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 설교 모음
[스크랩] 복음의 비밀 (요 9: 3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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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비밀 (요 9: 35-41)
①기억상실증에 걸린 한 남자가 의사를 찾아갔습니다. 그는 의사에게서 이런 진단을 받았습니다. 당신의 기억을 되살리려면 당신의 시력이 손상될지도 모릅니다. 그렇지 않으면 방법이 없습니다. 선택은 당신이 하십시오. 기억을 되찾길 원하십니까? 아니면 두 눈이 멀쩡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는 심사숙고한 후 대답했습니다. 저는 기억을 되살리기보다는 제 시력을 그대로 유지하겠습니다. 제가 과거에 어디에 있었느냐를 보기보다는 앞으로 어디로 가게 되는지를 보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②우리는 과거의 일을 바로잡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과거의 문은 이미 닫혀 있지만 미래는 새로운 가능성으로 열려 있습니다. 하지만 과거의 실패나 성공에 계속 얽매여 있다면 앞으로도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우리가 크리스천으로서의 삶을 살면서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것이 있는데 바로 과거에 지배받지 않으면서 과거로부터 교훈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크리스천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몇 번 노력하다 실패한 후에는 다시 시도하지 않기로 마음먹습니다. 그들은 과거의 기억 때문에 미래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눈이 멀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확신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과거조차도 기꺼이 좋은 결과를 낳게 해주실 것이라고 믿을 수 있습니다.(실패한 인생, 성공하는 그리스도인 / 어윈 루처) 이것이 바로 성공하는 인생의 비결입니다. 과거의 기억을 되살리기 보다는 미래의 가능성에 대해 눈을 뜨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해야할 믿음의 비밀입니다.
③오늘의 본문은 예수님께서 그 눈뜬 소경이 쫓겨났다는 소식을 듣고 그에게 찾아가시는 장면으로부터 시작됩니다(35절). 바로 직전에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바리새인들이 소경을 붙잡아 놓고 심문하였고 우선 안식일에 소경을 고쳤다는 것을 문제를 삼았었습니다. 왜냐하면 안식일에는 죽기 직전의 병을 제외하고는 안식일에 고치면 안된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바리새인들과 유대 당국자들은 그 부모들에게 그 눈뜬 사람이 날 때부터 소경이었는지를 물었지만 이에 대하여 부모들은 날 때부터 소경이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고, 지금 또한 낫게 된 것도 분명한 사실이라고 말하면서 어떻게 낫게 되었는지는 자식에게 물어보라고 대답을 회피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안식일을 범하면서 눈을 떴다는 것은 안식일의 계명을 어긴 죄로 인해 그 사회에서 출교를 당하는 형벌을 무서워했기 때문입니다. 그때 당시로 유대인의 공회로부터 유대교 출교를 당한다는 것은 많은 불이익과 수모를 당하는 일이었습니다. 이 청년의 부모는 분명히 소경된 자기 아들을 예수님께서 고치셨고 그렇다면 분명히 이 예수는 구약의 많은 선지자가 예언한 메시야 곧 그리스도이신 것이 틀림이 없다는 믿음이 있었음에도 이 부모들은 유대인 조사팀들이 왔을 때 비겁하게 대답을 회피했습니다.
④그러나 그 눈뜬 자는 유대인 당국자들에게 어떤 태도를 보였습니까? 예수가 죄인인지 어쩐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 아는 사실은 자신이 소경으로 있다가 지금은 보는 것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25절). 더군다나 그들도 예수의 제자가 되려고 하느냐?고 반문까지 했었습니다(27절) 또한 예수를 안식일과 같은 율법을 어기는 죄인이라고 말하는 유대당국자들 앞에서 “하나님이 죄인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들으신다고 예수가 죄인이 아닐 뿐만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오지 아니하고서는 그런 창세 이후로 눈뜨게 되는 사건이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여 대답하였습니다(33절)
⑤이처럼 날 때부터 소경된 청년은 그의 눈을 낫게 하신 예수를 옹호하다가 유대인의 공회에서 쫓김을 당하였습니다. 그러니 당시 소경은 사실 눈뜨고서 손해를 보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의 그룹에서 출교를 당했기 때문입니다. 35절을 보십시오. 쫓겨남을 당했다고 했습니다. 출교는 완전히 그 생활권에서 쫓겨나는 것으로서 사람들이 5 규빗 이상 가까이 하지 못하게 되어 있고, 같이 식사나 교제가 허락되지 않고 죽어도 울어주지 못하게 되어 있으며 오히려 돌을 던지면서 저주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를 말하지 않았던 눈뜬 소경의 부모들은 출교를 당하지 않았으나, 자신의 눈을 하나님의 보내신 자로서 예수를 말하던 날 때부터 소경인 사람은 출교를 당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그가 출교를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에게 찾아가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복음의 비밀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복음의 비밀은 ;
1. 인간에게 찾아 다가가시는 예수님이십니다(35-39).
⑴이 눈뜬 청년은 욕심 때문에 쫓겨난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을 시기했거나 멸시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로지 그는 예수를 따르려 했기 때문입니다.
①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예수 때문에 병이 낫고, 그래서 그 분의 은혜에 감사해서 주님을 따른다고 할 때 얼마나 정상적인 삶이 회복된 것입니까? 그러나 예수를 알지도 모르고, 그래서 예수를 따르지 않았던 날 때부터 소경된 자는 구걸하고 지내는 설음은 있었어도 까닭없는 핍박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의 동정을 받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제 눈을 뜨고 보니 예수 때문에 미움을 당하고, 예수 때문에 핍박을 받고, 예수 때문에 쫓겨나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이 소경의 행복은 과연 날 때부터 소경인 채로 있던 때가 행복했나요? 아닙니다. 행복은 내가 느끼기 나름입니다. 예수 때문에 천하의 모든 진리를 다 알게 된 기쁨은 핍박 중에서도 예수를 담대히 증거하는 이 눈뜬 청년을 보니, 분명 그의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 중 예수 때문에 눈뜬 때가 가장 행복했을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②오늘도 예수를 진정 만나서 예수를 따르다가 핍박을 받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성경은 마 5:11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라고 예수 때문에 핍박받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⑵성경에는 주님 때문에 쫓겨난 사람을 많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①야곱을 생각해 봅시다. 야곱이 탄생할 때부터 야곱에게 하나님의 위대한 축복의 뜻이 있다는 것을 그의 어머니 리브가는 잘 알았습니다. 형 에서와 쌍둥이지만,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길 것이란 예언을 리브가가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야곱의 어머니 리브가가 인간의 방법으로 그것을 해결하려고 아버지가 좋아하는 별미를 해드리고 에서로 변장하여 아버지 이삭의 축복을 받아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탄로가 나서 야곱은 아비의 집에서 도망나와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쫓겨가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②또한 요셉을 보세요! 요셉은 하나님께서 주신 꿈 때문에 형들에게 쫓겨났습니다. 요셉은 다른 형제들보다 뛰어날 것이라는 꿈 이야기를 말했다가 시기를 받아서 쫓겨나 애굽의 상인에게 팔리고 보디발의 집에서 종살이를 하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③위대한 전도자 사도 바울은 어떻습니까? 예수 믿는 자를 잔해하라는 유대당국의 공문을 가지고 기독교인들을 추적하며 가다가 다메섹이란 곳에서 꼬꾸라지는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부활하신 주님이 그를 만나주었고 이제는 예수믿는 자를 핍박하는 자가 아니라 복음을 이방에 전하라는 사명을 받아서 지중해 연안을 4번씩이나 돌면서 선교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선교하는 가운데 얼마나 많은 동족 유대인으로부터 쫓김을 받았습니까? 겨우 광주리에 달아 내려 성 밖으로 쫓겨 나기도 했습니다. 행9:25 그의 제자들이 밤에 광주리에 사울을 담아 성에서 달아 내리니라 루스드라에서는 거반 죽게될 정도로 맞고는 죽은 줄 알고 성 밖으로 쫓겨 나기도 했습니다. 행 14:19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초인하여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성 밖에 끌어 내치니라
④한국에 복음이 들어왔을 때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쫓김을 받았듯이 가문으로부터 쫓김을 받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를 잘 믿으려고 하다가 가정으로부터 쫓겨나고, 가족으로부터 쫓겨나고, 친구로부터 쫓겨나고, 직장으로부터 쫓겨나고, 남편으로부터 쫓겨나고, 학교로부터 쫓겨나는 등 여러 공동체로부터 쫓겨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쫓겨난 사람의 형편은 쫓겨난 이유야 어떠하든지 쫓겨난 사람은 외롭고 고독합니다. 쫓겨난 사람은 괴롭습니다.
⑶그러나 예수 잘 믿다가 쫓겨나는 데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이 있습니다. 예수 때문에 쫓겨나서 외롭고 고독할 때 하나님은 그를 만나주십니다.
①야곱을 보세요! 야곱은 어머니 리브가가 본 야곱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인간의 방법으로 이루려다가 오히려 형과 아버지의 심기만 불편하게 만들었습니다. 야곱이 브엘세바를 떠나 하란으로 향하여 가다가 한 곳에 이르러 해는 지고 누울 곳이 없어 돌을 베개하고 잠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이 꿈에 나타나셔서 야곱에게 엄청난 언약을 맺습니다(창28:15).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야곱이 잠이 깨어서 그 새벽에 귀한 것을 깨닫습니다.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도다” 야곱은 벧엘에서의 하나님의 이 약속 때문에 그가 다시 거부가 되어 가나안으로 돌아올 때까지 한 시도 하나님의 약속을 잊은 적이 없을 것이고, 야곱은 외롭고 고독할 때마다 그 약속을 붙들고 하나님을 바라보며 승리하였던 것입니다.
②우리 주님은 우리가 외롭고 힘들때도 이처럼 약속을 붙들고 승리하기를 원하십니다. 아무리 사람이 나의 사정을 알아준다 해도 세상의 다른 만남을 통해서는 절대 고독과 쓸쓸함을 달랠 길이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만나야 외롭고 고독함을 이길 수 있습니다. 이 눈뜬 사람에게도 역시, 예수님은 주님을 따르다가 쫓겨났다는 말을 들으시고 그 사람을 찾아 주셨습니다. 주님은 주를 위해 살다가 쫓겨났다면 찾아오셔서 우리의 형편을 살피시고 들으십니다.
③또한 비록 자신의 교만 때문에 쫓김을 받더라도 주님은 당신의 백성에게 찾아와 고통을 이기도록 힘주시는 분이십니다. 실수와 허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고난을 외면하시지 않으십니다. 주님을 배반한 베드로에게 부활하신 주님이 또 찾아가셨습니다. 한 번 택하신 자를 끝까지 붙드시며 찾아내시는 주님이십니다. 선지자 요나가 주님으로부터 니느웨 성에가서 회개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면하라는 말씀을 선포하라는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고 다시스로 도망갈 때에도 우리 하나님은 그에게 풍랑을 만나고 큰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 3일 동안 있으면서 회개할 기회를 주셔서 결국 요나로 하여금 주님께 받은 사명을 다시 감당하게 만드셨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자식이 없을 때 그의 아내 사래의 요청으로 그녀의 몸종 하갈을 통하여 아브람의 아들을 낳게 됩니다. 그런데 아들을 낳은 후에 하갈은 태도가 달라집니다. 오히려 그의 주인 사래를 멸시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사래 사이에 갈등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13년여가 지난 뒤에 하갈은 아브라함의 집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하갈은 사래의 여종으로 들어가서 주인의 말을 듣고 아브람의 아들을 낳고는 주인을 멸시하다가 오히려 주인에게 학대를 받고 쫓겨난 하갈이 술이라는 곳에 길가에 있다가 여호와의 사자를 만나게 됩니다. 이때에 하갈이 이 샘의 이름을 이렇게 지었습니다. ‘브엘라해로이’ 이 우물에서 만난 하나님은 나의 모든 것을 살피신다는 뜻입니다. 인생살이에서 나는 쫓겨났다고 생각할 때에 하나님은 우리를 내어쫓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우리를 더욱 관심있게 살피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④만일 우리가 세상으로부터 쫓겨났다고 한다면 하나님은 오히려 우리의 기도를 더 잘 들어주십니다. 이스라엘의 왕 중에서 가장 뛰어난 왕을 꼽으라고 하면 아마 대개 다윗 왕을 추천할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 왕만큼 추방을 당하고 극심한 쫓김을 받은 왕도 드물 것입니다. 다윗은 골리앗과 싸움에서 돌아오자 사람들이 사울 왕보다 다윗을 더 존경하는 민요를 불렀습니다.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라고 불렀습니다 이것 때문에 다윗은 장인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어 동굴에도 숨고 적군나라에 피신하기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그 아들 암살롬의 란을 당하여 예루살렘에서 쫓겨가게 되었습니다. 아들에게 쫓겨가면서 다윗 왕이 지은 시가 있습니다. 시 3편에 보니까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1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도소이다 2 많은 사람이 있어 나를 가리켜 말하기를 저는 하나님께 도움을 얻지 못한다 하나이다 (셀라) 3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니이다 4 내가 내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 다윗은 이런 쫓김 속에서도 자신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을 절대 신뢰하였기 때문에 그 많은 환난을 승리한 위대한 왕이 된 것입니다.
⑤하나님은 때로 우리에게 쫓김을 당하는 자리에 내어놓기도 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반드시 인생의 외로운 처지에서 괴로운 현장에서 우리를 만나 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 삶의 터전에서, 가정에서, 친구들 사이에서, 소외감을 느낄 때가 있습니까? 경제생활에 쪼달림을 받으십니까? 바로 이때가 하나님의 만남이 준비된 때입니다. 바로 코앞에 와있는 하나님을 만날 기회를 못하고 놓치고 있지는 않습니까? 모든 일에 대하여 쫓김을 당하는 순간 하나님을 보지 아니하면 숨을 쉬고 먹고 자기는 하겠지만 진정한 문제해결은 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실상은 영적으로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삶이 될 것입니다. 자신에 대한 고통만 가지고 살다가는 인생을 허무하게 보내고 맙니다. 고통 때문에 주님을 만나야 진정 우리는 살 길을 찾게 됩니다.
⑥따라서 예수를 잘 믿으면 나의 인생이 다 잘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구별되는 어려움과 고통이 계속됩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이 더욱 더 영안이 활짝 열려지기를 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고난이 없다면 하나님을 온전히 바라볼 수 없기 때문에 영안이 열리지 않게 됩니다. 육신의 것으로만 만족하려고 하면 영안이 열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육신의 어려움과 고통을 통해서 하나님을 신령하게 만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의 영안이 어설프게 열리지 말고 아주 활짝 열리게 하기 위해서 예수를 믿으며 고난 당하는 자, 핍박을 당하는 자에게 찾아가십니다.
⑷그런 의미에서 기독교의 복음은 은혜의 복음입니다.
①은혜란 하나님이 우리 인간의 삶 속으로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다른 종교는 인간이 신을 향해 종교적인 수행과 열심, 공로와 선행, 지식과 인생철학으로 도달해 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중보자 없이는 결코 만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원수된 자는 화해자없이는 결코 만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생명이 되셔서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화목제물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우리와 하나님의 중보자가 되셔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만나고 예수를 따르는 길이 바로 하나님을 만나는 길이요, 우리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이 됩니다. 믿습니까? 왜냐하면 우리 예수님은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우리는 죄용서를 받을 뿐만 아니라, 죄로 인해 발생된 모든 인생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근본문제가 해결된다고 말합니다.
②모든 문제에는 근본 문제가 있고 지엽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병이 들었다면 병은 지엽적인 문제이고, 하나님을 떠난 영적인 병인지, 죄를 짓고 생긴 병인지, 마귀가 가져다 준 병인지, 아니면 인간이 실수해서 생긴 병인지, 사회적으로 불안해서 얻어진 심리적인 병인지 진단을 해봐야 합니다. 그런데 그 모든 병의 뿌리는 인간 내면에 있습니다. 인간 내면에 어떤 상처가 남아 있으면 병의 증상은 잠시 해결되긴 해도, 근본 뿌리가 고쳐지지 않아서 또 재발됩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근본문제는 하나님을 떠난 문제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만남으로 해결될 수 있습니다.
③이 소경이 우리 주님을 만나서 자신이 근본적으로 불행하게 소경으로 태어난 사실을 하나님이 하실 일을 나타내려 하심이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불행을 극복한 것처럼, 우리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해결됩니다. 따라서 영안이 밝아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향하신 계획을 아는 은혜가 임하면 인간의 불행은 극복되는 것입니다.
2. 인자를 믿느냐?
⑴소경은 단순히 눈을 뜬 것으로 만족하고 말았더라면, 아마도 하나님의 더 큰 계시를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왜 주님이 그 눈뜬 자를 다시 찾아와 만나 주시므로 그의 믿음을 완전하게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①만일 그가 눈 뜬 것으로 만족하고 유대인에게서 쫓겨나는 어려움과 괴로움과 수모를 당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신 예수그리스도를 만나는 축복의 반열에 들지 못했을 것입니다. 사실 이 소경이 육신의 눈을 뜨는 것도 대단한 기적이지만, 그것은 사실 영적인 눈을 뜨는 것의 억만 분의 일도 안됩니다. 오히려 어떤 분은 영적인 마음의 눈이 떠졌기 때문에 육적인 눈을 차라리 뜨지 않기를 원하며 지내는 분들도 있지 않습니까? 보아서 시험들고 미혹되는 것들은 차라리 보지 않고 하나님의 영원한 것들을 보면서 살겠다는 것 아닙니까?
②눈 뜬 소경은 예수님으로부터 시력을 되찾는 기쁨을 누렸을 뿐 아니라 또한 바리새인들로부터의 심문과 출교의 고난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직 예수님을 아는 지식과 믿음에 온전히 이르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아무리 문제가 해결됐어도 예수에 대한 확실한 신앙고백이 없이는 믿음을 지키기가 어렵습니다. 사실 믿음이 좋다가도 문제가 생기면 실족하는 경우를 종종 우리 주변에서 보지 않습니까? 믿음이 더욱 다져지는 자리에 나아가려면 계속 주님을 신뢰하고 만나야 합니다. 그래야 믿음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다음 주에 있을 심령부흥회에 여러분의 믿음을 또 다지고 또 다지는 기회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③문제가 생기면 우리의 믿음이 나약해진다는 사실을 잘 아시는 예수님이 그러한 고통과 불완전한 상태에 있는 그를 만나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에게 인자를 믿느냐?고 질문하셨습니다(35절). .
35 예수께서 저희가 그 사람을 쫓아냈다 하는 말을 들으셨더니 그를 만나사 가라사대 네가 인자를 믿느냐 이 질문에 대해 눈 뜬 소경은 자신이 예수님을 믿기 전에 그분이 누구인지 알고 싶다고 말하였습니다(36절). 36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인자(人子)라는 말은 그 당시 메시야를 가르키는 말로서, 당시 사람들은 인자라는 단어를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단어적인 의미로는 사람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만, 하나님이 인간이 되셔서 이 땅에 오셨다는 점에서 인자라는 말을 씁니다. 결국 눈 뜬 소경은 자기 앞에 서신 분이 자기를 고치신 예수님이요 그분이 또한 인자, 곧 메시야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예수님 앞에 엎드려 경배하며 신앙을 고백하였습니다(37,38절) 37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38 가로되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
④여러분, 그동안 소경이 눈을 뜬 다음에 그가 아는 주님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기억하십니까? 이 소경이 눈을 뜬 후에 11절에 보면, "예수라는 사람이 눈을 뜨게 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다가 17절에 보면, 사람들이 소경의 눈을 고쳐준 사람을 누구라고 보느냐 고 묻자, "그는 분명히 선지자"라고 대답합니다. 더욱이 유대인들이 다시 재차 심문하자, 그는 33절에 보면,"그는 하나님께로 온 분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다시 예수님이 그를 만나서 이렇게 묻습니다. 35절에, "네가 인자를 믿느냐?" 소경이 대답합니다. 36절에,"주여 뉘시오니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예수님을 인자로 믿습니다. 메시야로 믿는 것이었습니다. 유대 사회로부터 쫓겨난 이 눈뜬 사람이 그 어려운 상황에서도 예수를 분명히 신앙고백한 것은 그의 믿음이 확고히 섰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⑵언제 믿음이 자랍니까?
①믿음에 확고히 서려면 평온할 때보다 환란 때 믿음이 자라고 확고하게 됩니다. 조건적인 신앙에는 절대 믿음이 자라지 않습니다. “이번 일만 잘 해결되면 예수를 잘 믿겠습니다.”그렇게 해서 해결된 다음에는 믿음이 자란 경우를 잘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극심한 환란에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믿겠다”고 하는 의지적인 신앙에는 절대 믿음이 자랍니다. 그런 믿음은 다음에 더 큰 어려움과 고난이 와도 믿음이 쓰러지거나 흔들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영혼의 갈급한 만큼 자라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왜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습니까? 갈급하니까 주님을 찾기 때문에 그 심령안에 주님의 은혜로 채울 자리가많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세상의 것들로 가득 차 있다면 주님은 그 마음에 자리잡을 수 없어서 은혜를 받아들이지 못하게 됩니다. 왜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뜻에 갈급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역사하기를 바라는 믿음에 대한 갈증 때문입니다. 믿음이 자라고 성숙해 지려는 자에게는 애통하는 마음이 생기게 되어 있습니다. 그만큼 믿음에 대한 씨름의 질문이 많아지기 때문입니다. 점점 영적인 눈이 뜨여지는 가운데 있는 사람은 신앙의 갈증이 생기는 것이 당연합니다.
②그런데 이런 갈증을 우리 주님은 절대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37절에서 다시 주님이 대답하십니다.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38절에,"주여! 내가 믿나이다." 이 구절에 대한 주석을 보니까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자신의 눈을 뜨게 해 주신 예수께 그의 시선을 고정시키고 그를 메시야로, 곧 인자요, 하나님의 아들로서 경배의 대상으로서 알게되어 경배하는 것입니다. 육신의 눈을 뜬 후, 영적인 눈을 뜨는 순간이었다."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적의 의미요, 예수께서 궁극적으로 병을 고치신 이유입니다. 어떤 시련과 환란이 와도 영적으로 절대 신앙을 가지고 승리하기를 원하시는 것이 우리 주님의 뜻입니다. 여러분의 심령안에 주님을 찾는 갈급함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믿음이 자라고 영적으로 견고해집니다. (복음송: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 헤메이듯이 )
③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배고프다가 빵을 얻으면 빵이 귀한 것입니다. 그러나, 배가 부르면 빵은 그렇게 귀한 것이 아닙니다. 가난하고 병들과 어려우니까 사랑이 그립고 사람하나 찾아오는 것이 귀한 것입니다. 출세하고 부자되고 잘살아 보십시오. 사람들이 자꾸 찾아 오면 귀찮고 복잡한 것입니다. 국회의원도 선거시즌이 되니까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이 귀해서 시장바닥에도 찾아가서 만나지, 당선되어서 한참 일하는데 사람들이 자꾸 찾아와 이것저것 조르면 귀찮은 것입니다. 소경이니까, 눈 뜬 것이 천하에 감사한 것이지, 항상 눈뜨고 사는 사람에게는 그저 그런 것입니다. 소경이 눈뜨고 살다가 눈감을 날이 안온단 말입니까? 언젠가는 눈감아야 할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정말 중요한 것이 이것입니다. 소경이 구원의 메시야 예수그리스도를 발견한 것입니다. 그것에 대한 영적인 눈이 떠지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감사한 것입니까?
④조지 폭스라는 사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탄도 병들면 천사가 된다!" 어두움을 헤매고 다닌 이 소경이 눈뜨고자하는 갈증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오랜 세월동안 자신의 삶의 의미를 못찾고 헤메였을 것입니다. 아니 죽음을 택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진 목숨이 살아서 구걸하며 하루 하루를 아무 소망없이 살다가 주님을 만났습니다. 거기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참된 의미가 무엇입니까? 주님을 향한 영안이 열린다는 뜻입니다. 영안이 열린다는 말은 영원하신 주님을 구원자로 알았다는 것이고, 이제는 내가 이 세상의 중심이 아니라, 우리 주님이 섬김을 받을 자요,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지구가 중심이 아니라, 태양이 중심이 되어 지구가 돌고 있는 것처럼...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나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인자(하나님의 아들)을 위해서 사는 삶의 목적을 발견하는 것을 본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환란과 핍박 중에도 영안이 밝은 자들은 주님을 위해 사는 목적을 바라보는 것이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뜻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심판하시는 예수님(39-41). ⑴이제 우리는 소경이 눈 뜬 사건의 결론 부분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시점에 왔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무엇일까요? 요한복음 10:10과 마가복음10:45에서 요10:10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막10:45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①인간을 사단에서 건져내 구원하시고 풍성한 삶을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 그 분은 자기 목숨을 십자가에서 대속제물로 주심으로 우리를 죄에서 건져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본문 39절에서는 예수님은 심판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고 말씀합니다.. 39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②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영적 소경들의 눈을 뜨게 하고, 바리새인들과 같은 교만한 자들의 눈을 어둡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말씀합니다.
⑵그러면 심판의 의미를 세 가지로 살펴보겠습니다.
①심판하면 날벼락을 내리듯이 인간의 죄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으로 생각하지만, 사실 하나님의 심판은 그런 심판이 아니라 죄인임을 정죄하시는 심판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 우리가 잘 아는 복음의 말씀이 있은 다음 구절 17절 이하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18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19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하나님이 예수님을 어둠의 세상에 생명의 빛으로 보내셨습니다(요 1장). 그런데 어두움을 더 사랑하는 자들은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정죄를 당합니다. 그래서 빛 가운데로 나아오지 못하고 어둠 가운데로 피하고 숨습니다. 다시 말해서 생명의 빛으로 오신 예수를 영접지 아니합니다. 바로 그 어둠에 속한 자들이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유대 종교 당국자들이라는 것입니다. 다시말해서 이 말씀은 세상 사람들이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으로부터 빛을 받으면 어둠의 정체가 드러나기 때문에 빛으로 나오려 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의 어둠이 빛인 줄 착각하고 더욱더 그 어둠에 집착한다는 것입니다. 이것 역시 요한복음 3장 20-21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20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 21 진리를 쫓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반면 소경이 치유받고 그의 영적인 시각이 성숙하는 것은 하나님 안에서 빛가운데 생명을 얻었다는 것을 나타낸 사건인 것입니다. 생명은 또 다른 생명을 살릴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눈뜬 소경은 바리새인을 비롯한 유대당국자들을 향해 예수를 전하지 않습니까? 출교의 위협을 무릎쓰고 예수 생명을 전하는 그 눈뜬자에게 분명 생명의 빛이 임한 것을 나타내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아무리 유대당국자들이 치료받은 자 속에 들어간 생명의 빛을 억압하려고 온갖 노력을 다했지만 그 빛을 억누르지는 못했습니다. 이 사실 역시 “빛이 어둠 속에 비취는데 어둠이 이를 이해하거나 이기지 못했다.”는 것을 입증한 말씀입니다.
㉰더군다나 누구든지 예수님의 빛을 거역하면 자신의 진정한 정체를 파악할 수 있는 길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거부하는 한, 그들은 자신에 대해서도 바로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예수님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어둠의 상태에 놓여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어둠에 있다는 것을 정죄하는 것이 심판입니다. 그리고 그런 주님의 심판의 목적은 어둠 가운데서 빛되신 주님을 통해 하나님을 찾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② 심판은 보이는 것을 보지 못하게 하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하는 것입니다. 39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여기서 말씀하시는 심판은 하늘의 영광된 열매를 맺게 하시는 생명을 주시느냐, 아니 주시느냐 하는 심판입니다. 자기의 죄로 인하여 구원을 보지 못하는 자들에게 십자가로 이루신 구원을 믿게 하시고, 원죄로 인하여 선을 행할 수 없는 자들에게 성령으로 하늘나라의 영광된 열매를 맺게 하시는 생명으로 살려 찬송케 하십니다.(롬7:24-25) 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그러나 자기들의 생활의 의로 구원의 대상을 삼는 자들에게는 십자가를 보지 못하게 하고,(갈2:21) 2:21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자기들의 의로 세상 축복을 기뻐하는 자들에게는 영생을 보지 못하게 하십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전2:14)
㉯소경이 눈을 뜬 사건은 주님이 육안과 함께 영안을 동시에 뜨게 하신 은총이었습니다. 지난 시간에 설교한 내용이 기억납니까? 소경이 눈을 뜬 다음 어떤 과정이 있었습니까? 자신이 눈을 뜬 다음, 예수님을 선지자로 고백하더니, 나중엔 자신이 예수의 제자라고 말하는 바리새인들의 지적대로 “당신들은 모세의 제자이고, 자신이 예수의 제자”라고 말한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예수를 죽이려고 혈안이 되었던 유대인들은 예수의 제자라는 언어의 의미를 모르고 율법주의자로서 자신들이 그를 죄인이라고 정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다시 바리새인들이 예수가 자신들을 소경이라고 말하는 그 말을 못 알아듣고 있었던 것입니다(40절). 40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가로되 우리도 소경인가
㉰바리새인들은 그 말씀의 의미가 자신들을 가리키는 것임을 이해하고는, 자신들을 율법에 무지한 백성들과 같은 부류로 여기는 평가에 분노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큰 죄는 그 무지를 하나님 앞에 겸손히 인정하지 않는 교만입니다. 영적인 자만과 죄에 대한 무지에서 깨어나지 못한 바리새인들과 유대 당국자들은 다 예수를 믿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임으로 심판을 받고 말았습니다.
◆ 옛날에 까치와 부엉이가 함께 사는데 까치는 낮이 밝다고 하고 부엉이는 밤이 밝다고 싸웁니다. 서로 고집하여 끝이 나지 아니하고 만나면 싸웁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재판을 하자고 하여 밤에는 까치가 못보고 낮에는 부엉이가 보지 못하니까 재판하러 갈 수가 없어서 고민하던 끝에 하루는 까치와 부엉이가 밤에 한 나무에서 자다가 이른 새벽 아주 밝기 전에 서로가 희미하게 볼 수 있는 시간에 일어나서 둘이서 재판하러 떠났습니다. 독수리가 일찍 일어나서 날개 치고 있다가 그들을 보고 “까치야 네가 부엉이하고 어디 가느냐”하고 물으니까 까치가 독수리보고 “너는 낮이 밝느냐 밤이 밝느냐” 하니까 독수리가 “너 그걸 말이라고 하느냐 낮이 밝은 것은 사실 아니냐”리고 대답합니다. 그런데 이 부엉이가 끝까지 밤이 밝다고 해서 재판하러 간다고 하고 둘이서 날아가는데 뒤에서 독수리가 하는 말이 “까치야 너 재판하면 진다 지니까 가지 말라”고 말립니다. 까치가 “독수리 너도 낮이 밝다고 하면서 어째서 재판하면 진다고 하느냐” 물으니 그 때에 독수리의 대답이 지금 재판장이 올빼미라는 것을 왜 모르느냐 하더랍니다.
㉱하나님의 의를 믿지 아니하고 자기들의 생활의 의를 구원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보면서도 자기의 구주로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예수의 구원을 믿지 아니하는 바리새인들은 영생을 주시는 영광의 주를 보지 못하고 흑암을 광명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소경 된 것을 알지 못하는 소경들입니다.
③ 심판은 주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죄를 지적당하는 것입니다(41).
㉮하나님의 은총에 대해 거부하는 자는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바리새인들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자녀들의 구원을 이루신 그 예수께서 자기들의 의를 구원의 대상으로 삼는 바리새인들에게 말씀하시고 계십니다(41). 41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이 말씀은 바리새인들에게 육체적인 시각은 있는데 영적인 시각이 없다는 것입니다. 구원이 아닌 구원을 구원으로 보고 있으니까 하나님의 참 구원을 보여 줄 수가 없고, 주 예수의 구원을 믿지 아니하는 자들은 자기들의 의로 인하여 도리어 죄 사함도 받지 못하고 죄 가운데서 멸망의 자식이 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전7:15) 7:15 내가 내 헛된 날에 이 모든 일을 본즉 자기의 의로운 중에서 멸망하는 의인이 있고 자기의 악행 중에서 장수하는 악인이 있으니
㉰이 세상 사람들은 다 나름대로의 판단 기준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 판단 기준이 전통과 관습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기도 하고, 자기 인생 경험에서 온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런 판단 기준이 하나님의 기준과는 거리가 먼 경우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죄인으로부터 출발하지 않고 의인으로 출발한 경우이기 때문입니다. 죄인이 만든 풍습과 전통이 하나님의 절대 의 앞에 가치가 없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예를 들어 제사풍습-조상이 복을 준다는 사상은 잘못된 것.). 원죄가 없다고 하는 자들은 자기들의 의를 노력과 열심을 앞세우는 자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에게는 성령도 주시지 아니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지도 못하고 저들이 알고 있는 조그마한 율법, 그리고 율법해석, 저들이 가지고 있는 전통적인 지식의 조그마한 편견에 사로잡혀서 그것이 마치 전부인양 착각하며 살게 됩니다. 그러니까, 엄청나게 큰 구원의 주님을 바로 보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들의 작은 의(잣대)로 주님을 재면서 핍박하고 배척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적인 소경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율법주의자들은 은혜의 가치를 비웃었습니다. 사람마다 비슷한 경험들을 하게 되지만, 그 경험에 어떤 태도로 반응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올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경험한 어떤 일 때문에 지독하게 독선적인 성격이 되어버리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그 일을 경험했기 때문에, 오히려 다른 사람을 깊이 이해하는 아량을 갖게 되었다고 고백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실패를 경험할 수 있지만, 그 실패에 바르게 대응해서 극복하지 못하면, 다른 사람이 베푸는 선의나 호의를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처럼, 거듭되는 실패로 인해 사람과 사람 사이에 나타나는 {관계의 부조화 현상}은 하나님과 우리들 사이에서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구원받았다고 고백하는 그리스도인 가운데에도, 하나님의 은혜를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들은 처음에는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다는 사실에 감격하다가도, "자신이 얼마나 죄인된 사람이었고, 또 지금도 날마다 죄를 범하고 있지 않는가"라는 죄책감에 시달리기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어느새 {하나님께서 그들을 이미 용서하셨다}는 사실을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는 율법주의적인 오류인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우리는 이미 은혜로 구원받았으며,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게 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감사함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에게, 은혜는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이런 경우를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사람이 죄를 짓고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에게 죄가 있는 것이 너무나 확실한데도, 재판관은 이 사람에게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그것은 이 죄인에게 정말 죄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어떤 이유 때문에} "죄인의 죄가 없는 것으로 인정하겠다"는 재판관의 약속 때문입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이 죄인이 죄가 없다고 인정받게 된 데에는, 누군가 죄인의 죄 값을 대신 치렀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재판관의 공정성을 전혀 손상시키지 않으면서도, 죄인을 심판에서 구할 수 있었습니다. 로마서 5장 8절 말씀을 보십시오. "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구원의 놀라운 은혜가 주어진 것은, 하나님의 크신 사랑 때문입니다. 그런데 율법주의자들은 은혜의 가치를 비웃고, 은혜로 구원받는 것 보다 의로운 행동으로 자신의 구원을 확실히 하겠다고 열심을 냅니다. 하지만, 율법주의자들의 열심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라, 심판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나온 것입니다. 두려움 때문에 하는 순종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두려움에 의한 순종은 결국 십자가의 은혜를 거부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이것은 무죄 선고를 받은 죄인이 여전히 죄인으로 살겠다고 주장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것을 아는 자답게, 주의 사랑을 드러내며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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