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 설교 모음

[스크랩] 이렇게 예배하는 자(081012)

하나님아들 2016. 4. 8. 13:51

이렇게 예배하는 자
요한복음 4:19~24
  
(여는 말)
청년교회로 소문난 어느 교회 모 목사님의 설교 중에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그 교회에 서른 넘은 늙은 총각이 하나 있었는데, 어느 날 보니 고등학교를 갖 졸업한 스무살 짜리 아가씨랑 love line을 만들어 가지고 벙글벙글 웃으며 다니고 있어요. 그래서 살짝 불러서 물어보았답니다. "너 완전 도둑 아니야? 왜 그렇게 어린 아이를 꼬셔갖고 그래?" 그랬더니 그 노총각 한다는 말, "목사님, 저도 여자를 만나서 장가를 가야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제가 아무리 애를 써도 여자같은 여자를 만날 수 없는 걸 어떻게 합니까? 이제 십년만에 제대로 나에게 관심을 가져주는 여자를 만났습니다. 절 도둑놈이라 하지 마시고 좀 도와주세요." 그러더랍니다. 그러면서 덧붙여서 설명하는 말이 여자들이 나이를 먹으면 전혀 맛이 없대요. 나름대로 멋있는 아이디어를 생각해내서 "영화 보러 가자" 하면, 그 영화 봤다거나, 그 감독 영화 보나마나 뻔하다거나, 한마디로 거절당하기 일쑤라는 겁니다. 그래서 좀 신나는 아이디어를 내어서 어디 여행을 가자고 하면, 여기도 몇 번 저기도 몇 번 다 가보았고 안가본데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자들이 이것은 나보다 좀 모르겠지 싶어서 야구장에 가자면 어느 팀은 뭐가 나쁘고 어느 팀은 어느 감독이 꼴보기 싫고, 하면서 구구절절 이유가 있어요. 자기보다 모르는 것도 없고 신기해하는 것도 없답니다. 도무지 자기 재주로는 여자를 설레게 만들거나 신나게 만들 아무 것도 없대요. 이 여자 만나도 늘 심드렁하고, 그래서 다른 여자를 만났더니 또 그렇고, 그래서 어린 여자를 만났는데 너무너무 좋답니다. 이 영화를 보아도 신나고, 저 감독 이야기 해줘도 눈이 반짝반짝하고, 서울대공원가도 좋아라 깡총깡총, 청계천 가도 깡총깡총, 북한산 가도 아이 좋아라. 어린 여자는 아직 새로운 일, 새로운 장소가 널려있어서 무엇을 해도 신기해하고 재미있어하고 즐거워한답니다.
남자와 여자가 만나 연애를 하는데 늘 상대가 따분해 하고 지루해 하고 재미없어 하는데 연애가 이루어질 수 없지요. 상대에 대해 뭔가 알고 싶어하고, 설레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만나는 시간이 기다려져야 연애가 지속이 되고, 또한 깊어지지 않습니까? 사실은 어린 여자 늙은 여자의 차이가 아닌 것이지요. 상대에 대한 관심과 태도의 차이지요. 사랑에 빠지면 상대와 보낼 모든 시간이 기대와 설렘으로 부풀죠. 그러면 재미없는 일도 신나는 것이며 매일 걷던 길도 새로운 것이지요.
우리의 예배도 사실 그렇습니다. 예배는 하나님과의 meeting입니다. 오늘 이 예배가 성도 여러분과 하나님 사이에 어떤 meeting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1. 예배는 하나님과의 만남이다.
요즈음 화요일 저녁에 새가족 성경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그 시간에 숙제가 있는데, 매 주일 예배시간에 설교 내용을 메모하는 것입니다. 청년부 제자훈련 시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성경공부를 시작하기 전에 각자가 메모한 내용을 서로 나누는데 대단히 은혜가 됩니다. 설교를 준비한 저도 예상하지 못한데서 크게 은혜를 받으시고, 그 사실 때문에 제가 은혜를 받는 경우도 많습니다.
제가 설교 내용을 메모하시게 숙제를 내어 드리는 이유는 매우 단순합니다. 설교를 그냥 흘려듣지 마시고 설교를 듣는 가운데 하나님을 만나시기 원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여러 차례 여러분께 말씀드리지만 설교는 목사가 가지고 있는 생각으로 성도여러분께 연설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성경 말씀의 내용을 성령님이 감동하시는 대로 풀어서 해석하고, 예화나 삶에 적용할 수 있는 여러가지 상황을 함께 견주면서 그 뜻을 새겨보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 설교입니다. 곧 그러한 목사의 입에서 나오는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며, 설교를 하는 목사는 목사 대로, 또 설교를 들으시는 회중들은 회중 대로, 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설교를 높여서 설교말씀을 듣는다고 표현하는데, 이 표현은 설교하는 목사를 높이는 말이 아니라 설교를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높이는 표현입니다.
그저께 청년부 모임에서 물어보았습니다. 예배 때 하나님을 만나십니까? 대부분의 대답은 "가끔" 이었습니다. 그나마 기억이 없다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이 예배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계십니까? 매주 주일예배 때마다 하나님을 만나십니까? 찬양예배 시간에, 목장예배 시간에, 가정예배 시간에, 새벽예배 시간에, 우리가 일상의 삶에서 우리 몸을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는 삶의 예배 가운데에서 하나님을 만나십니까?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다면 그 예배는 예배가 아닙니다. 이름이 예배지만 실제로는 실패한 예배, 예배가 아닌 다른 행사입니다. 이 시간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신다면 이 시간은 예배가 아닙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배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배를 사전적으로 설명하면, '신에게 공경하는 마음으로 예의를 갖추어 절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에서 육체를 절을 하지 않지만 찬송가나 복음성가를 부르며 하나님을 찬양할 때 하나님께 마음으로 절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신 앞에 나아가 엎드려 부복하고 있을 때 신이 축복도 하시고 명령도 하시면서 이런저런 말씀을 해주십니다.
오늘날 예배의 원형이 된 구약시대의 제사는 짐승을 잡아 바치는 의식이었습니다. 곧 우리의 죄로 인하여 우리가 죽어야 마땅하지만 우리 대신 짐승을 죽여 하나님께 바침으로 우리 죄값을 치르고 용서를 받는 것이 제사였습니다. 그 제사의 제물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이제는 다시 짐승을 잡는 제사를 드리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나 신약시대의 예배도 구약시대의 제사의 정신을 담고 있습니다. 곧 하나님 앞에 엎드려 부복하면서, 우리의 생명에 대한 모든 권한을 하나님께 드립니다. 예배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내 생명인 시간을 드리고, 내 소유를 드리고, 내 몸의 헌신을 드립니다.
예배는 기본적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 엎드려 경배하며 나를 드리는 것입니다. 곧 예배는 나와 하나님이 만나는 시간입니다. 예배를 드리는데 하나님을 만나지 않는다면 누구에게 경배하며, 누구에게 엎드려, 누구에게 나를 드리는 것입니까?
저의 입에서 나오는 이 말을 통해 하나님은 지금 말씀하십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하나님 앞에 엎드려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듣습니다. 다만 이 말씀을 전하는 목사가 하나님이 아니므로 목사의 말로 전하는 것 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배 가운데 하나님을 만나십시다.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는 예배는 실패한 예배입니다.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는 예배는 죽은 예배입니다. 의례로서 정해진 순서를 차례차례 따라 하다가 그 순서가 끝나면 예배가 끝나는 것은 예배가 아닙니다. 단지 그 시간만 흘러가는 것은 예배 시간 때우기는 될지언정 예배하는 것은 아닙니다. 딴 생각이 들고 졸리고 지루하고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예배 견디기는 될지언정 예배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모두 살아있는 예배를 사모합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는 예배를 사모합니다.
그런데 왜 예배에서 하나님을 만나십니까? 라는 질문에 '가끔', 이라거나 '기억이 없다'는 대답이 나올까요? 왜 우리는 살아있는 예배를 사모하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만났다는 확신이 없을까요?

 

2.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자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기를 원하지만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만나고 싶다고 만날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만약 우리가 이 나라 수상 헬렌 클락을 만나고 싶다면 언제든지 만날 수 있습니까? 안됩니다. 반드시 미리 비서관을 통해 면담을 신청해야 하며, 헬렌 클락이 우리를 만나주어야 할 타당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될 때 약속된 시간에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로서는 왠만한 일로는 수상을 만날 수 없습니다.
이 나라의 수상도 우리가 만나고 싶다고 만날 수 없는데 하물며 하나님이신데 만나고 싶다고 만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만나려면 면담신청하고 비서관이 미리 체크해본 뒤에 하나님이 꼭 만나보아야 할 필요가 있으신지 따져보아야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나라 수상도 우리를 만나줄 것 같지 않은데 하나님이 우리를 쉽게 만나주실까요? 아마 이런 식으로 만나려면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수상이 만약 크라이스트처치를 방문했는데, 다민족 국가이니까 한국인을 만나고 싶어하고 그 중에 좀 작은 규모의 한인 교회를 방문하고 싶다 해서 우리 길벗교회를 찾아온다면, 어렵고 까다로운 절차 없이 수상을 만날 수 있습니다. 3년전에 해밀턴에서 '한국의 보자기' 전시회를 했는데 헬렌 클락이 왔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 가운데 섞여 헬렌클락을 가까이서 만났습니다. 그 해에 사망한 마오리 여왕도 만났습니다. 수상이 자기가 필요해서 어떤 기회에 우리를 찾아주면 만나기 쉽지요.
하나님이 당신이 필요하셔서 우리를 만나기를 원하신다면 우리가 하나님 만나기가 쉽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사실은 사람을 만나기를 원하십니다. 매우 간절하게 원하십니다. 아무나 만나고 싶으신 것은 아니고 이런 사람을 만나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본문 23절입니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고 계십니다. 그들을 만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이 드리는 예배를 받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이렇게 예배하면 되는 것입니다. 곧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면 온 세계를 두루두루 찾아다니시면서 애타게 갈급하게 찾으시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임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는 비결은 간단합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일 예배 가운데도 하나님이 임재하시고, 새벽예배 가운데도 임재하시고, 목장예배, 가정예배, 우리의 삶의 예배, 어느 예배나 받으시고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가 진짜 예배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주시는 예배, 우리의 예배를 받아주시는 예배가 진짜 예배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20절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21절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장소가 문제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형식이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예배 받으실 분이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아버지께 예배를 해야 아버지가 받으시지, 아무리 형식이 잘 갖춰졌고, 아무리 근엄하게 예배한들 아버지와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예배 받으실 아버지를 만나야 예배할 수 있습니다.
그 아버지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아 지금도 온 세상을 살피시는 분이십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이 부분을 NIV에서는 'in spirit and truth'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영으로, 영 안에서 예배해야 하며, 진리로, 진리 안에서 예배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진리는 자연과학적 사실이나 철학적 개념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안에 계시되었고 오늘날 내 안에 깨달음으로 자리잡게 된 진리,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을 가리킵니다. 곧 영과 진리 안에서라는 말은 진리의 영의 인도를 받아서 오직 영이신 하나님과 영으로 교제하라는 말씀입니다.
빌립보서 3:3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당이라.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라는 부분을 NIV성경에는 worship by Spirit of God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곧 '성령에 의해 예배하고'라는 뜻입니다. 진짜 참된 신자가 '할례당'이라면 성령에 의해 예배하는 우리가 진짜 할례당이라고 하는 말입니다. 바울 사도는 예배가 성령에 의해 인도받는 예배일 때 참된 예배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것은 온 정성을 다 쏟아 성실하게 예배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성령의 조명으로 성령이 깨닫게 해주시는 대로 예배하라는 말씀입니다. 내 영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내 영이 하나님의 영과 접속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찬양을 할 때 옆의 사람 신경쓰지 마시고 하나님께만 집중하십시다. 설교 들을 때 딴 생각하지 마십시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내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마음에만 집중하십시다. 헌금 할 때 그 헌금을 계수하고 사용하는 사람을 의식하지 마십시다. 오직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는 분 하나님께만 집중하십시다.
예배의 형식도 중요합니다. 2000년의 교회 역사를 통해 오늘날의 예배 형식이 만들어졌습니다. 함부로 무시하거나 멋대로 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형식은 본질을 담는 그릇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 형식을 통해서 본질을 살릴수 있는지 없는지가 더 중요합니다. 순서대로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나는 일에 모든 관심을 집중해야 합니다.
찬양단을 세우면서 예배 순서에 약간의 변화를 주었습니다. 몇 가지 성도 여러분들의 이해가 필요한 부분이 있습니다.
흔히 찬양을 준비찬양으로 말씀하시는데, 찬양은 결코 준비찬양이 아닙니다. 찬양 시간이 싫어서 찬양 끝나는 시간에 맞추어 오시는 분들도 과거에 더러 있으셨습니다. 그러시면 안됩니다. 찬양이 예배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주일 예배는 오후 2시에 시작합니다. 찬양인도자가 "다같이 묵상하심으로 예배를 시작하겠습니다." 라고 예배의 시작을 선언하는 순간이 예배 시작시간입니다. 찬양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찬미하고 높이는 노래이며, 하나님께 사랑을 고백하는 노래입니다. 이 찬양이 결코 준비의 과정이 될 수 없습니다. 찬양 자체가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예배입니다.
요한계시록 4장과 5장에 천상에서 하나님께 예배하는 장면을 목격한 요한의 기록이 있습니다. 보좌에 하나님이 앉아계시고 그 보좌를 둘러싸고 24장로가 앉아 있습니다. 그 위를 여섯 날개 달린 네 천사들, 스랍들이 날고 있습니다. 네 천사들이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돌려드릴 때, 이십사 장로들이 엎드려 절하며 머리의 면류관을 보좌앞에 던집니다. 그 주변에 수천수만의 천사들이 하나님께 노래하며 찬양합니다. 천상의 예배는 경배와 찬양 worship and praise입니다.
찬양단을 세우면서 '예배에의 부름', '입례송'을 찬양으로 대신했습니다. 곧 찬양곡을 고를 때 그런 내용을 담은 곡을 고르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성시교독을 생략했습니다. 하나님을 찬미하고, 우리의 사랑을 고백하는 찬양을 부름으로 우리를 예배로 부르시는 하나님께 우리가 화답함을 교독문 대신 찬양으로 대체한 것입니다. 그 다음 순서는 그대로 두었습니다. 성경봉독이 있고, 기도가 있고, 설교가 있고, 봉헌 순서가 있습니다.
이 형식도 절대적인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는데 더 나은 방법이 있으면 고쳐나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문제는 이 형식 자체가 아니라 이 형식으로 담을 수 있는 내용입니다. 곧 이 예배형식을 통해서 예배의 본질,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만남이 이루어지고, 우리가 우리를 온전히 하나님께 드릴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을 만난 사람
동영상을 잠깐 보면서 하나님을 만난 사람의 삶을 생각해보시겠습니다.
(동영상)
저 물고기들이 받는 압력은 자동차 뒤에 코끼리가 1600마리가 올라앉은 정도의 압력이랍니다. 물고기 한 마리가 받는 수압은 7ton입니다. 바닷 속으로 잠수함이 들어가면 많은 수압을 받게 되는데 너무 깊이 들어가면 잠수함이 짜부라지죠. 위의 장면을 찍기 위하여 카메라를 내려보낼 때도 카메라가 부서지지 않도록 특수장비를 만들었지요. 저런 압력을 견디기 위해 물고기는 어떤 대책이 있습니까? 껍질이 1m되는 강철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늘하늘 꼬리를 흔들며 수영하는 그 물고기의 껍질은 그냥 얇은 피부와 같은 껍질입니다. 어떻게 저 물고기가 짜부러들지 않고 멀쩡하죠? 그 안에 똑같은 압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깥에서 누르는 압력과 똑같은 압력이 안에서 밖으로 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물고기를 급속하게 육지로 끌어올리면 터져버립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인생은 고해(苦海), 고통의 바다라고들 합니다. 사는 가운데 수많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 어려움 속에 휘둘리며, 절망하며 분노하며, 때로는 우쭐하다가 때로는 좌절하며 그렇게 살아갑니다. 우리를 둘러싼 삶의 이 무거운 압력을 어떻게 감당하며 살면 좋을까요? 어떻게 하면 이 압력에 짓눌리지 않고 살 수 있을까요?
우리 안에 그 압력을 든든히 받쳐주는 내부압이 있으면 됩니다.

 

(맺는 말)
고린도후서 3:16~18을
한 번 보시겠습니다.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 /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면 하나님을 대면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비록 흐릿하지만, 바울 사도 시대 청동거울처럼 완전히 뚜렷하지는 않지만 얼굴과 얼굴을 대하듯이 하나님을 볼 수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찬양 가운데서, 기도 가운데서, 선포되는 말씀 가운데서 우리를 만나주십니다. 그럴 때 우리도 "저와 같은 형상으로" 곧, 하나님을 닮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주님의 영광에 이르게 됩니다. 주의 영, 성령님이 그렇게 해주십니다.
예배 가운데 하나님을 만나시고, 만나는 만큼 하나님을 닮아가시고 주님의 영광에 이르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은 우리의 내부압이 되어 주십니다. 우리를 삶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도록, 우리의 수고와 무거운 짐을 맡아주십니다.
오늘 예배 가운데,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우리를 만나주시고, 우리를 온전히 받아주신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모든 삶의 무게를 받쳐주시는 은혜가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출처 : 길벗
글쓴이 : 송명헌(1)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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