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란! 예배 기타!!!

[스크랩] 레포트-바람직한 교회관

하나님아들 2014. 3. 27. 23:18

개혁주의 입장에서의 바람직한 교회관

 

 

Ⅰ. 서 론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그리스도와 사귐이 있게 하시고, 그 안에 계속 머무르도록 하는 외부적인 도움 및 방법으로 교회를 주셨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있는 성도들에게 교회는 ‘어머니’와 같은 역할을 한다(4.1.1).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백성을 한 순간에 완성하실 수 있지만, 특별한 섭리가운데 그들의 어머니인 교회의 교육을 받으며 성장하도록 하셨다. 이때 교회가 신자들에게 주는 중요한 보호기능은 예배를 통하여 발휘된다. 이는 하나님께서는 공적 예배를 통하여 신자들을 조금씩 세워 가시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양육과 더불어 훈련의 의미도 포함된다. 이처럼 교회를 어머니와 같은 개념으로 이해하는 칼빈의 입장에서 볼 때 교회를 떠나서는 구원이 없다는 생각은 확고하다.

이처럼 칼빈은 개혁교회의 기초를 놓았으며, 우리에게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오직 은혜’라는 귀중한 신앙의 눈을 열어 주었다. 칼빈의 이러한 이신득의의 사상의 저변에 깔려있는 말씀중심의 목회철학과 그가 저술한 「기독교 강요」의 교회론을 중심으로, ‘개혁주의 입장에서의 바람직한 교회관’에 대하여 정립하여 보고자 하는 것이 본 연구의 목적이다.

 

 

Ⅱ. 본 론

 

1. 올바른 개혁주의 교회관 정립

  개혁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관심은 하나님의 교회였으며, 하나님의 교회건설이었다. 이것이 교회중심(Church-centered) 사상이다. 로마 카톨릭은 하나님의 나라가 가견적 교회안에서 실현된다고 하여 가견적 교회와 신국을 동일시하지만, 칼빈을 비롯한 개혁자들은 오직 선택된 자들로 구성되는 우주적인 교회, 곧 무형교회 혹은 불가견적 교회(invisible church)를 말하면서도 선택받지 못한 사람도 회원이 될 수 있는 제도적인 지상의 교회, 곧 유형교회 혹은 가견적 교회(visible church)로 구분했다. 지상의 교회는 완전할 수 없다. 개혁주의는 지상교회의 불완전성을 인정하면서도 교회의 완전을 향한 추구를 경시하지 않는데, 이것이 교회개혁운동이다. 교회중심사상은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사이에 서 있는 이 교회를 중심으로 신앙적 삶을 추구하며 교회에 주어진 사명을 완수하려고 힘쓴다. 

교회에 대한 개혁주의의 개념은 몇 가지 중요한 차이가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루터파의 교회관과 거의 같다. 양자는 다 같이 교회의 참 본질을, 영적 실재(spiritual entity)로서 설립된 불가시적 교회(the invisible Church)에서 찾는다는 데서 일치한다. 그러나 루터파가 교회의 통일성과 거룩성을 교회의 직원, 말씀, 성례 등의 객관적인 의식에서 찾는 것과는 달리 개혁주의는 그것들을 더 광범위하게 ‘신자들의 주관적 교통(in the subjective communion of believers)’에서 찾는다. 루터파에 의하면, 구원의 은혜는 오직 교회 안에서 또 교회를 통해서만 주어질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주시는데 있어 복음을 설교하고(preaching), 성례를 시행하는 등의 하나님이 제정하신 방법을 절대적으로 사용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혁주의 중에는 구원의 가능성은 유형교회(the visible Church)의 테두리 밖에서도 있을 수 있다고 하였으며, 하나님의 성령은 절대로 평범한(고정된) 은혜의 방법만을 쓰지 않고 ‘그가 (주권적으로) 원하시는 시간과 장소와 방법을 통하여 역사하시며 구원하시는 것’이라고 하였다.

또, 개혁파는 교회의 불가시적 교회(the invisibility of the Church)를 몇 가지 의미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첫째, 교회는 장소나 시간으로 볼 수 없기 때문에 보편적 교회이다.

둘째, 피택자의 단체로서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교회는 불완전하고 유형적일 것이다.

셋째, 교회는 부름받은 피택자의 단체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참 신자와 거짓 신자를 절대적으로 구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넷째, 말씀과 성례를 진정으로 행함에서 뿐만 아니라, 교회의 규율을 성실하게 관리함에 있어서도 교회의 참된 표지(the true marks of the Church)가 발견된다.

이러한 생각은 존 녹스(John Knox)에 의한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에서 보다 분명하게 나타났는데, 곧 그는 권징을 교회의 표식으로 정의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식별의 기준으로 삼는 교회는 ‘말씀선포’와 ‘성례집행’이 교회의 절대적인 표식(marks)이다. 그리스도의 나라는 오직 말씀으로만 다스려지는 나라이므로 교회는 말씀을 홀(scepter)로 삼는다. 따라서 교회는 세상에서 보기에 약하고 초라하기 그지없지만, 교회의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것을 자증한다. 바로 이 교회에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경배하는 그의 백성들이 있으며, 궁극적인 날에 승리하는 교회로서 나타날 영광을 위하여 이 땅에서 전투적인 교회의 모습을 더더욱 견고하게 유지한다. 이것이 개혁주의 입장에서의 합법적인 교회(a legitimate Church)일 것이다.

 

2. 올바른 예배의 회복

칼빈은 기독교 강요 4권 10장에서 그릇된 예배의 세 가지 유형을 소개하였다.

첫째는 사람의 생각을 가르치는 예배이다(24절).

이는 사람의 계명을 가르치는 예배(마 15:9; 사29:13-14),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가르치는 예배(골2:4-8)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빙자하여 실질적으로 그 시대의 정신과 민족적 전통, 또는 교파적 전통(장로의 유전) 등 인간의 생각을 가르치는 왜곡된 예배이다. 그는 특별히 골로새서 2:23의 ‘자의적 숭배’를 가장 전형적인 그릇된 예배로 규정하였다. 그들은 혹독한 금욕주의를 실천하는 종교적 철저성을 보여주지만, 그것이 전혀 주님의 명령이 아니라 스스로 만든 종교성이다. 자기의 종교성과 영성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추구하는 종교적 노력과 예배행위는 그것이 아무리 철저하고 인간적으로 존경스럽다 할지라도 하나님께는 그릇된 예배인 것이다.

둘째는 바리새인의 예배이다(26절).

칼빈은 ‘바리새인의 누룩(마16:6 ; 23:3)을 조심하라고 경계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상기시키면서, 율법의 해석자로서 모세의 자리에 앉아 권위를 주장하며 무리한 실천을 강요하고, 스스로 본을 보이지 않으면서 지식만 팔고 있는 삯군이 인도하는 예배가 바로 그릇된 예배라고 규정한다. 예배를 좌우하는 것은 예배 인도자라는 점에서, 이 지적은 중요하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거나 경배하지 않는 형식적이고 지식적인 차가운 죽은 정통의 예배가 여기에 속한다.

셋째는 연극적 예배이다(29절).

분위기와 의식은 우아하고 화려하며 음악과 설교는 장엄하지만, 인도자는 연극배우와 같이 연기를 하고 신의식과 외경심이 결여된 인간중심의 멋있는 예배이다. 교인들은 예배를 즐기지만, 하나님께 대한 경외는 없다. 정열적이고 감성적인 예배이지만, 연극을 관람하거나 음악회에 참석하거나 감동적인 영화나 드라마를 보거나 명 강의를 들은 것과 별 차이가 없다. 특히 현대에 들어와서는 ‘찬양과 경배’라는 이름하에, 찬송은 거의 쇼와 다를 바 없어져 버렸다.

이처럼 칼빈은 교회에서의 거짓 예배를 정화하기 위하여 성상철거, 미신타파, 음악의 우상화 철폐, 단순한 성경적 예배로의 복귀, 말씀에 대한 강조, 예배자가 이해할 수 있는 서민적 언어의 사용을 통하여 경건하고 순수한 영적예배를 드림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데 최선을 다하였다.

하지만 현대교회는 칼빈처럼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림으로써 ‘경건하고 순수한 영적예배’로서의 하나님 임재를 경험하고 있는지가 의문이다.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지는 예배에 관한 연구는 오늘날에 있어서 모든 목회자가 고민해야 할 과제 중의 하나일 것이다.

 

3. 직분중심의 교회

그리스도께서는 교회를 다스리고 지배하시는데 이때 사람들의 사역을 사용하신다. 그러므로 칼빈이 역설한 바처럼 사람들의 봉사는 하나님께서 교회를 가장 강력하게 다스리시는 중요한 힘이 된다. 교회에는 목사가 있어서 설교와 성례를 집행하고, 교사들은 성경의 교리로써 회중을 가르치며, 장로들은 권징을 시행하고, 집사들은 가난한 자들을 구제한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교회 안에 직분자를 세우셔서 사용하시며, 그들을 통하여 은사를 교회에 분배하시고, 이러한 제도 안에서 성령의 능력을 나타내심으로 친히 당신의 임재를 드러내 보이신다. 그리스도의 몸은 이런 식으로 세워지고 양식이 공급됨으로써 그의 백성은 범사에 머리이신 그에게까지 자라게 된다. 더욱이 교회정치에는, 교회가 교회의 정체성을 성경적으로 갖추어야 할 사명까지 포함된다. 그러므로 칼빈은 이러한 교회의 질서와 정치를 폐지시키려고 한다든지 또는 이것이 불필요하다고 여겨 무시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교회를 파멸시키며 파괴하는 사람이라고 단정한다. “교회의 사역이 얼마나 절대로 필요한가를, 주님은 말씀으로만이 아니라 실례들로써도 선언하신다”(4.3.3). 가령, 주께서 고넬료에게 진리의 빛을 주실 때, 그를 베드로에게 인도하사 그로부터 말씀을 듣게 하셨던 것이다. 칼빈에게도 공동체로서의 교회 개념이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이렇게 ‘직분중심’이다.

원래 장로는 교회를 다스리는 소명에 적합한 임명이고, 집사는 빈민 구호물을 모으는데 적합한 임명이다.

칼빈이 제네바 교회에 ‘교회법령(Ecclesiastical Ordinance)’의 통과가 있은 뒤 교회의 직원으로 목사, 교사, 장로 그리고 집사의 네 가지 직분을 설정하였다. 특별히 집사의 직분은 교회의 대표적인 이미지들 중의 하나인 ‘섬기는 공동체’의 실상을 구현하는 일과 직결되었다. 실제로 ‘집사’라는 말 자체도 ‘섬김’이라는 의미이다. 이 집사의 직분은 다른 직분과 서열상 똑같으며 결코 열등하지 않다. 또한 집사직은 여성이 취할 수 있는 직분이기도 했다(딤전 5:9-10). 칼빈은 집사의 직분이 수행해야 하는 중요한 두 가지 사역을 제시하는데, 첫째는 구제하는 일이고, 둘째는 병든 자들을 위로하는 일이다(4,3,9). 앙드레 비엘레(Andre Bieler)가 칼빈의 교회관 연구를 통하여 확실하게 파악했듯이, 교회는 집사 직분이 효율적으로 기능을 발휘하게 함으로써, 재물이 부자에게서 가난한 자에게로 원활하게 유통되게 하여, 교회가 추구해야 할 ‘이상적 경제 질서’를 사회 안에서 실현할 수 있어야 한다. 이처럼 제네바 교회의 집사들은 교회의 복지시설이라 할 수 있는 구빈원(Hospital)에서 봉사하면서 병자들을 돌보고 가난한 자들과 노인, 과부, 고아들 및 생활이 어려운 사람들에게 물자를 제공하였다. 실제로 제네바 시에 구걸하는 자들이 없었던 것은 칼빈이 이와 같은 정책이 실제적으로 펼쳐질 수 있도록 부단히 신경을 썼기 때문이었다.

앙드레 비엘레는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은사를 서로 교환하는 것을 전제로 교회 안으로 모인다”고 했던 칼빈의 말을 소개하면서, 그러나 칼빈 시절의 이러한 집사 직분이 오늘날에는 아주 빈약하고 엉뚱한 모습으로 변질되어 버렸고, 어떻게 보면 사실상 이 직분은 교회 안에서 사라져 버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면서 탄식한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매매식 직분수여의 모습을 보면서 어찌 앙드레 비엘레와 같은 깊은 탄식이 흐르지 않겠는가?

 

4. 교회헌금의 올바른 사용

칼빈의 기독교 강요 4장~7장을 보면, 칼빈은 역사적 사실들을 인용하면서 교회의 참 모습을 그려나간다. 칼빈은 옛적교회가 헌금을 사용한 실례들과 사역자들을 임명한 절차에 대하여 자세하게 진술하는데, 이는 옛적교회가 지켰던 성경의 원리로부터 이탈해있는 현대교회로 하여금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처음에 교회재산을 관리하는 일은 무보수로 또한 자발적으로 맡아서 처리했지만, 일부 사람들의 탐욕과 악행으로 나쁜 선례가 생겼기 때문에 이런 폐단을 고치기 위해서 교회법을 제정하여 교회 수입을 네 부분으로 나누어 사용하게 했다. 옛적교회의 신앙으로서는, 당시 로마가톨릭이나 오늘날의 대다수 교회들의 경우와는 달리, 재산을 가난한 자들에게 분배하지 않고, 자체재산으로 소유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었다. 교회가 소유한 땅이나 재물 전부는 가난한 자들을 위한 유산이라는 것을 교회회의의 결정과 초대저술가들에서 자주 발견하는 한편, 회중들이 자기들의 주교(목사)를 선정하는 자유는 오랫동안 보존되었으며, 교회의 다수 회중이 원하지 않는 주교를 억지로 임명할 수 는 없었다. 옛적교회는 신실한 대중의 찬성 없이 슬쩍 끼어들거나, 증인이 없이 쉽게 주요 직책을 차지하는 모순이 생기지 않도록, 성경에 있는 원형에 충실하려고 상당히 노력했다.

칼빈의 예배의식에는, 오늘날과 같은 의무적인 헌금으로서의 십일조가 없었다. 아니 당시의 예배의식에는 아예 ‘헌금’이라는 요소가 없었던 것이다. 대개의 경우 헌금은 성찬식과 연결되었는데, 성찬식이 끝난 후 성도들은 ‘가난한 자를 위한 연보’에 참여할 수 있었다. 칼빈은 교회에 바쳐진 헌금은, 그리스도께 바쳐진 것이므로 그의 뜻을 따라 가난한 자들에게 분배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보았다(4.5.18). 그는 직분자가 재산을 모으는 것을 수치라고 여겼지만, 반면 가난한 자를 돌보는 것은 직분자의 영광이라고 보았다. 그러므로 칼빈은 집사들의 주도하에 운영되는 구빈원을 설립하여 제네바의 빈민들을 구체적으로 돌보게 하였고, 이를 위한 재정을 위하여 성도들에게 ‘일상 구제 연보(the daily alms)’를 장려하였다.

헌금제도가 예배의 의식 속으로 들어오게 된 것은, ‘뉴잉글랜드’로 들어간 개척자들이 교회의 재정자립을 꾀하려는 나름대로의 선한 의도에서 시작되다가, 보다 자연스럽게 재정확보가 용이한 ‘십일조 개념’이 끼어들게 되었다. 결국 뉴잉글랜드에 하나님의 국가를 세워보려던 초기 개척자들의 순박한 꿈은, 그들 자신의 부적절한 의도에 의해서 ‘변질된 개혁교회’라고 하는 예상 밖의 결과를 초래하는 꼴이 되었다. 이후로 이러한 대륙의 미국식 복음주의는 사방으로 확산되면서 또 하나의 그릇된 정통을 형성하였다.

오늘날 헌금에 대한 교회의 문제는 주정헌금, 월정헌금, 감사헌금, 절기헌금, 건축헌금, 선교헌금, 심방감사헌금, 생일헌금, 구역헌금 등 수많은 헌금의 제목들도 문제이지만, 특히 교회가 ‘살아있는 성전(living temples)’을 돌보는 일, 곧 가난한 자들을 돌보는 시급하고 필요한 일을 제쳐놓고, 호화로운 예배당 건축과 비품마련에 집착하는 등의 교회당 장식에만 몰두하는 한국교회의 물질적 타락은 칼빈이 볼 때는 엄연히 교회 재산에 대한 부정한 사용일 것이다(4.5.18).

하지만 오늘날에 들어와서는 뜻있고 올곧은 하나님의 종들에 의해서, 개혁자들이 자신들의 생명을 지불하면서까지 회복시켜 놓았던 참된 교회를 다시금 회복해 나가자는 운동이 세계 곳곳에서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하고 있음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하나님의 간섭하심이 아닐 수 없다.

 

5. 권징이 살아 있는 교회

칼빈은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권징의 세 가지 목적을 제시한다(4.12.5). 권징은 그리스도께서 정하신 것이므로 교회에 유익한 것이다. 하지만 교회의 권징이 어느 정도로 엄격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조심스러운 입장을 취한다(4.11.6; 4.12.8). 권징이 가장 긴급하게 요구되는 것은 무엇보다도 주의 만찬을 순결하게 시행하기 위한 것과 관련된다. 칼빈은 크리소스톰(Chrysostom)당시 사제들이 권세 있는 자들을 두려워해서 성찬을 받기에 합당치 않은 자들을 제제하지 않았던 행위에 대해 단호하게 책망한 경우를 실례로 제시한다(4.12.5).

사실 교회의 권징목적은 ‘선한 행실’을 장려하는데 있고, 교회는 이것을 말씀 선포를 통하여 신자들에게 촉구한다. 물론 여기서 ‘선한 행실’이란 도덕주의를 가리키는 좁은 의미가 아니고, 복음의 진리에 일치하는 삶, 곧 교회의 지체의 자리에서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통치에 복종하는 신자의 순종을 의미한다.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삶을 사는데서 신자의 도덕성은 월등한 수준을 드러내게 된다.

따라서 ‘권징’이라는 말은, ‘신자의 훈련’ 혹은 ‘신자의 단련’을 의미하는 쪽으로 좀 더 적극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교회의 훈련이라는 개념은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아주 낯선 개념처럼 들릴지는 모르지만, 종교 개혁기의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을 적극적으로 생각했다.

칼빈은 제네바 교회를 위하여 ‘신앙교육서(the instruction in Faith)’를 작성하여 적극적으로 가르쳤고, 온 교회에 정확한 복음의 진리를 공급하기 위하여 교사를 세워 성도들을 가르치게 했다.

그렇지만 오늘날 한국교회에는 권징이 사라지고 없다는 또 하나의 풀어야 할 문제가 있다. 이것은 교회의 위엄과 질서유지에 적신호가 되는 까닭도 있지만, 이것을 넘어 성도 개개인에게 있어야 할 오래 참음과 바르게 함의 ‘성숙된 신앙열매’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이유도 있다.

 

6. 성례의 참 뜻을 살리는 교회

성례는 말씀 선포와 더불어 교회의 중요한 표식 중의 하나이다. 교회는 성례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확증하고, 하나님께 대한 경건을 상호 확인한다. 성례는 하나님께서 선하신 약속을 우리의 마음에 인 치시는 일종의 표징이고,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말씀과 더불어 역사하셔서, 그의 능력으로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의 약속이 확증되게 해주신다. 따라서 성례는 반드시 말씀에 의한 설명이 수반되어야 한다. 말씀을 통하여 역사하시는 성령에 의한 효과가 수반되어야 진정한 은혜의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성령의 능력이 없이는 성례는 조금의 유익도 없으며, 반대로 스승에게서 배움을 이미 받은 마음속에서 신앙을 강건케 하고 키우는 성례를 막을 것은 아무 것도 없다”(9절). 비록 성례가 마치 캔버스에 그림 그리듯 상징되는 실체를 생생하게 묘사한다는 점에 있어서 말씀에 없는 특징을 가지기는 해도, 그러나 말씀 없이 그 자체만으로는 어떤 힘도 발휘하지 못한다. 성례 자체에는 어떠한 은밀한 힘도 없으나, 신자의 심령에 계시는 성령께서 내면의 교사가 되시어 그것을 쓰실 때에만 그의 신앙이 굳게 되는 것이다.

칼빈은 진리가 일차적으로 선포되고 계속해서 가르쳐 졌다는 전제하에 성찬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이 성도들에게 있는가의 여부를 심사했다. 또한 칼빈은 주의 만찬은 1주 1차씩 예배와 일체를 이루어 시행되는 것이 보다 성경적이라고 보았고, 그렇게 자주 시행되는 데서 올 수 있는 ‘성찬경시 심리’에 대해서는, 오늘날의 장로회에 해당하는 교회법원의 기능과 역할을 최대한 활용함으로써 능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고 보았다.

문제는 오늘날 성례에 있어서 칼빈의 이와 같은 정신을 찾아보기가 어렵다는데 있다. 간혹 성찬이 시행되는 경우를 보지만, 그것의 의미에 있어서도 다분히 츠빙글리적인 점, 즉 단순히 ‘기념설’차원에서 머무는 경우가 다반사가 아닌지 싶다. 진정한 개혁주의 정신에 입각한 교회라면 신앙고백들에 따라, 성찬에 대한 이해가 마땅히 ‘그리스도의 영적 임재설’이어야 한다.

이러한 지적이 오늘날에 있어서 너무 지나친 일인지도 모를 일이다. 왜냐하면 성찬 문제의 회복에 대한 기대는커녕, 헤게만(H. G. Hegeman)이 잘 지적하고 있듯이, 말씀의 신실한 선포 역시 어느 정도는 ‘단지 말씀’, ‘신학의 설명’, ‘성경강해’, ‘도덕관’, ‘심리적인 선동을 위한 연설’, ‘종교적인 묵상’, ‘시사해설’ 등으로 변질되었기 때문에, 전술한 바와 같이 ‘설교(예배)에 있어서의 그리스도의 임재문제’가 더욱 시급한 개혁의 현안으로 다루어져야 할 형편에 오늘날의 교회가 처해 있기 때문이다.

 

7. 교회 정치의 중요성

칼빈은 1541년에 제네바 교회를 위하여 ‘교회법령(Ecclesiastical Ordinance)’을 제정하였다. 이것은 교회에 질서를 도입하기 위한 하나의 정치체제였다. 교회의 생활을 통제하는 일련의 정치 제도가 없을 경우, 인간의 자율성에만 의지하는 것으로는 결코 교회를 순결하게 유지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필수적인 것이었지, 선택의 문제라고 볼 수 없다. 교회가 건강한 모습으로 설 수 있으려면 일련의 ‘정치체제’가 필요하기 때문에 오늘날 감독주의, 회중주의, 장로주의 등의 몇 가지 형태의 정치 체제가 복음주의 교회들 속에서 시행되고 있다.

교회는 역사 속에서 구체적으로 형성되고 운영되는 공동체라고 하는 성격상 교회다운 질서를 유지할 수 있게 해주는 일련의 정치 체제가 필요할 수밖에 없다. 물론 오직 그리스도만이 교회를 다스리실 수 있는 유일한 왕이시다.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몸을 다스리실 때에 이를 건실하게 받드는 데서 교회는 정치에 순종하는 모습을 드러내 보이게 된다.

칼빈은 성경을 주의 깊게 연구한 끝에 교회를 다스리는 권한은 한 개인에게 있을 수 없고, 장로들의 회의에 속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4.11.6). 그러므로 교회 정치의 바람직한 형태는 감독주의나 회중주의가 아니라 장로주의(Presbyterianism, 장로제도)이다. 장로제도 정치형태는 노회의 권위를 중심에 두고, 당회(session), 노회(presbytery), 지방대회(synod), 총회(general assembly)로 이어지는 단계적인 교회회의 형태를 이루고 있다. 하지만 제도 자체가 교회의 완벽한 운영을 자동적으로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정치에 관계하는 사람이 장로주의 정치의 근본정신을 깊이 깨닫는 중에 그것이 지향하는 바대로의 정신을 살려 운영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교회정치에 있어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왕으로서 머리가 되신다는 데 대한 철저한 인식이며, 따라서 어떠한 경우에도 인간의 자의적 통치가 끼어들지 못하도록 경계에 경계를 더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최고의 교회정치제도는 그리스도를 가장 잘 영화롭게 하며, 그리스도의 백성을 계발하며, 그리고 이 세상에서의 증인과 봉사자로 그들을 잘 준비시키고 자유롭게 하는 제도이다. 바로 이런 활동을 성실히 감당하는 한, 장로회적인 교회정치제도는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참으로 개혁되도록 도울 것이다.

 

Ⅲ. 결 론

 

1. ‘어떻게 하면 건강한 교회로 세울 것인가’하는 목회철학적 질문은 목회현장에서 사역하는 모든 목회자들의 끊임없는 고민이면서, 언젠가는 풀어야 할 궁극적인 과제일 것이다. 설령 가지고 있는 목회고민이 다양한 다른 현상으로 나타나 보인다 할지라도 목회를 포기하지 않는 한 본질적으로는 ‘건강한 교회 세우기’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한국 교회는 양적으로 많은 부흥을 이룩했다.

그렇지만 그 양적인 부흥이 과연 질적인 성장을 가져왔는지에 관한 질문에 있어서 ‘Yes'라고 선뜻 대답하지 못하는 까닭은, 한국교회가 그만큼 바람직하지 못한 교회성장을 추구해온 결과는 아닐는지 반성해 봐야 할 때이다.

이제 와서 많은 사람들이 한국교회의 서구화를 염려하고 있고, 많은 사람들이 이단의 침투에 대해서 우려하고 있다. ‘신천지’를 비롯해서 ‘여호와 증인’, ‘가정교회’ ‘몰몬교’ 등 기존교회의 체제를 부정하는 수많은 이단들의 늑대와 같은 공격 앞에 한국교회는 속수무책인 것이 현실이고, 그야말로 하늘을 찌를 듯 휘황찬란해져 가는 패역한 문화의 세태 속에서 속절없이 무너져 내리는 성도들의 가치관과 이에 따른 세속화 현상들, 이처럼 다양한 위험에 노출되어 있으면서도 위험을 위험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한국교회의 철저한 위험불감증 속에서 수평이동의 몸집 불리기에만 급급해하는 기형적인 대형 교회들과, 그 사이에서 영양분 없는 인스턴트식 설교로 병들어 가는 불쌍한 심령들, 이것이 부정적 측면에서 바라보는 한국교회의 현주소가 아닐까 한다.

그러나 전혀 희망이 없는 바도 아니다.

해답의 실마리가 열리지 않는 바도 아니다.

이처럼 타락으로 치닫는 오늘날의 교회 모습을 안타까워하면서,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애통함으로 몸부림쳐 기도하는 목회자가 이 땅위에 한 명이라도 남아 있는 한, 그 눈물의 기도를 기뻐 받으시는 하나님께서 결코 그대로 두시지 만은 않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 시대의 신실한 남은 자들을 들어 하나님의 선한 도구로 사용하심으로써, 패역한 이세대로부터 종교개혁자들의 순결한 믿음을 되찾아 회복시키실 것이라고 확신한다.

2. 개혁주의의 생명력인 ‘개혁된 교회는 지속적으로 개혁되어야 한다(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 est!).’는 말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점에서 변화의 방향을 모색해 본다.

 

1) 세상문화를 선별해서 받아들일 수 있는 문화유입의 단일창구(기구) 제정의 필요성.

‘개혁’이라는 단어는 기존의 틀 안에서 (잘못된 것을) ‘도려내다’는 의미와, 기존의 틀 위에다 (잘된 것을) ‘덧붙이다’는 의미가 함께 있을 터이다. 우리가 개혁주의 사상에 입각해서 끊임없이 개혁되어야 하고, 그래서 항상 바로세워지기를 마다하지 않아야 한다면, 우리에게는 세속문화에서 수렴 가능한 일정부분을 선별하여 기독교 문화로 정착시켜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어떤 측면에서는 어정쩡한 묵인 하에서, 또는 어쩔 수 없는 시류의 흐름 속에서 세속문화에 대한 최소한의 수용이 없지 않았지만, 갈수록 그렇게 소극적인 개방만으로는 무섭게 변화하는 현대의 문화를 교회가 미처 수용해 내지 못한다. 물론 세속문화를 교회 안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이러한 주장은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대다수의 목회자나 신학자들에 의해서 ‘우리에게는 오염되지 않은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는 명분 속에서, 강력하게 저지당하여 매우 이단적이고 부정한 주장으로 치부될 수도 있겠지만, 세속문화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보수를 외쳐대는 태도는 변화하는 세태에 대한 ‘스스로의 고립’으로서 매우 바람직하지 못한 태도라고 본다. 변화를 수용하지 못하면, 그것은 변화로부터의 퇴보이다.

대부분의 한국교회는 그리스도의 우주적 주권을 말하는 개혁주의를 표방하면서도 문화 현실이나 사회 현상에 무관심하거나 침묵하는 근본주의적 입장을 취해 왔다. 한국의 개혁주의 교회에는 대체적으로 문화소명에 대한 이해가 결여되어 있는데, 이것은 일반은총에 대한 이해가 결여된 근본주의적 성향을 그대로 보여주는 일예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개혁주의적인 입장에서 세속문화를 선별하여 받아들일 창구를 마련해야 하는 까닭은, 우리가 싫든 좋든 세속문화를 접하며 살아가고 있는 한 우리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이유 때문도 있거니와, 세속문화의 무분별한 유입으로 인한 폐해보다는, 미리 선택적으로 흡수하는 세속문화의 유입이 보다 건전하고 안전할 것이라는 이유 때문이며, 또한 우리는 세상문화를 주도해 나가야 하는 또 하나의 사명자들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은 이 땅의 삶속에서도 하나님의 주권이 행사되도록 해야 한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 속에 살면서도(conform)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transform) 문화적 소명을 지니고 있음을 고백한다. 따라서 신자의 삶의 궁극적 목표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인데, 이것이 개혁주의 신학의 목표라고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2) 올바른 신학의 재정립에 대한 필요성.

오늘날 제기되고 있는 한국교회의 문제는 교회관에 관한 문제라고 볼 수 있으며, 교회관의 문제는 신학적인 문제, 즉 교회론의 위기에 그 뿌리가 놓여 있다고 본다. 즉 교회가 무엇이며 왜 존재하는가 하는 것에 대한 신학적 혼동이 그 원인이다. 이는 오늘의 한국교회가, 교회는 무엇이며 또 어떤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지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우리의 의무가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지켜야 할 신학적 기틀을 마련하고 신학의 재정립을 시도해 야만 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의 관심은 한국교회가, 아니 개혁주의 신학과 그 전통을 따른다고 말하는 한국의 장로교회가 개혁주의 신학과 그 전통을 얼마나 인지하고 있고, 또 개혁주의적 삶에 얼마나 충실한가 하는 점이다. 우리는 자유주의 신학이나 신정통주의 신학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그 신학적 경계선을 획정하고 비판도 해왔으면서도, 근본주의, 보수주의, 복음주의, 세대주의, 신비주의, 경건주의 혹은 오순절 운동과의 경계선이나 그 신학적 차이에 대해서는 선명하게 석명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고, 개혁주의라고 하면서도 세대주의 혹은 근본주의적인 신학에 안주해 오지 않았는가 하는 점을 조심스럽게 지적해 본다. 한국장로교회가 실상은 개혁주의를 표방하지만 그 내면에는 근본주의, 세대주의 혹은 경건주의적인 요소들이 서로 혼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3) 올바른 가치관의 확립에 필요한 교육적 제도장치의 필요성

21세기를 가리켜 ‘가치관의 혼돈’시대라고 말하고 다원화 사회라고도 말한다. 개인주의가 만연하고, 집단이기주의가 팽배하고, 포스트모더니즘 사조가 사고와 문화 속에서 불확실성으로 예표 되는 이 시대, 또한 첨단기술과 컴퓨터의 발달로 정보의 홍수 속에서 헤엄치는 이 시대에 비록 물질의 풍요는 넘치지만, 인성은 고갈되고 정신적 갈등이 커져만 가는 현대인을 위해서, 교회는 변화하는 사회를 예측하고 그 변화에 대응할 준비를 가져야만 한다. 사역적인 측면에 있어서는 양적인 사역보다 질적인 사역이 절실한 때이다. 다양화 하고 많은 소그룹 활동을 통하여 불신자와 성도들의 필요를 채우는 목회를 하면서 교회는 사회를 향해 열려있어야 한다. 이러한 사역적 측면에서 교회는 성경에 기초한 체계적이고 유용한 교육 메뉴얼을 작성하여, 교인들을 교육함으로서 피폐해져가는 현대사회를 극복해 나갈 수 있는 올바른 가치관 확립과, 특히 이단의 유혹으로부터 지켜낼 수 있는 교육적 장치와 성경적 체계를 확립해야만 한다.

4) 체계적인 영성훈련의 필요성

많은 교회성장 전문가들이 예고하고 있듯이 21세기는 그 어느 때보다도 치열한 영적 싸움이 예상되므로 교회도 영적인 능력(spiritual power)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20세기가 오순절 운동으로 시작했다면, 21세기도 새로운 영적 운동으로 무장되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 성령의 능력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으며 변함없는 교회성장의 원동력이기도 하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수 세기를 뛰어넘은 오늘까지도 여전히 진리이다. 성령의 능력과 영적인 힘을 회복하기 위해서 한국 교회는 무엇보다도 뜨거운 기도운동이 필요하다. 정체의 어려움을 겪는 현실 속에서도 계속 성장하는 교회는 기도하는 교회들이다.

옛날 가톨릭 수도사들에 의해 발견되었던 기도와 묵상에 대한 귀중한 자료들이, 나름대로 우리개신교에 접목되면서 ‘영성’이라는 이름으로 꽃을 피우게 된 점은 현대에 있어 매우 다행스러운 소득이 아닐 수 없다. 아직도 더 많은 연구와 좋은 결과들이 기대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원하기는 이러한 이론적 자료들을 바탕으로 한국교회의 예배 개선이 실현되어 살아있는 예배,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며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획기적인 예배의식의 발전을 기원해 본다. 그리하여 신앙과 생활이 분리되어있다고 지적을 받아온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신앙생활인’이 아닌 ‘생활신앙인’으로 거듭나게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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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예수나눔
글쓴이 : 청지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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