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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셀교회와 가정 교회에 대한 연구보고 [변종길 교수]

하나님아들 2014. 3. 27. 23:20

 

다음은 2008년 9월 대한예수교장로회(고신) 총회에 제출된 고려신학대학원 교수회의 “가정교회와 셀교회에 대한 연구보고서”입니다.

 

 

셀교회와 가정교회에 대한 연구보고서

 

 

고려신학대학원 교수회

 

 

 

서 론

 

최근 한국교회 목회 현장에 셀목회에 대한 관심과 함께 가정교회 운동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교파를 막론하고 많은 목회자들이 이 운동에 관심을 가지고 목회 현장에 적용을 시도하고 있거나 이미 정착 단계에 있는 교회들도 있다. 일부에서는 이 운동이 8-90년대 한국교회를 풍미했던 성경공부 중심의 ‘제자훈련’의 한계를 극복한 이상적인 목회 모델로 인식되면서 현재 한국교회 전체에 확산되고 있는 추세이다. 가정교회가 이처럼 많은 목회자들, 특별히 장로교 목회자들의 관심을 끌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가정교회 운동을 이 시대의 바람직한 목회의 대안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전통교회 특히 장로교회 교회론과 정치체제의 근간을 위협하는 위험한 운동으로 볼 것인가?

2007년 9월에 모인 대한예수교장로회 제57회 총회는 셀교회와 가정교회에 대해 고려신학대학원 교수회에 맡겨 자세히 연구하여 보고하게 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앞서 고려신학대학원 교수회는 가정교회 문제에 대해 학술대회를 개최하기로 결정하고, 2007년 11월 1일에 고려신학대학원 강당에서 “가정교회 학술대회 세미나”를 개최하였다. 이 때 발표한 원고들은 고려신학대학원 교수논문집인 「개혁신학과 교회」 21(2008)에 실려 있다. 가정교회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이 논문집을 참조하기 바라며, 본 연구보고서에서는 셀교회와 가정교회에 대해 성경적 관점과 개혁주의 교회론의 관점과 실천신학적 관점에서 간단히 살펴보고 그 문제점을 지적하며, 마지막으로 그 대안과 방향을 제시하고자 한다.

 

I. 셀교회에 대한 개요

 

1. 기본 개념

 

셀교회란 소그룹 형태의 셀을 기반으로 하여 회중으로 모인 교회를 말한다. 작은 셀들 하나하나를 하나의 작은 교회로 인정하여 평신도 사역자가 셀의 리더로서 성도들을 돌아보게 하는 목회구조이다. 셀교회에서는 이러한 구조에 대한 교리적 근거로서 모든 교인이 그리스도의 제자로 사역하는 전신자제사장직 교리를 주장한다. 셀교회 주창자들에 의하면, 셀교회야말로 모든 신자를 제자 되게 하는 구조일 뿐만 아니라 전신자를 복음 사역자가 되게 하는 성경적 교회구조이다. 이러한 주장은 중세교회뿐만 아니라 오늘날까지도 교회를 지배하고 있는 제사장직의 성직자화, 은혜의 성례전화, 교회의 제도화에 대한 반발 때문에 생겨나게 되었다. 오늘날 교회는 평신도를 통해 그리스도께서 세상 속에서 살아 역사하는 몸이라기보다 단순히 교인들이 출석하는 장소와 성직자들이 관리하는 건물이 되었으며, 사역을 감당해야 할 그리스도의 제사장들이 구경꾼들로 전락했다는 것이다.

셀교회의 주창자인 침례교 목회자요 신학자인 랄프 네이버(Ralph W. Neibour Jr.)는 전통교회와 셀교회를 비교하면서 건물 중심에서 공동체 중심으로, 프로그램 중심에서 관계 중심으로, “오라” 구조에서 “가라” 구조로, 교육에 기초한 교회구조에서 사역에 기초한 교회구조로, 교회 건물 내에서의 시간 활용에서 교회 건물 밖 삶의 현장으로 변화된 패러다임을 강조한다.

 

2. 강조점

 

셀교회는 외적 구조나 프로그램보다 교회의 본질과 사명을 강조한다. 다시 말해서 셀교회는 가정교회와 함께 교회의 본질 회복을 위한 노력의 산물로서 신약의 초대교회로 돌아가려는 운동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는 무엇보다도 교회의 공동체성이 강조된다. 교회 구성원들간의 상호의존적 관계를 형성하는 코이노니아적 구조를 강조한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교회의 공동체성은 특별히 오늘날 포스트모던 사회에서 더욱 절실히 요청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거대한 집단 속에서 개인이 소외되며 소수의 욕구가 충족되지 못하는 사회문화적 상황 속에서 교회의 공동체성이 회복되어야 하는데, 셀교회가 바로 그 본질을 회복하는 교회형태라는 것이다.

이 점에서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집’ 즉 ‘오이코스’로서 교회의 메타퍼(은유)가 강조된다. 교회 구성원의 관계가 사랑의 가족관계에 기초한 가족공동체임을 성경이 극명하게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가정교회’에서 특별히 셀그룹 모임의 이상적인 장소로서 ‘가정’을 주장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 점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3. 특징

 

셀은 5-15명의 성도들로 구성된 교회 속의 소그룹으로 예배, 교제, 기도, 전도, 양육, 봉사 등의 기능을 수행하며, 영적인 가족공동체로서의 교제를 나누며 신앙의 성장과 아울러 전도를 통한 셀의 배가가 강조된다. 셀교회의 키워드가 ‘번식’이라면 가정교회의 키워드는 ‘가족’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셀교회가 성장과 효율에 중점을 둔다면 가정교회는 관계와 섬김이라는 교회본질 회복에 중점을 둔다. 구성원 형성에 있어서도 셀그룹은 나이, 성별, 취미 등에 있어 동질성을 적용하지만(남성 모임, 여성 모임, 청년 모임, 전문인 모임, 동호인 모임 등), 가정교회는 반드시 부부 및 남녀, 가족이 함께 모이는 것을 강조한다. 또한 가정교회는 휴스턴서울교회 최영기 목사의 사역 모델을 따라 말씀과 기도가 강조되지만, 셀교회는 남미 콜롬보에서 발전된 G12,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에서 발전된 김삼성 선교사의 G12, 한국의 ‘풍성한 교회’에서 발전된 D12 등 모델이 다양하며, 특별히 G12 모델에서는 성령의 은사와 치유가 강조된다.

 

II. 가정교회란 무엇인가?

 

그러면 ‘가정교회’란 무엇인가? 어떤 이들은 ‘장소’로서 성도의 가정에서 모이는 성도들의 모임을 ‘가정교회(house church)’라고 부른다. 신약성경에 나타나는 많은 교회들이 가정교회 형태였다. 로마 교회는 브리스가와 아굴라의 집에 모였으며(롬 16:5), 고린도 교회는 아마도 바울과 온 교회의 식주인이었던 가이오의 집에서 모인 것으로 생각된다(고전 16:23; cf. 고전 1:14). 골로새 교회는 빌레몬의 집에서 모였으며(몬 2절), 라오디게아 교회는 눔바라는 여자의 집에서 모였다(골 4:15). 또 에베소 교회도 처음에는 브리스가와 아굴라의 집에서 모였다(고전 16:19). 이처럼 초대 교회는 성도의 집(가정)에서 모인 경우가 많았는데, 이 경우의 ‘가정’이란 장소로서의 가정을 말한다.

그러나 오늘날 ‘가정교회’를 주장하는 사람들 중에는 단순히 성도의 집에서 모였다는 것 이상을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미국 휴스턴서울교회의 최영기 목사와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말하는 ‘가정교회’가 그러하다. 그들에게는 장소적 의미보다 ‘새로운 교회구조’로서의 의미가 더 중요하다. 즉, 그들이 말하는 ‘가정교회’는 교회 안의 한 소그룹 모임으로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곧 ‘교회 안의 교회’로서 ‘가정교회’가 위치하고 있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사실 어디에서 모이느냐 하는 장소보다도 ‘새로운 교회구조’가 그 핵심이다.

이 ‘새로운 교회구조’는 성령의 역동적인 역사(役事)를 제한하는 ‘전통적인 교회구조’와는 달리 ‘성령의 힘을 제한하지 않는 교회구조’인 초대교회를 말한다. 초대교회 당시에는 한 도시에 하나의 교회 안에 가정이 중심이 된 수많은 교회들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최영기 목사는 이렇게 말한다. “어쨌든 저는 신약교회가 성령께서 마음껏 역사하실 수 있는 조직, 즉 가정교회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이를 통하여 폭발적인 능력이 나오게 되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가정교회’의 핵심은 교회 안에 있는 ‘가정교회’ 하나하나가 ‘독립된 교회’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것을 ‘구역’이라고 부르기를 거부한다. 그러면서 가정교회와 구역은 다음 두 가지 점에서 차이가 있다고 말한다. 첫째로, 구역은 같은 지역에 사는 사람을 묶어 조직되지만 가정교회는 가정교회 회원들의 선택에 따라 결성된다. 둘째, 구역모임은 친교와 서로를 돕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는 반면, 가정교회에서는 예배, 성경공부, 제자훈련, 선교, 전도, 친교 등 교회가 하는 모든 역할을 다 한다. 따라서 가정교회는 자그마한 개척교회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처럼 최영기 목사가 주장하는 가정교회는 교회 안에 있는 또 하나의 작은 교회이며, 그러한 가정교회들이 모여서 하나의 전체 교회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교회 안의 교회’라는 구조가 중요하며 장소 문제는 부차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교회 안의 교회’, ‘2층 구조로서의 교회’ 구조는 신약성경에서 발견되는 가정교회와는 거리가 멀다. 예루살렘 교회가 “집에서 떡을 떼고”(행 2:46),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였다”(행 5:42), 또는 “마리아의 집에 .... 모여 기도했다”(행 12:12)는 말은 있어도 그 각각이 완전한 교회였다는 증거는 없다. 예루살렘 교회는 수많은 가정교회들의 연합체였다기보다도 하나의 교회였는데 성도들이 가정에 모여서 모임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가정에서의 모임은 오늘날의 구역모임과 비슷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 외에 로마 교회나 고린도 교회 등에서도 오늘날 ‘가정교회’에서 주장하는 바와 같은 그런 ‘새로운 교회구조’의 증거는 없다고 생각된다.

 

III. 교회란 무엇인가?

 

‘가정교회’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성도들의 가정에서 모이는 모임을 왜 ‘교회’라고 부를 수 없는가라고 반문한다. ‘신자들의 모임’이 교회인데 왜 ‘교회’가 아니냐고 항변한다. 따라서 우리는 교회가 무엇인가를 바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벨직 신앙고백」이 교회는 ‘참 신자들의 거룩한 모임’이라고 했을 때, 그 ‘교회’는 온 세계에 흩어져 있는 ‘보편적 교회’를 말한다. “우리는 하나의 보편적 또는 일반적 교회를 믿고 고백한다. 그것은 참 신자들의 거룩한 모임이다.”(27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표현을 따르자면 ‘택자들의 총수’를 의미한다. “보편적 또는 우주적 교회는 불가시적인데,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 아래 하나로 모였고, 모이고 있으며, 모일 택자들의 총수로 구성되어 있다.”(25장 1항) 따라서 성도들 몇 명이 모였다고 해서 ‘교회’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모든 성도는 어떤 특정한 장소에 있는 ‘지역 교회’에 속해야 하며 그 교회의 가르침과 치리를 받아야 한다(「벨직 신앙고백」 28조). 그리고 참 교회의 표지는 복음의 순수한 전파와 성례의 순수한 거행과 권징의 시행이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을 따라 시행되어야 한다(29조). 그리고 참 교회는 주 예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대로 운영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고 성례를 거행하는 수종자(목사)가 있어야 하며, 목사와 함께 교회회의를 구성하는 장로들과 집사들이 있어야 한다(30조). 그리고 말씀의 수종자들(목사들)과 장로들과 집사들은 교회에 의해 적법한 선거를 통해 선출되어야 한다(31조).

따라서 이러한 교회의 표지를 결하고 있는 ‘가정교회’를 개혁주의적 의미에서 그리고 성경적인 의미에서 ‘교회’라고 부르는 것은 무리가 있다. 가정교회의 ‘목자들’은 대개 교회 성도들에 의해 투표로 선출되지 않으며 당회를 구성하지도 않는다. 물론 장로들이 다 ‘목자들’이 된다면 이런 문제는 없어지겠지만, 가정모임을 ‘가정교회’라고 부르는 것은 여전히 문제로 남게 된다.

 

IV. 초대교회는 다 가정교회였는가?

 

최영기 목사와 그의 주장에 동조하는 사람들은 초대교회는 다 ‘가정교회’였다고 주장한다. “가정교회라고 하면 평신도가 지도자가 되어 가정에서 모이는 교회를 말합니다. 신약성경을 읽어 보면 우리는 당시의 교회형태가 가정교회였음을 발견합니다.” 그렇다면 초대교회는 다 가정교회였는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주장하고 있지만, 신약성경은 가정교회 외에 다른 형태도 있었음을 말하고 있다.

우선 예루살렘 교회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모였다. 3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다 모일 수 있는 장소는 성전이 가장 적합하였을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성전의 동편에 있는 솔로몬 행각에 모였다(행 3:11, 5:12). 물론 그들은 ‘성전’뿐만 아니라 ‘집’에서도 모였다(행 2:46, 5:42). 그러나 이것을 가리켜 ‘가정교회’라고 말하는 것은 성급하다. 이것은 ‘가정교회’라기보다 하나의 구역모임에 가까운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에베소 교회는 처음에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집에서 모였지만(고전 16:19, 행 18:18,19), 나중에는 ‘두란노 서원’에서도 모였다(행 19:9,10). 따라서 에베소 교회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집에서도 모이고 두란노 서원에서도 모였을 것이다. 두 장소 사이의 정확한 역할 분담은 오늘날 우리가 알 수 없다.

야고보서에 보면 성도들이 ‘회당’에 모였다고 한다(약 2:2,3). ‘회당(쉬나고게)’은 원칙적으로 ‘모임’을 뜻할 수도 있고 ‘모이는 장소, 건물’을 뜻할 수도 있지만, 여기서는 ‘들어오다’, ‘좋은 자리에 앉다’, ‘발등상 아래 앉다’는 말과 함께 사용되었기 때문에 건물적 의미로 보아야 한다. 이 ‘회당’은 유대교 회당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야고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낸 편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의 ‘회당’은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모이는 건물(예배당)을 뜻한다. 따라서 야고보가 이 편지를 기록할 즈음에는 유대의 마을 곳곳에, 그리고 수리아 지역의 곳곳에 기독교 회당 건물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신약시대의 교회는 다 가정교회였으며 콘스탄틴 대제의 밀라노 칙령(주후 313년) 이전까지는 다 가정에서 모임을 가졌다는 주장은 지나친 것이며 신약 자체의 증거에 맞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신약성경에 나타난 초대교회는 처음에 성도의 가정에서 모임을 가진 경우가 많았지만, 신약의 ‘모든 교회’가 다 가정교회였다는 주장은 사실에 맞지 않으며 지나치다. 신약의 교회는 환경과 형편에 따라 ‘성전’에서 모이기도 하였고, ‘강의실 홀’(서원)에서 모이기도 하였고, 또한 따로 짓거나 빌린 ‘교회당 건물’에서 모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신약의 교회는 ‘의도적으로’ 가정에서 모인 것은 아니며, 형편에 따라 가정에서 모이기도 하고 홀에서 모이기도 하고 또는 별도의 건물에서 모이기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V. 한 도시에 여러 가정교회가 있었는가?

 

가정교회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한 도시에 여러 가정교회가 있었다고 주장한다. “신약시대에는 지금처럼 한 도시에 여러 교회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한 도시에는 교회가 하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즉, 로마에는 로마 교회 하나밖에 없었고 골로새에서는 골로새 교회가 전부였습니다. 그러나 그 밑에는 가정이 중심이 된 수많은 교회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면 과연 신약시대에는 한 도시에 교회가 하나밖에 없었고 그 안에 수많은 ‘가정교회’가 있었는가? 아니면 한 도시에 여러 ‘교회들’이 있었는가? 아니면 한 도시에 ‘하나의 교회’가 있고 그 안에 여러 개의 ‘가정모임’이 있었는가?

 

1. 예루살렘 교회

 

예루살렘 교회는 하나의 교회 아래 여러 가정모임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성도들이 날마다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또한 ‘집’에서 모여 떡을 떼며 음식을 먹었다는 것은(행 2:46, 5:42) 그들이 성도의 집에서 가정교회 모임을 가졌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누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예루살렘 교회는 은혜와 기쁨이 충만하여서 ‘성전’에 있을 때뿐만 아니라 ‘집’에서도 동일하게 순전한 마음으로 교제하고 형제 사랑을 실천하였다는 것이다.

만일 예루살렘 교회가 각각의 독립된 가정교회들로 구성되어 있었다면, 예루살렘 전체 교회에 대해서는 ‘복수’가 사용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신약성경은 ‘지역 교회’에 대해 사용될 때 하나 이상의 여러 교회를 가리킬 때에는 항상 ‘복수’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갈 1:2, 고전 16:1), ‘아시아의 교회들’(고전 16:19), ‘마게도냐 교회들’(고후 8:1), ‘유대의 교회들’(갈 1:22)에서처럼 여러 교회를 가리킬 때에는 항상 복수로 사용된다. 그러나 사도행전은 예루살렘 교회에 대해 말할 때 항상 단수로 말한다(행 5:11, 8:1, 3, 11:22, 12:1, 12:5, 15:4). 이 사실은 예루살렘 교회가 하나의 단일한 교회였음을 시사한다.

 

2. 로마 교회

 

오늘날 어떤 학자들은 로마에 적어도 세 개의 가정교회들이 있었다고 본다. 우선 생각할 것은 로마서에서 바울은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교회’ 또는 ‘교회들’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는 단지 “로마에 있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롬 1:7)라고 부르고 있을 따름이다. 따라서 이 표현만으로는 로마에 하나의 교회가 있었는지 여러 개의 교회들이 있었는지 알 수 없다.

로마서 16장 5절에 보면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집에 교회가 모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로마의 모든 성도들이 이 집에 다 모였다고 볼 수도 있지만, 당시 도시 로마의 크기로 볼 때 이 가능성은 그리 커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로마에는 브리스가와 아굴라의 집에 모이는 교회 외에도 몇 개의 가정교회들이 더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점에 있어서는 개혁주의 주석가들의 견해도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우리는 로마 교회에 대해 더 이상의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정확한 실상을 알기 어렵다고 말하는 것이 올바른 태도가 될 것이다.

 

3. 고린도 교회

 

어떤 사람들은 고린도에도 여러 가정교회들이 있었다고 본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은 순전히 추측에 근거해 있으며 확실한 증거는 없다. 이들은 성도들이 어디에 몇 명 모여 있으면, 거기에 ‘교회’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교회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개혁주의적 견해를 무시하는 것이다. 개혁주의 교회관에 따르면, 교회가 되려면 교회의 표지가 있어야 한다. 곧 순수한 복음의 전파, 순수한 성례의 거행, 권징의 실시와 같은 참 교회의 표지가 있어야 한다(「벨직 신앙고백」 29조). 그리고 교회에는 직분자들이 있어야 한다. 곧, 하나님 말씀의 수종자와 장로와 집사들인데, 이들은 교회에 의해 적법한 선거를 통해 선출되어야 한다(제31조; 엡 4:11). 그냥 성도들이 모였다고 해서 다 교회는 아니다.

고린도전서 1장 2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에게 편지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하나님의 교회’는 단수로 되어 있다. 여기서 ‘교회’는 지역 교회(local church)의 개념이다. 고린도후서 1장 1절에서도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도 ‘교회’는 단수로 사용되었다. ‘가정교회’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것이 여러 개의 가정교회들로 구성된 하나의 ‘지역 교회’를 가리킨다고 주장하지만, 만일 고린도 교회가 각각의 독립된 완전한 교회들로 이루어져 있었다면 ‘고린도에 있는 교회들’이라고 복수를 사용하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신약성경의 용법이기 때문이다(갈 1:2, 22, 고후 8:1, 행 15:41, 행 16:5, 계 1:4, 11, 20).

VI. 연합 모임이 있었는가?

 

만일 초대교회가 오늘날 어떤 사람들의 주장처럼 한 도시 안에 작은 여러 가정교회들로 이루어져 있었다면, 그들은 어떻게 서로 관련을 맺고 있었을까? 이에 대해 가정교회를 주장하는 학자들은 이들 가정교회들은 때때로 전체 모임을 가졌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 증거로 제시하는 것은 고린도전서 14장 23절의 ‘온 교회’가 함께 모였다는 기록이다. 그리고 로마서 16장 23절에도 고린도 교회에 대해 말하면서 ‘온 교회’의 모임 장소가 가이오의 집에 있었다고 말한다. 여기의 ‘온 교회’란 고린도에 있는 모든 가정교회들의 연합 모임을 의미한다고 본다. 그리고 ‘온 교회’의 회합은 이교도의 모임들의 경우를 따라 한 달에 한 번 정도 있었을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해석에 대해 큰 의문을 가진다. 첫째로, ‘온 교회’에 대한 이해이다. 고린도전서 14장 23절의 ‘온 교회’가 과연 그런 ‘연합 모임’의 의미인지는 의심스럽다. ‘온(whole)’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홀로스’는 ‘부분’에 대해 대비되는 ‘전체’의 개념이다. 따라서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무식한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는 문장에서 ‘온 교회’는 가정교회들의 ‘연합 모임’이라기보다도 교회가 전체로, 즉 공적으로 모이는 것을 의미한다.

로마서 16장 23절의 ‘온 교회’도 마찬가지다. 여기서 “나와 온 교회 식주인 가이오”라는 표현은 바울뿐만 아니라 교회 성도들 전체에 대해서도 식사를 제공하고 대접했다는 뜻이다. 여기서 ‘온 교회’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 전체를 말할 수도 있고, 또는 다른 지역에서 오는 ‘외지인 그리스도인들(Christian strangers)’을 다 포함해서 가리킬 수도 있다. 그렇다면 바울은 여기서 고린도에 연합 모임이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것이 된다.

그리고 소위 그러한 ‘온 교회’의 모임이 한 달에 한 번 정도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도 근거가 없다.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이교도들의 회합을 따랐을 것이라고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이교도들의 제사 행위에 대해 우상숭배이며 귀신과 교제하는 것으로 보았다(고전 10:7, 20). 따라서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이 그러한 이교도들의 회합을 모방했을 것이라고 하는 추측은 설득력이 없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VII. 개혁주의 교회론의 입장에서 본 가정교회

 

현금의 가정교회 운동에 대해 개혁주의 교회론의 관점에서 평가해 보기로 하자. 이것을 개혁주의 교회론을 구성하는 은혜의 방편론과 직분론, 그리고 교회법과 언약론의 관점에서 각각 살펴보기로 하자.

 

1. 직분론의 관점에서

 

최영기 목사는 성경적인 사역 분담(엡 4:11-12)에 근거하여 마태복음 28장 19-20절을 설명한다. 교회개척의 명령은 교회에 주신 명령이요, 교회는 제자를 만드는 곳이라고 한다. 최영기 목사는 수많은 프로그램과 심지어 설교도 제자를 만드는 것이 아니며, 제자를 만들어 내는 것은 가정교회 구로조만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가정교회는 전도하고 목사는 성경공부와 침례로 제자를 만든다. 이런 식의 포괄적인 역할 분담을 그는 성경 주석적으로 제시한다.

그렇지만 “목사는 말씀을 가르치고 복음을 제시만 하면 됩니다. 사실 목사들은 전도를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는 그의 발언은 주석적인 근거가 없다. 한국교회 안에는 이런 주석이 널리 퍼져 있지만, 전도 역시 설교자가 받은 직무에 속한다. 목사는 설교에만 집중하면 된다는 주장은 그 근거가 약하다.

 

2. 은혜의 방편론의 관점에서

 

최영기 목사는 제자 삼는 방법 가운데 설교가 있다고 전제하지만, 설교에 대한 그의 발언은 지나친 감이 있다(막 3:13-15). “사람은 듣고 배우지 않습니다. 보고 배웁니다. 제자는 가르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보임으로써 만들어집니다. ... 목회자가 무슨 설교를 하느냐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목회자가 어떤 삶을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교인들은 보고 배우지 듣고 배우지 않기 때문입니다.”

최영기 목사의 이 발언은 기성교회와 목회자의 취약점을 잘 간파하고 있지만 동시에 문제도 안고 있다. 종교개혁은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롬 10:17)는 말씀에 기초하여 설교를 중시한다. 실제로 마태복음 28장에서 제자들이 부여받은 가장 중요한 임무는 설교(전도) 사역이다. 그런데 “사람은 듣고 배우지 않습니다.”는 발언이나 “설교도 제자가 되고자 하는 마음을 갖게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실제로 제자를 만들어 내지는 못합니다.”는 발언은 지나치다. 설교는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정하신 은혜의 방편이기 때문에 설교를 제정하신 주님의 명령과 그 명령에 담긴 설교의 방편적 성격은 절대적이다.

최영기 목사의 이 발언은 직분론적 문제도 담고 있다. 설교자는 설교에 생사를 걸어야 한다. 기도로 준비하고 성령님께서 설교를 방편으로 삼아 역사하시게 섬겨야 한다. 그리고 목사는 삶의 모범도 보여야 한다. 목회자는 삶으로도 가르쳐야 한다는 주장은 목사에 대한 질책을 담고 있지만, 이 질책이 목사직 자체에 어떤 훼손도 가할 수 없으며 이를 근거로 하여 평신도의 위치를 더 부각시킬 수도 없다.

 

3. 세례(침례)의 역할

 

최영기 목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공동체의 일원으로 불러주셨기 때문에 침례는 서울침례교회라는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사건이라고 말한다. 물론 옳은 말이다. 그리고 영접과 침례는 담임 목사가 책임진다는 말도 직분론에서 보자면 옳은 말이다. 그러나 목자의 부담을 덜어주고 공동체 의식을 강조하기 위하여 이를 목사가 관장한다는 근거는 직분론적이지 않고 실용적이다. 세례 가 지닌 은혜의 방편의 성격도 약화된다.

 

4. 교회론의 관점에서

 

가정교회를 ‘교회’라 부르는 것은 주석적으로 근거가 약하다. 최영기 목사는 가정교회가 지닌 포괄적 성격을 부각하면서 ‘교회’라는 표현을 굳이 고집한다. 그러나 자신의 말처럼 세례와 성찬을 시행할 수 없다면, 그것은 교회가 될 수 없다.

또 가정교회는 개교회의 역할을 하며 완전히 교회형태를 취할 수도 있다고 한다. 그럼에도 마지막 주일은 합동목장으로 모인다. 같은 목장의 목원들끼리는 잘 알지만 다른 목원들은 잘 알지 못하는 폐단이 생긴다는 것이다. 또 목장모임이 정상적인 교회생활을 대치하지 않도록 교회생활을 열심히 할 것을 권면한다.

이런 권면의 근거는 실용적이다. 교회를 예배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주일 날 은혜의 방편인 말씀과 성례로 구성되는 예배가 있는 곳에 교회가 있다. 즉 이렇게 구성된 공예배를 드리는 공동체가 교회이다. 그렇지만 가정교회의 교회론은 공예배로부터 출발하여 구역이나 소그룹 모임을 정위(定位)시키지 않고 이른바 ‘가정교회’로부터 출발하여 전체 모임으로서 합동목장인 교회를 말한다. 그러나 주님이 세우신 교회는 교회 자체이지 ‘가정교회’가 아니다. 차라리 가정교회를 ‘구역’의 연장선상에 있는 ‘특활’이라고 본다면, 이런 문제는 쉽게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5. 침례교적인 배경

 

가정교회는 재량권을 가진 만큼 독자적으로 발전할 가능성과 위험을 동시에 안고 있다. 그러나 개인의 회심을 강조하는 전통적인 침례교와는 달리 가정교회는 ‘집단적인 개인’이다. 이 집단적 개인은 기존의 목회방식이나 교회의 모습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영적 완결체를 목표로 삼는다.

 

6. 교회정치의 관점에서

 

침례교회는 회중교회답게 등록교인과 회원을 구분한다. 직분을 맡고 투표권을 갖기 위해서는 침례를 받아야 하고, 이미 침례를 받은 이들은 안수집사회의를 거치고 임시 신도(信徒)사무총회에서 정식 의결을 거쳐 회원이 된다. 이것은 전통적인 회중교회의 모습이다. 즉 치리권을 회중이 지닌다. 그러나 다른 면에서는 목사가 주도적인 영향을 행사하는데, 이 점에서는 전통적인 회중교회론을 벗어나기도 한다.

미국 회중교회 역사의 초기에는 목사, 장로, 교사와 집사직이 있었으나 이미 17세기 말에 장로와 교사직은 사라졌다. 미국 제1차 부흥운동의 여파로 회중교회가 침례교회로 많이 바뀌었다. 침례교회는 전통적으로 목사(감독; 장로)와 집사 두 직분만을 인정한다. 가정교회론이 말하는 목자는 말하자면 교사직의 회복으로 볼 수 있다. 어쨌든 신도사무총회가 치리권을 갖는 한, 안수집사회는 당회를 대신할 수 없는 제도이다.

 

7. 평신도 목회의 문제

 

‘평신도 목회’라는 말이 지닌 의도를 동정적으로 이해하려고 한다 해도 평신도는 목회의 사명을 받지 않았다. 이 용어는 침례교회나 회중교회적 배경을 보여준다. 즉 평신도를 활성화시켜 이들이 교회 안에서 구체적인 사역을 감당하게 한다. 그렇지만 이것을 ‘목회’라고 부를 성경적 근거는 약하다. 목회자가 평신도 목회를 도와준다는 표현도 적절하지 않다. 예수님은 아주 구체적인 사람에게 목회의 사명을 맡기셨다. 우리는 직분자의 사역인 목회의 원래 의미를 순수하게 사용해야 한다.

평신도 목회 주장의 배경에는 이른바 ‘만인제사장직’이 있다. 그러나 이를 주창한 루터는 ‘절대적인’ 만인제사장직을 주장하지는 않았다. “모든 신자들이 제사장인 것은 옳다. 그러나 모두가 목사는 아니다. 그가 신자요 제사장이라는 사실 위에 직분과 위임받은 교구도 가져야 한다. 소명과 위임이 목사와 설교자로 만든다.” 비록 말씀과 성례 집행권이 교중과 전체 교인들에게 주어졌다 하더라도, 어느 누구라도 이 권을 스스로 행할 수는 없다. 먼저 청빙을 받아야 하고 교중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그래서 교중은 특정인을 말씀과 성례 집행을 위하여 청빙한다. 이처럼 루터는 만인제사장직으로부터 이 특별한 직책 곧 목사직을 도출한다. 칼빈이 교회의 표지를 목사직의 두 사역 곧 말씀 선포와 성례 집행에서 도출한 것도 루터의 이런 입장의 연장선상에 있다. 이렇게 볼 때, 만인제사장직에 기초하여 ‘평신도 목회’를 말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8. 가정교회와 언약론

 

가정교회는 성인 위주의 목회론이기 때문에 어린이의 위치는 여전히 해결해야 할 문제이다. 이 문제는 가정교회론이 개혁교회/장로교회의 정체성을 가장 크게 훼손할 수 있는 대목이다. 침례교회는 유아세례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언약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양 입장은 갈라선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의 약속은 분명하다.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와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창 17:7; 시 105:8-11 참고) 베드로도 같은 것을 선포하였다.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행 2:39) 언약의 당사자는 신자와 그의 자녀들이다(렘 11:10). 이 점이 침례교회와 장로교회의 주요한 차이이다.

이 배경에서 가정교회가 말하는 ‘가정’을 우리는 비판적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가정은 모임의 장소 이전에 이런 언약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 16:31)는 말씀은 구약의 언약을 상기시킨다. 가령 여호수아는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수 24:15하)고 서약한다. 구약과 신약에서 부모와 자녀로 이루어진 가정은 삼위일체 하나님과 언약을 맺는 당사자이다.

 

VIII. 가정교회론의 장로교화?

 

은혜의 방편론과 직분론과 그리고 교회법적으로 볼 때, 개혁교회론과 가정교회론은 서로 다르다. 가정교회론의 배경에 있는 언약론과 은혜의 방편론과 교회법적 측면은 개혁교회론과 다르기 때문에 우리가 받아들일 수 없다. 그렇지만 가정교회론은 장로교회의 위기와 교육받은 목회의 위기에 직면한 한국 개혁교회와 신학을 향하여 반성을 촉구한다. 직분론 즉 장로교회의 목사직뿐만 아니라 장로직의 바람직한 직분 수행에 대한 반성의 기회도 제공한다. 장로교회는 교리와 직분과 목회방법론에 있어서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고 고수하여야 하는 도전 앞에 서 있다.

목회방법론으로서 가정교회론의 특성은 참고할 만하다. 현대 사회와 교회가 점차 개인주의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가정교회가 추구하는 친교의 기여는 적지 않은 의미를 지닌다. 그렇지만 친교는 일차적으로 ‘예배’에서 삼위일체 하나님과 나누는 교제를 말한다(행 2:42 참고). 이 점에서 ‘공예배’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 삼위일체 하나님과 누리는 교제가 일차적이며, 이 일차적 교제를 누리는 하나님의 자녀들과는 형제자매의 관계를 예배에서 확인하며 구역이나 소모임에서 강화한다. 이를 인지하고 전제할 경우 공동식사와 기도회, 그리고 서로의 비밀을 털어놓을 수 있고 전도와 선교의 사명을 확인하는 가정교회는 현대병을 치유하는 좋은 방편이며 교회를 활성화할 수 있는 방법론이기도 하다. 비록 이 배경에 침례교나 회중교회론이 있다 하더라도 장로교화하여 도입하고 배울 만한 방법론이다.

그렇지만 가정교회론을 장로교화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가정교회는 성경적이며 초대교회를 회복하는 운동이라는 주장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겠는가? 초대교회를 회복하겠다고 나온 새로운 운동마다 일정 기간이 지나면 여느 기성교회와 다를 바가 없다는 교회사적 교훈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교회는 위로부터 주어지는 은혜의 방편으로 창조된다. 은혜의 방편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주셨고, 이 책임은 일차적으로 목사가 진다. 이를 기초로 하여 개혁교회는 언약론적 교회론을 제시한다. 이 교회론은 가정교회론이 지닌 ‘집단적 개인주의’를 교정할 수 있다. 언약론은 애초부터 개인주의를 경계하고 극복한다. 친교는 일차적으로 삼위일체 하나님과 언약 백성의 관계를 말한다. 언약의 하나님은 언약 백성을 교회의 예배 자리로 부르시고 교회에서 은혜를 베푸신다. 개혁교회는 설교와 성례와 목회를 통하여 교인들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도록 양육한다. 다만 개혁교회론은 교인들이 지금보다는 전도와 선교에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인도하는 방법론을 꾸준히 개발해야 한다. 전통적인 교회가 불신자를 구원하는 데에 점점 힘을 잃어가면서 사역의 초점을 주로 믿는 자들에게만 맞춘다는 랄프 네이버의 한탄은 무엇보다도 개혁교회와 장로교회에도 해당된다.

목회방법론은 다양하지만 그 출생 배경은 항상 존속한다. 가정교회론이 침례교회에서 나온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 경우 침례교회가 발생 초기부터 주장한 만인제사장직이나 직분, 언약 등 교회론이 작용한다. 침례교회는 지역 교회의 완전한 독립을 기조로 삼는다. 침례교회는 상부기관의 하달식 명령이나 하급기관의 절대복종식 제도를 배제한다. 즉 개교회중심체제로서 각 지역 교회는 다른 교회의 간섭을 받지 않는다. 목회자의 파송, 총회나 및 그 산하기관으로부터 하달식 명령을 인정하지 않는다. 개교회는 완전한 독립기관으로서 자의에 의하여 협동할 뿐이다. 이처럼 침례교회는 감독제도뿐만 아니라 장로교제도도 거부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자의에 의한 협동으로 총회와 그 산하기관이 있지만, 총회는 이러저러한 문제에서 교회들을 구속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장로교 정치와는 무관하게 가정교회를 시행하는 교회들이 자의적으로 협동할 경우, 이들은 교회정치에서 이중적인 측면을 지니게 될 것이다. 장로교회에 속한 교회가 침례교적인 연합체의 일원으로 사역한다는 말이 될 수도 있다.

직분론에서도 문제는 간단하지 않다. 침례교가 애초부터 교회에 두 직분만을 인정하기 때문에 장로직은 여전히 어색할 수밖에 없다. 이미 장로가 시무하는 장로교회를 가정교회로 바꾸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아예 개척 형태로 시작하여 장로를 임직함과 동시에 목자로 계속 세우는 일은 가능할 것이다. 운용의 미를 기대할 수야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장로를 인정하지 않는 제도에서 나온 가정교회를 장로교화하는 것은 엄청난 모험일 것이다. 총회나 직분론 등은 교회법의 소관사인데, 교회법에 대한 근본적인 점검이 필요하다.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께서는 은혜의 방편을 직분자인 사도들에게 맡기셨고, 목사직은 이 일을 계속한다. 교회법도 은혜의 방편론과 직분론의 연장선상에 있다. 목자를 선발하는 인선위원회도 당회이면 되고, 목자를 안수하여 장로로 세우면 해결될 것이다. 그러면 당회에 해당된다는 안수집사회를 따로 둘 필요도 없다. 장로가 목자이면 가정교회론이 지닌 장점도 살리고 회중교회론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가정교회론을 교회법에서 보완하여 장로교화할 수 있다 하여도 언약론만은 여전히 해결하기 어려운 교리적 문제이다. 가정교회론이 성인 중심의 목회방법론임이 여실하며, 이 때문에 장로교회의 정체성을 위협할 수밖에 없다. 가정교회를 시행하는 장로교회는 성도의 자녀들이 신도사무총회의 정식 결의와는 무관하게 교회의 정식 회원임을 어떻게 확립할 것인가를 깊이 고민해야 한다.

장로교회는 은혜의 방편론, 직분론, 예배와 교회정치에서 정체성을 확립해야 한다. 그럴 때에야 우리 주변에 있는 다양한 목회방법론을 단적으로 배제하거나 맹목적으로 수용하지 않고 창의적으로 수용하면서도 정체성을 바로 확립할 수 있을 것이다.

 

IX. 개혁교회의 공교회성을 위하여

 

한국교회가 추구하는 성장 일변도의 목회방법론에는 많은 문제점과 한계가 동시에 있다. 한국교회가 부흥과 성장을 이루기 위하여 도입한 방법론의 부침은 심하지만 방법론에 대한 신학적 반성은 많지 않다. 그러나 이제는 성장을 통하여 세계 선교의 두 번째 주역이 된 한국교회는 공교회성을 지향할 때가 되었다.

미국 침례교회 안에서 공교회성의 관점에서 침례교회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현대 침례교회는 어떤 신앙고백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들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교회정치 부분에서만 제외하고 따르던 미국의 초기 회중교회와도 다르다. 현대 침례교회는 미국의 제2차 부흥운동에서 나온 “신조가 아니라 성경만!(no creed but the Bible!)”이라는 입장을 충실하게 고수한다. 그러나 침례교회도 그 역사의 초기에는 여러 신조들을 작성하고 참고하였다. 그러나 현대 침례교도들 중에는 심지어 사도신경도 고백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침례교회의 시초부터 있었던 저항정신이 여전히 남아 있다는 흔적이다. 전통이라는 전통은 모두 거부하는 전통이기도 하다.

이미 언급한 교회론이나 직분론 그리고 언약론과 더불어 신조에 대한 이런 자세는 침례교회가 외부의 영향에 쉽게 노출되게 하였고, 무엇보다도 교회조직이나 전통보다는 자발적인 조직을 통한 사역 위주의 교회론을 창출하였다. 이 교회론의 연장선상에 가정교회도 있다고 하겠다. 이 교회론은 교구교회보다는 자발적으로 결정하고 연합한 성도들로 ‘모인 교회(a gathered church)’를 강조한다. 이것이 국가교회를 거부하고 유아세례를 부인하고 성인세례만을 인정하는 침례로 가시화된다. 스스로 결정하고 사역에 동참할 수 있는 자들만이 회원이 된다. 이것은 미국 내지선교와 외지선교의 저력이었다. 이런 자발적 단체가 목회방법론적으로는 가정교회이다. 즉 가정교회는 사역 중심의 자발적 단체이며, 은혜의 방편과 표지로써 말하는 예배공동체인 교회는 부차적이다.

사실 교회연합운동에 익숙한 한국교회로서는 이런 교회론에 이미 익숙하다. 랄프 네이버도 프로그램 위주의 전통주의 교회를 심하게 비판한다. 사역이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런 교회는 결국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일리 있는 지적이요 분석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장로교의 전통과 고신교회의 정체성을 지켜야 하며, 탁월한 목회방법론을 개발할 책임도 동시에 지고 있다.

미국의 침례교신학자인 하몬은 침례교회가 고대교회로부터 이어지는 공교회성을 지니고 있는가를 질문한다. 그가 말하는 공교회성은 예배와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공동생활에서 표현되는 한 믿음과 한 성찬 공동체가 나타내는 가시적(可視的) 일치이다. 그는 이를 ‘성례전적 영성’이라고도 표현한다. 이 공교회성과 영성을 바로 확보하지 못하면, 침례교회도 기독교로 자칭하지만 몰몬교와 마찬가지로 기독교가 아니라 영지주의에 빠지고 말 것이라고 경고한다. 그의 관심은 공교회적 전통을 도입함으로써 자기의 정체성 곧 침례교회의 정체성을 회복하려는 것이다. 그는 침례교회의 초기 역사에는 ‘공교회적 침례교도’들이 있었다는 것도 밝히면서 전통을 거부하는 현대의 침례교회인들을 정체성 회복을 향한 대화에 초청한다. 그는 고대교회 교부들을 인용하면서 신조와 예배와 전통의 권위와 그것들의 회복을 강조한다.

우리 고신교회 역시 이런 절박한 현실 앞에 서 있다. 그간 많은 목회방법론의 소용돌이 가운데서 우리의 정체성은 논의의 대상도 되지 않았다. 우리가 어떻게 공교회적인가? 이 질문에 몰두하지 않으면 우리도 역시 ‘영지주의’에 빠질 위험성에 처해 있다.

이제 가정교회를 시행하고 있는 교회들은 개혁교회의 전통과 교회법을 존중하는 새로운 모델을 개발해야 할 단계에 와 있다. 공교회성을 확보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 가정교회론을 다른 사람에게도 넘겨줄 수 있을 것이다. 이제 고신교회의 신학은 방법론을 개발할 뿐만 아니라, 도입되는 방법론에 대해서 시의적절하게 평가하고 목회 현장에서 공교회성을 확립해야 할 것이다.

 

X. 공동체 중심의 가정교회

 

1. 가정교회(목장)의 성격과 특징

 

가정교회는 한 마디로 교회의 공동체성을 지향하는 다기능적 소그룹 교회 운동이다. 종래의 소그룹 운동과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면 구조적인 면에서 개인 중심이 아니라 공동체 중심이며, 기능적인 면에서 복합적이고 종합적이라는 점이다. 이 점에서 가정교회는 셀교회가 주창하는 셀그룹의 구조와 기능면에서 일치하며, 넓은 의미에서 가정교회는 셀교회의 한 형태라 할 수 있다. 이 점에서 가정교회 사역의 중심 장(場)인 ‘목장’ 소그룹 모임의 성격과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교회의 본질인 공동체적 관계를 경험하는 장(場)이다.

 

가정교회 소그룹이 지닌 가장 중요한 특성은 공동체성이다. 여기서 공동체는 관계성이 기초된 6-12명의 소그룹 공동체를 의미하며, 공동체는 가정교회가 지향하는 교회본질 회복의 핵심 가치 중 하나이다. 그는 “가정교회는 공동체 운동”이며, “가정교회 사역의 목표 중 하나는 구성원끼리 확대 가족을 이루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전통교회 구조로는 이 목표를 이룰 수 없으며 관계성이 기초된 가정교회 소그룹 구조를 통해서만 확대 가족과 같은 사랑의 공동체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본다.

 

2) 평신도 중심의 사역의 장(場)이다.

 

가정교회 목장의 모임 장소는 교회당 건물이 아니라 성도들의 삶의 터전인 가정이며, 모임의 지도자 역시 신학훈련을 받은 교역자가 아니라 평신도이다. 이들(목자, 목녀로 지칭)은 매주 자기 가정을 개방하여 그룹원(목원으로 지칭)들에게 식사를 대접하며, 말씀과 기도를 중심으로 함께 모여 교제를 나눈다. 여기서 평신도 지도자의 리더십과 사역은 장로, 집사, 권사 등 제도적인 직분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역을 위해 임명된 목자들의 자발적인 헌신과 섬김의 삶을 통해 발휘된다. 목자라는 직책은 단지 사역을 위해 주어진 것이며, 사역에서 물러나면 더 이상 그 호칭이 적용되지 않는다. 그룹원들 역시 피동적인 참여자가 아니다. 가정교회 목장모임에서는 각자가 받은 은사를 활용하여 자발적이고 능동적으로 서로 섬기며 봉사하도록 기회가 부여된다.

 

3) 목양 기능을 지닌 사역의 장(場)이다.

 

가정교회가 종래의 소그룹과 근본적으로 다른 차별적인 기능이 있다면 평신도 목자에게 목양 사역의 책임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곧 성도가 성도를 돌아보게 하는 것이다. 최영기 목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가정교회 사역은 평신도 사역입니다. 평신도들이 10여명 되는 인원을 맡아서 목양을 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목회자에게만 넘겨주었던 사역을 되찾아서 에베소서 4장 11-12절 말씀대로 봉사활동을 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사역을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점이 친교 중심의 전통교회 구역모임과 다른 점이며, 성경공부 중심의 제자훈련 순모임과도 다른 점이다. 가정교회는 전통교회 소그룹이 가진 한두 가지 기능만이 아니라 예배, 교육, 친교(상담, 심방), 전도, 선교 등 지역 교회의 기능과 역할을 모두 감당한다. 목장 소그룹을 ‘가정교회’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4) 삶의 나눔을 통한 친교와 치유사역의 장(場)이다.

 

목장 소그룹의 핵심 기능은 말씀과 기도를 통한 성도 상호간의 친교이다. 특별히 여기서는 전통교회의 구역모임과 달리 예배의식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그룹원들의 삶의 나눔이 강조된다. 이 시간에 그룹원들이 돌아가면서 한 주간의 삶을 나누는데, 솔직한 자기 노출을 통해 내적 치유가 일어나고 그룹원들간에 가족과 같은 연대감과 소속감이 형성된다고 한다. 최영기 목사는 내적 치유가 가정교회의 목적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자연스럽게 치유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관계성에 기초한 목장모임 그 자체가 치유가 이루어지는 장이 되기 때문이라고 스스로 분석한다. 즉, 목장 소그룹을 통해 자신의 문제를 솔직히 내어놓을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될 뿐 아니라, 제시된 문제를 사랑으로 들어주는 사람들이 있고, 치유가 이루어질 때까지 의지가 되어 줄 수 있는 공동체가 있기 때문이다.

 

5) 영혼구원 중심의 전도와 선교 사역의 장(場)이다.

 

영혼구원은 가정교회가 강조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목표요 핵심가치이다. 가정교회 사명 선언에 따르면 교회성장보다 영혼구원이 우선순위이다. 불신자에게 전도하여 제자를 만드는 것이 교회의 존재목적이기 때문이다. 가정교회 소그룹은 종래의 전통적인 전도 방식으로는 접근이 어려운 현대인들에게 이상적인 전도의 매체로 제공된다. 이것은 관계성에 기초한 전도로서 불신자를 교회당이 아닌 목장모임으로 인도하여 사랑의 공동체의 맛을 경험하게 한 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관심을 갖게 만들어 결국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게 하는 것이다.

 

6) 성경적인 제자훈련의 장(場)이다.

 

가정교회의 궁극적인 목적은 예수님이 원하시는 제자를 만드는 것이다. 가정교회 목장 소그룹은 성경에서 예수님이 보여주신 제자훈련 방식을 따르고 실천하도록 교육환경을 제공하는 구조와 장(場)으로서의 기능도 수행한다. 최영기 목사는 제자훈련의 중요 원리로서 ‘듣고’ 배우는 방식이 아닌 ‘보고’ 배우는 방식을 강조한다. 즉, 지식 전달보다는 능력 배양, 교실 강의보다는 현장 실습, 말보다는 삶의 나눔과 본을 통해 주님을 닮아가는 제자훈련이 가능한데, 가정교회 목장 소그룹이 바로 이런 훈련의 장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가정교회는 자기들끼리만의 사교모임이 되지 않고 제자를 만드는 모임이 되기 위해 각 목장마다 매년 한 가정 이상 불신자를 전도하여 세례를 받게 하여 제자로서의 삶을 시작하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상에서 언급된 여섯 가지 가정교회 목장 소그룹의 특징은 공동체로서의 구조를 지니면서 기능적으로는, 미국 그레이스 커뮤니티(Grace Community) 교회 담임 목사인 맥아더가 제시한 셀그룹의 6 가지 기능(FLOCKS)과 거의 일치한다: 교제(Fellowship), 지도력 개발(Leadership), 전도(Outreach), 돌봄(Caring), 성경공부(Knowledge), 섬김(Salt). 양무리를 의미하는 영어 단어 FLOCKS로 요약되는 이 여섯 가지 기능은 관계성에 기초한 소그룹 공동체의 포괄적 특성으로서 셀그룹이 지닌 목양적 기능, 즉 가정교회가 강조하는 작은 교회로서의 기능을 잘 나타내고 있다.

2. 가정교회의 목표와 비전

 

최영기 목사에 의하면 가정교회 운동은 단지 하나의 목회방법론이 아니다. 신약교회의 회복이라는 본질적 사명을 그 목표로 하고 있다. 가정교회의 사명은 “온 세계의 교회가 성서적인 교회 모습을 회복하도록 돕는다.”라고 명시되어 있고, 여기에 구체적인 비전이 다섯 가지로 제시되고 있다. “가정교회가 발전해 가는 한 단계에 지나지 않는지 아니면 궁극적으로 도달해야 할 곳인지”에 대해서는 고려의 여지가 있음을 최영기 목사는 인정한다. 그리고 그는 “가정교회가 주님이 원하시는 유일한 교회조직이라고는 말하지 않겠다.”는 유보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가정교회가 신약교회의 본래 모습을 회복하는, 적어도 이 시대의 대안 모델이라는 나름대로의 확신이 그의 저서와 사역에 분명히 나타나 있다. 그 실례로 가정교회 운동의 확산을 위해 ‘가정교회사역원’이라는 조직을 만들어 세계적인 정보망을 형성하며 활동하고 있는데, 회원주소록에 등재될 수 있기 위해서는, 그리고 가정교회 세미나와 컨퍼런스를 주최하기 위해서는 최영기 목사가 발전시킨 가정교회, 목장, 목자 호칭을 그대로 수용한 자와 교회라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최영기 목사는 그의 가정교회 운동이 “초대교회로 돌아가고자 하는 노력의 일부”이며, 휴스턴서울교회의 가정교회가 성경적인 모습과는 아직 거리가 있지만 적어도 올바른 방향을 선택한 것으로 자평한다.

 

XI. 목회 상황적 요인: 새 포도주와 낡은 부대

 

그렇다면 가정교회 운동이 새삼 이 시대에 대두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왜 수많은 목회자들, 특별히 장로교 목회자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는가? 이것은 한 마디로 전통 목회가 한계에 봉착했음을 의미한다. 관계성이 파괴되고 점점 더 개인주의화되고 있는 사회문화적 상황 속에서 전통적인 목회 패러다임에 대한 목회자들의 위기의식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위기상황을 여러 가지 측면에서 분석할 수 있겠지만 여기서는 교회의 구조적 측면에 초점을 맞추어서 살펴보고자 한다.

 

1. 제도화된 전통교회

 

목회란 변치 않는 복음을 변하는 상황 속에 적용하는 실천적 기술(art)이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이며 구원의 능력이다. 이것은 불변하며 언제나 새 것이다. 하지만 그 복음이 선포되고 적용되는 방식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변한다. 예수님이 사용하신 ‘포도주와 부대’에 비유한다면, 전자는 포도주요 후자는 그것을 담는 부대(負袋)라 할 수 있다. 복음의 새 포도주는 언제나 새 부대를 요구한다. 낡은 전통, 구태의연한 제도와 관습이라는 낡은 부대는 새 포도주를 담을 수 없다. 오늘날 목회 현장이 맞고 있는 위기는 이런 의미에서 낡은 부대의 문제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목회 현장이 직면하고 있는 낡은 부대의 근본정체는 무엇인가? 하워드 스나이더는 성령을 소멸시키는 구조로서 건물 중심의 제도화된 교회구조와 목사 중심의 목회구조를 지적한다. 그는 건물 중심의 오늘날의 교회가 자신의 부동성(immobility), 비융통성(inflexibility), 친교 결여(lack of fellowship), 자만심(pride), 계급의식(class division)을 스스로 입증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뿐만 아니라 목회 성공을 지향하는 유능한 목사(superstar) 중심의 교회구조에서 교회는 더 이상 그리스도의 지체로서의 몸(body)이 아니라 청중(audience)일 뿐이라고 비판한다.

이상에서 공통적으로 지적되고 있는 요지는 분명하다. 오늘날의 제도화된 전통교회 구조로는 복음의 새 포도주를 담을 수 없다는 것이다. 오늘날 성령의 코이노니아가 가능한 새 부대로서 새로운 교회구조, 즉 소그룹(셀그룹)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최영기 목사의 가정교회 소그룹 운동 역시 이러한 상황에서 나온 이 시대의 목회적 대안이라 할 수 있다.

 

2. 한국 장로교회 장로직의 문제

 

교회구조 문제와 관련하여 교회의 직분구조, 특별히 장로교회의 장로직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대다수 한국교회 목회자들이 목회 상황에서 직면하고 있는 고질적인 문제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칼빈 전통의 개혁교회와 장로교회는 그리스도께서 복음 증거와 그의 몸인 교회 건설을 위해 직분을 세우셨다는 직분관을 가지고 있다. 목사와 함께 장로는 예수 그리스도가 보이신 섬김의 자세로 교인들을 다스리고 돌봄으로써 교회를 세우는 데 중심적인 직분이다. 장로의 직무와 관련하여 「고신교단 헌법」 교회정치 제6장 제47조는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1) 목사와 협력하여 행정과 권징을 관리하는 일; (2) 교회의 영적 관계를 살피는 일; (3) 교인을 심방, 위로, 교훈하는 일; (4) 교인을 권면하는 일; (5) 교인들이 설교대로 신앙생활을 하는 여부를 살피는 일; (6) 언약의 자녀들을 양육하는 일; (7) 교인을 위해 기도하고 전도하는 일; (8) 목회에 필요한 제반사항을 목사에게 알리는 일.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상의 여덟 가지 중 적어도 여섯 가지가 목양과 관련된 직무라는 점이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교회 장로직의 현실은 어떠한가? 물론 헌신적으로 하나님과 교회를 위해 봉사하는 장로들도 많이 있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도 많이 있음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다. 목양 직무보다는 회의나 행정 업무에 치중하고, 교인들을 섬기기보다는 교인의 대표로서 대접받고 군림하려고 하며, 목사에 대해서는 협력자의 모습보다는 견제자 혹은 대립자로서의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 여기에는 물론 목사직이 올바로 수행되지 못한 책임도 간과될 수 없다. 목사가 가르침의 직무를 소홀히 하고 기업의 최고경영자(CEO)처럼 권력을 독점하거나 모든 사역을 독점함으로써 장로직이 제대로 수행되지 못하는 측면도 없지 않다. 뿐만 아니라 목사 자신의 과도한 목회 업무로 인해 목회 사역이 구조적으로 한계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 오늘날 대다수 한국교회 목회자들이 목회의 한계와 위기를 느끼고 그 돌파구와 대안으로서 가정교회와 셀교회에 관심을 보이고 있는 또 다른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가정교회와 셀교회는 전통적인 직분 중심의 구조가 아니라, 목장 소그룹을 중심한 사역 중심의 구조이기 때문이다. 사실 최영기 목사가 주창하는 가정교회 중심의 평신도 목회론도 자신이 이전에 교회의 장로로 시무하면서 경험한 개인적인 체험이 그 배경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목사 중심의 목회구조 속에서 겪은 전통교회 직분의 한계와 부정적인 문제점, 그리고 평신도로서 자신이 이끈 성경공부 모임을 통해 자신이 경험한 평신도 사역의 잠재력과 가능성에 대한 확신이 침례교 목사로서 그의 가정교회론에 중요한 배경이 되고 있다.

 

XII. 가정교회 소그룹에 대한 실천신학적 평가

 

앞서 고찰한 바와 같이 가정교회 운동은 우리 시대 교회와 목회가 구조적으로 당면한 위기 상황에 대한 하나의 대안으로 전개되고 있다. 그렇다면 가정교회 소그룹의 구조와 기능을 실천신학적으로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긍정적인 면은 무엇이며 문제점은 없는가? 다음 네 가지 관점에서 평가를 시도하고자 한다.

 

1. 교회됨의 본질적 구조로서의 공동체적 관점

 

가정교회 소그룹 운동의 가장 큰 기여가 있다면 교회됨의 본질적 구조로서의 공동체성의 재발견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공동체란 상호의존, 상호책임에 기초한 ‘너와 나’의 관계성이 이루어지는 모임을 말한다. 6-12명이 가정에서 모이는 가정교회 소그룹은 이 점에서 성령의 코이노니아를 가능케 하는 구체적인 환경과 틀을 제공한다. 특별히 이 소그룹이 모이는 장소가 교회당 건물이 아니라, 성도들의 삶의 구체적인 현장인 가정이라는 점이 그 역동성을 강화시킨다.

이런 공동체적 구조의 발견은 교회됨의 본질과 직결되며 특별히 관계성이 파괴되고 점점 더 개인주의화되어 가는 오늘날의 목회상황에 교회본질 회복을 향한 큰 도전과 의의를 부여한다. 문제는 이 구조적인 틀 자체가 성령의 코이노니아를 자동적으로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 틀 속에 어떤 내용을 담을 것인가 하는 것은 여전히 과제로 남게 된다. 만약 이 속에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가 충만하게 역사하지 않는다면, 비록 성령이 역사하는 외적 구조와 형태를 갖추었다 할지라도 그 모임은 인간적인 사교모임 수준에 머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최영기 목사가 주도하는 가정교회가 역동적인 성장을 거듭하고 있는 것은 단지 외적으로 가정교회 체제를 갖추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깊은 영성, 즉 말씀의 깊이와 탁월한 가르침의 은사, 그리고 그의 깊은 기도 생활이 그 배경에 작용하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문제는 교회 안의 이런 소그룹 공동체를 과연 ‘교회’로 부를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특별히 장로교 전통의 개혁주의 교회론 입장에서 볼 때 이는 명백히 신학적인 문제를 야기한다.

 

2. 실천신학적 교회론의 관점

 

전통적으로 개혁주의 교회론은 참된 교회가 지녀야 할 네 가지 속성으로 단일성, 거룩성, 보편성, 사도성을 언급한다. 다니엘 로우(Daniël Louw)는 실천신학적 교회론을 제안하면서 신학적 정체성으로서 이 네 가지 속성과 함께, 기능적 차원에서 교회가 실천적 신앙 행위로 세상 속에서 나타내 보여야 할 네 가지 요소로 경축(doksa), 증거(marturia), 섬김(diakonia), 친교(koinonia)를 들고 있다. 경축은 예배, 감사, 찬양 등의 신앙행위를 말하며, 증거는 말씀선포, 신앙고백, 전도와 선교 등의 실천 행위를 말한다. 섬김은 긍휼, 사랑 등 제사장적 봉사를 뜻하며, 친교는 성도 상호간의 위로와 돌봄의 실천 행위를 의미한다.

이상의 네 가지 실천적 기능을 기준으로 가정교회 소그룹의 기능을 평가해 볼 때 목장 소그룹 모임은 앞서 살펴본 바대로 이 요소들을 두루 갖추고 있음을 보게 된다. 경축의 기능은, 물론 교회의 전회중이 함께 모여 드리는 예배를 통해 수행되지만, 가정에서 그룹원들이 모여 찬양하고 감사하며 예배하는 것을 통해서도 표현된다. 증거의 기능은 가정교회가 교회의 존재 목적으로 최우선적으로 강조하는 것이다. 물론 이 모임에서 증거 기능이 목사의 설교를 통해서 수행되는 것은 아니며 평신도 목자가 직접 설교를 하거나 복음을 전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불신자를 그 모임에 초대하여 복음에 대한 관심을 갖게 하여 기초 성경공부와 복음 영접까지 이르도록 인도하는 것, 그리고 그룹원 전체가 선교를 위해 기도와 헌금으로 동참하는 것을 통해 가정교회 소그룹은 증거의 기능을 수행한다. 섬김의 기능은 주로 목자의 리더십과 삶의 모습을 통해 표현된다. 목자 부부는 매주 빠짐없이 그룹원들을 위해 가정을 개방하고 식사를 준비하는 헌신과 희생을 감당함으로써 참 목자이신 예수님의 모습으로 그룹원들을 섬기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필요시 그룹원들을 직접 심방하고 상담하는 일을 통해 섬김의 도를 실천한다. 물론 섬김의 일차적 대상이 그룹원들이지만 그 범위는 가까운 이웃과 지역사회로 확대하여 독거노인, 장애자, 소년소녀 가장 등 사회적 약자들을 섬기는 일로 확대될 수 있다. 친교는 가정교회 소그룹이 지닌 가장 강력한 기능 중 하나이다. 여기서 그룹원들은 “서로의 부족함을 솔직히 나누고, 죄와 허물을 고백하며, 서로의 짐을 져 주고, 피차 격려하며, 관심을 가지고 다른 사람의 말을 들어주며, 서로 중보기도를 해 줌으로써” 공동체적 삶을 나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말씀과 기도를 통한 성령의 임재가 전제되어야만 진정한 친교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렇지 못한 상태에서 인위적인 자기 노출은 자칫 예기치 않은 문제점을 초래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3. 교회성장학적 관점

 

셀그룹의 ‘번식’처럼 가정교회 목장 소그룹은 ‘분가’를 통해 양적으로 계속 늘어가는 것을 목표로 한다. 소그룹 지도자들의 리더십과 영성 그리고 목회상황적인 요소가 상호 부합될 경우 가정교회가 교회성장학적 면에서 양적, 질적으로 성장의 잠재력을 지닌 구조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가정교회 제도를 도입한 모든 교회가 자동적으로 성장하는 것은 아니다. 가정교회 체제가 정착한 교회 가운데 양적 성장을 경험하고 있는 사례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또한 초기에 성장을 경험하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정체 상태를 보이는 교회들도 적지 않다. 따라서 가정교회를 도입한 교회들이 과연 계속 양적으로 성장할지 여부는 좀 더 지켜보아야 할 문제로 생각된다.

질적인 성장과 관련하여 크리스티안 슈바르츠는 「자연적 교회성장」이라는 책에서 전세계에 산재한 1,000개 교회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성장하는 교회의 8가지 질적 특성을 발견했다. (1) 사역자를 세우는 지도력; (2) 은사중심적 사역; (3) 열정적 영성; (4) 기능적 조직; (5) 영감 있는 예배; (6) 전인적 소그룹; (7) 필요중심적 전도; (8) 사랑의 관계. 전인적 소그룹은 이 가운데서 중요한 요소이다. 이 점에 있어서, 기본적으로 목회자에게 말씀과 기도가 살아 있고 지도력이 있다면 가정교회 소그룹 체제를 가진 교회가 그렇지 않은 교회에 비해 양적, 질적으로 성장가능성이 더 높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가정교회 제도를 실시하고 있는 모든 교회가 질적으로 성장하는 교회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앞서 제시한 다른 요인들이 함께 부합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목회자의 영성과 지도력이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4. 장로교회 정치와 직분론의 관점

 

그렇다면 가정교회 체제가 장로교회 정치와 직분론의 관점에서는 어떤 평가를 내릴 수 있을까?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가정교회 운동은 평신도 목회를 지향하는 운동이며 이 사역의 핵심에는 목자라는 직책이 있다. 이 직책은 사역을 위해서 주어진 것일 뿐 공적인 직분이 아니다.

하지만 최영기 목사가 시무하는 휴스턴서울교회는 주지하는 바와 같이 침례교회이기 때문에 장로직이 없다. 뿐만 아니라 그가 주창하는 가정교회는 직분 중심 체제가 아니라 철저히 목자 중심 체제이다. 따라서 가정교회 체제를 장로교회에 그대로 이식하거나 접목할 때 장로교 정치체제와 필연적으로 충돌이 생길 수밖에 없다. 여기에 장로 직분이 들어설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장로직이 있는 대부분의 전통교회가 가정교회 체제의 도입을 주저하거나 쉽게 접근하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장로교 정치체제에서 볼 때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가정교회가 초대교회의 원형을 꿈꾸는 이상은 좋지만, 단지 가정에서 목양 기능을 가진 평신도 중심의 소그룹 형태로 모인다고 해서 오순절 성령이 부어진 1세기 초대교회 공동체와 그대로 일치시키는 것은 무리이다. 다시 말해서 가정교회 소그룹을 항상 은혜와 사랑이 넘치는 공동체로 보는 것은 지나치게 순진한 발상이라는 것이다. 교회는 끊임없이 사탄의 공격을 받는 영적 공동체이기 때문에 가정교회 내에도 언제든지 시험과 유혹이 찾아올 수 있음을 깊이 유념해야 한다. 교회 내에 치리와 권징의 제도적 필요성과 중요성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점에서 볼 때 가정교회는 치리와 권징 면에서 매우 취약한 구조이다. 예기치 않은 중대한 문제가 발생할 경우, 특히 가정교회 지도자인 목자가 그 핵심에 연루될 경우 그 가정 소그룹은 치명타를 입게 되고 와해되거나 교회에서 이탈될 가능성이 높다.

 

XIII. 장로교 직제에 적합한 가정 소그룹 모델의 필요성

 

앞선 평가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가정교회 소그룹은 전통교회가 갖지 못한 공동체로서의 본질적인 교회구조와 참 교회로서의 실천적 기능을 지닌 이 시대의 하나의 매력적인 목회 전략이요 방법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중교회 체제인 침례교에서 시작된 가정교회는 용어 자체에서부터 개혁교회론과 장로교 정치체제 및 직분론과는 상호 부합되지 않는 태생적 한계를 지니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우리는 장로교 직제에 부합하는 가정 소그룹 모델을 통해 장로교회 목회자들이 이 시대 교회갱신 운동을 선도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장로교 직제에 부합하는 가정 소그룹 모델은 어떤 형태가 되어야 바람직한가? 이론적으로만 본다면 장로가 목자직을 맡아서 그 직무를 수행하면 될 것이다. 하지만 목회 현장에 적용할 때 문제가 간단치 않다. 소그룹의 적정 규모가 6-12명이기 때문에 이것을 전교인에게 확대 적용하려면 엄청난 수의 장로가 필요하게 된다. 그렇다고 서리집사나 안수집사 또는 권사와 동일 선장에서 장로가 목자직을 수행할 경우, 원칙적으로 장로직제의 질서와 권위가 무너지게 된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으로는 목자직을 안수집사 또는 권사가 맡게 하고 몇 개의 목장 소그룹을 묶어서 장로가 돌아보게 하는 것이다. 가정교회에서 제안하는 조직에 의하면 ‘목장’ 몇 개를 묶은 연합체를 ‘초원’이라 부르며 초원의 지도자를 ‘초원지기’라고 부른다. 사실 이런 조직은 현재 가정교회 제도를 도입한 여러 장로교회들이 이미 적용하고 있다. 이렇게 할 경우 목장 소그룹이 늘어난 만큼 장로수를 증원해야 하는데 목자직을 훌륭하게 잘 수행한 사람을 중심으로 장로를 선출하면 된다. 문제는 기존의 장로에게 단지 목자 직무를 맡긴다고 해서 가정 소그룹의 역동성이 자동적으로 생기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장로의 체질이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으면 안 된다. 기존의 의사결정 중심의 행정 체질에서 가정 소그룹이 요구하는 목양 기능의 핵심인 섬김과 희생 중심의 사역 체질로 전환되어야 한다. 또 한 가지 지적되어야 할 것은 가정교회가 가지고 있는 목장, 목자, 목녀라는 명칭을 굳이 그대로 고집할 것이 아니라 교회에 따라 창의적인 용어로 바꾸어도 무방하다는 점이다.

이 밖에도 가정 소그룹 체제를 도입하고자 할 때 지역 교회들의 다양한 특성을 신중히 고려해서 접목해야 한다. 특별히 전통교회를 가정교회 체제로 전환할 때 목회자의 리더십이 매우 중요하다. 이처럼 가정 소그룹 제도를 도입하여 장로들이 목양 직무를 수행할 경우 몇 가지 유익을 예상할 수 있다. (1) 사회적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목양 직무 수행을 통해 삶과 인격 및 사역 능력이 검증된 적격자를 장로로 세울 수 있고, (2) 목양 직무 수행에 따르는 엄청난 헌신과 희생으로 인해 장로들이 자원하여 임기제를 실시하려 할 것이며, (3) 그 결과 장로 직분이 계급화, 권력화되는 것을 방지할 수 있을 것이다.

 

XIV. 대안 및 방향 제시

 

그러면 오늘날 우리가 현재 논란되고 있는 ‘가정교회’ 문제와 관련하여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는가? 우리가 취해야 할 대안과 방향은 무엇인가?

 

1. ‘교회’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소그룹 모임은 교회생활에 있어서 중요하지만 그것을 ‘교회’라고 부르는 것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교회’가 되려면 참 교회의 표지인 말씀의 전파와 성례의 거행과 권징의 실시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직분들(목사, 장로, 집사)이 선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독립적인 당회와 집사회(제직회)가 조직되어 운영되어야 한다.

만일 교회 안의 소그룹 모임을 ‘교회’라고 부르면 그것은 ‘교회 안의 교회’가 되고 만다. 이러한 교회구조는 신약성경이 알지 못하는 것이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가정에 모인 교회’는 한 교회 안의 소그룹 모임이 아니라 하나의 독립된 개교회이다. 비록 성도의 가정에서 모였지만 하나의 독립된 교회로서 예배와 성찬과 권징 등 교회로서의 모든 기능을 다 수행했던 것이다. 예루살렘 교회의 경우는 성전에서 전체로 모였으며, 집에서는 일종의 구역모임을 가졌다.

어떤 사람은 신자들 몇 명이 모이면 교회가 아니냐고 주장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이해는 개혁주의적 교회의 개념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참 교회의 표지와 직분을 무시하면 교회가 혼란스러워지고 무질서해진다. 그렇다면 굳이 소그룹 모임만 ‘교회’라고 부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유초등부 모임도 ‘유초등부 교회’라고 부르고, 중고등부 모임도 ‘중고등부 교회’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교회’라는 용어를 남용하는 것은 개혁주의 교회 개념에 맞지 않다. 개혁교회는 참 교회의 표지와 직분을 중요하게 여기며 교회의 질서를 중요하게 여긴다.

 

2. 장로가 소그룹 모임을 인도해야 한다.

 

그리고 장로회 정치제도를 채택하고 있는 장로교회에서는 구역모임과 같은 소그룹 모임의 지도자에 장로를 세우는 것이 원칙적으로 옳다. 왜냐하면 장로의 직분이 양들을 치는(돌보는) 것이기 때문이다(행 20:28, 벧전 5:2). 그래서 목사 혼자서 다 돌보기 어려운 성도들을, 구역을 나누어서 장로들이 각각 자기 구역의 성도들을 돌보는 것은 합당한 일이다. 따라서 구역모임과 같은 소그룹 모임의 장은 장로가 맡는 것이 원칙이다.

물론 우리 한국교회의 경우에 구역은 많고 장로가 부족한 경우가 많다. 이럴 때에는 두 가지 해결 방안을 생각할 수 있다. 첫째는 장로 수를 늘리는 것이다. 이것이 원칙적인 해결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장로를 세우신 목적은 양들(교회 성도들)을 돌보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 해결책은 몇 개의 구역(소그룹)을 한 장로의 관할하에 두는 방법이다. 이처럼 몇 개의 구역으로 이루어진, 한 장로가 돌아보는 영역을 예를 들어 ‘지역’, ‘지구’ 또는 ‘초원’ 등으로 이름 지을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은 구역은 많고 장로 수는 부족한 한국교회의 현실에서 당장 시행할 수 있는 현실적인 해결책이기도 하다.

 

3. 공예배와 교회의 기능이 약화되어서는 안 된다.

 

소그룹 모임은 그에 맞는 역할을 감당하여야 한다. 교회는 교회로서 감당해야 할 역할이 있고, 소그룹은 소그룹으로서 감당해야 할 역할이 있다. 공예배와 성례식, 권징은 교회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교회적인 행사, 공동의회와 제직회와 당회도 다 교회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소그룹 모임에서 세례나 성찬을 행해서는 안 되며, 소그룹 모임이 공예배를 대신해서도 안 된다. 그리고 소그룹 모임의 헌금 사용에 대해서도 당회와 제직회의 지도를 받아서 해야 한다. 그리고 권징이나 치리에 관한 문제는 당연히 당회에서 다루어야 한다.

소그룹 모임에서는 전체 모임이나 예배에서 할 수 없거나 부족한 것들을 보충하고 가르치며, 성도간의 교제를 촉진하며, 개인적인 권면과 상담을 할 수 있다. 그리고 불신자들을 초청하여 전도하는 전도의 장으로 삼을 수 있다. 그러나 소그룹 운동을 한다고 해서 공예배가 소홀히 되거나 전체 교회와 기능이 약화되어서는 안 된다.

 

4. 교회 분열의 위험성을 경계해야 한다.

 

소위 가정교회에서는 목자의 임무가 중요하다. 목자에게 많은 권한과 책무가 주어진다. 이것은 분명 긍정적인 요소를 많이 가지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위험한 요소도 있다. 특히 교회에 불평이나 불만거리가 많이 생기거나 목회자에게 시험거리가 생길 때에는 목장들의 일부가 교회에서 떨어져 나갈 위험성이 커진다. 왜냐하면 최영기 목사의 가정교회론에 의하면 가정교회는 각각 완전한 독립교회라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따라서 소그룹은 소그룹이지 독립된 교회가 아니라는 점을 주지시켜야 하며, 목회자가 소그룹 인도자를 잘 지도하도록 해야 한다.

 

5. 교리와 말씀 교육의 강화가 필요하다.

 

최영기 목사의 가정교회론에 의하면 교제가 강조되는 반면 말씀이 많이 약화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중심이 되지 않는 모임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인간 중심의 교제 모임으로 전락할 위험성이 있다. 뿐만 아니라 이단이나 잘못된 교리를 가진 사람이 회원으로 들어올 경우에 통제가 쉽지 않을 수 있다. 특히 목자가 이단에 빠질 경우 그 목장 전체가 위험에 빠질 수도 있다. 따라서 소그룹에 이단이나 잘못된 가르침에 빠지지 않도록 교리와 말씀 교육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단기적으로는 인기가 적을지라도 장기적으로 든든한 기초를 세우는 것이 될 것이다.

 

6. 어린아이들에 대한 대책이 필요하다.

 

현재 한국에서 시행되고 있는 가정교회 운동은 태생적으로 침례교의 배경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어린아이들이 소홀히 되는 문제가 있다. 어린이목장을 운영하는 교회도 소수 있지만 대부분의 목장모임이 어른들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다. 이것은 개혁주의 교회론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어린아이들은 어른들과 마찬가지로 동일한 언약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 가운데 양육받아야 한다. 유아세례를 받을 때에 부모는 이 아이를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양육하겠다고 하나님 앞에서와 성도들 앞에서 서약했다. 따라서 우리는 어린아이들이 믿음으로 잘 자라도록 지도해야 하며 구역모임이나 목장모임이 어른들만의 모임이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7. 지역과 상황에 따라 다르게 적용되어야 한다.

 

최영기 목사의 가정교회 운동이 성공한 데에는 또한 문화적 배경이 자리잡고 있다. 곧 주5일 근무제가 정착되어 있는 미국 사회와, 날마다 언어와 문화가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스트레스를 받으며 살아가는 이민 사회라는 특수한 상황이 자리잡고 있다. 따라서 미국에 있는 교포들이 매주 한 번씩 모여서 친교모임을 가지는 것은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따라서 꼭 신앙적인 모임이 아니라도 일주일에 한 번씩 그런 류의 모임은 요청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은 상황이 다르다. 그런 류의 모임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한 주간 동안 사람들 사이에 시달리다 보니 조용히 쉬고 싶은 사람들도 있다. 따라서 획일적으로 목장모임과 같은 성격의 모임을 강요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공단이 많은 지역의 동질인 그룹에서는 이런 모임이 환영받을 수도 있지만, 안정된 사회생활을 하고 있는 지역에서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따라서 교회가 어떤 류의 소그룹 모임을 어떻게 운영하는 것이 좋은지에 대해서는 목회자와 당회가 그 지역 상황을 고려해서 심사숙고해서 결정할 일이며, 다른 교회의 제도를 무조건적으로 모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8. 무엇보다도 목회자 자신의 영성이 중요하다.

 

어떤 제도를 도입하고 어떤 소그룹 모임을 하든지 간에 제일 중요한 것은 역시 목회자 자신의 영성이다. 미국의 휴스턴서울교회가 성공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가정교회라는 제도 못지않게 최영기 목사 자신의 영성과 능력이 중요하게 역할했다고 말할 수 있다. 한국의 몇몇 교회들이 가정교회를 도입해서 성공했다고 하는 경우에 있어서도, 그것이 꼭 가정교회 제도 때문인지 아니면 목회자 자신의 영성과 능력 때문인지는 판단하기 쉽지 않다. 많은 경우에는 그 교회들이 다른 제도를 도입했더라도 성공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런 교회의 목회자는 대개 어떤 일을 이루고자 하는 의욕과 정열이 대단하며 지도력과 추진력이 높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러한 영성과 자질을 구비함이 없이 기존의 방법으로는 잘 안 되니까 소위 잘 된다는 방법을 한번 도입해 보자는 마음으로 새로운 제도를 도입한다면 실패할 가능성이 크다. 제일 중요한 것은 역시 목회자 자신이 주일마다 능력 있는 말씀을 공급하며 성도들을 바로 지도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목회자 자신이 늘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하며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유지해야 한다. 그래서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 힘이 있고 생동감이 있어야 하며 교회가 성령의 능력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목회자 개인적으로뿐만 아니라 교회 전체가 깨어서 기도하기를 힘써야 한다. 이런 바탕 위에서 성도간의 교제와 권면과 상담을 도울 수 있는 있는 적절한 소그룹 모임이 진행될 때 그 교회는 균형 있게 발전하게 될 것이다.

 

결 론

 

21세기의 급변하는 사회문화적 상황 속에서 목회 현장이 점점 더 험난해지고 있다. 교회가 교회로서의 본질과 사명을 망각한 채 시류에 떠밀려 표류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런 맥락에서 가정교회 소그룹 운동은 오늘날 제도화된 전통교회에 대한 하나의 도전으로 다가온다. 교회됨의 본질인 교회의 공동체성을 발견하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본연의 구조를 회복하도록 도전한다. 평신도 사역의 잠재력과 가능성을 일깨우면서 목사와 장로가 잃어버린 본연의 직무로 돌아가도록 촉구한다.

가정교회 소그룹 운동의 도전 앞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균형을 잡는 일이다. 가정교회 운동은 침례교회에서 비롯된 목회 방법론으로서 태생적 한계를 지니고 있다. 물론 침례교회에서 시작된 것이라고 무조건 반대하는 것은 바른 태도가 아니지만, 장로교회의 정체성을 도외시한 채 무분별하게 수용해서도 안 될 것이다. 개혁주의에 뿌리를 둔 장로교회는 그 신학적 뿌리를 깊이 유념하면서 장로교 직제와 부합되는 방법으로 소그룹 운동을 전개해야 할 것이다.

 

출처 : 基督徒的家
글쓴이 : 증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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