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강 이승훈
평안북도 정주에서 유기 그릇 장사를 하던 남강 이승훈(1864-1930) 선생은
1907년 평양 모란봉에서 열린 도산 안창호의 연설을 들은 후 삶이 바뀐 분입니다.
도산은 그때 어려움에 빠진 조국을 지키려면 옛날의 나쁜 버릇을 버리고 새 힘을 길러야 한다며 국민이 일체가 되어 새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눈물로 호소했습니다.
그 연설에 크게 감복한 남강은 돌아가서 머리를 깎고 술과 담배를 끊기로 결심하고 도산을 도와 신민회 운동에 뛰어들었습니다. 그리고 인재 양성을 위해 오산학교를 세웠습니다.
그는 설립자이자 교장이었고, 심부름하는 사환이자 목수였고, 청소부이자 학생이었고, 화장실을 청소하는 사람이었습니다. 1910년 어느 날 그는 신민회 동지들을 만나러 산정현교회에 갔다가 거기서 한석진 목사가 전한 ‘십자가의 고난’ 이야기를 듣고 신자가 되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때 그의 나이 46세였습니다. 유교적 학식을 흠모하던 그가 개종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불퇴전의 용기로 신앙적 삶을 살았습니다. 105인 사건으로 옥고를 치렀고, 3.1운동 때도 민족 대표의 일인이 되어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가 재판정에서 한 말은 하나님의 믿는 사람의 의기가 무엇인지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다. 하나님이 인류를 내실 때 각각 자유를 주었는데 우리는 이 존귀한 자유를 남에게 빼앗겼다. 자유를 빼앗긴 지 10년 동안 심한 고난과 굴욕이 우리를 죽음의 골짝으로 이끌었다. 일본이 오랜 옛날 한국으로부터 입은 은의를 원수로 갚되 이렇게 심할 수 있느냐. 우리는 최후의 1인 최후의 1각까지 적의 칼 아래 쓰러질지언정 부자유 불평등 속에서 남에게 끌리는 짐승이 되기를 원치 않노라. 우리의 이번 일은 제 자유를 지키면서 남의 자유를 존중하라는 하늘의 뜻을 받드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1922년 7월 21일 3.1운동 민족대표로는 맨 마지막으로 출옥할 때까지 3년 4개월 20일 동안 옥중에 머물며 구약 스무 번, 신약 백 번 이상을 읽으며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삶을 결단했습니다. 3.1운동의 좌절을 겪으며 당시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측면을 도외시한 채 도피적이고 내세적인 신앙으로 급격히 기울고 있었습니다. 지식인들 가운데는 사회주의에 빠지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남강 이승훈은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 나라를 경험해야 한다고 일관되게 가르쳤습니다. 그는 가장 낮은 자리에서 섬겼기에 사람들의 사표가 될 수 있었습니다.(남강문화재단 편 <南岡 李昇薰과 民族運動>, 남강문화재단출판부, 1988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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