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 설교 모음

[스크랩] 조용기목사/자화상과 자존심 (벧전 2:9-10)

하나님아들 2014. 1. 2. 10:41

조용기목사/자화상과 자존심 (벧전 2:9-10)

<서론>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자화상과 자존심”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의식중이든 무의식중이든 자기 가슴속에 자기의 모습을 그림으로 갖고 있습니다. 그것을 자화상이라고 부르는데 가정주부는 나는 주부라는 자기 모습을 가슴에 새기고 있고 상인은 나는 장사꾼이라는 자화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말할 필요없이 목사는 나는 목사라는 자화상을 가슴속에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자화상에 따라서 사람들은 자존심이 돋구워지기도 하고 자존심이 상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지하철 환승로에서 체험한 바를 조임생 권사님이 그 글에 적은 것을 제가 읽고 대단히 감동을 했습니다. 지하철 환승로에 백발에 허리가 꼬부랑한 할머니가 앉아있었습니다. 옷도 남루하고 몸도 많이 늙고 지쳤습니다. 벌벌벌 떠는 손으로 쳐다보고 있기에 권사님이 동냥하는 거지 할머니인 줄 알고 돈 천원을 주니까 껌 한통을 주거든요. 그래서 아~ 좋다고 안받는다고... 돈 받으라니까 기어코 껌 한통을 받으라고... 껌을 안받겠다고 하니까 이맛살을 찌푸리면서 아주 마음에 기분나빠 여기기에 왜 기분 나쁜가 옆에 보니까 껌통이 여러개있어요. 아~ 장사꾼이구나. 물건을 파는 사람을 거지 취급하니까 자존심이 상해서 이맛살을 찌푸리는구나. 당장 껌을 덥썩 받으니까 얼굴이 환해지더랍니다. 그래서 지하철을 타면서 저 할머니도 그 마음속에 나는 당당한 자화상이다. 거지가 아니다. 나는 물건을 팔아서 이윤을 남겨서 먹고 사는 사람으로서 자존심을 가지고 있는데 당신이 왜 내 자손을 상하게 하느냐. 나를 거지로 취급하느냐. 그렇게 하는 모습을 분명히 보고 아~ 누구든지 마음속에 자화상과 자존심을 가지고 있구나 하는 것을 느꼈다는 글을 읽어 보았었습니다.

<본론>
1. 상처 입은 자존심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기 전에는 얼마나 멋있는 자기 모습을 가지고 있었습니까?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받아서 찬란한 영광스러운 자기 모습에 자기는 한껏 아름다운 자화상을 가지고 자존심에 어깨가 으쓱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동등되려고 마귀의 꾀임에 빠져서 선악과를 따먹고 반역하고 난 다음 순식간에 일어난 사건은 벌거벗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큰 영광이 몸에서 떠나가 버리고 갑자기 보니 발가벗었어요. 완전히 벌거벗긴 자화상인 것입니다. 그것보니까 자존심이 형편없이 상처를 입었습니다. 몸둘 바를 몰랐습니다.
창세기 3장 7절에 보면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자화상이 이지러지고 나니 이것을 어쩌든지 카바해야 되겠는데 뭘 카바합니까? 무화과나무가 넓적넙적하니까 무화과나무 잎사귀를 따서 앞치마를 해 입었는데 여러분 무화과나무 앞치마가 얼마나 오래 갑니까? 햇빛이 비취니까 쪼글쪼글쪼글해서 버석버석 부서지고 맙니다. 그러니 도저히 자기의 부끄러운 벌거벗은 모습을 가지고 나타날 수가 없어서 나무 뒤에 숨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동산을 거닐면서 찾았어요. 아담아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내가 벗었으므로 부끄러워서 나무 뒤에 숨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가 널 보고 벗었다고 말하더냐? 네가 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먹었느냐? 자기 자화상이 이지러지고 자존심이 낮아지면 사람이 비열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존심이 상한 사람은 고상하지 못합니다. 욕도 막하고 주먹질도 하고 비열해지는 것입니다. 아담은 자화상이 이지러지고 자존심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아주 비열해졌습니다. 왜, 어떻게 비열해졌느냐면 하나님 앞에 하나님, 하나님이 나에게 만들어준 그 여자가 나를 꾀므로 내가 선악과를 따먹은 것은 하나님 책임이요 그 여자 책임입니다. 아주 얼굴 두껍게 자기의 잘못을 하나님과 여자에게 둘러 씌웠습니다. 사람은 자기 자존심이 상하면 어찌하든지 자존심을 보호하기 위해서 남의 탓으로 돌려야 합니다. 남편은 우리 아내 때문에, 아내는 우리 남편 때문에... 내 친구 때문에, 내 이웃 때문에... 심지어는 대한민국 때문에... 대통령 때문에... 다 이웃의 책임을 전가해서 자기의 자존심을 지키려고 하지만 허물어진 자존심은 그렇게 해서 지켜지지가 않습니다. 자존심이 상하면 어떤 일이 생깁니까? 대인 공포증이 생깁니다. 내 이지러진 자존심을 가지고 사람들 못만납니다. 아담과 하와가 사람들 보기가 두렵고 하나님이 무서워서 나무 뒤에 숨은 것처럼 자존심이 상한 사람은 대인공포증을 가지고 사람 만나기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당당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혼자 외롭게 있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3장 10절에“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벗었기 때문에 두려워한 것입니다. 안벗었으면 두렵지 않을 것인데... 그러므로 우리도 우리 자화상을 잃어버리고 자존심이 상하면은 두려워하고 우리 자신을 숨게 되는 것입니다. 온갖 변명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시키는 것입니다.
창세기 3장 12절로 13절에“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야훼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이르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한 사람도 내 책임이라는 사람 없습니다. 아담은 사실 부인이 선악과를 주므로 받아 먹기는 먹었습니다. 그러나 안먹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인이 여보 이것 먹으시오 하니까 어~ 좋다. 받아 먹었습니다. 요사이도 부인이 주는 것 안받아 먹는 남편 별로 없어요. 그러므로 장가 잘들어야지 세속적인 부인을 만나면 세속적으로 끌려갑니다. 또 열심히 예수 잘믿는 아내 만나면 교회로 끌려오게 되는 것입니다. 별도리없이 교회로 끌려오게 돼요. 기도원에 자주 가는 아내는 남편 끌고 기어코 기도원으로 가는 것입니다. 안끌려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넥타이를 자꾸 잡아 당기는데 어떻게 안가는 것입니까? 여자에게는 네가 왜 선악과를 먹고 남편에게 주었느냐? 뱀이 꾀기 때문에 사탄이 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상한 자화상을 어찌하든지 고치고 자존심을 치료하려고 다른 사람의 책임으로 전가시키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자화상이 이지러지고 자존심이 상처를 입으면 못삽니다. 자기를 상실하고 마는 것이니까. 사람들 앞에 설 수도 없고 무화과나무 잎같은 변명을 만들어서 입어도 쭈글쭈글해지고 말고 있을 곳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술을 마시게 되고 폭력을 행하게 되고 반항적이 되고 비열하게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어느 정신요양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의사가 한 정신병 환자의 방으로 들어갔는데, 환자가 가만있지 못하고 분주했습니다. 옷장을 뒤지고, 서랍을 뒤지고 서랍을 열었다 닫았다 하고 침대 밑을 들어가서 뭘 찾고 그래서 의사 선생님이 여보시오 뭘한다고 그렇게 부지런히 찾고 있습니까? 하니까 딱 의사를 쳐다보면서 선생님, 나는 나를 잃어버린 사람입니다. 나를 좀 찾아 주십시오. 내가 어디 있습니까? 그 말에 의사 선생님이 자기가 쇼크를 먹었다는 것입니다. 그래? 자기가 자기를 보고 물었습니다. 의사 선생이 너는 네가 누구인지 아느냐? 모릅니다. 그러면 이 환자가 찾듯이 너도 너를 찾아야 될 것 아니냐? 그래서 오히려 환자에게 큰 교훈을 배웠다는 이야기를 기록한 것을 보았습니다. 선생님, 잃어버린 나를 찾고 있습니다. 이 말이 오늘날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외치는 말인 것입니다. 내가 누군가. 어디서 와서 왜 살며 어디로 가는가. 나를 찾아 주십시오. 그것이 소리없는 외침인 것입니다.
고대 헬라 철학자인 탈레스는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자신을 아는 것이고, 가장 쉬운 일은 남의 흉을 보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자기를 아는 것은 굉장히 힘이 들어요. 그러나 남 흉보라면 아주 힘들지 않아요. 믿든지 말든지 참이든지 거짓이든지 상관없이 막 남의 흉을 보는 것입니다. 오늘날 여러분 다른 사람이 여러분에 대해서 무슨 이야기를 하겠다고 하는 것을 듣고 마음 상할 필요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를 상실한 사람일수록 남의 이야기 더 많이 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정신빠진 사람이 남의 이야기를 많이 하는 것입니다. 정신이 올바로 든 사람은 남의 이야기 안해요. 자기 살기도 바쁜데 왜 남의 이야기해요? 정신빠진 허수아비가 사사건건이 이웃사람의 흠집을 잡고 벗기고 손가락질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화상이 죄로 인해 벌거벗어지면 자존심에 상처가 나며 우리 자신이 어디서 와서 왜 살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고 방황하게 됩니다. 상처 입은 자존심은 떳떳하지 못해 발버둥 치며 숨으려고 하고 변명하며 책임을 회피하려고 하는 것이 인간의 본심입니다.


2.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어떻게 하면 우리가 벌거벗은 자화상, 상처 투성이인 자존심을 회복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우리 대신 벌거벗고 십자가에 못박히기 위해서 오신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아들로 태어났다는 것은 높은데서 엄청나게 낮아진 곳으로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으로 왔다. 사람도 타락하기 전의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고 버림을 받아야 마땅한 아주 흉악한 것이 인간인 것입니다. 영적으로 죽었고 마음으로 부패, 부정하고 허물 투성이고 냄새가 나는 그런 사람세계로 내려오게 된 것입니다. 나는 어릴 때 아주 우스게 소리를 들었는데 지금 자꾸 그 생각이 나요. 우리 아래채에 아주 시골에 태어나서 시골에서 노동일을 하다 세상을 떠난 신손이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성은 신가고 이름이 뭔지 모르기 때문에 손이라고 했습니다. 신손. 그런데 똑 자기 비슷한 부인하고 결혼을 했어요. 그런데 부인이 우리 부흥회에 와서 어머니하고 할머니가 부엌에서 불때고 일할 때 이야기 하는 것이 나는 어릴 때 부엌에 늘 불 쬐고 같이 있어서 이야기를 듣거든요. 어린아이 듣는데 이야기를 마음대로 하면 안됩니다. 그런데 그때 무슨 이야기를 하냐면 나는 우리 신랑이 내 곁에 오면 정말 겁이 납니다. 왜냐하면 날 안고서 키스를 하려고 하는데 키스 그 여자가 모르지요. 입을 맞추려고 하는데 입에서 얼마나 구린내가 나는지 말로다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내가 밀어내면 막 달라들어서 입을 맞추는데 화장실보다도 더 구린내가 납니다. 그러니까 우리 할머니도 하하하 웃고 어머니도 하하하 웃었습니다. 내가 어리니까 모르는줄 알았지만 그때 들은 이야기를 지금도 기억이 난 다 말입니다. 자기도 무식하고 별로 잘나지 못했으면서도 자기보다 더 못한 남편이 구린내나는 입으로 입을 맞추겠다는 그것이 자기에게 충격이 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예수님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아들이 더럽고 추악하고 냄새나는 우리들에게 와서 우리에게 키스만 해준 것이 아니라 온통 우리를 끌어안고 살아야 되었었으니 그것 쉬운 일이라고 생각합니까? 예수님이 우리와 같이 되었다는 것 쉽게 생각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너무나 놀라운 희생인 것입니다.
로마서 8장 3절에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 6절로 8절에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주님은 종의 형체를 가지고 와서 종처럼 살았으며 나중에는 범죄인 중에 가장 극악한 범죄의 탈을 쓰고 십자가에 못박혀 처형을 당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다 무엇이냐. 우리를 대속하여 우리의 옛날 자화상을 복구시키기 위해서 그런 것입니다. 인간의 벌거벗은 자화상과 비천한 자존심을 예수님이 대신 짊어진 것입니다. 우리의 이지러진 자기의 모습, 우리의 비천한 자존심, 깨어진 인간, 잃어버린 인간을 찾아주기 위해서 우리 대신 주님께서 그 자화상이 이지러졌습니다. 그의 자존심이 극악한 죄수로까지 낮아지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완전히 포기하고 상실했습니다. 죄로 부패한 인간을 대신 짊어지고, 허물로 뒤덮인 인격을 자기가 담당하시고, 병든 마음과 몸을 끌어안고 저주 받은 삶을 자기의 것으로 걸머지고 죽음과 멸망으로 절망적인 자화상을 갖고 있는 인간을 대신한 것입니다. 자존심에 상처가 깊을수록 비열한 언어심사 행동을 하는데 예수님은 비열한 언어심사 행동을 안했습니다. 극단적으로 자존심이 상함을 받고 십자가에 못박혀 있었으면서도 주님은 끝까지 죄인들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여 저들이 알지 못하고 이렇게 하니 저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시고 마지막 회개하고 구원받으려고 하는 강도의 죄를 용서하고 구원으로 이끄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눅 6:45)
마음에 자화상이 이지러지고 자존심이 상한 사람은 이지러지고 상한 것만 입으로 밖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욕을 하고 분노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쌍말을 하고 부패한 말을 합니다. 왜냐하면 자기의 자화상이 이지러지고 자기의 자존심이 땅에 떨어졌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격이 아주 비열하고 비참한 사람은 여러분 자기를 잃어버린 사람이구나. 그렇게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자기를 상실한 사람이 저런 일을 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찾은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똑똑한 사람은 그렇게 말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를 위한 대속의 고통을 당한 것입니다.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예수님은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히셨다. 그러므로 저는 여러분을 끌어안고 나를 끌어안고 십자가에 못박히기 때문에 예수 죽음을 내 죽음으로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이사야 53장 7절로 11절에“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 야훼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야훼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
예수님께서 그 영혼이 수고를 해서 얻은 여러분을 보시고 오늘 만족하게 여기시는 것입니다. 엄마가 상고의 고통 가운데서 어린 아기를 낳고 나면 그 핏덩어리를 품에 안았을 때 마음에 얼마나 만족하게 여기고 기쁘게 여긴 그 심정을 아마 가지고서 예수님을 보면 예수님의 마음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기 영혼을 곤혹하게 한 것은 말로 형용할 수 없어요. 이 세상에 살아있는 존재가 당한 고통의 극한적인 고통을 예수님은 자원해서 짊어지셨습니다. 예수님이 원치 않았었으면 여러분 절대로 십자가에 올라가지 않습니다. 그가 죽은지 나흘이 되어 냄새가 나는 나사로도 말한마디에 살려 올리셨는데 폭풍우가 일어난 바다의 파도도 잠잠하게 하신 주님, 그를 잡으려고 하는 사람에게 내가 네게 명하노니 물러가라고 했으면 순식간에 전부다 쓸어졌을 것인데 주님은 잠잠하게 묶으는 자에게 손을 내놓고 때리는 자에게 어깨를 내놓고 못박는 자에게 손을 펼쳐 준 것은 여러분과 나를 구원하고자 하는 그 뜨거운 열정 때문인 것입니다. 사랑 때문에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자화상과 자존심을 회복해 주시기 위해서 자기가 우리의 깨어지고 이지러지 짓눌린 자존심을 대신 담당하신 것입니다. 사람으로 대접받지 못했습니다. 짐승도 예수 그리스도처럼 처참하게 대접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비참하게 주님 죽으신 것을 우리는 항상 생각하고 감사해야 될 것인 것입니다. 기독교의 복음이라는 것이 왜 위대하냐 하면 기독교의 복음은 종교가 아닙니다. 철학이 아닙니다. 의식이 아닙니다. 형식이 아닙니다. 생명을 주님께서 대신 바꿔치기 한 것입니다. 이제 와서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고 믿으면 주님의 대속의 옷을 대신 갈아 입습니다. 우리의 옛사람의 옷을 예수님이 다 덮으시고 예수님의 새로운 옷을 우리에게 입혀 주시는 것입니다. 의의 거룩한 건강한 축복, 영생의 옷을 우리가 받아입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자화상과 영광스러운 자존심을 받아서 입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자화상을 우리가 받아서 입고 예수님의 자존심을 우리가 받아서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죽음 내 죽음, 예수 부활 내 부활, 예수 승천 내 승천, 예수 보좌 내 보좌로 그리스도와 함께 된 것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감사해야 될 것은 아무 한일이 없이 무조건하고 믿음으로 값없이 선물로 우리의 운명이 달라진 것입니다. 옛사람을 주님께서 짊어지고 가시고 새사람으로 입혀 주신 우리는 잊지 말아야 될 것은 고린도전서 1장 28절로 30절에“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하나님이 여러분을 불러서 예수님 안에 탁 넣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로 나서 우리와 하나가 되어서 우리에게 무엇을 주느냐. 예수님은 하나님께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가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 사물을 올바르게 판단하고 영원을 잘 깨달아 알 수 있는 지혜를 주시고 우리에게 태어나서 죄를 한번도 안지은 것처럼 만들어 주는 의로움이 되어 주시고 우리를 허물에서 놓여남 받는 거룩함이 되어 주시고 우리를 은혜로써 구원받게 만들어 주시는 주님이신 것입니다.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예수님은 우리에게 나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그러므로 예수님의 대속의 옷을 여러분 믿음으로 확실하게 받아 입게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께서 깨달아 알고 꿈꾸고 믿고 입으로 시인하면 여러분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새사람으로 입혀 주시는 예수님과 더불어 우리는 살게 되었으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3. 새 사람으로 입혀주시는 예수님
예수님이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어 주십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옛날 피조물이 아닙니다. 옛날 아담과 하와처럼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고 버림받은 피조물이 아니라 새로운 피조물인 것입니다. 영생하고 하나님과 더불어 살고 성령을 모신 예수님과 똑같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인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여러분과 나를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어서 아주 영광스러운 자화상을 마음속에 갖고 자기의 자존심이 하나님의 자녀로써 당당하게 살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 성경에 보면 사마리아 여인을 볼 수 있습니다. 사마리아에 대낮에 12시에 혼자 물동이를 들고 물 길러 나왔습니다. 여자들이 물을 길러 아침에 나오지 대낮에 안 나옵니다. 왜냐하면 이 여자는 완전히 자존심이 상한 여자로써 사람 기피증에 걸렸기 때문에 사람이 안 나오는 낮 12시에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서 물 길러 나왔습니다. 그때 마침 제자들은 먹을 것을 사러가고 예수님 혼자 우물가에 앉자 있다가 이 여자가 온 것을 보았습니다. 여자는 자기가 사람들을 회피하고 무시하고 멸시 당하고 살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는데 예수님이 여자여, 물 좀 주시오. 깜짝 놀랐습니다. 자기같이 천한 여자를 보고 물을 달라는 유대인이 있을 수가 있느냐. 그래서 당신은 누구기에 나에게 물을 달라 합니까? 더구나 사마리아 남자들도 날보고 물 달라는 말 안하는데 유대인으로써 감히 나보고 물 달라고 합니까? 예수님이 웃으시면서 물 달라 하는 사람이 누군지 알았더라면 물을 오히려 달라고 했을 것이요. 내가 주는 물을 마시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고 속에서 솟아난 생수가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자가 웃으면서 아니 날 놀리는 것입니까? 이 우물은 깊고 당신은 물길 두레박도 없는데 어디에서 물을 떠서 나에게 먹이신다 말입니까? 예수님께서 이 물을 마시면 다시 목마르거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다고... 그 물을 내게도 좀 주십시오. 그래서 내가 낮에 물을 길러 나오지도 않게 해주시옵소서. 그래서 예수님께서 남편을 데리고 오시오. 남편요? 내 지금 남편 없습니다. 예수님이 고개를 끄덕끄덕 하시면서 그렇지요. 남편 없지요. 당신은 남편 다섯을 갈아치우고 지금 오다가다 만난 결혼도 안한 여섯째 남자하고 데리고 살지 않아요? 어떻게 나를 알아요? 이제보니까 선지자시군요. 당신들은 예루살렘에서 예배봐야 되는데 우리는 사마리아에서 예배를 드리는데 예루살렘에 와서 예배를 봐야 하나님 받아들인다고 하는데요. 예수님께서 아니야. 사마리아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지금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릴 때가 오나니 지금이라. 그것 너무 복잡한데요? 메시아라는 분이 오시면 우리에게 알려 주실 것입니다. 말하고 있는 내가 바로 그 메시아다. 그러므로 이 사마리아여인은 완전히 예수님과 대화하므로 달라진 것은 누가 자기를 상대를 해서 그렇게 대화를 해주며 나중에 알고 보니까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가 자기 같은 천한 여인을 데리고서 끝까지 말해주는 것을 체험하고 난 다음에 자기 자화상이 달라졌습니다. 나도 버림받은 여자가 아니구나. 나를 인정하고 받아주는 메시아가 있구나. 그리고 자존심이 생겨서 마음에 대인기피증이 사라졌습니다. 그 자리에 물동이를 내버려두고 시내로 뛰어 들어가서 여보시오. 내 말 들으십시오. 저 우물가에 메시아가 나타났습니다. 내 과거를 소상하게 손바닥 보듯이 말씀하는 분인데 오시오. 사람들을 피해서 12시에 혼자 물 길러 온 여자가 사람들에게 나가서 예수님을 전도하는 전도인이 된 것입니다. 대인기피증이 사라졌습니다. 그 마음속에 예수님과 대화하므로 말미암아 완전히 이지러진 자화상이 고쳐지고 자존심이 살아났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러분 마귀가 오면 사람을 벗깁니다. 그래서 사람을 벗겨서 자화상을 이지러지게 하고 완전히 자존심이 땅에 떨어지게 해서 비열한 인간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마귀에게 꾀임을 받았을 때 제일 먼저 한 것이 무엇입니까? 발가벗겨서 자존심을 상하게 하고 자존심을 없게 해서 비열하게 만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무화과나무 잎으로 앞치마를 만들고 나가도록 만들어 놓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에덴에서 쫓겨나갈 때도 하나님은 그대로 최소한도의 자화상을 가지고 자존심을 가지고 나가기 위해서 짐승을 잡아 피를 흘려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혔던 것입니다. 마귀는 벗기고 하나님은 입히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귀는 우리를 사람을 통해서 말로나 행동으로 이웃을 자꾸 할퀴고 발가벗기는 것이 마귀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화상을 이지러지게 하고 자존심을 짓밟아서 비열한 인간으로 만들려고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점잖은 사람도 일단 자존심이 상하면 비열하게 되는 것입니다. 비열하게 되면 앞뒤를 가리지 않습니다. 같이 욕하고 삿대질하고 온갖 흉측한 일을 저지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사마리아여인을 데리고서 정죄하거나 벗기지 않았습니다. 만일 율법사나 바리새인을 만났더라면 이 여자야 남편을 다섯이나 갈아재끼고 여섯째 데리고 사는 이 사기꾼이요 창녀야. 그렇게 말하면 벗기지 않습니까? 공격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한번도 창녀라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예수님께서 너는 다섯 번째 남편하고 이별하고 여섯 번째 남자하고 사는데 결혼하지 않고 동거하고 있다. 그 말을 했지 주님께서 이 여자를 욕하지 않았었습니다. 정죄하지 않았습니다. 제일 중요한 것이 마귀는 오면 정죄합니다. 있는 죄도 정죄하고 없는 죄도 만들어 내어서 정죄합니다. 너는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한 놈이다. 그래서 사람들도 만나지 못하고 하나님께 못선다. 용기를 빼앗고 절망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절대로 정죄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용서와 사랑으로써 입혀 주시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하나님께서 짐승을 잡아 가죽옷을 입혀 주었지만 이제는 짐승을 잡아 일시적인 가죽옷을 입혀 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생명의 옷을 입혀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고 버림을 받아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죄지은 그대로 못난 그대로 빈손 든 그대로 나오면 주님께서 우리를 끌어안아서 옛사람을 청산하고 자기의 생명으로 새사람을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 받으러 나온 사람은 마음에 강하고 담대한 마음을 가져야 되지 위축되고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바리새교인이나 사두개교인이 간음하다가 현장에 잡힌 여자가 돌로써 치려는 그러한 예수님은 아니신 것입니다. 종교가 사람을 정죄하고 죽이려는 것은 율법주의적인 것이요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 여자에게 나는 너를 정죄하지 아니한다. 집에 돌아가서 다시 죄짓지 말라. 용기와 희망을 주셨지 절망을 갖게 만들어 주지는 아니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자화상을 주셨는지 한번 알아볼까요? 여러분과 내가 하나님께 나올 때 어떻게 만들어 주셨는지 베드로전서 2장 9절로 10절 다같이 한번 읽어 보십시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나는 택함 받은 족속이요, 왕과 같은 제사장이요,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요,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입니다.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엄청나게 다른 사람이 되지 않았습니까? 여러분의 모습이 이렇게 달라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그만한 자존심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긍지를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자기자랑을 하나님 앞에 할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그렇게 훌륭한 사람인줄 알면 다른 사람 대할 때 훌륭하게 대하지 야비하게 대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깡패요 폐인으로 생각하면 다른 사람을 대할 때도 그렇게 대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자기의 모습인 자화상과 자기의 자존심에 따라서 언어심사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죄수들을 감옥에 가둬놓고 난 다음에 항상 욕이나 하고 주먹질이나 하고 난 다음에 임기가 차서 내보내면 나가서 당장 그대로 죄짓습니다. 사회에 대한 반항을 가지고 대적적인 행동을 합니다. 왜냐하면 삐뚫어진 자화상에 상처를 입은 그대로 나오니까 야비하게 된다 말입니다. 그러나 감옥에 있을 때 예수를 믿게 되고 주님이 인간 대우를 해주시는 모습을 보고 변화되어 나와서 주의 종도 되고 자선사업 하는 사람도 되고 훌륭한 사람 된 사람이 많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기독교 교회들이 합쳐서 기독교 교도소를 세운 것은 교도소에서 사람 때려잡는 곳이 되지 말고 사람을 치료해서 훌륭한 자화상, 훌륭한 자존심을 가지고 임기를 마치고 나가서 사회에서 변화된 사람이 되라고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보는 모습이 달라지고 자기의 느낌이 달라지면 사회생활에서 변화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고상한 자존심이 마음속에 생겨난 것을 알게 되면 새사람이 된 자화상을 알고 새 자화상을 상상하고 꿈꾸며 기적적으로 변화된 것을 믿으며 자기가 어떤 사람인가를 고백해야 되는 것입니다. 벌거벗을 때와 대속의 고귀한 옷을 입었을 때 자존심이 치료되고 두려움이 극복되고, 자존심이 치료되고 건강하면 긍정적이고 행복한 인격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긍정적이고 행복한 인격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 모습이 달라져야 되고 자기 자존심이 달라져야 되는 것입니다. 모습이 이지러지고 파괴된 자기 모습을 가진 사람이 자존심이 있으며 행복이 있을 턱이 없습니다. 자존심이 달라지고 자화상이 달라져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디에서 달라집니까? 십자가 밑에 나와서 달라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인정해 주시는데요. 하나님이 여러분을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해주니까 자기 모습이 얼마나 훌륭합니까? 그리고 예수님이 여러분을 사랑해서 자기 몸과 피를 다 쏟아서 구원을 시켜 주시니 여러분 얼마나 귀한 존재요, 얼마나 고귀한 존재인 것입니까? 십자가 밑에 나와서 여러분 짐을 풀어 놓고 보면 여러분은 고귀한 자화상을 얻게 되고 고귀한 자존심을 갖게 되어서 말이 달라지고 생각이 달라지고 행동이 달라지고 발걸음이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속사람이 달라지는데 겉사람이 그것이 안 나타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벌거벗을 때와 대속의 고귀한 옷을 입을 때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벌거벗을 때는 자기 마누라도 고소하고 하나님도 책임을 전가시키는 비열한 인간이 되었잖습니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에서 새로 지음을 받은 새사람이 되고 난 다음에는 내가 고상하니 고상한 말을 하고 내가 존귀하니 존귀한 말을 하게 되고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자녀답게 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변화된 사람에게 변화된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결론>
우리는 천국 자화상을 항상 신분증처럼 마음에 간직하며 고상한 자존심을 가지고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열등의식이나 패배감이나 절망감을 이기고 하나님과 함께 동행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 곁에 못나갑니다. 나는 겁이 나서 나갈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예수 보혈로 말미암아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자녀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기 때문에 하나님과 함께 살아갈 수가 있는 당당한 자화상을 가지고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똑같은 물건이라도 누구의 소유냐에 따라 그 가치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피카소의 그림은 잘못 그려서 버린 것조차도 집 한 채 만한 값이 될 정도입니다. 자기가 그렸다가 그림이 마음에 안 들어서 쓰레기통에 버린 것 그것을 주워서 있는 사람이 요사이 집 한 채 만한 값을 가지고서 팔아먹는 것입니다. 미국 제16대 대통령 아브라함 링컨이 앉았던 걸상은 너무나 값이 비싸서 값으로 헤아릴 수 없어서 오늘날 보물로 국가에서 보존하고 있습니다. 링컨 대통령이 앉아있는 걸상이었는데 그 걸상에 링컨 대통령이 세상 뜨고 난 다음 무슨 특별한 가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링컨 대통령이 앉았던 걸상이라는 그 생각이 보물로 만들어 준 것입니다. 심지어 지난 2009년에는 엘비스 프레슬리. 노래 잘하는 사람 있지 않습니까? 그가 군대에 가기 위해 긴 머리를 잘랐는데 오늘날 그 머리카락 뭉치가 돈덩어리가 된 것입니다. 뭉치 한단에 1천 700여만 원입니다. 그러니 이발사는 왔다지요. 우리 머리를 깎아가지고서 쓰레기통에 넣어 버리는데 엘비스 프레슬리 머리카락은 그래도 이발사가 기념으로 깎아가지고 놓아두었던 것이 이제는 돈다발이 되고 만 것입니다. 머리카락이 달라졌습니까? 아닙니다. 그 머리카락이 누구의 머리카락인가에 따라서 그렇게 달라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옷을 입고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가치가 있다 말입니다. 여러분이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엄청난 가치 있는 분 아닙니까? 하나님의 아들 아닙니까? 하나님이 아들로써 보좌 우편에 앉게 하시고 천군 천사가 그 앞에 복종하는 하나님의 아들. 그 아들과 동등한 이치에 있게 되었으니 예수님의 이름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가치 있는 것입니까? 여러분 보통 사람으로 보지 마십시오.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나는 이래 뵈도 하나님의 자녀이다. 예수님이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사용하고 예수님의 의로운 옷을 받아 입고 예수님의 생명을 마음속에 받았으니 프레슬리의 머리카락 보다는 만천배로 낫지 않습니까? 오늘날 예수님의 머리카락을 이발사가 가지고 있었더라면 아마 돈 쌓아 놓을 데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유된 우리는 천하보다 귀한 존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긍정적인 자화상과 건강한 자존심을 가지고 믿음으로 담대히 살아나가게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토인비는 변화를 거부하면 결국 자기만족, 자기도취, 자아 우상화에 빠져 망하게 된다고 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선민사상에 빠져 변화를 거부하고, 기독교라는 새로운 변화를 수용하지 못해 결국 수난의 민족으로 남게 된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과거 일본과 중국이 서양 문명을 받아들여 변화를 꾀할 때, 당시 유교적 사고에 따라 기독교 정신을 거부하고 쇄국 정책을 펴며 서양 학문이 들어오는 것을 막았습니다. 그 결과 나라도 개인도 망하고 만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모셔 들이고 변화되어야 돼요. 종교는 소용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종교라도 그것은 우리를 변화시키지 못하는 이상 소용이 없습니다. 변화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오순절 날 120명의 변화되는 사람들이 모여가지고서 초대 교회를 낳았고, 바울이라는 사람이 변화되므로 말미암아 이방 세계를 그리스도의 복음화하는데 위대한 공로를 세웠었습니다. 웨슬리의 변화되매 감리교가 생겨났고 칼빈이 변화되며 스위스를 장로교 국가로 만든 것입니다.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 된 자화상을 상상하고 꿈꾸며 변화된 것을 믿고 고백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죄와 허물로 상처가 난 자존심이 치료되고 두려움이 극복되어 건강하고 긍정적이고 행복한 인간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왜 우리를 오늘날 한국이 이처럼 잘살게 하시나요? 짧은 60년 내에 국민소득 60달러에서 오늘날 근 3만불에 가까운 국민소득을 가진 세계 20대 선진국에 들어가게 만들어줬으니 기적 아닙니까? 내가 일본에 이번에 부흥회 할 때 일본에 지식인 한 사람이 나를 자꾸 만나자고 해서 만나니까 대화를 좀 하자고 해요. 그래서 앉더니 나를 이상하게 쳐다보더니 한국 사람들은 요술 방망이 아닙니까? 그래요. 왜그러냐니까 나는 나의 세대에 100년 내에 한국이 일본을 따라 잡으리라고는 꿈도 못 꾸었습니다. 한국이 어떻게 일본의 미스비시 자동차를 따라 잡을 수 있습니까? 세계적인 자동차 회사를 어떻게 따라잡습니까? 그런데 하루저녁 잡아보니 현대가 미스비시보다 앞서고 말았습니다. 그 다음 배는 일본이 세계에서 제일 많이 생산하고 좋은 배를 만드는데 지금은 한국이 세계에서 제일 좋은 상선도 만들도 호화선도 만들고 군함도 만들고 잠수함도 만들고 이것 웬일입니까? 또 그것은 제켜 놓고라도 옛날에 일본이 만든 라디오면 따라올 천하에 장사가 없었는데 지금은 라디오가 뭡니까? 전기 모든 기구와 텔레비와 인터넷 제품은 한국이 일본을 훨씬 제끼고 세계적인 것이 되고 만 것입니다. 그리고 난 다음 하는 말이 가장 더 어려운 것은 지금 일본 회사에 연구원들과 기술자들이 한국 회사에 스카우트되기를 학수고대하고 수많은 머리좋은 일본 기술자들이 한국회사에 스카우트 되 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큰일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이야기 좀 해주십시오. 한국에 왜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그것도 한 100년이나 걸렸으면 몰라도 눈 깜짝할 사이에 자고 나니까 이렇게 달라졌는데 왜 이렇습니까? 그래서 내가 한 말은 일본은 옛 영광에 앉아서 변화가 되지 않았고 한국은 변화되었기 때문에 앞서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변화됩니까? 예수 믿으면 변화됩니다. 우리 한국에 천2백만 예수 믿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변화의 물결이 우리에게 다가온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우리나라는 예수님 안에서 새 것으로써 하는 것입니다. 옛날 꿈속에 살고 있지 않습니다. 옛날에는 우리가 일본보다 못했고 세상에서 제일 가난한 나라 중에 하나였는데 그것을 생각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옛날에 살고 있지 않습니다. 새것이 되었습니다. 새 시대 그리스도와 더불어 살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다는 것이 이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사람이 변화되면 사람을 따라서 온 사회와 국가가 변화되는 것입니다.
세계적인 컨설팅 회사인 맥킨지는 오늘날 경제 상황을 가리켜 그 핵심은 “인재 전쟁”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에드 마이클스는 책에서 성공하는 기업이 되기 위해서는 전략, 기술, 시스템 보다 더 선결되어서 해야 될 것은 사람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인재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입니다. 삼성 전자의 이건희 회장도 얼마 전,“인재 경영”을 다시 한번 강조했습니다. 세계 제일의 부자인 빌 게이츠 회장이 이끄는 마이크로소프트사(MS)는 1년에 20만여 통이나 되는 이력서를 받습니다. 그 중 선발하여 20에서 30 퍼센트만 채용하는 것입니다. 나머지 300명으로 구성된 사내 인재 발굴팀이 자체적으로 조사하고 발로 뛰어다니며 인재들을 찾아낸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잘 쓰면 사람이 사회와 회사와 국가를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훌륭한 국회의원을 뽑아야 올바른 법을 만드는 것입니다. 훌륭한 대통령을 뽑아야 나라가 올바르게 가는 것입니다. 사람의 가정도 사회도 국가도 변화시키기 때문에 사람을 잘 뽑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우리 한국에 세계에서 따라오지 못하는 것은 부모님들이 자녀 교육에 열심인 것입니다. 이는 옷을 팔아서라도 자식은 공부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녀들을 공부시켜서 훌륭한 자녀들로 만드니까 이 자녀들이 변화된 세상을 이끌어가는 것입니다. 교육열이 세상을 바꾸어가는 것입니다. 교육하지 아니하면 옛날에 그대로 머물러 있으면 아무것도 안 되는 것입니다. 휴렛 팩커드(HP)를 이끄는 칼리 피오리나 회장은 취임 후“핵심 인재 전쟁”을 발표하고 6개월 마다 직원들을 평가하는 인재 양성 경영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인재의 덕목으로 사람들은 여러 가지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전경련은 최근 삼성전자, LG전자, SK텔레콤, 현대자동차 등 국내 굴지의 11개 기업의 인사담당자들을 상대로 기업이 원하는 인재상을 조사했습니다. 그 결과, 중요한 요건은 네 가지였습니다. 개인이 역량이 있고, 국제 감각이 있고, 원만한 대인 관계, 올바른 가치관 등을 가진 인재를 뽑는다고 한 것입니다. 세계의 기업들은 지금“인재 전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시대마다 인재를 사용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방법은 틀립니다. 세상 사람만 택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도 사람을 뽑습니다. 하나님은 국가를 택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건물을 택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재를 택합니다. 어떤 인재를 택합니까? 하나님이 택하는 인재는 참 희안합니다.
고린도전서 1장 27절로 29절에“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세상이 다 버린 인재를 하나님이 찾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택한 사람은 저 왕궁에서 택한 것이 아니라 쓰레기더미에서 찾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나는 못났다. 나는 공부도 못했다. 인물도 못났다. 건강도 없다. 재산도 없다. 가문도 없다. 천만에요. 그런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세상에 천한 것들 멸시받는 것들 이런 사람을 택해서 있는 것들을 폐하게 하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오히려 천한 것들 멸시받는 것들 공부 못한 것들 없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말고 자랑을 생각하십시오. 그것 때문에 하나님이 택해 주신 것입니다. 세상에 너무 잘난 사람 하나님 택하지 않습니다. 세상에 못난 사람을 택해서 잘난 사람은 주님께서 업신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한번 따라 읽으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나같이 미련한 것을 택하사 지혜있는 자를 부끄럽게 하려 하심이요 나같이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을 부끄럽게 하시며 나같이 천한 것과 멸시받는 것이 하나님의 택함을 받아서 아무 인간도 하나님 앞에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자신 있지요? 할렐루야~ 하나님께 한번 박수하십시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우연히 교회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여러분을 택해주셨다고 택해주셨어요. 그 많은 사람 가운데 하나님이 너는 내 것이다. 오너라. 나는 아닌데요? 나보다 훨씬 잘난 사람 많은데요. 나보다 교육받은 사람 많은데요. 저사람 나보다 인물 훨씬 좋지 않습니까? 돈도 많구요. 웃기는 소리하지 마라. 내가 원하는 사람 내가 택한다. 네가 내 마음에 맞다. 네가 천하고 멸시받고 없는 사람이지만 나는 귀하게 여긴다. 그래서 택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여러분도 하나님 앞에서 새로운 평가를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나는 더 이상 천한 사람 아닙니다. 고귀한 하나님의 자녀인 것입니다. 멸시받는 사람 아닙니다. 하나님의 존경을 받는 사람인 것입니다. 없는 자가 아닙니다. 천당의 보화를 가진 사람인 것입니다. 사람팔자 시간문제인 것입니다. 세상은 뛰어남으로 인재를 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은혜로 인재를 택합니다. 우리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천국 자화상을 항상 간직하면 모든 절망과 낙심을 이기고 하나님과 함께 동행할 수 있습니다. 절대로 여러분 이제는 자화상이 구겨질 수 없습니다. 자존심이 짓밟힐 수 없습니다. 여러분 형편없는 사람이라도 하나님이 택하신 자녀라는 자화상을 가지고 자존심을 가지고 살기 때문에 당당하고 용감하게 열등의식과 좌절감을 가지지 마시고 낙심하지 마시고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 다같이 고개 숙여 기도드리겠습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여, 우리같이 천하고 못나고 멸시받고 버림받은 자를 택해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고상한 삶을 살게 만들어 주시는 주님 감사합니다. 우리 조상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벌거벗어서 인간의 힘으로 무화과나무로 앞치마를 해입으려고 애를 써도 안되던 우리에게 주님은 가죽옷을 입혔습니다. 옛날에는 짐승의 가죽옷이지만 지금은 예수님의 가죽을 벗겨서 우리에게 입혀 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 이름으로 살고 예수님 의로써 살고 예수님 거룩함으로 살고 예수님의 건강으로 살고 예수님의 축복으로 살고 예수님의 천국으로 옷 입고 살게 된 것을 감사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빛난 자화상을 가지고 영광스러운 자존심을 가지고 당당하게 사는 성도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하고 기도합니다. 아멘.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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