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g130818 베풀어어 주신 은택을 기억하자. (시편 103:2-9)
11세기 당시 프러시아라고 불렀던 독일의 황제 가운데 헨리 3세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왕 노릇 하는데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내가 더 이상 이 일을 하고 싶지 않다" 그는 수도사의 삶을 동경했습니다. "나도 깊은 산 속에 들어가서 내 한 평생을 기도하면서 보낼 수는 없지 않을까?" 그래서 그 당시 유명한 수도원에 원장이었던 리챠드라는 수도사를 찾아가서 자기가 황제 일을 그만 두고 그 수도원에 들어오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수도사가 한참 그 황제를 계속 쳐다보았다고 합니다. 쳐다보더니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황제 폐하여! 수도원에 일단 들어오시면 다른 수도사와 마찬가지로 모든 수도원의 계율에 철저하게 복종해야 한다는 것을 아십니까?"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노력하겠습니다" "그런데 혹시 우리 수도원에서 수도사들이 지켜야 할 계율 가운데 가장 중요한 계율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모릅니다. 뭡니까?" "그것을 우리는 순종이라고 합니다. 철저하게 순종하셔야 되는데 하실 수 있습니까?" "노력하겠습니다" "그러면 제가 첫 번째 계율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황제여, 지금 당장 궁궐로, 왕의 보좌로 돌아가서 나라와 백성을 성실하게 섬겨 주십시오" 그래서 헨리 3세는 결국 수도원에 들어가지 못하고 다시 궁궐로 돌아갔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 후부터 새로운 마음으로 심기일전해서 열심히 나라를 다스리게 되었고 그가 죽었을 때 그가 죽은 무덤의 묘비 문에는 이런 비문이 세워졌다고 합니다. "나라와 백성을 성실하게 섬겼던 황제가 여기에 잠들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하나님의 아들 딸들이 순종의 계율을 지키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오늘의 주시는 말씀은 주님의 베풀어 주신 은택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계율입니다.
사과가 나무에서 떨어지는 단순한 사건에서 뉴턴은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그가 평범한 사건에서 귀중한 자연 원리를 볼 수 있는 예리한 관찰력을 가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잘 교육받고 훈련된 내과 의사는 초음파 검사 사진이나 내시경을 통해 사람의 장기를 보고 건강상태에 대한 진단을 내릴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믿음의 사람에게는 믿음의 안목이 있어서 그 믿음의 눈으로 이 세상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게 됩니다. 본문의 말씀은 시편 시인이 믿음의 눈을 통해 발견한 것들에 대한 노래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 본 시인은 하나님의 두 개의 손을 보았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의로운 손이며,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은혜의 손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의로운 손으로 의를 지탱하고 계셨으며, 은혜의 손으로 세상을 껴안고 계셨습니다. 세상 어디에나 하나님의 의와 은혜의 손길이 함께 계십니다. 믿음의 안목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 하나님의 의와 은혜의 손길이 세상에 충만하게 역사하고 계심을 보게 됩니다. 믿음의 안목만이 이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와 은혜는 전혀 별개의 것으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날실과 씨실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천을 짜듯이, 하나님의 의와 은혜가 서로 함께 공존하며 인간의 역사를 이끌어 가고 계십니다.
본 시편은 감사 예배시 스물아홉 편 중 다윗이 남긴 아홉 편의 시 가운데 하나입니다. 시 전면에 흐르는 시적 율동감과 내용의 풍부함, 그리고 문학적 감흥 면에서 빼어난 시입니다. 깊은 영성을 가진 사람만이 표현할 수 있는 수준의 노래요 기도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아니 자신을 향하여 하나님께 드릴 찬양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권고하고 있습니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 성호를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라고 했습니다. 영혼의 음악은 모든 음악의 정수입니다. 다윗은 그의 생애에 수많은 시련과 체험들을 통하여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를 맺은 사람입니다. 그는 높은 하늘의 공기를 호흡한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 항상 서서 신령한 교제를 계속하는 영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성전에서 끊임없이 하나님을 찬양했던 ‘찬양의 사람’입니다.
주님이 베풀어 주신 은택에 감사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송축하라는 말은 찬양하라, 감사하라는 뜻입니다. 시편 103편에서 7번이나 반복해서 소개됩니다. 여러분! 다윗은 너무나 많은 고난의 삶을 살았던 인물입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하나님의 돌보심과 보호 가운데 그는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그의 인생의 노년에 그는 살아온 나날을 회고하면서 하나님 앞에 감사의 찬양을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양하라.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오늘 이 다윗의 마음이 우리의 마음이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시편 103편은 자기 자신과 대화를 하는 좋은 예입니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 성호를 송축하라.” 자기 자신에게 여호와를 송축하라고 명령합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송축하도록 자기 영혼을 훈련시키는 독특한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자기 자신과 대화를 하는 경험들이 있습니까? 시편 103편 뿐만 아니라, 시편 42편, 43편도 자신의 영혼과 대화를 나누는 시편들입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여러분도 이렇게 자신의 영혼과 대화를 나눈 경험들이 있습니까? 무심코 “내가 왜 이러지?” 이렇게 말한 적은 없습니까? 오늘 아침에 일어나면서도 자기 자신과 싸움을 벌인 사람은 없습니까? “좀 더 잤으면 좋겠는데? 무슨 소리야, 일어나야지, 사순절 새벽기도 하기로 하나님과 약속했잖아?” 자신과 이런 대화를 주고 받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오늘 시편 말씀은 이런 평범한 대화를 넘어서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을 송축하도록 훈련을 시키고 있습니다. “내 영혼아(my soul)” “내 속에 있는 것들아...” 이렇게 자신을 부르면서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를 잊지 말라고 합니다. 2절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시인은 하나님의 은택(恩澤)을 잊지 말자고 다짐합니다. 성도는 자기 내면을 향하여 끝없이 하나님에 대한 찬양을 독려해야 하고,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택을 잊지 않도록 스스로 경계해야 합니다.
헨리 죠엣이라는 사람은 “감사하는 마음은 마치 병을 예방하는 예방주사와 같고, 치료하는 항생제와 같고, 상하는 것을 방지하는 방부제와 같다”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감사의 생활입니다(살전5:18).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소원, 하나님의 명령, 하나님의 기대와 바라심이 우리가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 존귀하고 영광스럽고 사랑과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 주시고 만물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고 열매를 맺고 수확하게 하시고 모든 은택을 베풀어 주시는 여호와 그의 이름을 지극히 거룩한 이름이요 우리가 그 앞에 무릎을 꿇고 복종하며 은혜를 높이 드러내므로 송축하며 감사해야 할 이름입니다.
독일의 그레첸이라는 아이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마을에 기근이 찾아왔습니다. 그 마을의 부자 할아버지가 배고파하는 아이 20명에게 매일 빵을 나누어 줍니다. 그러면 아이들이 서로 큰 빵을 받으려고 싸우듯이 가져갑니다. 그러나 그 중에 그레첸이라는 아이는 다른 아이들이 큰 빵을 가져가기를 기다렸다가 마지막 남은 가장 작은 빵을 가지고는 ‘할아버지 감사해요’하며 집으로 갑니다. 이 모습이 할아버지는 너무 아름답게 보였습니다. 하루는 장 작은 빵 속에 은전 6개를 넣었습니다. 그 날도 여전히 다른 아이들은 큰 것을 싸우듯이 가져갑니다. 마지막 가장 작은 빵을 들고는 할아버지께 감사하다는 인사를 남기고 돌아갑니다. 집에 가서 보니까 그 속에 은전 6개가 있어서 다음 날 그것을 들고 할아버지께 은전을 드리며 빵 속에 있었다고 이야기 합니다. 할아버지는 ‘ 그것은 할아버지가 너에게 주는 선물이란다. 다른 아이들은 빵을 주어도 고맙다는 인사를 하지 않는데 너는 가장 작은 빵을 받고서도 기뻐하고 고마워하는 네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보였단다.’고 말씀하시며 빙그레 웃으십니다.
중국 선교사인 ‘스탠리 존슨’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교양인과 야만인의 차이는 감사할 줄 아느냐, 감사할 줄 모르느냐의 차이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 인간됨의 그 됨됨이는 하나님께 감사할 줄 알고, 하나님을 높여 찬양할 줄 아는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또 이사야서 1장 3절에 보면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소도 주인을 알아봅니다. 그 임자를 압니다. 나귀도 구유를 압니다. 그런데 그들이 태어난 하나님의 존재를 모른다면 이것은 짐승보다 못한 존재입니다. 여러분! 사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것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해를 주시고 비를 주시는 겁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고, 건강을 주시고, 가족을 주시고, 재물을 주시고, 사업을 주십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내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큰 착각에 빠지는 것입니다. 은혜를 깨닫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은택이란 말의 본래적 의미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위해 하신 일’ 을 총칭하는 말입니다. 이것은 영혼이나 육체에 모두 관련되는 것이며, 현실적인 것이거나 영원한 것 모두에 관련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택은 우리의 의식주의 삶에 관련된 것들을 포함하고, 우리의 영적 삶에 관련된 모든 것들을 포함합니다. 가장 위대한 선물인 독생자의 선물, 하나님의 말씀, 그리고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 주신 것, 이 모두가 하나님의 은택입니다.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신 은혜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할 때 제일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어렵고 외로울 때 나를 도와 주신 일, 그런 것들은 나중에 생각해도 됩니다. 제일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의 죄를 용서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는 시작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죄를 용서해 주시지 않았다면,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도 없었습니다. 이젠 아시겠지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이것만 해도 얼마나 큰 은혜인지, 아시겠지요?
3절=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 우리가 송축해야 할 여호와의 은택 중에서 가장 먼저 제시되고 있는 것은 ‘죄사함’ 입니다. 이를 가장 먼저 진술하는 것은 그것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여호와 앞에 큰 죄를 범한 후 깊은 회개를 통하여 죄사함의 은총을 체험하였습니다. 그런 체험을 한 당사자 다윗은 하나님의 사죄의 은총을 확신하고 있었기에 바로 본절과 같은 표현으로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죄악을 사하십니다. 우리가 어떤 자들입니까? 우리 모두는 죄 가운데 빠져 죄로 물들어 있는 자들입니다. 여러분의 입, 손, 발을 살펴보십시오. 우리의 모든 지체들이 하나님의 법을 제대로 준수하지 못하고 그릇 행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의 죄악은 결코 적지 않습니다. 우리가 사함 받아야 할 죄악의 종류와 수량은 결코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하찮은 것이 아닙니다. 이 죄가 얼마나 많은가는 오직 하나님 만이 말하실 수 있습니다. 시인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시 40:12 “··· 죄가 나의 머리털보다 많으므로 내가 낙심하였음이니이다”이 모든 죄악과 허물들을 하나님께서 용서하십니다. 주님의 용서는 조건 없이, 완전히, 그리고 영원히 주어집니다. 주님은 기록된 책에서 죄의 기록 자체를 깨끗이 지워주십니다. 그리고 다시 기억지도 않으십니다.
모든 병을 고쳐주신 은혜
성경에는 유난히도 병자들을 고쳐 주시는 말씀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병자들을 치유하시는 사역이라고 할 만큼 병자들을 고쳐 주시는 말씀들이 많습니다. 여기 ‘병(타할루)’ 은 단순히 육체적·정신적 질병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죄로 인한 심판으로서의 질병’ 이라는 의미를 포함하는 독특한 단어로서, 구약에서 모두 5회 밖에 사용되지 않았습니다(신 29:21, 대하 21:19 등). 우리의 나쁜 습관도 넓은 의미에서 우리의 질병입니다. 우리의 잘못된 생각과 사상, 이것도 넓은 의미에서는 우리가 앓고 있던 질병입니다. 우리는 죄로 인하여 마음의 병과 육체의 질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8장에 나오는 간음한 여자에게도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 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8:11)”고 하셨습니다. 또 예수님은 병이 나은 사람에게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요한복음 5:14)”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에게는 무슨 병이 있습니까? 못 고칠 육체적인 질병이 있습니까? 아니면, 고쳐야 할 나쁜 습관이 있습니까? 어쩌면 여러분의 질병은 이생에서 고쳐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모든 병이 고쳐 질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1:4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한편 ‘고치시며(하로페)’ 의 일차적 의미는 찢어진 곳을 꿰매어 수선한다는 뜻입니다. 즉 여호와의 치료의 은총은 모든 망가진 것을 온전케 회복시킨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못 고치는 질병이 전혀 없는 ‘치료의 하나님’ 여호와 라파의 하나님 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든 병을 고쳐주시는 은택의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여기 용서와 치유의 관계는 분명합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질병을 고쳐주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육체의 병을 고치십니다. 죄는 우리 몸에 온갖 질병의 씨를 뿌렸습니다. 수많은 병들이 우리를 고통가운데로 몰아넣고, 마침내 죽음으로 이끕니다. 하나님은 때로 이 병들을 직접 고치십니다. 주의 종의 기도를 통하여 병을 고쳐주시기도 하고, 구역원들의 중보기도를 통하여 고쳐주시기도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각종 약과 의료 기술을 발전케 하셔서 질병에서 고침 받게 하십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택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영적 질병을 고치십니다. 죄는 우리 영혼에 심각한 피해를 입힙니다. 영혼을 뒤틀리게 하고, 약하게 하며, 영원한 죽음에로 몰아갑니다. 하나님은 말씀과 성령, 그리고 십자가 보혈로 우리의 영혼의 질병을 치유하십니다. 치유하시는 주님의 은혜를 감사하며 온 마음으로 찬양하는 성도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파멸에서 건져주신 은혜
“파멸”을 영어로 “destruction”이라고 하는 데 파괴, 멸망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생명이 파멸되고, 우리의 생명이 파괴 되는 것은 우리 생명이 위험에 빠져서가 아닙니다. 그런 위험은 운이 좋아서 용케 벗어날 수도 있고, 또 누구의 도움으로 벗어날 수도 있습니다. 우리 생명이 결코 파멸에서 구원 받을 수 없었던 것은 죽음이라는 파멸입니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입니다. 성경에 보면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로마서 6:23)”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죄로 말미암아 파멸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습니다. 이런 우리를 하나님께서 구속하여 주셨습니다. 여러분, “구속(redeem)”의 의미를 아시지요? 하나님께서 우리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시려고 우리를 값을 치르고 산 것입니다.
‘속량하다(까알)’ 는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救贖) 사역을 나타내는 단어(뤼트로마이)와 동일합니다(눅 24:21, 롬 3:24). 값을 지불하여 파멸과 멸망 가운데서 건져내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 점에서 본문에는 죄인들을 피로 값 주고 사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이 암시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의 생명을 죽음에서 구속하시는 데에는 자신의 희생이 있었으며, 그러한 희생은 갈보리 언덕에서 죄인들을 대신하여 죽임을 당하신 구속주(Redeemer)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으로 구체화되고 절정에 달합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생명을 죽음에서 속량하시는 은총을 베푸십니다. 본 절은 분명 오실 메시야의 구원 사역에 대한 예언적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모두 파멸에 해당하는 저주받은 인생들입니다. 죄의 노예가 되어 예정된 죽음을 향해 한 걸음씩 걸어가는 것이 인생의 숙명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 값을 지불하시고 우리 모든 인생을 죽음과 파멸에서 구원하신 것입니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다윗은 자신의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신 하나님을 송축합니다. 과연 우리 하나님은 임박한 위험으로부터도 우리를 건져내시는 분이십니다.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 주시는 은혜
4절 “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8절 “여호와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용서하시며 사랑하시는 ‘라흐밈’의 하나님 즉 긍휼과 자비와 인애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인애가 풍성하신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고 또 고백했습니다. “여호와여 주의 긍휼(라흐밈)을 내게 그치지 마시고 주의 인자와 진리로 나를 항상 보호하소서”(시40:11).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라함) 이는 저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로다”(시103:12-14).
16세기에 폴란드의 유명한 천문학자 코페르니쿠스는 세상을 떠날 때 자기의 묘비를 이렇게 기록해달라고 그랬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바울이 가졌던 특권을 구하지도 않습니다. 베드로에게 주셨던 능력을 구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예수님 십자가 지실 때 옆에 있었던 강도에게 베푸신 그 긍휼을 구할 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셔서 그의 독생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사 우리의 모든 죄와 저주를, 질병을 짊어지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게 하셨습니다. 우리를 긍휼히 여기신 그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는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오늘 이렇게 축복된 삶을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언제나 주님 앞에 나와서 주님의 긍휼하심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주님 나를 긍휼히 여겨 주옵소서. 나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내 힘으로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나는 피곤하고 힘들고 지쳤습니다. 나는 포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 나를 긍휼히 여기시고 나를 도와주시옵소서.” 그 때 주님께서 일하시는 것입니다. 그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애 3:22-23=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지금까지 복을 누리고 살아온 것은 우리가 잘나고 믿음생활 잘 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요. 주님께서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한량없는 긍휼 때문이요. 용서와 사랑 때문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그 은혜를 무엇으로 다 보답할 수 있겠습니까?
시116:12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여호와께 무엇으로 보답할까.” 시116:17 “내가 주께 감사제를 드리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이다.” 그 은혜를 보답하는 감사의 제사를 드리며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그 위대하신 이름을 송축하는 것뿐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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