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한 교회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행2:42)
교회를 건강한 교회와 병든 교회로 나눌 수 있겠습니까? 교회라는 말 자체가 헬라어로 ‘에클레시아’인데, ‘죄악 세상에서 빼내심을 받은 자’란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이미 하나님에 의해서 건강함을 입었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무슨 건강한 교회, 병든 교회를 나눈단 말입니까?
그러나 안타깝게도 성경에서 조차 교회를 건강한 교회와 병든 교회를 나누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고린도 교회는 참으로 대단한 믿음과 은사를 가진 성도들로 구성된 교회였습니다. 그런 교회라도 병들어 점점 쇠퇴되어 갔습니다. 의아하지 않습니까?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가 쇠퇴되어갔던 세 가지 이유를 밝혔습니다. 첫째는, 육체적인 삶입니다. 고린도교회는 육체적인 삶에 빠져서 죄악을 범하고 분쟁을 일삼았습니다. 분쟁의 소용돌이 중심에는 설교자들의 설교 방식에 따른 파벌이 문제였습니다. 둘째, 주지주의(主知主義)입니다. 지식만능주의 있지요? 인간이 배운 지식이면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다는 겁니다. 고린도교회는 철학적 논쟁 장소였던 아덴을 중심으로 끊임없는 변론에 휘말렸습니다. 즉 사람들은 자기들이 알고 있는 지식 곧 철학으로 하나님을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다는 자만에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엄청난 교만입니다. 셋째, 균형 잡히지 못한 은사입니다. 은사를 앞세워서 교회의 덕을 세우기는커녕 서로 자기들이 받은 은사가 최고라고 싸웠습니다. 그러기에 고린도교회는 병든 교회입니다.
빌립보 교회도 잘 아시지요? 빌립보 교회는 연약한 중에서도 사도 바울의 복음 사역을 가장 능력 있게 도왔던 교회입니다. 빌립보서를 읽어보시면 아시겠지만 그들은 가난한 중에서도 하나님의 복음 사역을 위해 기쁨으로 헌신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을 능력 있게 전했습니다. 얼마나 열심이었는지 복음을 전하느라 다툼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다툼으로 하든지 사랑으로 하든지 무슨 방도로 하든지 그리스도의 예수의 복음이 전해지는 것으로 인하여 자신은 기뻐하고 기뻐한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그러기에 빌립보 교회는 건강한 교회입니다.
건강하다는 말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영적으로 아무 탈이 없고 튼튼한 상태를 말합니다. 사도 요한은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한3서 2절).”고 했습니다. 교회는 영혼도 잘 되고, 하는 일도 잘 되고, 몸도 건강하다면 더할 나이 없이 좋지요. 건강이 중요합니다. 건강해야 합니다. 건강해야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건강한 교회로 가는 비결은 무엇일까요? 그 비결을 본문에서 찾아보십시다.
1. 건강한 교회는 가르침을 받는 교회입니다.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라고 했지요? 초대 예루살렘교회의 성도들은 사도의 가르침을 신실하게 받았습니다. 가르침을 받는다는 것은 ‘배운다.’는 것입니다. 배운다는 말은 첫째, 새로운 지식이나 교양을 얻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로 학교에서 학습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둘째, 새로운 기술을 익히는 것입니다. 학원이나 기능을 가르치는 학교에서 배우는 것을 말합니다. 셋째, 남의 행동, 태도를 본받아 따르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회생활에서 주로 이루어지는 배움입니다. 가족관계, 친구관계, 직장동료 관계, 이웃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배움이지요. 넷째, 경험하여 알게 되는 것입니다. 경험하여 배우게 되는 것을 체험이라고 합니다. 즉 체험적 지식은 인생의 연륜이 필요하지요. 그래서 성경은 센 머리 앞에서 일어서라고 했습니다. 왜냐? 노인들의 지혜는 체험적 지식의 산물이기 때문에 깊고, 넓고, 높다는 것입니다. 다섯째, 습관이나 습성이 몸에 붙는 것입니다. 어떤 행동을 반복함으로 인해 습관으로 고착되는 것을 말합니다.
‘배울 수 있는 사람’은 누굴까요? 첫째, 가르치는 사람이 있을 때 배웁니다. 가르쳐 주는 사람이 곁에 있다는 것은 행복입니다. 가르쳐 주는 사람을 가리켜 ‘멘토(mentor)’라고 합니다. ‘멘토’란 ‘현명하고 성실한 조언자’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스승이나 은사나 좋은 지도자를 말합니다. ‘멘토’가 꼭 살아있는 사람이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위인들은 이미 죽어 우리 곁에 없지만 그들의 책을 통해, 삶을 통해 우리는 끊임없이 조언을 받아 배울 수 있습니다. 둘째, 겸손한 사람이 배웁니다. 제가 늘 인용하였듯이 토마스 A. 켐피스는 그의 책 [그리스도를 본받아] 서문에서 ‘겸손한 사람은 교만한 사람이 20년에 익힐 지혜를 한 순간에 깨친다.’고 했지요. 공자는 말하기를 ‘세 사람이 함께 걸어가면 그 중에 한 명 이상은 반드시 자기를 배우게 하는 스승이 있다.’고 했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배웁니다. 셋째, 깨어 있는 사람이 배웁니다. 깨어 있다는 말은 각성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즉 자신의 부족을 깨닫고 뭔가 배워서 자신을 발전시켜야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은 가르치기가 편안합니다. 또 배우려는 열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가르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전혀 준비하지 않았던 지혜도 전달할 수 있습니다. 설교하는 것도 마찬가집니다. 왜 부흥회를 가면 말씀전하기가 쉬운 지 아십니까? 모두 새로 오신 강사님으로부터 뭔가 들으려고 귀를 쫑긋 세우고 귀 기울이기 때문에 준비하지 않은 말씀까지 전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사도의 가르침을 받은 교회입니다. 왜 가르침을 받았습니까? 실천하려고 받았습니다. 실천할 때 변화는 일어나고 능력은 나타납니다. 그러나 현대 교회 성도들은 실천하여 변화되려고 하지 않습니다. 수많은 지식을 전달받고 있지만 그 지식을 듣는 것으로 즐기고 맙니다. 하나님의 지식도 마찬가집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배운 것으로 끝입니다. 현대 교회 성도들은 귀만 커졌습니다. 듣는 귀만 고급스러워졌습니다. 그러나 배운 것을 실천하는 데에는 천박할 정도로 가난해졌습니다. 초대교회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초대교회는 사도들로부터 배운 말씀을 실천하기 위해 목숨을 던졌습니다. 핍박을 받고 고통을 당하고 죽음이 목전에 있어도 배운 대로 사는 즐거움이 넘쳤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을 보십시오. 그는 순교로서 배운 것을 실천했습니다. 그는 배운 것을 그대로 실천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냈습니다. 그 때 스데반의 얼굴은 천사처럼 빛났습니다. 사도행전 6장 15절입니다.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2. 건강한 교회는 사랑으로 서로 교제합니다.
“서로 교제하며”라고 했지 않았습니까? 교제란 헬라어 ‘코이노니아’로써 ‘사귐’이란 뜻입니다. 건강한 교회는 사랑으로 서로 사귄다는 것입니다. 이 사귐은 먼저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과 사귀고, 예수님 안에서 성령님과 사귑니다. 이런 영적 사귐이 밑바탕이 되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형제, 자매와 사귀는 것입니다. 사귐의 본래의 뜻은 갈라디아서 6장 6절에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는 말씀처럼 ‘함께 하는 것’입니다. 무엇으로 함께 합니까? ‘모든 좋은 것’으로 함께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 본문은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의 사귐을 말하기도 합니다. 즉 목회자와 성도 간의 사귐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는 사귐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성도와 성도 간에도, 가족 간에도, 동료 간에도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사귐이요, 교제인 것입니다.
건강한 교회는 사랑으로 서로 교제합니다. 교회 안에서도 교제합니다. 세상에 나가서도 교제합니다. 안 믿는 사람들과 교제하는 것에 두려움을 갖지 마십시오. 거부감을 갖지 마십시오. 그들과 사귀어야 전도가 됩니다. 그들을 사귀는 일에는 예수님의 리더십을 사용해 보십시오. 예수님의 리더십은 첫째, 주는 것입니다. 주는 것은 세상 어느 사람이라도 환영합니다. 세상 리더는 정복하거나 강력한 카리스마로 다스려 빼앗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주시는 것을 리더십으로 삼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오병이어로 떡과 물고기를 주셨습니다. 칠병이어로 역시 떡과 물고기를 나누어 주셨습니다. 귀신을 쫓아내 주셨습니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도 모든 사람을 위해 대속물로 내어 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살 찢기시고, 피 흘리셔서 기꺼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완벽하게 주시는 리더셨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의 이름은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이 되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게 되었습니다. 주면 교제가 일어납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들지 않거나 여러분을 괴롭히는 사람이 있다면 밥을 몇 번 사줘 보십시오. 그러면 마음이 금방 열립니다. 이웃을 전도하고 싶거나 누군가를 전도하고 싶다면 주십시오. 뭔가를 주시면 마음이 열려서 여러분과 사귀고 싶어 하고, 여러분의 말을 들어줄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의 리더십은 대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대접받기를 원하느냐? 그러면 먼저 남을 대접하라고 하셨습니다. 대접하면 대접받게 되는 날이 오게 됩니다. 대접하는 데 인색한 사람은 대접받을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이나 롯은 지나가는 사람을 대접했는데 부지중에 천사를 대접함으로써 구원의 길을 제시받게 됩니다. 정말 아브라함은 대접을 끝내주게 하는 분이셨습니다. 대접 잘 하는 사람은 좋은 리더십을 하나 가진 사람입니다. 자꾸 대접하려는 사람을 싫어할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셋째, 예수님의 리더십은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모든 허물을 덮어줍니다. 허물을 자꾸 말하는 사람은 싸우자는 사람이요, 친구를 잃어버리는 사람이 될 겁니다. 그러나 사랑으로 허물을 자꾸 덮어주려고 하면 친구를 얻게 될 줄 믿습니다. 사랑은 모든 두려움을 내어 쫓습니다. 사랑엔 두려움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있어 보십시오. 두려움이 있을 수 없습니다. 캄캄한 밤에도 든든합니다. 산 속에서도 무섭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길을 가면 아무리 먼 길도 짧게 느껴집니다. 사랑하는 마음은 언제나 강력한 힘을 발휘합니다. 사랑 앞에서 녹아나지 않을 사람이 없습니다. 사랑은 원수의 마음도 녹입니다. 사랑은 어떤 사람이라도 감동을 줍니다.
지난 주 수요일, 14살짜리 누나가 급류에 휩쓸려 물 속으로 들어가자 13살짜리 남동생이 누나! 누나! 를 외치며 물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가 누나와 남동생이 모두 죽어버린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저는 그 뉴스를 듣고 울었습니다. 동생이라도 얼른 뒤돌아서서 나오지 왜 물 속으로 뛰어 들어 갔니? 왜 그런 어리석은 짓을 했을까?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생각해보십시오. 사랑하는 누나가 물 속에 빠져 갈 때 그 순간 이성은 마비되고 사랑의 감정만 솟아오른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왜 어린 아이를 데리고 가던 어머니가 아이가 교통사고가 나려 할 때 총알같이 달려가 아이를 밀쳐내고 자기가 차에 치여 죽을까요? 사랑은 날카로운 지성의 번쩍임이 아니라 물밀 듯이 밀려오는 감정의 능력이기에 여러 생각할 것 없이 행동함으로 자신을 죽여 아들을 살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리더십의 가장 위대한 요소입니다. 사랑이 없는 리더십은 사람을 살릴 수 없습니다. 저나 여러분들에게 사랑이 없다면 다시 회복해 달라고 기도해야 될 줄 믿습니다.
넷째로 예수님의 리더십은 섬기는 것입니다. 섬긴다는 말은 일단 무릎을 꿇는다는 것입니다. 왜냐? 받들어 모시려면 섬기는 사람이 낮아져야 하기 때문이지요.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섬김을 받으려고 오시지 않으셨다고 했습니다. 오히려 낮아져서 모든 사람을 섬기러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 병든 자, 죄인 곧 사회적으로 냉대를 받고 왕따를 당하고 있었던 사람들을 섬기셨습니다. 그것 때문에 오해도 많이 받고 욕도 많이 들으셔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누가 뭐라 하든 상관치 않으시고 예수님은 낮은 위치에 내려가셔서 사람을 섬기셨습니다. 예수님의 리더십은 수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키셨습니다. 저도, 여러분도 예수님의 리더십을 사용할 때 사랑의 교제, 예수님 안에서의 사귐이 잘 일어나게 될 줄 믿습니다.
우리 교회가 이 지역에 들어온 지가 벌써 10년이 되어 갑니다. 과연 이 교회가 이 지역에 들어와서 한 게 뭐가 있나? 생각을 해보니 별로 한 게 없어요. 이제는 우리 교회가 이 지역 사회 속으로 들어가기 위한 노력을 기울일 때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공부방이라든지, 경로잔치 등을 통해 지역사회를 사랑으로 섬기는 교회가 되어야할 줄 믿습니다. 저도 이런 문제를 놓고 요즘 기도하고 있습니다. 아래층을 평소에 개방하여 아이들이 공부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어주는 것을 생각해봤습니다. 여러분들도 이런 문제를 놓고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3. 건강한 교회는 사랑의 식사가 있습니다.
“떡을 떼며”라고 했지요? 떡을 뗀다는 말은 ‘애찬(愛餐)’ 곧 사랑으로 식사를 나누는 것을 말합니다. 사랑으로 식사를 나눌 때 우리는 하나라는 의식이 더욱 확고하게 들기 때문입니다. 식사라는 것은 참으로 미묘합니다. 같이 앉아서 밥을 먹으면 이상하게 친해지거든요. 함께 예배를 드리고 밥을 같이 먹고 친교를 나누는 것은 너무도 중요합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예배 후에 꼭 식사를 함께 나누려고 하지만 많은 분들이 바쁘다는 이유로 인해 함께 하지 못해 안타깝습니다. 주일날만큼이라도 그리스도안에 있는 분들이 사랑의 식사를 나눔이 어떠신지요? 건강한 교회는 사랑의 식사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혹은 사회에서 냉대를 받는 사람들과 자주 식사를 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세리 마태, 세리 삭개오의 집에서도 식사를 하셨고, 나사로의 집에는 자주 들러 식사를 하셨습니다. 제자들과는 3년 동안 함께 식사하시고, 함께 주무시고, 함께 생활하셨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수 만 명의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오병이어, 칠병이어를 통해 기적을 일으키셔서 한 자리 공동 식사를 나누시기도 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시기 직전에는 마가의 다락방에서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식사를 나누심으로써 예수님의 사랑이 얼마나 건강하신 것이었는지를 보여주셨습니다. 사랑으로 함께 식사를 나누는 교회가 건강합니다.
4. 건강한 교회는 기도하는 교회입니다.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고 했지요? 기도란 말의 사전적 의미는 “인간보다 능력이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어떠한 절대적 존재에게 비는 의식”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기도를 ‘비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미신적인 사고방식입니다. ‘비는 것’은 ‘빌다’라는 말에서 나온 말인데, “바라는 바를 이루게 하여 달라고 신이나 사람, 사물 따위에 간청하다.”는 뜻이라고 했습니다. 단지 바라는 바를 이루려고 간청하는 것이 기도라면 ‘귀신, 사람, 사물’ 그 어느 것이든 기도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구절 사전에는 기도란 “성도와 하나님과의 교제 및 대화”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기도란 단지 어떤 소원이나 이루는 정도의 기복주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관계’에 있음을 말해줍니다. 즉 기도는 하나님과의 관계성 속에서 파생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과 부모 자식지간으로 설정해 놓으셨습니다. 부모 자식 간에는 교제가 있습니다. 대화가 있습니다. 그저 혼자 막 떠들다가 가는 교제나 대화가 아닙니다. 부모 자식 지간에는 말하기도 하고 듣기도 하는 상호 교환적인 의사소통이 있기 마련입니다. 의사소통은 서로를 알아가는 중요한 수단입니다. 처음 만난 사람은 서로를 잘 모릅니다. 그러나 한 번, 두 번, 세 번 반복해서 계속 만나서 대화를 하다보면 서로를 잘 알게 됩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를 잘 아시지만,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너무 무지합니다. 왜 그럴까요? 기도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많이 배운다고 하더라도 기도가 없는 사람은 영혼으로 들어가는 지식이 없기에 결정적인 순간에는 하나님을 모른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알아가는 방법은 기도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의사소통이 되게 하고, 하나님과 사귀게 하고, 하나님과 대화가 되어 하나님을 잘 알아가는 사람이 되게 합니다. 이런 사람을 성도라고 합니다. 성도는 하나님과 대화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과 대화한다는 말은 영적인 호흡을 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물론 기도의 내용으로서는 ‘부르짖음(호소), 통회, 간구, 변명, 감사, 찬송’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완벽한 기도는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주기도문입니다. 주기도문의 순서를 보면 첫째,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길 기도합니다. 둘째,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셋째, 하나님의 뜻이 이미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넷째, 우리의 필요한 양식을 달라고 기도합니다. 다섯째,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사람을 용서해준 것처럼 우리 죄도 용서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여섯째,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일곱째, 우리를 악에서 구원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여덟째,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하나님 아버지께 영원히 있다는 신앙고백을 합니다.
기도하는 교회, 건강한 교회입니다. 건강한 교회는 밤이고 낮이고 기도가 끊어지지 않습니다. 크든, 작든 교회는 기도가 살아있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저녁 7시마다 저녁 기도회를 합니다. 새벽 5시에 기도회를 합니다. 금요일 저녁 9시에 기도회를 합니다. 이렇게 많은 기도회 시간에 기도하러 나오시지 못하는 분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바쁘다고 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 시간이면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있기 일쑤입니다. 지금 교회가 어렵습니다. 힘듭니다. 교회가 어렵다는 말은 여러분이 어렵다는 뜻입니다. 교회가 어려운 데 그 교회에 속한 성도가 ‘나는 편안한데.’라고 말하면서 기도하시기를 게을리 하시는 분이 계시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가 학개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이 전이 황무하였거늘 너희가 이때에 편벽(호화로운)한 집에 거하는 것이 가하냐? 그러므로 이제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희는 자기의 소위를 살펴볼찌니라 너희가 많이 뿌릴찌라도 수입이 적으며 먹을찌라도 배부르지 못하며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며 일군이 삯을 받아도 그것을 구멍 뚫어진 전대에 넣음이 되느니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희는 자기 소위를 살펴볼찌니라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전을 건축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로 인하여 기뻐하고 또 영광을 얻으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너희가 많은 것을 바랐으나 도리어 적었고 너희가 그것을 집으로 가져갔으나 내가 불어버렸느니라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것이 무슨 연고뇨 내 집은 황무하였으되 너희는 각각 자기의 집에 빨랐음이니라 그러므로 너희로 인하여 하늘은 이슬을 그쳤고 땅은 산물을 그쳤으며 내가 한재를 불러 이 땅에, 산에, 곡물에, 새 포도주에, 기름에, 땅의 모든 소산에, 사람에게, 육축에게, 손으로 수고하는 모든 일에 임하게 하였느니라(학개1:3-11).”
하나님의 축복된 메시지가 선포되는 교회를 외면하고서 내 가정이, 내 사업이, 내 일터가 복 받기를 원하십니까?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교회와 함께 자라나고 교회와 함께 부흥되는 삶이 되실 때 하나님의 축복이 풍성하게 임할 줄 믿습니다. 그렇게 하기위해서라도 자꾸 예배에 참석하고 기도하는 자리에 나오셔서 기도의 불을 붙여야 합니다. 집에서 혼자 기도하는 것은 힘듭니다. 불쏘시개가 여럿이 모여야 그 역할을 감당하듯이 기도의 불을 붙이려면 여러분들이 함께 모일 때 기도의 불의 뜨겁게 붙게 되는 겁니다.
이제 건강한 교회, 건강한 가정, 건강한 가족이 되기 위해 기도하러 나오십시오. 기도는 우리의 모든 문제를 놀라운 기쁨과 감격으로 만들어주는 위대한 역사가 될 줄 믿습니다.
저는 오늘 건강한 교회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첫째, 건강한 교회는 가르침을 받아 실천하는 교회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가르침을 받는 대로 삶에 적용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둘째, 건강한 교회는 사랑으로 서로 교제하는 교회라고 했습니다. 교제란 사귐이라고 했지요? 예수님 안에서 서로 사귐이 있으시길 부탁드립니다. 셋째, 건강한 교회는 사랑으로 떡을 떼는 교회라고 했습니다. 즉 사랑의 식사, 함께 대화하며 나누는 식사를 통해 우리는 서로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넷째, 건강한 교회는 기도하는 교회라고 했습니다.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는 교회야 말로 기적이 일어나는 교회가 될 줄 믿습니다.
건강한 교회는 성장과 부흥이 일어나지 말라고, 말라고 해도 성장과 부흥이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사람을 데려다가 앉히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선순위가 우리들 각자가 건강한 교회, 건강한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건강한 교회, 건강한 성도가 모인 곳에는 어떤 새 가족이라도 받아들일 수 있고, 양육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될 때 자연적인 교회 성장과 부흥이 일어나게 될 줄 믿습니다.
건강한 교회-2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아 나타나니.”
(행2:43)
[자연적 교회 성장]이란 책을 써가지고 교회 성장의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 [크리스티안 A. 슈바르츠]라는 분은 건강한 교회에 꼭 필요한 여덟 가지 질적 특성이 있다고 했습니다. 첫째는, 사역자를 세우는 지도력인데요. 건강한 교회는 제자훈련, 중요한 업무의 분담 그리고 재생산에 투자함으로써 상상할 수 없는 성장을 가져왔다고 합니다. 둘째는, 은사 중심적 사역인데요. 교회는 성도들의 은사가 뭔지? 성도들의 은사를 발견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아울러 성도 개개인의 은사에 따라 일할 수 있도록 잘 조정해줌으로써 교회 성장에 이바지하였다는 겁니다. 셋째는, 열정적인 영성인데요. 성도들이 성령으로 ‘불붙어’ 있는가? 성도들이 기쁨과 열정으로 헌신과 믿음의 삶을 살고 있는가? 이런 것이 교회 성장에 절대적인 영향을 주었다는 겁니다. 넷째는, 제 기능을 다하는 조직인데요. 교회에 불필요한 조직을 과감하게 개선하고, 정말 필요한 조직을 둠으로써 조직이 살아 움직이도록 하라는 겁니다. 음- 예를 들면, 자질구레한 교회 조직이 많지요? 또 이름만 걸려 있는 조직도 많지요? 그런 것 다 없애고 이름 그대로 일하는 조직을 만들라는 겁니다. 다섯째는, 영감이 넘치는 예배인데요. 먼저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지는 예배입니다. 다음으로 구체적인 삶의 변화가 일어나는 예배입니다. 이렇게 영감이 넘치는 예배를 드릴 때, 사람들은 스스로 예배에 참석하게 된다는 겁니다. 정말 즐거운 예배, 신나는 예배란 인위적으로 꾸며서가 아니라 성령에 감동되어 나타나는 것이지요. 여섯째는, 전인적인 소그룹입니다. 전인적이라는 말은 소그룹(작은 모임)에서 영혼의 성장, 마음의 성장, 육체의 건강을 되찾는 사건이 일어나게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즉 목장에서 성도들이 잘 양육되어 또 다른 소그룹을 번식시킬 수 있을 때 교회는 성장한다는 겁니다. 많은 성장하는 교회는 말합니다. “우리 교회는 의도적으로 사람을 나눔으로써 소그룹의 번식을 꾀하고 있다.”고요. 우리 교회도 소그룹을 더 많이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소그룹이 부지런히 번식해야 되겠지요. 일곱째는, 필요 중심적 전도입니다. 불신자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전도법입니다. 모든 성도들이 자신의 은사를 사용해 자기와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불신자들을 섬기고, 그들이 확실한 복음을 들을 수 있도록 도우며, 또한 그들이 교회와 연결되도록 돕고 격려하는 일을 할 때 교회는 성장한다는 거지요. 여덟째는, 사랑의 관계입니다. 교회 안에서는 사랑이 밑바탕에 흐르게 해야 하고, 거룩한 웃음이 흘러나와야 합니다. 성도들끼리 만나면 가식 없는 웃음이 있는가? 즐거운 마음이 넘치는가? 성령의 기쁨이 있는가? 이런 것은 사랑의 관계로 끈끈이 연결될 때 가능합니다. 사랑의 관계는 교회 성장의 질적 특성입니다.
지난 주 우리는 건강한 교회로 가기 위한 네 가지 특성을 살펴보았습니다. 첫째, 가르침 곧 배움이 있는 교회가 건강한 교회라고 했습니다. 둘째, 사랑의 교제가 있는 교회가 건강한 교회라고 했습니다. 셋째, 사랑의 식사를 나누는 교회가 건강한 교회라고 했습니다. 넷째,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는 교회가 건강한 교회라고 했습니다.
이번 주에도 저는 사도행전 2장 43절에 의거하여 건강한 교회로 가기 위한 두 가지 특성을 더 얹어 보려고 합니다. 첫째,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교회가 건강한 교회입니다. 둘째, 기사와 표적이 주의 종과 성도들로 인하여 일어나는 교회가 건강한 교회입니다.
5.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교회는 건강한 교회입니다.
교회란 “세상 죄에서 꺼냄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사람들의 무리”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란 거룩하고 순결한 공동체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거룩하고 순결한 곳에 임재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거룩하고 순결한 상태에 있을 때 성령으로 임재 하셔서 그 능력을 나타내십니다. 능력을 달라고 해서 능력이 주어지는 게 아닙니다. 능력은 거룩하고 순결하면 자동으로 임하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거룩한 은사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의 은사는 하나님의 뜻대로, 성령의 뜻대로 각자에게 나눠주시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 4절로 11절을 읽어드립니다. “4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5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6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7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8어떤 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9다른 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이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10어떤 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이에게는 예언함을 , 어떤 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이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11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 그러므로 교회는 성령이 임하시는 길을 닦아 놓아야 하는데 그것이 거룩과 순결입니다. 거룩하고 순결한 공동체가 되면 당연히 거룩하신 하나님이 임재하시고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셔서 세상으로 하나님의 실존을 발견하도록 하시는 겁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통로는 실로 다양합니다. 첫째, 말씀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말씀은 하나님의 실존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알고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남을 봅니다. 만약 우리가 말씀을 읽고 듣고 깨닫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도 하나님의 능력인지 사단의 능력인지 분별할 수 없을 겁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보아도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해도 오래가지 않습니다. 말씀의 바탕이 되어 있어야 하나님의 능력을 제대로 체험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을 걸어갈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119:105).”라고 고백했습니다. 말씀은 그 자체가 능력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온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지금도 말씀은 능력으로 나타납니다. 히브리서 4장 12,13절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13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살았다는 이 선언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말씀의 능력을 감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살아 움직이는 말씀입니다. 그렇기에 이 말씀은 우리를 비춰주는 거울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통해 영혼의 화장을 할 수 있습니다. 영혼에다가 영적인 스킨, 로션, 영적인 영양크림, 영적인 파운데이션을 바르고 영적인 아이샤도우 등을 붙이려면 말씀을 읽고 듣고 지켜야 합니다(계1:3). 그래서 하나님은 성경 디모데후서 3장 16,17절에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말씀은 방망이처럼 우리의 죄악과 허물을 두들겨 패서 깨닫게 하기도 합니다. 예레미야 23장 29절입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말이 불같지 아니하냐 반석을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 하나님의 말씀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게 역사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히13:18). 그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들에게 보이도록 말씀이신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오셨다고 성경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 1절로 3절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니라. 2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3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요한복음 1장 14절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이셨습니다. 따라서 성령이 임하시면 우리를 예수님께로 인도하시는데, 예수님이 하신 말씀 가운데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깨닫도록 인도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 26절입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요한복음 16장 13,14절입니다.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14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라.” 성령은 진리의 영이시기에 능력을 나타내실 때 언제나 말씀되신 예수님을 드러내십니다. 예수님이 교회에서 드러나기 시작하면 세상은 두려워 떨게 됩니다. 왜 세상이 두려워 떱니까? 죄악 세상은 예수님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능력을 감당할 수 없어서 두려워 떨게 됩니다. 교회에서 예수님이 나타나시기 시작하면 세상은 네 가지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하나는 예수님을 피해 도망가든지, 둘째는 예수님을 향해 공격을 하든지, 셋째는 쥐 죽은 듯이 숨어 있든지, 넷째는 두 손 두 발 다 들고 항복하며 주께 나오든지 해야 합니다. 그만큼 교회에서 말씀되신 예수님이 나타나시면 사람들은 두려워 떨게 됩니다.
18세기에 웨일즈 지방에 위대한 영적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때를 같이하여 한국 땅에도 평양을 중심으로 영적인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이에 영향을 받아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이기풍(1865년 평양 출생)은 목사 안수를 받고 제주도 선교를 떠납니다. 제주도 선교를 자원하여 가지만, 여러 가지 고초를 겪은 후 1908년에 제주도에 도착했으나 복음이 잘 전해질 리가 없었습니다. 그도 그렇듯이 제주도는 섬이고 어업을 주업으로 하는지라 미신이 성행되고 있었고, 뱃사람 특유의 고집과 표독한 성품으로 인해 접근조차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한 귀신들린 정신병자가 낫을 들고 사람을 해치는 장면을 목격하였습니다. 이기풍목사님은 즉시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좇아내고 그 사람을 온전케 하였습니다. 제주도 사람들은 이 사건을 목격한 후에 하나님에 대한 큰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이 소문은 온 섬사람들에게 퍼져 예수 믿는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그리하여 교회가 개척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어떤 무명의 선교사님이 해외에 있는 섬에 들어가게 되었답니다. 복음을 아무리 전해도 듣지 않고 매 달 고목나무에다가 제사를 지내기에 사람들에게 묻기를 ‘그 고목나무가 무슨 힘이 있어 당신들을 도울 수 있다고 거기다가 제사를 지내는 거요?’라고 물었더니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이것은 고목나무가 아니라 [태무신]이다. 우리가 태무신에게 제사를 지내지 않으면 태무신이 노여워하여 온 마을에 재앙을 내려 우리는 다 죽는다.’고 하는 겁니다. 기가 막힌 선교사님은 ‘내가 이 태무신을 베어 넘어뜨릴 테니 과연 그런 일이 일어나는지 정말 보자.’고 제안을 했더니 다들 죽이려고 달려들어 혼비백산 도망을 쳤답니다. 할 수 없이 선교사님은 밤에 톱을 가져와 그 나무 밑 둥이를 싹둑 잘라 냈답니다. 다음 날 아침 난리가 났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렇게 믿었던 재앙은 마을 어느 누구에게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선교사님은 그들을 찾아가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알려주고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였더니 온 마을 사람들이 마음을 열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겁니다.
저희 동네에도 고목나무에 문종이 조각을 끼운 새끼줄을 두르고 지금도 제사를 지내고 있습니다. 그것이 마을 풍속이요, 문화라고 우기면서 말입니다. 놀라운 사실은 절 받은 고목나무마다 속이 모두 썩었는데, 제가 생각하기로는 들어줄 수도 없는 자신에게 자꾸 소원을 빌어 나무가 속이 상해서 썩어가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둘째, 기도를 통해 능력이 나타납니다. 기도는 능력의 원천이요, 기적과 이적의 산실입니다. 기도할 때 귀신이 떠나가고 질병이 치유되고 각종 응답을 통해 믿음의 확증이 생겨납니다.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도 기도하지 않는 것은 예수 믿는 게 아니라 자기를 믿는 것입니다. 기도 생활이 없으면서도 큰 교회 다닌다고 폼 잡아봐야 성도의 생활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작은 교회라도 기도하는 사람은 세계를 움직이는 사람, 한 나라의 역사를 바꾸는 사람, 가정과 교회를 성장시키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 교회의 건강수치는 기도에 힘쓰는 자들이 많을 때 올라가게 되는 겁니다.
기도는 각종 능력을 체험하게 함으로 두려움을 없애주고 사명을 새롭게 하고 어두운 세상을 빛으로 밝히는 힘을 발휘하게 합니다. 지금 교회는 기도하기를 힘쓰고 애쓰고 있습니다. 그렇게 기도하라고 말씀드려도 기도하지 않고 예배하지 않고 자기 힘으로 살려는 사람은 잠시간의 헌신은 있을지 몰라도 결코 영적인 승리자 될 수 없음을 명심하셔야 합니다. “기도 외에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다.”는 예수님 말씀에 귀를 기울이셔야 합니다. 교회에서 기도하려고 모이는 무리가 소수이다 보니 밖에서 들려오는 시끄러운 소음에 비웃음이 섞인 듯이 들려올 때도 있지만, 기도를 시작하면 반드시 승리하게 됩니다. 기도하는 한 교회는 소망이 있습니다. 기도가 살아있는 한 교회는 반드시 부흥하게 될 줄 믿습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사람이 하나 둘 늘어나야 합니다. 나무 조각 하나로는 큰 불을 이룰 수 있습니다. 나무 조각이 여러 개, 수 십 개, 수 백 개, 수 천 개, 수 만 개로 늘어날 때 단양 말로 ‘환닥불’이 됩니다. 우리 시골 동네 사람들은 ‘환닥불에 살찐다.’고 했습니다. 활활 타오르는 환닥불에 살갗이 뜨거워 살찌는 것처럼 느껴서 그렇게 말을 했겠지요. 그러나 교회에서 기도의 불이 활활 타오르기 시작하면 교회 안에서 타오르는 영적인 열기와 위엄이 세상을 압도하게 되는 겁니다. 사람들의 마음에 두려움이 임합니다.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이 기도하는 사람들 중에서 나타나게 됩니다. 그럴 때 세상은 교회를 높이 보고 교회의 머리 되신 예수님을 겸손히 영접하게 될 줄 믿습니다.
안타깝게도 작금의 세상은 교회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교회를 우습게 봅니다. 목사를 우습게 봅니다. 성도들을 우습게 봅니다. 많은 분들은 그렇게 말합니다. 기독교인이 세상 사람들에 비해 윤리, 도덕적으로 더 나은 삶이 없어서라고 그렇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에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떠나서 그렇다는 겁니다. 이사야서 1장 2,3절입니다.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3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하나님을 거역하고 하나님을 떠나 세상과 타협하고 사는 성도들로 존재하는 한 세상은 우리를 가볍게 볼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굳세게 살아가며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 않는 한 세상은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정해주지 않을 겁니다. 세상은 이상합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믿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성도들을 핍박하고 죽이면서도 마음속으로는 감동을 받습니다. 정말 대단한 믿음의 사람이라고 탄복하는 겁니다. 그러나 우리가 세상과 타협하여 무늬만 그리스도인으로써 살아가면 겉으로는 우리와 친하게 지내는 척 하면서도 속으로는 ‘별 거지 같은 게 그리스도인이라고 개 폼 잡고 있어? 에이 위선자야? 차라리 예수 믿는다고 말을 하지 마라.’고 외치는 겁니다. 그러므로 선한 척, 바른 척 하지 말고 예수 제대로 믿고 능력을 나타내십시오. 그러려면 기도하십시오. 기도하지 않으면 절대로 능력이 안 나타남으로 인해 세상이 두려워할 것도 없습니다. 마귀가 겁낼 위인이 못 됩니다. 아주 작은 어린 아이라도 기도하는 사람을 마귀는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기도하는 사람을 통해 그 명맥이 유지되고, 발전되고, 퍼져나가는 것입니다.
건강한 교회-3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아 나타나니.”
(행2:43)
6. 기사와 표적이 주의 종과 성도들로 인하여 일어나는 교회가 건강한 교회입니다.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S기도원에서 40일 금식기도를 막 성공적으로 마친 P목사님, 너무도 기진맥진했습니다. 배가 고팠습니다. ‘아! 빨리 가자. 가족이 기다리는 집으로. 교인들이 기다리는 교회로.’ 하산하기 전 산에서 기도하고 내려오니 마음이 가벼웠습니다. 막 산에서 내려오는데,
“아니, 개구리 아냐!”
P목사님은 개구리를 보자 어디서 그런 힘이 솟아났는지 재빠르게 얼른 손으로 잡았습니다. 그러나 개구리를 잡은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는 방으로 개구리를 가지고 들어와 촛불을 켰습니다.
“그래, 이 촛불을 사용하는 거야.”
그는 앞뒤 가리지 않고 촛불에 개구리를 구워서 먹었습니다. 40일 금식기도를 마치고 바로 개구리를 구워 먹다니! 이것이 탈이 되어 그만 그는 죽고 말았으니 통탄할 일이 아닙니까! 먹는 게 뭔데. 그 어려운 고비 고비를 잘 넘기며 40일 금식 기도까지 잘 마쳤는데, P목사님이 개구리 때문에 시험에 빠지다니!]
40일 금식기도를 마친 것은 기적이나 아직 건강치 못한 심령이 되었으니 시험을 이기지 못하고 만 것입니다. 건강한 교회, 건강한 심령이 되는 게 너무도 중요함을 다시 한 번 강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지난 두 주를 통해 건강한 교회의 다섯 가지 요소를 살펴보았습니다. 첫째, 가르침을 받는 성도, 배우려는 성도들이 모인 교회가 건강한 교회라고 했습니다. 둘째, 사랑의 교제, 사랑의 사귐이 있는 교회가 건강한 교회라고 했습니다. 셋째, 사랑의 식사를 나누는 교회가 건강한 교회라고 했습니다. 넷째,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는 교회가 건강한 교회라고 했습니다. 다섯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두려움을 나타내는 교회가 건강한 교회라고 했습니다. 오늘은 여섯째로 기사와 표적이 주의 종과 성도들을 통해 나타나는 교회가 건강한 교회임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하나님이 교회를 통해 능력을 나타내시는 것을 가리켜 ‘기사와 표적’이라고 합니다.
첫째, ‘기사’란 어떤 일에 의해 생겨난 사건을 본 사람의 놀라움이요, 이제 그 사람에게 보여질 영적인 사건에 대하여, 눈을 뜨게 하는 것(행14:8-18)을 말합니다(R.C. 트렌치(Trench, Richard chenesix, 1807-86 영국의 신약학자).
출애굽기에는 출애굽을 위한 열 가지 재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피의 재앙, 개구리 재앙, 이 재앙, 파리 재앙, 악질 재앙, 독종 재앙, 우박 재앙, 메뚜기 재앙, 흑암 재앙, 장자를 치는 재앙 말입니다(출7:20-12:36).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재앙 사건을 똑똑히 목격했습니다. 하나님은 왜 열 가지 재앙을 일으켜서 애굽 사람들을 벌하셨습니까? 이스라엘 사람보다 애굽 사람이 더 악해서 그렇습니까? 이스라엘은 애굽보다 나은 게 없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이스라엘은 목이 곧은 패역한 백성입니다. 출애굽기 32장 9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곧은 백성이로다(참고 ; 출33:3,5, 34:9, 신9:6,13, 31:27).” 목이 곧은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출애굽 열 가지 재앙 사건을 목격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만이 온 세계의 유일한 신이심을 깨닫게 하시려는 목적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이스라엘만은 아니지요. 온 세계 사람 모두에게 이 사실을 선포하시기 위해서 먼저 이스라엘에게 이 사건을 목격하게 하신 것뿐이지요. 그런데 이상합니다. 이스라엘은 이 사건을 목격하기만 했는데도 애굽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왜 그럴까요?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사람들이 알았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기사가 일어나면 성도들이 그 사건을 봅니다. 그 사건은 성도들로 하여금 믿음에 불을 붙이도록 작용합니다. 연약했던 성도들도 그 기사를 통해 힘을 얻습니다. 예수님을 똑바로 못 믿었던 성도들도 예수님을 바르게 믿도록 동기부여를 받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 교회에서 일어난 기사를 통하여 성도들의 삶이 달라진 것을 목격합니다. 그리하여 교회는 계속 그런 기사를 접하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은 놀랍니다. 두려워합니다. 교회를 핍박하고 욕하고 조롱했던 사람들은 매우 크게 놀라게 됩니다. 그런 사람들은 엄청난 두려움에 휩싸여 감당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위엄이 그 사람에게 임하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35장에서도 이런 모습이 나타났습니다. 야곱의 가정에 큰 불행이 찾아왔습니다. 그 불행은 야곱과 그의 가족을 당황하게 하였습니다. 하지만 야곱의 두 아들 시므온과 레위가 여호와의 언약을 이용하여 세겜 성 사람들을 다 죽이고 노략합니다. 이때 두려워 떠는 야곱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야곱과 그의 가족에게 영적인 부흥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목적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영적부흥을 위하여 몸을 정결케 하고 의복을 갈아 입고 우상을 버린 후에 벧엘로 올라가라고 하셨습니다. 야곱과 그의 가족들은 한 가지로 순종하였습니다. 그리고 벧엘로 무리지어 올라갑니다. 놀라운 사실은 아무도 야곱의 가족을 향해 공격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여호와의 두려움이 그들에게 임하였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35장 5절입니다. “그들이 발행하였으나 하나님이 그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신 고로 야곱과 아들을 추격하는 자가 없었더라.”
사도 바울도 그랬습니다. 그는 바울 되기 이전에 사울이었습니다. 사울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을 잡아다 감옥에 가두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던 그가 스데반 집사님이 순교하는 사건을 접하고는 완전히 큰 충격에 휩싸였습니다.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일어난 스데반 순교 사건, 천사의 얼굴처럼 변하며 자기를 돌로 친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기도하는 스데반 집사님을 보면서 사울은 엄청난 두려움에 휩싸였습니다. 결국 그는 율법주의와 세상 권력에 떠밀려 다메섹으로 가다가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사울은 변하여 바울이 되었습니다. 그 역시 복음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생명을 바치는 위대한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충주동광교회도 그런 사건이 초기에 있었습니다. 교회가 설립되는 것을 반대하던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매일같이 나와 교회 창문에다 ‘교회입주 결사’라는 글자를 붙이고는 시위를 했습니다. 저의 멱살을 잡고 욕을 해댔습니다. 그렇게 8개월을 괴롭혔습니다. 저는 힘들고 슬펐지만 대항하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교통정리를 하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때가 되니 하나님은 핍박자들의 가정에 기사를 일으키셨습니다. 사고가 터지고 가족이 와해되었습니다. 병들어 고통을 당하게 되고 이상한 사건이 막 터졌습니다. 여호와의 두려움이 그들에게 임하였습니다. 견딜 수 없었던 그들은 두 손 두 발 다 들고 항복했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에 의해 이 교회는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충주동광교회는 앞으로 든든히 설 것이고 아름답게 성장할 줄 믿습니다.
사람들은 기사를 보면 앞으로 일어날 영적인 사건에 대한 깊은 이해심을 갖게 됩니다. 교회는 기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꼭 나 자신의 체험이 아닐지라도 다른 사람에게 일어나는 영적인 사건들을 접해야 합니다. 교회에서 일어나는 영적인 사건들을 목격해야 합니다. 기사가 일어나는 것을 목격할 때, 성도들은 일치단결합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다. 이런 모습을 보는 세상은 놀라 떨게 됩니다. 주님 앞으로 겸손히 나와 주님을 경배하게 될 줄 믿습니다.
둘째, ‘표적’이란 ‘초자연적인 능력이 밖으로 드러나 진리가 진리 됨을 증거 하는 일’을 말합니다. 표적은 권위를 증명해줍니다. 예수님은 표적을 통해 자신의 권위를 입증하셨습니다.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은 참 진리시요, 참 기쁨, 참 행복의 구주이심을 증거 하신 것입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수 만 명을 먹이십니다. 이는 예수님이 하늘에서 내려오신 산 떡이요, 생명의 떡으로써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여 그 말씀대로 살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됨을 깨닫게 해줍니다.
예수님은 귀신을 좇아내셨습니다. 거라사 지방의 귀신들린 한 형제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붙잡기도 힘들어 쇠고랑을 채웠으나 그것마저 다 끊어버릴 정도로 무시무시하게 귀신의 힘을 받은 형제였습니다. 그 형제는 집을 뛰쳐나와 옷도 입지 않고 무덤 사이에서 지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거라사 지방을 지나실 때 그 형제는 예수님 앞에 나와 무릎을 꿇고 큰 소리로 말합니다. 귀신이 말하는 겁니다. “가로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당신께 구하노니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눅8:28).” 귀신이 이렇게 말한 것은 예수님이 벌써 더러운 귀신을 향해 “이 사람에게서 나오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롬8:29). 이 귀신은 군대귀신이었습니다. 군대라는 말은 많다는 것이요, 무리 지어 들어갔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앞에서 그들은 허깨비였습니다. 귀신은 예수님께 애걸복걸합니다. “무저갱으로 들어가게 하지 마시고 돼지에게로 들어가게 해 달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이 허락하셨더니 무려 2,000마리나 되는 돼지에게 들어가자 돼지들이 꿀꿀꿀하며 비탈길을 내리달리더니 호수에 들어가 모두 빠져 죽고 말았습니다(눅8:31,32). 이외에도 예수님은 귀먹고 벙어리 되게 하는 귀신을 쫓아내십니다. 나아가서는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쫓아내십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세상 임금인 사단을 멸하려고 오셨던 것입니다(막1:24; 눅4:34). 예수님은 귀신을 쫓아내심으로써 예수님만이 만왕의 왕이시요, 만주의 주이심을 확실하게 증거해주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질병을 치료해주셨습니다. 오른 손 마른 사람을 치료하셨습니다. 각종 다양한 질병을 모두 치료해주셨습니다. 문둥병자들을 치료해주셨습니다. 특히 네 명의 친구에게 들려와 지붕을 뚫고 내려진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신 후에 말 많은 유대인들 앞에서 “네 자리를 들고 일어나 걸어가라.”하심으로써 건강케 하신 사건은 두고두고 회자되는 감동적인 표적입니다. 예수님만이 구세주임을, 전능하신 하나님임을 보여주신 표적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죽은 자를 살려주셨습니다. 죽은 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다시 살리셨습니다. 12살 소녀가 죽은 것을 보시고 ‘잔다.’하시더니 ‘달리다굼’하시니 깨어나 사람들이 놀랐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표적을 통하여 예수님만이 생명의 주이심을 나타내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자연을 제어하셨습니다. 풍랑이는 바다를 잔잔하게 하셨습니다. 물 위를 친히 걸어오셨습니다. 이 엄청난 표적을 일으키신 것은 예수님은 창조주이심을 증거 하시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일으키신 다양한 표적을 보며 예수님을 이해하고 굳게 믿는 수단으로 삼아야지, 표적 자체가 신앙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표적 자체가 예수님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몰랐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표적 일으키는 것이 보기 좋아, “우리에게 하늘로서 내려오는 표적을 보여 달라.”고 부탁하곤 했습니다(마12:38). 이 때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으리라(마12:39,40).” 이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모든 표적들 중의 가장 큰 표적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 승천이라는 겁니다. 이보다 더 큰 표적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 표적이야말로 예수님을 가장 잘 증거 하는 표적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사람 사랑하심의 증거가 확실하게 드러난 표적이라는 겁니다. 로마서 5장 8절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확실한 증거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볼 때마다 하나님의 사랑을 재삼 깨닫습니다.
우리는 표적을 따라다니는 어리석은 성도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마24:24).” 그렇습니다. 표적과 기사는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도 일으킬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 표적과 기사를 통해 주님을 나타내느냐? 아니면 주님을 나타내는 척하며 자기를 드러내느냐의 차이입니다.
교회가 표적과 기사가 나타나야 함에도 불구하고 조심할 것은 표적과 기사만을 선호하는 삶은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리새인들처럼 표적과 기사가 나타나지 않으면 도무지 믿지 않는다는 예수님의 책망을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진정한 표적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사람 되어 이 땅에 오셨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나 같은 죄인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어주셨다는 겁니다. 그리고 사흘 만에 부활하시고 하늘나라로 승천하셨다는 겁니다. 이보다 더 큰 표적은 없습니다.
표적과 기사의 목적은 오직 예수님을 나타내기 위한 것입니다. 교회에서 일어나는 표적과 기사도 예수님을 드러냅니다. 그럴 때 성도들은 예수님을 확실하게 알고 믿고 따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생각과 기대감에 부응하는 표적과 기사는 안 됩니다. 인간은 언제나 육적인 삶에 초점을 맞추어 표적과 기사가 일어나기를 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로또 복권에 당첨되는 일, 싼 값에 산 땅이 급작스럽게 올라가 돈 방석에 앉는 일, 사놓은 집이 천정부지의 값으로 뛰어 오르는 일, 노력도 안 했는데 대학에 합격하는 일 등, 인간의 얄팍한 육체적 욕망이 채워지는 일이 표적, 기사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보여주신 표적과 기사가 비록 인간의 약한 부분을 강하게 하시고, 죽은 자가 다시 살리시며, 경제적인 풍요함이 임하도록 하셨다고 해도, 그것은 하나님의 전능하심,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을 확실하게 증거 하는 것으로만 사용되었다는 점을 주시해야 합니다.
저는 오늘, 지난주에 이어 건강한 교회의 특성을 말씀 드렸습니다. 지난 주에 저는, 두려움을 주는 교회가 건강한 교회라고 했습니다. 신자든, 불신자든 교회에 왔을 때, 말씀을 들을 때, 기도할 때 경건한 두려움을 느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너무 가볍게 행동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기도 후에도 너무 쉽게 입을 열어버립니다. 하나님과 대면하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과 대면한 사람은 쉽게 입을 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경건한 능력을 체험한 사람은 입을 닫고 그 분이 주신 말씀을 묵상하거나 계속 기도할 뿐입니다. 우리는 예배 후에 금방 세상에 속한 사람으로 돌아갑니다. 예배 중에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예배의 여운 때문에 가볍게 세상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자신의 삶에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파악합니다. 고칩니다. 변화됩니다. 바꾸어 새롭게 살아가는 삶을 과감하게 선택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신중함이 없습니다. 예배 시간에도 쉽게 장난칩니다. 가볍게 농담을 나눕니다. 헛된 말로 예배의 시간을 망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은 설교자도 공범입니다. 설교자가 여호와를 향한 경외심으로 말씀을 전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경외심은 의식적으로 꾸며서 되는 일은 물론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이 임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서 활동하셔야 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거룩하고 순결하려고 노력해도 그것은 노력일 뿐 허사로 끝납니다.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임재하셔야 합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완전히 정복하셔야 합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하나님 앞에 온전히 세우셔야 합니다. 성령께서 그렇게 하시기 전까지,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서 하나님께 닿지 않는 예배로 우리 자신을 세뇌할 뿐입니다. 그럴지라도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긍휼을 베풀어달라고 기도하며 예배드려야 합니다. 성령으로 우리를 지배하시고 정복하셔서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세우실 것을 소망하면서 예배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몸부림에 감동하셔서 언제 성령으로 우리를 충만하게 하실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감동되어 위대한 예배를 드리게 될 날이 언제나 임하게 될까요? 정말 깊은 감동으로 여호와의 위대하심을 찬양할 날이 언제나 임하게 될까요? 주여! 우리의 목마름을 해갈하시러 하늘을 가르시고 이 곳에 내려 오시사 여호와만이 하나님이심을 보여 주옵소서! 주여! 주님의 거룩함을 우리에게 드러내시고 우리로 세속적인 성품을 제거하고 주께 엎드려 주의 은혜를 구걸하는 거룩한 걸인이 되게 하옵소서.
둘째, 기사와 표적이 일어나는 교회가 건강한 교회라고 했습니다. 기사는 앞으로 있을 영적인 일을 깨닫도록 문을 열어주는 것과 같습니다. 문에 들어선 성도는 하나님의 사건을 봅니다. 비록 자신에게 직접적으로 일어난 것은 아닙니다. 타인에게 일어난 사건을 봅니다. 세상에 일어난 하나님의 사건을 봅니다. 이 사건이 기사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 우리는 비로소 영안이 열립니다. 영안이 열리면 깨달음이 옵니다. 깨달음을 통해 영적인 세계 속으로 들어갑니다. 이 영적인 세계 안에서 표적을 봅니다. 이 표적을 통해 예수님을 발견합니다. 진리 되신 예수님, 말씀으로 존재하시며, 창조를 함께 이루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날 대신하여 죽으셨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표적 중의 표적, 우주 최고의 표적을 봅니다. 이 표적을 통해 우리는 죽음을 경험합니다. 아, 우리가 살아있지 않구나! 우리가 주님과 함께 죽어 장사지낸바 되었구나! 오, 이런 놀라운 일이! 예전엔 주님의 십자가가 우리와 상관없는 것, 무익하게 보였는데, 지금은 주님의 십자가만이 우리의 자랑이요, 우리의 지혜요, 우리의 능력이라고 깨닫습니다. 이 지점까지 오면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세상에 표적을 드러냅니다.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일어났던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기사와 표적을 일으켜 세상에다 예수님을 전하게 하십니다. 이런 교회가 건강한 교회입니다.
그렇다면 건강한 교회의 일원이 되시려면 첫째,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두려움이 세상에 임하도록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둘째, 우리를 통해 기사와 표적이 일어나도록 해야 합니다. 이 두 가지 특성이 우리 힘으로 되는 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이끌어 주셔야 가능한 것입니다. 단지 우리는 거룩함과 순결함으로 우리 자신을 하나님 앞에다 세울 뿐입니다. 주여, 당신의 백성들이 거룩함과 순결함으로 채우고자 하는 열망으로 가득하게 하소서!
건강한 교회-4
“믿는 사람이 다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행2:44)
7. 믿는 사람이 다 함께 하는 교회가 건강한 교회입니다.
본문 44절에는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라고 했습니다. 46절에도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라고 했습니다. 함께 한다는 것은 참 좋은 일입니다. 홀로 있어 고독한 것은 기도하거나 특별한 경건훈련 외에는 좋지 않습니다. 전도서 4장 9절로 12절에는, “9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저희가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10 혹시 저희가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11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12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독불장군(獨不將軍)은 좋지 않다는 뜻입니다. 독불장군은 자기 밖에 모릅니다. 개인주의입니다. 이기주의를 나타내는 용어이며 자기 의견만 주장함으로써 공동체의 결속을 깨는 것을 의미합니다.
건강한 교회는 믿는 사람이 다 함께 하는 교회입니다. 다 함께 하려면 모여야 합니다. 44절에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라고 했습니다. 믿는 성도들이 다 함께 모이려면 첫째, 믿음이 같아야 합니다. 하나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한 믿음이어야 합니다. 둘째, 마음이 같아야 합니다. 한 마음 한 뜻이라는 말이 그런 뜻입니다. 마음이 모아지지 않는 사람들은 모이면 싸웁니다. 마음이 같아야 한 마음으로 모일 수 있습니다. 빌립보서 2장 5절에는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라고 했습니다. 한 마음 한 뜻이 되려면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 되면 함께 모이는 것 자체가 큰 즐거움이 됩니다.
모이는 것을 잘 하는 교회는 부흥, 성장하게 되어 있습니다. 모이자고 해도 안 모이는 것은 단합이 안 되는 교회입니다. 지도자를 중심으로 결속되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병든 교회의 전형입니다. 세상에는 모이지 못하게 하는 요소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이유와 변명, 핑계거리들이 많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10장 25절은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말세가 되면 마귀들은 ‘모이지 말자. 바쁘지 않느냐? 기도, 예배, 전도, 목장 모임은 바쁜 일이 없을 때 하자.’라고 속삭입니다. 거기에 속아 넘어가면 안 됩니다. 세상 모임도 자꾸 모여 결속을 다집니다. 마귀에게 넘어가 악한 일을 하는 사람들 보십시오. 얼마나 자주 모이는가? 그런데 경건하고 거룩한 일을 위해 모이는 성도들의 모임은 얼마나 자주 모여야 하겠습니까?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모이기를 폐하자고 한다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들이 그런다는 겁니다. 그것을 가리켜 히브리서에는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아예 안 모이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교회의 경건한 모임에 모이지 않으려는 저들의 행동은 아예 습관처럼 굳어져 모이지 않는 것을 당연히 여깁니다. 이 정도가 되면 심각한 영적 질병이 들어 버린 것입니다. 학교를 보십시오. 학생들이 결석하는 것을 용인합니까? 그런 학생에게 좋은 성적을 주겠습니까? 그런 학생들이 좋은 성적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공부에 도전을 받겠습니까? 못하더라도 일찍 학교에 나가서 출석하고 공부하려는 노력이 있을 때 공부 잘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지지 않겠습니까? 회사를 보십시오. 직원들이 출석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습니까? 회사에 출근도 안 하는 데 월급 주는 회사 보셨습니까? 그런 회사 있으면 저에게 소개 좀 해주십시오. 채용되기만 하면 복음사역을 위해서 매월 쓸 수 있지 않겠습니까? 여러분도 그런 회사에 뽑히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일터에 나가지 않아도 꼬박꼬박 월급이 나오니 말입니다. 그러나 그런 회사가 있습니까? 그런 회사가 있다면 미친 회사지요. 회사나 직장은 여러분의 출근부를 확인하지 않겠습니까? 하물며 하나님께 예배하고 기도하는 일이 회사나 직장보다 못합니까? 오히려 하나님께 예배하고 기도하는 일이 세상일에 앞서서 먼저 해야할 우선적인 일이 아닙니까? 놀라운 사실은 예배나 기도하는 일을 세상 일을 다한 후에 시간 나면 하는 것으로 생각하기에 예배드리는 일을 쉽게 빼먹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모든 일에 영적인 헌신을 우선으로 두어 보십시오. 얼마나 여러분의 육체의 일이 쉽게 풀려가는 지를 경험하시게 될 줄 믿습니다. 영적인 일을 뒤로 미루고 육체의 일을 먼저 풀려할 때마다 여러분은 절망스러울 때가 많을 것입니다.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갓난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벧전2:2).”고 했습니다. 갓난아이들에게 있어서 최고의 농사는 울어 젖을 얻어먹는 것입니다. 젖이 갓난아이에게는 생명입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최고의 농사는 예배와 기도입니다. 성도는 예배와 기도를 통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얻어먹습니다. 성도라는 이름은 가졌는데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먹지 못해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지 못한다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취한다 해도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성도라면 마땅히 예배와 기도 모임에 자꾸 모이는 습관을 길러야 합니다.
충주에서 충주동광교회를 섬긴 지 10년이 되어 갑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늘 송구스러운 것이 뭔지 아십니까? 목숨을 바쳐 주님을 주님 되게 섬기는 분들을 많이 양육하지 못했다는 겁니다. 목숨을 바치는 것은 고사하고 정말 예배 하나라도 똑바로 드리고 하나님의 것인 십일조 예물을 제대로 바치게 하는 것 하나 훈련시키지 못한 것에 대해 깊이 회개합니다.
이상종 목사의 소원이 무엇인지 여러분은 아십니까? 목사의 소망에는 관심이 없으십니까? 그러면 안 됩니다. 제가 여러분에 대해 관심을 위해 노심초사 기도하는 것처럼 여러분도 아시고 함께 기도해야 합니다. 저의 소망이 무엇일까요? 큰 교회를 지어서 봉헌하는 것입니까? 그런 꿈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지요. 그러나 그것이 저의 최고 소망은 아닙니다. 성도들이 많이 모이는 것일까요? 그런 꿈도 늘 가지고 있지요. 그러나 그 역시 최고 소망은 아닙니다. 저의 가장 큰 소망은 물론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모든 목회의 최우선에 하나님의 영광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서는 생명을 바쳐 하나님을 섬길만한 성도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을 정도의 믿음을 소유하게 할 수 있다면 저는 너무도 감격하여 기쁨의 눈물, 감사의 눈물을 흘릴 것입니다. 물론 그런 믿음도 하나님이 주셔야 할 선물이라지만 성령의 도움을 통해 우리에게 임한답니다. 성령님은 목사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 속에 역사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그런 삶을 살도록 깨닫게 하시지요. 그런데 우리 교회 성도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소망, 지옥에 대한 두려움, 하나님의 불 심판에 대해 무지, 무감각합니다. 왜 이렇게 안일하십니까? 하나님의 심판이 바로 코앞에 닥쳐야 두려워 떨며 주께 무릎을 꿇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이미 때는 늦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구원의 확신이 없어도 즐겁게 살아갈 수 있습니까? 그럴 수 있다면 그는 아직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는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적어도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우리 자신의 문제를 파악하고, 하나님께 하소연하며 나아갈 수 있는 간절함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할 수 있도록 돕는 시간이 언제입니까? 바로 예배의 시간이 아닙니까? 기도의 시간이 아닙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은 지금도 예배하는 자, 기도하는 자를 찾으신다고 하셨습니다(요4:23). 예수님은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4:24).”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여러분을 찾아 복을 주시려고 해도 여러분을 예배의 시간에, 기도의 시간에 찾을 수 없으니 어떻게 복을 주시겠습니까?
건강한 교회는 예배 시간에, 기도 시간에 자꾸 모여드는 교회입니다. 제가 능력 없는 목회자라는 사실을 여러분이 제 설교를 통해 변화되지 않을 때 보면 압니다. 성도들의 변화되지 않는 모습을 보는 것은 너무도 괴로운 일입니다. 너무나 가슴 아픈 일입니다. 그렇다고 금방 금방 변화되는 사람이 어디 그렇게 많습니까? 변화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러기에 참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모든 일에는 전문가가 있기 마련입니다. 페인트하면 우리 중에 이환길 성도님을 따라갈 분들이 없을 줄 압니다. 따라서 페인트칠을 할 때는 이환길 성도님이 시키는 대로 해야 합니다. 만약 페인트칠하러 처음 간사람, 혹은 함께 일한 지 오래되었다고 해도 이환길 성도님의 말을 안 듣고 제 맘대로 하면 이환길 성도님은 화를 내실 겁니다. 이환길 성도님은 페인트칠하는 데는 전문가이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세금 업무에 대한 일을 한다고 하면 우리 중에 홍순진 집사님을 따라 갈 수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세무에 관한 일에 궁금증이 있다면 홍순진 집사님에게 여쭈어 봐야 합니다. 만약 우리 맘대로 세무 관련 서류를 만들어 가면 100% 퇴짜를 맞게 될 것입니다. 세무 업무에 대해서는 홍순진 집사님이 전문가이기 때문입니다. 사과를 재배하는 일에는 우리 중에 황대섭 집사님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황대섭집사님은 긴 세월 동안 사과 농사를 지으셔서 사과 재배의 전문가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과수원에 가셔서 혹 일을 도와주신다고 하신다면 황대섭 집사님이 시키는 대로 해야 합니다. 만약 황대섭 집사님에게 묻지도 않고 자기 마음대로 나무를 전지한다든지, 과일을 솎아준다든지 하면 황대섭 집사님이 크게 화를 내실 겁니다. 왜냐? 황대섭 집사님은 사과 재배의 전문가이시기 때문에 황대섭 집사님의 말씀을 잘 듣고 그대로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영적인 일, 교회의 일, 구원 받는 일에 관한 전문가는 누굽니까? 예배, 기도, 전도에 관한 전문가는 누굽니까? 성경의 전문가는 누굽니까? 바로 목사입니다. 왜 페인트, 세무 업무, 사과 재배 등의 특별한 세상 업무에 대해서는 전문성을 인정하여 전문가의 말을 들으면서도 영적인 일의 전문가의 말은 안 들으시는 겁니까? 왜 영적인 일을 저에게 상담치 않고 여러분의 소견에 옳은 대로 하십니까? 그러니까 틀리는 겁니다. 주의 종과 틀리니 하나님의 생각과도 틀리게 되는 겁니다. 보이는 목사의 마음에도 들지 않는 생각을 하나님께서 옳다고 하시겠습니까? 목회자는 하나님이 세워서 하나님의 법도를 가르치라고 한 특별한 전문가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하여 권면하는 말씀을 잘 들으시면 탈 날 게 없는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는 성도들은 다 함께 있어야 합니다. 자주 그리해야 합니다. 예배 모임, 기도 모임, 목장 모임에 함께 있어야 합니다. 예배는 최소한 주일 낮, 주일 저녁, 수요 예배는 꼭 드려야 합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예배를 먼저 드린다는 생각을 가지신다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도우실 줄 믿습니다.
건강한 교회-5
“믿는 사람이 다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행2:44)
8. 건강한 교회는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通用)합니다.
사도행전 4장 32절에는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通用)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고 했습니다. ‘통용(通用)한다.’는 말은 ‘두루(빠짐없이 골고루) 쓰인다.’는 말입니다.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려면 첫째,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야” 합니다. 성도들이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지 않는다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완전히 성도들 모두가 가족처럼 되어야 합니다. 성도들 개개인이 가족이라는 개념을 상실한다면 불가능합니다. 가정에서 부모 자식들이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가정을 이루었듯이 믿는 무리가 성령 안에서 가족을 이루어 하늘나라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물건을 서로 통용할 수 있습니다. 둘째, “제 제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고 하는 이가 하나도 없어야” 합니다. 자기가 가진 것이라고 자기 제물이라고 주장하는 성도가 있다면 어떻게 그 물건을 다른 사람이 사용할 수 있겠습니까? 내 것, 네 것 없이 우리들의 것이라는 의식이 없다면 어떻게 그렇게 하겠습니까? 따라서 성령의 감동되어 은혜 받으면 이론만은 완전히 공산주의처럼 되는 것입니다. 공산주의는 사유재산 인정치 않고 공동의 소유로 하여 모두가 잘 먹고 잘 살자는 캐치프레이즈를 내 걸었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지금 지구상에 존재하는 공산주의가 정말 내 것, 네 것 없이 우리 모두의 것으로 인민들 모두가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했습니까?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입니다. 현 지구상에 시행되고 있는 공산주의는 지배층 배불려주는 제도입니다. 그 중에도 북한 공산주의는 가장 악랄합니다. 북한 공산주의는 오직 김일성만을 위한 공산주의였는데, 김일성이 죽고 나서도 ‘수령형상창조, 주체사상’ 등을 학습하여 지금도 김일성 우상 노름에 미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를 이어 충성하자!’는 구호를 내걸고 김정일에게 모든 권력을 승계하였던 것입니다. 공산주의 이론을 실현하자면 그렇게 하는 게 아닙니다. 김일성도, 김정일도, 북한의 공산당 간부들도 모두 자기의 사유 재산을 내 놓아 북한 인민들을 굶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백성들이 굶는 데 그들의 사유 재산이 다 뭐하는 겁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건강한 교회란 공산주의를 실현하자는 뜻이 아닙니다. 건강한 교회란 자기 것을 기꺼이 내 놓아 공동체에 소속된 무리들과 함께 나눈다는 겁니다. ‘나눔의 원리’입니다.
지난 번 중고등부 수련회를 영풍교회와 함께 했다고 했습니다. 영풍교회는 먹는 것, 마시는 것, 간식거리를 풍성하게 싸가지고 왔습니다. 영풍교회는 나누는 것을 기쁨으로 아는 교회였습니다. 성도들은 기꺼이 우리 학생들을 위해 봉사와 섬김으로 주님의 사랑을 보여주었습니다. 우리 학생들은 배워야 합니다. 우리 성도들도 배워야 합니다. 영풍교회는 기꺼이 자기 것을 내놓아 충주동광교회 학생들을 섬겼습니다. 물론 저는 말씀으로 섬겼습니다. 그래도 고맙고 송구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나누는 교회 앞에 나누지 못한 교회는 고개를 숙여야 합니다. 감사해야 합니다. 예루살렘교회가 크고 사람이 많다고 하지만 마게도냐의 첫 성 빌립보 교회에 늘 머리를 숙여야 했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어려운 중에서도 예루살렘 교회를 섬겼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흉년이 들어 어려움을 겪을 때 기꺼이 자기들의 소유를 떼어 나누어 줄 줄 알았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교회입니까? 그러므로 예루살렘 교회는 빌립보 교회에 감사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도 늘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감사를 표했습니다. 왜요? 빌립보 교회는 사도 바울의 선교활동에 많은 비용을 감당하였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는 말합니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15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16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17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2:14-17).” 그렇습니다. 건강한 교회는 나누어주는 교회입니다. 제 것만 주장하고 자기 밖에 모르는 사람들로 구성된 교회는 병든 교회입니다. 어찌하든지 믿는 형제를 위해 자기 것을 기꺼이 풀어 놓을 수 있는 사람들로 모인 교회가 건강한 교회입니다. 다음 주에는 수재의연금을 별도로 내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마침 총회에서 교단 차원에서 수재를 당한 교회와 성도들을 돕기로 결정하고 공문이 내려왔습니다. 우리 교회도 동참했으면 합니다. 한 주간 기도하시고 정성껏 준비하여 기쁜 마음으로 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결코 억지로나 인색함으로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출25:2; 고후9:7).
건강한 교회는 결국 연합하는 교회입니다.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교회가 건강한 교회입니다(롬8:28). 합력할 때 어떤 병든 사람도 치료됩니다. 어떤 무기력한 사람도 힘을 얻습니다. 어떤 절망적인 사람도 소망 중에 거하게 될 줄 믿습니다.
“호머와 밀턴은 눈먼 시인이었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곱사등이었습니다. 세익스피어는 절뚝발이였으며, 토마스 에디슨은 8살 때 청각을 잃은 장애인이었습니다. 스티븐슨은 각혈과 천식으로 죽음의 위기를 몇 번씩 넘기는 가운데 ‘보물섬, 지킬 박사와 하이든’이란 명작을 남겼습니다.” 모두가 그들 곁에는 그들을 이해해주고 격려해주고 함께 사랑을 나눈 가족과 믿음의 인물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건강하고 잘 생기고 많이 배운 사람일지라도 연합하는 사람이 없고 계속 분리만 시키는 사람만 그 곁에 있다면 인생의 성공을 거두기는커녕 죽을 정도로 고통만 가중될 것입니다.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꼭 닫혀 있는데도 조갯살이 없고 조개껍질만 남은 조개를 보신 적이 있습니까? 유심히 조개껍질을 살펴보면 아주 조그만 구멍이 있는데 그 구멍은 쇠고둥이라는 것이 만들어 낸 구멍입니다. 쇠고둥은 조그만 송곳 같은 것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으로 조개껍질에 구멍을 내어 조금씩 아주 조금씩 조갯살을 빨아 먹는다고 합니다.”
우리는 누굽니까? 함께 모여 공동체를 살리고 가정을 살리고 사람을 살리려고 함께 모이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나라 공동체에 협력하지 않아 나도 우리도 모두 죽게 하는 사람입니까? 우리 것을 기꺼이 나누어 어려운 형제, 자매들을 살리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나밖에 몰라 이기주의로, 개인주의로 몰락해가는 사람입니까?
저는 오늘 건강한 교회는 나누는 교회라고 했습니다. 우리 교회가 잘 모이고, 잘 나누는 교회로 자라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건강한 교회-6
“45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46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純全)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47하나님을 찬미하며(행2:45-47a)”
9. 건강한 교회는 가정을 천국으로 만듭니다.
건강에 대한 관심이 날로 더해가고 있습니다. 가는 곳, 머무는 장소마다 건강을 위한 조언이 적힌 글들을 흔하게 볼 수 있습니다. ‘건강한 삶을 위한 십계명’, ‘건강을 위해 꼭 알아야 할 상식’, ‘건강한 체력을 위한 운동법’ 등 건강에 대한 제안들이 너무 많아서 어떤 것을 따라서 내 건강을 지켜야할지 고민스러울 정도입니다.
건강에도 세 종류가 있습니다. 첫째, 영혼건강입니다. 둘째, 마음, 정신의 건강입니다. 셋째, 육체의 건강입니다. 사도 요한도 요한3서 2절에서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간구하노라.”고 하면서, 편지를 받아보는 성도들의 건강을 기원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들도 영혼 건강, 정신 건강, 육체 건강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흔히 우리는 육체의 건강부터 중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체력은 국력’,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는 구호들은 모두 육체의 건강을 앞세운 것들입니다. 육체의 건강이 중요하다는 것은 저 역시 뼈저리게 느낍니다. 새벽 기도를 끝내고 아침 운동을 나가보면 수많은 사람들이 걷기, 달리기, 체조 등을 하는 것을 봅니다. 모두 육체의 건강을 지킬 때 마음의 건강도 찾아온다고 믿기에 육체의 건강을 돌보려고 애쓰는 모습입니다.
하지만 육체가 건강하다고 해서 꼭 정신이 건강한 것은 아닙니다. 육체가 건강해도 정신에 문제가 있는 사람들은 너무도 많습니다. 건강한 육체를 가지고도 범죄하고, 게으름을 피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건강한 육체를 가지고도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괴로움을 주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렇게 보니 건강한 정신을 갖기 위해서는 반드시 육체의 건강이 있어야 한다는 주장은 모순이 있습니다. 물론 건강한 육체를 가지는 게 건강한 정신에 도움을 주겠지요. 하지만 건강한 육체를 가졌다고 해도 건강한 정신이 아닐 수도 있기에 필요충분조건은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거꾸로 생각해야 합니다. 건강한 육체를 가지려면 건강한 정신을 가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건강한 정신을 가지려면 건강한 영혼을 가져야 합니다. 영혼은 정신을 지배하고, 정신은 육체를 지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건강을 지키는 순서를 영혼, 정신(마음) 그리고 육체로 해야 정상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죄성을 물려받았습니다. 죄성은 우리로 하여금 영혼 건강을 위해 먼저 뛰는 일을 어렵게 하였습니다. 되려 거꾸로 육체의 건강을 위하여 먼저 노력한 다음, 정신 건강을 위해 힘씁니다. 사람들은 영혼 건강은 우습게 여깁니다. 영혼 건강은 갖추어져도 그만, 안 갖추어져도 그만, 뭐 그런 정도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영혼 건강이 없이는 정신 건강도 미완성, 육체의 건강도 미완성이란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정상적인 건강 순서는 영혼 건강, 정신 건강, 육체 건강입니다. 이 영혼 건강을 위해서 사도행전은 우리에게 귀한 가르침을 계속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의 건강을 통한 개인의 건강으로의 적용이었습니다.
우리가 이제까지 살펴본 바로는 ‘첫째, 배우려는 성도가 건강한 교회를 이룬다. 둘째, 사랑의 교제가 건강한 교회를 이룬다. 셋째, 사랑의 식사가 건강한 교회를 이룬다. 넷째, 기도하기를 전혀 힘쓸 때 건강한 교회를 이룬다. 다섯째,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삶이 건강한 교회를 이룬다. 여섯째,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날 때 건강한 교회를 이룬다. 일곱째, 성도들이 함께 모일 때 건강한 교회를 이룬다. 여덟째, 나눔의 원리를 실천할 때 건강한 교회를 이룬다.’는 것이었습니다. 여덟째의 요건을 좀 더 강화시키는 말씀이, 45절에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입니다. 자기 재산과 소유를 팔아서 각 사람이 필요한 대로 나누어 주는 것처럼, 나눔의 원리를 확실히 실천하는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교회가 교회다우려면 나눔의 원리가 실천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또한 46절의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란 말씀은 일곱째의 요건을 강화시킵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란 말씀과 “힘쓰고”란 말씀은 “성전에 모이기”란 말을 잘 받쳐주는 구절입니다. 건강한 성도는 ‘날마다 마음을 같이합니다, 모이는 일에 힘씁니다.’
그리고 나서 건강한 교회의 아홉 번째 요건인 ‘가정 천국 만들기’입니다. 본문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건강한 영혼, 건강한 정신, 건강한 육체는 가정이 천국이 될 때 이루어집니다. 가정이 병들면 영혼도, 정신도, 육체도 망가지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은 밖에 나가서 잘 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내 가정의 사람이 소중하다는 것을 알지만 다른 사람에게 대하는 것만큼 친절하지 못합니다. 경솔하게 함부로 행동하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가정을 병들게 하는 지름길입니다. 가정이 천국 되어야 가족 개개인이 건강해지는 겁니다.
성경은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딤전 5:8).”고 했습니다. 자기 가족이 누굽니까? 가정의 구성원입니다. 부모형제자매가 가족입니다. 영적으로는 하늘나라 한 가족을 말합니다. 따라서 가정을 천국으로 만드는 게 너무도 중요한 건강 요건입니다.
저는 가정이 깨진 사람들의 건강이 파괴되는 모습을 많이 봤습니다. 어떤 가정이 있었습니다. 부부는 아들, 딸 낳고 오순도순 잘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남편이 복권에 당첨이 되어 수억의 돈을 받게 되었습니다. 성실하던 남편은 허랑방탕하기 시작했습니다. 용돈을 많이 받은 자녀들도 방탕의 삶을 살았습니다. 아내 역시 품위 유지비로 돈을 펑펑 쓰며 먹을 것 안 먹을 것 막 먹어가며 세월을 파먹었습니다. 그 가정은 2년이 못 되어 파괴되었고, 가족들은 모두 병들어 한 사람씩 죽고 말았습니다.
이런 가정도 있습니다. 딸 넷에 아들 하나의 다복한 가정이었습니다. 부부는 성실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내가 병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병들어 있는 동안 가정에 저축해두었던 모든 돈은 날아가고 말았습니다. 아내가 죽자 딸 넷, 아들 하나를 돌아볼 새 없이 슬픔에 젖어 술로 세월을 보내던 남편도 아내의 뒤를 따라 죽고 말았습니다. 어린 딸 넷과 유아인 아들은 죽은 아버지의 시신 곁에서 떠나지 못한 채 울고 또 울고, 울고 또 울었습니다. 울다 지쳐버린 아이들은 밥 먹을 생각도 못한 채 며칠을 보냈습니다. 그렇게 아이들은 영양실조로 죽어갔습니다. 다행히 동네 사람에게 발견되어 간신히 생명은 건졌지만, 그들 마음에 뿌려진 상처는 일생의 삶을 불행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런 가정도 있습니다. 남편이 아내를 때립니다. 술만 먹고 오면 애들을 괴롭힙니다. 아이들은 어머니가 맞는 광경을 목격하며 컸습니다. 특히 남자 아이들은 아버지가 술 먹고 어머니를 때리며 소리쳤던 말을 녹음기처럼 듣고 자랐습니다. “조선 여자와 조선 명태는 맞아야 돼. 조선 여자와 조선 명태는 맞아야 돼.” 이런 말을 한국 남자들이 했겠습니까? 조선이란 말을 넣은 것으로 보아 일제 36년의 잔재가 아닌가 여겨집니다. 일본인들이 조선의 얼을 빼앗기 위해 퍼뜨린 것이 몇 가지 있다고 합니다. 첫째, 노름, 둘째, 조선 사람을 비하하는 말, 셋째, 조선 여인에 대한 가치를 떨어뜨려 어머니로써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하는 것 등입니다. 물론 이것은 야사입니다. 하지만 신뢰가 가는 것은 오늘날까지 한국 사회를 병들게 하는 나쁜 것은 거의 다 일본을 통해서 들어오고 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일본은 우상국가입니다. 대다수의 놀이, 문화가 우상의 지혜를 받고 만들어 집니다. 고스톱, 빠징꼬, 주점, 놀이문화, 만화, 영화 등에 큰 영향을 주고 있는 게 일본입니다. 예전에는 우리 문화가 일본에 전해졌지만 우리 문화가 국력의 약화 속에서 쇠퇴되어가고 경제력을 앞세운 저급한 문화가 우리 문화를 삼키고 만 겁니다. 이러다 보니 잘 살고 국방력이 뛰어난 나라의 말은 명언이요, 가난하고 국방력이 약한 나라의 말은 별 볼일 없는 말이 되어, 그 국가의 정신문화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 것입니다. 이 가정의 자녀들, 특히 아들도 아버지의 잘못된 언어문화의 영향으로 나중에 커서 또 다시 가정 폭력을 행사는 아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나쁜 가정만 있는 건 아닙니다. 얼마든지 아름답고 행복하며 건강한 가정도 이 땅에 매우 많은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그리스도인의 가정이 그 대표적인 가정일 겁니다. 여러분도 이 사실에 동의하시지요? 왜 이렇게 대답에 자신이 없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의 가정이 불행하다는 말씀입니까? 왜인가요? 이유는 무엇인가요? 무엇이 여러분의 가정을 불행하게 만들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가정을 천국으로 만들기 위해서 다시 업그레이드를 해야 합니다.
오늘 성경은 가정 천국을 만들기 위해서는 몇 가지 해야 할 일이 있다고 제안 합니다.
첫째, 집에서 떡을 떼라는 겁니다. 집에서 떡을 뗀다는 말이 무슨 말일까요?
집에서 밥을 먹으라는 말입니다. 그 밥은 사랑의 식탁을 형성하고 사랑을 제공하는 밥입니다.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라고 하지 않았습니까?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는다는 게 뭡니까? 즐겁게 밥을 먹고, 고통 없이, 마음의 갈등 없이, 복잡한 생각 없이 행복하게 밥을 먹는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혹시 집에서 밥 먹는 게 고통인 분이 계십니까? 그러면 안 됩니다. 집에서 밥 먹는 게 세상에서 가장 맛있어야 합니다. 어떤 부인들은 불평합니다. ‘제 남편은 밖에서는 밥을 안 먹으려고 합니다. 꼭 집에 와서 밥을 먹으려고 하니 아주 죽겠습니다.’ 아니, 그게 왜 죽을 일입니까? 박수쳐 주어야 할 일이지요. 아, 바쁘고 힘든데 밥을 해주려니까 그런다고요? 그 말이 이유가 될 수 있을까요? 남편이 다른 집으로 가지 않고 내 집으로 들어와 내가 해주는 밥을 먹으려 할 때 부인들은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합니다. 그런 남편 귀하게 여기고 사랑해야 합니다. 얼마나 훌륭하십니까?
어떤 여자 집사님이 있었습니다. 그 부인에겐 술주정뱅이 남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부인은 고민이 많습니다. 허구헌날 술을 먹고 집으로 들어오니 말입니다. 싸워도 보고 달래도 보았지만 남편의 술 습관은 고쳐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해도 딱히 응답이 없습니다. 원망이 나오고 불평이 나옵니다. 그래서 이젠 마지막으로 기도해보고 응답이 없으면 헤어지리라 마음을 먹고는 기도를 하는데, 하나님이 마음에 말씀을 들려주시는 겁니다. “여종아, 힘들지?” “네, 힘들어 죽겠어요.” “허허, 뭐 그 정도 가지고 힘들어 죽겠다고 하느냐? 나는 네가 하도 말을 안 들어 십자가에 달려 죽었단다.” “......” 여 집사님은 아무 말도 못하고 죄책감에 눌려 있었습니다. “여종아, 네 남편이 왜 저러는지 아느냐?” “왜 그러는데요?” “너에게 기도 제목을 제공하기 위해서 그러느니라.” “네?” “생각해봐라. 너 예전에 편할 때 기도했느냐?” “아니요.” “여종아, 네 남편은 너를 위해 악한 도구로 쓰임 받고 있느니라.” “아, 그렇군요. 그럼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제부터 남편을 위해 감사하거라.” “감사할 게 있어야 감사하지요?” “감사할 것 많다.” “네?” “첫째, 네 남편이 살아 있다는 것으로 감사해라. 지금 남편 없이 홀로 외롭게 사는 사람이 한 둘이냐? 둘째, 네 남편이 집으로 돌아와 네 손으로 해주는 밥 먹는 것에 감사해라.” 여 집사님은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남편이 퇴근하면 술에 취했든 말든 항상 감사했답니다. 어느 날 남편이 일찍 들어왔습니다. 그리고는 여 집사님을 꼭 껴안아 주더랍니다. 여 집사님은 놀라서 “왜, 왜 이러세요?” “왜 이러긴? 내가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당신처럼 아름다운 마음씨를 가진 여자는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지. 내 이제 당신 속 안 썩이고, 술 끊고, 당신 믿는 하나님 나도 믿고 살아갈게.” 이 날 이 여 집사님은 하나님의 은혜에 천 번 만 번 감사드렸답니다.
가정은 밥을 잘 먹어야 합니다. 가정에서 밥 안 먹으려고 하면 벌써 문제가 생긴 겁니다. 아내는 남편이나 아이들이 가정에서 가장 행복한 밥을 먹을 수 있도록 배려를 해야 합니다. 옛날 우리 어른들은 밥상에서 설교를 많이 했습니다. 잔소리입니다. 밥상에서는 그러면 안 됩니다. 밥상에 둘러앉은 가족들이 웃으면서 밥을 먹고 소화를 잘 시켜 건강을 지킬 수 있도록 좋은 얘기만 해야 합니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제가 어렸을 때 저는 아주 말썽꾼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녁때만 되면 매를 맞을 일이 많이 발생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저를 위한 배려로 식사 전이나 식사 후 30분 정도까지는 일체 매 맞을 일에 대한 언급을 회피하셨던 것입니다. 식사 후에 설거지가 끝나고 다시 방으로 들어오신 어머니께서 회초리를 가지고 저를 앉으라고 하실 때까지 저는 편한 마음으로 밥을 먹고 소화를 시켰던 것입니다. 밥을 안심하고 먹게 해주신 부모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이들이나 가족들이 집에서 밥을 안심하고 먹을 수 있게 해주십시오. “너 이런 이런 일 잘못했지? 얼른 밥 처먹어. 밥 처먹고 매 맞을 줄 알어.” 이래가지고서야 맘 편히 밥 먹겠습니까? 먹는다고 소화가 되겠습니까? 살로 가겠습니까? 물론 스트레스 살로는 가겠지요? 하지만 그런 살은 사람 죽이는 살입니다.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라는 말씀처럼 건강을 위해 집에서 행복하게 밥을 먹게 하는 것이 정말 중요합니다.
둘째, 가정 천국을 만들려면 집에서도 하나님을 찬미해야 합니다. 흔히들 교회에서만 예배드리고 찬송하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왜 그럽니까? 우리는 교회 건물을 본질적인 교회라고 배웠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예수님을 구주로 모신 여러분 자신입니다. 여러분이 계신 곳은 어디나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한 가지 물어 봅시다. 하나님이 제일 먼저 세운교회는 무슨 교회입니까? 가정교회지요? 최초의 가정 교회는 어디에 세워졌습니까? 에덴동산이지요? 아담과 하와가 가정 교회의 최초의 구성원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건물 안에 모여서 공동체를 이룬 것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예배당이란 건물 안에서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 각 가정으로 돌아간 성도들이 어떻게 생활하나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가정에서도 예배자의 삶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가정에서도 말씀 보고, 가정에서도 기도하고, 가정에서도 찬송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합니다.
건강한 성도는 가정에서도 찬미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찬미란 찬송이라는 말과 같은 의미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찬송이란 하나님께 향하여 기쁨이나 감사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요(율로기아), 하나님을 예배하는데 있어서 노래나 음악을 연주하는 일(흄노스, 휨노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데 있어서 노래나 음악을 연주하는 일만 찬미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것은 찬미에 대한 좁은 의미만 알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찬미란 하나님께 향하여 기쁨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찬미란 하나님을 향하여 감사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오늘 저 너무 기뻐요. 저 오늘 기분 좋아요.”라고 표현하는 것도 찬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 고맙습니다.”라고 말하는 것도 찬미하는 겁니다.
집에서 이런 말을 쓴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닙니다. 우리는 가까울수록 기쁨의 표현이나 감사의 표현을 하는 것에 어려움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그런 말을 해주니 난 정말 기분이 좋아! 당신의 그런 행동이 나의 마음을 기쁘게 합니다.”는 표현을 하기가 매우 쑥쓰럽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또한 배우자나 자녀에게 고맙다고, 감사하다고 말하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를 들어주셔서 고맙다고, 감사하다고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 및 군중들과 함께 식사를 나누실 때 하신 ‘축사’는 ‘감사의 기도’입니다(마14:19,막 6:41,눅 9:16,24:30,마 15:36,막 8:6,요 6:11,23). 예수님은 사람들의 건강한 신앙의 삶을 보셨을 때 기꺼이 칭찬과 영광을 주님께 돌렸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하나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시란 사실로 신앙고백을 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 겁니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16:17).”
가정은 감정을 숨기는 곳이 아닙니다. 가정에서는 감정을 표현하도록 도와주십시오. 아이들이 무슨 말을 하려고 할 때 막는 부모가 있습니다. 억압하면서 소리 지르는 부모가 있습니다. 그러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구원받고 예수님의 사람이 되었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아님을 벌써 깨달았을 겁니다. 그러나 많은 분들이 교회를 다니면서도 예수님의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사람, 종교의 사람, 습관적인 신앙 관습에 젖어 사람들이 되었기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싫어하시는 게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고 아무렇게나 행동하기 일쑤인 겁니다. 과연 그런 분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칭해줄 수 있겠습니까?
남편들이여, 아내들이 무슨 말을 하려고 할 때 억압하지 마십시오. 아내들이여, 여러분들의 잔소리로 남편들이 무슨 할 말을 잃어버리게 하거나 식상하게 하여 대화 자체를 거부하게 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가 아닙니다.
사람은 말로써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일을 지배적으로 합니다. 말로 되지 않으면 행동으로 해야 하는 데 그것이 나쁜 감정일 때는 큰 일 납니다. 좋은 감정이든 나쁜 감정이든 말로써 할 수 있도록 여력을 주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가정은 행복을 만들어가게 될 줄 믿습니다.
건강한 교회는 기쁨과 감사의 감정을 가정에서도 잘 표현하도록 교육시킵니다. 우리 충주동광교회는 참 좋은 교회로 하나님이 지금 사용하고 계신 줄 굳게 믿습니다.
건강한 교회-7
“47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2:47)”
10. 건강한 교회는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습니다.
‘칭송(稱頌)’이란 ‘칭찬하여 일컫는 것’입니다. ‘칭찬(稱讚)’이란 ‘좋은 점이나 착하고 훌륭한 일을 높이 평가하는 것’입니다. 칭찬받으려면 ‘좋은 점’이 있어야 합니다. 칭찬받으려면 ‘착하고 훌륭한 일’이 있어야 합니다.
건강한 교회란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그렇다고 칭찬을 받기 위해서 뭔가를 한 것이 아닙니다. 또 칭찬을 받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인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마6:3,4).” 그렇습니다. 성도는 누군가에게 칭찬을 구하려고 선한 일을 하지 않습니다. 누군가가 알아주고 인정해주고 칭찬해주기를 바라서 선한 일을 했다면 그는 이미 성도로서 자격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성도는 오른손이 한 일을 왼 손이 모르게 할 정도로 모든 선한 일을 은밀하게 합니다. 따라서 성도는 모든 사람이 칭찬하는 것을 기뻐하지도 않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저희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눅6:26).” 거짓 선지자들의 특징은 모든 사람에게 칭찬받으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전해주신 심판의 경고 메시지를 전하지 못하고 사람들 듣기 좋은 말만 전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짓 선지자가 모든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을지라도 그는 화가 임한다는 것입니다.
건강한 교회가 칭찬 받는다는 것은 분명 의미가 깊습니다. 예수님 말씀처럼 모든 사람이 그 교회를 칭찬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영적인 일에는 사단의 공격이 있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사단에 속한 세상 사람들은 교회를 향해 공격의 말을 하거나 실제로 공격하기도 합니다. 의롭게 살려는 자에게는 핍박이 있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의롭게 살고자 하는 자에게 칭송을 해줄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무리들, 선지자의 편에 섰던 소수의 무리들, 사도들과 성도들 편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함께 전하던 많은 사람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들은 성령 충만함을 받아 의롭게 살아가는 초대교회 성도들에 대한 칭송을 아끼지 않았을 것입니다.
영적인 사람은 칭찬에 대한 이해도 밖에서 안으로 들여오면 안 됩니다. 영적인 사람은 언제나 모든 것을 안에서 밖으로 나가도록 해야 합니다. 성령 안에서,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야 함은 필수입니다. 성령은 우리 영혼에 먼저 들어오셔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우리 영혼을 구원하시고, 나아가 우리 마음을, 우리 육체를 강건케 하시는 것입니다.
칭찬도 마찬가집니다.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았다”는 말은 먼저 안에서 칭송이 있고 밖으로 나갔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초대교회 성도들,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성도들은 먼저 안에서 칭찬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제일 먼저 성령의 충만함을 통해 자기 자신이 자신을 칭찬하게 되었습니다. 성령 충만함을 받기 전에는 늘 자신에게 불만이 많았습니다. 자신에게 너무 화가 났습니다. 자신의 삶이 너무도 악하였기 때문입니다. 자신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에 호응하지 못하는 삶이었기 때문입니다. 늘 죄책감과 괴로움, 우울증과 중압감으로 인생의 삶을 원망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나니 예전에 자기가 아닙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나니 성령께서 주인이 되어주셔서 자기를 운전해주시는데 적극 순종합니다. 예전에는 자기가 모든 것을 감당하려 했으나 성령님이 내주하셔서 나의 삶을 이끌어 가심으로써 매우 지혜로운 삶을 영위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나는 성령님의 거룩한 뜻을 따라 생활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하는 일마다 만족합니다. 설사 그것이 세상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고 괴롭힘을 받는다 할지라도 의로운 일이기에 만족합니다. 기쁨이 넘칩니다. 그러므로 나는 나에게 말합니다. “이상종목사, 정말 잘했어. 대단해. 성령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따르다니 정말 대견해. 앞으로도 잘할 거야.”하며 칭찬하며 격려하게 됩니다. 질문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에게 만족한 삶을 살아갑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을 칭찬하고 격려하고 기쁨으로 함께 찬송할 수 있습니까?’ 이 질문에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습니까? 칭찬은 언제나 나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이 칭찬해도 나는 아니라고 고개를 설레설레 저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위선적인 선행을 하면서 자신조차 살짝 속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영의 사람이라면 단번에 알아챌 수 있습니다. ‘아, 내가 얼마나 가식적인가? 내가 얼마나 위선적인가? 사람들이 나를 칭찬하지만 정말 마음이 괴롭다! 나는 칭찬받을 사람이 결코 아닌데...’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속아 넘어가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 속에 계신 성령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성령에 감동된 내 양심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순수하게 자신조차 감동시키고 기쁨을 줄 수 있는 삶, 그래서 마음껏 자신을 축복하고 칭찬해줄 수 있는 삶이 될 때 칭찬의 일 단계가 만족된 것입니다.
이 단계는 가족의 칭찬입니다. 가족은 나를 누구보다 잘 압니다. 나를 잘 아는 사람 중에 배우자가 일등입니다. 영적인 배우자의 칭찬을 받는 사람이라면 어디 내 놔도 부끄럽지 않은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속을 수 있습니다. 깜빡 속습니다. 하지만 영적인 배우자 속에 계신 성령께서 분별의 영을 주셔서 분별하게 하실 줄 믿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있습니다. 성도들 중에 교회에서 칭찬 받는 사람일지라도 가족들에게 칭찬받지 못하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목사가 칭찬해주고, 성도가 칭찬해줄지라도 가족들의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게 하는 사람은 칭찬의 두 번째 단계를 빼먹고 사는 사람입니다. 칭찬의 순서에서 두 번째 단계는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가족 전도와 맞물려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은 흔히 말합니다. 내가 영적으로 똑바로 살아가려고 하는 데 마귀가 역사해서 가족들이 나를 핍박하게 한다고. 물론 그럴 수 있습니다.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그런 거룩한 성도들을 많이 봤습니다. 그러나 그런 분은 극소수입니다. 대체적으로 보면 경건한 삶을 빙자한 교만함 때문에 오만불손한 태도를 취하고 살아가는 사람이 부지기수입니다. 이런 성도는 독단적이고, 편협해서 도무지 사람들이 들어올 수 있는 여지를 남겨놓지 않습니다. 자기 말은 다 옳고 가족들은 모두 틀리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생각은 올바른데 다른 가족들은 모두 잘못되었다고 말합니다. 물론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 성도님은 영적인 생각을 하는데 믿지 않는 가족들은 육적인 생각을 하니까요. 하지만 더 깊이 생각해봅시다. 내가 영적인 생각을 하였다면 믿지 않는 가족보다 더 깊은 사랑을 주어야 합니다. 더 넓은 친절함과 인격적인 언어로 가족들의 마음을 감동시켜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큰소리칠 수 있다면 예수 믿지 않는 가족들에게 더 아름다운 삶을 보여주어야 옳지 않겠습니까? 예수 믿지 않는 가족들보다 사랑도 없고, 친절하지도 않고, 규모 있는 생활도 되지 않으면서 예수 믿는다고 의로운 척한다면 가족들의 영혼을 모두 지옥으로 집어넣기에 딱 알맞은 행동입니다. 자, 여러분! 우리는 그렇게 살지 맙시다. 우리의 삶은 내가 칭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은 가족들이 칭찬하고 후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고집스럽게 우리가 예수님을 주장하더라도 반대하였던 가족들이 끝내는 모두 감동되어 예수님을 영접하도록 해야 할 줄 믿습니다.
셋째, 친족, 이웃과 모든 사람들의 칭찬입니다. 이제 밖으로 나온 것입니다. 가족의 범위 밖으로 말입니다. 친족, 이웃 그리고 모든 세상의 사람들은 우리를 알아도 잘 모릅니다. 모르기 때문에 아주 작은 선행과 의로운 삶에도 쉽게 칭송할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와 다른 종교를 가졌거나, 다른 생각을 갖고 사는 사람들이 우리를 칭송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칭송을 기대하지는 맙시다. 우리는 본래부터 사람의 칭송이 그리워 주를 따라 나선 것은 결코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불신자들에게 예수님 때문에 받는 핍박이 아니라면 문제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저는 여러분들 모두가 예수님의 이름을 전하다 핍박 받는 것을 즐기시기를 소망합니다. 하지만 그게 아니고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세상에서 악을 행하다가 욕을 얻어먹고 핍박을 받는다면 하나님께서 결코 여러분을 기뻐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19절 20절 중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죄가 있어 매를 맞는다? 죄가 있어 매를 맞는다?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겠느냐? 그렇습니다. 잘못해서 얻어터져놓고 ‘나는 인내하리라. 나는 참아 내리라.’고 말한다면 그게 무슨 상 받을 일이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세상에서 불신자보다 못한 삶을 살다가 핍박을 당하고 욕을 얻어먹었다면 그것처럼 부끄러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성도는 마땅히 불신자보다 더 아름다운 생명의 삶이 이어져야 할 줄 믿습니다. 꼭 칭찬받으려고, 인정받으려고 그렇게 하지는 마십시오. 구원 받은 사람은 당연히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건강한 교회가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았다.”는 말씀은 어떻게 해석되어야 합니까? 이 질문에 답변하기 위해 다시 한 번 생각해봅시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본래부터 용기 있는 성도였습니까? 사도들이 본래부터 대단한 능력을 지니고 표적과 기사를 일으키며 다녔던 인물이었습니까? 여러분 잘 아시듯 사도행전 1장부터 8장까지를 장식하는 사도 베드로는 본래부터 그렇게 설교를 잘하고 능력 있는 사도였습니까? 그렇지 않았지요? 베드로는 목소리 크고, 나서기를 좋아했던 사람이라 실수도 많고 동료들 마음에 상처를 많이 주던 사람이었습니다. 더구나 그는 예수님의 십자가형 언도가 내려질 현장에서 버젓이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하며 비굴한 자세를 취했던 사실을 잘 아실 겁니다. 그는 예수님의 눈빛을 보며 통회 자복했지만 예수님이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가서 무덤을 확인했으면서도 믿지 못하고 자신의 사도직을 버리고 옛 직업으로 돌아가 고기를 잡았던 그였습니다. 만약 그를 주님이 만나주시지 않았다면 어찌되었을까요? 예수님께서 그 사명을 다시 부여해주시지 않았다면 그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과연 그가 마가의 다락방에서 120명의 한 일원이 되어 기도했겠습니까? 모든 제자들도 마찬가집니다. 예수님이 붙잡히자 사도 요한 외에는 모두 도망쳤습니다. 어떤 제자는 홑이불로 자기의 벗은 몸을 둘러싸고 예수님을 따르다가 홑이불을 벗어던지고 홀랑 벗은 채로 줄행랑을 놓기도 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런 제자들과 군중들과 사람들을 보며 비웃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도 같은 입장이 되었다면 어떻게 했을까요? 과연 우리도 죽을 각오로 주님을 따를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가 그렇게 존경하며 따르던 예수님이 나약하기 짝이 없게도 병사들에게 잡혀 저주 받은 자의 징표라는 십자가형을 받으러 걸어가고 있을 때 그래도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믿을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 중 어느 누구도 나는 믿을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아주 작은 일이라도 닥치면 쉽게 예배에 빠집니다. 기도회에 빠집니다. 이런 우리가 과연 주님을 죽도록 따르겠습니까? 돈 버는 일을 생각해보세요. 그깟 몇 푼 안 주는 일에도 얼마나 열심히 합니까?
제가 초등학교 시절 용돈을 벌려고 다 말라버린 고춧대를 뽑는 알바를 한 적이 있을 때 정말 목숨 걸고 했습니다. 손바닥에 물집이 잡혀 터지고 팔은 아파 힘들어도 그 길고 긴 한 줄에 10원 준다는 약속에 최선을 다해 일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바로 헌신하고 바로 따라가고 바로 믿으면 영원한 삶을 보장해준다는 약속이 있음에도 우리는 순종하지 못합니다. 그렇게 못하는 이유를 생각해보니 하나님의 약속은 당장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 믿어지지 않아서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히11:1-2).”고 강조했던 것입니다. 왜요? 믿음은 육신의 눈으로 보이는 것을 향한 신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 하나님의 나라를 영안을 열어 보게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은 4차원의 세계인 것입니다. 4차원의 세계란 보여지는 세계에서 오는 게 아니라 보이지 않는 영의 세계 하나님 나라의 주인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2:8).”고 했던 것입니다. 믿음은 인간의 자발적인 소원이 아닙니다. 믿음은 인간의 노력에 의한 생산품도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선물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아무런 노력을 기울이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능력있는 믿음을 얻기 위해 기도하고 말씀 배우고 예배드리는 일을 계속해야 할 줄 믿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제자들이나 초대교회 성도들이 온 백성에게 칭송들을 정도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된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그들의 나약함, 두려움, 무능력함 그리고 비굴한 삶의 태도를 넘어설 수 있게 만든 것은 성령의 임재였습니다. 성령께서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120명의 성도들에게 임재하시고 성령으로 충만케 하심으로 인해 모든 사람들이 땅의 사람이 아닌 하늘에 속한 사람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때부터 이들은 하늘의 비밀을 알았고, 하늘의 비밀을 담대히 전했으며 땅에 속한 자들과 다른 삶을 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비굴하기만 했던 베드로가 명설교가요, 능력자로 변한 것은 성령의 충만함 때문이었습니다. 신약 성경은 위대한 믿음의 인물들이 하나님의 큰일을 감당하기에 앞서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 사실에 대해 상습적으로 소개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먼저 우리의 구세주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태어나시기 전부터 성령으로 이끌림을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마리아의 몸에 예수님을 잉태시키실 때에 성령의 능력으로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잉태소식을 전해주는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눅1:35).” 이 사실에 관하여 요셉에게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 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마1:20,21).”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세례 요한에게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십니다.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이 갈라지고 성령이 비둘기같이 예수님에게 내려오시더니 하늘에서 소리가 났습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마1:11).” 누가는 이 사건 이후에 예수님이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40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셨다(눅4:1).”고 소개했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입으신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시기까지 계속하여 성령의 충만함을 유지하셨습니다. 완전한 하나님이시지만 완전한 인간이셨던 예수님은 성령의 충만함으로 맡겨진 인류 구원의 사역을 완수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령의 충만함으로 귀신을 쫓아내시고, 질병을 치료하시고, 하늘나라 복음을 선포하심으로써 온 백성들에게 칭송을 받으시는 분이 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보다 6개월 먼저 태어나 예수님이 오시는 길을 예비하는 사역을 했던 세례요한입니다. 세례 요한이 어머니 엘리사벳의 몸에 잉태된 지 6개월이 되었을 무렵 마리아 역시 아기 예수를 잉태하였습니다. 마리아는 천사의 전한 말,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 본래 수태하지 못한다 하던 이가 이미 여섯 달이 되었나니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눅1:36,37).”는 말을 듣고 엘리사벳을 만나러 갔습니다. 마리아가 문을 열어젖히고 엘리사벳에게 문안인사를 할 때 엘리사벳의 뱃 속에 있던 세례 요한이 마리아의 몸 속에 잉태하신 아기 예수를 대하자 기쁨으로 뛰놀았습니다(눅1:41, 44). 뿐만 아니라 엘리사벳은 즉시로 성령의 충만함을 입었습니다. 어머니의 성령 충만함은 아들 세례 요한에게 그대로 전달되어 세례 요한은 어머니 뱃속에서 이미 성령 충만함을 입고 출생하는 사람이 됩니다. 나중에는 아버지 사가랴도 하나님의 약속에 순종할 때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예언을 하게 됩니다(눅1:67). 이후 세례 요한이 태어나 능력있는 사역을 시작하지만 어느 곳에서도 성령 충만함을 받았다는 말이 소개되지 않는 이유는 그가 이미 태아였을 때 성령 충만함을 받았음을 확실히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 그도 성령 충만함으로 사역을 감당함으로써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는 사역을 감당하게 되고 위정자들이 두려워 떠는 능력의 사람이 됩니다.
사도행전은 성령행전이라고 합니다. 성령께서 행하신 일들을 기록한 책이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은 이렇게 시작되고 있습니다.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의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그의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1:1,2).”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의 먼저 쓴 글이라면 누가복음을 말합니다. 누가복음은 크게 ‘예수님의 행하심’, ‘예수님의 가르치심’,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심’, ‘예수님의 승천하심’으로 꾸며졌다는 말입니다. 이 중 성령으로 명하심이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연결고리를 이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볼찌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눅24:49).”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이란 요한복음 14장 16,17절과 요한복음 16장 7절로 15절에 약속된 ‘진리의 성령’, ‘보혜사 성령’이십니다. 누가는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누가복음서 제일 마지막에 소개한 후에 제자들이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예루살렘에 들어가 늘 성전에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니라(눅24:52,53).”는 주석을 달아줌으로써 누가복음을 마무리합니다. 그리고 사도행전을 저술할 때 누가복음에서 소개했던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소개합니다. 사도행전 1장 4절, 5절입니다.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그리고 8절로 가서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신 것을 소개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여자들과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님의 아우들과 제자들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썼다고 소개했습니다(눅1:12-14). 누가는 모인 무리의 수가 한 120명 정도 되었다는 꼼꼼한 주석까지 달아주었습니다. 잠시 베드로의 설교가 있은 후 가룟 유다 대신 12사도의 한 사람으로 맛디아를 제비뽑아 선출하였습니다. 그리고 오순절 날이 이르렀을 때 그들은 기도하기 위해 다시 마가의 다락방에 모였습니다. 바로 이 순간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을 말하기를 시작하니라(눅2:1-4).”고 했습니다. 이 사건은 사도행전 전에 기록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이 한 권의 책이요, 1,2부의 연결된 책임을 잘 증거 해주는 사건입니다. 또한 사도행전 시작과 전체의 흐름을 규정짓는 사건이기도 합니다. 사도행전은 성령행전이요, 성령 충만함을 입은 사도들과 성도들이 예수님을 전하며 교회를 세우는 아름다운 역사를 기록한 책입니다.
성령의 충만함이 임하자 사람들은 달라졌습니다. 두려움 없이 예수님을 전했으며, 하나님 섬기고 예배하고 기도하는 일을 모든 일의 우선으로 믿었으며 실제로 그렇게 실천했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은 건강한 교회를 지향하게 하였고 건강한 교회는 건강한 삶으로 그 건강함을 드러내었습니다. 우리가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건강한 교회는 첫째, 배우려고 합니다. 둘째, 서로 사귐이 있습니다. 셋째, 사랑의 식사가 있습니다. 넷째, 기도하기를 전혀 힘씁니다. 다섯째, 세상 사람이 두려워합니다. 여섯째,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납니다. 일곱째, 모이기를 힘씁니다. 여덟째, 나눔의 원리를 실천합니다. 아홉째, 가정 천국을 만듭니다. 열째가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습니다. 그리하여 구원 받는 사람이 날마다 늘어나게 되는 겁니다.
우리 교회는 건강한 교회입니까? 성도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습니까? 날마다 구원 받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습니까? 건강하지 못하면 자연적인 교회 성장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건강해야 사람이 붙습니다. 영혼도 건강, 정신도 건강, 육체도 건강해야 무엇이든지 목표를 잡고 추진할 수 있습니다. 어릴 때 어른들이 그랬습니다. ‘몸만 건강하면 언제든지 성공할 수 있다.’ 그러나 몸만 건강하다고 해서 모두 성공할 수 있습니까? 영혼이 건강해야 진짜 건강한 것이요, 진짜 성공한 사람입니다.
교회는 영혼의 건강을 위해서 모여야 합니다. 육체의 건강, 정신의 건강은 영혼이 건강해지면 자연스럽게 따라올 줄 믿습니다. 중요한 것은 영혼의 건강입니다. 영혼의 건강을 위해서는 성령 충만함을 받는 게 필수입니다. 성령 충만함을 받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성령 충만함을 입을 때 진정한 성도로써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건강한 교회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떤 방법으로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건강한 교회가 되어 자연스럽게 열 가지의 삶이 겉으로 드러납니다. 열 가지 삶이 밖으로 드러나면 구원 받는 사람이 날마다 증가하게 될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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