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 설교 모음

[스크랩] 하나님의 임재 안에 살기

하나님아들 2013. 10. 26. 10:16

하나님의 임재 안에 살기

15:1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15:2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15:3 너희는 내가 일러 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15: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15:6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15: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15:8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15: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15: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15: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나님의 임재 안에 사는 삶이

하나님과 지속적인 교통을 갖도록 통로를 열어준다.

하나님과 일시적 혹은 간헐적인 교통이 아니라,

지속적이고도 우정 깊은 교통을 갖는 게 우선적으로 중요하다.

많은 사람들이 이 부분에서 실패하므로

하나님과 깊은 관계 속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따라서 전천후 혹은 상록수 신앙으로 일관 된 사람을

하나님은 인정하시고 사용하신다.

그 좋은 예가 다윗의 삶에서 엿볼 수 있다.

그는 넘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다시 일어섰고 하나님을 향했다.

사람이 어쩌다 넘어지는 게 대수가 아니라, 그 이후가 더 중요하다.

의인은 일곱 번 넘어져도 여덟 번 일어나는 사람이다.

우리가 예수 닮기를,

인생의 목표로 정하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4 가지 삶의 틀을 만들어 유지해야 함이 중요하다.

1. 하나님과의 관계가 날마다 새롭고 깊어져야 한다.

이 부분은 수도원의 수사들이 촛 점을 맞추고 있는, 영성 훈련 분야다.

2. 내 육신의 소욕을 죽이는 훈련을 해야 한다.

이 분야는 청교도 신학자들이 연구하고 주장했던 영역이다.

3. 말씀에 경건하게 통달해야 한다.

말씀을 통해 제반 영적인 이치를 깨달아야 한다.

성경을 주야로 많이 읽어서 말씀이 내 삶 속에

레마로 임하는 차원 속으로 들어가도록 해야 한다.

말씀이 의식의 깊은 곳까지 풍성하게 도달하도록 해야 한다.

4.예수님이 지니셨던 성령의 능력이 나의 삶의 현장 속에서 재현되도록 해야 한다.

성경 안에 기록된 사건들이 오늘을 살아가는

나의 삶 속에서 생생하게 재현되도록 해야 한다.

관념이나 상상 속에 머물러 있는 하나님이 아니라,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이 네 가지 틀 혹은 기둥에 대해서 앞으로 다루고자 한다.

내가 예수님을 얼마나 닮았느냐 하는 것은

내 자신이 얼마나 8복과 가까운 삶을 사느냐로 측정할 수 있다.

예수를 닮기 위해서는 가난한 심령과

애통하는(상한) 심령을 가지는 게 기본적인 자세다.

그리고 영적인 체질을 개선하는 일이 기본적인 임무다.

우리의 모든 의식구조가 영적인 체질로 바꿔지도록
부단한 경건 훈련을 해야 한다.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인재 가운데 살면서

하나님과 친밀하고도 지속적인 교통을 할 수 있는가?



(1) 하나님을 체험적으로 알아야 한다.




성경 혹은 역사를 통해서만 아는 하나님이 아니라,

직접 하나님을 음성을 듣거나, 갖가지 사건을 통해서 만나는 경험이 요구된다.




성경에서 예수를 만났던 사람들은 변화를 경험했다.

삭개오나 사마리아 여인 그리고 12제자가 좋은 예들이다.




'하나님은 살아 계신다'라고 말할 때,

누가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고 고백하느냐에 따라, 그 의미와 무게가 달라진다.




'전에는 내가 하나님에 대해서 귀로만 들었지만

이제는 친히 하나님의 얼굴을 뵈옵는다. '라고 욥은 고백했다.




히11:6-7에서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믿음에도 수준과 편차가 있다.




믿음 중에는 세상이 감당하지 못할 큰 믿음도 있지만,

귀신도 비웃는 믿음을 가진 사람도 있다.




얼마 전에 들은 애기다.

어느 중형 교회 목사님 교회에 귀신들린 청년이 나타났다.

그 청년은 목사님을 보자마자, '이 새끼야! 너도 목사냐?'라고

대들면서 멱살을 잡으려고 하는 것을 피해 도망 나왔다.

그리고 며칠 뒤 어느 목사님께로 귀신들린 청년을 데리고 갔었는데,

그 목사님을 보자마자 귀신들린 청년이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는 안수 기도를 통해 귀신은 항복했다.

만일 '능력 행함의 은사'가 없는 사람 앞에 귀신들린

사람이 나타난다면 그는 어떻게 반응할 것 같은가?

'당신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이니

정신 병원에 입원하는 게 좋을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귀신들린 사람에게... 이게 성경적인 해답인가?


시14:1과 시53:1에

어리석은 자는 하나님이 없다고 말한다.

가장 큰 죄는 하나님에 대한 불신앙이다.

(시14:1)“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시53:1)“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며 가증한 악을 행함이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많은 사람들이 마치 하나님이 죽은 것처럼, 혹은 안 계신 것처럼 행동한다.

이것은 신앙 속에 들어있는 불신앙적인 믿음을 드러낸 것이다.


하나님의 살아 계심이 온 몸으로 의식화 돼 있어야 된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체험적으로 알고 있어야 한다.


내 자신에게 질문해 보자.

성경의 어느 부분이 내 삶 속에서, 그대로 재현되거나 적용된 적이 있었는가?

이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에게 매우 의미 있는 질문이 될 수 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 증거는 창세기부터 계시록 안에 수두룩하다.

그렇다면 내 삶 속에서 하나님을 체험한 적이 있었는가?


진정한 교육은 말이 아니라, 삶으로 혹은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듯,

진정한 신앙 고백은, 하나님을 체득하므로 나오는 것이어야

힘이 있고 실제적이 될 수 있다.


* 말씀을 통한 믿음의 증거와 삶을 통한 믿음의 증거를 가져야 한다.

관념적이거나 개념적인 하나님이 아니라

실존적인 하나님에 대한 실증적인 체험을 갖고 살아야 한다.

신앙에는 이론적인(지적인) 신앙과 실천적인(경험적인) 신앙이 있다.


무신론자 중에도 이론적인 무신론자와 실천적인 무실론 자가 있다.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받은 자는 적다'는 주님의 말씀을 상기해보자.


이 세상, 온 우주 안에는 형언할 수 없는

하나님의 신비 혹은 경이로움이 넘치고 있다.

신비 아닌 게 없을 정도다.

살아있는 것은 물론 생명이 없는 것들도 신비 그 자체다.


산책로를 거닐면서 통감하는 것은

하나님은 정말 놀랍도록 훌륭한 '정원사'라는 점이다.

깊이 살펴보면 성경 역시 신비로 가득 채워 져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지은 것 중에는 신비 아닌 게 없기 때문이다.


눈을 열어 가득 찬 하나님의 신비를 보라.

어떻게 무지개가 일곱 가지 색으로 만들어지는가?


어떻게 밀물과 썰물이 교차하는가?

파란 선인장에 어떻게 보라색 꽃이 피는 걸까?


우리의 생년월일 자체가 신비이다.

인간의 생사화복 역시 놀라운 신비 자체다.


살고 싶어서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되며

죽고 싶어서 죽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우리의 삶과 죽음 자체가 하나의 놀라운 신비가 아니겠는가!

각자 인생의 궤적이 다른 것도 경이로울 뿐이다.


하나님의 경이로움은 소우주라 할 수 있는,  우리의 몸 안에서도 볼 수 있다.


두뇌와 중추신경들 무수한 세포들, 그리고 내장들의 조화적인 기능들이며

감각 기관들의 세밀하고도 오차 없는 활동 시스템은,

거대한 슈퍼컴퓨터를 능가한다.


첫 번째 기둥: 하나님과의 교통.


하나님과의 교통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임재 안에 살도록 한다.

오늘날 한국 교회 안을 들여다보면

기독교에 대한 치명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다.


한국 기독교 수준이 하향 평균화가 돼 버렸다는 점이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주된 원인은 기독교의 원형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무엇보다 기독교의 원형을 회복하는 데 있다.

한국 기독교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크게 네 가지 측면에서 탈바꿈해야 한다.


먼저 신학교 교육이 바꿔져야 한다.

신학교가 회칠한 무덤으로 변질되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회교(무슬림)와 불교는 수직 상승하고 있는데

반해 기독교는 계속 하향 곡선을 그리고 있다.

생명의 종교라는 기독교가 왜 이렇게 고개를 숙이고 있는가?


우리나라에 현각 스님으로 유명해진 미국인 스님이 있다.

그는 예일대 출신이며 카톨릭 신자였다.

그런데 그가 어느 날 불교에서 새로운 깨달음을 얻고 귀이 했다.


소위 정통 보수라고 자처하는 많은 신학교에서

그는 오랫동안 천주교 생활을 했지만

천주교를 통해서 참 진리를 발견하지 못했던 것이다.

참 진리는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다.


이처럼 아무리 신앙생활을 오래 했어도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지 못한 사람의 결과가 이렇게 드러난다.


150개가 넘는 한국의 신학교를 혹평하자면

하나님을 죽이는 방법을 가르치고 있는 실정이다.


한국 기독교의 판도 변화는 먼저 신학교에서 일어나야 한다.

신학생들이 성경은 읽지 않으면서 다른 서적에 파묻혀 있다.


이 점을 깊이 생각해봐야 한다.

이들은 신학에 대해서는 잘 알지만, 성경에 대해서는 무지하다.


성경을 배우는 방식이 달라져야 한다.

설교자는 먼저 내 속에서 말씀을 깨닫고 체험된

메시지를 가르치거나 전달하도록 해야 한다.

현대 교인들은 고리타분한 설교에 식상해 있다.

기독교 TV를 보라.

한국 목회자들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있다.


교파마다 성경 해석이 다를 때 나는 어떤 해석을 내 놓으며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하는가?


이에 대한 처방책은 내가 개인적으로 만난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르는 것이다.


신학을 하는 방식을 바꾸어야 한다.

신학생의 생각, 인격, 품성, 가치관에 변화를 주는

교육 시트템이 아쉬운 실정이다.


신학교가 더 이상

설교 잘 하는 직업인을 양성하는 곳이 되면 곤란하다.


신학생 시절에 노방 전도를 하거나 설교하고 가르치는

실제적인 훈련을 통해 목회자적인 품성을 기르고

자질을 다듬고 검증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선교 패턴이 바뀌어야 한다.


요즈음 회자되는 말은 교회 개척하기 위해서는

목사가 적어도 1-2억은 갖고 있어야 한다고 한다.

하지만....

돈으로 선교(혹은 교회 개척을)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이 허락하시고 인정하시는 선교(목회)라면

하나님이 제반 필요한 여건과 사람을 엮어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도, 어느 집에 유하거든 떠날 때까지 머물라 하셨고,

두 벌 옷도 준비하지 말라고 했으며,

일하는 소의 입에 망을 쒸우지 말라고 하셨다.


하나님이 주도적으로 만사를 인도하시도록 해야 한다.

인간의 욕망이 앞서기 때문에 좌절과 실패를 하게 된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해야 합니다.

목사님은 단지 하나님의 일에 수종 드는

종이라는 마음 자세를 견지해야 합니다.'



출처 : 알프스의 눈동자. 데보라의 세계여행
글쓴이 : 알프스의 눈동자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