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사렛 예수의 이름(The Name of Jesus Christ of Nazareth)
사도행전 4:5-12
“이튿날에 관원과 장로와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는데/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예하여/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가로되 백성의 관원과 장로들아/ 만일 병인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얻었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하면/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사도행전은 초대교회의 역사를 기록한 책입니다. 예수님의 승천 후 성령충만한 제자들과 초대교회 성도들은 매일같이 놀라운 역사를 이루어나갔습니다. 불치의 병들이 고침받았고, 엄청난 양적 부흥이 있었고, 그토록 변하기 어려웠던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 변화되는 역사들이 줄을 이었습니다.
우리는 사도행전에 기록된 초대교회의 사건들을 읽을 때마다 가슴 설레는 감동을 받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사도들의 용감한 모습이 과장 없이 그려지고 있습니다.
성전 미문에 앉아서 구걸하던 하체장애인이 고침 받은 사건 때문에 베드로와 요한이 당국자들에 의해 잡혀왔습니다. 당시 절대 권력을 가졌던 당국자들은 사도들의 복음 증거를 못마땅하게 여겼고, 공포분위기를 조성하여 사도들의 활동을 막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욱박질렀습니다.
7절= “...너희가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여기 ‘너희가’(휘메이스)는 ‘너희와 같은 자들이’ 정도로 해석되는 표현입니다. 이들은 사도들을 정당한 심리 과정을 거치기도 전에 이미 인격적으로 무시하고 있었고, 사도들이 행한 기적을 하찮은 것으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라는 표현은 사도들의 기적에 대하여 의혹을 표시하는 말입니다. 당국자들은 이 기적을 하나님의 이름에 근거한 것이 아니고 악신에 근거한 기적으로 매도하고 있는 셈입니다. 마치 예수께서 귀신을 내어쫓으신 것을 빗대어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었다고 매도하던 것과 같은 경우입니다.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은 사실을 알아보기보다 사도들에게 누명을 씌우기에 급급했습니다. 만약 악한 영의 힘을 빌어 이러한 일을 행한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사도들을 사형에 처할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어려운 상황에서 사도들이 보여주었던 용기는 참으로 놀랄만한 것이었습니다. 베드로 사도의 우렁찬 음성을 들어봅시다.
8절=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가로되, 백성의 관원과 장로들아”
9절= “만일 병인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얻었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하면”
10절=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사도의 입을 통하여 최고 공회 앞에서 자랑스럽게 증거된 나사렛 예수의 이름!
지금 사도 베드로는 굳이 ‘나사렛’ 이란 지명을 동원하여 예수님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작은 촌 나사렛은 일반 백성에게 무시당하던 이름이었고, 이 말을 듣고 있는 산헤드린 공회 회원들에게는 멸시의 대상이었습니다. 경건한 사람 나다나엘조차도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고 나사렛 출신을 폄하했습니다.
그런데, 왜 베드로가 나사렛 동네를 들먹이면서 나사렛 예수라고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까?
베드로가 이 이름에서 발견한 것은 무엇입니까? 나사렛 예수의 이름이 어떤 이름이기에 얼마 전까지 겁쟁이 노릇을 했던 베드로가 이처럼 담대하게 이 이름을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까?
1. 병자를 건강하게 한 이름 (적용적 해석: 치유자 예수)
10절=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여기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라는 표현은 베드로 사도가 성전 미문에서 만난 병자를 고치면서 했던 말과 완전히 동일한 말입니다.
행 3:6=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실제로 베드로는 병자의 오른 손을 잡아 일으켰는데, 이 때 사도의 모든 행동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가 병자를 고치는 능력이 있음을 확신하는 믿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나사렛 예수의 이름은 병자를 건강하게 하는 이름이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치유자 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베드로 사도가 이처럼 담대한 용기를 갖게 된 것은 나사렛 예수께서 모든 병을 치유하시는 능력을 가지신 분이라는 믿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내내 사도들은 병 고치시는 예수님의 능력을 마음껏 맛보았습니다. 사도들 스스로 파송받아 병고치는 기적을 행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대속의 사역을 마치시고 부활 승천하셔서 성령을 보내어 주실 때까지 사도들은 용기가 없었습니다. 담력이 모자랐습니다.
그러나 오순절에 보혜사 성령께서 강림하셨고, 제자들이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었을 때, 그들에게는 놀라운 담력이 생겨났습니다.
과거 예수님과 동행하면서 배우고 경험했던 모든 것들이 되살아 났고, 주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의 능력들이 제자들에게 직접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막 16:17=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막 16:18=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사도 베드로에게는 성전 미문의 하체장애인이 말씀 한마디에 벌떡 일어난 것이 큰 일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나사렛 예수의 이름 안에는 이보다 더 큰 능력이 얼마든지 있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산헤드린 공회의 살기등등한 분위기를 깨고 베드로가 목청을 높여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자랑스럽게 공개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이 만병의 치유자이심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또한 사도들처럼 이 이름의 권세를 누릴 수 있는 약속을 받은 자들입니다.
우리 믿는 자들은 예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어야 합니다.
우리 믿는 자들은 새방언을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의 복음을 증거하다가 뱀에 물릴 수도 있고, 독을 마실 때도 있겠지만 예수 이름의 권세로 보호받습니다.
예수 이름으로 병든 사람을 위해 기도할 때 병고침의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나사렛 예수의 이름은 병자를 건강케 하는 이름입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치유자 되십니다. 이 믿음으로 승리하는 성도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구원 얻을 유일한 이름 (적용적 해석: 구원자 예수)
12절=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베드로 사도는 나사렛 예수의 이름 속에서 놀라운 구원의 능력을 발견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나사렛 예수의 이름이야말로 구원 얻을 유일한 이름이라고 담대하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사도의 선포 속에는 나사렛 출신인 예수 그분은 치유자이실 뿐 아니라 유일한 구원자이시라는 엄청난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다’ 는 것입니다. 과연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의 유일한 구원자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베드로의 자신만만한 선포처럼, 천하 인간에 구원을 가져오는 유일한 이름은 오직 예수 밖에 없습니다.
여기 ‘주신’(데도메논)으로 번역된 단어는 완료 수동태 분사인데, 수동태는 신적 수동태로서 그 주체가 유일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즉, 하나님이 그런 법칙을 세우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에서 ‘없나니(우크 에스틴)’ 은 현재 시제인데, 이것은 변치 않는 진리와 사실을 나타냅니다. 즉,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원자라는 사실은 베드로가 말하기 이전과 그 당시 뿐 아니라 오늘날까지 영원한 진리임을 의미하는 표현입니다. 왜냐하면 우주의 통치자이신 하나님이 그렇게 정하셨기 때문입니다.
본절에서 말하는 ‘구원(소테리아)’ 은 ‘치유’와 ‘영혼 구원’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먼저 이 단어가 ‘치유’, 즉 육체적 구원을 의미한다는 것은 지체장애인이 베드로를 통해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걷기도 하고 뛰기도 했던 역사를 가리킵니다.
두 번째, 영적인 구원을 가리킨다는 것은 예수께서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당시의 당국자들이 구원받지 못할 무리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도 베드로의 선포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베드로는 ‘구원’이라는 단어의 이중적인 의미를 통해 사도들을 죄인 취급하며 심문하는 대제사장들과 무리들을 향해 복음을 선포하였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이나 하던 앉은뱅이가 예수의 이름으로 영육 구원을 얻은 것처럼 당신들도 예수의 이름을 믿어 영혼의 구원을 얻으라’ 고 촉구한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구원에 대하여 사도의 외침과는 사뭇 다른 사상으로 무장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철학에서 구원의 길을 찾으려 하고, 어떤 사람들은 과학에서 그 길을 찾고 있습니다.
하지만 유사 이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 영생의 길을 찾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진리를 찾아 헤매던 수많은 사람들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밑에서 참 안식을 찾았고, 영생의 축복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에덴 동산에서 범죄 이전의 아담은 하나님과 통했고, 하나님을 아버지 알듯 알았고, 죽음과 죄를 모르는 생명을 소유했었습니다.
그러나 범죄 후 하나님과의 대화는 단절되었고, 하나님 아는 일에 대해서는 영적 백치가 되었고, 죄와 사망과 사탄의 권세 아래 사는 에덴 동편의 생명과와 차단된 가인족이 되었습니다.
온 인류는 조상 아담을 따라 3중 상실을 했습니다: (1)하나님과의 교통 상실 (2)하나님 지식 상실 (3)생명 상실.
그런데 둘째 아담되신 예수님은 인류에게 상실된 모든 것을 회복시켜주셨습니다: (1)그의 십자가로 하나님께 가는 길을 회복했고 (2)말씀이 육신되고 하나님이 사람 되신 분으로서, 하나님께 대한 최선 최후의 계시이며 진리가 되셨고, (3)믿는 자에게 영생을 주십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는 유일의 길이요 유일의 진리요 유일의 생명이라고 주장하십니다(요 14:6). 오직 한 길 예수 외에 구원의 길은 없습니다. 이것이 기독교 전도의 대전제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기독교 전도의 좁은 문이요 십자가인 것입니다.
복음의 관용성이 문제가 되고, 다른 종교의 반발을 사는 것도 당연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2+2=4란 진리는 하나뿐이고 그 밖의 모든 수는 사실이 아닌 것처럼, 최후의 귀한 것도 하나뿐입니다.
CCC 총재 김준곤 목사님은 “나는 온 우주에서 하나밖에 없는 것, 교환도 혼합도 안 된다... 나의 유일성 보다 아버지의 유일성 보다 더 절대적인 나의 하나님과 나의 구속의 길이 하나뿐이라는 사실에 나는 불편을 느끼지 않는다” 고 했습니다.
구원 얻을 유일한 이름인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전하고 또 전하는 성도 여러분 되시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베드로를 변화시킨 존귀한 이름 (적용적 해석: 존귀하신 예수)
10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분명한 것은 사도 베드로가 천한 나사렛 예수라는 이름 속에서 다시없는 존귀한 이름을 발견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산헤드린 공회 앞에 서 있던 사도에게 있어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와도 비견할 수 없이 존귀한 분이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이름이 여러분에게 존귀한 이름으로 다가옵니까?
사도 베드로는 이 이름과 관련하여 잊을 수 없는 뼈아픈 과거가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잡히셨을 때 가야바의 집까지 멀찍이 따라갔던 베드로는 주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하게 되었습니다.
작은 비자가 베드로에게 “네가 갈릴리 예수의 일당이 아니냐”고 물었을 때 그는 맹세하며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갈릴리는 나사렛보다 훨씬 넓은 지대를 가리킵니다. 북방에 있던 유대인들은 거의 다 갈릴리 사람에 속했고, 따라서 갈릴리 예수는 결코 부끄러운 이름이 아니었습니다. 떳떳한 이름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베드로는 그 갈릴리 예수를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어떻습니까? 베드로는 많은 권력자들 앞에서 떳떳지 않은 이름인 ‘나사렛 예수’를 자신 있게 외치고 있지 않습니까?
여기에서 우리는 변화된 베드로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나사렛 예수의 이름 속에서 말할 수 없이 존귀한 이름을 발견한 것이 확실합니다.
영국의 비평가요 역사가인 칼라일(1795-1881)은 “만일 나의 직업이 나를 영화롭게 못한다면 내가 나의 직업을 영화롭게 하겠노라” 라고 말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무시했던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서 비할 수 없는 존귀성을 깨달은 베드로는 예수님을 높여서 예수님의 이름을 존귀하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원래 십자가의 도가 이처럼 역설적인 것입니다. 십자가는 대단히 천하고 가장 참혹한 죽음의 상징이었습니다. 로마 시대 십자가의 형은 노예들에게나 반란자들에게 가하는 가장 잔인한 사형법이었습니다. 십자가는 문자 그대로 저주받은 자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가 예수께서 달리신 후에는 세상에서 다시 없는 존귀한 것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교회마다 십자가로 상징을 삼고 있고, 십자가를 국기로 삼는 나라들이 한 둘이 아닙니다. 가장 천한 것이 가장 존귀한 것이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베드로는 남들이 천시하던 나사렛 예수의 이름 속에서 놀라운 존엄성을 발견했고,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마음껏 자랑하고 있습니다. 이 이름은 베드로를 변화시킨 존귀한 이름입니다.
그의 가치관이 변했습니다. 갈릴리 예수의 이름 속에서 참된 가치를 발견하지 못했을 때는 비겁하게 부인했던 사람이지만, 이제 나사렛 예수 이름 속에서 참된 가치를 발견했기 때문에 그 이름을 위하여 흔연히 자신의 생명을 내어놓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나사렛 예수의 이름 속에서 참된 가치를 발견한다면 우리의 신앙의 자세는 베드로처럼 180도 달라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존귀하신 예수님을 위해 목숨인들 바치지 못하겠습니까?
뉴욕의 유대인 여자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했습니다. 가족들은 그 여자로 하여금 새로이 얻은 믿음을 버리게 하려고 온갖 노력을 다 했습니다. 유럽 여행을 제안하기도 하고 그리스도를 부인하기만 한다면 갖고 싶은 것이나 하고 싶은 어떤 일이라도, 다 하게 해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여자는 예수님에 대한 사랑 안에서 조금도 흔들림이 없이 굳세게 버티었습니다.
마침내 여자의 부모는 딸을 위해 만찬회를 베풀고 모든 친구들을 다 불렀습니다. 아버지가 식탁 상좌에 서서 손님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오늘 밤 어떤 특별한 이유로 여러분을 이 자리에 모셨습니다. 우리 집 딸년이 저 비천한 나사렛 사람을 따르기로 작정했습니다. 오늘 밤 내 딸은 마지막 결정을 내려야만 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를 단념 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영원히 아비의 집을 떠나든지 해야 합니다.“
놀라고 당황한 딸은 한동안 말문을 열지 못했습니다. 얼마 후 딸은 찬송가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십자가를 내가 지고 주를 따라 가도다.
이 후부터 예수로만 나의 보배 삼겠네“
노래를 마친 딸은 자기 방으로 들어가서 옷을 갈아입고 가방을 꾸려 영원히 부모의 집을 떠나버렸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최상의 희생을 기꺼이 치렀던 것입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베드로와 요한이 가진 것이라고는 나사렛 예수의 이름밖에 없었습니다. 돈도 지식도 권세도 별 기술도 없었습니다. 당시 거지도 예수 이름을 원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도(道)는 어디서나 반대를 받아 발 붙일 곳이 없었습니다(행28:22).
그러나 예수의 이름만 전해 주면 가난 속에서도, 죽어 가면서도, 사랑과 감사와 찬송이 반석에 생수 터지듯 했습니다.
만인에게 원하는 만큼 돈을 주고 지식을 주고 기술을 줄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어느 시대나 그런 것은 오직 소수의 사람만이 소유할 특권을 누립니다. 설혹 가졌다 하더라도 마음은 지옥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이름은 누구나 이 자리에서 소유할 수 있는 전천후 기쁜 소식입니다.
나사렛 예수의 이름은 참으로 놀라운 이름입니다. 이 이름에는 불치의 병이라도 치유할 수 있는 강력한 능력이 있습니다.
이 이름에는 우리에게 영생을 주는 구원의 능력이 있습니다. 아니, 이 이름 외에는 그 어디에도 구원의 길을 찾을 수 없습니다.
이 신비한 이름 속에 있는 존엄성을 발견한 베드로는 겁쟁이에서 목숨을 건 선포자로 변화했습니다. 이런 변화는 교회사 2,000년 역사에 계속적으로 일어났고, 참 하나님의 종들은 예외 없이 이 이름을 자랑스럽게 사용했습니다.
여러분은 나사렛 예수 이름의 권세를 경험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예수 이름으로 병자를 위해 기도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예수 이름으로 전도하여 오이코스의 입에서 구원의 감격을 고백하는 것을 들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예수 이름 속에서 존귀하신 예수님을 발견하고, 그분을 위해 십자가를 지고 따르기로 결심해 본 적이 있습니까?
사도행전 4:5-12
“이튿날에 관원과 장로와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는데/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예하여/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가로되 백성의 관원과 장로들아/ 만일 병인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얻었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하면/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사도행전은 초대교회의 역사를 기록한 책입니다. 예수님의 승천 후 성령충만한 제자들과 초대교회 성도들은 매일같이 놀라운 역사를 이루어나갔습니다. 불치의 병들이 고침받았고, 엄청난 양적 부흥이 있었고, 그토록 변하기 어려웠던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 변화되는 역사들이 줄을 이었습니다.
우리는 사도행전에 기록된 초대교회의 사건들을 읽을 때마다 가슴 설레는 감동을 받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사도들의 용감한 모습이 과장 없이 그려지고 있습니다.
성전 미문에 앉아서 구걸하던 하체장애인이 고침 받은 사건 때문에 베드로와 요한이 당국자들에 의해 잡혀왔습니다. 당시 절대 권력을 가졌던 당국자들은 사도들의 복음 증거를 못마땅하게 여겼고, 공포분위기를 조성하여 사도들의 활동을 막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욱박질렀습니다.
7절= “...너희가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여기 ‘너희가’(휘메이스)는 ‘너희와 같은 자들이’ 정도로 해석되는 표현입니다. 이들은 사도들을 정당한 심리 과정을 거치기도 전에 이미 인격적으로 무시하고 있었고, 사도들이 행한 기적을 하찮은 것으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라는 표현은 사도들의 기적에 대하여 의혹을 표시하는 말입니다. 당국자들은 이 기적을 하나님의 이름에 근거한 것이 아니고 악신에 근거한 기적으로 매도하고 있는 셈입니다. 마치 예수께서 귀신을 내어쫓으신 것을 빗대어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었다고 매도하던 것과 같은 경우입니다.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은 사실을 알아보기보다 사도들에게 누명을 씌우기에 급급했습니다. 만약 악한 영의 힘을 빌어 이러한 일을 행한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사도들을 사형에 처할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어려운 상황에서 사도들이 보여주었던 용기는 참으로 놀랄만한 것이었습니다. 베드로 사도의 우렁찬 음성을 들어봅시다.
8절=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가로되, 백성의 관원과 장로들아”
9절= “만일 병인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얻었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하면”
10절=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사도의 입을 통하여 최고 공회 앞에서 자랑스럽게 증거된 나사렛 예수의 이름!
지금 사도 베드로는 굳이 ‘나사렛’ 이란 지명을 동원하여 예수님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작은 촌 나사렛은 일반 백성에게 무시당하던 이름이었고, 이 말을 듣고 있는 산헤드린 공회 회원들에게는 멸시의 대상이었습니다. 경건한 사람 나다나엘조차도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고 나사렛 출신을 폄하했습니다.
그런데, 왜 베드로가 나사렛 동네를 들먹이면서 나사렛 예수라고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까?
베드로가 이 이름에서 발견한 것은 무엇입니까? 나사렛 예수의 이름이 어떤 이름이기에 얼마 전까지 겁쟁이 노릇을 했던 베드로가 이처럼 담대하게 이 이름을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까?
1. 병자를 건강하게 한 이름 (적용적 해석: 치유자 예수)
10절=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여기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라는 표현은 베드로 사도가 성전 미문에서 만난 병자를 고치면서 했던 말과 완전히 동일한 말입니다.
행 3:6=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실제로 베드로는 병자의 오른 손을 잡아 일으켰는데, 이 때 사도의 모든 행동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가 병자를 고치는 능력이 있음을 확신하는 믿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나사렛 예수의 이름은 병자를 건강하게 하는 이름이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치유자 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베드로 사도가 이처럼 담대한 용기를 갖게 된 것은 나사렛 예수께서 모든 병을 치유하시는 능력을 가지신 분이라는 믿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내내 사도들은 병 고치시는 예수님의 능력을 마음껏 맛보았습니다. 사도들 스스로 파송받아 병고치는 기적을 행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대속의 사역을 마치시고 부활 승천하셔서 성령을 보내어 주실 때까지 사도들은 용기가 없었습니다. 담력이 모자랐습니다.
그러나 오순절에 보혜사 성령께서 강림하셨고, 제자들이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었을 때, 그들에게는 놀라운 담력이 생겨났습니다.
과거 예수님과 동행하면서 배우고 경험했던 모든 것들이 되살아 났고, 주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의 능력들이 제자들에게 직접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막 16:17=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막 16:18=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사도 베드로에게는 성전 미문의 하체장애인이 말씀 한마디에 벌떡 일어난 것이 큰 일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나사렛 예수의 이름 안에는 이보다 더 큰 능력이 얼마든지 있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산헤드린 공회의 살기등등한 분위기를 깨고 베드로가 목청을 높여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자랑스럽게 공개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이 만병의 치유자이심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또한 사도들처럼 이 이름의 권세를 누릴 수 있는 약속을 받은 자들입니다.
우리 믿는 자들은 예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어야 합니다.
우리 믿는 자들은 새방언을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의 복음을 증거하다가 뱀에 물릴 수도 있고, 독을 마실 때도 있겠지만 예수 이름의 권세로 보호받습니다.
예수 이름으로 병든 사람을 위해 기도할 때 병고침의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나사렛 예수의 이름은 병자를 건강케 하는 이름입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치유자 되십니다. 이 믿음으로 승리하는 성도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구원 얻을 유일한 이름 (적용적 해석: 구원자 예수)
12절=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베드로 사도는 나사렛 예수의 이름 속에서 놀라운 구원의 능력을 발견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나사렛 예수의 이름이야말로 구원 얻을 유일한 이름이라고 담대하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사도의 선포 속에는 나사렛 출신인 예수 그분은 치유자이실 뿐 아니라 유일한 구원자이시라는 엄청난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다’ 는 것입니다. 과연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의 유일한 구원자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베드로의 자신만만한 선포처럼, 천하 인간에 구원을 가져오는 유일한 이름은 오직 예수 밖에 없습니다.
여기 ‘주신’(데도메논)으로 번역된 단어는 완료 수동태 분사인데, 수동태는 신적 수동태로서 그 주체가 유일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즉, 하나님이 그런 법칙을 세우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에서 ‘없나니(우크 에스틴)’ 은 현재 시제인데, 이것은 변치 않는 진리와 사실을 나타냅니다. 즉,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원자라는 사실은 베드로가 말하기 이전과 그 당시 뿐 아니라 오늘날까지 영원한 진리임을 의미하는 표현입니다. 왜냐하면 우주의 통치자이신 하나님이 그렇게 정하셨기 때문입니다.
본절에서 말하는 ‘구원(소테리아)’ 은 ‘치유’와 ‘영혼 구원’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먼저 이 단어가 ‘치유’, 즉 육체적 구원을 의미한다는 것은 지체장애인이 베드로를 통해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걷기도 하고 뛰기도 했던 역사를 가리킵니다.
두 번째, 영적인 구원을 가리킨다는 것은 예수께서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당시의 당국자들이 구원받지 못할 무리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도 베드로의 선포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베드로는 ‘구원’이라는 단어의 이중적인 의미를 통해 사도들을 죄인 취급하며 심문하는 대제사장들과 무리들을 향해 복음을 선포하였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이나 하던 앉은뱅이가 예수의 이름으로 영육 구원을 얻은 것처럼 당신들도 예수의 이름을 믿어 영혼의 구원을 얻으라’ 고 촉구한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구원에 대하여 사도의 외침과는 사뭇 다른 사상으로 무장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철학에서 구원의 길을 찾으려 하고, 어떤 사람들은 과학에서 그 길을 찾고 있습니다.
하지만 유사 이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 영생의 길을 찾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진리를 찾아 헤매던 수많은 사람들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밑에서 참 안식을 찾았고, 영생의 축복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에덴 동산에서 범죄 이전의 아담은 하나님과 통했고, 하나님을 아버지 알듯 알았고, 죽음과 죄를 모르는 생명을 소유했었습니다.
그러나 범죄 후 하나님과의 대화는 단절되었고, 하나님 아는 일에 대해서는 영적 백치가 되었고, 죄와 사망과 사탄의 권세 아래 사는 에덴 동편의 생명과와 차단된 가인족이 되었습니다.
온 인류는 조상 아담을 따라 3중 상실을 했습니다: (1)하나님과의 교통 상실 (2)하나님 지식 상실 (3)생명 상실.
그런데 둘째 아담되신 예수님은 인류에게 상실된 모든 것을 회복시켜주셨습니다: (1)그의 십자가로 하나님께 가는 길을 회복했고 (2)말씀이 육신되고 하나님이 사람 되신 분으로서, 하나님께 대한 최선 최후의 계시이며 진리가 되셨고, (3)믿는 자에게 영생을 주십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는 유일의 길이요 유일의 진리요 유일의 생명이라고 주장하십니다(요 14:6). 오직 한 길 예수 외에 구원의 길은 없습니다. 이것이 기독교 전도의 대전제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기독교 전도의 좁은 문이요 십자가인 것입니다.
복음의 관용성이 문제가 되고, 다른 종교의 반발을 사는 것도 당연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2+2=4란 진리는 하나뿐이고 그 밖의 모든 수는 사실이 아닌 것처럼, 최후의 귀한 것도 하나뿐입니다.
CCC 총재 김준곤 목사님은 “나는 온 우주에서 하나밖에 없는 것, 교환도 혼합도 안 된다... 나의 유일성 보다 아버지의 유일성 보다 더 절대적인 나의 하나님과 나의 구속의 길이 하나뿐이라는 사실에 나는 불편을 느끼지 않는다” 고 했습니다.
구원 얻을 유일한 이름인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전하고 또 전하는 성도 여러분 되시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베드로를 변화시킨 존귀한 이름 (적용적 해석: 존귀하신 예수)
10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분명한 것은 사도 베드로가 천한 나사렛 예수라는 이름 속에서 다시없는 존귀한 이름을 발견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산헤드린 공회 앞에 서 있던 사도에게 있어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와도 비견할 수 없이 존귀한 분이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이름이 여러분에게 존귀한 이름으로 다가옵니까?
사도 베드로는 이 이름과 관련하여 잊을 수 없는 뼈아픈 과거가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잡히셨을 때 가야바의 집까지 멀찍이 따라갔던 베드로는 주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하게 되었습니다.
작은 비자가 베드로에게 “네가 갈릴리 예수의 일당이 아니냐”고 물었을 때 그는 맹세하며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갈릴리는 나사렛보다 훨씬 넓은 지대를 가리킵니다. 북방에 있던 유대인들은 거의 다 갈릴리 사람에 속했고, 따라서 갈릴리 예수는 결코 부끄러운 이름이 아니었습니다. 떳떳한 이름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베드로는 그 갈릴리 예수를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어떻습니까? 베드로는 많은 권력자들 앞에서 떳떳지 않은 이름인 ‘나사렛 예수’를 자신 있게 외치고 있지 않습니까?
여기에서 우리는 변화된 베드로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나사렛 예수의 이름 속에서 말할 수 없이 존귀한 이름을 발견한 것이 확실합니다.
영국의 비평가요 역사가인 칼라일(1795-1881)은 “만일 나의 직업이 나를 영화롭게 못한다면 내가 나의 직업을 영화롭게 하겠노라” 라고 말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무시했던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서 비할 수 없는 존귀성을 깨달은 베드로는 예수님을 높여서 예수님의 이름을 존귀하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원래 십자가의 도가 이처럼 역설적인 것입니다. 십자가는 대단히 천하고 가장 참혹한 죽음의 상징이었습니다. 로마 시대 십자가의 형은 노예들에게나 반란자들에게 가하는 가장 잔인한 사형법이었습니다. 십자가는 문자 그대로 저주받은 자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가 예수께서 달리신 후에는 세상에서 다시 없는 존귀한 것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교회마다 십자가로 상징을 삼고 있고, 십자가를 국기로 삼는 나라들이 한 둘이 아닙니다. 가장 천한 것이 가장 존귀한 것이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베드로는 남들이 천시하던 나사렛 예수의 이름 속에서 놀라운 존엄성을 발견했고,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마음껏 자랑하고 있습니다. 이 이름은 베드로를 변화시킨 존귀한 이름입니다.
그의 가치관이 변했습니다. 갈릴리 예수의 이름 속에서 참된 가치를 발견하지 못했을 때는 비겁하게 부인했던 사람이지만, 이제 나사렛 예수 이름 속에서 참된 가치를 발견했기 때문에 그 이름을 위하여 흔연히 자신의 생명을 내어놓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나사렛 예수의 이름 속에서 참된 가치를 발견한다면 우리의 신앙의 자세는 베드로처럼 180도 달라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존귀하신 예수님을 위해 목숨인들 바치지 못하겠습니까?
뉴욕의 유대인 여자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했습니다. 가족들은 그 여자로 하여금 새로이 얻은 믿음을 버리게 하려고 온갖 노력을 다 했습니다. 유럽 여행을 제안하기도 하고 그리스도를 부인하기만 한다면 갖고 싶은 것이나 하고 싶은 어떤 일이라도, 다 하게 해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여자는 예수님에 대한 사랑 안에서 조금도 흔들림이 없이 굳세게 버티었습니다.
마침내 여자의 부모는 딸을 위해 만찬회를 베풀고 모든 친구들을 다 불렀습니다. 아버지가 식탁 상좌에 서서 손님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오늘 밤 어떤 특별한 이유로 여러분을 이 자리에 모셨습니다. 우리 집 딸년이 저 비천한 나사렛 사람을 따르기로 작정했습니다. 오늘 밤 내 딸은 마지막 결정을 내려야만 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를 단념 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영원히 아비의 집을 떠나든지 해야 합니다.“
놀라고 당황한 딸은 한동안 말문을 열지 못했습니다. 얼마 후 딸은 찬송가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십자가를 내가 지고 주를 따라 가도다.
이 후부터 예수로만 나의 보배 삼겠네“
노래를 마친 딸은 자기 방으로 들어가서 옷을 갈아입고 가방을 꾸려 영원히 부모의 집을 떠나버렸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최상의 희생을 기꺼이 치렀던 것입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베드로와 요한이 가진 것이라고는 나사렛 예수의 이름밖에 없었습니다. 돈도 지식도 권세도 별 기술도 없었습니다. 당시 거지도 예수 이름을 원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도(道)는 어디서나 반대를 받아 발 붙일 곳이 없었습니다(행28:22).
그러나 예수의 이름만 전해 주면 가난 속에서도, 죽어 가면서도, 사랑과 감사와 찬송이 반석에 생수 터지듯 했습니다.
만인에게 원하는 만큼 돈을 주고 지식을 주고 기술을 줄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어느 시대나 그런 것은 오직 소수의 사람만이 소유할 특권을 누립니다. 설혹 가졌다 하더라도 마음은 지옥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이름은 누구나 이 자리에서 소유할 수 있는 전천후 기쁜 소식입니다.
나사렛 예수의 이름은 참으로 놀라운 이름입니다. 이 이름에는 불치의 병이라도 치유할 수 있는 강력한 능력이 있습니다.
이 이름에는 우리에게 영생을 주는 구원의 능력이 있습니다. 아니, 이 이름 외에는 그 어디에도 구원의 길을 찾을 수 없습니다.
이 신비한 이름 속에 있는 존엄성을 발견한 베드로는 겁쟁이에서 목숨을 건 선포자로 변화했습니다. 이런 변화는 교회사 2,000년 역사에 계속적으로 일어났고, 참 하나님의 종들은 예외 없이 이 이름을 자랑스럽게 사용했습니다.
여러분은 나사렛 예수 이름의 권세를 경험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예수 이름으로 병자를 위해 기도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예수 이름으로 전도하여 오이코스의 입에서 구원의 감격을 고백하는 것을 들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예수 이름 속에서 존귀하신 예수님을 발견하고, 그분을 위해 십자가를 지고 따르기로 결심해 본 적이 있습니까?
출처 : 한국강해설교연구원
글쓴이 : agaser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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