 방법에 있어서 프랑스의 사례를 좀 더 실감나게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유석근, 『밝혀진 적그리스도의 정체』, 281-283.]

 

 



    화형에 처할 죄수가 있을 경우 미리 선정된 장소에 화형집행대에 해당하는 기둥을 설치했습니다. 그리고 사람의 키 높이까지 짚과 장작을 몇 겹씩 쌓아올립니다. 물론 기둥 주변에 죄인이 들어갈 수 있는 입구와 죄인을 묶기 위한 공간을 별도로 만들었습니다. 죄수에게는 불에 잘 타게 하기 위해 죄수복 대신 유황이 칠해진 셔츠를 입혔습니다. 이윽고 죄수를 줄과 쇠사슬로 기둥에 단단히 묶은 후에는 죄수가 들어가던 입구 통로까지도 짚과 장작으로 채워 넣었습니다. 그런 다음에 불을 붙이면 사방의 장작더미가 일시에 불이 붙었다고 합니다.

   산 사람을 화마 속에 넣는 행위가 얼마나 잔인한 일입니까! 이것이 그리스도의 대리자를 자처하는 로마 교황이 개신교도들을 처형하는 방식이었습니다. 『고문실의 쾌락』(자작츨판사, 2001)이라는 책자에 보면 1796년 1월에 이단자에 대한 화형 집행 장면을 목도한 사람의 편지가 실려 있습니다. 편지에는 화형이 얼마나 참혹했던가를 실감나게 표현하고 있는데, 내용은 이렇습니다.


   “처형은 정말 잔인했습니다. 여자는 화염에 휩싸여 한 시간 반, 남자는 한 시간 이상 산 채로 고통 속에 몸부림쳤습니다… 죄인이 계속해서 갈구하는 것은 단지 몇 더미의 장작을 더 태워달라는 것뿐인데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화염은 타버린 만큼의 장작만 보충하면 똑같은 온도를 유지하며 탔습니다. 그의 간절한 탄원에도 불구하고 고통이 줄지도 않았고 땔감이 더 많이 허락되어 죽음이 앞당겨지지도 않았습니다.”


 


   어떻습니까? 이것이 바로 머지않아 세속권을 다시 거머쥘 바티칸이 배교를 거부하는 개신교도들에게 가해올 핍박의 방식입니다. 상황이 이러한데도 모든 사람과 화평해야 하니까, 원수를 사랑해야 하니까, 공산주의자들이나 교황청이 종교재판소를 세우고 위협해오면 곧장 배교할 것입니까? 그래서 지옥에 갈 것입니까? 아니면, 넋 놓고 있다가 과거의 개신교도들처럼 무방비 상태에서 저토록 처참하게 고문 받으며 죽어갈 것입니까?


   기왕 순교할 거라면 무장해제 상태에서 가만히 있다가 당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무장하고 적그리스도의 세력과 피 흘리기까지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해야 합니다. 조금이라도 더 적그리스도의 세력을 박살내고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한 다음에 죽어야 합니다.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도들이 무장하자 그들 안의 많은 연약한 이들이 충분히 성장하기까지 안전하게 신앙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적의 계략에 넘어가서 무장해제 되자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했습니다. 물론 이것도 순교이지만 이런 순교는 하나님의 완전하신 뜻은 아닙니다.


   이런 식의 순교는 그 당시 개신교도들이 무지하거나 부주의한 나머지 사탄의 농간에 넘어가서 당한 것입니다. 가장 좋은 순교는 자신의 부르심을 다 마친 다음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시간과 장소에서 순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쩔 수 없이 순교를 허락하시는 상황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애초에 기획하신 그 시간 그 장소에서 순교를 맞이하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믿음과 순종과 지혜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전적으로 순종하고 지혜롭게 반응할 때 하늘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도 온전하게 이루어집니다. 그러면 우리는 부르심을 다 마친 다음에 순교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