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 설교 모음

[스크랩] 거룩한 희생물*최태선목사

하나님아들 2018. 4. 5. 23:08

예수가좋다오

거룩한 희생물

로마서 12장 1절 / 최태선 목사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긍휼을 힘입어 너희에게 간청하노니 너희는 너희 몸을 거룩하고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살아 있는 희생물로 드리라. 그것이 너희의 합당한 섬김이니라."(로마서 12:1).


1. 공동체


한 사람이나 책 한 권이 인생에서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곤 합니다. 저의 경우, '형제들의 처소'라는 의미를 가진 '브루더 호프' 공동체가 신앙 여정의 모범이 되었습니다. '브루더 호프' 공동체의 창시자는 그곳의 장로였던 에버하르트 아놀드입니다.


1920년대의 수많은 독일 청년들처럼, 에버하르트 아놀드와 아내 에미는 제1차 세계대전 직후 혼란스러웠던 시기의 사회 문제에 답을 제공하지 못하는 기관들 - 특히 교회 - 에 환멸을 느꼈습니다. 스스로 답을 찾는 과정에서 그들은 독일청년운동(German Youth Movement)과 독일 목사인 요한 크리스토프 블룸하르트와 그 아들 크리스토프 프리드리히 블룸하르트, 16세기 재침례교도들, 그리고 초대 교회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에버하르트는 그 시절을 회상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지금까지 걸어온 탐구의 여정에 대해 말하고 싶습니다. 한 무리의 젊은 사람들이 자주 모였고, 나는 성경공부와 대화를 통해 그들을 예수님에게 인도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매우 난감한 상황에 놓여, 어찌할 바를 모른 채 고민하다가, 더 깊은 관점에서 사람들의 필요를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육체와 영혼의 필요, 물질적, 사회적 필요, 그리고 그들이 당하는 굴욕과 착취와 노예 상태를 보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맘몬과 불화(不和)와 증오와 폭력의 엄청난 세력을 피부로 느끼게 되었고, 힘없는 자의 목을 짓누르는 압제자의 잔인한 구둣발을 목격했습니다. 이런 일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내 말을 다소 과장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것들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그 무렵, 1913년부터 1917년까지 진리를 깊이 이해하기 위해 고통 속에서 몸부림쳤습니다. 그런 가운데 나는 인간의 영혼을 위한 개인적인 헌신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전부가 아니라는 것, 그것만으로는 하나님의 존재를 온전히 표현하지 못한다는 것을 더욱 더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또한, 사람들에게 순전히 개인적인 기독교 신앙으로 다가간다거나, 또는 그들도 나처럼 사적(私的) 신앙을 갖도록 개인들에게만 관심을 갖는 것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4년의 기간 동안 나는 힘겨운 싸움을 경험했습니다.


옛 문헌들과 예수님의 산상수훈과 성경의 다른 부분들을 자세히 연구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현재의 사회 체제에서 압제 당하는 사람들인 노동자 계층의 삶을 이해하고 그들과 삶을 함께 나누고 싶었습니다. 나는 예수님과 아씨시의 성 프란체스코와 선지자들의 길에 상응하는 어떤 길을 발견하고 싶었습니다.


"공동체 삶은 우리에게 필요 불가결한 것입니다. 우리가 행동하고 사고하는 모든 것을 결정짓는 '절대로 필요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삶의 방식을 선택하는 데 있어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우리의 선한 의도나 노력이 아닙니다. 사실, 우리를 강권했던 것은 어떤 확신이었습니다.


이 확신은 만물의 근원자에게서 나오는 것이었고, 우리는 그 근원자가 하나님이심을 인정합니다. 우리는 공동체로 살아야만 합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생명체는 공동체적인 질서 속에 존재하며 공동체를 향해 나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에버하르트의 깨달음은 공동체였습니다. 우리도 깨달아야 합니다. 또한 공동체의 의미가 “오직 너희는 첫째로 하나님의 왕국과 그분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이며 “아버지의 왕국이 임하옵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10)라는 사실을 마음으로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복음은 개인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공동체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개인으로서는 복음을 살아낼 수 없습니다. 또한 성령의 역사는 하나 됨에 있기 때문에 신앙에 대해 진지하게 반응하는 사람이라면 공동체를 이루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교회가 그런 공동체가 되지 못하면 교회는 사회 문제에 대해 무능할 수밖에 없고 더 이상 하나님 나라의 전초 기지로서 세상의 빛이 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에 사는 교인들에게 11장까지 모든 교리를 설명한 후에 공동체의 비결인 12장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2. 구별된 제물(희생물)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희생물)이 되어야 할 우리는 각별히 신경을 써야 합니다. 제물(희생물)은 언제나 흠이 없는 것이어야 했습니다. 흠이 없어야 할 뿐 아니라 최선의 상태에서 드려야 했습니다.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 드리기를 원한다면 희생물로서의 우리 몸을 잘 보존하고 순결을 유지해야 할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가 드리는 제사의 역설이 있습니다. 우리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릴 때에만 우리는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실 만한 구별된 제물(희생물)로 온전히 살아갈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의 앞부분에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거스르는 불순종에 대해 죽을 때만이 경건하고 능력 있고 새로운 삶을 살아갈 자유를 얻게 된다고 역설했습니다. 그때 비로소 이타적이고 창조적이며 기쁨 넘치는 사랑을 배우게 됩니다.


기독교 공동체가 하나의 대안사회로서 힘을 얻기 위해서는 먼저 무정하고 희망이나 기쁨이 없는 세상의 현실을 유념해야 합니다. 악의 정사와 권세들이 눈에 불을 켠 채 우리가 드리려는 몸을 훼손시키려 달려들고 있습니다. 이기심과 권력욕에 대한 유혹은 우리의 기쁨을 파괴할 뿐 아니라, 이웃을 향한 효과적인 봉사가 이루어지지 못하도록 방해합니다. 진정한 관계가 주는 기쁨을 빼앗아 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끊임없이 기도함으로써 하나님께 의지하고, 성령의 인도를 구해야 합니다. 그럴 때 신실하신 그분은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 주십니다. 인간의 능력에 의지하면, 자비심은 곧 바닥을 드러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소진되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이 되지 못하고, 그분이 의도하시는 교회가 되지 못하면 우리의 몸을 제물로 드릴 수 없습니다. 마틴 루터가 말한 것처럼 삼중의 적인 '악마와 세상과 육신'은 우리의 삶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신뢰를 훼손하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습니다. 그것은 때론 주변 문화의 얼굴을 하거나 우리의 욕망을 자극하거나 성취와 성공에 대한 유혹으로 다가옵니다. 우리는 그것들의 실체를 파악하지 못하고 넘어지길 잘하는 죄인들일 뿐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의 몸 드림이 온전하지 않다는 이 뼈아픈 깨달음에 대해 미리 마음의 준비를 시키고 있습니다. 7장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실존하는 전투, 즉 우리의 왜곡된 욕망과 성령의 능력에 사로잡힌 경건한 삶 사이에서 벌어지는 끝없는 전쟁에 대해 생생히 묘사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법과 죄의 법이 마음속에서 싸우고 있다는 설명은 바울 자신의 삶을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종말의 때에 완전한 존재가 되고 불멸의 새로운 몸을 입기 전까지, 스스로 신이 되고자 하는 인간의 성향이 우리를 계속 괴롭힐 것입니다. 그때까지 우리는 인간적인 부족과 한계 안에서 탄식할 수밖에 없습니다. 본문에서 사용된 몸이라는 단어 (소마-σŵμα)는 다른 곳에서 육체라는 의미로 사용된 '싸륵스'(σαρξ)와 동일한 개념이 아닙니다. '싸륵스'는 '육신'(flesh), 즉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인간의 욕망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고 있습니다.


'싸륵스' 때문에 우리는 자신의 몸을 온전히 드리지 못하고 불순종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 '싸륵스'의 온갖 유혹들과 끊임없는 전투를 벌입니다. 그러나 로마서 7장 뒤에는 8장의 소망과 은혜가 뒤따르고 있습니다. 그 변화는 7장 마지막에서 시작됩니다. 끊임없는 전투에 대한 절망 가운데 바울은 두 손을 들고 “오 나는 비참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24) 하고 부르짖습니다. 그때 그의 입에서는 기쁨에 넘치는 대답이 터져 나옵니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를 통하여 내가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그런즉 이와 같이 내 자신이 생각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섬기되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롬 7:25).


이어지는 8장 1절에서 그 이유가 밝혀집니다. “형제들아, 내가 법을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법이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에만 그를 지배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8: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용서를 이루셨기에, 하나님의 시각에서 우리가 '성도'로 만들어졌기에, 비록 우리의 인격이 죄에 물들고 이기심에 굴복했던 적이 많았고, 여전히 그럴 가능성에 열려 있지만 우리에게는 정죄함이 없는 것입니다.


비록 실패했더라도 절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의 용서가 새로운 희망을 주기 때문입니다. 객관적으로 바라볼 때 우리가 드리는 제물이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만한 것이 전혀 되지 못하고, 우리의 삶의 방식도 거룩함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에 예배로 응답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는 그 부족한 예배를 합당하고 거룩한 것으로 받아주십니다.


더러운 말, 잔인한 행동, 판단하고 정죄하는 사고, 이기적인 태도, 사람을 지배하려는 냉정한 마음, 교만한 고집 등 온갖 것들이 우리의 드림을 훼손하지만 그 모든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용서하시고 정죄하지 않으실 때, 우리의 예배는 그분께 드려지는 것입니다. 그 얼마나 기쁜 소식이며 얼마나 큰 위로와 소망입니까?


각 개인에게 필요한 용서의 말씀은 공동체에도 필수적입니다. 진정으로 한 몸이 되지 못하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용서는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우리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자비가 상상을 뛰어넘을 만큼 크기 때문에 우리는 공동체의 몸을 드리는 일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으며, 은혜 가운데 서로에게 하나님의 용서를 베풂으로써 우리의 드림을 정결하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제물이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거룩한 산 제물이 될 수 있는 것은 오직 이 은혜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바울은 단 한 번의 결정적 행동(once for all)을 뜻하는 동사를 사용하여 우리의 몸을 '드리라'고 한 후에 그 드림의 마땅한 모습이 되어야 할 세 개의 형용사를 덧붙였습니다. 즉, '살아 있는', '거룩한' 그리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이 그것입니다. 그 같은 제물이 바로 영적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3. 살아 있는


자아를 부인하고, 이기심을 버리고, 욕망을 거절하는 일들부터 시작합니다. 살아 있는 제물은 언제든 제단에서 빠져 나오고 싶어 합니다. 사도 바울처럼 날마다 “내 몸을 쳐서 복종하게”(고전 9:27) 하는 치열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특히 몸이라는 단어의 공동체적 의미가 이 시대에 강조되어야 합니다. 오늘날 기독교는 수없이 많은 종파와 교단들로 갈라져 있어서 하나로 만드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사소한 교리 차이도 극복할 수 없습니다. 발상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다양한 공동체들이 서로에게 줄 수 있는 자신만의 독특한 정체성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살아 있는 제물이 되기 위해 종파를 허물고 교단을 허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한 몸으로서 기쁨이 넘치는 섬김 가운데 그 다양성 모두를 드리는 것입니다.


모든 기독교 교회들이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그리스도의 몸임을 먼저 인식하고 따른다면, 모든 교회들이 '그리스도의 머리되심'을 최우선의 가치로 생각한다면 우리의 몸(모든 교회들로 이루어진)을 '살아 있는' 제물로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4. '거룩함'


우리가 드리는 몸의 희생물은 거룩합니다. 거룩이라는 단어는 이 시대에 힘을 잃었지만, 거룩은 성경에서 풍부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은 성막이나 성전에서 사용할 목적으로 특정한 그릇들을 따로 구별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그릇들은 거룩한 쓰임을 위해 성별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 역시 그분의 목적을 위해 구별된 특별한 그릇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스스로를 거룩하다고 여기는 순간 교만이라는 덫에 걸려 사랑과 기쁨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성별되었기 때문에 느낄 수 있는 사랑과 기쁨이 우리에게 있는가를 돌아볼 수 있다면 바른 길을 걷고 있는지 판단할 수 있을 것입니다. 믿지 않는 자들과 믿는 자의 차이는, 다른 이들보다 거룩하게 행동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를 거룩한 존재로 구별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입니다.


이러한 사고는 실패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 줍니다.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사랑 가운데 우리를 용서해 주시며, 우리 공동체를 하나님 보시기에 거룩한 공동체로 만들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같은 이유에서 우리는 소망의 존재로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하라.”(마 5:48)고 말씀하셨습니다. 헬라어로는 “너희는 완전해질 것이다.” 텔레이오스(τέλειος)라고 번역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온전함에 이르기 위해 버둥거리는 존재들이 아닙니다.


주님의 완전하신 사랑으로 끊임없이 우리를 변화시키고 능력을 주시는 하나님 때문에 우리 안에 온전함이 창조됩니다. 우리 몸을 살아 있는 제물로 드릴 때 우리를 거룩한 존재로 구별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됩니다. 또한 우리 역시 삶을 통해 그분의 거룩함을 드러내기를 더욱 갈망하게 됩니다.


5.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마지막으로 우리의 제물은 하나님께 기쁨이 됩니다. 우리의 존재 자체가 그분께 기쁨이 된다는 이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우리는 다르게 살 수 있는 용기를 얻을 수 있고, 먼저 그분의 나라의 그분의 뜻을 구하는 삶을 기꺼이 살아갈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나 세상이 우리를 어떻게 판단하든지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분이 우리와 관계 맺길 원하시고 우리가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으로 그분의 사랑에 응답할 때 우리의 존재 자체가 그분께 기쁨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능력으로는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 그분을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날 수 있고, 또 어떤 일을 하더라도 그분 안에서 만족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사랑을 증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감사할 수 있습니다. 무슨 일이든 최선을 다해 그분에 대한 사랑을 담을 수 있습니다. 공동체의 삶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역설적이지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이라는 구절은 우리를 훈련으로 부르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일이 이 세상에서는 기쁨이 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방법을 따르기 위해 인간적인 방법을 거부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충실한 산 제물이 됨으로써 다른 사람의 적대감에 직면할 때도 있습니다.


6. 영적 예배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살아 있는 희생물로 드릴 때 그것은 영적 예배가 됩니다. 사도 바울은 영적 예배라는 말로 그 의미를 보다 명확하게 해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예배라는 헬라어는 '프로스퀴네오'(προσκυνέω) 명사는 종종 '섬김'으로 번역되는데, '의식'과 '의무'라는 뜻 모두를 내포합니다. 이 단어의 이중적 의미는 여기서 유익한 역할을 합니다. 우리의 예배 의식과 봉사활동은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기 때문입니다.


헬라어 형용사 '로기코스(λοϥικὀς)는 보통 '영적'이라고 번역되지만, 동사 '생각하다'와 관계가 있는 단어로, 참되고 핵심적인 본질에 부합한다는 의미의 '진정한'을 뜻합니다. 그래서 '지성과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라고 번역하기도 합니다. 몸을 개인적 인격을 가리키는 말로 해석할 때 '영적 예배'는 모든 차원의 삶을 제물로 드리는 태도를 의미합니다.


그 경우 성(聖)과 속(俗)의 차이들은 사라져 버리고 모든 직업이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거룩한 산 제물이 됩니다. 우리의 작업장은 예배 장소가 되며, 일상적인 활동은 우리가 드리는 예배의 일부분이 됩니다. 양치질을 하고, 운동을 하고, 낮잠을 자고, 아이를 돌보고, 남편과 대화하고, 집안을 청소하고, 음식을 만들고, 음악을 듣고, 직장에서 일하는 모든 행위가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예배에 대한 이러한 통전적인 이해가 공동체에 영향을 미칠 때 교회는 한층 더 균형 잡힌 참된 영성을 회복하게 됩니다. 복음 전도는 우리의 존재로써 복음을 보여 주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열린 자세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모든 기회를 이용하여 사랑과 기쁨의 일상적 행위로 다른 사람에게 다가갈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참된 공동체가 될 때 교회 자체가 '산 위의 동네'(마 5:14)가 되어 사회적 대안의 모습을 보이게 됨으로써, 사회적인 문제 해결에 직접적이고도 적극적인 참여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섬김의 자리로 부르셨든, 최선을 다해 그 일을 하게 될 것이며, 다른 사람들의 일에도 더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7. 그러므로


자기 자신이나 공동체를 영적인 예배로 하나님께 드릴 때, 그분은 유혹을 거룩과 용납의 순간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우리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릴 때, 우리는 더 깊은 진리의 세계로 초대되어 참된 헌신으로 가득 찬 공동체의 길을 기쁨으로 걷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가좋다오


출처 : ╋예수가좋다오
글쓴이 : (一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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