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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유다인의 조기 교육방법*

하나님아들 2014. 3. 27. 20:50

예수가좋다오

유다인의 조기 교육방법*
출애굽기 2:1~10
석기현 목사.


 

 전 세계에서 우리나라 부모들만큼 조기교육의 열정이 뜨거운 부모도 없을 것입니다.  물론 조기교육이라 해서 다 좋은 것은 아니지만, 그로 인하여 이 작은 나라에서 세계적인 인물들이 나타나게 된 것도 사실인데, 대표적인 예가 바이올리니스트 사라 장, 본명 장영주 양입니다. 사라 장이 세 살 반 때에 처음으로 피아노를 쳐 보게 되었을 때에 그 아이에게 천부적인 절대음감이 있음을 발견한 그녀의 부모들은 그로부터 6개월 후 즉 만 네 살 때 16분의 1 사이즈의 바이올린을 손에 쥐어 주고 연습을 시작하게 했다고 합니다.


 그 결과 그녀는 다섯 살 때에 미국의 음악명문 학교인 줄리아드에서 오디션을 받았고 8세 때부터 벌써 세계무대에서 연주하게 되었습니다.  그 사라 장이 9세 때에 4분의 1 사이즈 바이올린으로 '데뷔'라는 제목의 첫 음반을 내게 되었을 때에, 열 살도 안 된 어린 소녀가 마치 '인생의 웬만한 산전수전을 다 겪어본 40대 여인'과 같이 깊은 음악성을 표현하면서 연주하는 모습에 그 녹음 현장에 모여 있던 관계자들은 다들 문자 그대로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입니다.  그 뒤로 14세가 되기도 전에 이미 베를린 필하모니, 빈 필하모니, 뉴욕 필하모니 등 세계 3대 오케스트라와 협연하였고, 지금도 계속 일취월장하고 있는 세계적인 명연주자가 된 것입니다.


  하지만 조기교육의 성공 사례를 논하자면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을 능가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을 출애굽시키고 광야를 통과하여 끝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까지 이끌어갔던, 명실 공히 이스라엘의 최고 지도자요 선지자였습니다. 그런 모세를 낳은 어머니가 요게벳인데, 실로 놀라운 것은 그녀가 자기의 아들을 직접 교육시킬 수 있었던 시간은 지극히 짧았을 뿐 아니라 그 아들의 나이가 오늘날의 그 어떤 조기교육 시기보다 훨씬 더 어릴 적, 문자 그대로 '젖먹이 시절'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게벳은 자기 아들 모세를 실로 하나님께서 크게 쓰신 신앙의 인물로, 이스라엘 민족으로부터 오늘날까지도 가장 추앙 받는 위인으로 만들었던 것이었습니다.

 

 과연 모세를 그렇게 키운 교육방법은 무엇이었습니까?  오늘 어린이주일을 맞이하여 저와 여러분은 우리의 자녀들을 진정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큰 인물로 만들기 위하여 반드시 지켜야 할 '영적 조기교육'의 원칙이 무엇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부모는 자기 자녀를 우선 '신전인격적 생명'으로서 인식해야 합니다.

  1절부터 4절에 기록하기를 "1레위 족속 중 한 사람이 가서 레위 여자에게 장가들었더니 2그 여자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아 그 준수함을 보고 그를 석 달을 숨겼더니 3더 숨길 수 없이 되매 그를 위하여 갈 상자를 가져다가 역청과 나무진을 칠하고 아이를 거기 담아 하숫가 갈대 사이에 두고 4그 누이가 어떻게 되는 것을 알려고 멀리 섰더니"라고 했습니다.

 

  모세의 부모는 세상의 부모들이 자녀로 인하여 받게 되는 그 어떤 스트레스와도 비교가 안 될 엄청난 압력을 모세를 낳게 되는 첫 순간부터 받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본문 바로 앞에 나오는 출애굽기 1장 22에 기록된 대로 "바로가 그 모든 신민에게 명하여 가로되 남자가 나거든 너희는 그를 하수에 던지고 여자여든 살리라"고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애굽 왕 바로는 고센 땅에 거주하는 이스라엘 민족이 점점 더 강성해지는 것을 염려하여 그런 끔찍한 명령을 내렸던 것이었습니다.  자기 자식을 부모가 스스로 죽이는 것은 정말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임에 분명했지만, 모든 이스라엘의 부모들이 그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만큼 바로의 명령이 절대적이고도 무서운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모세의 부모만 그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릴 만큼' 절대적인 권력자 바로의 추상같은 명령을 어기고서 모세를 숨겨 키울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것은 그들이 그 갓난 아들을 '하나님 앞에서' 볼 줄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본문 2절에 "아들을 낳아 그 준수함을 보고"라고 기록되어 있는 내용이 바로 그것입니다.

  사도행전 7장 20절 상반절에 보면 "그 때에 모세가 났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지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여기서 모세의 부모가 '그 준수함'을 보았다는 사실은 그들의 어린 아들이 그들의 눈에 그냥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기'로 보였다는 정도의 뜻이 아닌 것입니다.  그들은 단지 부모의 눈으로만 아니라 '하나님의 눈'에 자기 아들이 그 얼마나 '아름답게' 비치고 있을지를 볼 줄 알았던 것이었습니다.

 

 이 사실은 히브리서 11장 23절에서 더욱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는데, 거기에 보면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 아니하였으며"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히브리서의 구절에서 '믿음으로'라는 말은 '모세'를 수식하는 말이 아니라 '그 부모'를 수식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제대로 다시 번역하자면 '모세가 났을 때에 믿음으로 그 부모가...'라는 어순으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즉 모세의 부모에게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이 있었으며, 그 결과 자신의 아들 역시 그들이 믿는 하나님의 눈으로 볼 줄 알았고, 그러니 아무리 바로의 명령이 준엄하고 두렵다고 해도 그처럼 '하나님 앞에서 아름답고 준수한 아이'를 결코 죽일 수가 없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어린 모세를 '바로의 기준'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기준'으로 판단한 부모였던 것이었습니다.

 또한 그런 까닭에 모세의 부모는 그 아들의 생명까지도 오로지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온전히 맡길 줄 알았습니다.
 그렇게 석 달을 몰래 키우다가, 아마도 아이의 울음소리가 점점 더 커져서 그랬을 것이라고 생각되는데, 더 이상 숨길 수 없게 되자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은 그 어린 아들을 '갈대 상자'에 담아 나일강변의 갈대 사이로 띄워 보냈습니다.

 

  그때 이미 7, 8세 쯤 되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모세의 누이 미리암을 딸려 보내어 멀리서 지켜보게 하기는 했지만, 앞일이 어떻게 될지는 전혀 알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것은 사도행전 7장 21절에 "(모세의 부모가 그를) 버리운 후에"라고 기록하고 것처럼, 그 부모로서는 그야말로 '최후의 선택'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모세를 그냥 버리지는 않고 "역청과 나무진"으로 완전히 방수처리가 된 갈대 상자를 마련하는 등 끝까지 최선을 다한 후에 나머지는 오로지 하나님의 손에 맡겼던 것입니다. 이처럼 모세는 바로의 명령에 따르면 '죽여야 할 아들'로 태어났지만, 그 부모가 그를 하나님의 눈으로 보고 결코 그럴 수 없는 '아름다운 아이'임을 깨달았기 때문에 그처럼 두려운 명령도 '무서워 아니하고' 그의 생명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세상의 부모치고 자기 자식이 사랑스럽지 않은 부모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 어느 아버지 어머니의 눈에도 자기 아들이야말로 '최고로 준수한 완소남'이요 자기 딸이야말로 '세상에서 제일 예쁜 공주'일 것이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제 새끼를 귀여워하는 것은 사실 동물도 똑같이 할 줄 알지 않습니까? 명실 공히 '만물의 영장'이라는 사람이 자기 자식을 보는 눈이 그 정도 수준에 머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신앙의 부모라면 당연히 자기 자식을 '하나님의 눈'으로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내 자녀가 그냥 나를 닮아서 귀여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았기 때문에 실로 '아름답고도 준수한 생명'으로 태어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아들은 내 성을 따르고 내 핏줄을 이어갈 아들이기에 앞서 하나님께서 만세 전부터 선택하신 '생명책에 기록된 택자'이며 '그리스도의 보혈'로써 구속함을 얻게 된 아들인 것을 먼저 깨달아야 합니다.  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귀여운 내 딸 역시 내가 그런 '딸 바보'가 되기 훨씬 전부터 하늘 아버지께서 이미 당신의 사랑하시는 '언약의 자녀'로 지명해 두셨고 그처럼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딸'로 조성해 주신 것을 꼭 먼저 인식할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됨으로써 저와 여러분은 자녀를 키울 때에 모든 '세속적 압력'을 이겨내고 오직 '하나님의 기준'만을 따르게 됩니다.  '이 아이가 다른 사람 눈에 어떤 아이가 될까?'라는 걱정에 빠져 전전긍긍하는 못난 부모가 아니라, '이 아이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사랑스럽고 흠모를 받는 아이가 될까?'라는 설렘 가운데 오직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인도를 따라 그를 양육하는 부모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내 아들이 학교 선생에게 얼마나 똑똑한 학생으로 보일까? 내 딸이 제 또래 친구들에게 얼마나 더 예쁘게 보일까?' - 이렇게 보기 이전에 '이 아이가 하나님의 눈에 지금 몇 점짜리 아이로 보일까?'라고 판단할 줄 아는 부모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저 부모라면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육신적 부성애나 모성애가 아니라 '믿음으로' 자녀를 대하고 판단할 줄 아는 영적 부성애와 모성애가 아니겠습니까?


 하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인 우리 자녀들을 이처럼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신전인격적인 생명으로 볼 줄 아는 부모가 됨으로써, 오늘날 역시 '바로의 명령'이 주고 있는 온갖 압력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이 소중한 생명을 끝까지 '하나님께로부터 사랑받는 자녀'로 지켜내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부모는 자기 자녀를 가능한 한 어릴 때부터 '교회중심의 신앙교육'으로써 양육해야 합니다.

 

  5절 이하 10절에 "5바로의 딸이 목욕하러 하수로 내려오고 시녀들은 하숫가에 거닐 때에 그가 갈대 사이의 상자를 보고 시녀를 보내어 가져다가 6열고 그 아이를 보니 아이가 우는지라 그가 불쌍히 여겨 가로되 이는 히브리 사람의 아이로다 7그 누이가 바로의 딸에게 이르되 내가 가서 히브리 여인 중에서 유모를 불러다가 당신을 위하여 이 아이를 젖 먹이게 하리이까 8바로의 딸이 그에게 이르되 가라 그 소녀가 가서 아이의 어미를 불러오니 9바로의 딸이 그에게 이르되 이 아이를 데려다가 나를 위하여 젖을 먹이라 내가 그 삯을 주리라 여인이 아이를 데려다가 젖을 먹이더니 10그 아이가 자라매 바로의 딸에게로 데려가니 그의 아들이 되니라 그가 그 이름을 모세라 하여 가로되 이는 내가 그를 물에서 건져 내었음이라 하였더라"고 기록했습니다.

 

 모세의 부모가 그를 '갈대 상자'에 넣어 하수에 띄워 보낸 후에 오직 하나님의 손에 전적으로 맡겼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즉시 실로 오묘한 구원의 역사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 결과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은 이제 더 이상 숨길 필요 없이 아주 당당하게 자기 아들에게 젖을 먹이며 키울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그것도 애굽의 공주로부터 "삯" 즉 양육비까지 받아 가면서 자기 집에서 합법적으로 모세를 양육하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아이가 자랐을" 때에, 즉 모세가 젖을 떼고 걸음마를 할 무렵이 되었을 때 요게벳은 그를 "바로의 딸에게로 데려가야" 했고, 그때부터 모세는 그의 친부모와는 완전히 생이별을 하고 요게벳의 아들이 아니라 애굽 공주의 아들로 자라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놀라운 것은 그 모세가 장성한 후에도 여호와 하나님을 믿었으며 자기 민족이 이스라엘인 것도 알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그의 "나이 사십이 되매 그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아볼 생각이 나더니"라는 사도행전 7장 23절의 기록을 통해서 확인될 수 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모세는 40세가 될 때까지 여전히 하나님 신앙을 지키고 자기 민족에 대한 사명감까지 간직할 수 있었던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전적으로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이 그 아들에게 '영적 조기교육'을 시켜 준 덕분이었습니다.  다른 일반 교육은 나중에 모세가 바로의 궁전으로 들어가게 되면 다 자동적으로 받게 될 것이니까 조금도 염려할 것이 없었습니다.
   당시 애굽 왕궁에서 왕자들이 받았던 교육은 애굽의 우상신들에 대한 신학을 비롯하여 천문학, 약학, 수학 등에 이르기까지 당대의 일류 중의 일류인 엘리트 코스였습니다.


 그 결과 사도행전 7장 22절의 스데반의 설교 중에도 "모세가 애굽 사람들의 학술을 다 배워 그 말과 행사가 능하더라"고 했듯이, 그처럼 큰 나라에서 자라면서 보고 배운 교육이 다 나중에 가서는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리드하는 사명에 너무나 요긴하게 쓰인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애굽의 교육을 잘 받아도 그 모세가 신앙인이 되지 못하면 다 헛일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만약 모세가 자신이 이스라엘 민족이라는 사실, 그리고 그에 대한 자긍심과 사명감,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잃어버린다면, 그는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지도자는 고사하고 그냥 애굽 공주의 왕자로서 어쩌면 자기 민족을 학대하는 애굽의 왕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물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아니 사실상 모세 성장 환경을 생각하자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을 것 같았음에도 불구하고, 놀랍게도 모세는 바로의 궁전에서 자랐으면서도 40년 동안이나 '여호와 신앙'을 지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겠습니까? 그 대답은 한 가지뿐입니다.  바로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이 그 어린 모세를 품에 안고 젖을 먹이면서 키웠던 기간에 그에게 집중적인 신앙 교육을 시켰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외에는 다른 기회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요게벳은 그 제한된 기간 동안 매일 같이 자기 아들을 그 얼마나 열심히, 그 얼마나 철저히 가르쳤겠습니까? 몇 년만 지나면 떠나보내야 하는 아들이었습니다. 그렇게 생부모와 헤어지고 자기 민족과 단절되고 무엇보다도 신앙교육을 전혀 받을 수 없는 곳으로 자기 아들을 보내야 할 것을 생각하면서, 요게벳은 그야말로 분초를 아껴서 자나깨나 모세에게 반복적으로 주입식 신앙교육을 시켜 주었을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녀는 모세에게 젖을 먹일 때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에 감사하는 기도를 그 영아 모세의 귀에 들려주었을 것입니다.


 그 어린 모세를 안고 흔들어 주면서 혹은 업고 다니면서도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의 이름과 그 동족이 간구하는 '해방, 구원' 이런 단어들을 잠재의식 속에 새겨지도록 만들었을 것입니다. 아마 아기 모세를 잠재울 때에도 자장가 대신에 찬송을 불러주다가 엄마의 뜨거운 눈물이 그 아기 모세의 얼굴에 떨어지게 된 적도 자주 있었지 않았겠습니까?


 왜냐하면 자기 아들을 잃느냐 지키느냐 하는 것이 바로 그 몇 년 안에 결판나는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준수한 아이'를 애굽 왕실에 빼앗기느냐 아니면 '히브리 사람'으로 키우느냐 하는 사생결단의 문제를 두고 자기에게 주어진 기회는 겨우 수 년밖에 안 되었지만, 그것은 그녀에게 있어서 절대로 실패해서는 안 될 소중한 기회요 딱 한 번밖에 주어지지 않은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였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사적인 영적 조기교육의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정말 위대한 기적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 사실을 두고 히브리서 11장 24절로 26절은, 바로 그 앞절에서 그 부모의 신앙을 칭찬한 후에 곧 이어서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고 기록했습니다.  바로 그 어머니 요게벳의 조기 신앙교육의 결과 모세는 끝내 '믿음으로 장성하게' 되었고 온 이스라엘을 출애굽시키는 위대한 지도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 모세가 0세부터 3, 4세까지 자라는 동안, 아직 말도 제대로 못 배웠을 나이였지만, 그 영아 모세의 영혼 속에는 여호와 하나님의 성호가 깊숙이 박혀 버렸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느 정도인고 하니 그가 나중에 바로의 궁전에 들어가서 초중고대학교 전 과정을 거치면서 애굽의 온갖 태양신, 짐승신, 잡신들에 대한 신학만을 배웠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아무 사람도 가르쳐 주지 않았던 여호와의 성호를 기억하고 그 하나님만을 믿는 신앙을 지켜낼 정도였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는 매일 왕궁에서 애굽의 왕족들과만 교제하면서도 오직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인 동시에 자신의 진짜 민족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을 뿐 아니라, 거기에서도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 자기 민족을 구원해 내어야겠다는 사명 수행을 위하여 고난까지도 기꺼이 감수할 정도로까지 자라나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조기 신앙교육의 성과입니까? 오늘날 여러분은 과연 무엇을 염려하면서 자녀를 키우고 있습니까?
  주일에 예배를 빠뜨리고서라도 학원에 보내어 과외공부시키지 않으면 대학교에 못 들어갈까 벌벌 떨고 계십니까?
  성경 말씀대로 행하도록 가르치면 학교의 불신 친구들에게 전혀 인기 없는 아이가 될까봐 걱정하고 계십니까?
  교회생활을 열심히 하면 자칫 세상 사회에서는 꽁지가 될 것 같아서 겁을 내고 계십니까? 그처럼 자기 자식을 '바로의 궁'에서 세속적인 '일류 교육'만 시키려 하는 부모는 절로 그 자녀로 하여금 '애굽의 우상숭배'라는 과목부터 제일 먼저 배우게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조기교육은 아주 중요하며 결정적입니다.


 왜냐하면 바로 0세부터 3세까지의 기간이 어린아이들의 두뇌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자라는 기간인데, 생후 1년 사이에 뇌의 무게는 무려 두 배로 증가하며 2세가 되면 성인의 뇌의 50퍼센트, 그리고 4세에는 이미 75퍼센트까지 발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뇌의 용적과 무게만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은 바로 이 기간 동안에 엄마의 뱃속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라는 새로운 세계를 마치 물을 빨아들이는 스펀지처럼 고스란히 흡수하면서 익히게 되는 까닭에, 이 기간의 조기교육의 중요성이 그처럼 강조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조기교육에서 있어서 가장 중요한 과목은 무리한 언어교육이나 지식교육이 아니라 바로 '생활교육'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합니다. 그저 엄마의 사랑을 듬뿍 주면서 스스로 숟가락으로 밥을 먹고 간단한 옷을 저 혼자 입을 수 있도록 하는 것들이 실상은 훨씬 더 중요한 교육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교육들이 아이의 근육 발달은 물론이요 정상적인 두뇌발달 및 감성 형성에 제일 좋은 자극이 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모국어도 제대로 자리 잡히지 못한 나이에 일찍부터 무리하게 외국어까지 억지로 배우게 하면 그 아이에게 절로 스트레스를 주게 되며 정상적인 교육에 장애를 겪게 될 것이라는 사실은 무슨 전문 심리학자들의 지적이 아니라도 상식적으로 충분히 예견할 수 있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그 어린 시절부터 바른 '신앙교육'을 시키는 것은 더더욱 중요합니다. 그래서 잠언 22장 6절에서도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우리 부모들을 일깨워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유아세례도 가능한 한 어릴 때에 받게 하는 것도 아직 말 한 마디도 못하는 영아 때부터 그 아이를 '언약의 자손'으로 신앙교육을 시키기 위함인 것입니다.

 

요게벳의 경우처럼 저와 여러분에게 주어진 기회 역시 제한되어 있으며 절대로 실패해서는 아니 될 단 한 번의 기회뿐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내 자녀들이 내 집에서 먹고 자랄 동안 우리는 이들이 평생토록 잊지 못할 신앙교육을 완전히 다 마쳐 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경향교회 영아부와 유치부 주일학교를 졸업할 때 즈음에 벌써 그들의 인격 속에 평생을 두고 절대로 지워지지 아니하도록 우리 부모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 아이들의 귀에 '예수님, 하나님, 성령님'의 이름을 들려주어야 합니다.
   주일학교를 졸업한 후에도 주일학교 선생님께로부터 배웠던 성경구절들이 그 아이의 머릿속에 아예 '돌비에 새겨진 듯'이 박혀 있어야 하고, 주일학교 친구들과 함께 불렀던 찬송들이 그들의 귀에 늘 앵앵거리고 혼자서라도 절로 입술로 흥얼거릴 정도가 되게 만들어야 합니다.


 중고등학교에 가서 이제 세상 학문을 본격적으로 배우면서 자라게 되는 때에도 그들의 영적 잠재의식 속에 예수 구원 신앙, 교회라는 거룩한 공동체, 천당과 지옥의 실존 등 제일 기본적이면서도 가장 중요한 교리가 그 아이들의 사춘기 성장과정 중에 가장 강력하고도 뚜렷하게 그들의 아이덴티티를 형성하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녀의 뒤꽁무니만 따라가거나 불신사회의 과잉교육 풍조에 휩쓸리지 말고, 우리의 소중한 아들딸들을 오직 이처럼 어릴 때부터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기관'인 교회를 중심으로 신앙교육에 최우선을 두고서 양육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자녀란 부모에게 있어서는 그야말로 '기력의 시작'인 동시에 '축복의 기업'입니다. 그러니 그 자녀를 잘 키우고 바로 교육시키는 것은 부모에게 있어서 너무나도 중차대한 의무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속된 말이지만 정말 '자식 농사'를 잘 지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자식을 키워 본 사람이라면 다 알 수 있듯이 그것이 실제로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우리나라의 어느 유명한 기업가가 자기 평생에 아무리 애를 써도 자기 뜻대로 될 수 없었던 일 세 가지 중에 하나가 '자식'이었다고 말했을 정도인 것입니다. 바로 그런 까닭에 저와 여러분은 우리의 자녀들을 '내'가 키우는 것이 아니라 '하늘 아버지' 밑에서 키워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야말로 내 자녀의 진짜 부모인 '생명의 창주주'이시며 육신의 부모인 나보다도 훨씬 더 그들을 사랑하고 계시는 '아바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자녀를 '부모'의 눈으로 판단하지 말고 어디까지나 '하나님 앞에서의 인격체'로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을 '불신사회'의 기준을 따라서가 아니라 오직 '교회중심'으로 하나님을 경외할 줄 아는 신앙인의 교육을 시켜 주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비로소 저와 여러분의 자녀들은 '바로의 딸의 아들'이 아니라 진정 '히브리 사람의 아이'로서 성장하게 될 것이며, 선민 이스라엘 중에서도 크게 쓰임 받는 '신앙의 위인'으로 우뚝 서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말은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국가에서 모든 기본 생존권을 뒷받침해 주는 사회보장제도를 일컫는 말입니다. 우리 경향의 아들딸들에게는 영적으로 그야말로 '요람에서 무덤까지' 이르는 신앙교육이 완벽하게 이루어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경향교회의 주일학교와 경향인의 각 가정을 통하여 '영아' 때부터 '소천'하게 되는 그날까지 평생토록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인으로, 교회를 중심으로 충성하는 사명인으로 살게 만드는 이 위대한 신앙교육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부모와 교사로서의 이 소중한 책임을 감당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예수가좋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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