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 설교 모음

[스크랩] 예수님을 부인한 베드로

하나님아들 2016. 6. 15. 16:26

예수님을 부인한 베드로

본문: 누가복음 22:54~ 62 • 찬송 290장 (통 412장)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눅 22:61~ 62)

삼년 동안의 공생애를 모두 마치고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있는 예수님의 주변에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공생애기간 동안에도 예수님의 주위에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자신의 처한 상황에 따라 각각 다른 마음과 태도로 주님을 만났던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십자가의 죽음을 앞둔 예수님의 주위에 등장하는 사람들도 서로 전혀 다른 이해와 생각으로 예수님을 대하고있습니다. 그중의 한 사람, 베드로입니다. 그는 '죽을지언정 절대로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다' 고 호언장담하던, 이를테면 수제자였습니다. 물론 그는 분명 진심으로 그렇게 다짐했고 또 그렇게 할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을 잡으러 온 말고의 귀를 잘랐고(요 18: 10~11), 예수님의 말씀대로 물 위를 걷다 물에 빠지기도 했고(마14: 28~31), 한 소녀가 그를 ‘예수와 함께 있던 자’라고 고발하자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하는 '연약함' 을 보였습니다(막14: 66~72). 바로 이 '연약함' 이 인간의 진짜 모습입니다. 생각지도 못한 자리에서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사람에게 무너지는 것이 우리입니다. 그러니, "한결같겠다" 큰 소리 쳐봐야 아무 소용없습니다. 오히려 입다물고 주님 앞에 무릎 꿇을 때 우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게 될 것입니다(엡6:10~11).

두려움과 공포로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배시자 베드로였지만, 슬피 울며 후회하고 방황하는 베드로를 부활하신 예수님은 찾아가 큰 비전을 주셨습니다. 우리의 눈물은 어떤 것입니까? 때늦은 후회의 눈물입니까, 아니면 진정한 회개의 눈물입니까?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마9:13)

엘 그레코(El Greco)라는 화가가 있습니다. 그가 그린 ‘참회하는 성 베드로’라는 그림에서 베드로는 천국의 열쇠를 쥐고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은 모두 이미 천국의 열쇠를 가지고 있습니다.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매일의 삶 속에서 우리는 더러운 죄악으로 더럽혀집니다. 은혜 받아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음에도 얼마나 많은 죄악 속에서 살고 있습니까?

천국의 열쇠를 쥐고 있어도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천국의 열쇠를 쥐었지만 하나님이 우리의 죄악을 사하지 않으시면 안 되는 줄 알기에 하나님을 주목하는 베드로의 모습, 이것이 ‘참회하는 성 베드로’라는 그림입니다. 중요한 것은 죄를 범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죄를 범하고 실수하며 잘못합니다. 죄를 범하지 않을 수 없기에 그 죄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죄 사함의 은혜를 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먼저 자신의 죄를 깨닫는 것입니다. 남을 탓하는 것도 아니고, 사회를 탓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제일 먼저 하나님 앞에 나 스스로를 깨끗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억울하다 하지 말고 나를 들여다보아 나를 정결하게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회를 들여다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먼저 들여다보는 것이 예수 믿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우리에게 자신을 먼저 들여다볼 수 있는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이 고난을 이길 수 있는 메시지를 주실 것입니다.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벧전5:9)

고난에는 나의 잘못으로 인한 고난과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고난이 있으나 베드로의 경우 첫 번째가 고난의 이유로 보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고난이 있다는 것은 우리가 살아있다고 하는 증거입니다. 죽은 사람에게는 번민이나 고난이 없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다른 사람보다 좀 더 값진 삶을 살아가려는 신앙인에게는 더 많은 십자가와 시련이 있기 마련입니다. 십자가의 고난은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로 이끕니다. 우리의 고난의 아픔은 하나님을 발견하는 길이 됩니다. 십자가 없이는 구원의 사건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기독교의 진리는 십자가 없이는 면류관도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아픈 상처를 싸매어 주고, 낫게 하실 것입니다.(벧전4:12- 13, 약1:2)

세상만사에는 성공과 실패가 있는 것과 같이, 신앙생활에도 성공자가 있고 실패자가 있는 것입니다. 시몬 베드로는 불학 무식한 갈릴리 바다의 어부로서 주님의 특별은총을 받고 수제자로서 영광스러운 주님의 가르침을 받았고 수많은 기사와 여러 가지 이적들을 직접 목격하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던 제자였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하는 신앙고백으로 칭찬을 받은 바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도 우리와 같은 연약한 인간인지라 가장 중요한 시점에서 주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하여 한때는 신앙의 성공자가 일시에 실패자가 되는 아픔을 맛보았던 때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베드로가 실패하게 된 원인은 무엇이었을까요?

첫째는, 자기과신이었습니다. 신앙인에게 있어서 가장 위험한 일은 자기과신입니다. 자기를 지나치게 과신하는 것은 신앙인으로서 금물입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말하기를 "그런즉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10:12)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항상 두렵고 떨림으로 받은 구원을 성취하도록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 "이만하면 됐다"고 할 때에 넘어지는 일이 생기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자기 자신을 지나치게 과신하였기 때문에 겟세마네에서 기도해야 할 중요한 시기에 기도하지 아니하고 졸기만 하였습니다. 기도의 준비가 없었던 그에게 갑자기 위험이 닥치니까 칼을 뽑아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치게 되는 혈기가 나오게 되었습니다. 자기 과신으로 아무런 마음의 준비도 없이 예수님을 따라가던 베드로는 비자(계집종) 앞에서도 주님을 변호할 만한 힘이 없어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블레셋의 골리앗은 자기의 힘만 과신하다가 실패하지만, 다윗은 자기의 무능함과 부족을 알고 여호와를 신뢰하므로 승리하였던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는 자기를 과신하지 말고 성령의 도우심을 요청할 때 신앙에서 낙오되지 않고 성공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과신하면 안 된다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베드로는 자신을 다른 사람과는 다른 존재로 생각하는 우월감을 가졌을 때가 많았음을 성경을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다 주님을 버릴찌라도 나는 주님을 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베드로의 이야기 중에 등장하는 말 중에 [나] 라고 하는 말이 문제입니다. 다른 사람에 비해서 자신은 다르다는 생각입니다. 이러한 자세는 영적으로 볼 때 가장 사탄이 이용하기 쉬운 자리에 자신을 노출시키는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의 자세에서도 바로 그러한 생각 때문에 결국 예수님을 받아 드리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들의 기도에도 나는 저 세리들과 같지 아니합니다. 자신을 특별한 존재로 드러내기를 좋아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자세는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은 것 같으나 실제로는 은혜를 잃어 가는 것입니다. 가상 임신이라는 것이 있다고 합니다. 아니면서도 꼭 같은 증상을 동반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가상 충성자들이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충성하는 자 같은데 주님 앞에 설 때에는 아무것도 없는 성도인 것입니다. 베드로가 다른 제자들 보다 낫다고 생각했을 때는 실제로 다른 제자들보다 나은 것이 전혀 없었을 때였습니다. 시험이란 대체로 여기서부터 출발합니다. 다른 사람들 보다 내가 더 낫다는 생각이 아주 잘못된 생각입니다. 성경은 다른 사람이 죄를 지을 때 나도 그러한 죄를 지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더 조심하고 경성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성경 속에는 자신을 믿고 있을 때가 항상 넘어짐의 시기였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둘째, 멀찌감치 따라갔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한때 장담하기를 주와 같이 옥에도, 죽는 데도 가겠다고 장담하였으나 정작 주님을 위해서 나서야 할 때는 멀찍이 주를 따라갔다는 데 실패의 원인이 있었습니다. 목자와 멀어진 양떼는 길을 잃을 수밖에 없습니다. 남편과 아내 사이가 멀어지면 생이별 할 수밖에 없는 것이요, 태양에서 지구가 멀어질 때에는 추운 겨울이 되는 것과 같이, 주님과 멀어진 신자는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내 믿음이 지금 기도생활과 멀어지지는 않았는가? 교회출석이 줄어지지 않았는가? 말씀을 가까이 하고 있는가? 봉사와 충성과 감사가 멀어지지는 않았는가? 수시로 점검하여 봅시다.

셋째, 시험은 환경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모른다고 한 환경은 이러한 것을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우선 베드로는 빌라도의 법정이 아닌 가야바의 집에서 주님을 모른다고 했던 것입니다. 가야바의 법정은 사형을 집행하는 곳이 아닙니다. 재판은 결국 빌라도의 법정에서 최후의 판결이 나게 되어 있습니다. 즉 베드로는 이미 마음에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가야바의 집에서 주님을 부인했던 것입니다. 또 칼을 든 군인이 베드로를 붙잡고 위협을 했더라면 베드로가 본능적으로 두려워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할 수도 있음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에게 질문한 사람은 계집아이였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맹세하고 심지어 저주까지 하면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했던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베드로는 이미 마음으로 주님을 모른 채 하기로 생각하고 가야바의 집에 들어갔던 것입니다. 이것은 그 후 그가 변화를 받아 공회 앞에 서서 내가 너희 말 듣는 것이 옳은 가 하나님 말씀 듣는 것이 옳은가 결단하라 우리가 보고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노라 한 것을 비교하여 보면 얼마나 큰 차이가 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때 베드로는 헤롯에게 체포되어 다음날 사형에 처해 질찌도 모르는 그 밤에 옥중에서 수족이 결박되고 보초들이 지키는 가운데서도 깊이 잠들어서 천사가 옆구리를 칠 때 비로써 깨어났던 그 담대성과 비교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위해 죽을 것도 각오 할 때에 환경은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성경에 많은 신앙인들이 넘어지는 것은 환경 때문이 아니었고 신앙이 없었기 때문이며 신앙 승리의 모든 요소도 환경이 문제가 아니라 그 믿음이 승리케 한 것입니다.

넷째, 불신자와 멍에를 같이 할 때 실패하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멀찌감치 따라와서 악당들의 무리와 불을 쪼이는 불신자와 멍에를 같이 하였습니다. 성도는 세상에서 구별된 무리요, 거룩한 무리입니다. 세상의 빛이요, 소금입니다. 교회에서는 신자요 교회밖에 나가면 불신자와 다름없는 세속주의나 자유주의로 사는 것을 주님은 원치 아니하십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실패자로 끝나지 않고 다시 일어났습니다. 그는 승리하였습니다.

* 기도: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는 예수님 앞에 겸손히 무릎 꿇고 주님의 도우심을 간구하오니 성령의 은총으로 인도하시어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게 하소서. 어떤 형편에 처하든지 변함없는 믿음을 주시옵소서.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한태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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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한태완 목사님 설교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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