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 설교 모음

[스크랩] 베드로의 진정한 신앙고백과 나의 진정한 신앙고백

하나님아들 2017. 12. 10. 22:23

                          베드로의 진정한 신앙고백과 나의 진정한 신앙고백

                                                                                 (16:13-20)


  

마태복음 16:13-20절 말씀을 가지고 2주 연속 시리즈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지난 주는 교회를 위임하신 예수님이라는 주제로 설교를 했으며, 오늘은 베드로의 진정한 신앙고백과 나의 진정한 시앙고백이라는 주제로 설교할 것입니다.

 

지난주에 저는 신학도 시절에 예수님의 사역에 관해 두 가지 희한한 의문을 가진 바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은 왜 교회 하나 세우지 않았을까?” 다른 하나는 예수님은 왜 성경 한 권을 기록하지 않았을까?” 

지난주는 첫 번째 의문인 예수님은 왜 교회 하나 세우지 않았을까?”는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시간 관계상 두 번째 의문은 드리지 못해 오늘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저는 신학은 조금 늦게 시작하여 평신도 생활을 오래 했습니다. 신학을 하기 전경은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이기 때문에 절대적 보호를 받는 줄 알고 있었습니다. 성경을 하나의 말씀로 믿지 않은 사람은 있겠지만 감히 도전한 사람은 없는 줄 알았습. 그러나 신학을 접하여 공부하다보니 세상 사람들 보다는 오히려 신학의 이름으로 성경이 도받고 있는 현실을 실감하면서 예수님은 왜 성경 한 권을 기록하지 않았을까? 이런 생을 한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성경을 기록했다면 이러한 도전은 받지 않았을 것입니다.

 

신약 성경은 딱히 27권만 처음부터 존재하고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4세기 정 결정할 당시에는 성경과 유사한 글들이 많았습니다. 예컨대, 베드로 복음, 바나바 복, 도마의 복음서 등등 50여 가지나 더 있었습니다. 많게는 100여 가지로 보는 학자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짤막한 글들, 마치 쪽복음까지 합치면 100여 가지 되기 때문입니. 몇 년 전에 (가룟)다의 복음서가 발견되었다는 기독교계 뉴스까지 들려왔습니다. 것은 너무나 터무니없는 것으로 판명되었습니다만, 어떠하든 성경과 유사한 많은 글 중에 27권만 정경이 되어 우리 곁에 와 있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성경을 기록했다예수님기록한 것만이 성경(정경)이 됩니다. 지금의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이 쓴 사복음서는 외경은 될 수 있을망정 정경될 수 없니다. 이리하여 예수님은 왜 성경 한 권을 기록하지 않았을까? 이런 생각을 해본 것입니.

 

이 두 가지는 어쩌면 합리적인 생각이며, 합리적인 의문일 수 있으나 희한한 의문이라고 한 것은 신학도들이 보편적으로 이런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저 혼자만 특별하게 한 것 같희한한 의문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별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지난주에도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이 두 가지 의문은 신학을 마쳤어도 그리 풀리지 않았니다. 그런데 선교 현장에서 말씀을 가르치며, 나름대로 목회를 체험하면서 풀리기 작했습니다. 그래서 첫 번째 의문인 예수님은 왜 교회 하나 세우지 않았을까?” 여기에 답은 본문을 중심으로 지난주에 상세히 말씀을 드렸습니다

 

두 번째 의문인 예수님은 왜 성경 한 권기록하지 않았을까? 이것은 아직까지확하게 모르겠으나 희미하게는 보입니다. 그러나 오늘 주제는 성경이 아니기 때문에 희미한 이라도 할 수 없어서 조금 아쉽기는 합니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성경의 저자들은 성령의 감동(충만)을 받아 기록했으, 초대 교부들은 성령의 조명(충만)아 성경과 유사한 많은(50-100가지) 글들 중에 27권만 정경으로 결정했다는 것입니. 할렐루야!

 

이것이야 말로 1517년 종교개혁 이후 장로교회가 주축이 된 개혁주의 성경관입니다. 아멘입니다. 그리고 여기 교부(敎父)는 교회의 아버지라는 뜻으로 2000년 기독교의 중요한 교리(삼위일체, 정경, 주일예배, 예수님의 신성과 신성, 성탄절 등등)는 이분들이 결정했다고 해서 붙여진 진 것입니다. 교부들이 결정한 교리들이 1700년 동안 조금도 흔들림 없이 지탱해 오고 있는 것은 성령을 충만히 받아 결정적인 증거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교리들은 산산조각이 났거나 아예 폐기되어 21세기 오늘날까지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런 사실들을 묵상해 보면 기적 중에 기적입니다.

 

 

<본 문>

 

예수님은 제자들을 대동하고 전도 여행 중에 가이사랴 빌립보에 도착을 했습니다. 지난주에 여기 빌립보는 빌립보교회가 있는 곳이 아니라 이스라엘 가이사랴 지방에 있는 도시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가이샤라 빌립보 지방에 도착했을 때 자기 소문이 귀에까지 들려와서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 제자들의 대답입니다. 세례 요한, 엘리야, 예레미야, 선지자 중에 하나라고 합니다. 제자들이 정확하게 답변한 것으로 보아 그들도 빌립보 지방에 떠 돌고 있는 예수님의 대한 소문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의 대답이 석연치 않아서 그런지 예수님은 다시 묻습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예수님은 똑 같은 질문을 두 번 하셨는데 첫째 질문은 세상 사람들의 생각을 물었고, 두 번째 질문은 제자들의 생각을 물었습니다. 첫 번째 질문에서 제자들의 대답이 석연치 않았던 것은 세상 사람들이 자기에 대해 너무나 잘못 알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자기는 예수며, 인자인데 세상 사람들은 세례 요한, 엘리야, 레미야, 선지자 중에 하나라고 하니 석연치 않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대답은 사뭇 달랐습니다. 여기까지가 지난 13-15절의 설교의 요약이며, 오늘 설교의 서론격입니다.



16: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

 

두 번째 질문의 대한 베드로의 답변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답변을 원했습니다. 수님이 이런 답변을 원했던 것은 답변의 문장이 좋아서가 아닙니다. 자기 신분이 망라하고 있기 때문에 좋아한 것입니. 질문의 요지가 그대로 다 드러나고 있기 때문에 흡족해 하신 것입니다.

 

는 구원자 예수이며, ‘그리스도는 메시아 구원자이며, ‘하나님의 아들인자로서 하늘 영광의 보좌를 비우고 사람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특히 인자는 예수이 세상 사람들과 제자들에게 듣기 원해 질문했던 바로 그 이름입니다. 람들이(너희는) ‘인자를 누구라 하느?”

 

베드로의 이 대답 때문에 베드로의 신앙고백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오늘 설교 제베드로의 진정한 신앙고백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너희는 인자를 누구라 하느고 물었을 때, 베드로가 대답을 했습니다만 즉시 대답했을 것 같습니까? 지체하다 대답했을 것 같습니까? 베드로는 즉시 대답하지 못하고 조금 지체하다 대답을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물음에 제자들은 한참 동안 대답을 못하고 적막이 흘렸을 것입니다. 이 말은 만 2년 동안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았던 제자들도 실상은 세상 사람들처럼 예수님의 대해 잘 몰랐던 것입니다. 제자들 사이에서 적막히 흐르고 있을 때, 성령께서 베드로의 마음을 노크합니다. 그리고 대답할 방법(내용)까지 알려줍니다. 다같이 17절을 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베드로의 대답은 베드로 스스로 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물론 역할은 성령께서 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물음 이후에 제자들 사이에도 적막이 잠나마 흘렸다는 것이며, 또한 베드로는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한참 지체했다는 증거니다. 이리하여 베드로의 대답은 일반적으로 베드로의 신앙고백이라고 할 수 있으나 오늘 설교 제목처럼 베드로의 진정한 신앙고백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

 

이런 상황에서 그러면 오늘 설교 제목을 왜 베드로의 진정한 신앙고백이라고는 했을까?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베드로 스스로 대답한 것이 아니라 성령의 도움을 받아 하나님의 뜻대로 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성령의 도움이 없이 베드로 스스로 했다면 조금도 지체함 없이 아마도 즉빌립보 사람들과 흡사하게 소문난 대로 선지자들의 이름을 거명했을지 모릅니다. 것마저도 성령께제시키고 하나님의 뜻대로 대답하도록 알려준 것입니다. 이리하여 베드로의 진정한 신앙고백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의 신앙은 인간적인 요소가 들어가면 안 됩니다. 특별히 신앙고백적인 요소일수록 인간적인 요소는 배제되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인간적인 요소를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반면에 성령과 함께 할 때만이 신앙의 진수가 나옵니다.

 

성령과 함께한 베드로의 진정한 신앙 고백의 의미를 다시 상고해 보도록 하겠습니. 16절입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

 

여기 시몬은 히브리식 본명으로 하나님께서 들으신다는 뜻을 가진 이름입니다. 베드로는 헬라식 이름으로 반석이라는 뜻입니다. 마태는 예수님이 베드로를 처음 부르실 때 베드로라 하는 시몬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4:18). 그러나 여기서는 시몬 베드로가 대답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시몬을 먼저 언급한 것은 그의 이름과 연관되어 하나님이 알준 대로 대답을 했기 때문이 아닌 듯싶습니다.

 

마태가 베드로의 이름을 서로 교호적으로 사용한 것은 특강 낙원은 천국의 중간 장소인가?’에서 말했던 것처럼 배경(상황)에서 사용자의 적절한 수사법입니다. 마태는 이처럼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섬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님의 신분 중에 가장 심오하며 가장 완벽한 표현으로서 기독교 신조의 핵심을 이루는 부분입니다. 특별히 예수님의 인성 부분인 아들과 신성 부분인 그리스도()는 본질적인 신분을 나타내고 있어서 기독교의 중요한 신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 그리스도, 아들은 단순히 예수님의 신분의 관한 것만이 아니라 여기에 특별히 구속사적으로 모든 구원의 요소들이 연관되어 있으므로 더욱더 진정한 신앙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성령님의 역사하심이 함께 하시므로 더 값진 신앙 고백이 된 것입니다.

 

베드로는 반석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반석은 하나님 곧 그리스도를 예표합니다. 사도 바울의 증언입니다.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전10:4).

반면에 구약은 반석을 거의 하나님으로 예표하고 있습니다. 시편의 기자의 진술니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18:2).

 

베드로의 신앙 고백에는 두 반석이 만난 것입니다. 이것을 알고 있는 저는 이런 기도를 자주합니다. “여기 가르치고자 하는 열정과 배우고자 하는 열정이 만났으니 하나님의 말씀만 온전히 전하고 배우게 해달라고 말입니다.

두 반석의 만난의 의미는 무엇이겠습니까? 일차적으로는 든든하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반석이라는 뜻이 주는 의미대로 쉽게 깨질 수 없고, 아무나 깰 수 없으며, 또한 쉽게 너질 수 없습니다. 두 반석의 만남, 베드로(우리)의 신앙고백과 주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면 어떤 일도 할 수 있으며 또한 못할 일도 없다는 것을 시사해 줍니다.

 

이차적으로는 실제적인 적용의 의미일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와 베드로의 신앙 고백이 만나는 것은 신앙적 이론이나 꿈꾸는 파라다이스 곧 낙원과 같은 상상의 나라가 아니라 진실한 만남이 되어야 하며, 실질적이며 더 깊은 관계로 발전하여 실행에 옮기라는 의미가 두 만남 안에 들어 있습니다.

여러분! 사람은 알게 모르게 수많은 만남을 갖습니다. 그러나 관계로 이어지는 것은 그리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같이 마음을 주고받으며 행동할 수 있는 더 깊은 관계로 발전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여기 두 반석의 만남은 만남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깊은 관계까지 이어진 것을 말합니다.

 

사랑하는 제자 여러분!

여러분의 신앙고백은 무엇입니까? 도대체 무엇으로 신앙고백을 하고 있습니까? 기서 초년생인 신학도 여러분에게 주는 교훈은 여러분의 신앙고백입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렸듯이 아무리 유명한 주석가라고 할지라도 틀린 주석을 앵무새처럼 따라 설교하지 말라고 한 것처럼 신앙고백도 아무나 따라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처럼 반석 같은 자기 독자적인 신앙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저의 신앙고백은 이렇습니다. (뜸드린 후에) “잘하는 선교사보다 정직한 선교사가 되습니지금 신앙고백을 말하고자 하면서 약간 지체할 때, 여러분 중에는 아마 우원장은 대단한 신학(철학)적이거나 아니면 엄숙한 성경적인 내용으로 고백할 것으로 기대한 분이 있었을 것입니다. 만약에 있었다면 정말로 죄송합니다. 여러분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 무나 싱거운 신앙고백을 하면서, 마치 자랑스럽게 할 것 같이 저의 신앙고백은 이렇습니다고 시작해서 말입니다.

 

저의 신앙고백이 여러분에게는 기대치 이하로 싱겁게 들렸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저의 나름대로 철학이라면 철학, 신학이라면 신학, 성경(신앙)이라면 성경적인 신앙고백이라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다음 두 가지 이유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는 저의 신앙고백의 내용이 좋고 나쁨을 떠나 저만이 가질 수 있는 단독적이며 나의 진정한 신앙고백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나의 영혼 깊숙이 들어와 있는 나의 신앙 자체이기 때문에 굳이 신앙고백으로까지 필요를 느끼지 않아서입니다.

 

실상은 베드로도 제자학교 초대 신입생이기 때문에 이와 같이 신앙고백을 했으나 성령의 체험과 충만을 받은 후에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라는 사실은 신앙자체였기에 이보다는 더 위대한 신앙 고백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의 수준으로는 진정한 신앙고백이었습니다. 물론 성령의 도움이었지만 말입니다.

지난주에 설교할 때는 다음 주에 설교는 베드로의 진정한 신앙고백이라고 소개를 했습니다. 그러나 설교 준비를 하면서 베드로의 진정한 신앙고백과 나의 진정한 신앙고백으로 바꾸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함께한 제자들, 빌립보 현장에 함께한 모든 제자들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만 대답을 했습니다. 대답하지 못한 제자들은 2년 동안 가르침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신분의 대해 잘 모르고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베드로가 성격급하여 다른 제자들보다 먼저 이야기를 한 것처럼 해석들 하고 있습니다만 실상은 령의 도움으로 대답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아무리 베드로가 성격이 급했다고 하라도 성령의 도움이 없었다면 대답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베드로가 성격이 급하여 다른 제자들보다 먼저 대답을 했다면 성격 급한 사람들이 매사에 많은 알있다는 것이 됩니다. 저는 별로 성격이 급하지 않아도 모르는 것 빼놓고 알 것은 다 니다.

 

여기서 베드로의 대답(신앙고백)과 예수님의 평가를 다시 거론한 것은 지난주에 시간상 다 말할 수 없어 미루어 놓았습니다. 그래서 이야기하지 못한 점도 있지만 본질적인 것은 예수님의 평가를 놓고서 기독교와 천주교가 양분화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또한 중요한 교회론적인 문제여서 다시 거론하지 않을 수 없어 거론하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베드로 개인에게 교회를 위임하고 열쇠를 준 것이 아니라 모든 제자에, 반면에 천주교는 모든 제자가 아닌 베드로 개인에게 준 것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에서 교회 위임을 베드로 개인이 아닌 모든 제자들에게 한 것으로 보는 이유이렇습니다. 첫째, 예수님의 질문이 베드로 개인에게 한 것이 아니라 현장에 있는 모제자들에게 했기 때문입니다. 둘째, 대표성의 원리 때문입니다. 대답은 베드로가 했지예수님의 평가는 베드로 개인이 아닌 현장이 있는 모든 제자들에게 동일하게 한 것으로 봅니다. 아담의 개인적인 죄가 모든 인류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도 바로 모든 인류를 대표하는 대표성의 원리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대표성의 원리가 예수님의 평가에 적용되었다고 보는 것입니. 셋째, 교회 역사가 증명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 교회의 위임권을 베드로 개인에게 주어졌다면 교회를 세우는 일 역시 베드로가 생존해 있때는 가능하지만, 사후에는 더 이상 교회를 세울 수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역사는 베드로만 교회를 세우고 목회한 것이 아니라 스데반 집사의 순교 사건 이후에 흩어진 제자들이방지역에 교회를 세웠으며, 이 가운데 초대교회의 롤모델인 안디옥 교회가 세워졌, 이때 바울이 등장하여 초대 교회를 세우며, 목회자를 양육하여 목회하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사역자들도 교회를 세워 목회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기독교는 예수님이 교회의 위임권과 천국 열쇠를 결코 베드로 개인에게 준 것이 아니라 당시 제자 공동체뿐만 아니라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하나님의 아들라는 사실을 근거로 인격적이며 영적인 신앙 백하는 모든 자들에게 주어진 것으로 본 것입니다. 그래서 감히 오늘날까지 주님의 교회가 세워질 수 있었던 것이며, 또한 주님 재림할 때까지 교회는 세워지고 또 세워질 것입니다.

반면에 천주교에서는 교회 위임권과 천국 열쇠는 모든 제자들이 아닌 베드로 개인에게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딱 한 가지이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듣고 보면 실망할 정도가 아니라 허망함을 느낄 것입니다. 교황권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천주교의 초대 교황이 베드로가 되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천주교의 모든 종교상의 교권은 교황에게 있는 것입니다. 실망입니까? 허망입니까?

여러분! 천국에 가시걸랑 베드로 형제를 만나면 이렇게 인사해 보세요. ‘초대 교황님 동안 평안하셨지요그러면 베드로가 어떤 반응을 보일 것 같습니까? 아마 깜짝 놀래 형제가 그런 소리하고 있지만 그 애들(천주교)이 다 조작하여 만들어 놓은 것이라며, 손사래를 치면내 생전에 스스로 내가 교황이라고 말해 본적이 없다네. 실상은 수제자라고 부르는 것도 부끄러운 일이라며 대답할 것 같습니다.

더 나아가 자기 변호를 하면서 이것은 사실이야, 증거(증인)가 다 있다며, 생명책을 들쳐보지 않아도 되며, 예수님직접 물어보지 않고 바로 옆에 있는 세례 요한한테만 물어봐도 알 수 있다며 사실 확할 것입니다. 여기서 베드로가 세례 요한을 지적한 것은 같은 선지자라기보다는 믿음의 경주와 허다한 증인들의 설교에서 말한 것처럼 세례 요한은 믿음의 증인이기 때문에, 여기 논제의 핵심인 베드로 생전에 교황이라고 했느냐는 증언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평가는 모든 제자들에게 한 것이 아니라 베드로 개인에게 했다는 천주교의 해석은 결과적으로 자기들의 교황권 교리를 확립하기 위한 허망한 해석입니다.

 

16: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마태는 시몬 베드로가 대답을 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16절 확인해 보겠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16). 그러나 예수님은 바요나 시몬아이라고 부르고 있습. 두 이름은 단순한 차이가 아니며, 또한 그렇게 보면 예수님이 지금 부르고 있는 호칭에 대해 크게 오해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요나 시몬아'라고 부르는 것은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깊은 연관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설교 제목을 베드로의 진정한 신앙고라고 한 것입니다.

 

여기 는 성이나 이름이 아니라 당시 언어인 아람어(, 바르에서 파생)아들을 뜻합니. 따라서 바요나 시몬바요나와 시몬의 두 이름이 중복되어 호칭됐거나 베드로를 강조하기 위해 사용한 것이 아니라 요나의 아들 시몬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현대식 문법으로는 바요나가 아니라 바-요나가 맞습니다.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요나는 시몬 베드로의 아버지가 됩니다. 예수님이 시몬을 제자로 부를 때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라고 부르면서 새 이름까지 게바(베드로)’로 지어 줍니다(1:42). 베드로는 주님이 지어준 이름뿐만이 아니라 헬라식 이름이라서 이후로는 주로 사용합니다. 또한 부활 후에 베드로에게 사랑하라는 사명을 부여할 때도 요한의 아들 시몬이라고 세 번씩이나 부릅니다(21:15-17). 그러나 여기 오늘 본문에서요나의 아들 시몬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문자적인 해석으로 베드로의 아버지는 요한요나 두 이름을 갖고 있는 셈입니다. 두 이름만 보고 혹시 드로의 아버지는 두 분인가? 이런 의심을 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다른 두 이름을 갖고 있는 것으로는 다들 생각할 것입니다. 많은 주석가들도 베드로의 아버지는 요한요나 두 이름을 가진 것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 아버지 이름은 요한 하나뿐입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전혀 개의치 고 문자적으로만 보면 두 이름을 가진 것처럼 보입니다. 이것은 유대인의 문화를 알못하면 도저히 알 수 없는 비밀입니다. 비밀의 특징에 대해서는 지난주에 말씀드렸지.

 

여기 요나는 베드로의 아버지가 아니라 구약의 요나 선지자입니다. 요나 선지자하면 다른 것은 몰라도, 불순종한 선지자, 물고기 뱃속에 들어간 선지자 두 가지는 재빨리 기억할 것입니다.

 

오늘도 웃을 만한 질문을 하겠습니다. 여러분! 물고기가 사람의 뱃속으로 들어갑니? 사람이 물고기 뱃속으로 들어갑니까? 다들 웃는걸 보니 웃을 만한 질문인 것이 맞나 봅니다. 물고기가 사람의 뱃속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들어간 것입니다. 이 사실로만 보아서는 전무후무한 사건 같은데 실상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상아나 고래 같은 큰 물고기에 물려 밥이 되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입니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들어간 사건에서 주는 교훈은 하나님의 말씀의 불순종하면 어둠에 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물고기 뱃속은 어둠이 철벽같을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 어두움은 불못(지옥)같은 곳입니다. 요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번에는 제가 천국가면 요나에게 한 번 물어볼 것입니다. 요나 형제 물고기 뱃속에 다시 한 번 들어가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 요나도 손사래를 치며 두 번 이상 들어갈 곳이 못된다고 대답할 것 같습니다.

 

요나의 사건에서 더 깊이 들어가 보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요나는 물고기에 물릴 도가 아니라 통체로 뱃속에까지 들어갔지만 죽지 않고 살아났기 때문에 깊은 교훈()이 됩니다. 물고기 뱃속에 들어간 요나는 소화가 되어 배설물로 나온 것이 아니라 3안 좀 답답했겠지만 여전히 흡을 하며 생명을 유지하다가 물고기가 갑자기 토하게 되어 밖으로 뛰쳐나온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창조 이래 전무후무한 사건입니다.

요나의 사건은 창조주 하나님의 섭리로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 외에 어떤 것으로도 설명할 수 없습니다. 물고기의 소화 기능도 잠시 정지시킨 하나님은 창조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대자연을 당신의 뜻대로 다스리고 계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

어둠은 요나를 삼켰지만 죽이지는 못했습니다. 요나는 3일 만에 다시 살아났습니다. 여기 3일은 예수님의 죽음의 3, 무덤의 3일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표적을 요구한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은 선지자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고 응수하셨습니다(12:38-39).

 

요나 사건 이후에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절대적 인도하심, 가장 아름다운 보호하심을 상징하는 신앙적 문화로 자리 잡게 됩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요나를 자랑스럽게 여기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요나의 표적밖에 없다고 제시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입니다.

 

이런 경우와 비슷합니다. 지방이나 민족은 자기 나름대로 긍지를 가질 만한 특색이 있습니다. 교육도시로 알려졌기 때문에 교육이야기 하면 긍지를 느끼며 마냥 좋습니다. 하얼빈중국의 표준어를 쓰는 도시로 알려져 있어서 표준어 이야기하면 긍지를 느끼면서 하얼빈 출신 아나운서 이름을 거명하며 좋아합니다. 조선민족은 의민족이어서 조상들이 흰옷즐겨 입었던 것에 긍지를 느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바요나하면 하나님의 절대적 보호하심에 최고의 긍지를 느낍니다.

 

이 문화를 이해한다면 이 상황은 이처럼 전개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 요나는 베드로 아버지 요한의 다른 이름이 아니며, 베드로의 육신적인 아버지도 아닙니다. 액면그대로 구약의 선지자 요나입니다. 따라서 지금 예수님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 베드로를 향하바요나 시몬아 른 것은 요나의 아들 같은 시몬이라는 의미로 부른 것입니다. 설사 요나가 베드로의 아버지 요한의 다른 이름이라고 할지라도 예수님의 부름의 의미는 선지자 요나와 연관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바요나의 의미를 제대로 알고 있던 베드로는 감격하고 감격했을 것입니. 예수님의 부름의 의미는 더 나아가 베드로에게 교회의 위임권과 천국 복음의 열쇠를 맡겨도 되겠다는 야심찬 부름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절대적 인도와 보호는 지난주에 말씀드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는 말과 일맥상통합니다.

 

베드로의 신앙고이 예수님을 향하여 진실했기 때문에 그 진의를 아신 예수님베드로를 향하여 바요나 시몬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오늘 설교 제목을 베드로의 신앙고으로 생각을 했다가 두 번째 설교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베드로의 진정한 신앙고백과 나의 진정한 신앙고으로 변경한 것입니다.

 

네가 복이 있도다는 말은 신약성경에서 유일하게 개인에게 국한시켜 사용된 말이지만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처럼 본문의 전체적인 의미로 볼 때, 단지 베드로 개인만이 아닌 베드로와 같이 진정으로 신앙고백한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복입니.

이 복에 대해서는 19절에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세상에 있는 교회를 잘 섬기는 자들이 받을 영적인 복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여기 복은 칭찬의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복의 선언입니다.



<결 론>

 

마태복음 16:13-20절 본문으로 2주 연속 시리즈 설교를 했습니다. 지난주 첫 번째 설교는 교회를 위임하신 예수님이었으며, 오늘 두 번째 설교는 베드로의 진정한 신앙고백과 나의 진정한 신앙고백입니다.

 

본문의 핵심은 예수님의 질문과 제자 베드로의 답변입니다. 그리고 베드로의 답변의 대한 예수님의 평가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질문을 하게 된 것은 빌립보 지방에 떠돌고 있는 자신의 신분의 관한 소문 때문이었습니다. 잘못된 소문이었때문에 그 진의를 알고자 질문을 한 것입니다. 만약 정확한 소문이었다면 질문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설사 질문을 하더라도 이런 식으로 하지 않고 소문의 걸맞게 다르게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한 번만 한 것이 아니라 같은 요지의 질문을 가지고 두 번씩 했습니다. 번째 질문은 세상 사람들은 인자를 누구랴 하느냐입니다. 제자들의 답변입니다. “세례 요, 엘리, 예레미야 혹은 다른 선지자 중에 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의 생각이었습니다. 두 번째 질문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랴 느냐어느 정도 적막이 흐르다가 베드로가 제자들을 대표하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합니다.

 

이리하여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2000년 동안 신약의 위대한 신앙고백 혹은 베드로의 진정한 신앙고백으로 전해오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 예수님이 주인이신 교회는 바로 이런 신앙고백 위에 세워졌습니다. 베드로의 진실성은 예수님도 당시 바로 인정하셨습니다. 베드로에게 교회 위임권을 주기 전에 바요나 시몬아라고 부르는 것으로 이미 인정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보편적으로 교회 위임권, 천국 열쇠 때문에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인정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아닙니다. 바요나 시몬아 이 한 마디에 인정이 된 것입니. 이것은 비밀급입니다.

 

베드로의 이름은 반석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반면에 예수님도 반석이십니. 교회는 이처럼 두 반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교회는 어둠의 권세가 이기지 못한다것은 바로 이런 반석위에 세워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지난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가 사탄이 이길 수 있는 배경, 조건, 능력교회의 위임식 때부터 부여받은 것은 바로 반석위에 교회를 세우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반석위에 세워지지 않은 교회는 모래위에 세워진 것으로서 무너질 것입니다.

초대교회를 거의 세웠다고 할 수 있는 사도 바울은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고후5:1).

이 세상의 장막은 영원하지도 않으며 또한 영원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원한 하늘의 본향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물론 이 세상에서도 하나님의 나라의 임재를 체험하며 신앙생활을 해야 하지만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이 아니라 하늘 본향에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설교 제목을 다시 한 번 상기해 봅니다.

베드로의 진정한 신앙고백과 나의 진정한 신앙고백입니.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이것은 베드로의 진정한 앙고백입니다. 그렇다면 나의 진정한 신앙고백은 무엇입니까? 깊이 묵상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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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분간 묵상합니다.

묵상을 마치는 대로 제가 마무리 기도하겠습니다.

출처 : 창골산 봉서방
글쓴이 : 바나바선교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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