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는 심령을 깨워라 (막 5:21-25, 35-43)
21. 예수께서 배를 타시고 다시 맞은편으로 건너가시니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이거늘 이에 바닷가에 계시더니 22. 회당장 중의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발아래 엎드리어 23. 간곡히 구하여 이르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 하거늘 24. 이에 그와 함께 가실새 큰 무리가 따라가며 에워싸 밀더라 25.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아 온 한 여자가 있어 - 35. 아직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회당장에게 이르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36.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 37.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 외에 아무도 따라옴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38. 회당장의 집에 함께 가사 떠드는 것과 사람들이 울며 심히 통곡함을 보시고 39. 들어가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떠들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40. 그들이 비웃더라 예수께서 그들을 다 내보내신 후에 아이의 부모와 또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을 데리시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가사 41.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이르시되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하심이라 42.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 나이가 열두 살이라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 43. 예수께서 이 일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고 그들을 많이 경계하시고 이에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라
이 시간 “자는 심령을 깨워라.”라는 제목으로 말씀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시작부터 조금은 딱딱한 이야기지만 17세기 유럽에서 일어난 합리주의 운동으로 인간의 이성의 힘을 낙관하여 모순된 현실의 사회제도를 개조하려는 운동이 일어났는데 이를 가리켜 계몽주의 운동라고 합니다. 계몽(啓蒙)이란 ‘지식수준이 낮거나 의식이 덜 깬 사람들을 깨우쳐 준다.’는 의미의 글자대로라면 좋은 의미입니다.
그러나 당시 계몽주의가 과학발전에는 많은 공헌을 했지만 함부로 이성을 가지고 성경을 비판하고 자연신론이나 유물론 무신론 등을 탄생시켰기 때문에 카톨릭의 부패로 말미암아 가뜩이나 영적으로 어두운 시대를 더욱 어둡게 만들어 갈팡질팡하게 한 암흑의 주인공이었습니다.
이런 어두운 시대가 약 100년간 지속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프로이센의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를 보내셔서 그 유명한 ‘순수이성비판’을 통해서 인간의 이성이 최고 존재에 대한 탐구를 착수할 만한 능력을 갖고 있는지의 여부에 대해 강한 비판을 제기함으로 철학자들의 낯을 뜨겁게 만들어 좌충우돌의 계몽주의의 막을 내리게 했습니다.
계몽주의가 꿈꾸는 세상, 그래서 진정 세상을 좀 더 밝게 산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진정한 계몽운동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오늘 읽은 본문 말씀이 말해줍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가정에 짙은 어둠이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어린 딸이 병들어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집에 가셔서 아이의 손을 잡아 기적적으로 살리심으로 통곡하며 우는 그 어두운 집을 밝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야이로가 누굽니까? 유대 회당의 한 회당장인데 주목할 것은 성경은 그의 이름을 유독 강조하고 있습니다. 22절에 “회당장 중의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성경의 생략기법은 놀라울 정도인데 여기서는 그 이름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그 의미가 무엇이기에 그랬을까요?
학자들 중에는 “야이로”는 ‘그는 빛난다.’는 의미의 “야일”에서 온 말이라. 혹은 ‘깨어나다’는 히브리어 “야이르”에서 근거한 이름이라는 등의 주장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두 단어는 의미상으로는 비슷한 말로 야이로라는 이름은 빛을 비쳐주고 깨워주는 “계몽”이라는 말로 의역해도 가능한 단어입니다.
이처럼 야이로는 그의 믿음으로 예수님을 모시고 어둠에 쌓인 그의 가정을 밝게 한 진정한 계몽인이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육신이나 과학에서만 아니라 영적으로 진정 아버지의 사랑 안에서, 예수 안에서, 성령 안에서 진정한 계몽시대가 오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서 엡5:14에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추이시리라 하셨느니라.” 했습니다.
사11:9에도 “그 때에 -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했고, 렘31:34에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르쳐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알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우리 심령을 깨우는 성령의 계몽은 어떻게 오는 것일까요?
1. 준비된 예배가 심령을 깨웁니다.
21절 “예수께서 배를 타시고 다시 맞은편으로 건너가시니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이거늘 이에 바닷가에 계시더니” 여기 예수님께서 바닷가에 계셨는데 그것은 해안의 경사진 지형을 이용하여 말씀을 가르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수천수만의 무리들이 모여들어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지형을 잘 준비해 두셨습니다. 그러니까 바닷가는 바로 강단입니다. 즉 교회라는 말입니다.
바로 이런 배경 하에서 오늘 사건을 이해해야 합니다. 이처럼 진정한 심령의 계몽은 예배를 통해서 일어납니다. 예배 잘 드려야 합니다. 가인의 예배가 아니라 아벨의 예배와 같이 하나님 앞에 보혈과 화목과 전심을 다해 신령과 진정으로 드릴 때 하나님께서 열납하시고 성령을 부어주십니다. 그러므로 예배가 사도행전의 초대교회로 돌아가기를 힘써야 하겠습니다. 더 준비된 예배, 더 영광 돌리는 예배, 더 뜨거운 예배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2. 쉬지 않는 기도가 심령을 깨웁니다.
22-23절 “회당장 중의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발아래 엎드리어 간곡히 구하여 이르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 하거늘”
유대의 회당장이라면 바리새인입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주님이 화를 선언하실 만큼 외식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날마다 성경을 보고 예수님의 메시아 되심의 표적을 보고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아무리 봐도 예수 믿을 것 같지 않는 사람인데 그가 예수님께 나아와 엎드려 절하고 간곡히 간구하여 죽은 딸을 살렸습니다.
이런 바리새인이 누굽니까? 그것은 바로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생활의 변화를 모르는 완악한 우리들입니다. 말씀만 따먹지 은혜 속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속지 않습니다. 그래서 간곡하게 만드십니다.
회당장 야이로가 위기를 만났습니다. 사랑하는 어린 딸이 병들어 죽어가고 있습니다. 본문의 “어린 딸” ‘뒤가트리온’이라는 낱말은 딸에 대한 사랑과 강한 애정을 보여주는 용어입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사랑하는 딸이 죽어가니 그 아버지의 마음이 오죽 하겠습니까?
그래서 주님을 찾아갔습니다. 자기 신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의 핍박, 역시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주님을 괴롭힌다는 미안함도, 사람들이 많아 주님 만나기 어렵다는 것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딸을 살려야겠다는 그 일념 뿐 다른 생각은 할 수 없었습니다.
왜 이래야 합니까? 그렇지 아니하면 엎드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영혼을 살리시기 위해서 강제로 기도의 광장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눅 18장에 나오는 원한 맺힌 과부와 같이 날마다 하나님 앞에 부르짖고 기도하게 하신 이유는 그래야 이 말세에 참된 믿음을 지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눅18:8에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말세에 살 방법은 믿음밖엔 없는데, 그 믿음마저 세상에서 보기조차 어렵다 하시니 얼마나 충격적인 말씀입니까? 그러나 원수에 대한 원한 맺힌 과부와 같이 하나님 앞에 부르짖는 그런 믿음을 가지면 하나님께서 성령을 주셔서 믿음 지키고 사명 감당할 수 있다고 힌트해 주시고 계십니다. 이 거룩한 한을 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간곡한 기도생활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야 성령을 부어주십니다.
이처럼 날마다 예배해 보세요. 열심히 하나님을 경외해 보세요. 그러면 죽어가던 우리 심령이 살아납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살 것 같지 않던 우리 심령이 살아납니다. 행복해집니다. 강해집니다. 변화됩니다. 소생합니다. 그러므로 살려면 예수 앞에 엎드리세요. 이상한 다른 방법으로 받으려니까 못 받거나 잘못됩니다. 그래서 렘2:19에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를 버림과 네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인 줄 알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진정 살려면 형식적 믿음에서 탈피하여 초대교인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3. 시험을 이기는 강한 믿음이 심령을 깨웁니다.
24-25절 “이에 그와 함께 가실새 큰 무리가 따라가며 에워싸 밀더라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아 온 한 여자가 있어” 아이는 죽어 가는데 상황은 악해만 갑니다. 사람들에게 떠밀려 보행조차 어렵습니다. 더구나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은 한 여자가 있어 시간을 지체합니다. 야이로의 입장에서 보면 가슴 터지는 순간입니다. 열두 해나 혈루증으로 앓았다면 곧 죽을병도 아닌데 분초를 다투는 일을 가로막다니 답답한 일입니다. 그래도 실망치 않았습니다.
이처럼 금방 은혜 받지 못한다고 실망하지 말고 하나님 경외함을 계속하시기 바랍니다. 수증기가 올라가 비가 되는 것처럼 우리의 기도가 올라가면 쏟아질 날이 옵니다. 물이 100도에서 끓지 50도에서 끓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신앙의 도수와 골격이 완전히 잡힐 때까지 계속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롬5:3-4에 "이 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믿음의 분량이 차기를 기다리십니다. 그래서 렘29:12-13에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하셨고, 신4:29에도 “만일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그를 찾으면 만나리라.” 하셨습니다. 실망하지 말고 온전한 믿음에 도달하시기 바랍니다.
4. 하나님의 말씀이 심령을 깨웁니다.
35절 “아직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회당장에게 이르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야이로에게 비보가 날아왔습니다. 완전히 절망적인 순간입니다. 그 때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하셨습니다.
이 때 야이로는 비보보다 예수님의 말씀을 더 믿었습니다. 믿음이 좋아서라기보다 딸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주님의 말씀을 더 믿고 싶었을 것입니다. 집에 도착하니 통곡소리가 들립니다. 아이가 호흡을 멈추고 창백한 모습으로 누워 있습니다. 그래도 딸을 사랑하기에 그 사실을 믿고 싶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주님의 말씀에 기대었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믿음 좋은 수제자들만 데리시고 아이에게 다가 가셔서 손을 잡고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하심이라” 그랬더니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걷자 예수님은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하셨습니다. 아마도 살아나자 말자 먹을 것부터 찾았나 봅니다. 놀라운 기적이었습니다.
이렇게 말씀에 끝까지 서고 또 말씀을 계속 드시라는 교훈입니다. 말씀에 배고파 하세요. 그래서 시1:2-3에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했습니다.
그런데 성경 기록을 보세요. 살리기 전에는 어린 딸이라 했는데 살린 후에는 열두 살이라 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12살은 성인입니다. 남자아이는 만 13세에 여자아이는 만 12세에 성인식을 치룬다고 합니다. 이처럼 말씀에 서야 장성한 신앙입니다. 그러기 전에는 어린이입니다. 그래서 엡4:14에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했습니다.
회당장 야이로가 말씀이냐? 비보냐?, 말씀이냐? 현실이냐?, 말씀이냐? 분위기냐? 갈레 길에서 말씀을 택한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견고히 서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날마다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성경을 외우면 더욱 폭발적입니다. 한 구절이라도 수백 번이고 외우시기 바랍니다. 거기에서 놀라운 영적 부흥이 일어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 죽은 심령들이 잠자는 데서 깨어 살아나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회당장 야이로처럼 내 영혼이 살아야겠다는 뜨거운 일념으로 체면도 나이도 연약함도 무엇도 다 잊어버리고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모두 예배운동, 기도생활, 강한 믿음, 하나님 말씀 등으로 다가오는 놀라운 심령의 부흥을 체험하여 어둠을 벗고 하나님의 밝은 빛 아래서 우리 심령이 깨여나는 진정한 영의 계몽이 함께하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한성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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