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합니까?
박상돈목사
참 난감합니다.
그저 읽으면 될 일이지 성경 읽는데 왕도가 있습니까?
닥치는 대로 읽기만 하면 된다고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성경 다독증에 걸린 사람들이지요.
그래도 그들은 괜찮습니다.
다른 책이 아니라 성경을 부지런히 읽겠다는 열정이 있으니 말입니다.
물론 공로주의 사고를 지닌 분들이 그중에 있다는 것이 문제이지요.
부지런히 성경을 읽는다면 칭찬할 일입니다.
그래도 성경을 읽을 바엔 효과적인 방법은 없을까 고민할 필요는 있습니다.
맨 손으로 물고기를 잡기가 어디 쉽습니까?
그런데 그물이 있다면 어떨까요?
아마도 상당히 수월할 것입니다.
이것을 확대해 보십시오.
점점 더 도구들이 첨가될수록 고기잡이는 생산적일 것입니다.
이를 성경읽기에 적용해 보십시오.
막무가내 식으로 성경을 읽는 것은 물론 읽지 않는 것보다 훨씬 좋습니다.
기왕이면 다홍치마란 말도 있지 않습니까?
성경을 읽되 효과적으로 읽는 방법은 없겠냐는 것이지요.
성경은 분명 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책 읽는 방법이 어느 정도는 통용이 됩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책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영안이 열려야만 이해가 됩니다.
읽는다고 이해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보기는 보아도, 듣기는 들어도 알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묘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지식인을 무식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반대로 일자무식의 사람도 영으로 깨달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이지요.
조금 고상하게 말하자면 성령님의 조명, 곧 이끄심이지요.
성령님의 내적 조명이 있기에 하나님의 말씀이 이해가 됩니다.
영적 분별력이 생깁니다.
그러므로 성경 읽기의 첫걸음은 분명 성령님의 조명입니다.
성령님께 조용히 내어 맡기는 의존이 필요합니다.
내적 조명은 필수입니다.
이 필수를 선행조건으로 해 두고 성경 읽기의 방법을 말하려고 합니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인내심을 필요로 합니다.
몇 시간에 독파할 책이 아니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성경이 그저 재미있는 책은 아닙니다.
분명 기쁨이 있고 희열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의 마음을 조여 옵니다.
우리의 연약함이 적나라하게 폭로됩니다.
솔직히 성경 읽기가 두렵습니다.
그래도 그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그 용기는 믿음에 기초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놀라운 은총에 기대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의존할 때에 용기가 생깁니다.
성경은 분명 신앙의 책입니다.
신앙의 눈으로 볼 때만이 그 길이 열리는 이상한 책입니다.
그렇다고 이상한 언어로 기록된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언어로 기록되었습니다.
그래서 누구라도 읽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누구라도 믿음이 없으면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으로 읽어야 한다는 것도 생략하려고 합니다.
순전히 세상의 책 읽는 방법을 떠올려 보십시오.
책을 잘 읽으려면 그 줄거리를 잘 요약할 줄 알아야 합니다.
줄거리의 요약이 책 읽기의 중요 포인트입니다.
중심주제가 무엇인지 알고 읽어나간다면 수월하겠지요.
그래서 어느 책이라도 저자의 말은 중요한 포인트가 됩니다.
보통은 저자의 말 속에 저술의 목적과 방향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목차입니다.
목차를 보면 저자의 의도가 엿보입니다.
가장 보편적인 책 읽기의 방법을 성경에 적용해 봅시다.
물론 선결과제는 남아 있습니다.
성경의 저자에 관한 것이지요.
우리야 당연히 하나님께서 참 저자이심을 믿습니다.
그러나 또 하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하여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기록자들은 단순히 기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적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록자들의 삶을 그대로 인정하셨습니다.
기록자의 문체나 사상이나 생활습관들이 배어 있습니다.
기록자들마다 언어 사용의 방식이 다릅니다.
성경에는 기록자의 생생한 삶이 노출되어 나타납니다.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는 것이 영감설의 문제입니다.
같은 말도 누가 사용하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집니다.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에릭 프롬(E. Fromm)과 폴 틸리히(P. Tillich)의 언어 사용 방식입니다.
두 사람은 모두 20세기의 거장들입니다.
프롬은 사회심리학자로서 한 획을 그은 분입니다.
틸리히는 신학자로서 탁월한 명성을 남긴 분입니다.
두 사람 모두 종교적 언어에 익숙합니다.
힘, 혹은 권력은 선과 악의 두 측면이 있습니다.
선의의 힘도 있지만 악마적인 힘도 있습니다.
틸리히는 성도가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영적 능력을 “power"로 표현합니다.
"force"는 마성적 능력을 가리키지요.
따라서 "power"는 건설적이고 반면 ”force"는 파괴적인 힘입니다.
그런데 프롬은 틸리히와는 정반대로 이 용어들을 사용합니다.
“force"가 건설적이고 창의적이며 ‘power"는 공격적이고 파괴적인 능력입니다.
결국 동일한 단어지만 사용하는 학자의 성향에 따라 그 의미도 달라집니다.
기록자에 따른 표현방식의 차이점과 문체상의 특이성을 어떻게 고려해야 합니까?
이런 문제를 다루는 것이 성경 기록방식의 다양성과 통일성의 과제입니다.
감사하게도 이런 골치 아픈 문제는 탁월한 신학자들에게 맡겨두면 됩니다.
우리는 그 열매만 받아먹으면 되는 것이지요.
물론 공짜 생각을 하면 곤란하겠지요.
신학자를 위해 기도하고 후원하는 일이 우리의 몫이라고 하면 어떨까요?
(지극히 개인적인 소견을 말하는 것을 용서하십시오.
교회가 정상적이라면 당연히 신학자를 위한 배려의 공간이 있어야 합니다.
신학자를 위해 후원하고 연구에 전념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 배려의 방법이야 잘 아실 터이니 생략합니다.)
정리해 봅시다.
성경의 저자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기록자를 통해 말씀을 전하십니다.
기록자들은 시대도 다르고 교육의 수준도 다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감동을 주셨습니다.
이것을 영감이라고도 하지요.
성경에 관한 바울의 말을 들어볼까요?
디모데에게 보낸 두 번째 편지입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 3:16)
하나님께서 예언을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성경은 기록자의 사상과 생활습관이 노출된 책입니다.
성경의 저자만큼이나 문체상의 다양성이 나타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다양성을 하나로 묶는 통일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사람의 글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 일관되게 흐르는 내적 주제를 통일성이라 부릅니다.
성경의 다양성과 통일성을 간결하게 정의해준 말씀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의 요약입니다.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히 1:1-2)
자, 중요한 것은 책의 줄거리를 제대로 파악하는 일입니다.
이 문제에 접근하기 위해 지난 주에 소개한 두 성경구절을 확인해 봅시다.
요한복음과 고린도후서의 말씀입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요 5:39)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하지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 같이 아니하노라.
그러나 그들의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벗겨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그 마음을 덮었도다.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고후 3:13-16)
오늘의 과제는 “어떻게 구약을 읽을 것인가”입니다.
구약이 무엇입니까?
아니 구약이란 말이 무엇입니까?
도대체 구약이란 말을 누가 먼저 사용한 것입니까?
그 힌트가 앞의 구절에 나와 있습니다.
적어도 문헌상으로 구약이란 말은 바울에 의해 사용되었음을 봅니다.
고린도후서는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자연스럽게 구약이란 단어를 사용한 것을 보십시오.
이는 바울이 고린도에서 이 말을 자주 사용했음을 암시합니다.
구약이란 “옛 언약”을 말합니다.
“옛 언약”이란 “새 언약”에 대칭을 이루는 말입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새 언약은 옛 언약의 대체가 아닙니다.
새 언약과 옛 언약의 관계는 대체가 아닌 완성의 의미입니다.
따라서 옛 언약과 새 언약은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옛 언약과 새 언약은 언약의 연속성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어떤 이들은 신약은 완결된 언약이라 여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구약은 폐기 처분해야 할 옛 것으로 치부합니다.
그러나 구약이 없는 신약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물론 신약이 없는 구약도 무의미합니다.
신약은 구약 안에서 꽃을 피웁니다.
신약은 구약의 토대 위에 세워진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제법 규모가 큰 모 교회의 목사와 담론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 분은 자랑스럽게 목회하는 동안 신약만 설교했다고 말했습니다.
그 분은 지금도 복음서만 설교하고 계십니다.
대단한 자부심입니다.
그러나 성도가 불쌍하단 생각이 듭니다.
신약만 먹였으니 영양실조가 분명합니다.
하긴 어느 성도에게 성경 읽으라고 하니까 이렇게 말하네요.
“목사님, 저 다이어트 중이에요.”
다이어트 할 것이 없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다이어트 합니까?
말씀을 안 먹고 어떻게 건강한 성도의 삶을 기대할 수 있습니까?
다이어트만큼이나 치명적인 것이 편식 아니겠습니까?
구약을 모른다고 하면 차라리 낫습니다.
구약에 대한 편향적 평가는 곤란합니다.
신약 중심으로 지나치게 치우친 경향은 괴롭습니다.
구약 외면이 무지의 결과가 아니길 바랄 뿐입니다.
신약은 알고 보면 구약의 보고입니다.
신약은 온통 구약의 이야기로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약을 안다는 것은 신약을 더욱 생동감 있게 만듭니다.
구약을 아는 만큼 신약의 영적 깊이는 깊어집니다.
물론 그 너비와 폭도 정비례하겠지요.
구약을 알면 알수록 신약의 맛이 새롭게 됩니다.
그렇다면 구약을 어떻게 보아야 합니까?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뭐라고 말합니까?
모세의 글을 읽으려면 수건을 벗겨야 한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비유를 통해 수건을 벗겨야 한다고 말합니다.
수건으로 눈을 가렸으니 제대로 글을 읽을 수는 없겠지요.
수건을 벗겨내야 하나님의 말씀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벗겨냄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바울은 예수님께로 돌아가야 벗겨진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아주 중요한 힌트입니다.
구약을, 더 나아가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할 것인가를 일러준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이것을 전문적 용어로 “구속사에 따른 이해”라 말합니다.
“구속사적 (성경)해석”이라고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과 나눈 대화를 보십시오.
유대인들은 성경 읽기의 가장 나쁜 예입니다.
유대인들은 부지런히 성경을 연구합니다.
그 연구의 목적 또한 그럴 듯 해 보입니다.
그들은 성경을 “영생을 얻는 길”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영생 얻기 위해 부지런히 성경을 연구합니다.
유대인들만큼 성경을 연구하는 집단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들은 부지런히 성경을 연구하고 묵상합니다.
그런데 그들을 향해 예수님께서 무엇이라 말씀합니까?
“그러나 그의 글도 믿지 아니하거든 어찌 내 말을 믿겠느냐 하시니라.”(요 5:47)
예수님께서 일러주신 성경의 용도가 무엇입니까?
성경은 예수님에 대한 증거의 책입니다.
예수님을 증언하는 것이 성경입니다.
이 역시 구속사의 입장에서 성경을 볼 것을 가르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과 바울의 가르침 속에서 구약을 읽는 방법이 보입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구약성경의 중심이 예수님임을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거꾸로 신약의 관점에서 구약을 접근하면 됩니다.
모범답안을 갖고 문제에 접근한다는 것이지요.
공부를 잘하기 위해선 무엇보다도 문제를 많이 풀어보아야 합니다.
그것도 정답을 풀어야 합니다.
문제를 하나하나 풀어보는 것이 일반적 방식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부족할 때에 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겠습니까?
아예 답을 다 맞춰놓고 그 문제를 읽어보는 것입니다.
제가 구약을 읽는 방법으로 제안하려는 것이 이것입니다.
구약이 문제라면 신약은 답입니다.
그러므로 신약의 답을 갖고 구약의 문제를 확인해 보는 것이지요.
예수님이 메시야입니다.
그렇다면 구약은 메시야를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그 의미와 역사 속에 나타난 메시야의 예표는 무엇입니까?
이런 질문들을 통해 구약의 주제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답을 통해 문제를 보고 읽는 방식으로 구약을 접근하십시오.
구약을 통해 신약을 보듯이 신약을 통해 구약을 볼 수도 있어야 합니다.
신약의 답으로 구약의 문제를 풀어보십시오.
구속사의 관점에서 구약을 읽으란 뜻입니다.
이것보다 더 안전하고 확실한 방법이 없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신약의 눈으로 구약을 읽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구약의 눈으로 신약을 읽어야 되겠지요.
'성경 상식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스크랩] 성경 통독을 즐겁게 하는 11가지 리딩 포인트 (0) | 2017.01.18 |
|---|---|
| [스크랩] 성경을 효과적으로 읽는 방법 (0) | 2017.01.18 |
| [스크랩] 성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3] (0) | 2017.01.18 |
| [스크랩] 성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2] (0) | 2017.01.18 |
| [스크랩] 성경은 어떻게 읽을 것인가?[1] (0) | 2017.01.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