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 설교 모음

[스크랩]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

하나님아들 2014. 7. 7. 21:17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주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지니라"(사도행전13장48-49절)

 

행 13:13~41은 바나바와 바울이 비시디아 안디옥이라는 곳에서 전한 강론의 내용입니다. 그 내용을 다 읽어야 되겠지만 시간상 읽지 않았습니다. vv13-14,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이 바보에서 배 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이르니 요한은 그들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그들은 버가에서 더 나아가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르러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앉으니라.” 비시디아 안디옥이란 도시는 밤빌리아 지역의 한 도시로서 바나바와 바울은 그곳에서도 마찬가지로 안식일에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복음을 전했습니다.

 
거기서 전한 말씀 내용을 잠시 살펴보면,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① 첫 부분(vv17-23)은 서론으로서 출애굽부터 다윗의 역사까지 구약의 역사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마음에 맞는 다윗을 통해 그의 후손 예수를 구주로 세우셨다고 말씀하죠. 이런 역사 개관을 통해 구약의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는 통로라는 점을 논증합니다. 행 3:22-23, “(사울 왕을)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 하시더니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이 사람의 후손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

 
② 두 번째 부분(vv24-37)은 구약의 역사가 예언하고 있는 대로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예언이 성취되었다는 사실을 확증합니다. 3:29-30, “성경에 그를 가르켜 기록한 말씀을 다 응하게 한 것이라. 후에 나무에서 내려다가 무덤에 두었으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신지라.”


③ 세 번째 부분(vv38-41)은 구약의 예언대로 오신 그리스도를 믿도록 권유하는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3:38-39,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

 
그러니 이 바울의 말씀강론의 결론이 무엇입니까 성도들 중에는 목사님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정신을 집중하지 않고 방향을 잡지 못한 채 앉아 있다가 나중에 “오늘 목사님이 무슨 말씀 전하셨어요?” 그러면 “음~, 글쎄요. 잘 모르겠는데요.” 그러던가, “ 음~, 다 좋은 말씀이지요. 목사님이 뭐 나쁜 말씀 하시겠어요?” 그러든가 강론 중에 전한 재미있는 예화 한 가지만 기억하는 분들이 참 많아요. 오늘 바울의 강론을 듣고서 결론이 무엇인가를 파악해야 제대로 설교를 들은 거겠죠? 그게 뭡니까? 이렇게 결론지을 수 있을 겁니다. ‘구약 성경에 예언된 다윗의 후손,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고, 그를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함을 얻게 된다.’는 겁니다. 부연하자면 모세의 율법을 지켜도 얻지 못하던 천국 갈 자격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얻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오늘 우리가 전하는 복음과 완전 일치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천국과 지옥을 믿지 않는다고 말하지요. 그런데 실제로 누가 죽으면 뭐라 인사하죠?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이게 무슨 의미예요? 좋은 데 밝은 데 가라는 얘기죠. 이 시간을 빌려서 알려드리는데, 우리 크리스천들은 이런 문상인사를 하면 안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믿고 죽은 사람은 이미 천국에 갔고, 안 믿고 죽은 사람은 이미 지옥에 갔기 때문입니다. 살아있을 때가 기회이고 죽으면 끝입니다. 죽은 사람이 지옥에서(혹은 연옥에서) 천국으로 옮기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그러므로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는 인사는 하지 말아야 합니다. 대신에 "주님의 위로를 빕니다.", "마음이 많이 아프시죠?", "천국에 가셨으니 힘 내세요." 이렇게 인사하면 됩니다. 또 사람들은 “이 땅에서 괴롭게 사시다 가셨는데, 좋은 데 가셨으면 좋겠어요.” 죽으면 끝이고 천국과 지옥이 없다면서 또 좋은 데 가라고 합니다. 죽으면 그냥 끝이라면서 말이죠. 좋은 데가 어딜 말하는 겁니까? 저들은 막연하게 좋은 곳이라 하지만 그게 아니죠. 죽음 후에는 천국과 지옥이 분명히 있습니다.

 
실존주의 철학자인 키에르케고르가 “인생은 고통의 터널을 지나 죽음에 이르는 종착역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모든 인생이 다 죽음의 종착역을 향하여 가고 있습니다.  지금 사는 게 너무 힘들고 고통스럽다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죽음으로 인생을 마감하면 삶의 모든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 거겠죠. 그러나 하나님께서 히 9:27에서 말씀합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우리 인생에게 한 번 죽는 것은 정해진 것입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찾아옵니다. 그러나 죽음이 끝이 아닙니다. 새로운 세계가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기다리고 있는데, 어떤 이는 생명의 부활로 영원한 천국에, 어떤 이는 사망의 부활로 영원한 저주와 형벌의 지옥에 이르게 됩니다. 믿든지 안 믿든지 이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중력이 없다고 믿고 고층빌딩에서 떨어진다고 날아가는 게 아니라 추락해서 죽는 겁니다. 사실은 믿지 않아도 부인해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걸 막연히 믿는 사람들조차 이 좋은 곳, 천국을 가려면 착하게 살아야 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천국에 가고는 싶은데 지금은 자신이 없고 좀 더 착한 일 많이 하고 그러면 나중에 언젠가 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겁니다. 이게 맞습니까?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좀 착하게 사는 의로움을 가지고는 결코 천국에 갈 수 없다고 말씀합니다. 죄가 하나도 없는 완전한 의인만이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말씀하시죠. 그런데 이 땅에 사는 모든 인류는 원죄를 타고 나고 또 스스로 범죄 하였기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고”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결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v39에 모세의 율법을 아무리 지켜도 의롭게 될 수 없단 말이 그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다른 의를 세우셨는데 바로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셔서 우리 죄를 짊어지시고 우리가 받을 천벌을 대신 받으시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의 구주가 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죄사함받고 그의 의로움이 나의 의로움이 되어 천국백성이 되는 혜택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누구에게요? 오직 믿는 자에게, 누구를? 예수 그리스도를! 이게 바울의 말씀강론의 핵심입니다. 자, 이렇게 바울이 전한 천국복음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읽은 본문말씀을 통해 살펴봅시다. http://cafe.daum.net/ilmak

 
1. 복음을 받는 사람들의 두 가지 반응

그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vv42-43, “그들이 나갈 새 사람들이 청하되 다음 안식일에도 이 말씀을 하라 하더라. 회당의 모임이 끝난 후에 유대인과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사람들이 많이 바울과 바나바를 따르니 두 사도가 더불어 말하고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 권하니라.”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듣고 구원의 도리를 깨달아 예수님을 구주로 믿은 것입니다. 모르긴 해도 천국 복음에 대한 입 소문은 한 주간 동안 이 안디옥성에 시끄러울 정도로 퍼져나갔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v44에 보니 한 주간 후 다음 안식일에는 거의 온 시민들이 모여서 말씀을 들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v45, “유대인들이 그 무리를 보고 시기가 가득하여 바울이 말한 것을 반박하고 비방하거늘” 그들은 바울이 전한 구원의 복음에 대하여 반박하고 비방하며 거부하고 천국 복음을 훼방하였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원의 복음이 전해질 때 사람들은 반드시 두 가지 반응을 합니다. 받아들이고 믿든지,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하던지 말이죠.

 
아마도 요즘 사람들은 복음을 듣고 여기 유대인들처럼 반대하며 핍박하지는 않을 겁니다. 아마 조롱할 겁니다. 왜냐하면 천국지옥이 이 시대의 시급한 문제가 아니라, 현실의 경제문제를 더 큰 문제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오늘날 사람들 앞에서 본문의 설교를 하면, “웬 엉뚱한 이야기를 하느냐?”며 딱하게 여길 것입니다. 따라서 요즘은 천국복음에 대해 들으면 여기 유대인들처럼 화내고 박해하는 게 아니라, 무관심한 채 자기와 상관없다는 태도를 보일 것입니다. 오히려 복음전하는 자를 불쌍한 눈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쳐다볼 겁니다.

 
어찌됐든 간에 복음에 대해서 항상 사람들은 두 가지 반응을 보입니다. 듣고 믿든지, 무관심하거나 반대하며 믿지 않든지…. 성경은 이에 대해 단호하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 3:16-18)

 
그러므로 우리가 전도할 때도 언제나 두 가지 반응을 만나게 될 겁니다. 아니 사실은 반대하고 조롱하고 비방하고 무관심한 자들을 더 많이 만나게 될 겁니다. 이걸 당연한 일인 줄 아셔야 합니다. 이런 일에 초연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천국복음을 전할 때도 듣고 예수님을 믿은 자가 있는가 하면, 끝내 믿지 않고 심판을 받은 자가 있었습니다. 심지어 가롯유다 같은 자는 제자인데도 배반하고 예수님을 팔았습니다. 베드로나 바울의 복음전파를 듣고도 똑같은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에 대해 반대하거나 무관심한 자들 때문에 절대로 실망할 필요 없습니다. 복음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늘 그래왔다는 사실입니다. http://cafe.daum.net/ilmak

 
2.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

이런 걸 보면서 우리는 복음을 아무나 받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됩니다. 오늘 본문 v48b에 보면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누가 영생을 얻게 됩니까? ‘영생받기로 작정된 자’만이 영생을 받습니다. 따라서 만약에 두 사람에게 복음을 전했는데 한 사람만 영생 받기로 작정된 자라면 그 한 사람만 복음을 받아들여도 복음 전파는 100% 대성공인 셈입니다.

 
‘누구는 구원받기로 작정하고 누군 버리기고 작정했는가?’하는 부분은 어떤 측면에서 보면 굉장히 불합리하고 독선적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분명한 진리입니다. 신학적으로 작정과 예정에 대해서 박형룡 박사는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작정이란 만사만물에 관계하는 넓은 범위의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을 뜻하고, 예정이란 특별히 구원에 관계하는 좁은 범위의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서 작정은 우주만물에 대한 하나님의 보편계획이고, 예정이란 인간 구원에 관련된 하나님의 특수계획을 말합니다.

 

또 선택을 정의하자면 “아무런 조건이나 공로와 상관없이 죄인들 가운데 어떤 일정한 수를 하나님의 기쁘신 뜻으로 선택하여 구원얻고 영광의 후사가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영원한 행위를 뜻한다.” 하나님의 계획인 작정을 크게 원으로 그린다면 그 안에 예정이란 원을 그릴 수 있겠고, 그 예정 안에 선택이란 원을 그릴 수 있을 것입니다. 행 13:48에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란 단어는 사실 예정을 말하는 것이고 특히 선택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예정, 작정, 선택’이란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우리 크리스천들에게 하나님이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가 분명히 있다는 것을 지지해주고 있습니다.  ① 마 22:14,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② 엡 1:4-5,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③ 딤후 1:9,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예정)대로 하심이라.”  ④ 롬 8:29-30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⑤ 롬 9:11,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등이 예정과 선택을 지지하는 구절들입니다.

 
우리는 내 지성이나 느끼는 감정이나 의지를 기준으로 예수 믿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만을 기준으로 믿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가라!” 그러면 가고 “멈추라!” 그러면 멈추고 성경이 말하는 그대로 믿는 정통 보수 신앙을 견지합니다. 앞의 말씀에 의하면 사람들이 왜 복음을 거부합니까?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이유 한 가지를 찾아보자면 아직 때가 되지 않아서일 겁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들은 왜 복음을 받아들이고 예수 믿습니까?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되었기 때문입니다.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이 말씀을 역으로 읽으면 어떻게 됩니까? “예수님을 믿는 자는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예정, 선택)된 자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는다면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란 사실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감사하십시오. 내가 영생을 받기로 작정된 자가 되어 예수 믿는 자리에 있게 되었다는 사실에 감사하셔야 합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선택이 언제 일어났다고요?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아니 창세전에 일어났다는 겁니다. 이게 어떻게 가능해요? 하나님이 창조주이시고 전지전능하신 주권자이시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우리를 구원하시기로 예정하셨다면 그래서 우리를 이제 부르시고 구원하셨다면 이 구원이 얼마나 확실합니까? 갑자기 생각나서 어제 결정한 게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니 이 구원을 이루시기 위해서 우리가 천국에 갈 때까지 얼마나 확실하게 보장하시겠습니까?

 

롬 8:32,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선택하신 자는 반드시 구원하시고 영화롭게 천국에 들어가게 하신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에 대해 담대함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이 말씀을 잘못 적용하면 “그러면 우리가 전도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전도하지 않아도 선택된 자는 다 믿을 거고 전도 아무리 해도 선택되지 않은 자는 구원받지 못할 거 아니냐는 거죠.

 

그러나 그건 오해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구원하실 때 “하나님께서는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 1:21) 말씀하십니다. “너는 가서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네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명령하십니다. “너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누가 선택받은 자인지 아닌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저 누구에게든지 복음을 전해야 되고, 하나님은 우리의 미련해보이기조차 하는 전도를 통해서 구원을 베푸시기 때문에 무조건 전해야 하는 겁니다.


 3.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여 떠나는 제자들

 그런데 열심히 복음을 전했더니 받아들이지 않고 무관심하거나 반박하고 비방하고 있으면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그때 바울과 바나바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우리 같으면 기분 확 잡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들에 대해 안타까운 마음을 가졌겠지만, 바울의 일행들은 기분 잡쳐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에게 이렇게 반응합니다. v46,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그것을 버리고 영생을 얻기에 합당치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그리하여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가 다 믿게 된 것입니다. v49에 “주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지니라.” 그랬죠? 유대인들에게서 복음의 방향을 이방인들에게 돌리게 된 계기가 되고 그렇게 복음이 전 세계로 확장되어 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계획은 절대로 중단되는 법이 없습니다. 내가 거절한다고 해서 구원계획에 차질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나 한 사람 심판을 받을 뿐, 이 복음의 역사는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복음을 거절했을 때 하나님은 지체 없이 복음의 물줄기를 이방인에게로 돌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마 10:23에, “이 동네에서 너희를 핍박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고 말씀하죠. 하나님은 절대로 당신의 일을 중단하시지 않습니다. 유대인이 거절하면 이방인에게로, 이 동네에서 거부하면 다른 동네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전도란 안 믿는 사람을 찾아가서 내가 그 사람을 예수 믿게 하는 것이 전도가 아닙니다. 나는 어느 한 사람도 예수 믿게 할 수는 없습니다. 나는 그에게 믿음의 선물을 줄 수 없습니다. 믿음의 선물은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에게 하나님만 주실 수 있는 선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도란 두루 다니면서 하나님께서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를 내가 찾아다니는 것입니다. 우리가 소풍가서 보물찾기 하듯이 그런 사람을 내가 발견해내는 것입니다. 고구마 전도법에서 말하듯이 찔러서 푹 들어가는 익은 고구마를 찾는 겁니다. 이 광주시에 하나님께서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가 얼마나 많은지 아무도 모릅니다. 이미 기름과 심지까지 준비되어 있는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불만 붙이면 믿음이 불일 듯 일어날 사람이 많이 있을 겁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복음의 불을 들고 다니면서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붙여보는 것입니다. 복음의 젓가락을 가지고 이 사람 저 사람 찔러보는 겁니다.

 
 우리가 사람들을 전도하기 위해 만날 때 한 사람도 구원시키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낙심할 필요 없습니다. 우리가 전도함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한 영혼이 얼마나 귀한지를 알게 될 겁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에 출석하고 있는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얼마나 귀한 존재인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전도하며 행한 선한 일이 그 사람을 구원해 내는 벽돌 한 장 쌓는 일이 될 것입니다. 어느 날 그런 벽돌 쌓는 일들이 마쳐질 때 예수님을 영접하고 구원받는 역사가 일어날 겁니다. 우리가 기도하면서 계속 전하고 있다면 잘하는 것입니다. 결과는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의 말을 들은 유대인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v50에 보니까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시내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박해하고 그 지역에서 쫓아냈습니다. ‘경건한 귀부인들’이란 유대교 예배에 참여하고 있던 고위층의 부인들이고, ‘유력자들’은 고관들과 유지들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종교적 박해를 가할 때 이렇게 정치권력을 이용하여 교묘하게 압박해왔습니다.

 
 그러나 바울과 바나바는 그런 것에도 역시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v51에 보니까 “두 사람이 그들을 향하여 발의 티끌을 떨어버리고 이고니온으로 가거늘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 ‘티끌을 떨어버리는 행위’는 마 10:14에서 예수님이 명령하신 대로 행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의 땅에서 돌아올 때 성지 예루살렘의 신성함을 지키기 위해서 이방의 먼지도 떨어버렸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를 상징적인 표지로 복음을 전하고 받지 않으면 발의 티끌을 떨어버림으로써 그들과 관계가 없다는 것과 그들의 불신의 책임을 스스로 지게 된다는 뜻으로 명령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복음은 구걸이 아니라 선포입니다.

 
 어떻게 이런 담대한 행동이 나오는 걸까요? 쫓겨 가는 마당에 할 거 다하고 가지 않습니까? 그것은 복음 때문에 박해를 받는 자가 복이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잘 알기 때문일 겁니다. 하늘의 상이 크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들은 복음의 물길이 이런 박해로 인해 막히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발에 티끌을 떨어버리고 이고니온 지방으로 이동하는 바울과 바나바의 모습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했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복음을 전하는 저와 여러분의 담대한 모습이기를 원합니다.扈ⓗ

출처 : ╋예수가좋다오
글쓴이 : (일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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