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 설교 모음

[스크랩] 갈 2:20(그리스도인의 삶)

하나님아들 2014. 9. 15. 19:21

출처 : http://blog.daum.net/isaac4003/595

 

그리스도인의 삶 1 (갈2:19,20)

 

 

새부산교회 이상봉 목사

 

 

 

 

 

 

 

 

갈라디아서 2:15-18에서 사람은 다 타락하여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 되었으므로 누구도 그 행위로는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으며 따라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하나님의 의를 누려야지 율법을 지킴으로써 의롭다함을 얻으려고 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강조한 바울은, 이어지는 2:19,20 말씀에서 그리스도인의 존재 또는 그리스도인의 생명(삶)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여기서 먼저 바울은 자신이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다'고 말한다. 율법을 향하여(율법에 대해) 죽었다는 것은 우리 옛 사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그와 함께 죽어 없어졌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간단히 말하면 살았으나 죽은 사람이다. '옛 사람이 죽은' 사람인 것이다. 따라서 율법에 대해서도 죽었다. 또 율법 뿐 아니라 육신에 작용하는 모든 것들 곧 죄와 세상과 욕망과 마귀에 대해서도 죽었다. 하나님은 율법의 요구에 도저히 부응할 수 없고 오직 율법의 정죄와 저주와 심판을 받아 사망에 이를 수밖에 없는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미리 죽이신 것이다.

 

 

 

 

하나님이 죽이신 우리는 살아 있는 자가 아니라 사실상 이미 죽은 자였다. 인류는 타락 후 하나님께 대해 죽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죽은 자를 단지 죽었다고 선언하시고 매장하신 셈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죽여 폐기하신 것은 가정(假定)이나 형식이 아니라 실제이다. 이것을 믿는다면 우리는 분명히 실제로 죽은 자이다. '믿음 안에서' 우리는 분명히 죽고 없어졌다.

 

 

 

 

이것은 우리 자신이 스스로 선택하고 실행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다. 그러나 우리가 선택한다 할지라도 달리 선택할 수 없고 피할 수 없는 유일한 길이다. 우리는 안 죽을 수 있는가? 만일 우리가 안 죽고 영원히 살아서 자기 (옛 사람의) 생명대로 모든 것을 행한다면 율법은 영원히 우리를 따라다니며 정죄와 송사와 저주와 심판을 내리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지 않으면 안된다. 죽어야 할 것은 죽어야 한다. 이런 이유로 인해 우리의 죽음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의 죽음은 '율법을 향하여(대하여)' 죽은 것이다.

 

 

 

 

다음으로 바울은 우리가 율법을 향해 죽은 것은 단지 율법의 정죄와 심판을 피하기 위한 소극적인 길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여 살기 위한' 즉 하나님을 능히 섬기는 새로운 삶을 위한 적극적인 길이었음을 설명한다.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

 

 

 

 

바울은 이 사실에 대해 로마서 7장에서 자세하게 설명했다.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율법이 사람의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났느니라 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부라 이르되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케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지라도 음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여기서 바울은 죽음만이 우리를 얽어매고 있는 율법에서 우리를 자유케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으며 실제로 하나님이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처리하심으로써 우리에게 그런 자유를 주셨음을 말하고 있다. 죽음은 율법의 정죄와 심판에서 우리를 자유케 할 뿐 아니라 또한 율법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던 무능과 죽음(無力)에서 자유케 했다. 즉 죽음은 무능을 벗고 하나님을 능히 섬길 수 있는 존재로 거듭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 것이다. 로마서 7:4의 말씀처럼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해 죽임을 당하고' 하나님을 향해 다시 삶으로써 타락하고 무능한 옛 삶을 청산하고 하나님을 위해 열매를 맺는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우리 옛 사람이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해 죽었다는 사실에 대해 말한 후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라고 말했다. 이것은 19절에서 말한 내용을 표현을 달리하여 다시 한 번 강조한 것이며 더 구체적으로 설명한 것이다. 갈2:20의 이 말씀은 너무도 유명하여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가장 단순하면서도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히 갈2:20은 신약의 기본 진리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복음 진리를 단순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암송하는 사람은 많지만 이 말씀의 진정한 의미를 알고 누리는 사람은 매우 적은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의 의미를 오해하고 있다. 그 오해의 주된 내용은 이것이니, 사람들은 성경이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는 예수를 믿은 후에는 소위 말하는 自我(옛 사람)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완전히 없어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세 가지 단계가 있다.


첫째 부류의 사람들은 내 안에 더 이상 내가 살지 않는다는 말을, 나(인간 자신)는 완전히 사라지고 자신이 그리스도로 변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즉 자기의 생명이 본질적으로 바뀌어서 자기는 완전히 사라지고 대신 그 자리에 하나님이 들어와서 자기가 하나님이 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은 변화가 아니라 교체이며 대체이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 속에 근본적으로 육신에 속한 성분이 제거되었으므로 자기의 하는 모든 일이 다 하나님의 것으로서 거룩하며 완전하다고 착각한다.

 

 

 

 

둘째 부류의 사람들은 갈라디아서 2:20의 의미를 그 정도는 아니라도 적어도 육신의 혈기와 욕구는 다 사라진 것을 말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가 여전히 (죄성을 지닌, 죽을 운명의) 인간이지만 그 생명과 정신과 마음이 하나님의 아들의 거룩한 품성으로 변했기 때문에 범죄할 수 없으며 실패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셋째 부류의 사람들은 이 말이 첫째나 둘째 부류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정도는 아닐지라도 자기 안에 거하는 영의 능력이 자기 육신의 소욕을 당연히 이기며 항상 이길 것이라고 생각한다. 즉 자기 안에 육신적 성질과 생명은 여전히 남아 있을지라도 자기 속에는 그것을 이기는 생명이 있어서 적어도 자기가 살아서 나서는 것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할 정도로 하나님의 생명이 자기를 완전하게 장악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육신(자아)을 부인하거나 그것에 대해 아무 걱정을 하지 않아도 저절로 거룩한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들은 다 갈라디아서 2:20이 말하는 바가 아니며 그것을 오해이다. 바울이 갈라디아서 2:20에서 말한 것은 단지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신다'는 것이다. 전에는 그리스도가 없었는데 이제는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면서 말씀하시고 역사하신다는 것이다. 갈라디아서 아니 성경이 말하는 진리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고 딱 그것이다.

 

 

 

 

(믿음 안에서가 아니라) 물리적, 현상적으로만 말한다면 소위 ''는 죽어 없어진 것이 아니고 그대로 존재한다. 이것은 엄연한 현실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날마다 느끼고 있는 바이다. 그렇다면 바울이 우리가 죽었다고 말하는 것은 무엇을 두고 말한 것인가? 그것은 우리의 역할(활동)이 제한되고 축소되었다는 것이다. 아니 제한이나 축소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죽은 지경에까지 이르렀다는 것이다.

 

 

 

 

어디까지 제한되고 축소되었는가? 바로 예수를 믿는 일, 예수를 담고 예수를 찬송하며 붙드는 일을 제외하고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자리까지 제한되고 축소되었다. 즉 나는 여전히 살아 있으나 그 ''(自我)의 역할과 활동은 오직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 한 일에만 제한되고 나머지는 죽은 상태나 다름없이 된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이요 실제인 것이다.

 

 

 

 

우리의 삶은 더 이상 내가 활동하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살면서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시도록 그를 믿으며 순종하는 삶이다. 이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의 뜻은 단순히 우리가 죽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로 그리스도의 몸 곧 하나님을 담는 그릇이 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나는 죽고 하나님의 아들(하나님 자신)이 내 안에 사는 것이다. 결국 문제는 누가 생명이 되느냐 하는 것이다. 우리 안에서 나의 육신적 생명이 활동하지 못하고 오직 그리스도의 생명만 활동한다면 그것이 바로 내 안에서 나는 죽고 그리스도가 사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자리이며 복음 진리의 기본이다.

 

 

 

 

나는 죽고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나를 대신하여 산다는 말의 의미가 앞에서 언급한 오해의 사례에서처럼 해석될 수 있다면 바울은 20절 후반에서 "...내가 사는 것은" 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죽은 것이 아니고 내가 산다는 것이다. 바울은 분명히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고 말한 후에도 다시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으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지만 한편으로는 분명히 내가 여전히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명이 바뀌어지거나 대체된 것이 아니라 옛 것과 새 것이 공존하며 그리스도와 내가 공존하는 것이다. 문제는 '나만 있느냐 아니면 그리스도도 함께 있느냐' 하는 것이며, 더 나아가서 '누가 생명이 되며 누가 활동하느냐' 하는 것이다 이것은 주도권 문제이다. 주도권을 잡는 자가 '' 것이고 그렇지 못한 자는 실제로는 '죽은' 것이다. 

 

 

 

 

이리하여 우리는 우리 안에 '옛 사람'과 '새 사람' 곧 '옛 나'와 '새 나'가 공존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옛 사람과 새 사람의 차이는 무엇인가? 옛 사람은 악하고 새 사람은 선한가? 그런 점도 있다. 그러나 본질적인 차이는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느냐 모르느냐' 하는 것이다. '옛 나'는 악하건 선하건 하나님을 모르는 자이다. 그 안에는 하나님께 속한 것이 없으며 그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생명과 무관하다. 그러나 '새 나'는 하나님의 빛을 본 자이며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서 하나님의 성질로 채워진 자이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를 믿는 나'인 것이다.

 

 

 

 

흔히 사람들은 사람이 거듭났다고 하면 그가 완전히 죽거나 사라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아니고 단지 그 사람 안에 하나님이 더해진 것이며 그 사람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물리적으로 말한다면 육적인 사람이 따로 있고 영적인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또 어떤 사람 안에는 옛 사람(생명)만 있고 어떤 사람 안에는 새 사람(생명)만 있는 것도 아니다. 사람 즉 ''라고 일컬어지는 존재는 오직 하나뿐이다. 생명도 하나뿐이다. 다만 하나님을 알고 진리를 아는 사람이며 그 생명을 따라 사는 사람이냐 아니면 사탄의 거짓말과 타락한 본성(육적, 동물적 본성)을 따라 사는 자연인이냐 하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사람은 언제나 그 두 길 중에서 한 길로 행한다. 그리고 많은 경우에 그리스도를 믿는다 하는 사람도 그 두 길 사이를 왔다 갔다 한다.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 즉 복음 진리를 아예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생명을 아예 받지 못한 사람은 물론 오직 육적인 사람(옛 사람)으로만 산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그 속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고 하나님의 생명이 있으므로 두 존재가 함께 있는 것과 같이 된다. 그러므로 그런 사람에게는 두 가지 가능성이 존재한다. 즉 그는 여전히 육신의 요구를 따라 육신대로 살 수도 있고 아니면 자기(육적 자아)를 부인하고 자기 속에서 역사하는 하나님의 생명을 따라 삶으로써 하나님의 아들로 살 수도 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비록 예수를 믿고 그 생명을 소유하고 있다 할지라도 실제로 영을 좇아 행하며 자기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생명을 따라 살지 않고 육신대로 산다면 그는 여전히 육에 속한 사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할 것이며 범사에 실패하며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지 못한다. 그런 사람은 이론적으로는 하나님의 자녀고 새 사람일지라도 실제적으로는 전혀 새 사람이 아닌 것이다.

 

 

 

 

오직 매일 그리스도를 실제로 믿는 사람 곧 매순간 자기를 부인하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만이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생명을 누릴 수 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육신의 모든 활동 곧 모든 육신의 생각과 육신의 야망과 육신의 의지와 육신의 노력을 내려놓는 사람이다. 그는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영의 요구를 따라 사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만이 육신을 가졌어도 육신을 이기고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며 하나님의 인격을 나타낼 수 있다.

 

 

 

그리스도인의 삶 2 (갈2:20)

 

 

새부산교회 이상봉 목사

 

 

 

 

 

 

 

바울이 갈라디아서 2:20에서 말하는 핵심적 진리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자신으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말미암는다는 것이다. 이것을 다른 표현으로 하자면 '생명'이 근본이지 '행위'가 근본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며 그를 닮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가 그의 영원하신 아들 그리스도를 닮기 원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가장 중요한 목표로 생각하고 계시지 않는다. 그는 한 번도 우리에게 먼저 그리스도를 닮고 그와 같은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를 닮고 그의 형상으로 빚어지기 위해서는 먼저 필요한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무엇인가? 바로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고 누리는 일이다. 삶과 행위는 생명에서 나온다. 사람이 하나님을 만족시키지 못하고 그리스도와 다른 삶을 사는 것은 그의 소원이 그러해서도 아니고 노력이 없어서도 아니다. 오직 그의 생명이 하나님의 생명과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그의 자연적 생명(육적 생명)으로는 도저히 그리스도를 닮을 수 없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바울이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빌4:13)고 말한 것을 상기시키며 하나님께 힘과 능력을 구하여 하나님을 섬기면 되지 않느냐고 말한다. 많은 신자들이 자신에게는 도저히 주님을 따르거나 닮을 힘이 없다는 것을 어느 정도 알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께 은혜를 구한다. 하나님이 자신에게 힘을 주셔서 그리스도를 닮게 만들어 주시며 하나님의 뜻대로 온전히 살 수 있도록 해 달라고 간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언젠가 은혜를 받고 그런 힘을 얻게 될 것이며 그렇게 되기만 하면 모든 것이 가능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살아간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사람들이 실제로 그런 능력을 얻어서 주님을 닮는 것을 별로 보지 못했다. 왜 그럴까? 정성과 열심이 부족해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그들의 믿음이 부족해서 그런 것일까? 문제는 그것이 아니고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바로 헤아리지 못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단지 주님을 닮는 것 즉 우리 삶이 주님과 같이 거룩하고 선하게 되는 것이 바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이라고 생각하면 안된다. 그것은 이차적 문제이다.

 

 

 

 

그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진정한 목적이 달성되면 저절로 해결될 문제이며 거기서 파생되는 결과이지 결코 목적이 될 수 없다. 주님을 닮기를 원하는 사람들이나 그것을 위해 주님으로부터 능력을 구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들이 그러한 자신들의 목표에 이르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의도, 하나님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의도, 하나님의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생명이 되시는 것이다. 그로 인해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로 연합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생명을 우리 안에 심으시고 그로 인해 생명 안에서 우리와 하나로 연합하여 함께 살기를 원하신다. 간단히 말하면 하나님의 목표는 그리스도가 우리의 생명이 되게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문제는 사람의 행위가 어떠하며 능력이 어떠하냐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하나님을 그 안에 받아들이고 있느냐 그렇지 못하냐 하는 것이다. 문제는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이지 다른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하나님 없이) 선한 사람이 되거나 거룩하고 유능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오직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사는' 사람이 되게 되는 것이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또 성령을 보내셨다.

 

 

 

 

성령은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거하도록 하기 위해 우리 안에 오신 것이다. 이 영을 받는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이며 하나님의 대리인과 대표자로 살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단지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 안에 거하는 것도 아니며 하나님의 인품과 일이 우리 안에서 모방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우리 안에서 거하시며(사시며) 그 생명으로 친히 우리를 다스리심으로써 우리와 하나님이 하나로 연합하게 되는 것이다. 

 

 

 

 

일단 그리스도가 우리의 생명이 되기만 하면 우리는 (시간이 흐르면) 저절로 주님을 닮게 된다. 또 그런 상황에서는 자연스럽게 힘을 달라고(역사를 해달라고) 기도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언제나 일하기를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생명이 되시는 주님 자신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거나 관심이 없고 단지 주님을 닮거나 그의 능력을 받는 것만 추구한다면 우리는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할 것이다. 바른 순서는 언제나 주님 자신을 먼저 깨닫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다음의 두 표현은 바울이 자신의 삶의 원리를 가장 간단하면서도 명확하게 설명한 것이다.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골3:4)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빌1:21)

 

 

 

 

갈라디아서 2:20의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라는 말씀과 함께 이 두 말씀은 승리의 길이 무엇이며 이기는 삶의 비결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보여준다. 지난 주에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갈라디아서 2:20을 오해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생각했다. 그 내용 세 가지를 말했다. 그것은 주로 우리의 죽음이 자아의 완전한 상실이라고 생각하는 오해와 관련된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그것과는 다른 차원에서 또 하나 사람들 가운데서 이루어지고 있는 근본적인 오해에 대해 다룰 필요가 있다.

 

 

 

 

그것은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는 말씀을 그리스도인이 장차 이루어야 할 그리스도인 삶의 목표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바울(그리스도인)이 '자기는 죽었고 오직 지금은 그리스도가 자기 안에서 살고 있으며 자기가 사는 것은 그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만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현재 바울(그리스도인) 안에서 이루어진 실상으로 생각하지 않고 장차 신자가 도달해야 할 목표나 표준으로 생각하며 그것을 소망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그리스도가 자기 속에 사는 것)을 하나님이 이미 베푸신 은혜로 생각하며 누릴 생각을 하지 않고 마치 수고하고 노력해서 도달해야 할 삶의 목표와 같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으니 이것이 바로 가장 큰 오해인 것이다.

 

 

 


빌립보서 1:21의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라는 말씀도 똑 같이 오해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식의 삶 곧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을 하나의 희망이나 표준으로 생각하며 언젠가 그렇게 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거나 그렇게 되기 위해 애쓰고 있다.
그러나 바울의 이 말은 결코 신자가 여러 해 동안 하나님 앞에서 시련과 연단을 받으며 노력한 후에야 도달할 수 있는 목표를 말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삶의 목표나 표준이 아니라 단지 신자(바울) 안에서 이미 이루어진 사실일 뿐이다. 바울은 자기 삶의 원리 내지 현상을 설명한 것이지 목표를 제시한 것이 아니다. 바울이 '나는 죽고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산다'는 말을 한 것은 다만 '내가 사는 것이 왜 내가 아니고 그리스도 때문인가' 하는 것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그렇다면 바울이 사는 것은 왜 자기가 사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가 자기 안에서 사는 것뿐인가? 그것은 바울이라는 사람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서 이미 죽어 없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그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으므로 그렇게 밖에는 살 수 없는 사람 곧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살기 때문에 내가 산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내 안에는 오직 그리스도가 산다'고 말한 것은 그의 목표나 소망을 말한 것이 아니라 현재 자기 삶의 실상과 원리를 말한 것이다.

 

 

 

 

그가 고백한 것처럼 바울(그리스도인)이 사는 것은 그리스도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사는 것이 아니라 죽은 것이며 없는 것이다. 그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살고 있는' 사람이었다.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으로 사는 새 사람으로서의 바울을 생각하지 않고는 달리 바울이라는 사람은 이제 찾아볼 수도 생각할 수도 없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사는 바울말고는 바울은 없다. 그는 이미 십자가 못 박혀 죽은 옛 사람일뿐이다. 우리는 그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바로 이해해야 한다. 바울이 말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살고 계시므로 나도 살고 있다'는 이 한 가지이다. 즉 '내게 있는 것은 그리스도뿐'이라는 것이다. 이 얼마나 단순하고 명확한 삶의 모습이며 얼마나 간단한 원리인가!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또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라는 것은 결코 미래에 성취되어야 할 목표나 표준이나 이상(理想)이 될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이 우리 안에 이미 이루신 삶이며 우리가 매일 살고 있는 삶의 실제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승리의 길이며 이기는 삶의 비결이다. 이것은 결코 내가 앞으로 승리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일'도 아니고, '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그렇다.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사시며 우리 생명이 되신다는 것은 생명의 비밀이요 승리의 길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길이며 과정이지 목표나 목적지가 아니다. 우리의 최종 목적은 우리가 하나님이 안식하실 집이 되고 하나님이 다스리실 나라가 되고 하나님을 영원히 찬송할 영광스런 아들로 드러나는 것이다. 우리의 목표는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완전히 이루어져서 우리 삶이 하나님을 영원히 찬양하는 아들로 굳게 서게 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우리의 인격과 삶은 하나님의 성품을 따라 변하여 거룩하게 되고 우리가 속해 있는 세계는 하나님의 나라로 변하는 것을 체험하게 된다. 이것은 무엇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가? 바로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 안에 거하시며 역사하심으로써 이루어진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것은 목표나 이상이 아니라 이런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길이며 과정이며 능력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 혼자서도 이루는 것도 아니고 인간만으로 이루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그리스도)이 우리 안에서 생명이 되시며 친히 모든 일을 수행하심으로써만 이룰 수 있다. 즉 하나님의 뜻은 우리를 통해 이루어지되 우리 자신이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우리를 대신하여 사시는 대행(代行)적 삶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으므로 이제는 우리를 대신하여 우리 안에 사신다.

 

 

 

 

바울이 강조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살고 계시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능력)을 이미 누리고 있으며 따라서 (무능한) 우리 자신은 더 이상 살 필요가 없으며 무엇인가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에 의해 이미 이루어진 사실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나는 내가 죽고 주님이 내 안에 사시도록 하겠다"고 말하지 않고 오직 "지금은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신다"고 과거형으로 말했다. 

 

 

 

 

우리는 이것을 깊이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 이것을 깊이 깨닫고 그리스도를 현재적으로 누릴 수 있도록 믿음을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나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이제는 오직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내 생명이 되어 살아 계시므로 나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필요가 없고 스스로 인생의 위기를 헤쳐나가거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발버둥을 칠 필요가 없습니다. 만일 제가 이것을 깊이 깨닫지 못하고 있으면 이것을 깨닫도록 눈을 열어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전에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죄를 짊어지시고 대신 돌아가셨기 때문에 여러분의 모든 죄는 다 사하여졌고 여러분이 친히 죽어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들었고 그것을 들을 때 참으로 복된 소식이라고 생각하고 기뻐했다. 뿐만 아니라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살아주심으로써 우리가 스스로 살지 않아도 된다"는 말씀을 듣고서는 더욱 기뻐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세월이 지나면서 (사탄의 거짓말에게 속거나 진리의 지식이 희미해져서) 이런 복음에서 멀어지고 자기 열심과 노력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애쓰는 자리로 떨어지곤 한다.

 

 

 

 

우리는 개인적 경건 생활과 교회 생활을 통해서 자신이나 서로에 대해 그리스도인의 삶을 올바르고 완전하게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가르치며 일깨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삶의 표준에 대해 많이 말하고 육신의 정욕을 거부해야 할 것과 세상을 사랑하지 말 것과 불의한 유혹을 물리쳐야 할 것과 십자가를 지고 고난을 참으며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거기에 순종할 것에 대해 피차 가르치며 일깨운다.

 

 

 

 

그런데 그러다 보면 우리 안에는 자연히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참으로 고통스럽고 힘든 것이며 쉴 날은 없고 넘어야 할 산이 많구나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많은 신자들이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날마다 애를 쓰고 한숨을 쉬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날마다 수고를 하고 애를 쓰지만 또한 날마다 실패를 한다. 날마다 그리스도인답게 살려고 하는데 날마다 주님을 욕되게 하고 사탄에게 지니 그리스도인이 되기란 참으로 힘든 것이라는 생각이 더욱 굳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고생을 하는 것과 아무 차이가 없는 것처럼 되고 만다. 이런 사람들은 "예수를 믿기 전에는 무거운 죄짐을 지고 허덕였는데 이제 예수를 믿고 난 후에는 주님을 닮고자 하는 성화(聖化)의 짐으로 괴롭구나" 하고 탄식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이런 식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는 것은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니며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누리는 삶이 아니다. 그런 사람들은 다시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는 말씀의 의미를 깨닫고 이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내 안에 내가 산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살고 계시는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생활이다. 내가 사는 것 즉 내가 애쓰고 힘쓰고 활동하는 것은 오직 예수를 믿는 일뿐이라는 것이다.

 

 

 

 

만일 내가 참고 사랑하면서, 내가 친절하고 겸손하며 온유하게 행동하면서, 그리고 내가 슬픔을 삼키면서 이를 악물고 십자가를 지려고 애쓸수록 주님을 닮는 것은 안되고 고통만 느끼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내 안에 살아계신 그리스도께서 인내하시고 사랑하시며 고난을 참으시고 온유와 겸손한 심령으로 자기(나)를 낮추시며 십자가를 지신다면 우리는 기쁨과 안식 속에서 저절로 하나님의 아들의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이나 주위의 형제 자매들이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려고 애를 쓰면서 피곤과 고통을 느낀다면 바른 그리스도인의 길이 무엇인지 일깨워주어야 한다. 그런 식의 삶은 하나님이 사람 안에 거하시면서 마음에 할례를 베푸시며 마음과 뜻과 성품을 다해 하나님을 섬길 수 있도록 역사하시기 전에 사람들이 겪어야 할 삶이지 그리스도의 영을 모시고 있는 오늘 우리의 삶은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어야 한다.

 

 

 

 

죽음은 고통스럽다. 죄에 대해 죽고 정욕에 대해 죽고 세상에 대해 죽고 자아와 혈기와 고집에 대해 죽는 것은 참으로 힘들고 고통스럽다. 그와 마찬가지로 하나님 앞에서 살려는 노력도 힘들고 고통스럽다. 하나님의 거룩과 사랑과 의를 따라 행하는 것이 우리의 새로운 삶이다. 이 새 삶을 산다는 것은 옛 삶을 버리는 것만큼 어렵다. 이 모든 것은 다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이다. 복음 - 기쁜 소식 - 이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주심으로써 더 이상 우리 스스로 '버릴 것을 버리거나 살아야 할 것을 살지 않아도 되도록' 만드셨다는 것이다. 구원은 우리 스스로 무엇을 해야 하는 자리에서 우리를 건지시고 해방시키신 것이다.

 

 

 

 

우리가 스스로 죽지 않아도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자신의 힘으로 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참으로 기쁜 소식이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힘으로 그리스도인답게 살려고 애쓰는 것은 참으로 무모하고 무리한 일을 하는 것이다. 로마서 7장은 인간이 제 아무리 노력해도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 없으며 할려고 발버둥을 치면 칠수록 실패의 구렁텅이로 더 깊이 떨어져 절망하게 되고 만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롬7:18)

 

 

 

 

매일 선을 행하기를 원하는데 그것을 행하는 것이 도무지 안된다면 어찌 피곤한 삶이 되지 않겠는가? 주님은 이런 사람들에게 찾아오셔서 "나는 더 이상 네가 선을 행하는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 너는 다만 내 안에 가만히 있으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얼마나 큰 복음인가! 문제는 우리에게 선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선을 행하느냐 행하지 못하느냐 하는 것도 아니고 오직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느냐 거하지 않느냐 하는 것이다. 문제는 선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누가 선을 행하느냐 하는 것이며, 주님을 믿느냐 아니면 스스로 모든 것을 하려고 애쓰느냐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를 위하시는 하나님의 길, 우리를 살게 하는 하나님의 비결은 오직 그리스도께 모든 것을 맡기고 그 안에서 안식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에게 주 예수님을 닮으라고 요구하시지도 않고 또 우리가 예수님을 닮게 해 달라고 기도하며 능력을 구한다고 해서 거기에 부응하여 그럴 힘을 주시지도 않는다. 우리의 삶은 그리스도를 모방하는 삶도 아니요 그리스도로부터 능력을 받아서 사는 생활도 아니다. 우리의 삶은 오직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사시는 삶이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삶은 오직 이 삶뿐이다.

 

 

 


사람들이 궁금하게 생각하는 하나의 문제는 어떻게 해야 그리스도가 자기 안에 살아 역사하시게 되느냐 하는 것이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그리스도를 누리고 있는 것이 아닌 것이 분명한 이상 그것은 분명히 어떤 특별한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것이다. 도대체 누가 그리스도가 자기를 대신하여 자기 안에서 사는 것을 체험할 수 있는가?

 

 

 

 

이 해답은 갈2:20 상반절에서 찾을 수 있다. 즉 "이제는 내가 아니요"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가 된 사람에게만 되는 것이다. 내가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는다면 나는 여전히 나대로일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야만 비로소 나는 이전의 내가 아닐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는 것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먼저 두 가지 일이 이루어져야 한다. 첫째는 그리스도가 우리를 포함하여(대표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셔야만 한다. 둘째는 우리가 그것을 남의 일로서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의 일로서 받아들여야 한다. 즉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운명을 지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 우리 자신이 바로 그 자리에 있었고 그와 함께 죽어 없어졌다는 사실을 믿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때 우리는 우리의 죄 문제가 해결되었을 뿐 아니라 우리의 모든 (육신의) 문제가 근본적으로 다 해결되었음을 믿어야 한다. 나의 죄만 끝장난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 끝장난 것이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롬6:6) 이 말씀은 우리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이다. 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성소 안에 있는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졌다. 휘장이 위로부터 찢어졌다는 것은 이 일이 사람이 한 일이 아니요 하나님이 하신 일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 휘장에는 그룹(Cherub)들이 수 놓여 있었다.(출36:35, 대하3:14) 그룹이란 하나님을 수종드는 천사들을 가리킨다. 히브리서는 이 휘장이 주 예수님의 육체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에스겔서 10장을 보면 휘장에 그려진 그룹들은 천사는 천사되 하나님의 피조물들을 대표하는 천사들임을 알 수 있다.(겔10:14) 그것들은 사자와 황소와 독수리와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성전의 휘장이 찢어졌을 때 옛 창조에 속한 모든 만물도 함께 찢어진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들을 주 예수님께 맡기셨기 때문에 주님의 몸이 찢어질 때 모든 피조물도 다 함께 찢어진 것이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그는 혼자 죽은 것이 아니라 모든 옛 피조물들도 함께 사라지게 하신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항상 깊이 생각해야 한다. 이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우리는 이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렇다면 왜 오늘날 우리 자아는 여전히 살아 있을까?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는데 왜 아직도 살아 있는가? 이것이 바로 믿음의 문제이다.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는 진리에 기초해야지 막연한 인간적 관념에 기초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우리의 생각과 의지(意志)를 하나님의 말씀 위에 두도록 훈련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잠시 동안이라도 우리가 살아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되며 살아 있기를 기대해서는 안된다.

 

 

 

 

만일 우리가 살아 있기를 바라고 살려고 한다면 우리 자아는 즉시 살아난다.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모든 역사는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것은 오직 믿음 안에서만 역사하며 실제가 된다. 우리의 죽음과 부활(하나님을 향해 거듭남)은 오직 믿음 안에서 실제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일 매순간 믿음으로 살지 않으면 안된다.

 

 

 

 

애굽에서 바로에게 압제를 당하며 고생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바 가나안에서 자유롭고 행복한 생활을 누리는 것은 그들이 모두 간절히 바라는 바였지만 그들의 상식에 비추어 볼 때 가능성 면에서는 실현 불가능한 비현실적인 이상에 불과했다. 그런데 그런 그들의 생각은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체험하며 애굽에서 무사히 빠져나와 광야에 머물게 되었을 때에도 그다지 변하지 않았다.

 

 

 

 

즉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다지 믿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의 생각과 의지는 하나님 편에서 (믿음으로) 작용하지 않고 오직 육신적 상식과 관념을 따라서만 작용했다. 그러므로 결국 그들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누리지 못하고 광야에서 다 죽고 말았다. 하나님의 약속은 분명한 실제이지만 그것은 오직 그것을 믿는 자 안에서만 실제로 작용한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누리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만일 우리가 매일 자신이 착하게 되며 선을 행하는 좋은 사람이 되기를 바라며 그렇게 되려고 노력한다면 이것은 아직 우리 자신이 살아 있다는 증거이다. 이것은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 힘으로 스스로 사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서 역사하실 수 없다. 바울이 스스로 한 유일한 일은 자기를 버리고 그리스도를 취하는 일 곧 예수를 믿는 일뿐이었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그러나 오늘날 많은 신자들은 그렇지 않고 여전히 죽은 자신을 되살려 어떻게든 좋은 사람이 되어 보려고 발버둥친다. 이것은 그들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살고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인내가 없을 때 우리가 할 일은 "주님, 저는 인내가 없는 사람입니다. 저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성질로 가득차 있는 사람입니다. 제 자신이 성질덩어리인데 성질을 어찌 없애겠습니까? 그러므로 저는 인내할 수도 없고 또한 인내하지도 않겠습니다. 오직 저 자신을 새로 맡으신 주님을 믿으며 당신께 저를 전적으로 맡깁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구원을 누리는 길이며 하나님의 능력, 그리스도의 승리를 내 것으로 체험하는 길이다.

 

 

 

 

주님은 우리를 십자가에 못 박으셨고 우리는 거기에 다만 "아멘"이라고 답할 뿐이다. 무엇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인가? 하나님께 순종하려고 노력하고 선한 사람으로 살려고 애를 쓰는 것이 아니고 오직 이 한 가지 곧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살도록 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 일 곧 예수를 믿고 의지하는 일에 전념하고 다른 모든 수고와 노력을 내려놓는다면 일이 죽도 밥도 안되고 실패하는 것을 보게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그의 놀라운 솜씨로 모든 일을 다 온전히 해결해 가시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던져지는 마귀의 주된 시험은 우리로 하여금 옛날에 저지르던 범죄를 다시 그대로 저지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우리로 어떤 문제에 직면하여 무언가 스스로 일어나 하도록 부추기는 것이다. 그렇게만 되면 다음은 일사천리로 마귀의 뜻대로 되어갈 것이기 때문이다.

 

 

 

 

범사에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이 스스로 일어나 행동하게 될 때 우리는 이미 모든 일에 실패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우리가 정신을 차려서 이러한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고 날마다 주님을 바라보면서 범사에 주님을 의지하고 그를 믿는다면 우리는 이제 정말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내 안에 사셔서 내 대신 모든 일을 다 이루신다는 사실을 날마다 간증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출처 : 하나님의 임재
글쓴이 : 조용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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