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 설교 모음

[스크랩] 죄가 십자가로 제거되다.

하나님아들 2013. 3. 19. 23:43

예수가좋다오

죄가 십자가 보혈로 제거되다.

C. H. 매킨토쉬

 

로마서 4장7-8절 “이르되, 자기 불법들을 용서받고 자기 죄들이 가려진 자들은 복이 있으며  
8 주께서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이 말은 실로 큰복의 말입니다. 죄사함이 없다면 복은 있을 수 없습니다. 나의 모든 죄가 용서함을 받았다는 확실한 믿음을 갖는 것은 참 행복의 유일한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죄사함 없이 행복하다는 것은 마치 어느 때 영원한 구덩이에 빠질지 모르는 위험에 처해 있으면서도 행복하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사람이 자신의 모든 죄가 십자가의 보혈로 제거되었다는 하나님의 확증을 소유하기 전에는 확고한 행복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한 것입니다.
이 죄사함에 대한 불확실은 항상 죄의 무거운 짐을 느끼는 그런 사람들에게는 틀림없이 근본적으로 정신적 고통을 주게 되는 것입니다. 나의 모든 죄를 주님께서 다 지고 가셨나 아니면 아직도 마음(양심)에 남아 있느냐를 구별하지 못하는 모호한 의혹 상태에 있다면 이것은 너무나 비참한 것입니다.

이 죄사함에 관해서 설명하기 전에 먼저 독자들에게 아주 정확하고 확실한 개인적 질문을 드려야 하겠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모든 죄가 용서받았다는 확실하고도 안정된 확증을 소유할 수 있다고 믿으십니까?"

내가 이 질문을 초두부터 하는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지식적으로는 알고 설교도 하면서 자기 죄가 용서받았다는 것은 확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의 죄가 용서받았다고 믿는 것은 주제넘은 것으로 고집할 뿐 아니라 더 나아가서는 이 용서받았다는 귀중한 사실에 대해서 항상 의심하는 것이 오히려 겸손의 증거가 아니겠느냐고 생각합니다. 바꿔 말하면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을 믿는다는 추상적인 것이요,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다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겸손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이런 모습은 다음의 성경 구절 앞에서 문외한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 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눅 24:46-4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으니"(엡 1:7)(골 1:14)

여기서 우리는 "용서"와 "죄사함"과 "죄"라는 말이 주의 이름으로 설교된 것을 봅니다.(이 단어들은 위의 3개의 성경 구절에 똑같이 들어 있다.) 그리고 위의 말씀을 듣고 믿은 자들은 다 죄사함을 받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구절들은 "모든 족속"의 범주에 속한 에베소, 골로새 사람들에게 주어진 것이요, 그 내용은 예수의 이름으로 얻는 죄사함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이 복음을 믿고 "죄사함"을 소유한 자들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주제넘은 것이고, 추상적인 것이었던가? 아니면 "죄사함"을 믿지 못하고 의심하는 것이 경건하고 겸손한 것이었던가?

사실 그들은 사악한 죄인들이었습니다. 즉 "허물과 죄로 죽은 자들"이었습니다. "진노의 자녀"이었습니다. "외인이요 손"이었습니다. "악을 도모하는 원수"들이었습니다. 그들 중 어떤 이들은 "다이아나 신"에게 의심 없이 무릎을 꿇고 절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많은 우상과 악한 행습에서 살았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죄사함"의 말씀이 예수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주어졌습니다.
이 말씀들은 진실이었습니까? 아니면 거짓이었습니까?
이 말씀들은 그들을 위한 것이었습니까? 아니었습니까?
그것은 모두 신화 속의 꿈같은 그림자였습니까?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단 말입니까?
그 말씀에는 죄사함에 대한 확실성도, 정확성도, 확고 부동한 것도 없단 말입니까?

이 질문이야말로 아무도 자신의 죄가 용서받았다는 확신을 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자들로부터 해명을 요구하는 질문들인 것입니다. 만일 참으로 죄사함에 대해서 깨우친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사도 시대에는 어떻게 그 사실을 깨우칠 수 있었습니까? 만일 1세기에 깨우칠 수 있었다면 지금 19세기에는 왜 그 사실을 깨우칠 수 없단 말입니까?(C. H. 매킨토쉬는 1820-1896년대의 사람이다)

"4 이제 일하는 자는 품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5 일을 하지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느니라.  6 이것은 또한 다윗이 행위가 없어도 하나님께서 의를 인정하시는 사람의 복됨에 관해 묘사하여  7 이르되, 자기 불법들을 용서받고 자기 죄들이 가려진 자들은 복이 있으며 8 주께서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롬 4:4-8)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마비 병 환자에게 이르시되, 아들아, 기운을 내고 네 죄들을 용서받을지어다, 하시니라"(마 9:2)

어느 때나 죄사함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확고히 알려져 왔습니다. 위에 인용한 성경 구절의 하나만으로도 죄사함 받았음을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거짓 가르침을 누르기에 충분한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 신기하고도 귀한 축복을 깨달은 사람들을 성경에서 발견한다면 나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이제 우리가 성경을 열고 각종 악습에서 죄책감을 느낀 사람들이 죄사함을 받은 것을 발견한다면 아무리 사악한 악인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확실성으로 자신의 죄가 용서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안다는 것은 가능한 것입니다. 성경에는 아브라함, 다윗, 히스기야, 중풍 병자 등 그 외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죄사함을 믿었다고 합니다. 이것을 주제넘고, 추상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반대로 그들의 마음 속에서 죄사함에 대해서 의심했다면 그것을 겸손하고 경건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아마도 어떤 이들은 그들을 특별한 경우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다루고 있는 문제에 관계되는 한 그들이 특별한 경우였던, 아니였던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확실한 것은 성경 속의 그들도 자신의 죄사함에 대해서 확실할 수 없다는 주장에는 틀림없이 반박할 것이라는 점입니다.

성경은 감정과, 연약성과, 과오와, 죄지을 가능성에 쉽게 영향을 받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들이 글 쓰는 입장에 있든, 독자의 입장에 있든 온전한 죄사함의 복음을 듣고 기뻐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 귀중한 문제에 대해서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은 있을 수 없다고 고수하는 자들은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 할 만한 성경적 근거도 없이 고집합니다.
성경에 있는 이 모든 예들이 우리에게 선례로 제시 될 수 없는 어떤 특별한 경우라고만 한다면 이것은 진실일 수 있겠습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가. 아브라함의 경우를 주목해 보겠습니다. 성경은 그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 4:23-25)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 고 했습니다.(창 15:6)
성령님도 역시 우리가 믿으면 의롭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 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행 13:38-39)

"저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거하되 저를 믿는 사람들이 그 이름을 힘입어 죄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행 10:43)

그렇다면 문제는 이것인데 사도 베드로와 사도 바울이 설교를 듣는 자들에게 죄사함에 대해서 거리낌 없이 전했을 때 그 내용의 진의가 무엇이었느냐입니다. 그들은 죄사함에 대해서 확신 할 수 없다는 사상을 열심히 전달하려고 애썼을까요?


안디옥 회당에서 바울이 청중들에게 "우리는 여러분에게 기쁜 소식(복음)을 전합니다" 라고 했을 때 아무도 자신의 죄사함에 대해서 확신 할 수 없다는 사상을 전한 것입니까? 만일 듣는 사람들의 마음에 의심과 염려가 남게 된다면 어떻게 그것을 "기쁜 소식"이라고 부를 수 있단 말입니까? 만일 아무도 죄사함에 대한 확신을 즐길 수 없다는 것이 진리라면 사도들의 전체 설교는 뒤집혀야만 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그의 청중들에게 이렇게 말해야만 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알 것은 아무도 자신의 생애 동안에는 자신의 죄가 용서받았는지, 못받았는지를 알 사람은 없는 이것이라" 사도들의 전체 설교와 가르침에 이런 것들이 있었습니까? 사도들은 십자가에서 죽고, 살아난 구세주를 믿는 믿음의 적절한 결과로 얻는 죄사함을 가장 확실하고 충실한 방법으로 어디서나 제시하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지금 교사들이 너무나 강하게 주장하는 가르침은 사도들의 그것과 너무나 거리가 먼 것입니다. 즉 우리 모든 죄의 온전한 용서를 믿는다는 것은 위험한 추측이라는 견해라든지, 영원한 의혹 속에서 사는 것이 절대자 앞에서 겸손한 태도라는 주장이 곧 그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원하고 평안한 안식을 믿고 즐길 수 없단 말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믿을 수 없습니까? 또는 우리의 영혼을 그리스도의 희생에 맡길 수 없는 것입니까? 소망 없는 혼돈 속에 영혼을 버려두는 것이 복음의 유일한 효과일 수가 있을까요?

하나님은 죄를 제거하셨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지만 나는 믿지 못합니다. 성령님은 세상에 오셔서 말씀을 증거하시지만 나는 그 증거를 믿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는 것과 하나님의 구속사역을 멸시하는 것과 성령님의 기록을 믿지 못하는 것이 경건과 겸손이라면 이것은 너무도 슬픈 일입니다.


이런 것이 복음이라면 믿음으로 화평과 기쁨을 누린다는 것은 그때부터 안녕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이라면 "주의 백성에게 그 죄사함으로 말미암은 구원을 알게하리니,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을 인함이라.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치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눅 1:77-79) 라는 말씀은 그때부터 헛된 것입니다.

만일 이 "구원의 소식"을 아무도 알 수 없다면 무엇 때문에 복음이 주어졌다는 말입니까?
지금 우리 앞에 있는 문제는 인간이 자신과 타인을 속여먹을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생각은 즉시 버리시기를 바랍니다. 슬프게도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속이고 타인을 속여 왔습니다. 그렇다고해서 진실한 하나님의 말씀과 죄를 제거하신 그리스도의 사역을 확고히 믿을 수 없다고 핑계될 수 있을까요?(성경을 사람의 글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종종 그렇게 생각한다-역자 주)

인간은 스스로 속여왔다. 그래서 나는 그리스도를 신뢰하기가 두렵다. 인간은 타인을 속여왔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도 속일 것이 두렵다. 이것은 흔히 일반적으로 할 수 있는 말입니다. 때때로 율법과 육적 경건주의가 사람들에게 입힌 외식적 옷을 벗겨서 그들의 상태를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교리를 알고, 교단이 인정하는 건전하고 계몽된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옹호자로 자처하며 나설 때 그들의 주장을 흠없고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시험해 보는 것도 우리의 임무입니다.

 

만일 그들이 주장하기를 인간은 자신의 구원을 확신할 수 없고 다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추상적인 것이고, 인간이 생활하면서 받아들일 수 있는 최상의 것은 혹 죽음 이후에 하나님의 은혜로 하늘나라에 갈지도 모른다는 연약한 소망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단호히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되는 그들의 가르침을 배척해야만 합니다. 거짓 신학은 구원을 확신할 수 없다고 말하나, 하나님의 말씀은 확신 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어느 쪽을 믿어야 할까요?
전자는 어두운 의혹과 두려움을 주지만 후자는 하나님의 확증을 심어 줍니다. 전자는 우리를 우리 자신의 공로를 의지하게 하지만, 후자는 완성된 그리스도의 사역을 의지하게 합니다. 어느 쪽에 가담할 것입니까? 성경 전체를 통하여 볼 때 그 안에는 아무도 영원한 구원을 확신 할 수 없다는 사상들이 기록되어 있을까요? 나는 단호히 성경에는 그런 사상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오히려 성경 어느 부분에서나 분명한 방법으로 모든 믿는 자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용서와 영접에 대한 가장 밝은 확신을 즐길 권리가 있다고 제시하고 있습니다.

묻겠습니다. 성경에 있는 가장 완전한 확증을 즐기는 것이 하나님의 신실한 말씀과 그리스도의 완성하신 사역에 대한 우리의 의무가 아닐까요? 그렇습니다. 그렇게 확신 할 수 있는 것은 믿음으로만 되는 것입니다. 이 믿음은 성령님에 의해 우리 마음속에서 역사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사실은 우리의 현재 다루고 있는 문제에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나는 나의 독자들이 지금 이 시간 그리스도께서 해주시는 한 안전하다는 사실을 소유할 수 있다는 충분한 확증을 갖고, 이 연구를 마치기 바랍니다. 어떠한 죄인이라도 죄사함에 대한 확증을 즐길 수 있다면, 왜 나의 독자들이라고 해서 그와 똑같은 확증을 즐길 수 없단 말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사실입니까?
그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내가 죄사함에 관한 복음을 단순히 믿기만 하면 그때 나는 용서받은 것이요, 의롭게 된 것이요, 주님께 영접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 저주받은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 나의 모든 죄를 그가 갖고 간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그 모든 죄를 그분께 담당시켰습니다. 그분은 그 모든 죄를 지고, 던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이제 한 점의 죄도 없이 하늘로 오르신 것입니다. 이것으로 충분합니다.

 

나의 모든 죄 때문에 형벌을 받으신 그분이 지금 하나님의 우편 보좌에 계신다면 나를 대적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나를 공격하던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은 죄를 짊어진 그분 그리스도에게 떨어졌습니다. 죄를 미워하시는 하나님의 진노를 그분이 받았기에 나는 부활과 영광을 받으신 구세주 안에서 자유를 누리고 영원한 용서를 받고 영접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쁜 소식"입니다.
나의 독자들이여, 이것을 믿습니까? 죽었다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믿습니까?
타락된 죄인의 모습 그대로 주님께 나아와 진실된 마음으로 온전히 주님을 신뢰하였습니까? "그가 우리 죄를 위하여 성경대로 죽으셨다가 장사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3일만에 다시 살아나신 것"을 믿습니까? 믿는다면 당신은 구원받은 것입니다. 의롭게 된 것입니다. 영접된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하여진 것입니다. 사실 당신은 불쌍하고 연약한 피조물이요, 매 순간마다 거역하는 악의 성품을 가진 자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당신의 생명이요, 당신의 지혜요, 당신의 의요, 당신의 거룩이요, 당신의 구속이요, 당신의 모든 것입니다.

그는 당신을 위해서 하늘에 항상 살아 계십니다. 그분은 당신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서 죽었고, 계속 깨끗이 보존하기 위해서 살으셨습니다. 당신은 그분의 죽음이 하실 수 있는 한 깨끗해 졌고, 그분의 생명이 당신을 보존하는 한 깨끗하게 보존되어집니다. 그분은 스스로 당신을 위해서 책임을 지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변화시킨 상태를 보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당신을 보십니다. 그리고 당신이 그분과 하나가 된 것을 보십니다.

이제는 더 이상 어두운 율법과 외식주의와 거짓 신학의 복도를 걷지 말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그것들은 여러 시대를 거쳐오는 동안 죄를 짊어지고 잘못 인도된 불쌍한 심령들의 한숨과 통분과 함께 뒤범벅이 되어 들려 온 소리들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충만한 기쁨으로, 부활하시고 영광 받은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선 것을 안다면, 지상에서의 당신의 전 생애를 그리스도 안에서 기뻐하고, 하늘에 예비 된 영화로운 집에서 영원히 살 것을 소망하며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죄사함이란 (2)

하나님의 권위로 당신의 모든 죄가 용서받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기를 원하면서 성령의 가르침에 따라 말씀 안에서 죄사함의 과제를 계속 풀어 나가도록 합시다. 다음 3가지 항목으로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죄사함의 기초.
둘째, 하나님의 죄사함의 양(크기)
셋째, 하나님의 죄사함의 방법(형태)

위의 열거한 세 개의 항목은 우리가 이 과목을 전체적으로 이해하는데 분명하고도, 충분하고, 명확한 도움을 줍니다. 우리가 먼저 죄사함의 기초를 좀더 분명하게 이해하게 되면, 더욱 죄사함의 양(크기)에 감사하게 될 것이요, 또한 죄사함의 방법을 더 알기를 원하게 됩니다. 성령님께서 우리가 하나님의 죄사함의 기초를 상고하는 동안 계속 우리의 인도자가 되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1. 하나님의 죄사함의 기초.

죄 때문에 염려 속에 있는 독자들이 이 귀한 진리를 이해하여야만 한다는 것은 최종적으로 취할 중요한 문제입니다. 죄사함의 기초가 확실히 깨달아지기 전에는 하나님 앞에서 유죄로 드러난 심령(양심)이 참 안식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에 관해서 인간은 모호한 생각을 가질 수 있습니다. 즉 죄인을 영접하려는 하나님의 준비, 죄 용서를 위한 하나님의 준비, 심판의 자리에 보내지 않으려는 하나님의 뜻, 그리고 속히 죄인을 은혜의 장소로 보내려는 하나님의 안타까움 등, 이 모든 것에 대해서 인간은 모호한 마음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유죄로 판명난 자가 하나님이 얼마나 공의로운 분이시면서도 구세주로 계시고, 또 죄에 대하여는 하나님이 얼마나 깨끗한 분이시면서 하나님의 속성이 얼마나 이 모든 것을 조화시켜 왔는가를 알기 전에는 진실로 깨우침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화평에 대해서 문외한이 될 것임이 틀림없다.


유죄를 선포하실 수 있는 권한을 가진 하나님의 진리의 빛이 우리 양심에 부어지면 죄는 절대로 하나님의 존전에 그냥 나아갈 수 없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즉 죄는 어느 곳에서 발견되든지 죄를 미워하시는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대에서만 하나님과 대면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다루어 나가는 하나님의 방법이 이해되고 믿어지기 전에는 심한 염려만이 남게 되는 것입니다. 죄는 실제적인 것입니다. 심판도 실제적으로 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알아져야 하고 정식으로 상고되어야 합니다.

공의는 만족되어야 합니다. 양심은 깨끗함을 입어야 합니다. 사탄은 잠잠케 되어야 합니다. 이 모든 것들이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가? 그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해결되어지는 것입니다. 이제 여기서 하나님의 죄사함의 기초를 알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귀한 구속 사역은 공의의 하나님과 칭의(稱義)를 받은 죄인의 달콤한 밀월을 즐길 수 있는 기초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그 구속 사역 속에서 저주받은 죄를 보게 되고, 공의가 만족해하는 것을 보게 되고, 율법의 중요성을 보게 되고, 죄인이 구원받는 것을 보게 되고, 원수 마귀가 당황해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창조 시에는 이런 것을 결코 보여주시지 않았습니다. 그 때는 피조물들이 표면에 나타난 능력과 지혜와 선양(goodness)을 즐겼으나, 첫 창조는 공의를 통과한 은혜 같은 것을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공의와 화평" 또는 "자비와 진리"의 아름다운 조화 같은 것은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이 모든 것은 갈보리에서 보여지도록 예비해 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중요한 문제점입니다.

하나님은 얼마나 공의롭고 의로운 분이신가요?
하나님은 영광스런 해답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그 해답입니다. 공의의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죄를 다루었습니다. 이것은 공의의 하나님이 새롭고 영원한 부활의 기초 위에서 죄인을 다루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일점 일획의 죄라도 그냥 지나쳐 버릴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를 제거하실 수는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저주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죄 위에 의로운 진노를 퍼부을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믿는 죄인(구원받은 성도)위에 영원한 하나님의 은혜를 부어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에서 이 모든 기록은 장엄하도다. 죄는 심판 받았고, 죄인은 구원을 얻었도다"

귀한 말씀입니다. 두려워하는 모든 죄인들은 믿음의 눈으로 그 사실을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마음에 안정된 평화를 주는 진리의 말씀임에 틀림없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죄에 대해서도 만족하셨습니다. 이것으로 나도(믿는 사람) 만족합니다. 여기서 나의 죄스럽고 고통스런 양심은 달콤한 쉼을 발견합니다. 나는 지금까지 내 앞에 검은 산 그림자같이 증대해 가는 죄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영원한 진노로 나를 위협해 왔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보혈은 하나님의 시야에서 그 모든 죄들을 제거해 버렸습니다. 그 모든 죄는 사라진 것입니다. 영원히 사라졌습니다. 납덩이처럼 하나님의 망각의 수렁 밑바닥에 가라앉아 버렸습니다. 나는 이제 자유자입니다. 십자가에서 나의 모든 죄 때문에 못 박히셨고, 이제는 일점의 죄도 없이 하늘의 보좌에 앉으신 그분의 자유를 나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죄사함의 기초인 것입니다. 얼마나 굳건한 기초입니까? 누가, 무엇이 그것을 간섭할 수 있을까요? 공의는 그 기초를 확보했습니다. 고통의 양심은 그 안에서 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단은 이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공의자로 계시하셨습니다. 그래서 믿음은 그 계시의 빛과 능력 안에서 걷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단순하고 확실하고 만족스러운 것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자신을 공의자로 계시하신다면 나는 그 계시된 말씀 속에서 믿음으로 의로운 자가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영적 영광이 죄인에게 비췰 때, 죄인은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죄를 심판하신 분이 그리스도의 부활로서 죄인을 의롭다 하셨음을 보게 되고, 깨닫고, 믿고, 간직하게 되는 것입니다.

두려움에 가득찬 독자들이여! 간청하노니 죄사함의 참 기초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아십시오. 고통 속에 있는 불쌍한 양심이 영원불변의 죄사함의 기초 위에서 안식을 누리지 못한다면 죄사함의 양(크기)과 죄사함의 방법을 아무리 숙고할지라도 소용없는 것입니다.


물어보겠습니다. 이 순간 완성된 구속 사역의 기초 위에서 안식할 수 있는 은혜로부터 당신을 방해하고 있는 것이 도데체 무엇입니까? 말해 보십시오. 당신은 절대로 굽히지 않는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킨 십자가보다 더 만족시킬 수 있는 어떤 다른 것을 필요로 합니까? 하나님께서 의칭(義稱) 받은 죄인으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완전한 공의의 하나님으로서 자신을 계시한 그 기초가 바로 십자가가 아니었습니까?

이에 대해서 당신은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당신은 만족합니까? 그리스도는 당신에게 충분하신 분이 아닙니까? 당신은 아직도 자신 안에 있는 어떤 다른 것, 즉 당신 자신의 방법이라든가, 당신 자신의 사역이라든가, 당신 자신의 생각이라든가, 당신 자신의 감정 같은 것을 구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헛된 것인 줄 알고 중지하십시오. 당신은 결코 다른 것을 찾지 못할 것입니다. 비록 무언가 찾는다 할지라도 그것은 장애물이 될 것이요, 손해거리요, 방해물일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께도 충분한 자요, 동시에 당신에게도 충분할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때 당신은 진실로 행복할 것입니다.(그렇게 되기 전에는 결코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성령님은 아마도 이 순간 유일한 죄사함의 기초인 온전하고 충만한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당신에게 안식을 줄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됨으로 실질적인 깨달음과 흥미를 갖고 두 번째 항목인 죄사함의 양(크기)에 진입할 수 있습니다.

2. 죄사함의 양(크기)

대단히 많은 사람들이 이것에 대해서 혼동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충분한 구속 사역의 진리를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그들의 모든 죄에 적용되는 실제적인 자유를 붙들지 않습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은 구절을 노래하면서도 그 가사의 능력 있는 내용에 심취하지 못합니다.

"우리들의 모든 죄를 누가 그 큰 은혜로 용서하실까!"

그들은 주께서 단지 죄의 일부분만 짊어진 것으로 느끼는 것 같습니다. 즉 그들이 회심 시의 죄까지만 주께서 짊어지신 것으로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들은 매일 짓는 죄에 대해서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마치 매일 짓는 죄는 과거의 죄를 용서하신 것과는 다른 기초에서 다시 용서되어지는 것처럼 느끼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따금 심히 낙담하고 매우 시달리는 생활을 합니다. 그들이 모든 죄에 해한 온전한 죄사함의 예비를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알기 전에는 다른 길이 있을 수 없습니다. 죄를 범하는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와 그 죄를 자백(시인)해야 한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사도는 성도가 그렇게 자기 죄를 자백함에 대해 무어라고 말했던가?

"하나님은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 1:9)

자! 왜 사도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라고 말하고 있으면서, "은혜롭고 자비로우사"라고 말하지 않는가?
그것은 모든 죄의 문제가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제거되고 평온하게 되었다는 기초에서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현재 의로운 대언자로서 하늘에 계십니다. 하나님은 죄사함에 관한 한 다른 어떤 기초 위에서 미쁘시고 의로우실 수 없습니다. 믿는 자들의 죄는 십자가에서 전부 속죄된 것입니다.

 

만일 하나의 죄라도 남았다면 그들은 영원히 버리운 자로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단 하나의 하찮은 죄라도 하나님의 성역에는 들어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더 첨가해서 말한다면 만일 믿는 자들의 모든 죄가 예수의 죽음으로 속죄되지 않았다면 그때는 자백(시인)으로도 안 되고, 기도로도 안 되고, 금식으로도 안 되고, 그 외에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용서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이야말로 하나님께서 "미쁘시고 의로운" 성품에서 죄를 용서할 수 있는 유일한 기초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께서 오직 "미쁘시고 의로운" 성품으로만 이 기초를 꼭 실천하셔야 할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절대로 그렇게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 기초가 곧 하나님께는 찬양이 되고, 우리들에게는 최고의 안식인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나의 독자들이 다음과 같이 부르짖을 것을 상상해 봅니다.

"무어라고요? 당신은 우리의 미래의 죄까지도 다 속죄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까?"

여기에 대하여 나는 다음과 같이 대답할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죄는 그리스도께서 죄를 지고 저주받은 시기로부터 미래의 죄들이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모든 믿는 자들의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위해 죽을 때로부터 18세기 동안 미래였습니다.(C. H .맥킨토쉬는 19세기 사람임) 만일 이 미래의 죄에 대한 생각이 우리가 범할 수 있는 미래의 죄와 관련지어 볼 때 어려움에 부딪힌다면, 그리고 현재 그 문제가 아직도 미해결로 남아 있다면, 우리가 지금까지 범해 온 과거의 죄에 관해서도 매우 큰 난관에 부딪히게 됩니다.

 

그러나 실상은 미래의 죄에 대한 모든 복잡함이 하나님의 견지에서 보기보다는 습관적으로 우리 인간 자신의 견지에서 십자가를 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미래의 죄에 대한 언급을 결코 하지 않습니다. 과거, 현재, 미래는 오직 인간적인 것이요, 세상적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가 영원한 현재인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죄(과거, 현재, 미래의 죄들)가 십자가의 영원한 공의의 눈길 앞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 모든 죄가 죄를 짊어진 자 곧 그리스도의 머리 위에 놓여졌던 것입니다. 그분은 자신의 죽음으로 죄사함의 영원한 기초를 세웠고, 그러므로 믿는 자마다 각자의 생애의 어느 한 순간, 또는 자신의 역사의 어느 한 경점에서, 또는 자신의 경력의 어느 한 지점에서 거룩한 복음을 그의 믿음의 귀로 듣게 되고 그 순간 죄사함 받고, 구원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영원한 영광으로 들어가는 순간까지 확실함과 확신을 갖고 거리낌 없이, 불안함도 없이, 주저함도 없이 "주께서 나의 모든 죄를 주의 등뒤에 던지셨나이다"(사 38:17)라고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함은 "오직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히 10:17) "여호와께서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6)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의 응답인 것입니다.

십자가의 그 강도를 예로 들어 봅시다. 유죄 선고를 받은 죄인으로서 그는 자기 옆에 매어달린 복된 그리스도를 믿음의 눈으로 보았을 때, 그곳에서 그 강도는 하나님의 낙원에 들어가기에 적합한 사람으로 인정되었습니다. 그는 십자가의 죄인에서 하나님의 존전에 들어 갈 하나님이 주시는 자격을 받았습니다. 그는 하늘 나라에 들어 갈 적격자가 되기 위해서 그 자신 속에 그 자신과 함께 할 어떤 다른 것을 결코 필요로 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낙원에 들어 갈 자격을 받은 후 낙원에 가는 대신 허락 받고 십자가에서 내려왔다고 가정해 봅시다. 즉 못은 뽑혀지고 자유롭게 가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고 상상해 봅시다. 아마도 그는 그의 자연성 속의 원리가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생각 속에서나, 말과 행동에서 죄를 지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는 하나님이 주신 자격과 적합함을 상실할 수 있었을까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그의 자격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요, 영원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그가 지상에 남아서 50년을 더 살았다 할지라도, 그는 어느 날 첫 번째 얻은 동등한 자격으로 하늘 나라에 들어갔을 것입니다.

만일 용서받은 죄인이 죄를 범한다면 하나님과의 교제를 방해받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그 죄에 대한 진정한 자백(시인)이 하나님과의 교제가 회복되기 이전에 있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요일 1:6)

그러나 이것은 분명히 죄사함과는 전혀 다른 각도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는 방해를 받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으로부터의 자격은 절대로 상실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십자가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모든 죄와 허물은 비할 수 없고, 헤아릴 수 없는 귀중한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속죄된 것입니다. 그분의 희생에 의해 믿는 자는 죄와 저주의 장소에서 의로움과 온전한 은혜의 장소로 옮겨졌기 때문입니다. 그는 단 하나의 의로운 행위도 없었던 상태에서, 단 하나의 죄도 없고, 앞으로도 그럴 수 없는 상태로 옮겨진 것입니다. 그는 은혜 안에 서 있고, 은혜 아래서 살고, 바로 그 은혜를 호흡하며, 하나님의 시야 외에는 다른 것이 있을 수 없는 곳에 있는 것입니다.


이제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누가 죄를 범하지 않을 수 있으랴?) 거기에는 반드시 자백(시인)이 따라야 합니다. 그래서 어쨌단 말입니까? 그래도 죄사함과 죄의 씻음은 역시 십자가에서 해답을 주신 하나님의 "미쁘고 의로운" 성품에서 세워진 기초 위에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십자가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미쁘심과 의로우심, 그리스도의 대언자로서의 사역, 우리의 모든 자백, 우리에 대한 모든 용서, 우리의 모든 성결, 모든 교제의 회복,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의 귀중한 보혈에 기초를 두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죄사함의 양(크기)이라는 항목을 다루고 있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하나님과의 교제에 있어서 우리가 알아야만 하는 또 다른 아주 중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먼저 믿는 자가 하나님과의 하나 됨이요, 하나님의 권속으로 양자로 들어가는 것이요, 성령님이 함께 거하심입니다. 이 모든 것들은 죄를 온전히 용서하셨음을 의미하고 있는 말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현재 한정된 주제 안에서 죄사함의 기초와 죄사함의 크기(양)를 생각해 보면서 죄사함의 방법(형태)이라는 몇 마디 말로 결론을 맺을가 합니다.

3. 죄사함의 방법(형태)

우리는 얼마나 많은 행위를 의뢰하고 있는가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참으로 내면적, 실질보다는 외형적 형태에서 좀 더 능력을 취하려 합니다. 다음과 같은 말을 얼마나 자주 듣습니까? "그래요, 나는 그가 나에게 은혜를 베풀었음을 압니다. 그러나 그는 그 은혜에 따른 모든 좋은 것도 갖고 가 버리기 위함이었지요"(이것은 세상 사람들에게 때때로 있는 일이다.) 그러나 주님은 어떤 일을 행함에 있어 자신의 방법대로 행하십니다. 그의 이름을 찬양합시다. 그분은 그 큰 일들을 실천하실 뿐 아니라 그것을 실천하고 있음을 믿을 수 있도록 하십니다. 그분의 실제적 행위가 위대할 뿐 아니라 그분의 실천하시는 방법(형태) 또한 매력적인 것입니다.

 
한 두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누가 복음 7장에서 바리새인 시므온에게 하시는 주님의 감동적인 말을 살펴봅시다.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원문에는 이 말이 있음-역자 주) 탕감하여 주었으니…"(눅 7:42)

위 말씀에서 단순히 빚에 관해서만 생각해 볼 때, 어떤 방법이었든 결과는 동일하게 둘에게 적용되었습니다.(둘 다 탕감되었다는 뜻) 그러나 둘 중에 누가 "기쁘게"라는 말의 영적 능력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포기했을까요? 둘 중 누가 그분의 적나라한 실제 방법을 보고 싶어했을까요? 빚 준자는 그 빚의 양에 대해서 투덜대며 용서해 줄 수 있습니다. 이 투덜댐은 판단하려는 마음이므로 모든 은혜의 고마움을 삭감시킬 수 있습니다.(세상 사람들의 은혜는 때때로 그렇다) 다시 말하면 "기쁘게 하는" 은혜의 방법이 실제에 있어서 은혜의 가치를 보기보다는 더 높이는 것입니다.

잠시 늘 영적 풍성함을 주는 우리에게 친숙한 누가 복음 15장을 살펴봅시다.
여기에는 3가지 비유가 있는데, 매 비유마다 능력 있고, 아름다운 방법을 보여 줍니다. 목자가 자기의 양을 찾았을 때 어떻게 했습니까? 그는 찾느라고 애썼던 모든 괴로움을 불평하였습니까? 아니면 자기 앞에서 양 자신이 스스로 집으로 가도록 다루었습니까? 둘 다 아닙니다. 그렇게 되어서는 은혜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했을까요? 그는 그 양을 자신의 어깨에 메었습니다.


어떻게? 그 무거움과 괴로움을 불평하면서 말입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즐거움"으로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분의 사랑의 방법을 깨닫습니다. 목자는 양을 다시 찾은 기쁨을 보여주었습니다. 양은 안전하게 그의 어깨 위에 올려져 있었습니다. 비록 과거에 벼랑에 있었다 할지라도 말입니다.

자, 누가 그의 "기쁘게"라는 말을 포기할까요? 누가 그분의 매혹적인 모습의 적나라한 행위의 본질을 깨닫기를 원할까요? 또 한 여인과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의 경우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녀는 촛불을 켜고, 집을 쓸고, 찾았습니다.
어떻게? 활기 없이, 싫증난 모습으로, 무관심하게 말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전심전력으로 일하는 사람처럼 "부지런히" 찾았습니다. 이것은 진짜 잃어버린 은전을 찾고자 하는 여인의 분명한 모습입니다. 그녀는 그것을 증명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불쌍하게 타락한 아들의 돌아옴을 맞이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주목해 봅시다.

"일어나서 자기 아버지께로 가니라. 그러나 그가 아직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그의 아버지가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달려가 그의 목을 껴안고 그에게 입을 맞추매"(눅 15:20)

아버지는 잘못을 저지른 아들은 집밖의 어느 누추한 곳으로 쳐 박으려고, 한 종을 보내지 않았고, 또는 부엌 같은 데로 들어가게 하지도 않았고, 아들이 아버지의 방으로 들어오는 것을 금하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아버지 자신이 친히 뛰어 나갔습니다. 말하자면 이것은 아버지로서의 위엄도 제쳐놓고 아버지로서의 애정을 표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단순히 방탕한 아들이 돌아오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자신의 마음이 전심으로 그를 받아들이고 있음을 나타내야 했던 것입니다. 아버지는 실제적 사랑의 마음뿐만 아니라 그것을 행하는 모습으로도 그 사랑을 실천하신 것입니다.

다른 성경 구절에서도 하나님의 죄사함의 방법을 증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위의 성경 말씀만으로도 하나님께서 인간 마음에 베푸시는 능력있는 모습을 은혜로 깨우쳐 주심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글을 마침에 즈음하여 독자들에게 진심으로 호소하노니, 하나님의 죄사함의 기초가 무엇이며, 죄사함의 크기(양)가 얼마나 큰 것이며, 죄사함의 방법(형태)이 얼마나 매력적인가를 알기를 바랍니다.
당신은 그 기초가 하나님 보좌만큼이나 안전하며, 그 크기가 무한하며, 그 방법(형태)이 모든 심령들이 바랄 수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당신은 죄사함의 문제가 풀려서 만족하고 있습니까?
당신은 아직도 죄사함에 관한 하나님의 뜻을 의심하고 있습니까? 그가 이런 방법으로 당신들 앞에 실제적으로 죄를 용서해 놓고 죄사함의 기초와, 죄사함의 크기(양)와, 죄사함의 방법(형태)을 보여 줄 때 당신은 주저할 것입니까?

그분은 당신에게 마음 문을 열고 그의 생각이 얼마나 철저한가를 보여주시고 있습니다. 그분은 두 팔을 벌리고 당신을 영접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당신에게 십자가를 가르키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그분의 손은 죄사함의 기초를 만들었고, 다 이루었음을 확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당신이 그곳에 나아와 안식을 누리기를 간청합니다. 더 나아가 항상 은혜를 더하여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는 당신을 위하여 예비하셨습니다. 지금 큰복의 성령님께서 당신에게 임하시어 이 모든 일들을 확실하게, 충만하게 알게 하시고, 죄사함을 믿게 할 뿐만 아니라 당신의 모든 죄를 "기쁘게" 그리고 "영원히" 용서하셨습니다.-ⓗ


예수가좋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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