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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세계를 보는 설교자의 영적 눈
1. 설교의 기원으로서의 ‘예수의 부활 사신’
제 종교의 특성을 소위 창시자라고 할 수 있는, 예컨대 ‘나사렛 예수’, ‘부타’, ‘마호멧’, 혹은 ‘공자’와 같은 한 개인에게서 찾을 것이 아니라, 그 종교의 창시자들이 무엇에 관심이 있었으며, 무엇을 인간들에게 제시해 주었으며, 그들로 인하여 인간들이 무엇을 깨닫게 되었는지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다른 종교들과 구별되는 기독교만의 고유한 특성은 기독교의 기원Ursprung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에 있다. 왜냐하면 만일 예수 그리스도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행적’도 다른 종교의 창시자들의 ‘언행言行’처럼 일반 ‘성인聖人’ 이나 ‘현자賢者들’의 언행 가운데 하나에 불과不過한 것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삼일 만에 부활하시어 제자들에게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의 ‘언행’은 다른 ‘성현聖賢’들의 언행과 ‘질적으로 다른 것’으로 입증되었다. 따라서 기독교의 진리를 증언하는 목회자의 설교는 철저히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빛에서 선포되어야 하고, 동시에 그의 설교는 의심할 여지 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현현에 신학적 근거를 두어야 한다. 왜냐하면 제자들의 최초 ‘복음선포Kerygma’, 곧 ‘설교’는 바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예수 기리스도를 목격한 사람들에 의해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을 우리는 우선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엠마오’라는 마을로 가는 두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사건에서 그 전거典據를 찾을 수 있다.
안식일 후 첫날 새벽 여인들이 예수의 무덤을 찾아갔다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예수가 다시 살아나셨다’는 천사의 증언을 듣었고, 여인들에게 직접 ‘예수가 나타나셨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전하였지만, 제자들은 믿지 않았다.(막 16:11,13,14) 이 사실은, 예수의 제자들이, 여인들이 ‘예수가 다시 살아나셔서 자신들에게 보이셨다’는 ‘부활현현 사신Botschaft’을 곧바로 받아드리지 않았다는 것과, 따라서 그들의 예수의 부활은 ‘부활사신’ 그 자체에 있지 않았음을 입증해 준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그 후에 열한 제자에게 나타나셔서, “자기(=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않은)”(막 16:14) 제자들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걸음 더 나아가 열한 제자가 예수의 부활현현 보고를 믿지 못한 것은 단지 그들에게 예수님이 나타나지 않으셨기 때문만도 아니다. ‘부활현현 보고’를 제자들이 믿지 못한 것은 그들의 눈이 가리워져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했기)”(눅 24:15f)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는 스스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아나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
또 우리와 함께 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 과연 여자들이 말한 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눅 24:22-24)고 증언하면서도, 예수가 ‘부활하여 다시 나타나셨다’는 증언도 믿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부활하여 자신들의 곁에 계신 예수님도 알아보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볼 수 있는 ‘믿음의 눈’이 없으면 - 성경이 ‘예수의 부활과 나타남’을 명백히 보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 그 누구도 기독교의 가장 핵심적인 진리인 ‘예수의 부활과 현현’을 믿고 증언할 수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의 부활현현’을 볼 수 있는 ‘영적 눈’이 없는 목회자는 기독교의 핵심적인 진리를 바로 증언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성경이 증언하는 것들을 자기 나름대로 왜곡하여 전하는 실수를 범하게 된다. 그러한 설교자는, 예수님께서 일찍히 말씀하셨듯이, 눈먼 장님이 장님을 인도하는 설교를 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십자가에 죽은 예수가 부활하여 나타났다’는 ‘사신Botsachft’이 ‘설교Kerygma’의 최초 원형(기원)이기 때문이다.
더 자세히 말하면,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의 눈이 밝아져 부활하신 예수님을 자신들의 눈으로 직접 목격하고서야 비로소, 그들은 가던 길를 돌려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열한 제자들과 그와 함께 한 자들에게 ‘예수가 부활하여 나타났다’는 것(눅 24:31-33)을 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근거에서 설교자는 성경을 해석하고 증언할 때마다, 그 증언 속에서 ‘예수 부활의 세계’를 볼 수 있어야 한다. 바꾸어 말하면 성경의 모든 말씀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현현의 빛’에서 이해하고 선포해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바로 ‘예수의 부활현현의 빛’에서 성경을 풀어줄실 때, 그들의 눈이 밝아져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았기 때문이다.(눅 24:27,32)
2. ‘부활현현 사신Botschaf’의 역사적 전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현현 사건은 단지 우발적偶發的으로 일어난 사건이 아니다. ‘예수의 부활 현현’은 구약 성경적 전거를 가지고 있는 역사적 사건이다. 다시 말해서 초월의 세계에 계신 하나님과 역사 속에 있는 인간과의 만남의 사건은 이미 이스라엘 조상 아브람에게서부터 시작되었다. 왜냐하면 아브람은 갈대아 우르Ur에 있었을 때,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었기 때문이다.(창 12:1-4) 이 사건이 지상적 인간의 역사적 사건이라는 것은, 아브람이 마루레 상수리 나무 아래서 지나가던 세 사람을 만나서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을 막기 위하여 의인義人의 숫자를 감하여 달라고 간청하는 사건(창 18:16-33)으로 반증反證된다. 왜냐하면 이 때에 아브람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화육Inkarnation’사건 처럼(요 1:14), ‘여호와 하나님이 역사적 인간의 몸을 입고Gottes Meschwerdung’ 오신 것을 보고 만났기 때문이다.(창 18:1-5)
이와 같이 초월의 세계에 계신 여호와 하나님과 이 지상에 살고 있는 인간의 만남은, 다시 말해서 ‘신적 세계와 인간적 세계의 지평융합’은, 아브람 이후 야곱, 모세 그리고 예언자들의 서로 다른 하나님 경험의 양태로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재현된다. 우선 야곱은 얍복강가에서 어떤 사람을 만나 그와 날이 새도록 씨름을 한다.(창 32:24) 그러나 이 사람은, 성경의 증언을 분석해 보면, 바로 사람의 몸을 입으신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왜냐하면 이 사람은 여호와 하나님 밖에 할 수 없는 ‘이름 바꾸어 주기’와 ‘축복’을 야곱에게 행하셨기 때문이다.(창 32:28-29 비교. 창 17:5) 그래서 야곱은 아주 담대하게,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창 32:30)고 증언한다.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의 사건을 ‘모세의 경험’으로 이어진다. 여호와 하나님은 호렙산 가시덤불 불꽃 가운데 나타나시어 “모세야 모세야”(출 3:4, 비교 4:1,5)라고 부르신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린다.)”(출 3:6)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지팡이가 뱀이 되고, 손에 문둥병이 생기는 역사적 사건’(출 4:3-4,6-7)을 경험한다. 이렇게 ‘초월자 존재’와 역사적인 인간이 서로 만나서 공동의 역사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사건은 새로운 양태로 구약성경의 증언에서 되풀이 된다. 바꾸어 말하면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 처럼, ‘시간 속에 있는 인간이 초월적인 영원의 세계를 직시할 수 있는 사건’이 ‘발람’의 나귀를 통하여 일어난다. 왜냐하면 ‘발람’은 초월의 세계에 현존하는 천사를 나귀의 증언으로 보게되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해 달라는 모압 왕 ‘발락’의 부탁을 받고 길을 가던 브올의 아들 ‘발람’은 앞에 ‘하나님의 사자’가 칼을 들고 서 있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발람’이 타고 있는 나귀는 ‘발람’의 행보를 앞에서 막고 서 있는 ‘하나님의 사자’를 보고 길을 벗어나 밭으로 들어간다.(민 22:23) 그러자 ‘발람’은 나귀를 돌이키려고 나귀를 채찍으로 때린다. 그러자 나귀가 다시 ‘발람의 발을 그 담에 짓누른다’(민 22:25) 그러자 다시 발람이 나귀를 채찍질 한다. 그 때에 나귀가 입을 열어 ‘발람’에게 “나는 당신이 오늘까지 당신의 일생동안 탄 나귀가 아니냐, 내가 언제 당신에게 이같이 하는 버릇이 있었더냐”고 반문합니다. 그때 여호와께서 ‘발람’의 눈을 밝히시어 여호와의 사자가 손에 칼을 빼들고 길에 선 것을 보게하신다.(민 22:31)
이 밖에 성경은 하나님의 많은 종들이 보이지 않는 초월의 세계에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역사 속에서 만나고, 그 하나님과 대화하고, 그 하나님과 씨름도 하는 사건을 다양하게 증언하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초월의 세계에 계신 하나님을 만나고, 그 하나님을 눈으로 목격한 사람들은 곧바로 살아 계신 하나님의 참된 증언자가 된다. ‘미가야’ 선지자를 비롯하여 ‘아모스’와 같은 구약의 많은 예언자들은 자신들이 목격한 초월세계의 ‘비전Vision’을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증언하였다.(왕상 22:19-23; 암 7-8장)
이러한 의미에서 구약의 참된 예언자들 뿐만 아니라, 신약의 참된 복음 선포자들은 하나님의 세계, 곧 초월의 세계 속에 살아계신 하나님을 목격한 사람들이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사도 바울이다. 그러므로 오늘날도 복음의 참된 선포자가 되고자 하는 자는 성경의 증언 속에서 ‘초월의 세계’, 더 자세히 말하면 ‘예수 부활의 세계’를 볼 수 있는 ‘신앙의 눈’을 가져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 ‘초월의 세계’ 곧 ‘부활의 세계’를 볼 수 있는 ‘신앙의 눈’을 가질 수 있을까? 이것이 바로 설교자의 영성에 관한 문제된다.
3. 그리스도 중심으로 성경을 ‘믿고, 행하면’초월의 세계가 보인다.
눈에 보이지 않는 ‘초월적 영생의 세계’, 곧 ‘예수가 부활하시어 나타난 세계’를 볼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성경의 증언을 믿고, 실행할 때만이 가능하다. 왜냐하면 ‘예수의 부활현현 세계’는 결코 비-역사적, 종교적 신비세계가 아니라, ‘초월적 세계와 역사적 세계가 융합된 세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을 우리는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현현 사건에서 발견할 수 있다.
왜냐하면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자(눅 24:16), 예수님은 그 두 제자들에게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고)”(눅 24:27),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 보(게 되었기)”(눅 24:30-31a)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게 된 것은, 예수께서 성경의 모든 증언을 ‘그리스도 중심으로 해석해 주심으로써’, 그리고 예수님께서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눅 22:19)고 명령하신 ‘성만찬’을 실현하신 데서 비롯되었다.
이러한 사실을 우리는 두 제자 자신들의 고백에서 입증할 수 있다. 왜냐하면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은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눅 24:32)고 서로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제자들의 고백에 의하면, 그들은 예수님께서 성경 말씀을 풀어주실 때에, 성경의 증언들에 대한 믿음이 생겼고, 그리고 믿음으로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 행하신 성만찬에 참여하는 순간, 곧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는 순간”(눅 24:30), 그들의 눈이 밝아져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보게 된 것이다. 우리는 이와 상응한 현상을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나타나신 사건에서도 동일하게 발견할 수 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그 후에 디베랴 호수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셨다.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매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다)”(요 21:2-3) 그러자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이르시되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하시니 이에 던졌더니 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님이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님이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요 21:4-7) 이러한 보고에 분명히 나타나 있듯이, 예수의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게된 것은,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는 예수의 말씀을 믿고, 그대로 행함으로써 그 말씀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심을 알아보게 된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말씀은 능력이 있어 평소 그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말씀하시는 분의 창조적 능력’이 그 말씀을 실행하는데서 입증되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행하신 것처럼, 일곱 제자들이 바다에서 육지로 올라오자, ‘떡을 가져다가 그들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심’(요 21:13)으로써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역사적 만남을 ‘성만찬’, 곧 음식 잡수시는 것으로 입증하였다.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부활하신 주님이 거居하시는 ‘부활의 세계’ -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 우리가 육신으로 죽은 후에나 가는 저 피안彼岸의 세계가 결코 아니다. 예수가 부활하여 나타난 ‘부활의 세계’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역사적 세계와 함께 현존하는 세계이다. 다시 말하면, ‘부활 세계’의 구약성경적 전거를 앞에서 이미 제시하였듯이,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삶의 공간 속으로 직접 들어오셔서, 인간과 만나시고, 그들과 대화를 나누시고, 그들과 함께 동행하시며, 그들을 구원하셨다.
이렇듯 여호와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인간에게 나타나시어 구원의 역사를 베푸신 시時-공간空間, 그곳이 바로 ‘부활의 세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브람이 세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난 여호와 하나님과 만나서 함께 대화를 나누고, 아들 이삭의 잉태를 약속받은 사실을 역사적 사실로 보고하면서도, 그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영접하지 않았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그(=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시던 분)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다”(요 1:10-11)고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초월적 하나님 경험’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경험의 주체이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더욱 중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의 참된 증언자가 되려면, 우선 ‘예수 부활의 세계’를 보아야 하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려면, 성경의 증언을 비롯하여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들의 증언을 믿어야 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자신의 선교 초기부터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라는 선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믿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위를 주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앓는 자를 고쳐주라”(눅 9:1-2, 병행 마 10:5-15; 막 6:7-13)는 명령을 받아 세상에서 실제로 그 능력을 경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부활현현 사신’을 믿지 못하였던 제자들처럼, 오늘 날도 성경의 증언을 역사적 사실로 믿지 못하는 목회자는 ‘부활의 세계’를 볼 수 없다.
역으로 ‘부활의 세계’를 보지 못하면, 참된 복음도 선포할 수 없다. 왜냐하면 최초의 복음전파는 ‘예수의 부활’을 목격한 사람들에 의해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참된 복음을 선포하고자 하는 자는 먼저 성경을 통하여 ‘예수 부활의 세계’를 보아야 한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사도 바울을 여러 사람들 앞에서 복음을 선포할 때마다, 자신의 다메섹 사건, 곧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나타나신 사건을 수 없이 반복해서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 말(= 예수 부활체험)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고전 15:2)고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목회자의 참된 영성, 그것은 예수가 부활하여 자신들에게 나타났다는 목격자들의 증언을 참으로 믿고 실현하는 데 있다. 끝.
2007. 12. 3, 재 등재 김재진 목사(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연구교수, 본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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