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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

하나님아들 2021. 6. 30. 15:56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

한 부자가 있다. 날마다 값비싼 옷으로 치장하고 호화로운 음식으로 연회를 베풀며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 집 문 앞에 누워 있는 헌데를 앓는 병자 거지 나사로를 그는 매일 오가며 거만하게 바라본다. 나사로는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떡 부스러기로 연명하는 비참한 신세의 사람이다. 심지어는 개들조차 나사로를 위로하여 아픈 곳을 핥아주나 부자는 무관심했다.

마침내 나사로는 죽어 천국에 올라가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다. (이 대목을 주의하라.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긍지로 삼는 바리새인들을 다분히 의식한 표현이다. 오늘날 종교행위에 빠진 형식적인 교인들에게도 해당되는 말이다.) 부자도 죽어서 화려한 장례식을 치렀다. 그러나 부자는 음부에 들어가 고통을 받게 된다. 음부의 화염과 불꽃 가운데 극심한 갈증으로 신음하던 그는 아브라함과 그 품에 안긴 나사로를 보게 된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간청한다. 나사로를 보내어 자신의 혀끝에 물 한 모금을 적셔달라는 것이다. 여전히 이 부자는 교만하다. 자기 집 문 앞에 누워있던 나사로를 응당 자신을 위해 기꺼이 음부까지 심부름을 할 정도의 하인으로 취급하고 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대답은 냉정하다. 그 부자가 받는 고통은 당연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거지 나사로가 천국에서 받는 위로와 대비된다. 가난한 자에게 들어간 복음으로 인해 천국이 나사로의 소유가 된 것처럼 부자인 너는 너의 교만으로 인해 세상에서 온갖 연락을 즐기면서도 네 문 앞에 누워있던 거지 한 사람에게도 은혜를 베풀 줄 몰랐으니 네가 지금 받는 그 고통을 감수하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제 음부와 천국 사이는 더 이상 서로 건널 수 없는 큰 심연이 가로막혀 있음으로 가고자 해도 갈 방도가 없음을 냉철히 알려준다.

그러자 이 부자는 두 번째 간청을 한다. 그렇다면 나는 이제 이 고통을 감수할지라도 아직도 죽음 후에 닥칠 음부의 고통을 모르고 나와 똑같이 살아가고 있는 내 다섯 형제들에게 나사로를 보내어 그 사실을 알려달라는 것이다. 이 간청은 부자가 음부에서 겪고 있는 고통의 크기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더욱 실감케 한다. 그러나 이 부탁 역시 아브라함은 거절한다. 왜냐하면 이미 음부의 고통에 대해 부자와 그 형제들은 모세와 선지자들을 통해 충분히 알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기 때문이다. 죽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나와 증거하면 그들이 들을 것이라는 부자의 간절한 요청도 거절당하고 만다. 왜냐하면 교만한 자들에게는 죽은 자의 부활로도 그 마음을 꺾을 수 없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나사로의 사건이나 예수의 부활 역시 바리새인들의 교만한 마음을 돌리지는 못했던 것이다.

부자는 이름이 없다. 왜냐하면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사람의 이름은 기억 속에서 영원히 사라질 의미 없는 이름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족보에 올라가고 더러는 화강암 비석위에 새겨지며 혹은 인간의 역사 속에 아무리 화려하게 남아있을지라도 이 세상에서의 삶이 끝나는 순간 그에게는 그 모든 것이 무의미한 것으로 되고 만다. 음부에는 이름이 없다.

부자는 기회를 상실했다. 그는 자신의 재물로 얼마든지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은 가난한 자들을 돌보는 일이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은혜를 더하셔서 그에게 그것을 날마다 기억할 수 있도록 그의 대문 앞에 거지 나사로를 배치해 두었다. 부자는 마땅히 나사로에게 선처를 베풀어야만 했다. 그의 고통을 한 인간으로써 함께 아파하고 위로하며 상처를 싸매어줄 수 있어야만 했다. 왜냐하면 그는 선처를 베풀기에 충분한 재물을 가지고 있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와 같은 선한 양심을 우리 모두에게 이미 하나님의 형상으로 새겨 두셨기 때문이다. 그것이 청지기가 마땅히 행해야할 직분이었다.

부자는 착각했다. 그 소유가 자신의 것이라고 착각했다. 뿐만 아니라 그 소유가 마치 영원히 지속될 것처럼 그렇게 날마다 살았다. 그 속에서 그는 가난하고 고통 받는 이웃에 대해 무관심했고 냉정했다. 그래서 그는 결국 음부로 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곳은 하나님으로부터 무관심과 냉정함을 받는 곳이다. 아니 하나님의 관심이 사라진 영역이 바로 지옥인 것이다. 바로 부자들이 가야할 종착역인 것이다.

그러나 이 비유를 통해 문득 떠오르는 의문은 마치 우리가 천국으로 가는 것이 가난한 자를 돕는 행위에 의해 결정되는 것처럼 오해되지나 않을까 하는 점이다. 그렇다. 우리의 포도원 주인은 우리가 행한 바 일의 크기에 의해 우리를 천국에 들여놓지 않는다. 그것은 마태복음 20장의 데나리온의 비유에서 밝히 설명했듯이 오직 전적인 포도원 주인의 주권에서 나오는 은혜의 약속이요 선물이다. 천국의 조건은 오직 예수요 오직 믿음뿐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오히려 구원의 조건에 다른 어떤 행위를 추가하려는 모든 노력들이 이단 사상으로 끝을 맺고 있음에 대해 우리는 각별히 주의해야만 한다. 그렇다면 기독교에서는 행위의 문제가 존재 근거를 상실하게 되는가? 기독교에서 윤리적 행위가 설 땅은 어디인가?

우리는 두 가지 방정식을 이해해야만 한다. 첫 번째 방정식은 우리를 미혹하는 가짜 구원의 방정식이다.

믿음(faith) + 행위(work) → 구원(salvation)

이와 같이 주장하고 말하는 모든 종교나 사상은 기독교와 무관한 이단 사상이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도 반드시 크리스천의 선한 행위와 윤리적 삶에 대해 가르친다. 아니 그 어떤 종교보다도 윤리적 실천성이 강한 종교가 기독교이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가난한 자들을 위해 자기 몸을 던져 세상의 빛으로 소금으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며 사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행위는 어디서 나타나는가? 그것을 바른 방정식으로 표현하면 이렇다.

믿음(faith) → 구원(salvation) + 행위(work)

행위는 믿음의 결과다. 만일 온전한 크리스천이 예수를 믿는 바른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렀다면 그는 반드시 선한 행위로 자신을 던져 이웃을 위해 살아가게 되어있다. 그렇지 못한 크리스천이 있다면 어쩌면 그의 믿음을 의심해야 한다. 그가 지닌 믿음은 예수를 주로 믿고 시인하며 고백하는 순전한 믿음이 아니라 회칠한 무덤처럼 외식하며 살아가던 바리새인의 가짜 믿음, 강도만난 이웃의 고통을 보면서도 외면하고 지나가는 레위인과 제사장의 자기를 위한 종교적 행위에 불과할지 모른다. 거지 나사로를 외면했던 이 부자가 음부에 들어가야 했던 것은 그의 믿음이 가짜였기 때문이다. (계속)

우리 시대의 거지 나사로는 누구인가?

내 대문 앞에 누워 있는 거지. 바로 우리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고통 받는 이웃. 굶주림과 상처에 신음하는 북한에 있는 내 형제들이 아니고 누구겠는가?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나사로를 도울 수 있는 충분한 기회와 시간을 주고 있다. 그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그를 도울만한 충분한 물질적 축복을 주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 물질로 날마다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호화스런 음식으로 내 배를 채우면서도 그들을 돕는 데는 인색하다. 그 인색함은 믿지 않는 자들의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믿는 크리스천들의 인색함이 더 완고하다. 그들은 그 무명의 부자처럼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스스로 믿고 행동하는 자들이다. 그리고 예수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외면하고 비웃었던 바리새인과 같은 자들이다.

가난한 사회를 회생시키기 위해 가장 효과적이고 빠른 길은 교육의 길이다. 우리 스스로가 1세기 전 구한말 개화기에 그와 같은 혜택과 은혜를 입었던 사람들이다. 수많은 외국 선교사들의 헌신을 통해 연세대학, 이화대학, 숭실대학과 같은 교육 기관이 세워져서 지난 세기 얼마나 많은 인재들을 배양했는가? 아무 희망 없이 완고히 닫혀있던 조선 반도가 마침내 문이 열리고 새로운 지식과 문물을 받아들이고 교육의 열기가 일어나며, 그 저력을 바탕으로 경제성장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결국 오늘의 풍요로운 물질의 축복을 누리게 된 것도 모두 그 은혜를 입은 결과들이다. 자신들이 가진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기 위해 머나먼 태평양을 건너 우리를 찾아왔던 그들처럼, 이제 우리가 누리는 물질적 부요를 나누어야 한다.

평양과기대를 통해 청년들을 가르침으로 북한의 형제들이 스스로 일어설 수 있는 경제적 회생의 길을 주고자 하는데 그것을 위해 믿는 자들의 마음을 호소하는 일이 그렇게 어려울 수가 없다. 얼마 전 평양과기대 프로젝트를 설명하기 위해 한국으로 출장을 다니며 여러 교회를 순방했다. 같은 메시지를 전하는 데도 작고 가난한 교회들은 큰 감동을 받으며 어떻게든 돕고자 하는데, 오히려 마음이 부요한 대형 교회는 그렇지 않다. 서울의 한 대형 교회의 당회에서 수십 명의 장로들 앞에서 평양과기대 프로젝트를 설명하다가 채 말도 꺼내기 전에 큰 반발과 비웃음을 받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북한은 우리의 주적인데, 왜 그들을 도와야 하는가? 하는 근본적인 보수적 질문 앞에서 애써 답변을 하다가 마치 예수님이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받아야했던 비웃음과 핍박이 떠올랐다.

역사는 반복된다. 우리에게는 이미 충분한 가르침이 있다. 율법과 선지자가 있을 뿐 아니라 가난한 자들을 위해 우리를 찾아와서 모든 것을 가르치신 예수의 복음이 있다. <옳지 않은 청지기의 비유>와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를 통해 이미 우리의 행할 바를 명확하게 가르치신 예수의 말씀이 우리 앞에 놓여 있다. 그것을 통하여 귀 있는 자들은 천국의 지혜를 배워야 한다. 우리는 모두 옳지 않은 청지기이며 한편 부자이기도 하다. 우리가 나누어야 할 것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떡들이다. 그것을 사용하여 적극적으로 친구를 사귀라는 것이다. 천국이 임박해 있기 때문이다.

“내가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네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눅 16:9)”

그러나 더러는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않는 무리들도 있으리라. 이 또한 주의 말씀이요, 부자들에 대한 경고이기도 하다.

 

<출처: 루카스의 막힌담을 허시고...>

[출처] [펌]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 II|작성자 ㅎ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