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 설교 모음

[스크랩] 하나님보다 앞서지 마라!*김병삼 목사

하나님아들 2017. 8. 19. 14:37

예수가좋다오

하나님보다 앞서지 마라!
사무엘 상 15:17~23 / 김병삼 목사
 

[사무엘 상 15장 17-23절]
 17. 사무엘이 이르되 왕이 스스로 작게 여길 그 때에 이스라엘 지파의 머리가 되지 아니하셨나이까 여호와께서 왕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을 삼으시고 18. 또 여호와께서 왕을 길로 보내시며 이르시기를 가서 죄인 아말렉 사람을 진멸하되 다 없어지기까지 치라 하셨거늘 19. 어찌하여 왕이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하고 탈취하기에만 급하여 여호와께서 악하게 여기시는 일을 행하였나이까 20. 사울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나는 실로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여 여호와께서 보내신 길로 가서 아말렉 왕 아각을 끌어 왔고 아말렉 사람들을 진멸하였으나 21. 다만 백성이 그 마땅히 멸할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길갈에서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고 양과 소를 끌어 왔나이다 하는지라 22.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23.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하니.


 2014년 한 해 동안 계속해서 ‘radical’이라는 주제로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오늘부터 이스라엘 왕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쓰시고 버리시는 기준이 무엇인지, 가장 근본적인 신앙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말씀을 준비하면서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십니다. 단지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 쓰임 받지 못할 뿐입니다.

 

[광수생각]이라는 만화에 나오는 두 남녀의 대화입니다.
 남자: 우리 아버지는 유명한 변호사에 빌딩도 두 채나 가진 부자라고! 그리고 나도 명문대를 나와서 대기업에 다닌다고!! 게다가 난 삼 형제 중 막내라고. 근데 왜 내 청혼을 받아주지 않는 거지? 내 배경과 내 스펙이 마음에 안 드는 거야?
 

여자:……. 으음. 너의 배경과 너의 스펙은 마음에 드는데, 네가 싫어!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일까요?
 사울 왕의 이야기는 하나님 앞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또한, 가장 중요한 단어가 있다면 ‘끝까지’가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하면서 오늘 말씀을 열어보려고 합니다.
 스펙이 아닌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되는 것.

 

스스로 작게 여길 때에…
 오늘 본문은 사무엘이 사울을 질책하는 장면에서 시작됩니다. 그런데 그 질책이 사울의 과거를 돌아보라는 것이죠. “사무엘이 이르되 왕이 스스로 작게 여길 그때에 이스라엘 지파의 머리가 되지 아니하셨나이까 여호와께서 왕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을 삼으시고” (17절)
 사울이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스스로 작게 여길 때”였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실상은 이렇습니다.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성경에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무엘이 말했다. 처음 이 길에 들어설 때 당신은 보잘것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왕께서도 그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당신을 이스라엘 가운데 가장 높이 두셔서 왕으로 삼으셨습니다.”
 스스로 보잘것없는 존재임을 하나님도 알고 사울도 알 때 하나님께서 그를 높이 세우셨습니다. 문제는 오늘 사울이 자신을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죠.


 하나님이 그를 세우신 이유는 그를 사용하시기 위함인데, 그가 스스로 하나님께 의지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 하나님이 그를 쓰실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자리에 사울을 더는 놓아 둘 수 없게 된 것이죠.

 

오늘 사울의 이야기를 보면서 우리가 복음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쓰시려고 부르던 때에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는지를 말입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도구가 되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심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도구가 되기를 거부하지 않는지를 말입니다.

 사무엘이 사울에게 기름을 붓기 위하여 만났을 때의 장면을 기억하시나요? 사무엘상 9장 21절의 말씀을 보세요. “사울이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이스라엘 지파의 가장 작은 지파 베냐민 사람이 아니니이까 또 나의 가족은 베냐민 지파 모든 가족 중에 가장 미약하지 아니하니이까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이같이 말씀하시나이까 하니.” 그런데 사울이 살아온 삶의 흔적을 보니, 잘못되었습니다. 인생이란 한 사건으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걸어온 모든 삶의 발자취가 합쳐져서 삶을 만들어 가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 삶에는 흔적이 참 중요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규현 목사가 쓴 [그대, 그대로도 좋다]에 보면 참 좋은 글이 있습니다.
 “삶의 흔적은 시간의 발자국이다. 또한, 시간이 멈추지 않고 앞을 향해 가고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지나간 시간의 흔적을 지울 수는 없지만, 새로운 흔적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은 기회다. 얼굴에 생겨난 주름은 흘러간 시간의 흔적이지만, 동시에 미래를 풍요롭게 여는 지혜의 샘터이기도 하다. …


 어제의 실수를 오늘도 반복하는 것은 시간의 퇴행이다. 과거의 상처에 계속 머물러 있다면 시간은 멈춘 것과 같다. 어제의 아픈 기억에 몸부림치며 과거의 시간에 서성이는 사람들은 추억의 박물관에 갇힌 미라와 다를 바 없다.


 수천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그 모습 그대로 그곳에 있다는 것은 아픈 과거만 크게 부풀어져 있을 뿐이다. 잔인한 과거의 시간, 그 흉기에 죽은 시간이 많다. 겨울이 가고 봄이 와도 아픈 기억의 편린을 털어 버리지 못하고 싸늘한 냉기에 얼어붙은 삶은 비극이다. 시간이 멈추어 버린 삶에는 봄이 없다. …


 때로는 나를 죽일 것 같은 끔찍한 경험이 일어난다 해도 다시 살아갈 수 있는 것은 다가오는 미래 때문이다.” 오늘 말씀은 우리가 잘 아는 사건과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사무엘상 15장은 사울이 아멜렉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에 하나님께서 그를 버리신 이유를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사무엘 상 15장 10~12절을 보세요.
 10. 여호와의 말씀이 사무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11. 내가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하노니 그가 돌이켜서 나를 따르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행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하신지라 사무엘이 근심하여 온 밤을 여호와께 부르짖으니라 12. 사무엘이 사울을 만나려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났더니 어떤 사람이 사무엘에게 말하여 이르되 사울이 갈멜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우고 발길을 돌려 길갈로 내려갔다 하는지라.

 

왜 사울이 끝까지 하나님 앞에 순종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으며, 하나님께서 왜 사울을 왕 삼으신 것을 후회하셨을까요?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우고”라는 말씀에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에는 철저하게 다른 두 가지의 기념비가 존재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역사를 기억하는 기념비로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강을 건넌 후에 열두 지파별로 돌을 쌓아 만든 길갈의 기념비입니다. 그 기념비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바로 사울이 세운 그리고 압살롬이 사무엘 하 18장 18절에서 세운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기념비입니다. 사울이 아멜렉과 싸움을 하고 승리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개입 하심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울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나서 하나님의 흔적이 아닌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싶었던 것이죠. 바로 이때로부터 사울에게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자신의 삶에서 하나님의 흔적이 없어지면 사람은 하나님과 멀어지고, 하나님의 능력을 더는 의지하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을 왕으로 삼으셨는데, 더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지 않으려 할 때 하나님은 사울을 사용하실 수 없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실 때, 누가복음 9장 23절에서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을까요? 예수님 당시에 수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따라왔지만, 그 사람들에게 사명을 맡겨주실 수는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아버지의 뜻대로” 하지 않으면 결코 이룰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 나라의 도구로 사용하시기 위해 지으시고 부르셨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끝까지 붙들어야 할 ‘radical’ 한 신앙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구로, 망치로, 톱으로, 지팡이로 쓰시려고 부르셨는데, 어느 순간 도구인 우리가 “기념비를 만들겠다.”라고 하면 참 우습지 않겠습니까? 이 부분에서 예수님은 아주 철저하셨습니다. 바로 변화산 사건이죠. 예수님이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변화산에 오르셨습니다. 그곳에서 제자들이 기적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모습이 변화되고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과 대화하는 것도 보았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예수님에게 이렇게 요청합니다. “여기에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를 위해 초막 셋을 지으면 어떻겠습니까?”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초막’이 무엇입니까? 바로 기념비를 세우자는 의미가 아니었을까요? 그때 하늘에서 음성이 들립니다.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무슨 뜻인가요? 쓸데없이 기념비를 세울 생각하지 말고 주님의 말씀을 듣고 세상에 나가서 일하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신앙의 선배들도 도구일 뿐입니다. 그 누구도 주님의 영광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재미있는 일화입니다. 종교개혁자 존 칼빈은 자신이 죽고 나면 기념비를 세우지 말라는 유언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이름 없는 공동묘지에 장사 되었는데, 한국의 장로교 신학자들이 그렇게 존경하는 칼빈의 무덤이 너무 초라한 것이 안타까워 기념비를 세웠다고 하죠.

 

우리 신앙의 기본적인 점검!
 무엇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일까요? 사도 요한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하여 요한복음 3장 30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하여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의 길을 내어드려야 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큰일을 했다고 생각하고 누군가 우리를 칭찬한다 해도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드려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신앙을 끝까지 지키는 길입니다. 좋은 일, 위대한 일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끝까지 우리 속에 계신 그분의 일, 우리를 부르신 그분의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김범곤 목사가 쓴 [생명의 떡 오직 예수: 낮은 곳의 작은 예수 마당쇠 이야기]에 나오는 글을 하나 소개합니다.
 자연(自然)은 없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이 만드신 천연(天然)입니다.
 자비량(自費糧)이 아닙니다. 주님이 준비하시는 주비량(主費糧)입니다.
 자존심(尊心)은 안 됩니다. 주님만 높이는 주 존심(主尊心)이어야 합니다.
 ‘스스로 자(自)’가 들어가면 타락입니다. 자생(自生)하려고 하면 망합니다.
 하나님 없이 자생하려다 영원한 사망으로 떨어진 것이 마귀입니다.
 스스로 계시고 사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입니다.
 우리는 살라는 대로 살아야 할 생령(生靈)입니다.
 스스로가 아닌 오직 예수그리스도로 스스로가 아닌 말씀과 성령으로 살아야 합니다.


 사울의 착각
 본문 21절입니다. “다만 백성이 그 마땅히 멸할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길갈에서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고 양과 소를 끌어 왔나이다 하는지라” 사울은 왜 진멸해야 할 것을 아깝게 생각했을까요? 그는 하나님께서 주실 것을 보지 않고, 자신이 잡아야 할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는 그 어떤 것도 자신의 소유가 될 수 없음을 간과했던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참 착각을 많이 합니다. 무엇인가를 많이 가지면 풍요로울 것으로 생각하죠. 우리는 주변에서 참 많이 가진 사람을 보지만, 그것을 누리지 못하는 안타까움도 봅니다. 우리가 꿈꾸는 그림 같은 바닷가에 집을 지어 놓고도, 그 전망 좋은 집에서 누리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불쌍합니까? 사실 그 집에서 나와 맨발로 바닷가를 걸으며 즐길 수 있는 마음이 없다면 얼마나 불행할 것일까요?


 사실 우리는 오늘도 “소유하면 누릴 것이라는 거짓 메시지”를 듣는 듯합니다.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처럼 불행한 얼굴을 하는 사람들의 삶에는 하나님이 배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삶의 풍요가 돈과 관계는 있지만, 절대적이지는 않습니다.


 시간이 많다고 여유가 있는 것이 아니죠. 진정한 여유는 바쁜 가운데 시간을 낼 수 있는 정신적인 여유가 중요합니다. 이것이 ‘누림’입니다. 직업이 없이 집에서 매일 노는 사람을 “사람을 여유 있다!”라고 말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어쩔 수 없이 주어지는 시간은 여유가 아니라 고통이기 때문입니다.

 

한때 우리나라 사람들이 뉴질랜드와 호주에 이민을 많이 갔습니다. 노후를 즐기며 한국에서 그 비싼 골프를 마음대로 칠 수 있다는 것 때문에 말입니다. 그런데 마음대로 골프를 치는데 재미가 없답니다. 한국에서 없는 시간과 없는 돈을 내서 칠 때는 그렇게 재미가 있었는데 말입니다.

성경을 통해 우리가 배우는 아주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자신이 소유하려고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 말입니다.
 사울이 본 단락은 사울의 불순종에 대한 사무엘의 지적으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다시 한 번 사울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합니다. 사무엘은 사울의 잘못을 지적하며 하나님의 심판을 법정의 검사가 피고에게 선고하는 것과 같이 준엄한 심판을 내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성도들의 순종은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기 때문입니다. 듣는다는 말의 히브리 원어가 순종을 의미합니다. 믿음은 들으면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습니다. 순종하지 않으면 예수님을 내 안에 담아 둘 수 없습니다. 말씀을 순종하지 않으면 내 안에 예수님이 안 계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말씀을 통하여 순종하는 삶이 어떤 종교적 행위보다 나음을 알게 되기를 원합니다.


 끝까지 순종한다는 것
 순종은 스스로를 작게 여기는 자의 몫입니다. 처음에 언급했던 사무엘 상 9장 21절에 나타난 사울이 바로 그런 것이죠. 그가 스스로 미약하다고 여겼을 때 그는 순종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출발점은 겸손이었습니다. 우리가 흔히 하는 말로 “개구리 올챙이 때 생각 못 한다!”라고 하는데 바로 사울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요? 무엇이 문제인가요?

 

본문 20~21절을 보세요. 20. 사울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나는 실로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여 여호와께서 보내신 길로 가서 아말렉 왕 아각을 끌어왔고 아말렉 사람들을 진멸하였으나
 21. 다만 백성이 그 마땅히 멸할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길갈에서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고 양과 소를 끌어왔나이다 하는지라


 사울에게 할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20절 마지막에 “진멸하였으나”라는 구절이죠.
 이 부분이 “진멸했습니다!”라고 끝났어야 합니다. 순종을 하기는 했는데 끝까지 순종하지 않은 것이죠.

 

1월 말씀 집회에서 한홍 목사님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자리에 서 있어야 하는데 순종하지 않으므로 축복의 자리에 있지 못합니다. 진정한 축복과 순종이란 하나님의 마음이 있는 곳에 우리의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순종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순종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금 사울이 딱 그런 상황에 부닥쳐 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명령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 아닙니다. 단지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진멸하였으나…”
 그리고 그 변명은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고 양과 소를 끌어왔나이다 하는지라
 그가 하나님을 위하여 한 일이라고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 일을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핑계를 댔을 뿐입니다. 그는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한 것이죠. 사울의 이 모습이 오늘 우리에게 찔림이 되지 않나요? “하나님이 좋아하실 거야!”라고 하는데 정말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것인가요?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하고 있나요?


 그래서 오늘 아주 유명한 말씀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22~23절을 보세요.
 22.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23.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하니.

 

“제사를 지낸다.”라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하나님을 만족하게 해 드리기 위한 행위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행위 내면에 있는 우리의 마음을 보십니다. “순종”이 없는 그 어떤 행위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다는 것이죠.
 

아주 재미있는 표현이죠?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메시지: 하나님의 명령을 행하지 않는 것은 이교에 빠져 놀아나는 것보다 훨씬 더 악한 일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우쭐대는 것은 죽은 조상과 내통하는 것보다 훨씬 더 악한 일입니다.)

 

점을 친다는 것은 미신을 믿는 것, 이방신을 섬기는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다는 것은 단순한 불순종이 아니라 “다른 길”을 가겠다는 것입니다. 신앙에 제3의 길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순종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과 다른 길을 가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 “완고함”은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습니다.

 결국, 하나님을 섬기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완고함을 꺾으시는 분이십니다. 왜냐하면, 완고함 때문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가장 큰 맹점은 점점 완고해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자신의 업적으로 착각하게 되면서 말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신 일을 마치 자신이 한 일인 것처럼 착각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 보면 늘 “내가…”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런 사람을 참 싫어하는데 자신만 모르는 것 같습니다. 어느 순간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버리셨는데도 착각하며 살아갑니다.

 

사울의 완고함은 그의 눈이 더는 하나님을 향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재물이 되어 버렸습니다. 불순종과 완고함은 우리의 시선이 하나님을 더는 바라보지 않을 때 슬그머니 찾아오는 무서운 ‘독’과 같은 것입니다. 그 독이 우리 몸에 퍼지면 마비가 되고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게 됩니다.

 

참 재미있는 현상입니다.
 감히 사울이 하나님의 명령을 무시하고 자신이 판단합니다.
 순종하는 사람의 특징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자신이 판단하지 않습니다. 무척 불합리한 일인 것 같지만, 자신에게 이해가 되지 않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이기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인생을 보시면, 끝없이 펼쳐지는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고향을 떠났습니다. 자신에게 주신 약속의 근거인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할 때도 아무 소리 하지 않고 모리아 산을 향해 떠났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아브라함의 모든 행위에 “믿음으로”라고 설명합니다. 그가 하나님을 믿었기에 순종하기로 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모든 것을 이해하고 확실한 것을 보았기에 행동했다고 되어 있지 않습니다. 믿음은 단지 바라는 것이고, 아직 보지 못한 것입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라는 말에 저는 이렇게 덧붙이고 싶습니다. “끝까지”
 순종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늘 경청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도널드 맥컬로우는 [빛나는 인격]이라는 책에서 경청하기의 중요성에 대하여 말합니다. 경청하는 법 배우기에서 경청하려면 마음을 열고 상대방의 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하면서 루스벨트 대통령의 예를 들었습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한 번은 무도회에 참석하여 특유의 환한 웃음을 지으며 사람들과 악수를 하고 의례적인 인사말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차츰 지겨워진 그는 어차피 아무도 듣지 않을 것이란 생각에 만나는 사람마다 “전 오늘 아침에 할머니를 죽였어요.”라고 인사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하나같이 “대단하십니다!”, “정말 정이 많으세요!”, “앞으로도 그렇게 하세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귀를 기울였던 한 외교관은 제대로 알아듣고 그에게 귓속말로 이렇게 속삭였습니다. “할머니께서 죽을 짓을 하셨겠죠.” 경청해야 제대로 반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하지 않는 예배는 순종할 마음이 없다는 형식일 뿐입니다.

 

시 51:17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호 6: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예수가좋다오

출처 : ╋예수가좋다오
글쓴이 : (一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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