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높은 곳을 향하여(창17장1-14)
출 처|홍정길목사
일반적으로 인생을 살아가면서 세번의 큰 변화를 겪습니다.
평생을 변화없이 일직선으로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의 생애는 극적으로 변화되어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삶을 살기도 합니다.
대부분의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은 이 두번째 단계, 평상적인 자유인의 삶에서 하나님을 아는 새로운 인생으로 바뀌어 살아가기는 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내 생애를 향해서 베푸신 놀라운 계획과 신묘막측한 인도하심에 자기 인생 전체를 맡기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사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그것은 믿음의 사람, 아브람의 생애에 있어서도 사실이었습니다.
아브람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갈대아 우르를 떠났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지시한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복을 주고 복의 근원을 삼겠다. 내가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네 후손을 이 땅에 편만케 채우겠다. 동서남북 사방을 살펴봐라. 그 모든 지경을 내가 너에게 주겠다’
그랬지만 아브람 가정에 자녀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브람이 하나님께 제안합니다.
"하나님, 내게 후사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았기 때문에 저는 다메섹의 엘리에셀이라는 조카를 데려다가 양자를 삼아 하나님의 뜻을 이루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합니다.“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다”
그러자 사라는 그 때 당시의 풍습을 따라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한 가지를 제안했습니다.
“똑같은 조건을 갖춘다면 내 몸에서 난 아이나 내 여종 하갈에게서 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하갈을 취해서 이 땅에 당신의 아이를 만들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룹시다.”
그 말을 좋게 여겨 아브람은 하갈을 취해서 아이를 낳았습니다.
아이가 잉태하자 하갈은 교만해졌습니다.
그래서 지금껏 자기 상전이었던 여주인 사래를 능멸합니다.
화가 머리 끝까지 난 사래는 남편을 닥달해 하갈을 잔인하게 학대해서 쫓아냈습니다.
하갈은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나 사래의 권위 아래 겸손하게 살 것을 명령받고 하나님의 축복을 가슴에 안고 돌아왔습니다.
드디어 하나님께서 그 집에 아이를 주십니다.
창세기 16장 16절입니다.“하갈이 아브람에게 이스마엘을 낳을 때에 아브람이 팔십 륙세이었더라”86세입니다.
아브람의 생애가 75세에 부름받아서 86세에 이르기까지, 창세기 12장부터 16장까지 계속 사건의 연속이었습니다. 11년 동안 이루어진 일입니다.
그런데 17장 1절을 보니까 갑자기 아브람의 나이가 99세로 껑충 뛰어넘습니다.
“아브람의 구십구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고 합니다.
86세에서 갑자기 99세로 뛰었습니다.
75세에서 86세까지 11년 동안은 많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의 믿음의 진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86세에서 99세까지 13년 동안에는 아무 기록이 없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아브람은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후손을 주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잊은채, 지금 자기 눈 앞에 있는 이 아들에게만 몰두해 있습니다.
늦동이를 둔 부모들은 자식을 무척 좋아합니다.
후배 중에 미국에서 학위 받아 가지고 와 대학 강단에 섰는데 서른 아홉살이 되도록 결혼을 못한 후배가 있었습니다.
여러 친구들이 수소문을 해서 배우자를 찾았는데 결국 두 살 아래의 대학 교수와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3년이 지나도 아이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부부가 하나님께서 아이를 안주실 수도 있다고 생각하며 그리스도인으로서 모범적으로 자녀 없이도 잘 사는 가정이 되자고 약속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결혼한지 5년 만에 아이가 생겼습니다.
남편이 45세이고 부인이 43세 때입니다.
아이 낳고 얼마나 좋아하는지 모릅니다.
세상에 자기만 아이 낳아본 것처럼 폼을 잡습니다.
100일이 되어 사진관에 가서 100일 사진을 찍으려고 하니 박사학위 받는 동안 머리가 다 빠진 이 친구를 보며 사진사가 “할아버지, 아이의 아빠, 엄마는 언제 오느냐?”고 묻더랍니다.
그러니 83세가 된 아브람이 늦게 본 아들을 얼마나 좋아했겠습니까?
이 아이 때문에 초반에는 어려움이 있었지만 이제 하갈은 자기 본 위치에 서서 여주인 사래의 권위아래 충성스럽고 겸손하게 순종합니다.
만사가 태평합니다.
그런데 이 시기에는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만났다는 기록이 한번도 없습니다.
그 전 11년 동안 날마다 함께 하시고 축복하셨던 그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졌단 말입니다.
아브람은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렸을 것입니다.
아브람은 나름대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착한 일도 많이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눈이 이 아이에게로 쏟아진 채 자신을 축복하고 인도하신 하나님을 향해 그의 눈이 열려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되기 쉽습니다.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를 누리면 우리는 그 하나님의 은헤와 축복만 바라보고 하나님께서 내 생애를 향해서 가지신 놀라운 계획과 축복에 대해서 무관심할 수 있습니다.
이미 주신 것만을 보고‘여기가 좋사오니’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거룩한 눈으로 볼 때에는 도무지 아무 가치가 없는 생애, 많은 사건이 있었지만 하나님 눈에는 아무 사건도 아닌, 성경에 기록한다면 잘 태어나서 잘 먹고 잘 자다 잘 죽었다고 그 한평생이 이 네 마디로 요약된 의미없는 생애로 갑니다.
하나님 눈 앞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생존, 동물도 그렇게 살 수 있는 삶으로 우리의 생애는 지나가고 있습니다.
모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시90:10)
하나님과의 만남이 없으면 우리 삶에 진정한 역사는 없습니다.
진정한 삶의 가치와 의미가 없습니다.
아브람은 눈 앞에 보이는 아이에게 마음이 뺏겨서 하나님이 자기 생애를 향해 부르신 약속을 잊었습니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 다른 것 다 안주셔도 좋습니다. 하늘의 별, 바다의 모래가 아니어도 좋습니다. 여기 있는 이스마엘이면 족합니다. 또 나이가 들어서 아이를 낳을 수도 없지 않습니까?”
점점 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서 둔감해지고 있었습니다.
이 때 우리 하나님께서는 이런 아브람을 심방하십니다.
17장 1절에“아브람의 구십구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이 구절을 원문으로 해석하면 “아브람에게 찾아오셨으매”입니다.
위에서부터 내려오셨다고 히브리 말은 기록되어 있습니다.
후에 22절을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그를 떠나 올라가셨더라”합니다. 찾아서 내려오신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올라가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생애를 위해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에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기록입니다.
성경의 주어는 하나님입니다.
성경에 씌인 단어 중에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가장 많습니다.
그 모든 하나님에 관한 기록을 줄이고 줄여보면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그 사랑이신 하나님은 인생을 향해 놀라운 계획을 가지셨다’는 말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아브람에게 하나님은 놀라운 계획을 가졌습니다.
그럼에도 아브람은 하나님을 따르는 평안, 하나님을 따르는 기쁨, 하나님께서 주신 이스마엘에만 만족했지 하나님께서 자기 생애에 놀라운 계획을 가진 것에 대해서는 외면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찾아오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 너는 내 앞에 행하여 완전하라. 아브람아, 너는 왜 내가 준 조그만 축복에만 만족하고 있느냐?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 네 몸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 못할 것 같으냐? 지금 그 아이로 네 마음이 만족하느냐? 나와 시선을 마주쳐라. 너는 네 아들 이스마엘만 보지 말아라. 네 눈을 들어 너를 사랑하는 하나님을 바라보아라. 네가 바라보는 하나님은 전능한 하나님이다. 그리고 나를 보면서 내가 너를 부른 그 완전함으로 네 인생의 행보를 바꾸어라”
하나님께서 오늘 이 시간 나를 향해 그렇게 말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내가 너를 위해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있다. 네가 너 자신을 사랑하는 것 보다 내가 너를 더 사랑하고, 네가 너를 염려하고 걱정하는 것 보다 내가 너를 더 염려하고, 네가 네 인생을 향해서 계획을 가진 것 보다 나는 너를 향해 더 완전한 계획을 가지고 있다. 네 눈을 들어 나를 보아라. 그리고 내가 너를 이끌고자 하는 영광스러운 땅을 향해 함께 가자’
아브람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과거에 주셨던 번성케하겠다는 약속을 다시 상기시킵니다.
이 약속은 너와 나 사이에 약속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내가 너에게 약속을 주었다고 말합니다.
너는 내 약속의 상대가 아니라고, 너는 그 약속을 감당할 능력이 없기에 내가 내 존재를 걸고 그것을 이루리라고 약속했다고 말씀합니다.
마치 어린 아이가 태어나면 아빠, 엄마는 그 아이가 도무지 그 의미를 모를 때부터 스스로 약속하면서 자녀를 휼륭하게 키우리라고, 이렇게 교육시키리라고, 자녀가 살아가는데 이런 뒷받침을 하겠다고 맹세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아브람게 이런 놀라운 약속을 하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말씀합니다.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않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로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함이니라”
“아브람”이라는 말은 ‘존귀한 아버지’라는 말입니다. 아브라함은‘열국의 아버지, 모든 나라의 아버지’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이름을 바꿔주셨습니다.
‘내가 너에게 약속했다. 존귀한 것으로 만족할 것이냐? 이름을 바꾸어라. 너는 열국의 아비다. 모든 족속의 아버지가 되리라’
우리 교회 김의정 선교사가 아이를 낳았는데 첫째부터 셋째까지 딸을 낳고서 이제는 절대로 아이를 안낳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또 네번째 임신을 해서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 이름을 재밌게 지었습니다.
‘부열’이라고 지었습니다. 아비 부(父), 열국 열(列)입니다.
이 이름이 아브라함입니다.
부열이는 김의정 선교사가 지은 것이고 여기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은 하나님이 지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름을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윌리엄 세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쥴리엣>에서 두 주인공이 사랑을 속삭이면서 이런 대화를 합니다. 로미오가 장미꽃을 선사하면서 “아마 이 장미꽃은 장미라는 이름이 없었어도 이 아름다움과 향기는 있었을 것이다”
사랑하는 연인들에게는 무엇이든지 아름답습니다.
그러므로 실재하는 것에 어떤 이름을 붙여도 상관이 없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부르시면 부름이 됩니다.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 명령하니 빛이 있었습니다.
아무 것도 없는 곳에 천지를 불렀더니 천지가 그 앞에 옵니다.
아담을 불렀더니 아담이 옵니다.
그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합니다.
“너는 아브라함이라, 열국의 아비라. 내가 너에게 약속했지 않느냐? 네 후손은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편만할 것이고 내가 약속한 이 모든 땅을 너에게 주리라. 너는 지금처럼 살아서는 안된다. 네 생애가 바꾸어져야 된다. 네 이름은 열국의 아비다. 내가 불렀다. 내가 부른대로 된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부르신 그대로 되었습니다.
그에게서 아랍 족속이 태어났습니다.
이스마엘의 후예입니다.
그리고 아랍인들과 함께 살고 있는 무슬렘 12억이 아브라함을 자신의 선조라고 합니다.
두번째로 하나님께서 이삭을 허락해주셨습니다.
이 후손들이 유태인으로 온 세상에 흩어져 살고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아브라함의 후예가 또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의 후사들입니다.
예수 믿는 이 땅의 15억도 넘는 크리스챤들의 숫자입니다.
그러니까 60억 인구 가운데 반수 이상이 자신의 조상을 아브라함이라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부르시매 아브라함은 열국의 아비가 되었습니다.
그가 별로 한 일이 없지만 세상에 아브라함보다 더 큰 이름은 없습니다.
그는 성을 짓지도 않았습니다.
큰 땅을 정복하지도 않았습니다.
큰 땅을 정복하기는 커녕 자기가 죽어서 묻힐 한 평 밖에 안되는 막벨라 굴을 무덤으로 소유한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의 눈 앞에는 아들 하나와 약속된 손자 둘 외에는 후손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부르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그의 후손이 지금은 온 세계에 차고 넘칩니다.
우리 하나님은 말씀대로 이루시는 전능한 하나님입니다.
2천년 후였습니다.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잡는 젊은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 아버지는 요한이고 그의 이름은 시몬이었습니다.
이 친구는 변덕이 많은 친구였습니다.
그런가하면 이 친구는 수완이 좋아 동료 사이에서도 우두머리 노릇을 했습니다.
20대 후반되는 어느날 자기 동생에게 이끌려 나사렛 사람 목수의 아들 예수를 만납니다.
그는 그 후에도 고기를 잡으러 나갑니다.
고기를 잡으려고 해도 잡히지 않아 허탈하게 그물을 손질하고 있을 때였는데, 목수의 아들 예수가 자기에게로 오더니 명령합니다.
“깊은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라”(눅5:4)
그는 감짝 놀랐습니다.
그는 자기도 형용하거나 상상할 수 없는 이상한 힘에 이끌려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내립니다.
자기 상식과 정반대였습니다.
낮에는 고기가 잡히지도 않을 뿐더러 더우기 깊은 곳에서는 고기가 잘 잡히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는 말합니다.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눅5:5)
그가 그 분의 말씀 따라 그물을 내렸는데 끌어올리니까 잡은 것이 얼마나 많던지 그물이 찢어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자기 배 뿐 아니라 이웃 배까지 가득 채워서 돌아왔습니다.
돌아오자마자 그는 뛰어내립니다.
그리고 예수께 나와와 말하기를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떠나소서”(눅5:8)
주님은 이 베드로를 부르십니다.
“시몬아 너는 모든 것을 버리고 나를 쫓으라”그는 쫓았습니다.
그 때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는 지금부터 시몬이 아니라 베드로다. 변화무쌍하고 흔들리는 물결 속에 살았던 인생이 아니라 이제는 반석이다”
놀라운 사실은 그 시골 무식쟁이가 하나님께서 그 이름을 반석이라고 주자마자 15억 인구의 신앙의 초석으로 그의 생애가 시작되었습니다.
우리 신앙의 위대한 선조들 가운데 겉보기에는 참 초라한 분들이 계십니다.
이기풍 목사님, 그 분은 깡패였습니다.
그가 선교사의 뺨 따귀를 때리곤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를 맞고도 조금의 흔들림도 없는 평화를 보더니 그 평화 속에서 예수를 만납니다.
이렇게 매를 맞고도 흔들림이 없는 인생을 살고 싶다고 해서 그 분이 신학교에 들어갔고, 제주도에 처음 선교사를 파송할 때 초대 선교사로 갔고, 마지막에는 그의 인생이 순교의 제물로 바쳐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새로 부르신 것입니다.
또 손양원 목사님이 계십니다. 손양원 목사님을 만나면 세번 놀란다고 합니다.
첫째로는 그가 설교를 하러 나타나면 키가 너무 작아서 설교단에 가려 잘 안보인답니다.
제가 손양원 목사님을 뵙지는 못했지만 그 분의 조카가 제 친구입니다.
그 친구가 키가 무척 작습니다.
그 친구가 늘 말하기를 역사상 위대한 인물은 다 키가 작았다고 합니다.
나폴레옹, 등소평, 박정희 대통령, 손양원 목사님도 키가 작았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두번째로 놀라는 점은 소리가 얼마나 우렁찬지 목소리에 놀란답니다.
세번째는 은혜로운 말씀에 놀랍니다.
손양원 목사님의 에피소드 가운데 제일 재밌는 것은 그 분이 강사로 초대받아갈 때 기차에 내리면 너무 초라해서 마중나온 사람들 중 아무도 그 분이 손양원 목사님인줄 모른다는 것입니다.
마중 나와서는 눈을 부릅뜨고 봐도 설마 저분이 그 유명한 손양원 목사님인가 할 정도로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주께서 부르셔서 주님의 뜻 안에서 그의 생애가 펼쳐지니까 그의 삶이 사랑의 원자탄이 되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향해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내 생애를 의미없이 물결치는대로, 바람부는대로 살게 하지 않으시고, 그 삶 속에 끌어내셔서 아브라함을 열국의 아비로 부르시듯이, 손양원 목사님을 사랑의 원자탄으로 부르시듯이 내 인생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멋진 인생으로 부르기를 원하십니다.
나이가 많다고 변명하시는 분 계십니까?
나이가 많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나이가 99세였습니다.
조그마한 성취를 했다고, 적은 아들로 만족하십니까?
하나님은 그 적은 아들로 만족하기를 원하시지 않습니다.
어리다고요?
나는 능력이 없다고요?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 내가 너에게 약속했고 그 약속을 내가 너의 생애를 통해서 이루리라’전능한 하나님을 우리가 너무 조금만 믿고 있지 않습니까?
당신이 믿고 있는 하나님은 너무 초라하지 않습니까?
우리 하나님은 전능한 하나님입니다.
내 한계에 갇혀 살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나를 초대하십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 네 한계를 벗어나서 내가 네게 지시한 인생을 살아라.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된다”
이 전능하신 하나님,
그 분의 부름 앞에 내 생애가 나아가는 복된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가 부르시면 그대로 됩니다.
그가 계획했으면 그가 이루십니다.
그 분은 전능한 나의 아버지입니다.
이 놀라운 은혜가 한계 속에 갇혀 사는 내게 우뢰 소리처럼 들려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생애로 나아가는 복된 시간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홍정길 목사(서울 남서울은혜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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